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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성령의 역사로 @의사소통이 분명해진

by 【고동엽】 2021. 12. 29.

성령의 역사로 의사소통이 분명해진다 행11:15~18 설교 녹취

 

 

▲똑같은 새소리인데, 듣는 사람에 따라 느낌이 다르다.

똑같은 새소리인데, 어떤 사람은 ‘노래한다’ 그러고, 어떤 사람은 ‘운다’고 한다.

그 차이는, 새소리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새소리 듣는 사람의 마음에 기인한다.

마음이 슬픔에 젖어 있는 사람은, 새소리가 <우는 소리>로 들리고,

자기 마음이 즐거운 사람에게는, 똑같은 새소리가 마치 <노래 소리>처럼 들린다.

 

이런 현상은 똑같은 한 사람에게도, 시차적으로 달리 일어나기도 한다.

어제 즐거울 때는, 새가 노래하는 것처럼 들리고

오늘 힘겨울 때는, 새가 서글프게 우는 것처럼 들린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오가는 <말>도 마찬가지다.

자기가 어떤 마음을 지녔냐에 따라서, 한 사람의 말을, 각자가 다르게 받아들인다.

가량 A가 어떤 사실을 말하더라도, 듣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서

그 내용이 판이하게 다르게 받아들여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B는 B나름대로 이해하고, C는 C자신에게 편한대로 그 말을 해석하고 받아들인다.

 

심지어는 사람이 어떤 마음을 보유하고 있느냐에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마저도 전혀 다르게 전달되어지게 되는데...

 

 

◑예수님 말귀를 잘못 알아들은 베드로

 

▲요한에게 라이벌 의식을 가졌던 베드로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요21:18

 

그 말씀이 끝나기가 무섭게, 베드로는 요한을 바라보면서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성경은 신사적으로 번역했지만, 실제론 ‘주님, 얘는 어떻게 되요?’의 막말식 말투)

 

베드로가, 다른 제자들 중에 특별히 요한을 가리켜 이렇게 물은 것은,

평소에 그가 요한과 어떤 라이벌 관계에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예수님의 대답과 베드로의 곡해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요21:22

 

그런데 나중에, 예수님 이 말씀은 전혀 엉뚱한 의미로 소문이 퍼져 나갔다.

이 말씀이,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제자는 죽지 아니하겠다 하였으나 요21:23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요한을 죽지 않고 살려두겠다’고 단정하신 것이 아니었다.

‘내가 재림할 때까지 만약if 요한을 살려둔다고 하더라도...’

즉, <가정법>으로 말씀하셨다.

 

그런데 주님의 이 말씀이 이후에 엉뚱한 소문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요한은 절대 죽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 곡해의 최초 발설자는,

주님으로부터 그 말씀을 직접 들었던 베드로였다.

베드로는 예수님 말씀을 잘못 알아들었다.

‘내가 재림할 때까지 그를 살려둘 것인즉, 그것이 네게 무슨 상관이냐?’

라고 알아들었다.

 

 

◑제자들은 평소에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베드로가 요한에게 가졌던 평소 경쟁의식

12제자들끼리 누가 가장 높은지, 평소에 서로 잘 다투었다.

그 중에 특별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이 세 제자가 경쟁이 치열했다.

예수님이 특별히 그 세 제자를 총애하셨기 때문이다.

 

변화산에,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고치시는 현장에, 겟세마네 동산에도

이 세 제자만 데리고 가셨다.

 

그러던 어느 날, 대형사고가 터졌는데,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십자가를 지시러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는 길에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은밀히 찾아가서 청탁을 드렸다.

주님이 이제 집권하시면, 자신들을 좌의정, 우의정으로 삼아달라는 것이었다.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소서 막10:37

 

이 야고보와 요한은 서로 형제이다.

그러니까 3인방이 있었는데, 그 중에 둘은 친형제이니,

베드로는 늘 2:1로 경쟁한다는 불리한 느낌을 가졌을 것이다.

따라서 요한 형제에 대한 베드로의 경쟁의식과 견제심리는 유달스러웠을 것이다.

 

그런데 이것으로 부족하다고 느꼈던지,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자신의 두 아들을 데리고 주님께 찾아가서

똑같은 청탁을 드렸다.

 

나머지 10제가가 불같이 화를 내었음을 두말할 여지가 없다.

그 중에서도 베드로가 아마 제일 화를 크게 내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베드로와 요한이 평소에 말이 서로 통하지 않았을 것이다.

설령 진실을 말한다고 할지라도, 그 진실이 제대로 전달될 수 있겠는가?

오히려 말을 하면 할수록, 오해와 곡해를 낳을 뿐이지 않겠는가!

 

자기 어머니까지 동원해서, 예수님에게 부정한 청탁을 한 요한 형제이고 보면,

그 요한을 향한 예수님의 말씀이,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21:22

베드로 귀에 제대로 들릴 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을 곡해했던 것이다.

경쟁심과 질투심으로 가득 찬 베드로는, 요한에 대한 주님의 말씀을

결코 액면가 그대로 올바로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성도 간에 오해와 억측이 생기는 이유

그렇다면 이것은 얼마나 중요한 교훈을 우리에게 던져주고 있는가?

아무리 크리스천이라 할지라도

바른 마음을 지니지 않으면

크리스천 간에도, 말이 곡해와 억측을 낳게 되고

심지어는 주님의 말씀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성도 간에 서로 진실을 말함에도 불구하고

그 말의 진의가 제대로 전달되기는커녕

오히려 심각한 부작용만 초래한다면

그것은 쌍방이 모두 진실을 말한다는 전제조건 하에서는

말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그 말을 듣는 사람의 마음의 문제이다.

 

바른 마음을 지니고 있지 않으면,

그 어떤 진실된 말도

왜곡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베드로와 요한은 그 후에 어떻게 되었는가?

그들은 서로의 말을 오해하고 곡해하던 견원지간의 사이에서,

놀랍게도 사도행전에 보면, 아주 서로 친밀한 동역자 사이가 되었음을 보여주는데,

이는 다름아닌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음>이었다.

 

 

◑성령 받고 친밀한 동역자가 된 베드로와 요한

 

▲1. 제 구시 기도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같이 성전에 올라가서 기도하다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우리를 보라 하니... 행3:1~4

 

베드로가 성전 미문 앞 앉은뱅이를 치유하던 그 역사적 순간에,

베드로 혼자 하지 않고, 그는 요한과 더불어 동역했다.

 

▲2. 예루살렘에서 핍박을 무릅쓰고, 두 사람이 함께 열심히 전도했다.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행4:19

 

그들은 관원들과 서기관들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힘써 그리스도의 부활을 전하는데, 기꺼이 적극적으로 동역했다.

 

▲사마리아 성에, 베드로와 요한을 함께 파견했다.

사마리아 성을 방문한 빌립 집사에 의해

사마리아 사람들도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 놀라운 소문이 예루살렘의 사도들에게도 전해졌다.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매 행8:14

 

과거에 가장 앙숙이던 사이가

사도행전에서 가장 긴밀한 동역자 사이가 된 것이다.

이것은 그들이 그릇된 질투심과 경쟁심에서 벗어낫음을 의미한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었을까?

행3장부터, 베드로와 요한이 같이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가는 등

동역을 시작했는데, 그런 아름다운 동역이 이루어지게 된 계기가

바로 행2장의,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이다.

 

베드로와 요한이, 함께 성령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베드로도, 요한도, 서로 더 이상 경쟁의식이나, 견제의식이 없었다.

그들의 마음은, 성령님께서 내주하시는 성령의 전이 되었다.

성령님을 모시고 보니, 그들은 서로 경쟁자가 아니라

동역자임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성령님으로 충만/민감할 때만,

상대가 하는 말의 진의를 파악하게 된다.

아니 그 보다 더, 비록 상대가 말을 안 한다 할지라도

상대방의 깊은 생각 속에 묻혀 있는 진의까지도

(때에 따라서는) 성령의 역사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성령의 교통으로)

 

성령충만을 받고 나니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요21:22

라는 말씀의 진의를, 그제야 파악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 때로부터 서로의 진의를 파악하고

긴밀한 동역의 관계를 이루어 갈 수 있었다.

 

이와 똑같은 일이 행11장에서도 반복되는데...

 

 

◑베드로의 설명을 잘 알아들었던 예루살렘 할례파

 

▲들었으나, 처음에는 진의를 파악하지 못했다.

 

유대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이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들었더니 행11:1

 

개역성경엔 ‘들었더니’가 맨 뒤에 나오지만, 헬라어 성경엔 문장 제일 앞에 나온다.

‘들었다’는 동사가 그만큼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뜻이다.

(아래 11:18의 '듣다'와 병행해서 이해해야 하는데, 잠시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도대체 누가 무엇을 들었다는 얘긴가?

예루살렘에 있는 크리스천들이, 베드로 사도를 통해,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다는 얘기다.

 

처음에는 베드로의 진의를 알아듣지 못했다.

이방인 고넬료의 가정이, 베드로를 통해 복음을 듣고, 세례를 받은 것은

하나님을 찬양할 일이요, 베드로의 공로를 칭찬할 일이었다.

 

그러나 오랜 세월동안 이방인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편견 때문에,

예루살렘 교회의 일부 ‘할례파 유대인 크리스천’들은

베드로의 그러한 행동을 처음에는 맹렬하게 비난했다.

베드로 사도가, 무할례자와의 교제를 엄금하는 유대 율법의 전통과 관습을

파기했다는 것이었다.

 

당시 예루살렘 교회의 구성원들은, 거의 할례를 받은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성경이 특별히 ‘할례파’로 그들을 지칭하는 이유는,

그들이 ‘할례를 받아야만 구원 받는다’는 잘못된 전통적 이론을 고수했기 때문이었다.

 

▲성령님의 역사로... ‘듣고 나서’ 태도를 확 바꾸었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행11:18

 

이 구절 역시, ‘듣다’는 동사가, 헬라어 성경에는 문장 제일 앞에 나온다.

 

베드로를 비난하던 할례파들이 갑자기 잠잠해졌다.

그들은 태도를 확 바꾸어, 이방인들에게도 회개를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들이 베드로의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베드로의 진의를 제대로 알아 들은 것은,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은

그들이 성령에 충만해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만약 그들이 성령에 충만해 있지 않았다면

베드로가 아무리 자초지종을 자세히 설명해도

그들은, 자기들의 전통과 습관에 의해서 베드로를 비난했던 그 태도를

절대 바꾸지 않았을 것이다.

 

베드로가 그들에게 설명한 것은 행11:5~17절에 잘 나타나있다.

그것을 한 마디로 압축하면, 그 모든 것은 성령님의 역사였다는 것이다.

 

이렇게 할례파들이 베드로의 설명을 듣고, 수긍하고, 이해한 것은

그들 역시, 행2장에서부터 시작된, 성령을 체험했었고, 계속 체험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전12:3절처럼, 성령님의 역사가 아니고는

이방인들이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을 수 없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처음에 할례파들은, 자기 전통과 관습에 의해

‘이방인도 예수 믿고, 성령 받았다’는 사실을 잠시 곡해하고 베드로를 비난하다가

즉시로, 성령님의 역사로, 베드로의 말귀/진의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그 성령님의 역사에 곧바로 순종했다.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던 것이다.

 

▲더 나아가, 듣지 않아야 할 말을 물리치는 것도, 성령님으로 가능하다.

산헤드린 공회는 사도들에게, 그리스도의 부활을 전파하지 말라고

엄히 겁을 주었다.

그들을 불러 경고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행4:18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은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행4:19

 

사도들은, 성령님의 역사로

들어야 될 말과, 듣지 않아야 될 말을

잘 구분할 수 있었다.

 

성령의 역사가 아니었다면, 산헤드린 공회의 말에 즉각 순종했을 것이다.

아니 자기들이 갇히고, 채찍에 맞고, 죽게 될 처지인데

누가 감히 그 명령에 거역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성령의 역사로, 사도들은, 듣지 말아야 할 말은, 불순종했던 것이다.

 

▲마치는 말

오늘날, 같은 성경책을 놓고도

이단과 사이비가 나오는 것은,

성경말씀을 듣지 않아서가 아니라,

성경말씀을 듣고도, 누구보다도 열심히 듣고 연구하면서도,

그 말씀의 진의를 못 알아듣거나, 곡해하기 때문이다.

성령으로 충만하지 못할 때 그러하다.

 

성령님의 빛 속에서, 사람들의 말한 것의 참 뜻을 알아들을 수 있게 된다.

성령충만한 가운데서, 예수님의 말씀하신 것의 참 뜻을 제대로 알아듣게 된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깊은 것 까지도 통달하신다. 고전2:10

 

오늘날 우리는 조심해야 한다.

요21장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의 의미를 곡해한 것처럼

행11장에서 할례파들이 베드로의 사역을 곡해한 것처럼

오늘날도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 오해와 억측을 통해,

공동체 안에서 관계가 뒤틀려지고 균열이 생긴다.

 

부부지간도 예외가 아니다.

오직 성령님의 조명 속에서만,

사람이 말하는 말의 진의를,

나아가 그가 마음속에 품고 있는 발설되지 아니한 말까지도

다 알아들을 수 있게 된다.

 

 

성령님은 인간의 마음속 까지도 읽으시고,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기 때문이다.

 

<09.02.15. 인터넷 설교 녹취 ▣ 교회론

 

출처 : 냉수 한 그릇
글쓴이 : 김지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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