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완성 09강(성화의 본질) 박영선 목사 잠깐 저장
로마서 5장에서 환란이 인내를 인내가 연단을 연단이 소망을 이루는 줄 알리라 했을때
이 소망의 결정적인 운명인 이유를 사람이 부끄럽게 아니함을 으로 연결되었던거를 다시 한번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로마서 5장 8절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다가 등장하여 이 구원과 완성이 하나님의 주도권속에 하나님의 시작과 작전과 이루시는 계획속에 포함되어있는것을 확인했습니다.
그다음 히브리서 12장에 징계라는것이 자식 만들기란 것이고 부모가 낳기만 하는 부모는 없다 낳은 이상 기르신다. 부모가 자식을 낳고 기름으로 완성을 책임진다는것으로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을 구원하셨을때 중생만 허락하는게 아니라 중생한 우리를 완성의 자리까지 아버지로서 책임지신다라는 것을 근거로 제시했습니다.
그렇게 따지고 보니 신앙이라는것은 구원을 얻은 자가 하나님께서 허락한 구원 영생을 얻게 된 복에 대한 감사의 반응 책임있는 인생 이라는 이해가 수정되어야할 필요가 있는것입니다.
우리는 칭의 까지를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보고 구원파적으로이해한다면 하나님 우리에게 하시는 일이 끝난것 같은 생각이 드니까
그 이후에는 하나님을 위해서 우리가 산다 라는 보답 헌신 이라는 것으로 성화의 과정을 이해하게되고 그 부분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는대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니까 신앙이 하나님이 시키는일을한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귀 기울인다. 어떻게 하면 더 열심히 쓸모있게 하나님의 사람으로 보답할까 하는 식의 이해가 되서 한국교회에서 보다시피 힘에 넘치는 열심들이 모든 성도들의 중요한 신자된 표이기도하고 확인이기도하고 충성이기도하고 책임이기도 한
그런 형태를 낳았습니다.
물론 한국교회가 자랑해도되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강의를 계속하면서 확인하는 바와 같이 이런 일들이 우리의 책임과 헌신으로 이해될때는
나중에 좀 심각한 부작용을 초래하게 됩니다. 차츰 강의를 계속하면서 확인하겠씁니다.
우리가 확인해야될것은 이 모든일에 하나님께서 뜻과 계획을 가지셨고 이 계획을 이루신다는 이해가 아주 필요합니다.
그레서 지난시간에 요한복음 15장의 포도나무 비유가 나왔습니다. 우리는 포도나무에 붙어있어야하는 신앙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본질은 순종이라고 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위하여 무엇을하는게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뜻에 나를 맞추는것 입니다. 이것이 신앙이고 잘하는것입니다.
그래서 조금 더 일반적으로 얘기하자면 한국 교회에 성도들뿐아니라 목회자들 대부분이 성공하는 목회 능력있는 목회 라는 강박관념을 가지고있는데 사실은 성경에 성공이나 능력이라는 표현이나 판단은 없습니다.
성경은 충성을 요구하고있습니다.
성공과 충성의 차이는 내유혹과 하나님이 시키신 일에 차이가 있는 것이죠.
충성이라고하면 우리는 하나님이 시키시는일을해야합니다. 하나님이 우릴 높였으면 높임받고 낮췄으면 낮춤받는 일을 받는것이 잘하는것인데, 세상적인 시각에서 보는 성공 능력이라는 것이 성경적인 기준을 대체해버렸는데 이렇게 된 이유가
하나님께서 구원을 허락한 백성들을 완성을 위해 인도하고계시고 주도권을 갖고있다는 무지가 구원이후에는 각자의 경쟁적인 충성 경쟁적인 헌신만 있기를 생각하기때문에 이런 부작용이있다고봅니다.
마태복음 7장 22절입니다.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쉽게 얘기해서 우리 한국교회가 많이 관심을 갖고 있는 열심있는 헌신을 신앙의 기준으로 삼으면 여기 이 주님의 가르침은 굉장히 충돌하는 말씀이됩니다.
선지자 노릇하고 귀신을 쫒고 그 이상의 많은 권능을 행한 헌신 우리가 좋아하는 능력에 관한 것도 없을것입니다.
주님께서 분명하게 이 비유로 기독교 신앙이 가장 잘 오해될수 잇는 부분을 지적하고계시는겁니다.
그런데 이 22절다시보시면 많은 사람이 그럴거래요. 이게 무슨 얘기 끝에 나오는 것이냐 하면 15절 이하의 말씀때문에 등정합니다.
15절은 거짓선지자를 얘기합니다. 거짓선지자와 참 선지자를 구별하라 는 말씀으로 시작하고, 거짓 신앙과 참 신앙을 구별하라 로 까지 확대해서 갈수있습니다.
거짓 선지자인지 참 선지자인지 무엇으로아느냐 거짓신앙과 참신앙을 무엇으로 구분하느냐 이때 16절이하에 그의 열매로 그들을 열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해서 열매를 봐라 라고 나옵니다. 우리 주일학교 출신들은 열매 라고 하면 깊게 박힌 선입견이있습니다.
열매를 맺자 해서 열매하면 기본적인 편견이 실천하는자가 되자 듣기만하지말고 실천하는 자가 되자, 우리에게는 익숙한 고정관념입니다. 여기에는 그런 얘기가 아니고 나무를 구별하는 법입니다.
그 나무가 아름다운나무인지 그렇지않은나무인지 뭘보고안다구요? 열매를 보고 압니다. 여기 나오죠 16절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는 포도를 딸수없고 엉겅퀴에서는 무화과를 딸수없다.
포도는 어디서 포도나무에서 무화과는 무화과나무에서만열립니다. 그얘기입니다. 그래서 17절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그러니 19절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아름답지 않은 나무는 찍힌다는겁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않는 열매가 나무의 초점이 없고
앞의 얘기를 연결해서 아셔야되요.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아름다운 일을 하지 않는게 아니고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는 나무가 아닌 나무다 본체의 정체성을 구별하는겁니다.
20절보세요. 이러므로 고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그럼 여기서 말하는 열매로 그들을 안다 라는 이 사실은 얼마나 중요한 신앙의 판별식이냐면 갈라디아서5장으로가보시면, 16절에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쫓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육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우너하는 짓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치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참은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여기 유명한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가 등장하는데 이 열매의 등장은 이 열매를 맺자 라는 단순한 요구가 아닙니다 앞의 우리 마태복음 7장과 연결해보면 이런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나무가 되어야 하는것입니다.
이 열매가 그냥 결과를 만드는것이 아니고 그 결과가 생길수밖에없는 존재가되여야합니다. 이 성령의 9가지 열매의 뜻을 뭐라고하느냐면 23절에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법이 없느니라, 포도나무에 포도가 열리는것을, 막을수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법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가 되었고 그 앞에 21절에 투기와 술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것이요 는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이라는것은 이런 열매가 맺히는 자들은 그들은 아름다운 나무가 아닌 탓입니다. 다시 돌아가 16절에
성령을 쫒아라 육체를 쫒지마라 이 권면은 우리만이 할수없기 떄문에 나타나고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의 백성이면서도 성화의 과정속에서 자신의 정체성과 자신의 마땅한 책임을 놓치곤 하기 때문에 이 권면이 나오는것이죠 우리는 자주 신자로서의 정당한 책임과 자리를 지키지못할떄가있고 잘하고있다고 생각하면서 틀릴수있습니다.
그것은 오늘 우리 마태복음7장에서본것과같이 그날의 많은 사람이 나더러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에 해당하는것입니다. 그래서 이 가르침이 등장하는거죠 여기서하는얘기는이겁니다. 내가 제대로 신앙생활하고있는지, 나는 신앙이라고생각하고있는데 잘못하고있는지, 그것을 무엇으로 아는가 열매가 뭐로맺히는지 봐라 이겁니다.
이건 굉장히 많이틀리는것입니다. 그 이제 우리 목회자 얘기를 자꾸 해서 죄송합니다만 이 프로를 목회자분들이 많이 보기 바래서 이런 예를 하는것이좋을것같습니다. 우리 목회자들 사이에 홀리 보이스라는 말이 있습니다. 거룩한 분석 그것이 대표적으로 기도많이해서 목 쉰 소리를 홀리보이스라고합니다.예전엔 이것이 중요한 영력의 측정기준이였습니다.
저같이 이렇게 보이 소프라노는 쳐주지않았습니다. 목소리가 이 음성이 다 간 옛날 창하는사람들이 폭포를뚫는 소리를가져야 기도많이하신분 실력있는분이되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하려는 얘기는 이겁니다. 그렇게 되면 그 다음에 자기가 할일이 끝났다 생각합니다.
예전엔 유명한 부흥사들이 많았고, 하나님이 자신을 쓴다는 사실 때문에 무례하게 간 분들을 많이 보시지않았습니까, 자기가 선지자노릇하고있기떄문에 틀렸을꺼라 생각안하는거죠. 무례함이 나오면 육체를쫓고있는것입니다.
제가 사사받았던 은사 한분은 고함을 지르는 분이 있었습니다. 그것도 홀리보이스입니다. 높은 고함을 지르고 역정을내시는데 홀리보이스라는것은 소리를 가지고하는것이 아니라 당신이 영적 권위를 갖고있는 것에 대한 위압적인 말투를 얘기하는것입니다.
이것만 홀리보이스가아니고 안들리게 살살 하는 홀리보이스가있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무서운 것은 뭐냐면 옳았을때 우리는 늘 틀립니다. 갈라디아서 5장이 가르치는 바는 뭐냐면 우리를 무얼 하던지 열매를 보아서 육체를쫓는지 열매를쫓는지 확인하라는 얘깁니다.그리고 이얘기는 옳고 그르냐 는 명문의 얘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를 사랑한다 그러면 다 옳고 종교적인형태 기도 전도합시다. 하는것은 다 옳지않습니다.
우리 사랑합시다. 라는 말도 얼마든지 잘못 쓰여질 수 있습니다.
사랑이라는 말로 내가 상대방한테 잘못하고 사과해야하는것을 어물쩡넘어갈려고 사랑할 순 있습니다. 이게 인간의 죄성입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 형태와 명분에 근거하지마시고 무슨 열매가 달려있는지 보라는겁니다.
성령을 쫓는 것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것 다 존재론적이고 인격적인것이죠. 신앙의 내용이라는것은 결단코 능력의 문제가 최우선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런일을 맡기지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능력있는일에 쓰실수는있습니다. 능력을 가지라고한적은 없습니다. 신앙에서 제일 무서운것은 하나님의 필요성이 없어지는것이 제일 무섭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제거되는 것이 제일 무서운 반 기독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도 모르고 사모하게되죠. 왜요? 형태와 명분이 옳았기 떄문에 빌립보서 2장에 지금 설명한 이 문제에 대한 아주 분명한 가르침이나옵니다. 빌립보서 2장 5절이하의말씀을봅시다.
너희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 그리스도의 뭘 본받으라는거에요. 순종을 본받으라는겁니다.
무슨 순종이죠? 하나님만이 계획을 세우시고 완성하시는분입니다. 그니까 예수그리스도를본받아야하는 이유는 자신을 비워 하나님의뜻으로채웠다는겁니다. 우리는 의욕으로갑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을 각오한 의욕으로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 순교 위의 기독교 뿌리를 내렸기 때문에 한국교회는 결사각오에 대해서는 전통이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이 치열하죠. 그 각오가좋습니다. 그게 병이됩니다.
이 의욕이 말이죠. 하나님이 시키신일보다 본인의 의욕이 하나님을 위하는 마음이 앞서서 하나님의 뜻을 그르친다구요. 이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는 무엇때문에 나오는것이냐 1절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에 무슨 위로냐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여
한 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뿐더러 또한 각각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라 나의 기름을 충만케 하라 너희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1절 의 내용을 할때 우리는 꼭 틀리죠 옳으면 꼭 승질부린다니까요.그러찮아요. 교회 안의 잘못된 것을 봤을때 얼마나 펄펄뜁니까 교회안에서 누구의 잘못된 실수를 보거나 결함을봤을때 얼마나 지랄들을합니까, 왜그래요 옳으니까 옳으니까 지랄을떨어도된다는거에요. 여러분 예수님을 보세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니까 다들 와서 놀렸다구요. 죽은자도 살리고 병든자도 고쳤는데 네가 남의생명은 구하면서 너 자신은 못구하냐, 네가 만약 하나님의 자식이다 하면 내려와봐라 했단말이에요.
여러분 우리 성깔대로하면 나같으면 내려가겠어요. 참 견디기 힘든겁니다. 똑같은 인간의 성종을 가진사람으로서, 목사일을하면서 어쨋든 남보단 더 가야되는것아닙니까, 제일힘든게이겁니다. 참기힘든, 유혹이힘든게 아니라 목사님떄문에 참아야할떄 그때 이생각을합니다.
예수님이 하신 답, 아버님 저들을 사하소서 자신들이 하는 일을 모르고있습니다. 이게 그얘깁니다.
한국교회가요. 교회전체가 어떤 실수를했었냐면 구원확신이라는 것으로 실수햇습니다. 구원확신을요 본인이 가진 감격과 한 영혼을 사랑하는 열심때문에 순전히 호의적이고 성경적이고 신앙적인 이유로 아무때나 시도때도없이 예의 상식없이 불심검문을했어요. 구원확신있으십니까?? 어물어물하면 전부 삼청교육대보냈습니다. 왜그랬다구요? 본인들이 가진 구원의 감격때문에 이 감격을 같이 나누고 싶은 순수한 마음때문에 모두의 심령에 상처를줬다는겁니다.
또하나의 사건이 있었죠. 방언이 한국 교회를 몰아부쳤습니다. 방언못하면 사람취급을못받았던 때가 있습니다.
우반과 돌반, 우린 다 돌반이였습니다. 방언 못하면 사람취급을못받았습니다. 지금도 그런데가 아직도있습니다만은, 기도원에들 올라가면 쎈분들은 방언으로기도하고, 그다음은 목청높여서 그리고 죄 많은 무력자들은 머리를 조아리고 속으로기도할수밖에없었습니다.
지금도그렇습니다. 강사목사님께서 나오셔서 아직도 방언 못받은 사람들은 일어나십시오. 날따라해보시오. 그러면 절반은 따라해요. 그리고 목사님이 아직도 못하는 것들은 따라와 호칭이 낮아지죠. 방에 따로 데려가서 시켜보죠. 그래도 못하는 년놈들은 가 그래서 저도 왔습니다.
이런 모든 일들을 비난하고 부정하자는것이아닙니다. 죄라는 것이 얼마나 무섭고 기독교 신앙이 무엇인지 정작 무엇인가를 분별하자는얘깁니다.
옳은 것을 하자 하곤 틀리고있다는것이죠. 그것이 오늘 마태복음7장으로돌아와서 보는 본문의 내용입니다. 이 얼마나 분명한 지적인가 보세요. 능욕적이지 않고 명분적이지 않습니다. 아름다운 나무가되어야합니다.
아름다운 나무는 성령의 열매를 맺는 나무요. 그래서 아름다운 나무입니다. 성품적이고 인격적입니다. 됨됨이의 문제입니다. 여기에 얼마나 맺었느냐는 결과와 업적의 비유는 없습니다.
본체 정체성 본질내용에 관한것이 우선합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하나님이 이 일을 주도하고계십니다.
그러니까 아까 우리 갈라디아서에 성령의 9가지 열매를 볼때 하나 놀라는건 뭐냐면 성령을 쫓는 일이라는 것은 명분과 능력의 일이 아닌 이상 우리에게 그런 마음이 가지는 주를 향한 신앙적인 헌신을 위하여 능력과 조건이 필요하다는 요구를 할수없게되는것입니다.
건강 권세 지식주십시요. 는 해당사항에없다는얘깁니다.
그건 자기자랑을 요구하는것밖에 안됩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이 불편하는, 아파서 못배워서 는 해당사항이 없습니다. 여러분 보고 나서서 유관순이되던가 마틴 루터가 되라는거 아니고 여러분의 일상 속에서 늘 훈련해야합니다.
여러분이 만나는 지지고 볶는 일상말입니다. 애들하고 싸우고 부부사이에 티격태격하고 살기위해 애써야하는 모든 삶의 정황들이 이 훈련에서는 최고의 자리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더 나은 조건 나쁜조건을 주는 불공평한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일을 통해서도 이 훈련을 받기에 공평한 적합한 하나님의 배려하심 인도하심 속에 있습니다.
우리의 욕심은 나서려는데 있죠. 그래서 마태복음 7장의 가르침은 이렇게끝이납니다.24절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메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이 비유로 결론을내립니다.
반석위에 모래위에 지은 집입니다. 둘다 집을 지었다는 것을 놓치지않으셔야합니다. 이문제는 실천의유무가아닙니다. 24절에 있는 바와 같이 누구든지 나의 이말을 듣고 행하는 자 26절에 나의 이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 우리가 실천의 유무를 따진다면 하나는 집을 지었고 하나는 집을 못지은 자 라고 해야맞습니다.
비교해서 보다시피 이 비유는 둘다 집을지었습니다. 문제는 어디다 지었느냐죠. 표어는 나의 이말을 듣고 행한 자와 행치 않는 자는 우리 번역이 틀린게 아니라 나의 이말을 듣고 가 반석입니다. 듣기는들었는데 행치않은 자는 반석이 아니라는거죠. 듣지 않고 행한자라는 것입니다.
듣고 행한것이 아닌, 그의 행함이 듣고 위에 있지 않은 행함, 그래서 모래위에지은거죠. 그래서 이 비유는 실천의 유무가 아닙니다. 근거의 유무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전체로 모든 주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주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은 하나님많이 권세를가지고있습니다. 그 권세는 힘만을 의미하지않습니다.
우리 인간에게 필요한 생명 내용, 가치 질서 모든 필요가 하나님께만 있다는 확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열심이라는 것이 우리가 가진 어떤 정서 진실 이런것을 하나님께 돌림으로 하나님꼐 영광이 된다 생각하고 신자의 당연한책임이라 생각하고 책임있는 내용이라생각합니다.
그렇지 않고 반석위에 지어야한다는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한 요한복음 15장에 포도나무 비유의 중요성은 가지는 줄기에 붙어있지 않는 한 말라버리는것입니다.
줄기로부터 생명이 전달되고 그 생명의 결실이 나무가지 끝에 걸리는것입니다. 가지가 줄기를 위하여 돌아다녀 열매를 사모으지 않습니다. 왜 여기에 감동이 있냐구요? 하나님은 우리보고 꺼내놓으라 하는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필요 요 복이요 영광입니다.
왜 기독교 신앙을 복음이라하는가, 하나님이 신적인 하나님만이 가지신 내용과 가치와 그 경지를 우리에게 채워 우리의 구원을 창조를 완성하시는것 이 기독교신앙입니다.
모든 감사와 감격 활동함이나 의욕이나 헌신이 있다 할지라도 이것은 모두 하나님의 것을 알게된 자의 소원이요 간절함의 표현이지 하나님이 이렇게 하셨으니 나도 이렇게 무엇인가 보답해야한다 이런건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드릴 것을 스스로 만들지를 못합니다.
지난 시간과 밀접한관계를가지는데요. 우리는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 순종이라는 것을 확인할때 사울의 실패를 예를들었었습니다. 멸하라고 하나님께서 시킨 아말렉과 그 제물들 중에 하나님께 바치겠다는 이름으로 소와 양을 남겨왔다가 폐위된다니까요. 왜요 하나님이 쓸모없다고 한것으로 하나님께 받치겠다고 들고왔다니까요.
우리 모두가 그 실수를하는것입니다. 하나님이 쓸모없다 라는것을 가치있다고 우기는거죠. 자기 자신에대해서까지말입니다. 우리 인생의 신자된 복은 다 어딨느냐 하나님이 주시는것으로 채우고 누리는 데에 그 복이 있습니다.
가장 큰 신자된 책임과 헌신이있다면 뭐냐,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신자의 복된 것과 영광을 제대로 드러내는 여러분의 의욕을 쏟아내 오염시키지않는것 이게 신자된 자의 올바른 자세가 있습니다. 우리모두의 행복이며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유일한 일입니다.
우리를 보는 모든 세상 사람들이 우리의 증언과 나타남이 세상에 속한 것이지 않음을 아는 확실한 구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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