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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은, 유한의 영원에로의 접목 |

by 【고동엽】 2021. 12.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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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은, 유한의 영원에로의 접목 행7:1~16, 벧전1:24~25 출처

 

 

▶도입 일화

미국에 살고 있는 제 조카 중 한 명이, 미국 청년과 결혼하였습니다.

한국인인 제 조카와 결혼하기로 한 마이클은 한국말을 배우기로 결심했습니다.

먼저 '가나다라.....' 즉 한글 알파벳을 익힌 그는,

어디에서든 한글이 보이기만 하면, 읽는 연습을 하였습니다.

 

하루는 한국인이 경영하는 가게에 들렀다가, 그곳에 손님들을 위하여 비치해둔

한국잡지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의자에 앉아 잡지를 펼쳐들고선 한자, 한자, 더듬더듬 읽기 시작했습니다.

 

‘오, 렌, 지.’

마이클은 몇 번이나 한 글자씩 천천히 읽어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단어의 뜻이 무엇인지, 전혀 짐작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마이클은 한국인인 가게 주인에게 정중하게 물었습니다.

‘아저씨! 오, 렌, 지. 가 무엇입니까?’

가게 주인은 마이클로부터 잡지를 넘겨받아 내용을 확인한 다음 박장대소하며 대답했습니다.

‘이건 orange야!’

 

마이클은 한글로 쓰여 있는 '오, 렌, 지'가, 영어로 orange일 줄이야 상상도 못했던 것입니다.

 

마이클이 한글로 오렌지란 글자를 읽을 수는 있었지만, 그것도 반복하여 여러 번 읽었지만,

그러나 그것이 orange를 가리키는 글자라는 사실을 알지 못할 때,

그 단어는 그에게 단순한 문자 이상의 의미일 수는 없었습니다.

 

뜻을 알지 못하는 단어를 반복하여 읽는다한들,

그것 또한 가치 없는 일이기는 매한가지였습니다.

 

우리의 신앙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또박또박 소리 내어 읽을 수 있습니다.

반복하여 교회를 다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 있어, 참된 신앙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다면,

그 모든 행위는 마치 오렌지를 뜻도 모르면서

'오, 렌, 지'로 거듭 읽는 것처럼 무의미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참된 신앙의 의미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그 해답을, 본문 벧전1:24~25a절속에서 찾아보려고 합니다.

 

 

◑1. 유한의 영원에로의 접목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벧전1:24~25a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참으로 잘 보여주고 있는 구절입니다.

모든 것이 풀처럼 유한하기 짝이 없는 이 세상에서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 영원한 까닭은,

그 말씀의 주체이신 하나님께서 영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유한한 인간에게 있어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참된 의미란,

'유한의 영원에로의 접목'이라 표현할 수 있습니다.

 

오늘 싱싱하게 피어있는 듯싶다가도

한 순간에 시들어 떨어져버리는 들풀과 같은 인생이, 즉, 유한이,

 

영원하신 하나님을 믿으므로,

비로소 유한을 뛰어넘어 영원과 접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친히 가르쳐주신, 주기도문은 이렇게 끝나고 있습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마6:13

 

▶주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날마다

영원하신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신앙을 고백케 하심으로써,

우리가 추구해야 할 신앙의 본질적 의미가 영원에 있음을 분명히 일깨워주십니다.

 

신앙의 본질적 의미가 영원과의 접목임을 바르게 알 때

바른 신앙의 정립이 가능합니다.

 

신앙의 참된 의미는 결코 유한의 강화에 있지 않습니다.

유한의 깊이나 높이의 확장에 있지도 않습니다.

유한의 미화에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것은 마치 물거품의 방울을 치장하거나 개선하려는 것처럼 부질없는 짓입니다.

아무리 크고 단단해 보이는 물거품이라 할지라도,

물거품은 어쩔 수 없이 물거품일뿐, 즉 순식간에 사라져버리고 맙니다.

 

영원에 접목되지 아니한 인간의 삶.. 또한 예외일 수 없습니다.

좀 더 잘 먹고 좀 더 많이 가지고 좀 더 높아질 수는 있겠으나

영원을 비켜난 인생이란, 영원과 매일 접목하지 않고 사는 삶이란,

결국 물거품과 같습니다. 늙으면 깨달을 것입니다. 그러나 일찍 깨달아야 합니다.

 

어차피 사라질 물거품에 지나지 않는다면,

거품의 크기가 큰 만큼, 거품이 터져 버릴 때의 허망함만 더 클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말이 무의미한 물거품으로 끝난다면,

그 과정 또한 아무런 의미를 부여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한 믿음 속에서 영원에 접목된다는 것은,

단순히 들풀 같은 인생의 유한을 뛰어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유한한 인간이 하나님의 영원하심에 접목됨으로써,

인간에게 주어지는 모든 시간과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비로소 영원한 가치를 지니게 된다는 데에, 그 진정한 의미가 있습니다.

 

아브라함, 모세, 여호수아, 사무엘, 다윗과

그 외 여러 믿음의 조상들을 생각해 보십시다.

 

그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희로애락과 질고의 일생을 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삶과 고난이 말할 수 없이 고귀하고 가치로운 것은,

그들의 삶과 고난이 영원과 접목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여러 믿음의 조상들과 반대로, 화려하게 살았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애굽의 왕들, 세상 군왕들, 재력가들, 영웅호걸들..

 

우리는, 지금 내가 아무리 비천하고 못났다 할지라도,

내 삶을, 그들 영웅호걸의 삶과 바꾸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 삶은.. 영원과 이어져 있고,

그들의 삶은, 아무리 화려했다 하더라도, 유한에서 끝났기 때문입니다.

(물론 ‘아래’에서 영원히 지냅니다만, 우리는 그것을 ‘생명’이라 부르지 않고,

‘사망’이라 부릅니다. 영원과,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되었기 때문입니다.)

영원에 접목된다는 것은 이처럼 중요합니다.

 

▶모든 순간은, 영원의 일부

흔히 영원을 말할 때, 순간을 하찮게 여기는 우를 범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틀렸습니다.

오히려 영원에 접목된 자만 순간의 중요함을 바르게 압니다.

모든 순간이 실은 영원의 일부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영원 속에서만, 순간이 영원의 가치를 지닙니다.

영원 속에서만, 오늘이 영원한 내일을 위한 초석이 됩니다.

 

영원 속에서는 가치롭지 아니한 것이 없습니다.

이 유한한 세상 속에서, 영원보다 더 고귀한 것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본문 행7장을 통해 우리가 얻고자 하는 교훈이 바로 이것입니다.

 

 

◑2. 발붙일 만큼도 안 주시고

 

행7장 스데반 집사의 설교는 이렇게 시작되고 있습니다.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가라사대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

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 아비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시방 거하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 7:2~4

 

아브라함이 본래 살던 곳을 떠나, 가나안으로 이주했던 것은

아브라함의 자의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하신 일이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란에 살던 아브라함을 직접 가나안 땅으로 불러들이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단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였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 순종의 결과를 이렇게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발붙일 만큼도 유업을 주지 아니하시고’ :5a

 

분명히 아브라함을 가나안으로 데리고 가신 분은 하나님이시건만,

하나님께서는 그곳에서 아브라함에게 발붙일 만큼의 땅 한 평조차도 주시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상식과는 완전히 어긋나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새로운 삶의 터전으로 친히 인도 해 가셨다면,

그것은 마땅히 광활하기 그지없으리라는 것이 우리의 상식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을 위해서는 한 치의 땅도 없었습니다.

(그는 막판에, 막벨라 굴을, 매장지로, 값을 치르고 구입했습니다.)

 

▶가나안 땅을 주시되, 4백년+ 후에 주시기로 약속

 

그리고 본문은 다음과 같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발붙일 만큼도 유업을 주지 아니하시고

다만 이 땅을 아직 자식도 없는 저와 저의 씨에 게 소유로 주신다고 약속하셨으며

하나님이 또 이같이 말씀하시되 그 씨가 다른 땅에 나그네 되리니

그 땅 사람이 종을 삼아 4백 년 동안을 괴롭게 하리라 하시고

또 가라사대 종 삼는 나라를 내가 심판하리니,

그 후에 저희가 나와서 이곳에서 나를 섬기리라 하시고’ 7:5~7

 

단지 가나안을 주시기는 주시되,

그때까지 아직 태어나지도 아니한, 아브라함의 후손에게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이집트에서의 노예생활로부터 풀려나게 될

4백 년 후에 말입니다. 참으로 황당한 얘기입니다.

 

그럴 바에야 아예 4백 년 후에 아브라함 후손을 직접 부르실 일이지,

무엇 때문에 하란 자기 집에서 잘 살고 있는 아브라함을

미리 이역만리로 이주케 하신 단 말입니까?

 

자신을 위해서는 발붙일 만큼의 유업도 없는 그 가나안 땅에서

아브라함의 삶이 대체 무슨 의미와 가치를 지닐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 모든 실정을 알고 난 뒤 고향을 등지고 온 아브라함의 실망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지금으로부터 4백년이면, 임진왜란(1592)이 일어났던 때입니다.

그만큼 오랜 기간이란 뜻입니다. 우리 같으면 기절했을 것입니다.

 

4백년, 아니 5백년 후에 이루어질 약속을.. 바라보고 믿으라는 겁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믿고, 좇기를 바라십니다.

주제는.. 신앙은 영원에 잇대어 있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자신을 위해서는 발붙일 만큼의 유업도 없는 그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절망하거나, 혹은 하나님의 약속 을 황당하다고 여기지 않았습니다.

 

이유인즉, 그는 영원하신 하나님을 믿는 자로서

영원과 접목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비록 자식 한 명 없지만,

그러나 영원 속에서 4백 년 후 그의 후손이 큰 민족을 이룰 수 있음을 믿었습니다.

 

후손들이 겪어야 할 400년 동안의 노예생활이 고되지 않을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영원을 경영하시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후손들을 사랑하시사,

세상 어느 민족보다 강한 민족으로 훈련시켜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선한 계획임을 믿었습니다.

 

지금 자신이 두 발 딛고 서 있는 땅 위에

자신을 위해서는 단 한 치의 유업도 없지만,

그러나 하나님에 의해 4백 년 후 그 땅이 자기 후손들의 삶의 터전이 될 것을

분명히 믿었습니다.

 

▶영원에 접목되어 있을 때, 믿지 못할 하나님의 약속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도 분명하게 알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후손에게 주실 땅으로

아브라함 자신을 4백 년 전에 미리 부르신 것은,

자신으로 하여금 4백 년 후를 위한 초석을 놓게 하시기 위함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창세기 23장에서 살펴본 것처럼, 아브라함은 그의 아내가 죽었을 때에,

원하는 곳 어디에나 고인을 그냥 매장하라는 원주민들의 끈질긴 호의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끝내 값을 치르고 매장지를 매입한 뒤,

그곳이 아브라함의 소유가 되었음을 원주민들로 하여금 공포하게 하였습니다.

 

그것이야말로 4백년 후, 그의 자손들이 그 땅을 향하여 나아올 이정표였습니다.

 

▶그래서 행7:15~16절은 이렇게 끝나고 있습니다.

 

‘야곱이 애굽으로 내려가 자기와 우리 조상들이 거기서 죽고, 세겜으로 옮기워

아브라함이 세겜 하몰의 자손에게서 은으로 값 주고 산 무덤에 장사 되니라.’

 

이집트로 이주한 야곱이, 이집트에서 죽자

그의 자식들은 야곱의 유해를 이집트에서 가나안으로 옮겨와,

아브라함이 값을 치르고 매입했던 바로 그 매장지에 장사지내었습니다.

 

이미 이때(아브라함의 증손자 때)부터, 아브라함의 후손들에게 있어서

가나안이란, 반드시 그들이 돌아가야 할 하나님의 약속의 땅이 되어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 땅은 그로부터 4백 년 후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땅이 되었고,

4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스라엘의 영토로 존속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비록 현실의 자신에게는 발붙일 만큼의 땅 한 평도 없었지만,

그러나 영원과 접목 속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던 아브라함으로부터

비롯되었음은 두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그가 영원하신 하나님의 영원과 접목되어 있지 않았던들,

발붙일 만큼의 유업도 없던 그 이역만리 타향에서의 삶은,

결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어윈 루처 ☞ 참음으로 기다리는 신앙

 

 

◑3. 나도 아브라함과 마찬가지

 

▶제가 살고 있는 아파트 앞 가로수는, 벌써 낙엽들이 한 잎, 두 잎 지고 있습니다.

1년을 채 넘기지 못하고 떨어지는 낙엽은 언제나 쓸쓸하고 외로워 보입니다.

 

푸르던 나뭇잎이 낙엽이 되어 떨어진다는 것은

이제 형체도 없이 사라져버리는 것을 의미하는 탓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낙엽을 보며 허무를 되씹기도 합니다.

 

그러나 한번 깊이 생각해 보십시다.

과연 나뭇잎은 낙엽이 되어 사라져버리기만 하는 것입니까?

 

나뭇잎으로서의 형체는 분명 사라져 없어집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나뭇잎의 의미와 가치마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지난봄에 돋아나 가을이 되기까지 푸른 잎으로 존재하던 그 잎들의 가치와 의미는,

작년보다 더 크고 굵어진 나무줄기와 가지 속에 실은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태양의 빛과 열 그리고 공기를 빨아들이면서

한 해 동안 나뭇잎들이 수고하지 않았던들,

지난해보다 더 성장한 나무로 나무 자체 가 지금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아예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모든 나무란, 그 나무를 거쳐간 숱한 나뭇잎들의

의미와 가치의 총 집합체인 것입니다.

 

▶인생도 이와 똑 같습니다. 우리에게도 시간은 끊임없이 스쳐 지나가고 있습니다.

사람이 늙어간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시간 이 스쳐갔음을 의미합니다.

10대도 스쳐가고 20대도, 30대도 스쳐지나 갑니다.

 

그러나 그 의미가 사라지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 동안 나를 스쳐 지나간 모든 시간은

실은 지금의 내 인생 속에, 나의 삶 속에, 나의 모습 속에 영락없이 남아 있습니다.

 

그 시간들을 의미 없이 탕진했다면.. 지금 의미 없는 인생으로,

가치 있게 선용했다면.. 지금 가치 있는 모습으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바로 지금의 내 자신이 나를 스쳐 지나간 모든 시간의 집합이요,

나의 일거수일투족이 그 시간들의 의미와 가치를 스스로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나간 세월 동안 진실되이 살아온 자의 지금이.. 거짓된 모습일 수 없고,

거짓되게 살아온 자의 인생이.. 진실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축적되어 있는 의미와 가치가 무엇이든 간에,

그의 인생이 영원에 접목되어 있지 않을 때,

그 의미와 가치는 결국 소멸되기 마련입니다.

 

인생이란 결국 풀의 꽃과 같이 유한한 존재이기에,

그 유한으로부터 비롯된 모든 의미와 가치는, 그 유한과 더불어 소멸되고 맙니다.

 

반면에 우리가 영원에 접목되어 있을 때,

우리를 스쳐지나 가는 시간들은 영원한 가치와 의미를 지니게 되며,

그 당연한 결과로서, 우리의 인생 자체가

그 영원한 의미와 가치의 집합으로 승화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 대표적인 예로, 오늘 본문은 아브라함을 들고 있습니다.

하란에서 실패자로 그 인생이 끝났을 수밖에 없는 아브람!

 

그러나 영원하신 하나님의 영원에 그 자신을 접목시킴으로써,

발붙일 만큼의 땅 한 평도 없던 그 이역만리 객지에서

영원한 믿음의 조상으로 승화되고 이스라엘의 초석이 된 아브라함 말입니다.

 

▶마치는 말

오렌지는 '오, 렌, 지'가 아니라 orange입니다.

우리가 믿는 신앙의 의미를 알자는 뜻입니다.

 

믿음은.. 유한(현실)의 강화나 확장 또는 유한의 미화를 위함이 아닙니다.

믿음은.. 오직 영원에로의 접목을 위하여 존재합니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 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벧전1:24-25

 

모든 것이 유한한 이 세상에서, 영원하신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그분의 영원하심에, 영원하신 그분의 말씀에 여러 분의 인생을 접목시킵시오.

그 영원의 초청에, 아브라함처럼, 기꺼이 응답 하십시다.

 

영원 속에서는 믿지 못할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도 없습니다.

영원 속에서는 의미 없는 것이 없으며, 가치롭지 아니한 순간이 없습니다.

 

영원 속에서는 발붙일 만큼의 유업조차 없는 오늘일지라도

영원한 내일을 위한 초석이 됩니다.

 

영원 속에서만 나의 인생은 새로운 세계를 위한 발판이 됩니다.

영원 속에서만 새 밀레니엄은 진정한 새 천년이 될 것입니다. 2000년경 설교인 듯

 

진정한 가치와 의미는 오직 영원 속에만 있습니다.

영원보다 더 값진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 영원에 우리를 접붙여 주시기 위해,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십니다.

 

기도/ 영원하신 하나님 아버지시여!

유한에 눈이 멀어 영원을 상실한 죄인이건만, 이 죄인을 긍휼히 여기시사

이 시간도 불러 주시고, 아버지의 영원하신 팔을 내밀어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아버지의 영원하심에 나를 접목케 하여 주옵소서.

아버지의 영원하신 품에 나를 맡기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영원하신 말씀에 나를 온전히 의탁케 하옵소서.

 

그리하여 발붙일 만큼의 유업조차 없는 상황이라 할지라도,

(특히 해외 이민자, 재외동포, 유학생들이 더 그렇지요)

그 속에 간직된 영원한 의미와 가치를 분별하는 통찰력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나를 스쳐지나 가는 모든 시간들이 영원한 의미와 가치의 집합이게 하시고,

그 같은 나의 삶이 정녕 새로운 밀레니엄을 구축하는 영원한 초석이게 하옵소서.

 

어떤 경우에도, 오늘 내가 추구하고 있는 나의 삶이

실은, 내일 내 후손들이 살아갈 삶의 발판이 된다는 하나님의 법칙을 잊지 말게 하소서...

 

출처 : 냉수 한 그릇
글쓴이 : 김지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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