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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퇴장 후에 다시 등장한다 시89:47 2003.04.15.설교녹취
*원제목 : 등장과 퇴장
영원에 접속된 내 인생, 매듭을 잘 지어야 에 계속 이어지는 설교문. (원래는 아래 포함, 3개가 한 설교)
사람은, 죽음으로써 끝나는 존재가 아니라,
죽은 이후에도, 계속 후대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 있고,
그런 의미에서 ‘세상에 다시 등장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마무리’를 아름답게 끝내야 한다는 주제의 설교문입니다.
◑서론/ 신앙은 반드시 지, 정, 의가 한데 어우러져야 합니다.
깨달음이 먼저 있어야 믿죠? ‘지’가 있어야 합니다.
내가 깨달음을 가지면, ‘정’ 즉, 내 감정이 동합니다.
그런데 절대 다수의 한국 크리스천들이, 이 부분에서 머물러 있습니다.
그 다음에 ‘의’ 내가 의지를 다해서, 주님을 붙잡지 않습니다.
내 의지를 드리기 전까지는, 우리는 성령의 사람일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령님 핑계를 대죠. 성령님께서 안 붙잡아주셔서...
아닙니다. 내가 깨달았다는 것(지), 말씀에 내 감정이 감동했다는 것(정) 자체가
이미 성령님께서 임하셨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기 의지(의)를 다해서,
환락과 핍박을,
주님의 적극적인 러브 콜링 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까.
여러분의 의지마저 주님께 드려질 때
우리의 일상은 세상 사람이 볼 때, 보잘 것 없다 할지라도
역사의 지평을 흔드는, 하나님의 도구로 쓰이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죽은 뒤에 ‘죽은 날’로 기억되고 지명됩니다.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그 사람의 출생일(생일)로 기억됩니다.
그러나 죽은 뒤에 생일은 더 이상 필요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사후에는, 그 죽은 날로 기억되기 때문입니다.
제 부모님의 경우에. 제 아버지, 어머니의 생신일이 언제인지는..
한참 생각해야합니다.
그러나 아버지, 어머니께서 세상을 떠나신 날은, 제가 금방 압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세상을 떠나면 가신 날로 기억하거든요.
왜 떠나신 날로 기억하느냐? 이유는 간단합니다.
한 인간의 죽음은 퇴장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곧 새로운 등장이기 때문입니다. 아까 말씀드렸죠.
인간의 삶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습니다.
우리의 육체는 흙으로 돌아가고
우리의 영은 하나님 아버지에게로 돌아갈지라도
우리의 삶의 흔적은 반드시 이 땅에 살아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죽는 것은, 나의 육체가 역사 속에서 퇴장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내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내 삶의 족적은
내 삶의 의미는 그 순간 다시 등장하는 것입니다.
▲역대 대통령들께서는, 임종과 아울러 대한민국 역사에서 퇴장했습니다.
과거의 인물이 되신 것이죠. 그런데 그걸로 끝났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와 동시에 그분들은 다시 등장한 것입니다.
임종 후에도, 그분들에 대한 ‘역사의 평가’가
사람마다 다르고, 의견들이 분분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았을 때에, ‘아름다운 퇴장’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후대의 사람들이, 우리 각자에게, ‘아름다운 역사의 평가’를 내려 줄 것입니다.
▲영국의 다이애나 황태자비는 1997년도에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역사에서 깨끗이 퇴장한 것이죠.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었습니다.
금년 초에 영국의 모 언론이, 찰스 황태자의 두 아들 가운데에서
둘째 아들이, 과연 영국 왕실의 기초를 이어받을 찰스 황태자의 아들인가.
아니면 다이애나비가 자신이 고백했던 다이애나 비의 정부.
옛날 승마 조교의 아들인지..
유전자 검사를 해야 된다는 문제를 제기한 적이 있습니다.
다이애나 비는 역사에 다시 등장했습니다. 그 둘째 아들이 살아 있는 동안
그 어머니는 둘째 아들의 삶 속에 등장해서, 둘째 아들을 괴롭힐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자기 목을 매어서, 역사에서 퇴장했습니다.
그러나 다시 등장했습니다. 2천년 역사에서, 그가 잊혀진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진리를 버릴 때에 그 인생이 얼마나 허망한지..
오늘도 목이 매인 모습으로, 그는 우리에게 웅변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3천년 전에 역사에서 퇴장했습니다.
그러나 퇴장하지 않습니다. 그는 다시 등장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예수원의 대천덕 신부님께서 작년(2002년)에 소천하셨습니다.
역사에서 퇴장하신 것이죠.
그분이 성공회 신부님이셨기에, 그분의 장례식이 서울 성공회 본당에서 있었습니다.
아시겠습니다만, 영국 성공회 사제들의 그 성의는 로마 가톨릭 사제들의 성의와 거의 흡사합니다.
성공회 높은 사제들께서 황금색 가운에 왕관 같은 금색 모자를 쓰고 나와서
홀을 들고 장례식을 집례 했습니다.
그러나 평생 무소유로 살았던 대천덕 신부님은, 퇴장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 그 정신이, 다시 등장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분이, 황금색을 입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압도하는 것을,
그곳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은 똑똑히 보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 이 세상을 퇴장합니다.
그러나 그 퇴장은, 결코 영원한 퇴장이 아닙니다.
그때 비로소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때는 내가 다시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기회 없이 등장하는 것이기에
그 등장이야말로 참으로 중요한 등장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내게 호흡이 있을 때에 <퇴장을 준비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죽음엔 정해진 시간이 없습니다. 정해진 날짜가 없습니다.
한자 죽을 사(死)를 파자하면, 한 일자(一)에 저녁 석자(夕)에 비수 비(匕)자가 됩니다.
죽음이란 어느 날 저녁에, 비수처럼 날아오는 것입니다.
한낮에 비수가 날아오면, 혹시 보고 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밤에 날아오기 때문에 피할 수 없습니다.
오늘이 그 날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매일 준비해야합니다.
▲보통의 유럽 사람들은, 하나님을 불필요하게 여기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너무나 많은 것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할 필요가 없겠죠.
그런데 프랑스, 스위스, 독일 신문을 펼치면
그 신문에 사람이 죽었다는 부고가 나는데, (보통 사람들도 다 납니다.)
그 부고 광고에는 전부 십자가가 그려져 있습니다.
유럽인들이, 살아생전에는 예배당을 잘 안 가는데,
죽고 나면, 부고를 알릴 때는, 십자가를 찾습니다.
저는 어디를 가든지 공동묘지 찾는 게, 개인적인 제 오랜 취미입니다.
3년 동안 유럽에 살면서, 그곳의 공동묘지를 여러 곳 찾아가 보았습니다.
모든 도시에는, 그 도시 근처에, 또 오래된 성당 주위에, 꼭 묘지가 있잖아요.
옛날 묘지니까, 십자가가 새겨져 있겠지.. 그렇지 않습니다.
최근에 쓰여진 모든 묘비에도, 하나같이 비석에 십자가가 그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평생을 자기 마음대로 살다가,
죽고 난 뒤에 부고의 십자가 인쇄하고
묘지 비석에 십자가 조각하면.. 그게 ‘바른 퇴장’이 되는 것입니까?
브라질 상 파울로 공동묘지에 갔을 때는,
다른 곳에서 전혀 볼 수 없는, 새로운 모습을 보았습니다.
어느 나라던지 비석에는, 당사자의 출생일과 사망일을 기록해둡니다.
그런데 그 공동묘지에 있는 비석은 하나같이 출생일은 별★표로,
죽은 날짜는 십자가♱로 표를 했습니다. 세계 어디에서도 못 보던 모습이었습니다.
묘지 관리인이 지나가기에 물었습니다. ‘왜 이 묘소에는 출생일은 별표로,
사망일은 십자가로 표를 했습니까?’ 그랬더니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이 세상에 올 때에는, 마치 자신이 Star인 듯 오지만,
갈 때에는 어쩔 수 없이 저분께 부탁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그렇게 묘비에 십자가 새겨 넣으면, 바른 퇴장이 됩니까? 또 바른 등장이 됩니까?
▲한국에서, 자기 분야에서, 아주 크게 성공하신 한 분이 계십니다.
그 분이 제 설교에 ‘인생은 퇴장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등장하는 것’이라고
정의 내리는 것을 듣고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목사님, 저는 지금까지, 사는 데는 정말 열심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오늘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저는 퇴장의 준비가 없었습니다.”
여러분, 모든 사람들이 사는 데 열심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퇴장을 준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퇴장 뒤에 그들의 등장은, ‘허무한 등장’ 이외에, 별다른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부터 퇴장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 퇴장 준비가, 살아있을 때의, 가장 알찬 자기 삶을 살아냄이기도 합니다.
이 모든 말을, 다르게 표현하면
우리는 정말 진짜 크리스천이 되어야 합니다.
▲‘실제적 무신론자’라는 말이 있습니다.
교회도 다녀요. 성경도 읽습니다. 십일조도 합니다. 찬송가도 부르고 기도도 하구요.
그런데 교회 밖에서 그 사람이 실제적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가만히 보면
이 사람은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니에요.
그 사람을 신학 용어로 실제적 무신론자 Practical Atheist or Pragmatic Atheist 라고 합니다.
여러분이 ‘실제적 무신론자’가 되어서는, 바른 퇴장도 등장도 불가능합니다.
▲다윗이 살인까지 저지르는 엄청난 죄를 짓고도
어떻게 그의 등장과 퇴장이, 이렇게 아름답게 성경에 기록될 수 있었겠습니까.
시편 6편 6절입니다.
내가 탄식함으로 곤핍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자신의 죄를 깨달은 뒤에 묘가 떠내려갈 정도로 회개했습니다.
우연히 된 일이 아니었습니다. 나단 선지자의 지적을 받고 곧 지은 시가 있죠.
시편 51편 14절입니다.
하나님이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 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내 혀가 주의 의를 높이 노래하리이다
상하고 통해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돌아감으로,
진짜 하나님을 믿는 자답게 나아가
그의 퇴장과 등장은, 영원한 등장과 퇴장이 될 수 있었습니다.
▲미국 스탠포드 대학에 가면 그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대통령을 역임했던 후버 기념관이 있습니다.
후버 기념관에 가면, 그의 명연설 구절들이 벽에 기록되어 있는데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과거형으로 되어 있죠. 자신의 경험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개혁의 열정, 개혁의 영감은, 가슴에서부터 우러나왔지만
그러나 그것은 오직 지적 능력에 의해서만 성취되었다.”
오늘날 청년들이 개혁을 얘기합니다.
청년들이 열정이 있는 만큼, 청년들 입에서 개혁의 이야기가 나와야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개혁을 이룰 수 있을만큼의 능력을 배양하고 있습니까?
4.19 이후 이 나라에서 개혁 소리가 안 나온적이 있습니까?
매번 구호만 있었습니다. 열정만 있었기 때문에. 지성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믿는 자가 갖추어야할 지성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단순히 학문적 지식이 아닙니다.
미래를 내다보는 통찰력, 어제 말씀드린바와 같이 더불어 사는 공생력,
어떤 경우에도 자기 자신을 맞출 줄 아는 자립정신.
그때 여러분들은 천국의 미래를 책임질 수 있습니다.
당부 드립니다. 여러분은 진짜 학생, 진짜 크리스천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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