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에도 풍부에도 (4)
빌립보서 4:10-13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
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주시
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본문은 아주 어려운 환경에서도 자족함을 얻는 행복론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당시 전도자의 삶에는 고달픔과 가난과 위험이 상존했습니다. 온갖 유혹이 있었고 사탄의 위협이 있었고 주위의 몰이해도 있었습니다. 사도바울은 전도길 에서 데살로니가교회(살전2:5)와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돈만 안다고 비방하는 오해(고후 12:16-18)를 받았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억울한 일은 모함 받고 오해받는 일입니다. 그런데 다행스러운 것은 빌립보교회 성도들은 전적으로 믿고 격려하고 기꺼이 선교비를 지원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지난 2년여 동안 바울은 가이사랴 감옥에 감금되어 있었고 배가 파선하는 난파사건에 휘말리는 동안 소식이 두절되어 있었습니다. 그때 바울은 고린도교회처럼 자신을 오해하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걱정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빌립보교회 성도들은 열심히 기도하고 헌금해서 가까스로 에바브로디도 편에 선교비를 전달하고 안부를 전함으로 소식이 다시 연결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동안 여러 오해로 낙심하고 의기소침했는데 빌립보교회 성도들의 소식을 듣고 너무나 감격하여 10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주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동안의 근황을 소개합니다. 11-12절에서 “그동안 나는 어떤 형편에도 자족하기를 배웠다,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극복할 수 있었는가 하면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었다(13).”고 했습니다. 즉 내가 예수 안에 있으니까 모든 고난들도 이기게 되더라는 말입니다.
참 눈물겨운 고백입니다. 바울은 유대교에 그냥 있었으면 평안한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개종해서 예수의 제자가 되고 전도자가 되어 엄청난 고난과 수난과 가난과 궁핍한 삶을 자초했습니다. 그래도 그것은 외적인 고난이고 사실 내적으로는 행복한 생활을 했습니다. 내 안에 예수께서 계셨고 성령이 함께 하셨고 하나님의 위로가 넘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모든 어려움들을 기쁨으로 이겨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사도바울이 고난 중에서도 오히려 행복하게 시험들을 이겨낼 수 있었던 비결을 몇 가지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해의 극복
그동안 외로웠던 것은 성도들이 터무니없는 오해 때문입니다. 특히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오해가 컸습니다. 고린도후서 12장16절을 보면 “하여간 어떤 이의 말이 내가 . 너희를 속임수로 취하였다고 하니”라고 되어있습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말이 많았던 모양입니다. 별 오해를 다하고 모함까지 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억울한 일이 오해받는 일입니다. 교회 안에도 보면 뒤에서 별 소리를 다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소리를 들을 때 마다 어떤 때는 암담하고 때로 기가 막힐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목회자들은 당장 쫒아가서 따지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 목회자는 대부분 경상도 출신 목회자이거나 서울 출신 목회자들입니다. 성격이 급하니까 못 참는 것입니다. 충청도 출신 목회자들은 그런 소리를 들으면 감각이 늦어서 하루쯤 뒤에 열이 오릅니다. 그때는 이미 쫒아가 따질 시간이 지나버린 때입니다. 그래서 감각이 느린 것도 은혜일 때가 있습니다.
사도바울도 성격이 다혈질이었는데 그럼에도 잘 참아 냈습니다. 참아내니까 전도자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때 지긋이 참아내는 것도 지혜입니다. 전도자의 삶은 가난도 고난도 문제이지만 곡해 받을 때도 문제입니다. 그런 때는 참는 자질을 발휘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사도바울은 13절에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하고 고백합니다.
원망과 불평을 극복
12절에서 바울은 “나는 배부름에도 배고픔에도 풍부에도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고 말합니다. 사도바울은 그런 삶의 비결을 예수 안에서 배웠다고 선언합니다. 이 삶이 참 중요합니다. 적음과 넉넉함은 모두 시험의 조건들입니다. 적은 사람은 적은대로 많은 사람은 많은 대로 다 시험에 들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적을 때 불평하고 의기소침하고 비굴해집니다. 또 많을 때 교만해지고 자만하고 사람들을 무시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시험 드는 것입니다. 신앙의 삶은 창조적인 삶입니다. 신앙의 삶은 많으면 많은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만족해하고 감사하며 살아가는 삶입니다.
전도자의 삶은 때로 배고픔이 문제가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전도자들이 살아가는데 때로 이 가난이 축복이기도 합니다. 풍부함, 넉넉함에서 누가 전도자의 삶을 살아가겠습니까. 그래서 이 길이 힘든 길입니다. 문제는 그 배고픔의 길도 축복의 길임을 아는 수준에 이르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 길이 행복한 길임을 알게 됩니다. 바울은 그 경지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무소유를 초월한 경지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있으나 없으나 불문하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더구나 사도바울은 마음에 성령의 은혜가 임재한 삶을 살아가고 지금도 주님께 확실하게 붙잡혀 살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지금 그에게는 그까짓 집 한 채, 누림 정도는 안목에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선교비를 조금 보내고 여러 말들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의 마음을 전혀 이해하지도 헤아리지도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고백하기를 “나는 가난에도 풍부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고 말합니다. 오늘 사람들이 불평하고 불만하고 원망하며 살아가는 것은 사실은 적어서가 아니고 너무 많아서 입니다. 그러니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그 행복의 원천인들 이해나 하겠습니까. 사도바울은 애초부터 원망이나 불평은 아예 그림자도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고백을 내 뱉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건강한 삶 유지
본문에서 “나는 ...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고 한 고백은 바울이 아주 건강한 삶을 살았다는 말입니다. 건강의 삶은 몸만 건강한 것이 아닙니다. 정신도 생각도 마음도 영적으로 신앙도 건강해야 그것이 건강한 삶입니다. 사람이 병들면 곧 바로 시험이 찾아옵니다. 사람이 병들면 불안한 마음이 찾아오고 낙심이, 걱정이, 우울함이 찾아옵니다. 감사함과 기쁨과 즐거움이 사라집니다. 그때 신앙이 시험대에 오르게 됩니다. 어떤 분은 어렵게 되었을 때 신앙이 더 좋아지고 다져지는 분이 있습니다. 또 어떤 분은 좋던 신앙이 크게 손상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더 불안하고 걱정되고 의기소침 되어 낙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마음을 비워야 치유를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병이라면 기쁘게 감당하겠다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때 그 자연 치료를 통해서 병에서 헤어날 수 있습니다.
1704년 독일의 베냐민 슈몰크 목사 내외가 멀리 심방을 갔다 왔습니다. 집에 와 보니 집이 다 타버렸습니다. 혹시 하고 잿더미 속을 뒤져보니 둘이 부둥켜안고 죽어 있었습니다. 두 아들의 시신을 안고 두 부부는 울부짖었습니다. 그때 사탄이 그 모습을 지켜보았을 것입니다. 그런 때 대부분 사람들은 심한 원망과 불평과 불신앙의 태도를 보이게 마련입니다. “누구도 도와주지 않아서 내 아이들이 불타 죽었다”고 원망과 불평을 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그때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행동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때 누구나 인간이라면 의기소침 되고 낙심하고 탄식하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그런 태도가 얼마나 오래 지속되느냐가 문제입니다.
그때 그 목사 부부가 한동안 울부짖고 안타까운 눈물을 흘리며 망연자실하여 충격 속에 있다가 한참 후에 마음이 진정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부부에게 평안한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목사부부가 마침내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그 고백이 다음과 같은 내용입니다.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온 몸과 영혼을 다 주께 드리니, 이 세상 고락간 주 인도하시고, 날 주관하셔서 뜻대로 하소서.” 이것이 그때 그 목사 부부가 고백한 눈물의 신앙고백이었습니다. 얼마나 간결하며 그 속에 신앙고백이 다 들어 있습니까. 어디를 보아도 원망이나 불신앙적인 내용이 없습니다. 모두 하나님의 뜻으로 돌리고 있습니다. 이 고백의 글에 Von Weber 라고 하는 사람이 곡을 붙여 오늘 찬송가 549장이 된 것입니다. 그 모습을 보고 사탄도 기가 막혔을 것입니다. 그 삶이 사탄을 약 올리는 생활입니다. 건강한 삶, 건강한 신앙, 건강한 생각과 건강한 영적생활은 이런 결과를 낳게 됩니다. 여기 이 고백에서 우리는 사도바울이 아주 건강한 삶을 살아갔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소망의 삶
사도바울의 “나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는 고백은 수양에서 나온 고백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목적을 두었고 소망을 두었기에 나올 수 있는 고백입니다. 신앙의 삶은 소망의 삶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소망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안에는 밝고 기쁜 소망과 즐거움과 자신감과 믿음의 삶과 찬송의 삶이 들어 있습니다. 그런 삶은 먼저 자신에게 강한 자신감과 밝은 현실의 삶을 만들어 줍니다. 그리고 보는 사람들에게 감동의 모습을 주고 세상을 따뜻하게 만드는 역할도 합니다. 어쩌면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사명일 것입니다. 그 삶속에서 천국의 단면이 엿보입니다.
클린턴이 대통령 후보에 나서서 마침내 지명되어 지명수락 연설을 했습니다. 그때 아주 충격적인 사실을 털어놓았습니다. “나는 아버지를 모르는 유복자입니다, 아버지는 내가 태어나기 석 달 전에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습니다, 나는 조부모 밑에서 자랐습니다, 내 어머니는 네 살 때 재혼하였고 내 의붓아버지는 술주정뱅이였습니다, 그런데 내 할아버지는 무식했고 가난했지만 남부 알칸소 작은 마을에서 잡화상을 했는데 내 할아버지는 인종을 초월하고 자기보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이익을 따지지 않고 덤으로 더 얹어주는 모습에서 나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나는 이제 미국에 희망을 주려고 합니다.” 그 연설 후에 클린턴은 뜨거운 박수갈채를 받았고 그는 마침내 대통령에 당선 되었습니다. 그때 클린턴이 “어머니가 나를 버리고 시집갔다” 그래서 그는 고민하고 원한을 품고 불평이나 하고 술주정뱅이가 되었다면 그는 사탄의 수하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폐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너희는 항상 기뻐하라, 감사하라, 기도하라”고 강조합니다. 사도바울은 “나는 ....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고 선언합니다. 그 말은 나는 배고프고 어렵다고 불평하거나 가졌다고 자만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정신이 믿음이고 소망이고 사랑인 것입니다.
좋은 관계의 삶
13절에서 바울은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사도바울은 그동안 마음고생이 많았습니다. 그동안 가이사랴 감옥에 감금상태에 있었습니다. 배가 파선하는 난파사건의 고난도 경험했습니다. 빌립보교회로부터 소식도 끊어졌습니다. 더 어려웠던 것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오해였습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말이 많았던 모양입니다. 사람들 중에는 사도바울이 물질을 탐하는 사람으로 우리를 현혹해서 돈을 갈취해 가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하여간 어떤 이의 말이 내가 ... 교활한 자가 되어 너희를 속임수로 취하였다 한다”(고후12:16)는 말을 들었다고 말합니다. 어디를 가나 이 말장난하는 사람들이 문제입니다. 이렇게 함부로 말하고 다니면 오해가 더 큰 오해를 낳고 마침내는 관계를 크게 손상시키고 악화시키게 됩니다.
우리는 살아가는데 할 수만 있으면 좋은 관계를 이루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좋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더 나아가 이웃과의 관계도 좋게 가져야 합니다. 친구들과, 부부사이에, 형제 사이에, 자녀들 사이에도 건강한 관계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관계들을 자꾸만 불화하게 하고 갈등을 유발시키는 사람들이 있어서 문제입니다. 이 관계가 불화하게 되면 가장 먼저 타격받는 것이 우리의 영적생활입니다. 불화하게 되면 기도와 찬양이 없어집니다. 교회생활도 재미가 없어지고 등한하게 되다가 결국 하나님과도 멀어지게 됩니다. 어느 조직에나 보면 이 불화를 야기하고 평지풍파를 일으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로버트 서튼이 “또라이 제로 조직“이라는 책을 써 냈습니다. 미국의 신문에 오랫동안 연재된 내용을 편집한 책입니다. 소위 “입맛 없는 사람”을 “또라이”라고 부릅니다. 이 책을 보면 어느 직장이나 조직에나 단체에서 이 또라이가 없는 조직을 만들면 성공한다고 말합니다. 오늘 세계적으로 가장 인기 있는 직장이 미국의 구굴회사라고 합니다. 그 기업의 모토가 “사악하게 굴지 말라(Don't be evil)”입니다. “직장이나 단체에서 또라이를 뽑지 말고 일단 뽑았으면 개조시키고 안 되면 과감하게 내 쫒으라”고 했습니다. 조직에 이런 또라이가 많으면 조직 전체가 사기가 저하되고 실적의 저하를 일으킨다고 경고합니다. 이 또라이가 어떤 짓을 하는가 하면 다음과 같은 행동을 합니다. “뒤에서 인신공격을 한다, 개인의 영역을 자주 침범한다, 함부로 신체에 접촉한다, 말과 몸과 행동으로 위협하기도 한다, 상대방을 냉소적으로 약을 올린다, 다른 사람의 지위를 얕잡아 본다, 공개적으로 망신을 준다, 무례하게 끼어들기를 좋아한다, 뒤에서 욕하고 경멸하는 표정을 짓는다, 실적을 부풀리고 상사 앞에서는 죽는 시늉을 하고 부하 앞에서는 쥐 잡듯 거드름을 떤다, 사람들을 무시하는 태도를 한다.” 이런 사람들이 또라이라고 합니다. 사탄이 가장 좋아하는 것이 이런 태도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살아간다는 것이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 2절에서 “한마음을 품으라”고 했습니다. 사도바울은 그럼에도 누구보다도 만족하고 행복하게 전도자의 길을 걸어가고 사역을 감당하였습니다. 그것은 숫한 오해들에 일일이 개념하지 않았고 원망과 불평은 그의 사전에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의 삶속에는 소망이 넘치고 자신감이 넘쳤습니다. 그렇게 모든 것을 이기는 방법을 13절에서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이 말씀이 열쇠입니다. 세상에 기준을 두거나 목적을 두거나 초점을 두었더라면 그도 너무 실망하는 일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것의 기준과 목적을 주님께 두었습니다. 그러니까 누구보다도 넉넉한 마음이었고 풍성한 마음이었고 행복한 마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외치기를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었다“고 했습니다. 문제는 주님께 초점을 맞추고 살아가는 삶입니다. 여러분의 삶의 목적과 초점이 주님께 맞추어지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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