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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보이지 않아서 더 잘 믿는다 행7:35~38

by 【고동엽】 2021. 12.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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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속주의에 적응해 가는 기독교... 복음의 위기 초래

 

한국교회 상황에서 복음의 위기의 원인으로

‘세속주의에 적응해가는 복음’이 거론되고 있다.

 

오늘날 일부 교회가, 복음의 진리에 세속적 유행 사조를 뒤섞어

더 이상 복음이 순전하지 않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김동춘 교수는 이를 ‘적응형 기독교’라고 칭했다.

 

①사회에서 웰빙이 뜨면 교회도 웰빙을 찬양하고,

(교회에서 쓰는 '웰빙'의 뜻은 '복음으로 온전해진 삶'이란 뜻의 웰빙이었다.

사실 가장 확실한 '웰빙'은 복음으로 겉이 아니라 속이 새롭게 되는 것이다.)  

 

②잘 먹고 잘 사는 법이 관심사로 등장하면

교회에서도 기독교적으로 각색해 부자되기 열풍, 성공주의 등으로 화답한다.

한 때 CEO 예수가 등장한 적도 있었다.

 

③몸의 건강이 유행하면, 부흥집회가 ‘신바람 건강법’으로 연결되었다.

 

이런 것들이 ‘적응형 기독교 패러다임’의 전형적인 형태라고 지적했다. (이상 펀 글)

 

물론 이런 것들은, 원래 좋은 목적으로 도입된 것들이며, 교회는 사회에 현실 적응해야 한다.

교회를 너무 비현실적으로만 생각하는 성도들 또는 새 신자들에게

더욱 친근하게 다가가서 복음의 접촉점을 설명하기 위한 목적에서의

어쩌다가 한 번 선택하는 것들이었다.

 

겉포장은 '웰빙'도 할 수 있고, '신바람'도 할 수 있다고 본다.

다만 속 내용인, 기독교 복음의 본질만 놓치지 않으면 된다.

 

복음은 본질적으로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것(분)을 믿는 것이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것들을 믿으려는 시도는 매 시대마다 계속되어져 왔는데...

그런 것도 필요할지 모르나, 복음의 본질은 결코 아닌 것이다.

 

 

◈눈에 보이는 우상 vs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행7:35~38

 

 

제(설교자)가 그동안 방문했던 세계 여러 곳 중에 ‘유대 광야’는

제게 있어서 또다시 방문하고 싶은 곳 1순위이다. 

형편만 허락한다면, 그곳에 텐트를 치고 1달 정도 머물고 싶을 정도로

유대 광야는 제 마음을 강렬하게 끌어당기고 있다.

 

그 이유는, 유대 광야는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늘 밝히 일깨워주고 있기 때문이다.

 

◑1. 유대 광야에서 예수님과 사탄의 시각 차

 

예수님은, 이 유대 광야에서, 사탄의 유혹을 물리치심으로써 공생애를 시작하셨다.

사탄은, 무려 40일 동안 금식하신 예수님을 향해서

거기 지천으로 늘려있는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고 유혹했다. (사람이 떡으로만...)

 

실패한 사탄은, 예수님을 성전 높은 꼭대기로 인도해 가서,

거기서 뛰어내리라고 주문했다. 하나님이 안전하게 지켜줄 것이라고 부추기면서...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마지막으로 사탄은 높은 산 위에 인도해가서 천하만국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당장 자기에게 엎드려 경배하면, 천하만국을 모두 주겠노라고 유혹했다.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이상과 같은 세 차례의 사탄의 유혹과 예수님의 대응을 관찰해 보면,

대단히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사탄의 유혹 - 눈에 보이는 것들

사탄은 세 번 다 눈에 보이는 것들로 유혹했고,

예수님께서는 세 번 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로 그 유혹을 일축하셨다.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높은 성전 꼭대기에서 슈퍼맨처럼 뛰어내리라...(인기)

천하만국의 영광과 권세를 주겠다...

 

이처럼 사탄의 관심사는 확실하게 눈에 보이는 것들뿐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나님을 경배하고 그 분만 섬기라! 

예수님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이신 하나님께만 관심이 있었다.

 

지금 똑같은 광야에 서 있었지만

예수님과 사탄의 관심은 이렇게 본질적으로 달랐고,

그 차이가 예수님과 사탄의 근본적인 차이였다.

 

▲예수님 -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추구

예수님과 사탄의 근본적인 차이가 명백하게 드러난 곳이 바로 유대 광야였다.

광야는 돌 맹이와 바위, 흙, 하늘 외에는 아무 것도 보이는 것이 없는 곳이다.

물 한 방울 없기에, 풀 한 포기도 보이지 않는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광야이기에,

사탄은 확실히 눈에 보이는 것만 추구했다. (궁한 사람이 더 찾는다는 원리로)

 

그러나 예수님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광야이기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으므로

오히려 하나님만 더욱 뚜렷이 바라보며, 하나님만 추구했던 것이다.

(광야에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아서 너무 절망해서 소망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

혹은 아무 방해 요인이 없어서?)

 

◑2. 광야에서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의 시각 차

 

위와 똑같은 예를 모세에게서 찾을 수 있다.

 

▲보이지 않는 신앙을 추구한 모세

모세는 40세 까지 이집트 왕자의 신분을 갖고 살았다.

물질적으로는 세상에서 가장 풍족하게 살았다.

왕궁은 이 세상에서 볼 수 있는 모든 부귀영화의 총체적인 집결지였다.

 

그러나 그 화려한 왕궁에서, 너무 볼 것이 많아서인지,

구태여 모세는 하나님을 깊이 가까이 가서 볼 까닭도,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모세가 왕궁을 떠나 미디안 광야로 피신한 후에

바로 그곳에서, 그 황량한 곳,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비로소 모세는 하나님을 볼 수 있었다.

 

오늘날에도 시나이반도 남단에 위치한 시내 산에 가보면,

그곳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온통 돌산(위 사진)이다. 

모세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그 곳에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기에

그는 하나님을 보고, 그 말씀을 들었다.

 

모세가 미디안 광야에서 양치기 할 때뿐만 아니라

출애굽 시킨 뒤에 40년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전하는 사역을 했다.

그 말씀의 분량이 얼마나 많든지, 구약성경 전체의 1/4에 해당한다.

 

그가 40년 동안 그렇게 말씀을 많이 받았던 장소가 특별한 곳이 아니었다.

“광야”였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광야에서 살았기에,

그는 매일 하나님을 보고, 매일 그 분의 말씀을 들었던 것이다. 40년 동안이나!

 

▲보이는 신앙을 추구한 백성들

바로 그 똑같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금송아지를 만들고,

그것을 가리켜 여호와라 경배했다.

 

그들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광야에 있었기에

어쩌면 ‘눈에 보이는 어떤 실체’가 더욱 절실했는지도 모르겠다.

 

모세나 이스라엘 백성이나 똑같은 광야에 있었지만

그 똑같은 광야에서 양자가 추구한 것은 극과 극으로 달랐다.

 

▲광야교회   행7:38

성경은 당시 출애굽 백성들을 ‘광야교회’로 칭하고 있다.

광야교회는,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고, 끊임없이 불평하는 모습에서 보듯이

아무것도 눈에 보이지 않는 광야로 인해서

이 세상에서 확실하게 눈에 보이는 것만 추구했던 전혀 교회답지 못한 교회였다.

 

그러나 모세와 일부 소수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똑같이 ‘광야교회’에 속해 있었지만

그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추구했고,

반면에 대다수 백성들은 눈에 보이는 것들을 추구했다.

(오늘날은 어떤가?)

 

▲오늘 우리도 어떤 의미로 ‘광야교회’다

오늘날 우리 인생 역시 ‘광야’와 같다.

인생 역시 단 한 치 앞도 내다보이지 않기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광야’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이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것 같지만

사실 인간이 볼 수 있는 것은 지극히 제한적이다.

자기 몸속에 지금 어떤 장기가 병들어가고 있는지도 못 보고,

오늘 밤, 일주일 뒤, 한 달 뒤에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못 본다.

그런 의미에서 사실 인간이 볼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래서 인생은 광야처럼 답답한 현실인 것이다.

 

그렇다면 광야 인생을 살아가는 성도는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겠는가?

아무 것도 보이지 않기에, 하나님만 쫓는 성도가 있고

아무 것도 보이지 않기에, 눈에 보이는 가치들을 쫓아가는 성도들도 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기에, 오히려 하나님만 더 열심히 추구하는 성도가 있고,

아무 것도 보이지 않기에, 확실히 눈에 보이는 것만 하나님으로 추구하려는

사람들도 있다. 광야에서 금송아지로 하나님을 대체했던 신앙이다.

 

전자는 아직도 3천5백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믿음의 표상'으로 남아있고,

후자는 모두 광야에서 파멸하고 말한다.

 

사탄은 오늘도 눈에 보이는 것들로 광야에서 우리를 유혹한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 모두가 남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러나 광야의 모세처럼, 눈에는 아무 증거 안 보일 지라도,

하나님을 더욱 깊이 바라보고 추구하는 신앙인들이 되자!

안 보이는 것을 믿는 것 - 그것이 바로 믿음이다.

 

(당신은 오늘, 아무것도 눈에 안 보인다고, 주저 앉아있지는 않는가?  

그러고 보니, 나도 아무것도 안 보인다고, 너무 낙심만 했던 것 같다.)

 

<07.04.08. 인터넷 설교 발췌 요약,  *원제목 : 광야 교회 행7:35~38

 

 

[주제별 분류]  믿음론  http://blog.daum.net/bible3/11522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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