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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선 목사 준비중

갈라디아서에서 본 십자가의 비밀, 능력(박영선 목사)

by 【고동엽】 2021. 12. 21.

갈라디아서에서 본 십자가의 비밀, 능력|

(갈 3:5 -14)--
이 갈라디아서는 도움없이 혼자 읽으면 그 뜻이 분명하게 드러날만큼 간단하지 않습니다.
누군가 도와줘서 인도해 줘야될 책중의 하나죠. 갈라디아교회 교인들에게 저들의 신자된 근거, 신자된 정체성,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자녀된 정체성을 다른 것에 팔아먹지 마라 그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안에 근거를 가지려하거나 그리스도의 십자가외에 다른 것으로 자신의 신앙을 혹은 구원받은 신자의 신분을 확인하려하지 마라 그것입니다.
5절을 보면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혹은 듣고 믿음에서냐" 고 이렇게 합니다.
성령을 받은 것이, 성령의 시대가 열린 것이 너희 안에 근거가 있었느냐, '너희가 열었느냐' 이거죠. 우리 지난 수요일에 확인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성령시대를 여셨습니다. 예수님만이 유일한 근거이십니다. 그
래서 이 문제를 뭘로 연결하느냐하면, 6절에 보듯이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함과 같으니라. 성령시대를 여는 것이 그 성령시대를 사는 신자들에게 허락된 축복과 특권의 시대이고 새로운 시대이지만 우리가 열지않은 것같이, 또는 우리가 열지않고 하나님이 그의 은혜로 허락하셨다는 것을 아브라함이 어떻게 의롭다함을 받았느냐에서 다시 한번 확인해 봐라 그것이죠.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았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았다는 것은, 아브라함이 의롭다함을 받을 조건과 자격을 제시하지 못했다에 촛점이 있습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는 것은 믿음이 가지는 가장 중요한 본질이 그렇듯이, 우리에게 허락된 결과가 자신이 가진 조건위에 서있지 않은 법칙을 얘기할 때 믿음이라고 한다 했습니다.
행위와 구별되는, 율법과 구별되는 은혜, 믿음을 논할 때 믿음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아브라함과 같이 저를 의롭게 여기신 이가 하나님이시다 하는 것과 같이 성령시대를 여는 것은 하나님이 예수안에서 이루신 일이지, 우리안에 근거가 없다,를 다시한번 확인 시키시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 예수를 믿으면서 늘 듣는 얘기죠.
은혜, 믿음, 십자가, 예수그리스도,,, 이 일의 중요성은 우리가 성경 전체내에서 늘 반복적으로 확인하는 일인데, 우리가 우리를 구원할 능력이 없다,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인간은 자기가 소원하고 상상하는 목적보다 더 큰 목적으로 만들어졌다를 강조하기 위해서 그런 것입니다.
사실은 우리의 양보한, 타협한 욕심들은 뭐냐하면, 하나님 그저 남에게 아쉬운 소리안하고 살게 해 주십시요, 이겁니다.
TV프로 중에 '인간시대' 이런 프로가 있습니다. 그기에 장애아이를 기르는 부모의 삶을 몇번에 걸쳐서 연속적으로 보여준 내용이 있는데, 대여섯살 쯤 되는 어린아이인데 점점 근육이 굳어져 가는 것입니다. 지금도 잘 걷지 못하고 장애로 인하여 고생을 하고 있는데, 지금보다 더 나빠질 것입니다. 근데 아이 엄마가 뭐라고 소원을 말하고 있느냐하면, '제발 지금만 같기를 원합니다.' 이렇게 소원을 말했습니다. 이것은 우리 믿는 자들도 늘 당하는 시험인데, '하나님! 요 정도로는 내가 참고 있을만 하니까 여기서 더는 어렵게 하지는 말아 주십시요' 그것이 기도의 중요한 내용이 되곤 합니다. 하나님을 너무 무시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건강, 체면, 자존심 이런 정도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지시는 목적과, (이건 우리의 이해를 위한 표현입니다) 욕심은 더 크십니다. 그 예수그리스도를 말미암아라는 얘기를 해야되고, 행위나 조건을 따지지않는 은혜, 믿음을 동원하는 이유입니다. 조금 더 말씀을 따라 내려가 봅시다.
7절 "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 " 중요합니다!
신자된 정체성은 어디에 있느냐, 내가 신자가 맞냐 하나님이 나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나를 사랑하는 그 대상이 내가 맞냐... 우린 가끔 서로 확인을 하게되죠. 이런 약점과 이런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하나임이 내편이냐 정말 하나님 내 아버지시냐, 여기 대답합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줄 알지어다,
이 무슨 얘기입니까.
'자기에게 조건이 없거든 하나님의 자녀인줄 알지어다... '
'하나님! 저는 하나님한테 사랑을 받을 이유가 없는데요, 하나님한테 복을 받을 이유가 없는데요, 제가 그래도 하나님 자녀라고 말할 수있습니까?'
'너 그렇게 묻는다면 돌아와 이 생각을 해라! 내가 내 아들을 줄 때, 네가 요구 했었느냐?,,,네가 회개했기에 내 아들을 보냈느냐? 네가 나에게 요청하고 하나님이 이렇게 해 주신다면 내가 앞으로 이렇게 살고 이런 사람이 되겠습니다라고 우리가 서로 타협을 한 것이냐? 아니지않느냐,,,'
여러분 잘 아는 로마서 5장 8절에 있듯이,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정하십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에 늘 잊어서는 안되는 유일한 토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 놓칩니다.
우리의 불안은 어디에 있느냐하면 우리에게 자격이 없다는 것이죠.
우리의 의심은 내가 그 은혜를 아무리 반복해도 나아지지않는다는데에 있죠. 그렇죠 이 두번째 중요하죠. 은혜를 한번 은혜를 입고 그다음엔 은혜가 필요없는 사람이 되고 싶죠. 하나님이 그러시지 않습니다. 은혜로 시작하고 은혜로 마칠 것입니다. 여러분이 자격이 없어하는 것은 당연한 자책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자신있는 것으로 우리에게 근거를 가지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목적과 뜻에서 벗어납니다. 그 얘기를 이어서 합니다. 8절 "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이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는 창세기 12장3절에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그긴 이렇게 되어 있었죠.
아브라함에 하나님이 뭐라고 축복하셨냐하면 내가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이 창대케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저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라" 입니다.
땅의 모든 족속이 유대인 뿐만 아니라, 혈연으로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삼은 유대인뿐만 아니라, 모든 땅의 족속들이, 이방인들까지도 아브라함으로 인하여 복을 받을 것입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의 어떤 자격위에 서있는 복이 아니라 아브라함을 부른 하나님의 은혜라는 조건위에서 아브라함이 그렇게 부름을 받았듯이, 아브라함의 혈통으로서의 후손들이거나 하브라함과 혈통에 상관없는 어떤 족속들도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같은 은혜로 구원을, 복을 받을 것이라.
그래서 그는 모든 족속의 복의 근원이 되며 믿음의 조상이 되는 것입니다. 이 문제야말로 하나님이 하나님의 자녀에게 허락한 구원과 약속하신 복들은 유대인과 이방인들에게 차별이 없다는 것입니다.
유대인과 이방인들에게 차별이 없다는 것은, 우리 인간이 가지는 구별과 상관이 없습니다. 인간이 만들 수있는 조건과 상관이 없고, 인간이 책임질 수있는 능력과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는 다 이 문제를 어려워합니다.
은혜라는 것이 무엇이냐할 때, 내가 아무것도 안하고도 복을 받는다는 것을 도무지 우리가 납득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에게 이렇게 설명드릴 수 있습니다.
이 은혜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하나의 본질은, '당신이 아무리 당신에 대하여 절망하였을지라도 하나님은 당신을 받아주실 수있다' 라는데 쓰십시요! 이것이 믿음입니다.
나한테 조건이 있지않고 하나님께 조건이 있는, 그의 위대하심과 자비로우심과 무한하신 사랑의 근거한 하나의 설명입니다.

분명히해야 할 또 하나는, 우리에게 책임과 연결되는 부분인데, 책임과 연결되는 부분은 '우리에게 조건을 만들기 위한 책임이 아니라,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신 것은 우리가 우리를 만드는 것과 우리가 책임을 질 수있는 한계를 넘어서는 신적 능력과 목적지에 이르게하기 위해서 은혜라는 말을 씁니다' 라는 것이 성경에 반복되는 강조입니다.
여러분이 여러분 마음에 드는 어떤 신앙적인 만족을 시켜서 하나님앞에 떳떳하려고 하지 마십시요. 그것 중요합니다.
정직한 것, 근면한 것, 성실한 것, 겸손한 것, 온유한 것, 예의를 지키는 것, 가다려 주는 것, 이런 것 다 훌륭한 덕목입니다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목적하시는 것은 그것보다 훨씬 크다 이겁니다.
여러분이 다만 정직하고 여러분이 다만 신실하고 여러분이 다만 따뜻하고 책임있고 하는 정도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목적한 창조의 목적도 우리를 구원하시는 구원의 목적도 아닙니다.
그것과 비교할 수없는 것입니다. 하늘이 땅과 먼 것같이 우리하나님의 뜻은 큽니다. 그래서 은혜를 논하는 것이지 여러분에게 그저 삶을 책임없이 살아도 되고 신앙생활을 생각없이 해도 된다는 것으로 쓰라고 성경이 이말을 하는 것 아닙니다.
그래서 '복음은 모든 일을 위한 것이고, 그 모든 일을 위한다는 말 속에는 지금 말한바와 같이 그의 자격과 조건을 묻지않을 뿐만아니라, 그의 책임과 소원을 넘어서는 신적 작정이 있기 때문에, 복음은 인간의 구별과 차별과 경쟁으로 확인할 수있는 그렇게 작고 제한 된것이 아니니라'에 모든 뜻이 모아지고 있습니다.
생각하면 놀라운 일이죠. 우리가 인간의 한계와 인간의 못난 것을 확인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우리가 소원하는 것은 아까 우리 잠깐 예를 든 것같이, 그저 남한테 아쉬운 소리 안하고 사는 것이 아마 평생 최고의 소원일 것입니다. 남한테 아쉬운 소리 안하고 사는 거 이거 얼마나 어려운지 아시죠? 참 어렵습니다.
아쉬운 소리 안하고 사는 것, 그것이 우리의 신앙적으로 따지면 아! 정말 하나님을 무시하는 발상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로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시겠다 약속하셨습니다.
여러분 믿음을 훨씬 크게 열어놓고 받아들이셔야 됩니다.
그래서 아까 이야기 한것같이 은혜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한 구원! 약속된 복들은 우리를 우리의 한계로부터 우리를 구원해내는 것입니다.
책임과 자격이라는 것데서부터 구원뿐만 아니라 우리의 소원과 우리의 욕심에서부터 구출해냅니다 것보다 더 큰데로 입니다. 그것이 10절 이하의 말씀입니다.
(10-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1-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
12-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니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

10절에서 12절에 걸친 율법에 관한 얘기 그것이 저주아래 있다는 얘기는 율법은 긍정적이지 않습니다. 대단히 부정적입니다.
커트라인에 불과하죠. 최소한 여기까지 돼야하고 이 수준에 미치지못하면 정죄와 심판아래 있다고 선언하는 기준선입니다.
그러니까 율법은 우리를 하늘넘어로 보내는 것이 아니라 땅에 묶어놓고 있는 것과같은 제한과 속박속에 있고, 율법을 지킨다는 것은 파멸을 면하고 정죄를 면하는 것은 될지언정 긍정적으로 어디를 가자는 것은 만들어내지는 못합니다.
그것은 거짓말을 하지않았다는 있어도 정직은 적극적으로는 무엇을 만들어내는 표현이 아닙니다. 더 가야죠 더.
그래서 이 율법의 한계들은 율법을 준 하나님의 중요한 목적이, 율법을 받은자가 가지는 정체성을 위하여 줬지 책임으로 주지않습니다.
다시 한번 합시다. 율법을 받은자는 그 율법이 하나님이 계시고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이기 때문에 율법을 받은 줄로 아는 것입니다.
나는 이 율법을 최소한의 기준으로 명하시는 하나님의 자녀다 라는 정체성으로 율법을 이해하고 지키지, 이 율법을 우리가 지켜 흠이 없어야된다 라는 것으로는 율법을 이해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 모든 신앙생활이 예수 믿는자 다워야 된다 라는 것이 세상사람들의 눈에 납득이 가는 것보다 더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어디로 가느냐하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죠. 그것은 물론 부정직한 걸 말하거나 태만한 것을 변명하는 데 쓰여서는 안됩니다.
당연히 정직해야하며, 당연히 성실해야하며, 당연히 세상사람들보다 그 성품에 있어서 앞서 나아가야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모든 그런 일을 하는 것이 세상사람들에 의해서 이해될 수 있는 것보다는 더 나아갑니다.
왜 예수를 믿는지 세상사람들은 알 수가 없습니다. 그건 하나님은 알아야 되는 문제이고, 하나님의 약속속에 있어야만 이해되는 것이지, 세상사람들이 다 알도록 얘기를 할 수 있었다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질 필요는 당연히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고 죽어셔야만 했다는 것을 늘 돌아보아야 합니다.
복음은 십자가로 말미암아 주는 것이요 십자가로 말미암아 주었다는 것은 우리 주위에 누구든지 자격으로, 자기의 능력으로 복음을 자기에게 적용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얘기입니다.
그것은 더 나아가서 우리가 우리를 위하여 죽는 것과 비교할 수없이 큰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죽으심으로써 목적하고 있는 목적이 내가 나를 위하여 목숨을 거는 것보다 당연히 클 수밖에 없다 하는데로 우리를 인도해야 됩니다.
그러니까 예수를 믿는다는 건 큰 겁니다. 하나님의 신비하심의 부름앞에 있습니다.
우리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신앙을 확인할 때, 나 이만하면 됐다라고 생각하는 것으로 확인하시면 안됩니다.
우리에겐 사실은 늘 죄책감에 쫓아다니는 것이 당연합니다. 또 정말 하나님이 내편에 드는가는 믿음에 대한 의심도 늘 따라 붙습니다.
왜요. 우리는 믿음속에 있고 약속속에 있어서 하나님이 조건이시기 때문에 그 조건이 내안에 있어서 내가 꺼내 보고싶을 때 내 방식대로 펼치고 그 효능을 확인 할 방법이 없기때문에 우리는 사실은 아주 자주 자주 정말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이 진실한가, 결국 그 결과가 올 것인가,,,불안합니다.
믿음에는 이 불안과 의심의 국면이 꼭 있습니다. 그것이 없으면 그것은 믿는게 아니라 생각이 없는 것입니다. 아.. 생각이 없는 사람만 믿음에 아무런 의심이 없고, 믿음에 의심이 있는 사람은 적어도 IQ가 세자리 이상이 되며는 당연히 따라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나오는 결론입니다.
13절과 14절에 보는 결론
("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신 21:23
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그리스도' '그리스도' '그리스도'입니다.")
13절과 14절에 가장 중요한 건 '그리스도' '그리스도'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시고,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하여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합니다. 그리스도 그리스도죠.

저주로부터 복입니다. 그러니까 신자의 신앙에 있어서 가장 신비한 부분이 뭐냐하면 내가 나를 봐도 한심한 그것이 복으로 복으로 결과될 수있다는 게 십자가의 비밀과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을 정죄하고 싶을 때, 여러분이 여러분을 놓고 싶을 때, 십자가가 무엇인가를 보십시요.
죽음이 영생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그러니까 십자가와 예수를 필요로 하지않는 믿음의 확인은 거짓입니다. 율법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제 설교에 귀를 기울이시는 이유를 제가 압니다. 여러분들도 순탄한 신앙생활을 하고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고민하고 계시고 스스로 자책하고 계시는 분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렇지않고야 저한테까지 왔겠습니까.
저의 책임은 뭐냐, 바로 여기에 보냄을 받은 것이죠. 사도바울이 이방의 사도바울이 된 것같이 저는 절망의 사도가 된것입니다.
테레사수녀는 자신의 소명을 뭐라고 소개했느냐하면은 자신은 어둠의 성녀라고 했습니다.
그는 평생을 비천한 자들을 위하여 다만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이 아니라, 그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정체성에 상처를 입은 자들을 위하여 보냄을 받았다고 당신의 소명을 이해했습니다. 인도의 천민들을 찾아갔을 때, 그는 꼭 무엇을 갖다주는 것으로 그의 구제활동을 거친것이 아니라 그 방문을 하여 그 사람을 씻기고 인간대접을 하는 것입니다. 구호품을 주는 것이 아니라, 같은 인간대 인간의 존엄성을 확인해주며 위로하며 대접해주러 갔다는 것이죠.
자신을 뭐라했다고요? 어둠의 성녀라고, 왜요?
그의 사역내내 그의 평생을 거쳐서 신문지상에도 발표된 그의 편지내용에도 보듯이 그는 깜깜한 어둠속에서 이 소명을 행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빛을 도무지 주시지않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외면하고 있는 것같습니다' 그가 그 고통속에 울부짖으면서, 그래서 더욱더 어둠에 사는자들, 자신도 자신을 존귀하게 여기지못하는 절망가운데 그 낙심가운데 있는 사람들의 처지를 이해할 수있게 되었다고, 말하자면 그것이 성육신의 길이더라고 고백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가지신 절망은 여러분이 은혜의 위대함을 더 깨닫게하기위한 하나님의 신비한 인도하심일 것입니다. 저는 보통 얘기하는 식으로 제 신앙이 좋다고 얘기할 순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누는 절망이라는, 또는 죄책감과 자책이라는 측면에서 얘기하자면 저는 신앙이 좋은 사람입니다.
저만큼 십자가의 필요성을 더 깊이 느끼는 사람은 없기때문입니다. 제가 여러분과 나누는 성경의 가장 중요한 내용들, 신앙의 본질된 내용들은 여러분 우리는 절망 가운데서 확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를 절망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과 우리를 향한 그의 뜻을 무시하는 것이다까지 왔다면 우리의 믿음은 기특한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이런 하나님의 위로하심과 예수안에서 찾아오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는 좌절, 죄책, 소외, 무능, 그 모든 것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극복하라 그러지않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로 극복하시고 찾아오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무능과 무력과 절망을 뚫고 들어와서 나를 잡았는데 여러분이
아니라고 우기고 있는 것을 인정하셔야됩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여러분들을 부둥켜 안았는데 여러분은....
이걸 해결하지않는 이상 하나님이 나를 찾아 오실 수없다고 그럽니다.
무슨얘기냐...내가 찾아가지않는 한, 내가 하나님을 만날 수는 없다고 우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보다 크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지않았고, 하나님이 우리를 찾으셨고, 우리가 우리의 죄문제를 해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의 죄문제를 해결하시고 찾아오십니다.
우리가 주를 붙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찾아 내려와 우리를 부둥켜 안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십자가안에서 모든 차별과 한계를 초월한 교제를, 연합을, 사랑을 여기 선포하십니다.
이 부름과 이 초대에 여러분들이 붙잡혀 와있는 것입니다. 이미 와 있는데 여러분들이 거부하는 것이죠.
무엇때문에, 자존심!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없는 신자가 되게하여 주시라....!
여러분이 여러분에게 떳떳한 신앙을 가지다가 하나님을 놓치지 마시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구하여 여러분이 죄인인 것을 고백하십시요.
그리하면 예수그리스도안에서 허락된 하나님의 모든 신비하고 위대한 은혜와 믿음안에 있는 축복들을 누리게 되실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인생을 괴롭히는 모든 자책감에서 여러분을 구할 것입니다.
세상의 위협과 시험앞에서 하나님이 여러분편을 들고 여러분을 품에 안고 계시다는 확신속에서 살아가는 신자의 인생이 되실 것입니다.

기도하십시다. 하나님아버지 은혜를 감사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시고 십자가안에서 우리를 찾아오신 우리 하나님이시니 우리는 더이상 바랄 것이 없습니다.
우리 모두로 이 시간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와 사랑과 그 다함이 없는 열심앞에 항복케 하시옵소서.
우리의 짐을 내려놓게 하시옵소서. 우리가 찾아가려고 발버둥할 것이 아니라 찾아오신 하나님을 예수안에서 영접하게 하시옵소서.
우리의 인생을 하나님손에 맡기게 하시옵소서.
그리하여 아버지를 하나님으로 모신자의 넉넉함과 승리를 누리는 관용과 포용과 인내와 겸손과 확신속에서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옵소서.

 

출처 : 원어사랑연구회
글쓴이 : 주춧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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