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에서 영원까지! (시 23:6)
시23:6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추석에 시댁에 간 며느리가 시어머니로부터 가장 듣기 좋은 말이“준비하느라 수고했다”,“어서 친정에 가야지”란 말이랍니다. 반면에 가장 듣기 싫은 말은“더 있다 가라.”는 말입니다. 시어머니들, 며느리 빨리 보내주세요!
해마다 명절 직후에 이혼이 급증한다는 뉴스를 보았습니다. 명절에도 24 시간 예수님을 바라보기 바랍니다.
시편 23편은 1절도 은혜롭지만 다음 절로 갈수록 더 은혜롭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시편에서 가장 은혜로운 구절을 꼽으라면 6절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6절 말씀이 가장 은혜로운 것은 예수 믿고 우리가 받은 축복을 가장 잘 표현해 주는 말씀이라고 생각됩니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존재 의미가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더 이상 두렵고 먼 하나님이 아니라 항상 선하고 인자하신 하나님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저는 외모가 선하게 생겨서 곤란할 때가 많습니다. 본의 아니게 다른 사람을 속이는 결과가 되기 때문입니다. 교회 이름 처럼 선한 목사라는 말을 들을 때 정말 민망합니다. 저의 두 딸에게 아빠가 무서우냐 엄마가 무서우냐 물으면 아빠라고 대답합니다. 혼자 살았다면 몰랐을 것입니다. 목회하면서 저에게도 한 성질이 있음을 비로서 알았습니다.
사랑한다는 딸에게도 항상 인자하고 선하게만 대하기 어려운데, 전능하고 완벽하신 하나님이 평생 선하시고 인자하시다는 것은 정말 황홀한 일인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일어난 기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평생 선하시고 인자하시다!’ 는 말이 전혀 실감나지 않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이런 이들은 대부분은 현재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들입니다. 하나님이 정말 선하고 인자하시다면 네게 왜 이런 어려운 일들이 생기겠느냐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자기가 처한 형편에 따라 판단하는 것이 어린아이 믿음입니다. 형편이 좋으면 하나님도 좋으신 하나님이시고 형편이 어려우면 하나님을 원망하고 낙심하고 의심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언제나 형편이 좋았기에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라고 고백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윗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수없이 지나다녔던 사람입니다. 그런 다윗이 하나님을 평생 선하고 인자하셨다고 고백한 것은 하나님이 항상 함께 하심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다윗은 형편을 보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판단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었던 것입니다.
요셉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죽을 구덩이에 빠지고 종으로 팔려가고 감옥에 들어가는 기가 막힌 어려움을 수없이 겪었지만 요셉은 하나님의 선하고 인자하심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말할 수 없는 어려움도 견뎌냈고 어떤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하였던 것입니다. 요셉이 이렇게 믿었던 것은 하나님이 항상 함께 하심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요셉만 아니라 주위 사람들도 다 알았습니다.
창 39:2-3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우리도 하나님을 이렇게 믿어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하나님이 선하고 인자하신 하나님이 되었다는 증거는 좋은 형편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셨고, 평생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마 28:20 “…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히 13:5 “…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여러분은 하나님이 평생 여러분과 함께 하시고 결코 떠나지 않으시는 증거를 갖고 계십니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십니까? 예수님을 주님이라 믿고 고백하십니까? 말씀을 듣고 찬양을 들을 때, 은혜롭다고 느끼십니까? 용서하고 사랑하리라는 마음이 있습니까? 하나님을 위한 소원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성령님이 마음 안에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환경과 형편은 달라졌을지 몰라도 하나님은 변하지 않으셨습니다. 여러분을 외면하지도, 떠나지도, 버리지도 않으셨습니다.
어느 토요일 지난 주 세례를 받았던 청년이 술이 잔뜩 취하여 찾아온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괴롭게 고백했습니다.“목사님, 저는 예수 헛 믿었어요, 세례 받은 것도 다 가짜예요.”그 청년은 세례 받고 회식 자리에는 안 가겠다고 결심했지만, 그 날 회식에 참석했다가 2차 3차에 따라가면서 너무나 부끄러운 죄를 지었다는 것입니다. 집으로 가면서 교회 옆을 지나는데, 깊은 좌절에 빠져 울다가, 제 방에 불이 켜져 있어 왔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 청년에게 에베소서 4장 30절 말씀을 읽으라고 했습니다.
엡 4: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오늘 죄 지은 일로 인하여 왜 너는 이렇게 괴로워 하니? 네가 정말 예수님을 믿은 것이 아니고 성령님이 너를 떠났다면 이처럼 괴롭겠니? 네가 괴로운 것은 바로 네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 근심하시고 계시다는 증거잖아.”그 청년은 성경책을 끌어안고 통곡하며 울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확신을 회복하였습니다.
우리는 성령님께서 정말 우리 안에 계신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거기서 확신이 오는 것입니다. ‘주님은 다 알고 계시고 함께 하시고, 지켜주시고 계시구나!’
이 기적이 예수님 안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6절에서 더 놀라운 축복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오늘 말씀에서 “평생”과 “영원”이라고 언급한 것을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평생 나를 따르리니” “영원히 거하리로다”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닙니다. “여호와의 집”이 있습니다. 천국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 사는 동안 나에게 선하시고 인자하신 하나님이 되신 것도 엄청난 축복입니다. 그러나 그 뿐 아니라 영원히 계속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자나갈 때도 있지만 여호와의 집, 천국에서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 일도 없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선하시고 인자하심만 영원히 누리는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에게 “영원히 거할 여호와의 집” 이 예비되어 있음을 분명히 안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삶을 산 것입니다. 다윗은 아들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아들과 싸우지 않고 왕궁을 다 내버려 두고 왕좌 다 물려 주고 피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다윗은 영원히 살 여호와의 집을 보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왕좌를 두고 아들과 싸우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영원한 천국에 대한 믿음을 가지게 되면, 어려운 일들 때문에 하나님이 믿어지니 안 믿어지니 하던 사람이 오히려 즐거이 고난을 감당하는 자가 됩니다.
지긋지긋하게 느껴지던 집안이 감사하게 됩니다. 지긋지긋하던 사람이 사랑스럽게 여겨지게 됩니다. 사명의 눈이 뜨인 것입니다.
여호와의 집이 믿어지면 교회가 새롭게 보입니다. 교회가 좋아집니다.
지난 8월 말로 교회 안에 작지만 큰 변화가 생겼습니다. 용역업체에 경비와 청소 일을 맡겼던 것을 해약하고, 경비와 청소 일이 전 교인들에게 개방된 것입니다. 저에겐 큰 숙원이었습니다. 우리가 외부 용역업체에 경비와 청소를 맡길 수 밖에 없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교회 건물은 8천여 평 큰 건물인데, 몇 백명의 교인으로는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출석 교인만 5천 명이 넘어서는 지금도 용역업체에 맡기는 것은 하나님 앞에 변명의 여지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청소와 경비, 천국 소망을 가진 자에게는 결코 부담이 아닙니다, 너무나 기쁜 일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는 고백이 남의 일 처럼 들리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천국은 믿지만 그것 때문에 세상에서 겪는 어떤 어려움도 기쁨으로 변하지 않는 이들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세상에서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을 실제로 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예수님이 왕되신 삶을 살아 보면 누구나 천국의 삶을 사모하게 마련입니다.
여기서도 이렇게 좋은데, 천국에서는 얼마나 좋을까?
많은 성도들이 주님과 친밀히 살아보지 못하였기에 하나님과 영원히 산다는 것이 좋다는 느낌이 안드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이름 하나 알고 살다가 나이가 들어 만났다면, 반갑기는 하겠지만 친밀함을 느낄 수 있겠습니까? 선하고 인자하심을 느낄 수 있겠습니까? 나면서부터 평생 함께 하면서 함께 웃고 함께 울고 사랑하며 살던 아버지, 나이 들면 말없이도 마음을 사로 알게 되지 않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이렇게 믿어야 합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항상 목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왜 나에게 목자가 되어주시지 않으시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정말 목자로 믿지 않으니 예수님께서 목자가 되실 수 없었던 것입니다.
지난 목회자 기도모임에서 한 목사님이 고백하셨습니다. 교회 주변이 재개발이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근처에 땅을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교회 건축 헌금을 하며 새 예배당은 설계까지 하였습니다. 새 대지 구입하면서 은행 융자를 받았답니다. 그런데 얼마 전 개발 계획이 백지화되었다는 발표가 있었습니다. 교회는 빚더미 위에 앉게 되었고 그로 인해 마음이 분주하였습니다. 기도회에 참석하였지만 예수님만 바라보라!는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답니다. 목회자 기도모임에 늦게 도착하였고 마음은 막막하였답니다. 기도 중에 시장에서 딸을 잃고 헤매다가 울며 헤매는 딸을 찾아 야단치는 자신을 보았답니다, 자기가 그렇게 말하고 있더랍니다.“아빠를 잃었으면 가만 있어야지, 왜 뛰어 다녔니? 아빠가 찾아 올텐데.”주님은 물으시는 것 같았답니다.‘넌 왜 뛰어다니고 있니? 나만 바라보고 있으면 되는데.’너무 기쁘더랍니다. 분명한 해답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영성일기 부담감이 컸다. 제가 하겠습니다.
여러분, 시편 23편이 나의 고백, 나의 노래가 되기 원한다면 “여호와는 나의 목자이시니” 하는 고백을 실제로 하며 살아야 합니다. 늘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정말 믿어야 합니다.
롬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고전 10: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목자인 예수님을 죽어라 붙잡고 살면 됩니다!
그러면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노래하며 간증하며 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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