일하라 그리고 쉬라! (출 23:10-13)
요즈음은 사람들의 관심이 모두 오래 살고, 건강하게 사는 문제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은 건강이 우상이 된 시대입니다. TV에서 뭐가 몸에 좋다고 한마디를 하면 전국의 식탁이 하루 아침에 모두 달라질 정도입니다. 고기가 좋지 않다고 하면 고기가 팔리지를 않습니다. 현미가 좋다고 하면 다음날은 현미 파동이 일어납니다.
모두 건강에 대해 관심이 많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들이 세상을 살되 건강하게 살고, 행복하고 기쁘게 사는 것, 그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건강하고, 힘있게 세상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건강하고, 힘있게 살아갈 수가 있습니까? 오늘 읽은 본문은 바로 그것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사람이 오래 살고, 건강하게 살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비결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절도 있는 삶"입니다. 하나님은 본문에서 우리들에게 절도 있는 삶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질서 있는 삶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께서도 질서 있게 일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천지 창조 과정을 보면 하나님은 오늘 일은 오늘 하시고, 내일 일은 내일 하셨습니다. 오늘 할 일을 미루고 있다가 내일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늘 일은 오늘 마치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하고 기뻐하셨습니다. 그런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도 이 같은 절도 있는 삶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본문은 광야에 있는 백성들에게 말씀하시는 내용입니다. 이제 이 백성들은 머지않아서 꿈에도 그리던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제 가나안에 들어가게 되면 그곳에서는 애굽에서 살던 식으로 살지 말고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라는 뜻에서 삶의 원칙을 제시하고 계십니다.
첫 번째 원칙은 일하라는 것입니다.
12절을 보면 "너는 육 일 동안에 네 일을 하라"고 했습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일하는 모습입니다. 열심히 땀을 흘리며 일하는 모습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거기에 생동감이 있고, 삶의 맛이 있고, 삶의 이유가 있고, 보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대표적인 선물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이 결혼하는 일이고, 안식하는 일이고, 땀흘려 일하는 일입니다. 우리들이 건강하게 움직여 가면서 일할 수 있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가장 좋은 축복입니다. 그래서 톨스토이는 "할 일이 없어서 놀고 있는 곳"이 지옥이라고 했습니다. 할 일이 없는 사람은 아침이 되어도 일찍 일어날 이유가 없습니다. 병이 나도 빨리 나아야 되겠다는 의지가 없습니다. 사람이 그렇게 살게 되면 일찍 죽습니다. 그래서 그곳이 지옥인 것입니다.
칼 힐티라는 사람은 잠 못 이루는 밤을 위하여라는 책에서 말하기를 "자기가 할 일을 발견한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열심히 일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 축복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는 "일주일 가운데서 6일은 자신의 삶을 위해서 열심히 일하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열심히 일을 하여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것이 첫 번째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제시하시는 삶의 원칙입니다.
두 번째 원칙은 쉬라는 것입니다.
12절을 보면 "제 칠 일에는 쉬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인간 육체는 "6일 계속해서 일하고 하루 쉬는 것이 가장 적당하다"는 말씀입니다. 인간의 육체의 한계는 6일 동안 일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 이상 일하면 무리가 된다는 것입니다. 어쩌다 한 번, 두 번, 쉬지 않고 일을 하는 것은 괜찮겠지만, 그것을 계속 반복하다 보면 그것 때문에 생명을 단축시키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6일 일하고 하루는 쉬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대원칙입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사람이 건강하게 살고 오래 살 수 있는 비결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 원칙을 지키지 않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이 원칙을 무시하고 살아갑니다. 주일도 없습니다. 출근 시간이 따로 없고, 퇴근 시간도 따로 없습니다. 일년 내내 쉬는 날이 하루도 없이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거기다 하루 종일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시고, 긴장하며 살아갑니다. 무슨 재주로 견뎌냅니까?
그래서 요즘 끔직한 소식들을 자주 듣게 됩니다. 엊그제까지만 해도 건강했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는 끔찍한 소식이 들려옵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그렇게 말합니다. "쉬지 않고 일만 하더니만, 내 그럴 줄 알았어." 그 말은 거기에 분명히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는 말입니다.
60년대 중반 어느 가정이 미국으로 이민을 갔습니다. 한국에서 고생을 많이 한 분입니다. 그때는 모험으로 이민을 갈 때입니다. 이 분들이 미국에 가서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일을 하는 만큼 돈을 벌었습니다. 일주일간 일을 하면 주급을 타 옵니다. 그때마다 가족들이 모여 앉아서 돈을 세는 일이 기뻤습니다. 꿈만 같았습니다. 재미있어서 더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하루 종일 일을 하고 집에 돌아올 때는 일거리를 가지고 와서 집에서 또 밤을 새워 일을 했습니다. 토요일이면 주일 날 일할 일거리를 맡아 왔습니다. 이제는 주일도 없고, 밤도 없이 일을 했습니다. 그때마다 돈이 불러났습니다. 그 재미가 이만 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밤을 새우며 일을 하다가 그만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병원으로 실려 갔습니다. 진찰을 해 보니까 간이 굳어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얼마 있다가 그분은 죽었습니다.
이것이 오늘을 살고 있는 대다수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어느 날 들려오는 소식들을 보면 모두 끔찍한 소식들입니다. 왜 이런 일들이 나꾸만 발생되고 있습니까? 그것은 가장 기본이 되고 기초가 되어야 할 원칙을 무시하고 살아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6일은 너를 위하여 일하고 하루는 안식하라." 이것이 대원칙입니다. 또 이것이 질서입니다 하나님의 명령들을 보면 그 명령들 속에는 모든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시고자 하는 정신이 들어 있습니다. 이것을 무시하고 살면 그것이 사람이든지, 물건이든지 기계이든지, 부서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들게게 절도 있는 삶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일하라, 그리고 쉬라" 이것이 삶의 원칙입니다.
세 번째 원칙은 쉬되 함께 쉬라는 것입니다.
12절을 보면 "네 소와 나귀가 쉴 것이며 네 계집종의 자식과 나그네가 숨을 돌리리라"고 했습니다. 나만 쉬는 것이 아니고 모두 함께 쉬라는 말씀입니다. 나도 쉬어야 하지만 소도 쉬고, 나귀도 쉬고, 종도 쉬게 하라고 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은 공평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생명체는 모두 소중한 존재로 보십니다.
하나님은 종이나 노예라고 해서 함부로 다루지 못하도록 계명으로 보호하셨습니다. 동물도, 짐승도, 사람들이 함부로 하지 못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너희는 고기를 먹되 피채 먹지 말라"고 했습니다. 또 "동물을 삶되 젖에 삶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사람들에게 동물을 죽일 수 있는 권하는 주셨지만 그렇다고 해서 잔인하게 죽이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본문에서는 소도, 나귀도, 함께 쉬라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고 땅도 쉬라고 했습니다. 10절을 보면 "너는 육 년 동안은 너희 땅에 파종하여 그 소산을 거두고 제 칠 년에는 갈지 말고 묵여 두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땅도 생명이 있는 것이니 "쉬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생명에 대한 관심입니다. 얼마나 자상하신 관심입니까? 그리고 얼마나 과학적인 계명입니까?
사람도 적당한 쉼과 안식이 있어야 건강하게 살게 되고, 동물도 역시 쉼과 적당한 안식이 있어야 건강하게 살게 되지만, 땅도 쉬어야 건강해져서 열매가 많이 열고, 건강해진다는 말씀입니다. 땅을 쉬게 하지 않으면 지질이 산성화되어 버립니다. 땅을 너무 혹사시키면 면역성이 약해지고 저항력도 약해진다고 합니다. 그러면 병충해에 약하고, 열매가 적어지고, 소산물을 제대로 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땅도 쉬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을 보십시오. 땅을 쉬게 합니까? 쉬게 하기는커녕 특수 작물을 심기 때문에 봄도 없고, 여름도 없고, 이제는 겨울에도 땅이 쉬지를 못하고 혹사를 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곳에서 열매가 제대로 맺겠습니까? 그리고 병충해를 이겨낼 수 있는 힘이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자꾸만 농약을 뿌린 그 열매를 사람들이 먹고 살아가니까 사람들까지 이상해지는 것 아닙니까? 모두 원리를 무시하고 살아서 그렇습니다.
풍수지리학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땅에도 생명이 있다고 합니다. 그것을 그들은 "기"라고 부릅니다. 이 "기"가 인간의 길흉 화복에 영광을 준다는 것입니다. 이 기를 "지기"라고 합니다. 이 지기의 원류가 백두산으로부터 흘러 나온다고 합니다. 백두산에서 시작되어 산 줄기를 타고 불암산 줄기를 내려와도 봉산과 연결이 되고, 이 지기는 다시 북한산 줄기를 지나 북악산에서 멈췄다는 것입니다. 북악산에서 내려다보면 서울 장안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데 그래서 서울이 명당이라는 것입니다.
그 명당 중에서도 흘러오던 이 기가 가장 많이 솟아나는 자리가 경복궁이고, 경복궁 중에서도 명당 자리는 임금님의 용상이 놓여 있던 "근정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곳을 "혈처"라고 부릅니다. 그를 뿜어 내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사람의 몸으로 말하자면 그 자리를 어머니의 유방에 해당하는 곳입니다. 옛날에는 바로 그 자리에 임금님의 용상을 놓았습니다.
그 혈처에 나침반을 놓고 정확하게 정남북향으로 올려다보면 기가 흘러 내려왔던 북악산 정상 지점과 일치되고 있습니다. 백두산에서부터 천리를 흘러왔던 기와 혈처에서 뿜어 내는 기가 마주 보고, 서로 연결이 되어서 서울이 명당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 혈처에서 정남북향으로 올려다보아도 북악산의 정상이 보이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일본 사람들이 이 기를 끊어 버린다고 해서 사람의 몸으로 말하자면 목에 해당하는 지점에 거기다가 사람의 몸으로 말하자면 입에 해당하는 지점에 건물을 지어 놓았습니다. 그것이 지금의 중앙청(박물관)건물이었습니다. 거기다가 사람의 몸으로 말하자면 입에 해당하는 지점에 또 하나의 건물을 지어 놓았습니다. 그것이 얼마 전에 헐어버린 구청화대 본관(총독관저)입니다.
그러니까 이 기를 끊어 놓기 위해서 목과 입을 틀어막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청화대 본관을 헐었고, 옛 중앙청 건물도 헐어 버린다는 것은 말로는 일본의 잔재를 철거한다는 것이지만 속 뜻은 끊어졌던 기를 다시 살리겠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같은 이론을 모두 수용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하여간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도 이 땅을 소중히 여기셨습니다. 땅에도 생명이 있다고 보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도 쉬고, 동물도 쉬고, 땅도 쉬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야 건강하게 되고, 면역의 힘이 생기고, 많이 결실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네 번째는 원칙은 하나님께 예배 드리라는 것입니다.
13절을 보면 "내가 네게 이른 모든 일을 삼가 지키고 다른 신들의 이름은 부르지도 말며 네 입에서 들리게도 말지니라"고 했습니다. 시간이 많아지게 되면 사람들은 대부분 허탄한 것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이것이 사람의 약점입니다.
사람들이 바쁠 때는 탈선을 하지 않습니다. 한눈을 팔지도 않습니다. 그때는 잡념도 없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많아지고 할 일이 없어지면 잡다한 생각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래서 실수하는 사람들을 보면 대부분 시간이 많은 사람들입니다. 기반이 닦이고, 여유가 생기고, 시간이 많아지면 사람들은 그때부터 한눈을 팔기 시작합니다.
요사이에는 이렇게 한눈을 파는 사람들이 즐기기에 가장 좋은 곳이 강남 일대라고 합니다. 강남에는 네 가지 괴물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강남을 4다의 도시라고 합니다.
첫째는 고급 음식점이 많고, 둘째는 사우나가 많고, 셋째는 호텔이 많고, 넷째는 교회가 많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고급 음식점에 가서 배부르게 먹고, 배부르니까 사우나에 가서 씻고, 씻었으니까 호텔에 가서 마음껏 즐기고, 그러고는 죄를 지었으니까 교회에 가서 회개하고, 그러기에 안성맞춤이라고 합니다.
시간이 많아지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렇게 살아갑니다. 이것이 인간의 약점입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생활할 때는 우상을 섬기고 한눈 팔 엄두를 못 냈습니다. 일하는 데 여념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광야에 나오니 시간이 많고, 서로 앉아서 이야기할 여유가 생기니까 그 시간을 선용한 것이 아니고 우상 만들 생각부터 했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본문에서 한계를 지어 놓으신 것입니다. "6일은 너희를 위하여 일을 하고, 제 7일에는 쉬되 쉬는 날에는 내가 너희에게 이른 모든 일을 삼가 지키고 다른 신들의 이름은 부르지도 말며 네 입에서 들리게도 말지니라." 이것이 우리들에게 제시하신 삶의 대원칙입니다. 이렇게 살면 신앙에 탈선이 없고, 정신적인 방황도 없고, 생활의 무질서도 없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받으며 소망스런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여러분들의 생활에 기본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삶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6일 동안은 나의 삶을 위해서 열심히 일하고, 다음 하루는 하나님을 향해서 온전히 예배 드리는 생활로 드림으로써 삶의 질을 높이고 내용 있는 신앙 생활을 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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