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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값! (2) (시 16:1-3)

by 【고동엽】 2022. 1. 19.

그리스도인의 값! (2) (시 16:1-3)

 

여러분, 이 세상에서 누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값진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자식입니까? 부모입니까? 아내입니까? 자식이 귀하기는 합니다. 그래서 자식 때문에 목숨을 버리는 부모도 있습니다. 부모와 아내도 소중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부모를 위해서 희생하는 자식도 있고, 아내가 죽은 뒤 따라 죽는 이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보다 더 소중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내 자신입니다. 내가 없는 세상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마16: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고 하였습니다. 이 세상에서 나라는 존재는 이렇게 중요한 존재입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나 같은 사람은 일찍이 죽어야 돼" 그렇게 말합니다.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이것은 인생을 모독하는 말입니다.

 

1. 나는 가장 값진 존재입니다.

 

나는 이 세상에서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장 값진 존재입니다. 얼마만큼 값진 존재인지 "(시16:3) 땅에 있는 성도는 존귀한 자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저희에게 있도다 "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소망이 우리 성도들에게 있으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적어도 우리의 이름이 하늘의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을 만큼 존귀한 사람들입니다. 내가 값이 없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에 나의 이름이 기록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이 점을 분명히 알고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같은 기쁨이 없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감사함이 없습니다. 자기의 가치에 대해서 무감각합니다. 어떤 분은 비굴하기까지 합니다. 여기에서는 뜻이 서지도 않고 이루어지지도 않습니다.

여러분, 참기쁨과 감사함을 느낄 때는 언제입니까? 그것은 자기의 존재 가치를 발견했을 때입니다. 자기 자신을 스스로 대견스럽게 여길 때 기쁨이 나오고 용기가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탕자의 비유를 아십니다. 탕자가 집으로 돌아옵니다. 오면서 스스로 생각합니다. 자기가 자기를 보아도 죽일 놈입니다. 어버지의 재산을 모두 탕신했습니다. 그것도 사업을 하다가 실패한 것도 아니고 창기와 함께 놀아나다가 탕진을 했습니다. 게다가 몸에 병까지 들었습니다. 작가 자기를 보아도 한심하게 보입니다. 자기가 자신을 보아도 용서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생각합니다. "염치는 없지만 이제라도 아버지께로 돌아가자, 가서 감히 아들이왔다고 말할 수는 없고 일꾼 중의 하나로 밥이나 먹여 달라고 하자." 그래서 집으로 돌아옵니다. 지금 탕자는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완전히 폐인이 되어 돌아오고 있습니다.
고향은 참으로 좋은 곳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죽어서라도 고향에 묻히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좋은 고향도 금의 환향하는 사람이나 좋은 곳이지 실패한 사람은 갈 곳이 못 되는 곳이 고향입니다. 병들고, 실패하고, 탕진한 사람이 무슨 얼굴로 고향에 갈 수 있습니까?
그렇지만 탕자는 고향으로 돌아 갔습니다. 방탕자 아들을 맞아들이는 아버지의 모습은 진지합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보자마자 뛰어나가서 맞아들입니다. 그러고는 "소를 잡아라. 목욕을 시키고 가락지를 끼우라. 잔치를 베풀라."고 말합니다. 아버지는 탕자를 여전히 완전한 아들로 영접하고 있습니다. 내가 나를 보는 관점과 아버지가 나를 보는 관점이 극과 극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대하시는 모습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비하하고, 경히 여기고, 비굴하게 생각할 때도 있지만 하나님은 나를 보고 여전히 천하보다도 더 값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시16:3) 땅에 있는 성도는 존귀한 자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저희에게 있도다"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말씁입니까? 그래서 칼바르트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내 두 개의 얼굴을 발견하게 된다. 먼저 내가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발견하게 된다. 내가 오죽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면 하나님은 아들을 희생시키면서까지 나를 대속해야만 했겠는가? 그래서 나는 십자가만 쳐다보면 숙연해진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십자가를 바라보면 나는 나의 값을 발견하게 된다. 나의 값이 얼마나 귀하면 하나님은 아들을 죽이면서까지 나를 살리려 하셨겠는가? 그래서 나는 십자가를 바라복 때마다 죄송한 마음과 기쁨의 마음을 동시에 갖게 된다."
여러분, "하나님이 왜 내게는 복을 주시지 않을까?"하고 서운해 할 필요없습니다. 그 십자가 속에 나의 값이 다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직 십자가만 바라보고 나아갈 뿐이고, 이 소중한 십자가를 간직하고 살아갈 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같은 값을 알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 같은 의미와 뜻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2.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습니다.

 

본문 시편 16편은 모두 11절밖에 안 되는 말씀인데도 그 속에 "나"라는 말이 25번이나 나오고 있습니다. "나를 보호하솟,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내가 주께 하뢰되, 주는 나의 주시오니, 주밖에 나의 복이 없나이다, 나를 훈계하신 여호와를 송축할찌라, 내가 하나님을 항상 모시리니, 하나님이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라." 나, 말고는 세상에 또 누가 있습니까? 나는 이렇게 중요한 존재입니다. 이 같은 나를 함부로 뒹굴리고, 욕되게 하고, 학대하고, 비관하고, 그렇게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시16:3) 땅에 있는 성도는 존귀한 자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저희에게 있도다 " "(벧전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이렇게 존귀하다고 하시는데 무슨 할 말이 더 필요합니까? 왜 자신을 과소 평가하고, 자신을 학대하고 세상에서 나를 더럽게 뒹굴리고 하는 것입니까? 이것이 얼마나 큰 죄입니까? "기왕 버린 몸" "이판 사판 공사판" "죽기까지 더 할라구" 이것이 얼마나 큰 죄입니까?
요즘 안타까운 것은 젊은이나 노인이나 너무 쉽게 죽어 버립니다. 시어머니가 싫어서 죽어 버리고, 며느리가 싫어서 죽고, 배반 당했다고 죽고, 살기가 어렵다고 죽고, 공부하기가 싫어서 죽고, 1등을 했으니 더 이상 꿈이 깨질까봐 죽고, 세상을 살기가 싫어서 죽어 버립니다. 여러분, 죄 중에서 가장 큰 죄는 스스로 삶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너는 존귀한 사람이라고 하시는데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우기고는 죽어 버립니다. 그러니 이것이 얼마나 큰 죄입니까?
이런 사람들은 대개 미래를 내다 보는 안목이 부족해서 그렇습니다. 너무 과거에 얽매이거나 너무 현실에 집착하다 보니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가지고 살아야만 합니다. 신앙은 미래를 소유하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미래가 있는 사람은 죽지 않습니다. 그래서 "(시16:2)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언제나 현재의 소망이지만 또한 언제나 미래의 소망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같은 미래의 소망을 지닌 사람은 절대로 생을 포기하거나 죽으려 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살아가기가 너무나 고달파서 몹시 지쳤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하소연이라도 할까 해서 성전에 나갔습니다. 가서 혼자서 기도하면서 실컷 울었습니다. 서럽고 외롭고 고달파서 자기 설움에 복받쳐 실컷 울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다 지쳐서 깜빡 잠이 들었습니다. 그는 꿈을 꾸었습니다.
꿈속에서 그는 주님을 보았습니다. 하얀 눈이 소복하게 내린 언덕 길에 두 사람이 길을 가고 있습니다. 한 사람은 몹시 지친 사람 같았고 또 한 사람은 지친 사람을 부축해서 가고 있습니다. 두 사람이 걸어가는 발자국이 선명하게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한참 후에 보니까 그 중 한 사람은 없어지고 혼자서 걸어가고 있습니다. 바자국도 한 사람의 발자국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눈을 비비고 자세히 보니까 한 사람이 지친 사람을 업고 가고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누군가 하고 주의 깊게 보니까 업고 가는 사람은 주님이고 업혀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그때 이 사람은 비로소 뭔가 보이지 않는 큰 능력에 사로 잡힌 것 같은 위안을 받고 돌아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로 이런 생각을 합니다. "내가 몹시 피곤해 있을 때,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지치고, 실패하고, 눈앞에 암담한 현실이 직면해 있을 때 그때 주님이 오셔서 내 손을 꼭 잡아 주신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다면 얼마나 힘이 될까."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하나를 더 생각해야 합니다. 주님이 오셔서 내 손을 잡아 주실 뿐만 아니라 주님이 나를 업고 가신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주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하고 단정지어 고백을 하였습니다. 이것이 우리와 주님과의 관계입니다.

 

3. 여호와는 나의 미래입니다.

 

(시16:5)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 나의 분깃을 지키시나이다 "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생활은 그 초점이 현재에 있지 않고 언제나 미래에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의 주안점은 현재에도 있지만 그 포인트는 언제나 미래에 더 강합니다. 과거는 아무리 훌륭했어도 미래만 못한 법입니다.
여러분, 약혼을 하거나 약혼식을 본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약혼을 하는 두 젊은이는 기쁨이 충만해 있습니다. 시종 싱글벙글합니다. 이들이 왜 그렇게 기뻐합니까? 금반지를 선물로 받아서입니까? 그것만이 아닙니다. 미래 때문입니다. 미래에 두 사람이 함께 살아가면서 주어질 행복을 생각하니 즐겁고 기쁜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 같은 미래가 있는 젊은이가 오늘 좀 어려움이 있다고 해서 죽을 것입니까? 이들에게 무엇이 있다면 오직 미래에 주어질 행복만이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5절에 나와 있는 말씀입니다. "(시16:5)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 나의 분깃을 지키시나이다"
비록 오늘 실패가 있고 고난이 있어도 이 미래에 주어질 분깃이 있는 사람은 그것쯤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 산업과 분깃이 있는 사람은 살아야 할 이유가 분명해집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를 살려 두고 계신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내가 병들었든지, 내가 가난하든지, 내가 못났든지, 내가 지금 살아 있는 것은 살아 있어야 할 사명이 있기 때문에 살아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고 살아가야 기쁨이 있습니다.
내가 할 일이 없고 무용한 사람 같아 보십시오. 하나님이 왜 나를 살려 두고 계실 것입니까? 노인은 노인대로, 병자는 병자대로, 남들이 보기에는 무용한 것 같은 사람도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모두 이 땅에 두셔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중에 누구보다도 실패를 많이 해 본 분이 있습니까? 그런분은 부끄러워할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실패를 모르고 살아 온 사람은 할 말이 없습니다. 생이 무의미합니다. 이런 사람은 실패하고 고뇌하고 낙심해 있는 사람에게 가서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런데 실패를 많이 해 본 분은 실패한 사람을 찾아가서 해 줄 말이 너무나 많습니다. 과부의 심정은 과부만이 안다고 했습니다. 누가 실패자의 그 아픔과 고뇌함을 이해하고 알아 줄 것입니까?

어떤 젊은 과부가 목사님을 찾아와서 울면서 호소합니다. "목사님 나는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목사님이 민망해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망설였습니다. 그에게 무슨 말을 할 것입니까? "어떡하긴요. 예수 믿고 기도하면서 살아야지요." 이 젊은 과부가 다시 말합니다. "목사님은 내 심정을 몰라요."
목사님이 그 심정을 알 리가 있습니까? 목사님은 막막했습니다. 무슨 말로 이 여인을 위로해 줄 것입니까?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그 여인보다 더 일찍 과부 된, 그러면서도 지금 열심히 살고 있는 여집사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빨리 와 주셔야겠습니다. 여기 이런 사람이 와 있는데 당신만이 와서 할 말이 있을 것 같습니다." 그 집사님이 황급히 달려 왔습니다.
오자마자 이 젊은 과부에게 "울긴 왜 울어, 과부가 어디 당신뿐이야? 나는 당신보다 더 일찍 과부 된 사람이야, 이게 모두 감당할 수 있으니까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야, 당신이 혼자서 살아갈만 하니까 하나님이 주신거야, 잔말 말고 기도하면서 마음 굳게 먹고 살아"라고 했습니다.
이 말 한마디에 이 여인이 두말 않고 돌아갔다는 것입니다. 과부의 심정을 과부 외에 누가 알겠습니까? 과부는 과부가 위로해야 합니다. 재수생은 삼수를 하고 나서 합격한 사람의 위로가 위력이 있습니다. 콩나물 장수를 전도하려면 콩나물 장사를 하는 집사님이 제격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세상에 여러 종류의 사람들을 두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실패를 많이 해 본 분이 있습니까? 그것은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할 말이 많은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여기저기에 많이 있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재수, 삼수를 해서 대학 공부를 한 분이 있습니까? 이것은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만나 주어야 할 젊인이들이 이 땅에는 너무나 많다는 것을 알기를 바랍니다. 과거에 불행했던 분이 있습니까? 과거가 파란 만장했던 분이 있습니까? 그 많은 경험, 얼마나 할 말이 많아 좋습니까? 이것도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분깃입니다.
여러분, 이제 "나는 쓸모없는 사람입니다."하지 마십시오. 나의 지난 과거 때문에 기죽어 사는 분이 있습니까? 그러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필요하시다는데 왜 그리 말이 많습니까? 하나님이 의롭다고 하셨는데 왜 자꾸 과거에 얽매어 사십니까? 오늘 내 생명이 이렇게 건재한 이유는 하나님이 나를 필요로 하고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오늘도 열심히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아갈 때 하나님은 우리의 우편에 계셔서 우리를 도우시고, 요동치 않게 하시고, 생명의 길로 우리를 이끌어 주의 영원한 즐거움으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시16:8)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시16:11)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값이 있는 존재들입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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