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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신학에 대하여 2

by 【고동엽】 2021. 12. 4.
2022.02.26
종교개혁 신학에 대하여 2
존 칼뱅 신학(1509-1564)
종교개혁자들 삶에 대한 이해에서
루터의 새사람이란 공포와 두려움으로부터 안정된 사람이고 칼뱅의 새사람이란 도덕으로 경건한 사람 입니다.
성서 바울의 새사람이란 평화를 일구는 사람(화목케하는 직책) 입니다.(고후5:17 - 21)
특히 칼뱅에게 세계란 인간이 하늘에서 추방된 존재고 육체는 혼의 쓸모없는 감옥 입니다. 예수께서는 세상이 잠시 지나가는 헛된 삶이 아니라 생명과 자유 평화를 통해서 삶의 축제가 이루어지기를 바라십니다.
칼뱅은 예수보다 플라톤에 더 가깝습니다.(폴 틸리히)
특히 종교개혁자들의 죄인(악인)에 대한 태도가 죄인을 용납하는 예수보다 죄인을 차별하고 배제하는 플라톤을 따른다는 말 입니다.
소명 신학
소명이 오늘날 하나님 일하는 직업으로 인식하는 것은 칼뱅 오해로부터 입니다.
바울은 할례를 안 받았든지 노예이든지 부름받은 현재 상태 그대로 살아가라고 합니다.(고전7:17 - 22)
여기서 부름인 '크레시스'는 소명하다 혹은 소환하다인 동사 '카레오'에서 유래합니다.
'크레시스'를 루터가 자기 번역 성서에서 직업(베르프)으로 번역했고 칼뱅이 이것을 따랐습니다.
바울이 부름받은 상태 대로 살아라를 칼뱅과 그 후예 청교도들은 전혀 새로운 의미를 부여해 소명을 하나님 일하는 직업으로 이해해서 오늘에 이르렀습니다.(1)
하나님 일한다는 사람들이 세상으로부터 조롱받는 일이 다반사 입니다. 세상이 하나님 의를 몰라서가 아니라 하나님 일한다면서 악이 발생하기 때문 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하나님 일하는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기도 합니다.
예수께서 체포되기 직전에 모든 제자들이 배반할 것임을 말씀합니다. 그러면서 인용한 성서 입니다.(마태26:31)
(스가랴 13장)
7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칼아 깨어서 내 목자, 내 짝 된 자를 치라 목자를 치면 양이 흩어지려니와 작은 자들 위에는 내가 내 손을 드리우리라
예수께서 하나님 일하는 일꾼을 칼로 친다는 성서를 인용해서 제자들이 배반할 거라고 말씀합니다.
제자들이 하나님 일한다며 예수그리스도를 따라다니면서 무엇을 몰랐을까요?
위 성서 말씀에서 하나님은 자기 일꾼을 치지만 하나님은 작은 자들과 함께하신다고 합니다.
하나님 일한다며 작은 자들과 함께하지 않는 일꾼을 칼로 친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 일이란 작은 자 약한 자 가난한 사람 죄인(악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 사역에 참여하는 자이며 이러한 일을 하지 않고 하나님 일한다는 사람은 예수그리스도를 배반하는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 일한다면서 의료 교육 언론 사회봉사 수익 사업하며 불의하고 부패하며 특히 힘있는 기득세력과 함께 하면서 힘 없는 약한 자 가난한 사람을 보호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오늘날 기독교가 사회로부터 버림받았습니다.
하나님 일한다는 그 현실에 하나님 의보다 인간 의가 더 발현되었기 때문 입니다.
하나님 일하는 특별한 직업이 따로 없습니다. 대한민국 실정법이 허용하는 모든 직업에서, 삶의 현실에서 하나님 의를 이루어가는 삶이 소명 입니다.
예정론 신학
칼뱅은 그리스 철학 섭리론을 적극 수용하여 신 작정론과 예정론 교리를 정립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은 일어날 모든 일을 아시며 그의 목적에 맞게 이런 일들이 발생하도록 하시며 그의 목적대로 되도록 인도하신다고 합니다.
구원받을 자가 예정되어 있고 구원받을 자 저주받을 자가 따로 예정되어 있습니다.(이중예정)
이스라엘 예언자들은 그리스 섭리 철학이나 칼뱅과 같이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역사가 일치한다고 가르치지 않았으며 아래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위 하나님 뜻이 반영된 것이라고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역사는 하나님께서 도전받는 장이며 정의가 패배를 맛보는 곳입니다. 다만 역사에 하나님 뜻이 계시되는 순간들이 있고 때로는 뒤로 물러서기도 하며 아주 조금씩 하나님 의가 실현되는 곳입니다.(2)
하나님은 약속한 복을 뒤집기도 합니다.
(예레미야 18장)
7 내가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뽑거나 부수거나 멸하려 할 때에
8 만일 내가 말한 그 민족이 그의 악에서 돌이키면 내가 그에게 내리기로 생각하였던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겠고
9 내가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건설하거나 심으려 할 때에
10 만일 그들이 나 보기에 악한 것을 행하여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하면 내가 그에게 유익하게 하리라고 한 복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리라
칼뱅 예정론은 근대 이전 기계론 세계관 입니다. 오늘날은 양자역학 세계관 입니다.
양자역학에서 빛을 포함한 모든 최소 물질은 입자와 파동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동안은 물질이 입자로만 되었는 줄 알았는데 움직이는 파동과 함께 있음이 밝혀졌습니다.
이해하기 어렵지만 물질이 필연으로 존재하지 않고 확률로 존재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해가 움직이지 않고 지구가 움직인다는 사실을 밝힌 코페르니쿠스 세계관 변혁보다도 더 엄청난 세계에 대한 인식 변화 입니다.
실은 진화론보다 더 크게 기독교에 충격을 준 사건인데 기독교가 잠잠한 것이 의아합니다.
하이젠베르크 불확정성 원리에 의하면 어떤 물질에서 입자 위치와 파동 운동량을 동시에 정확하게 측정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것을 거시 세계에 적용하면 세계는 필연과 우연으로 움직 입니다. 여기서 우연은 제 멋대로 움직인다는 뜻이 아니고 하나님 섭리 가운데 이지만 하나님께서 자유를 허락하신 가운데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 일도 일어난다는 의미 입니다.(칼 융)
아인슈타인은 양자역학 세계관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신이 모르는 우연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성서는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 일이 일어나기 때문에 하나님도 가슴아파하며 기도하신다고 합니다.
(로마서 8장)
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하나님께서 우주만물에 자유를 주셔서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 일이 발생합니다.
하나님은 순종하는 인간으로서 믿음을 원하지 않으시고 자유와 책임있는 인간으로서 믿음을 원하십니다.
자유는 우리에게 그렇게 소중합니다.
주권 신학
칼뱅은 하나님 절대주권을 세운 신학자 입니다.
칼뱅 주권 신학은 인간 가치체계보다 예수그리스도 계시가 우선한다는 주권 신학이 아닙니다. 지배하고 통치하는 신 주권을 강조하는 신학 입니다.
종교개혁 전에는 스콜라신학에 의해 교회에 권위가 있었습니다. 종교개혁에 의해 권위가 성서로 옮기게 되었는데 하나님 주권 신학에 의해 신 권위가 성서의 역사 증언에(예수 사역과 가르침) 대한 권위를 덮어버렸습니다. 주권 신학에서 신이 예수그리스도가 아니라 기독교 초기부터 발달한 그리스 철학으로 설명된 하나님이기 때문 입니다.(3)
다시 말씀드리지만 주권 신학에서는 강하고 힘센 신을 닮아 가기를 원합니다.
칼뱅에게서 하나님 주권이란 하나님 자신이 독자 비밀스런 계획에 따라 만물을 통제하는 것을 말합니다.(기독교강요 3, 23, 7)
이러한 입장은 모든 성공이 하나님 축복이고 재난과 역경은 하나님 저주라는 의미 입니다.(기독교강요 1, 16, 4, 6, 8)(4)
절대 무한 불변 전지 전능 완전한 선이라는 신 개념은 플라톤 신 범주 입니다.
신이 모든 사항을 주관한다는 섭리(providence) 개념이 발생한 그리스에서도 운명에는 섭리가 미치지 않는 구석이 있음을 인정했습니다.(5)
칼뱅은 하나님 주권 신학을 통해 하나님이 전지전능한 힘을 행사하는 절대 섭리 신학을 세웠습니다.
힘으로 통치하는 신플라톤주의 신 개념이 아우구스티누스 토마스 아퀴나스 루터 칼뱅과 현재 그들을 따르는 서구 신학 정통주의 입장 입니다.(6)
종교 발생이래로 사제들은 신 주권을 강조하며 권력자와 결탁하여 평화를 준다는 빌미로 민중을 억압했습니다.
하나님 주권 신학이란 결국 하나님 대리자 연하는 성직자 자신 권한을 높이는 것으로 귀결됩니다. 칼뱅 자신이 막강한 권한을 행사했습니다.
이것은 예수그리스도와는 다르게 힘으로 평화를 얻으려는 사상 입니다.
장이머우 감독 영화 영웅에서 이연걸은 각고 노력 끝에 자기 부족을 몰살한 진시황을 암살하기 직전에 섰습니다. 진시황은 자기가 죽으면 다시 전란이 일어나서 세상 평화가 깨진다고 말합니다. 이연걸은 세상 평화를 위해 암살을 포기하고 철수합니다.
인류는 힘으로 평화를 구해왔습니다.
법 사상가 칼 슈미트(1888 - 1985)는 정치 권력의 정당성을 유일신론(monotheism)에서 찾습니다.
그는 권력 주권을 예외사태(the state of exceptionality)로 규정합니다. 쉽게 말해서 주권자는 신과 같이 모든 권한을 갖는다는 말 입니다.
강력한 통제력이 있어야 평화를 얻는다는 뜻 입니다. 그래서 그는 히틀러 권력에 정당성을 부여했습니다.
예수그리스도는 힘으로 평화를 구하지 않습니다.
기독교 신인 예수그리스도가 어떤분인가 성서가 증언합니다.
(이사야 53장)
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성서는 우리에게 약한 신에게서 우리가 평화를 얻는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신이 자신의 힘을 비우고(케노시스) 연약하고 실패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보인 까닭은,
힘으로 얻는 평화는 거짓 평화임을 알리기 위함 입니다.
예수평화는 강자가 자신 힘을 내려놓을 때 이루어지는 평화 입니다. 예수평화는 약자가 강자와 동등한 권리가 보장될 때 이루어지는 평화 입니다.
이러한 예수평화는 가정 직장 사회 전반에서 필요로 합니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평화를 방해하는 기득 세력인 서기관과 제사장 그리고 바리새인들에게 강력하게 저항하십니다.
칼뱅 주권 신학에는
약한 신 그리고 힘을 포기한 신을 닮아감으로서 얻는 평화는 없습니다.
성공 번영은 하나님 축복이고 재난 역경 실패는 하나님 저주라는 칼뱅 신학은
고대 영지주의 개혁주의(복음주의) 자본주의가 추구하는 바와 똑같고 예수그리스도와는 상관이 1 도 없습니다.
2 세기 첫 신학자 오리게네스 5 세기 가톨릭과 개신교 신학 주춧돌을 놓은 아우구스티누스 가톨릭 신학이 된 11 세기 스콜라신학 모두는 예수그리스도가 신학 중심이 아닙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세계관이 이들 신학 중심이었습니다. 종교개혁 자들도 예수그리스도 중심으로 개혁하지 않았습니다.
종교개혁 자들은 예수그리스도를 따르지 않고 초기에 계발된 그리스 신관을 따랐습니다.
이것이 성서가 그리스도인 믿음 중심에 있지 못한 원인이고 이것이 오늘날 기독교가 사회로부터 버림받게 된 원인 입니다.
믿음장을 마칩니다. 다음회부터 지난해 초기에 두서 없이 산발로 썼던 글을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등 몇 가지 주제를 설정하고 다시 보충하여 정리합니다.
여러분과 가정에 평화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1. 조르즈 아감벤 남겨진 시간 강승훈 코나투스 2008, 40 - 45p
2. 아브라함 J 헤셀 예언자들 이현주 삼인 2020, 275p
3. 볼프하르트 판넨베르그 판넨베르그 조직신학 3 신준호 새물결플러스 2019, 245p
4. 데이빗 그리핀 과정신정론 이세형 이문출판사 대구시 2007, 139p
5. 아브라함 J 헤셀 377p
6. 존 쿠퍼 철학자들의 신과 성서의 하나님 김재영 새물결플러스 서울 2011, 53-5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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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신학에 대하여 2
존 칼뱅 신학(1509-1564)
종교개혁자들 삶에 대한 이해에서
루터의 새사람이란 공포와 두려움으로부터 안정된 사람이고 칼뱅의 새사람이란 도덕으로 경건한 사람 입니다.
성서 바울의 새사람이란 평화를 일구는 사람(화목케하는 직책) 입니다.(고후5:17 - 21)
특히 칼뱅에게 세계란 인간이 하늘에서 추방된 존재고 육체는 혼의 쓸모없는 감옥 입니다. 예수께서는 세상이 잠시 지나가는 헛된 삶이 아니라 생명과 자유 평화를 통해서 삶의 축제가 이루어지기를 바라십니다.
칼뱅은 예수보다 플라톤에 더 가깝습니다.(폴 틸리히)
특히 종교개혁자들의 죄인(악인)에 대한 태도가 죄인을 용납하는 예수보다 죄인을 차별하고 배제하는 플라톤을 따른다는 말 입니다.
소명 신학
소명이 오늘날 하나님 일하는 직업으로 인식하는 것은 칼뱅 오해로부터 입니다.
바울은 할례를 안 받았든지 노예이든지 부름받은 현재 상태 그대로 살아가라고 합니다.(고전7:17 - 22)
여기서 부름인 '크레시스'는 소명하다 혹은 소환하다인 동사 '카레오'에서 유래합니다.
'크레시스'를 루터가 자기 번역 성서에서 직업(베르프)으로 번역했고 칼뱅이 이것을 따랐습니다.
바울이 부름받은 상태 대로 살아라를 칼뱅과 그 후예 청교도들은 전혀 새로운 의미를 부여해 소명을 하나님 일하는 직업으로 이해해서 오늘에 이르렀습니다.(1)
하나님 일한다는 사람들이 세상으로부터 조롱받는 일이 다반사 입니다. 세상이 하나님 의를 몰라서가 아니라 하나님 일한다면서 악이 발생하기 때문 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하나님 일하는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기도 합니다.
예수께서 체포되기 직전에 모든 제자들이 배반할 것임을 말씀합니다. 그러면서 인용한 성서 입니다.(마태26:31)
(스가랴 13장)
7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칼아 깨어서 내 목자, 내 짝 된 자를 치라 목자를 치면 양이 흩어지려니와 작은 자들 위에는 내가 내 손을 드리우리라
예수께서 하나님 일하는 일꾼을 칼로 친다는 성서를 인용해서 제자들이 배반할 거라고 말씀합니다.
제자들이 하나님 일한다며 예수그리스도를 따라다니면서 무엇을 몰랐을까요?
위 성서 말씀에서 하나님은 자기 일꾼을 치지만 하나님은 작은 자들과 함께하신다고 합니다.
하나님 일한다며 작은 자들과 함께하지 않는 일꾼을 칼로 친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 일이란 작은 자 약한 자 가난한 사람 죄인(악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 사역에 참여하는 자이며 이러한 일을 하지 않고 하나님 일한다는 사람은 예수그리스도를 배반하는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 일한다면서 의료 교육 언론 사회봉사 수익 사업하며 불의하고 부패하며 특히 힘있는 기득세력과 함께 하면서 힘 없는 약한 자 가난한 사람을 보호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오늘날 기독교가 사회로부터 버림받았습니다.
하나님 일한다는 그 현실에 하나님 의보다 인간 의가 더 발현되었기 때문 입니다.
하나님 일하는 특별한 직업이 따로 없습니다. 대한민국 실정법이 허용하는 모든 직업에서, 삶의 현실에서 하나님 의를 이루어가는 삶이 소명 입니다.
예정론 신학
칼뱅은 그리스 철학 섭리론을 적극 수용하여 신 작정론과 예정론 교리를 정립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은 일어날 모든 일을 아시며 그의 목적에 맞게 이런 일들이 발생하도록 하시며 그의 목적대로 되도록 인도하신다고 합니다.
구원받을 자가 예정되어 있고 구원받을 자 저주받을 자가 따로 예정되어 있습니다.(이중예정)
이스라엘 예언자들은 그리스 섭리 철학이나 칼뱅과 같이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역사가 일치한다고 가르치지 않았으며 아래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위 하나님 뜻이 반영된 것이라고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역사는 하나님께서 도전받는 장이며 정의가 패배를 맛보는 곳입니다. 다만 역사에 하나님 뜻이 계시되는 순간들이 있고 때로는 뒤로 물러서기도 하며 아주 조금씩 하나님 의가 실현되는 곳입니다.(2)
하나님은 약속한 복을 뒤집기도 합니다.
(예레미야 18장)
7 내가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뽑거나 부수거나 멸하려 할 때에
8 만일 내가 말한 그 민족이 그의 악에서 돌이키면 내가 그에게 내리기로 생각하였던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겠고
9 내가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건설하거나 심으려 할 때에
10 만일 그들이 나 보기에 악한 것을 행하여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하면 내가 그에게 유익하게 하리라고 한 복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리라
칼뱅 예정론은 근대 이전 기계론 세계관 입니다. 오늘날은 양자역학 세계관 입니다.
양자역학에서 빛을 포함한 모든 최소 물질은 입자와 파동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동안은 물질이 입자로만 되었는 줄 알았는데 움직이는 파동과 함께 있음이 밝혀졌습니다.
이해하기 어렵지만 물질이 필연으로 존재하지 않고 확률로 존재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해가 움직이지 않고 지구가 움직인다는 사실을 밝힌 코페르니쿠스 세계관 변혁보다도 더 엄청난 세계에 대한 인식 변화 입니다.
실은 진화론보다 더 크게 기독교에 충격을 준 사건인데 기독교가 잠잠한 것이 의아합니다.
하이젠베르크 불확정성 원리에 의하면 어떤 물질에서 입자 위치와 파동 운동량을 동시에 정확하게 측정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것을 거시 세계에 적용하면 세계는 필연과 우연으로 움직 입니다. 여기서 우연은 제 멋대로 움직인다는 뜻이 아니고 하나님 섭리 가운데 이지만 하나님께서 자유를 허락하신 가운데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 일도 일어난다는 의미 입니다.(칼 융)
아인슈타인은 양자역학 세계관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신이 모르는 우연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성서는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 일이 일어나기 때문에 하나님도 가슴아파하며 기도하신다고 합니다.
(로마서 8장)
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하나님께서 우주만물에 자유를 주셔서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 일이 발생합니다.
하나님은 순종하는 인간으로서 믿음을 원하지 않으시고 자유와 책임있는 인간으로서 믿음을 원하십니다.
자유는 우리에게 그렇게 소중합니다.
주권 신학
칼뱅은 하나님 절대주권을 세운 신학자 입니다.
칼뱅 주권 신학은 인간 가치체계보다 예수그리스도 계시가 우선한다는 주권 신학이 아닙니다. 지배하고 통치하는 신 주권을 강조하는 신학 입니다.
종교개혁 전에는 스콜라신학에 의해 교회에 권위가 있었습니다. 종교개혁에 의해 권위가 성서로 옮기게 되었는데 하나님 주권 신학에 의해 신 권위가 성서의 역사 증언에(예수 사역과 가르침) 대한 권위를 덮어버렸습니다. 주권 신학에서 신이 예수그리스도가 아니라 기독교 초기부터 발달한 그리스 철학으로 설명된 하나님이기 때문 입니다.(3)
다시 말씀드리지만 주권 신학에서는 강하고 힘센 신을 닮아 가기를 원합니다.
칼뱅에게서 하나님 주권이란 하나님 자신이 독자 비밀스런 계획에 따라 만물을 통제하는 것을 말합니다.(기독교강요 3, 23, 7)
이러한 입장은 모든 성공이 하나님 축복이고 재난과 역경은 하나님 저주라는 의미 입니다.(기독교강요 1, 16, 4, 6, 8)(4)
절대 무한 불변 전지 전능 완전한 선이라는 신 개념은 플라톤 신 범주 입니다.
신이 모든 사항을 주관한다는 섭리(providence) 개념이 발생한 그리스에서도 운명에는 섭리가 미치지 않는 구석이 있음을 인정했습니다.(5)
칼뱅은 하나님 주권 신학을 통해 하나님이 전지전능한 힘을 행사하는 절대 섭리 신학을 세웠습니다.
힘으로 통치하는 신플라톤주의 신 개념이 아우구스티누스 토마스 아퀴나스 루터 칼뱅과 현재 그들을 따르는 서구 신학 정통주의 입장 입니다.(6)
종교 발생이래로 사제들은 신 주권을 강조하며 권력자와 결탁하여 평화를 준다는 빌미로 민중을 억압했습니다.
하나님 주권 신학이란 결국 하나님 대리자 연하는 성직자 자신 권한을 높이는 것으로 귀결됩니다. 칼뱅 자신이 막강한 권한을 행사했습니다.
이것은 예수그리스도와는 다르게 힘으로 평화를 얻으려는 사상 입니다.
장이머우 감독 영화 영웅에서 이연걸은 각고 노력 끝에 자기 부족을 몰살한 진시황을 암살하기 직전에 섰습니다. 진시황은 자기가 죽으면 다시 전란이 일어나서 세상 평화가 깨진다고 말합니다. 이연걸은 세상 평화를 위해 암살을 포기하고 철수합니다.
인류는 힘으로 평화를 구해왔습니다.
법 사상가 칼 슈미트(1888 - 1985)는 정치 권력의 정당성을 유일신론(monotheism)에서 찾습니다.
그는 권력 주권을 예외사태(the state of exceptionality)로 규정합니다. 쉽게 말해서 주권자는 신과 같이 모든 권한을 갖는다는 말 입니다.
강력한 통제력이 있어야 평화를 얻는다는 뜻 입니다. 그래서 그는 히틀러 권력에 정당성을 부여했습니다.
예수그리스도는 힘으로 평화를 구하지 않습니다.
기독교 신인 예수그리스도가 어떤분인가 성서가 증언합니다.
(이사야 53장)
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성서는 우리에게 약한 신에게서 우리가 평화를 얻는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신이 자신의 힘을 비우고(케노시스) 연약하고 실패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보인 까닭은,
힘으로 얻는 평화는 거짓 평화임을 알리기 위함 입니다.
예수평화는 강자가 자신 힘을 내려놓을 때 이루어지는 평화 입니다. 예수평화는 약자가 강자와 동등한 권리가 보장될 때 이루어지는 평화 입니다.
이러한 예수평화는 가정 직장 사회 전반에서 필요로 합니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평화를 방해하는 기득 세력인 서기관과 제사장 그리고 바리새인들에게 강력하게 저항하십니다.
칼뱅 주권 신학에는
약한 신 그리고 힘을 포기한 신을 닮아감으로서 얻는 평화는 없습니다.
성공 번영은 하나님 축복이고 재난 역경 실패는 하나님 저주라는 칼뱅 신학은
고대 영지주의 개혁주의(복음주의) 자본주의가 추구하는 바와 똑같고 예수그리스도와는 상관이 1 도 없습니다.
2 세기 첫 신학자 오리게네스 5 세기 가톨릭과 개신교 신학 주춧돌을 놓은 아우구스티누스 가톨릭 신학이 된 11 세기 스콜라신학 모두는 예수그리스도가 신학 중심이 아닙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세계관이 이들 신학 중심이었습니다. 종교개혁 자들도 예수그리스도 중심으로 개혁하지 않았습니다.
종교개혁 자들은 예수그리스도를 따르지 않고 초기에 계발된 그리스 신관을 따랐습니다.
이것이 성서가 그리스도인 믿음 중심에 있지 못한 원인이고 이것이 오늘날 기독교가 사회로부터 버림받게 된 원인 입니다.
믿음장을 마칩니다. 다음회부터 지난해 초기에 두서 없이 산발로 썼던 글을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등 몇 가지 주제를 설정하고 다시 보충하여 정리합니다.
여러분과 가정에 평화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1. 조르즈 아감벤 남겨진 시간 강승훈 코나투스 2008, 40 - 45p
2. 아브라함 J 헤셀 예언자들 이현주 삼인 2020, 275p
3. 볼프하르트 판넨베르그 판넨베르그 조직신학 3 신준호 새물결플러스 2019, 245p
4. 데이빗 그리핀 과정신정론 이세형 이문출판사 대구시 2007, 139p
5. 아브라함 J 헤셀 377p
6. 존 쿠퍼 철학자들의 신과 성서의 하나님 김재영 새물결플러스 서울 2011, 53-5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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