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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값! (1) (사 49:5)

by 【고동엽】 2022. 1. 19.

그리스도인의 값! (1) (사 49:5)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서 누구보다도 가장 존귀한 존재들입니다. 성경에서는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천하보다도 귀하다고,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독생자까지도 아낌없이 내주셨습니다. 사실 알고 보면 우리 그리스도인은 굉장히 존귀한 존재들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사49:5) 나는 여호와의 보시기에 존귀한 자라 나의 하나님이 나의 힘이 되셨도다"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같은 값을 모르고 살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때로 비관도 합니다. 자포 자기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심지어는 세상에 태어난 것을 저주스럽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것은 값을 몰라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값을 알고 살아가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입니다.
안데르센의 동화 가운데 미운 오리새끼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오리알 가운데 백조의 알 하나가 함께 섞여 있다가 같이 부화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 백조의 새끼 하나가 오리 새끼들 틈에 끼어서 자랍니다. 그런데 오리 새끼들은 키가 작달막하고 털에 기름이 흐르고 아주 다부지게 생겼습니다. 그러나 백조의 새끼는 멋없이 껑충하고 털은 까칠하고 생김새는 아주 볼품이 없습니다. 그래서 오리 새끼들이 조롱을 합니다. "네 조상은 어떻게 생겼길래 너 같은 것이 생겨났니? 털은 까칠하고 다리는 막대기처럼 길고 너는 참 한심하게 생겼구나." 백조의 새끼가 자기 자신을 들여다봐도 너무나 볼품이 없고 한심하게 생겼습니다.
그때 하늘에서 백조때들이 호숫가로 사뿐이 내려와 앉았습니다. 이 백조의 새끼에게는 그 모습이 얼마나 멋이 있어 보였는지 모릅니다. 하얀 털에, 날씬한 몸매에, 사뿐이 내려앉는 그 모습과 자태, 그 모습을 본 이 백조의 새끼는 자기 자신의 모습과 그들을 비교해 보고는 자신이 너무나 초라해 보여서 그만 눈물을 흘렸습니다. 자기가 바로 그 백조의 새끼인 줄도 모르고서, 자기도 얼마 있으면 그렇게 하늘을 나는 백조가 되는 줄도 모르고서 말입니다.

사람이건 짐승이건 자기의 값을 모르고 자기의 가치를 모르고 산다는 것이 이렇게 불행한 일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생을 포기하기도 합니다. 어떤 이는 자포 자기하기도 합니다. 또 어떤 이는 이 믿음의 길에서 미련 없이 떠나버리기도 합니다. 모두 자신의 값을 몰라서 그렇습니다.
여러분, 행복함과 기쁨이 언제 옵니까? 그것은 자신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능력과 자질을 발견했을 때입니다. 이를테면 자신의 가치를 발견했을 때 사람은 행복을 느끼고 기쁨을 누리게 되며 보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청년이나 처녀들은 건뜻 하면 죽고 싶다는 말을 합니다. 아직 자신의 값을 몰라서 그렇습니다. 그러다가 애인이라도 생기면 그런 소리를하지 않습니다. 죽고 난 후에 그 애인이 다른 사람과 사귀는 꼴을 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아이라도 하나 낳게 되면 그런 말은 고사하고 그런 생각조차도 하지를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는 50억이나 되는 사람들이 살고 있지만 이 아이의 부모는 나밖에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비로소 자신의 값을 깨달은 것입니다. 자신의 존재 가치를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학자 칼 바르트는 "나는 십자가만 쳐다보면 나의 값을 발견하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귀하게 여기셨으면 독생자를 십자가에 죽이면서까지 나를 구원하시려고 하셨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십자가만 쳐다보면 나의 값을 발견하게 되고 용기를 얻게 된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값을 알고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 모두는 엄청난 값을 지닌 사람들입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가치 때문입니다.

 

사람이나 물건이나 가치가 있으면 존귀한 법입니다. 물건을 보면 어떤 물건은 다른 물건에 비해서 월등하게 값이 비싼 것이 있습니다. 금이나 진주 같은 것은 그 어떤 물건보다도 값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물건 자체가 값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보화라고 합니다.
이것은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 사람이 지니고 있는 가치 때문에 다른 사람에 비하여 귀하게 여김을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두뇌가 좋다든지 특별한 재능이 있는 사람은 그것이 그 사람을 값이 있게 만들어 줍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이 존귀한 것은 그리스도인에게는 그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을 받은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구원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입니다. 얼마나 귀한 사람들입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이 점에 있어서만은 확실해야 합니다. 나는 적어도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을 받은 존귀한 사람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이 같은 의식이 있어야 매사에 확신이 있고, 생활에 활력이 생기고, 하는 일에 어떤 사명감 같은 정신을 가지고 살아가게 됩니다. 이 같은 사람은 세상을 값 있게 살아갑니다. 값이 있게 생각하고, 값이 있게 행동하고, 죽을 때에도 값이 있게 죽어갈 수가 있습니다. 문제는 가치를 인식하는 일입니다. 이런 사람은 세상을 함부로 살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아무 짓이나 하지 않습니다. 구별된 삶을 살아갈 수가 있는 분별력을 지니고 살아갑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서 아무렇게나 살아갈 수가 없는 것은 바로 이 같은 가치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도스인들은 죽을 때에도 함부로 죽을 수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죽을 때 분명한 이유가 있는 죽음을 죽어야 합니다. 모두 값 때문입니다. 그래서 값을 알고 살아가는 것이 이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둘째는 쓰임새, 용도 때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귀한 것은 바로 이 쓰임새 때문입니다. 자동차나 비행기가 귀한 것은 현대 생활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되는 문명의 도구들이기 때문입니다. 오병이어가 귀한 것은 값이나 양에 있지 않습니다. 그긋은 질이나 양이나 값으로 보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성경에서 이를 귀하게 여기는 것은 배고픈 사람 5천명을 먹이고도 남게 하는 그 쓰임새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보잘것도 없고, 볼품도 없는 이 물건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데 가장 요긴하게 사용될 수 있었기 때문에 귀하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귀한 것은 모양이 좋고 생김새가 아름다워서가 아닙니다. 바로 이 쓰임새 때문입니다. 적어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위해서 쓰임받는 그릇 즉 도구들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서 부름받은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귀한 존재들입니까?
그리스도인들은 "나는 하나님을 위해 사용되고 있는 도구다"라는 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이 의식을 통해 방종을 막을 수 있고, 허황된 꿈이나 세상의 유행이나 시대적인 그릇된 풍조에 휘말리지 않게 됩니다.

가끔 신문을 보면 정치하는 사람들이 뇌물을 받았다 해서 야단이 날 때가 있습니다. 교육하는 사람들이, 예술을 하는 사람들이, 돈을 받고 조작을 하고 부정을 저질렀다고 야단입니다. 그래서 이 같은 의식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치를 하는 사람이 "나는 나라를 위해서 쓰임받고 있는 도구다"하는 의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뇌물을 받고 나라에 그르칠 일을 저지르겠습니까? 교육을 하는 사람들이 "나는 신성한 교육을 위해서 부름받은 도구다."하는 의식을 가지고 있다면 그가 어떻게 뇌물을 받고 부정 입학을 시키는 데 동참을 하겠습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나는 하나님을 위해서 쓰임받고 있는 도구다"하는 의식있는 신앙인이라고 하면 어떻게 세상을 막 살아갈 수가 있겠습니까? 모두 이 의식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이 같은 의식을 가지고 살아 가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이런 사람이 있는 그곳이 변화하고, 밝아지고, 갱신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귀한 것은 바로 이 점 때문입니다.

 

셋째는 주인이 귀하기 때문입니다.

 

하찮은 물건이라도 그 주인이 귀하면 그 물건도 귀해지는 법입니다. 박물관에 가보십시오. 그곳에 보관되어 있는 물건들은 하나 같이 귀한 것들입니다. 귀하기 때문에 그곳에 보관해 둔 것입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그 중에서도 더 귀한 것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세종 대왕이 사용했다는 벼루는 무엇보다도 귀한 보물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이 존경하는 세종대왕이 사용했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이순신 장군이 사용했던 칼도 귀한 보물입니다. 이순신 장군이 나라를 위해서 사용했던 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칼을 보면 의미가 담겨 있고 역사의 정신이 담겨 있습니다. 미국에서도 가장 귀한 보물을 말할 때는 링컨이 사용했다는 만년필을 꼽는닥고 합니다. 위인 링컨이 사용한 것이고, 또 그 만년필은 노예 해방 문서에 서명한 만년필이기 때문에 더욱 값이 있는 것입니다. 그 물건 자체가 귀한 것은 아닙니다. 그 물건의 주인이 귀하기 때문에 귀할 뿐입니다.
세상의 그리스도인들이 존귀한 이유는 생김새가 아름답거나 지식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그긋은 나의 주인이 하나님이시고 그 하나님이 귀하시기 때문에 내가 귀한 것입니다. 무당이 귀한 사람일 수가 없는 것은 그의 주인이 귀신이기 때문입니다. 술주정뱅이가 귀할 수 없는 것은 그를 지배하고 있는 주인이 술이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이 땅에서와 하나님 앞에서 존귀할 수밖에 없는 것은 우리들의 주인이 귀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같은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입니다. 적어도 "나의 주인은 내가 아니고 하나님이시다"하는 의식을 지니고 살아야 합니다. 이 같은 생각을 지니고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인이고, 행복한 사람입니다.

 

넷째는 하나님의 인정하심 때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존귀한 것은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황송하게도 우리들을 향하여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하셨습니다. 또 천하보다도 귀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천사도 흠모하는 대상이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나는 여호와의 보시기에 존귀한 자라 나의 하나님이 나의 힘이 되셨도다."라고 말했습니다.
천사는 분명 우리들의 부러움의 대상입니다. 하나님 곁에서 일하는 천사, 얼마나 영광된 직분입니까?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나라에 갈 때는 그 천사들이 천국에 올라오는 성도들을 보고는 부러워 흠모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천사들은 구원받는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이 귀한 것은 이렇게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관심의 대상이고 사랑의 대상입니다. 그래서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이 존귀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지금 우리들이 주 안에서 얼마나 큰 복을 누리며 살고 있는지 모를 일입니다. 영광된 일입니다. 엄청난 은총입니다. "나는 여호와의 보시기에 존귀한 자라 나의 하나님이 나의 힘이 되셨도다." 얼마나 자신 있는 고백입니까? 우리는 이 같은 값을 알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이 같은 뜻을 알고 사명을 알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살아가는 모습이 달라질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도 달라질 것이고 삶의 질도 달라질 것입니다. 이 같은 의식을 가지고 세상을 자신 있게 살아가는 사람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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