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자료 18,185편 ◑/자료 16,731편

감사의 제사를 드리십시오/

by 【고동엽】 2021. 12. 4.

민수기 1517-21

 

어떤 사람이 안식일에 예수님 앞에 나아왔습니다.

보니까 그의 한 손이 말라서 오그라져 있는 상태였습니다.

바로 그때 예수님은 그에게 "손을 내 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말씀대로 저가 손을 내밀었고, 곧 그 손이 정상으로 회복되었습니다(12:10-13).

 

저는 그 장면을 다음과 같이 은유적으로 해석해 보고 싶습니다.

손이 마른 그 사람은 마치 남을 위해 손을 펼 줄 모르기 때문에

영혼이 말라붙고, 감사가 말라붙은 현대인의 모습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런 현대인들에게 주님은 끊임없이 "손을 내 밀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축복 받고, 은혜 받는 특별한 비결이 없습니다.

가장 기초적이면서도 중요한 비결은 '손을 펴고 손을 내미는 것'입니다.

손을 펴는 것은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이웃을 향해 도움의 손을 펴는 것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을 향해 감사한 마음으로 손을 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많은 축복을 예비하고 주실 준비를 다 갖추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의 손이 말라 오그라져 있기 때문에 받을 손이 없습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그러면서 "왜 안 주시느냐?"고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아닙니다. 원망하기 전에 우리는 손을 펴는 작업부터 항상 해야 합니다.

 

먼저 이웃을 향해 사랑의 손길, 구제의 손길을 펼 줄 알아야 합니다.

신명기 1511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는 반드시 네 경내, 네 형제의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

 

어려운 자에게 눈을 돌려보세요. 그러면 하나님이 나의 어려울 때 돌아보십니다.

어려운 자에게 귀를 기울여보세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나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려운 자의 소리를 듣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도 나의 기도를 듣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어려운 자에게 사랑의 손길을 펴는 것은 기도 응답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잠언 2113절에는 아주 중요한 말씀이 나옵니다.

"귀를 막아 가난한 자의 부르짖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면

자기의 부르짖을 때에도 들을 자가 없으리라."

무슨 말입니까? 사랑의 손길이 없으면 우리의 기도하는 손은 무력해진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의 손길을 펼 줄 알아야 합니다.

살아가면서 하나님은 수시로 우리에게 축복의 기회를 주십니다.

그 축복의 기회 중에서 가장 소중한 기회는 바로 감사의 기회입니다.

 

정말 복된 사람들을 보십시오. 감사의 기회가 생겼을 때 어떻게 합니까?

재빠르게 하나님께 감사해서 그 기회를 잡아 축복으로 연결시킵니다.

그런데 복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어떻게 합니까?

감사의 기회가 생기면 하나님은 잊어버리고 "내가 잘해서!"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결국 그 감사의 기회를 잡지 못해서 더 큰 축복을 놓칩니다.

 

사무엘상 25장에 나오는 부자 나발 사건을 생각해 보십시오.

자신의 목장이 잘 보존될 수 있었던 이유는 다윗 군사들의 도움이 컸습니다.

그러면 다윗이 도움을 요청할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제 고마움을 표시할 기회가 왔구나!"라고 하며 그 기회를 잡아야 합니다.

 

그러나 나발은 도움을 요청하는 다윗에게 심한 모욕으로 갚았습니다.

결국 그는 감사의 기회를 잡지 못하고, 결국 하나님의 진노로 죽게 됩니다.

만약 그때 나발이 다윗의 요청을 받고 그 감사의 기회를 붙잡았다면

그는 다윗으로부터 보답을 받고, 하나님으로부터도 은혜를 입었을 것입니다.

 

1997년 대천 해수욕장에서 초등학교 학생 몇 명이 물에 빠졌습니다.

그때 고등학생 여러 명이 동시에 급하게 바닷가로 뛰어들었습니다.

그때 초등학생들은 모두 구조되었는데 대신 고등학생 3명이 죽었습니다.

의로운 학생들입니다. 비록 그들은 죽었지만

그들의 순수한 사랑은 어디선가 반드시 열매맺게 될 것입니다.

 

그들 3명에 대한 합동 장례식이 있던 날이었습니다.

학교관계자와 지역 유지 등 수많은 사람들이 장례식에 참석했습니다.

그러나 살아난 초등학생 부모들은 어느 누구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은혜 갚는 것이 그렇게 부담이 되었나 봅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안 나타나면 그만인데 나타나서 왜 부담을 지느냐"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 소식을 신문으로 보고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은혜 갚는 일이 그렇게 부담이 되는 분들에게 앞으로 어떤 은혜가 주어질까?"

은혜만 받고 부담은 안 지겠다는 분에게 하나님이 과연 은혜를 내리실까요?

그러한 마음을 고치지 않으면 <은혜>조차 그 사람을 외면할 것입니다.

 

은혜를 갚는다는 것은 부담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부담을 져야 하는 곳에서는 부담을 지는 것이 마음이 편하고,

그렇게 은혜를 알고 감사해야 더 큰 은혜도 받고 삶도 행복해집니다.

 

감사는 행복을 낳습니다. 그래서 감사는 행복의 어머니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감사의 기회를 절대 놓쳐서는 안될 것입니다.

정말로 복된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신 감사의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습니다.

 

솔로몬 왕을 보십시오. 아들의 서열상 그는 도저히 왕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왕이 되었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러한 감사한 일을 두고 그는 감사의 기회를 잃어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감사의 마음을 표현한 것이 바로 일천 번제의 제사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그 감사를 받으시고 엄청난 축복을 솔로몬에게 더하십니다.

 

우리가 진정 복된 존재가 되려면 하나님께서 감사의 기회를 주셨을 때

감사의 손길을 펴서 그 감사의 기회를 꼭 붙잡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처럼 감사의 원리를 가르치는 것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거제입니다.

 

본문 18-19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가 나의 인도하는 땅에 들어가거든/

그 땅의 양식을 먹을 때에 여호와께 거제를 드리되."

이 구절만 언뜻 봐도 거제란 추수에 대한 감사제사임을 알 수 있습니다.

 

거제란 제물을 높이 들어서 하나님 앞에 제사하는 제사법입니다.

그런데 거제를 드릴 때 지켜야 할 원칙이 있습니다. 20절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의 처음 익은 곡식 가루 떡을 거제로 타작 마당의 거제같이 들어 드리라."

거제는 처음 익은 곡식을 가지고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처음 익은 곡식으로 감사 제사를 드리는 것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1. 첫째, 처음 익은 곡식을 가지고 드리는 것은

무엇보다도 가장 먼저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자기에게 집중된 마음을 하나님께로 집중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우리에게 집중하면 감사가 나오기 힘듭니다.

왜냐하면 남과 나를 비교하고, 내 소원과 현실을 비교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물이나 환경에 집중해도 감사가 나오기 힘듭니다.

왜냐하면 천하보다 귀한 우리이기에 천하의 어떤 것도 우리를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우리 마음을 하나님께 집중해야 진정한 감사가 나옵니다.

 

하나님께 집중하면서 특별히 무엇에 집중해야 합니까?

우리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집중해야 합니다.

우리는 죄로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대신 죽으셨습니다. 그처럼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는 그 구원의 은혜를 생각하며 항상 기본적인 감사를 가져야 합니다.

 

2. 둘째, 처음 익은 곡식을 가지고 드리는 것은

다른 구체적인 열매가 풍성하게 나타나지 않아도 감사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즉 처음의 조그마한 것을 가지고도 감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처럼 조그만 것을 가지고 감사하면 하나님의 더 큰 것을 주십니다.

 

우리는 결과를 보고 감사하지 말고, 먼저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나에게 주신 결과를 보고 감사하는 것은 감사의 질이 떨어지는 것입니다.

풍성한 무엇인가를 보고 감사하는 것은 진정한 의미의 감사가 아닙니다.

아직 결과는 보이지 않고 풍성한 무엇이 없어도 감사하는 것이 진정한 감사입니다.

 

주님께서 나사로를 살리실 때 요한복음 1141절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보시고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아직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미리 감사하십니다.

그러자 곧 바로 감사기도 후에 나사로가 일어나는 것을 보십시오.

 

여러분! 하나님을 믿으면서 아직 내가 바라는 결과가 나오지 않았습니까?

그래도 감사해 보십시오. 처음의 조그만 은혜를 감사하기 시작하면

나중에는 인생 전체가 감사의 것으로 채워지는 역사가 있게 됩니다.

 

혹시 우리의 감사가 흥정하는 감사가 아닙니까?

주님 이렇게 해 주시면 제가 이렇게 감사하겠습니다 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여러분 결과를 보고 감사하지 마시고 첫 열매만으로도 감사하길 바랍니다.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차지하지는 못했을지라도

내가 주신 작은 것, 작은 가능성만 가지고도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때

우리 하나님께서는 진정 그것을 보시고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3. 셋째, 처음 익은 곡식을 가지고 드린다는 것은

양이 얼마 되지 않아도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드려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약 추수를 다 한 후에 드리라고 했으면 더 많이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처음 익은 곡식을 드리라고 했습니다.

양과 상관없이 미리 감사하는 마음으로 드리라는 뜻입니다.

 

그런 식으로 가진 없이 없어도 그 조그만 것으로 감사해 보십시오.

시간이 지난 후에 보면 더욱 많은 감사의 내용이 채워져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혹시 풍성한 결실이 주어지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이미 감사했기에 그의 삶은 항상 감사가 충만한 삶을 살게 됩니다.

 

가진 것이 없어도 감사가 충만한 삶을 사는 사람이

가진 것이 많아도 감사를 모르는 사람보다 훨씬 부요한 사람입니다.

이제는 물량적인 것, 외적인 것을 가지고 감사를 저울질하지 말아야 합니다.

 

한국교회가 비판받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기복주의 때문입니다.

기복주의는 무엇과 관련이 있습니까? 물량주의와 관련이 있습니다.

많이 받아야 은혜를 받았다는 사고! 커야 은혜를 받았다는 사고!

그러한 사고가 문제입니다. 많아야 축복입니까?

아닙니다. 적게 받고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 할 수 있습니다.

많지 않아도 그것을 가지고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이 은혜 받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소박한 감사 속에 놀라운 축복의 씨앗이 숨겨져 있습니다.

 

주님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축사하셨습니다(6).

그 구절에서 축사하셨다는 말은 축복하고 감사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러자 그 감사 속에서 5천명을 먹이는 풍성함이 예비되어 나타났습니다.

이것이 바로 조그만 것에 대한 감사가 지닌 놀라운 파워입니다.

 

처음 익은 곡식! 그것은 분명 얼마 되지 않는 양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가지고도 감사할 수 있는 분들이 되어 보십시오.

그러한 감사 속에 풍요가 예비되고 잉태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손에 있는 그 조그만 것! 그것이 바로 축복의 씨앗입니다.

그것을 처음 익은 열매로 생각하고 그것을 드림으로 감사해 보십시오.

그러면 삶 전체가 감사와 은총으로 넘쳐 나게 될 것입니다.

새롭고 큰 무엇만을 항상 기대하지 말고 이미 주신 은혜에 감사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새로운 은혜가 더해지게 될 것입니다.

 

4. 넷째, 처음 익은 곡식을 가지고 드린다는 것은

그리고 현재의 그 모습 그대로 감사하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처음 익은 곡식! 그 적은 양을 생각하면 정말 아쉽습니다.

그래서 이런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더 주시면 더 감사할 수 있는데...."

그러나 하나님의 원리는 다릅니다. 지금 적은 양으로 감사하지 않으면

앞으로 많은 양을 가지고도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기 힘듭니다.

 

왜 사람들이 불평합니까? 현재의 모습을 보고 너무 속단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어떻게 그렇게 속단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오묘하신 뜻은 눈에 보이는 그것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어느 윤리학 교수가 아주 어려운 한 가정에 대해서 얘기를 했습니다.

남편은 매독에 걸렸고, 아내는 폐결핵에 걸렸습니다.

이 가정에는 네 명의 아이가 있었는데 얼마 전에 한 아이가 죽었고,

아내는 지금 다섯 번째 아이를 임신 중인 상태라고 얘기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이 임신 중인 아이를 어떻게 해야 할지 학생들에게 물었습니다.

 

그러자 한 학생이 손을 들고 대답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 경우에는 낙태를 해야 옳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다른 모든 학생들도 그 학생의 의견에 동조하는 분위기였습니다.

그러자 그 교수가 학생에게 말했습니다. "자네는 지금 베토벤을 죽였네."

악성 베토벤이 바로 그 가정의 다섯 번째로 태어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나 다른 사람의 앞날을 너무 쉽게 속단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너무 쉽게 판단하고, 너무 쉽게 결정하고, 너무 쉽게 절망합니다.

인생이란 참으로 복잡한 것이며 우리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생각을 초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재의 모습만 보고 그것을 평가하지 말아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대로 살아가는 사람을 흔히 현실주의자라고 합니다.

그들에게는 눈에 보이는 것이 진리입니다. 그래서 더 큰 것을 보지 못합니다.

사람이 보면 얼마나 보며, 들으면 얼마나 듣겠습니까?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속단하면 편협된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은 대개 자기의 관심영역 안에서만 보고 듣습니다.

그래서 그 관심 밖에 있는 것은 못 듣고 못 보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어떤 애기 엄마는 소리에 대해서 정말 둔감합니다.

그래서 잘 때는 자명종 소리도 못 듣고 남편 나가는 소리도 못 듣습니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엄마 노릇을 하나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이가 내는 조그만 소리는 신기하게도 금방 알아차립니다.

그 사실은 우리가 보고 듣는 것이 한정되어 있음을 잘 말해줍니다.

 

현재의 모습을 가지고 속단하지 말고 그 모습 그대로 감사해 보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감사의 제사를 받으시고,

그의 미래를 지금보다 훨씬 소중한 모습으로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그처럼 처음 익은 곡식으로 떡을 만들어 하나님 앞에 거제로 드릴 때,

거제는 흔히 두 단계로 나뉘어져서 드려지게 됩니다.

 

1) 떡을 하나님 앞에 들어올리는 단계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그 감사를 받으신다는 것을 상징하는 행위입니다.

 

2) 그리고 다시 그 떡을 내리는 단계입니다.

바로 그 순간, 그 떡은 제사장, 즉 사람을 위해 준비되는 떡으로 변합니다.

 

이러한 의식이 가지고 있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감사를 올려드리면 하나님은 그 감사를 통해 영광 받으시고,

그 감사로 주어지는 은총은 다시 우리들에게 돌려주신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즉 우리가 감사하면 결국 그 감사는 우리 품으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는 말입니다.

 

한번 이렇게 감사 기도를 드려 보십시오.

"하나님! 지난 1년간 건강으로 채워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그 건강으로 주어지는 부수적 은혜를 되돌려 주십니다.

그런 식으로 지혜, 물질, 자녀, 가정 등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 거제로 드리면

하나님은 더욱 풍성한 은총과 함께 그것들을 되돌려 채워주실 것입니다.

 

심지어는 우리의 고통과 어려움까지 하나님 앞에 거제로 들어올리십시오.

"하나님! 힘든 일년이었습니다. 그래도 꿋꿋한 마음 주시니 감사합니다.

저의 연약한 일년의 삶을 통해서도 우리 하나님께서 영광받아 주옵소서."

그러면 그 순간,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풍성한 은총을 더욱 실감하게 될 것이고,

명년에는 더욱 놀라운 하나님의 축복을 예비해 주실 것입니다.

항상 감사로 제사를 드림으로 축복을 예비하는 여러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