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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δεδομένα 18,185편 ◑/यू की-सेओङ

당신은 예수님과 얼마나 친하십니까? 요일1:1-4,

by 【고동엽】 2024. 6. 12.

요일1:1-4, 당신은 예수님과 얼마나 친하십니까?     

◑1. 하나님과 사귐이 중요합니다.       요일1:1-4     

요한일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려고 쓴 성경이지만, 구체적으로 말하면 
예수님을 영접한 성도가 세상에서 사는 법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요한은 그의 서신 첫 부분에서 너무나 중요한 말씀을 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주 예수님과 사귐을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믿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사귐을 가질 수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 딸이 어릴 때 어느 날 ‘인기가수 공연이 있는데 가도 돼요?’하고 제게
물었습니다. “안된다!” 하고 말해 주려다가 “하나님께 의논드려 보아라.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가려므나!”했습니다. 

대답하고 나서, 제가 잘 대답한 것 같았습니다.
이렇게 매사에,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 교제, 대화가 있어야 된다는 뜻이죠.
 
▲한 번은 어떤 사람이 고아원을 경영하는 조지 뮬러 목사님에게 찾아와서
“목사님, 제가 무엇을 도와드릴까요?”하고 물었습니다. 

조지 뮬러 목사님께서 대답하시기를“제게 묻지 마시고, 
하나님께 직접 물어 보세요.” 조지 뮬러는 오직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것만 
의지하여 고아원을 운영하기로 결심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조지 뮬러 목사님을 
어떻게 도우라는 대답을 들을 수 있었을까요?

우리가 물으면 하나님께서 대답을 해 주실까요? 
주님과 이런 관계가 가능할까요? 아직 믿어지지 않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사도요한은 먼저 자신이 예수님을 직접 만났음을 말씀합니다.

요일1:1 이 글은 생명의 말씀에 관한 것입니다. 
이 생명의 말씀은 태초부터 계신 것이요, 우리가 들은 것이요, 
우리가 눈으로 본 것이요, 우리가 지켜본 것이요, 
우리가 손으로 만져본 것입니다.  

여기서 ‘생명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는데 
그 예수님을 요한은, 귀로 들었고, 눈으로 보고 
그 말씀을 직접 듣고 손으로 만지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복음서를 보면 요한 사도는 유난히 주님과 친밀한 제자였습니다.

그런데 요한 사도가 이 말을 하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자기처럼 
예수 그리스도와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사귐을 가질 수 있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1:3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여러분에게도 선포합니다. 
우리는 여러분도 우리와 서로 사귐을 가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또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사귐입니다.

사도요한은 ‘우리 사귀어 봅시다’ 하는 말은 
사도요한이 누리는 엄청난 축복을 ‘흘려 보내주겠다. 함께 누리자’는 말입니다. 

그 말은 사도요한이 단순히 과거에 예수님을 보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도 계속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듣고 있다는 말이죠.

이런 사귐을, 모든 믿는 자가 누릴 수 있는 사귐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육신으로 주님을 보고 들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주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알고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고후 5:16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3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또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사귐입니다.

여러분은 이 말씀이, 내 삶에서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나요? 
즉 사귐이 있는 사람이.. 진짜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듯 사귀는 사람입니다. :1

누구를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일반적으로 주일이면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고 성경을 읽고 
십자가 복음을 믿고 세례를 받고 신앙 파악을 할 때 
종교란에 기독교라고 쓰고, 성경의 가르침대로 살려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이것들이 중요하지만 결정적인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질은 바로 하나님과 연합이요 사귐입니다.  

요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사귐으로 친밀히 아는 것을 뜻함

영생은 죽고 난 다음 천국에 가서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여기서 안다는 것은 지식이 아닙니다. 
관계적 앎을 말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예수님 안에 거하고 
예수님은 그 사람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진리를 부인하고, 
본질적인 복음의 핵심 교리들 일부나 전체를 부인하면서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올바른 교리를 지키려는 정통 보수신앙을 가지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복음적이고 정통 보수신앙을 가졌다고 
그가 그리스도인이라고 인정받는 것도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죄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사함받았다고 믿는 것조차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종교개혁 당시 표어였던 이신칭의 교리 전체를 
의심의 여지없이 다 믿는다 할지라도 충분한 것이 아닙니다. 
이런 교리를, 그저 ‘지적으로만’ 받아들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정통 보수신앙을 가졌어도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은 
아직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직분으로는 목사 장로요, 지식으로 신학박사이면서도 
명예욕이나 이기적인 욕심을 해결받지 못한 이들이 많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기본인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와 사귐’이 
없기 때문입니다.  

평생 믿음을 지키며 정통교리를 위해 싸우던 사람이 임종할 때 가서 
자신이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계시록에 나오는 에베소교회는 대표적인 정통 보수신앙을 가진 교회였죠. 
그들이 이단들과 치열히 싸운 것에 칭찬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으로부터 버림받을 수 있다는 무서운 책망을 받았습니다.

계2:4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에베소교회는 정통교리만 있었지 
하나님과 아들 예수님과의 사귐이 없었던 교회였습니다.

이런 교회, 이런 그리스도인들을 지금도 흔히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정신 차려야 합니다. 우리의 가족관계나 교인관계도 
예수님과의 사귐과 연결되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3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또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사귐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도는 어떤 사귐이든 주 예수님과 더불어 사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부 사이에 문제가 생기고, 가족 사이에 문제가 생기고 
교인들 사이에 문제가 생기면, 먼저 주님과 사이에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시비비를 가리기 전에 
주님과 한 주간이라도 기도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해결이 안될 문제가 없습니다. 이것이 가장 아름다운 사귐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기초입니다. *코이노니아

그리스도인들에게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세상과 사람이 근본적으로 악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한일서는 여러분이 나가서 세상을 변화시키라, 변혁시키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세상과 동떨어진 사람이 되라, 수도원에 들어가서 살라고 
말씀하지도 않습니다. 우리에게 더욱 필요한 것은 
먼저 주님과 사귐을 갖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 때만 세상을 변화시킬 힘을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계속하여 실제적인 사귐을 나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놀라운 약속을 하셨습니다.

요14: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사귀러) 오리라

요14:19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내가 너희와 사귀러 갈 것이니, 성령으로)

WEC 선교회를 설립한 C T 스터드 선교사가 아프리카에 가서 선교관을 
세우고 지낸지 얼마 안되어 집에 뱀이 들어온 일이 있었습니다.

C T 스터드 선교사는 사모님에게 이런 편지를 썼습니다.
“하나님 보호의 손길이 우리를 덮고 계시는구려. 
오늘 아침 식사를 하자마자 아이들이 들어와 말하길
‘침대에 뱀이 있어요!’하더군. 
담요를 들추어 보니 가느다란 초록색 뱀이 있었소. 

물리면 죽는다고 원주민이 일러주었던 바로 그 놈이더군. 
간 밤에 그 놈과 함께 잔 거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사자는 아마 한숨도 못 잤을 거요.”

하나님과 사귐이 있는 성도는, 하나님이 24시간 지켜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처럼 주님과 사귐을 가지려면 “말씀을 붙잡아야” 합니다. 

사도요한이 요한일서를 쓰면서 예수님을 ‘생명의 말씀’이라고 한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요일1:1 이 글은 ‘생명의 말씀’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가 주 예수님과 사귐을 가지려 할 때 명심할 것은 
그것이 말씀을 통하여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 안에서 주님과 교제하려고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미혹을 받게 될 것입니다.

눅24:32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웨슬리 목사님은 1738년 5월 24일 올더스게이트 거리 한 집회소에서 
로마서 서문 말씀을 들을 때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웨슬리 목사님과 만난 것입니다.
 
▲일평생, 2천 명의 고아를 먹여 살렸던 조지뮬러. 
그의 젊은 시절은 방탕하고 질이 나쁜 청년이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한 가정 예배에 참석했다가 기도와 말씀 중에 
형언할 수 없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자신이 방탕한 생활을 할 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편안하고 놀라운 기쁨이 있었습니다. 그는 그 예배 중에서 영으로 임재하신 
주님을 만난 것입니다. 지금도 주님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계십니다.

어느 신학생이 올린 글입니다.
“교수님 중에 한 분께서 ‘앞으로 목회하려면 성경 암송을 300개 이상 해라. 
그러면 교인들에게 인정도 받고 어디 가던지 성경 암송을 줄줄이 하면 
교인들이 그런 목사님을 진짜 목사라고 부러워하고 존경한다’고 하셨죠. 
그런데 그 말씀을 들으면서 나는 거부 반응이 생겼습니다.”

이 신학생이 왜 거부 반응이 생기는 걸까요? 
말씀은 그렇게 쓰라고 주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말씀을 주신 것은 보이지 않는 주님과 사귀고 
동행할 수 있게 해주시려는 것입니다.
말씀을 대하는 순간이 주님을 만나는 순간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중에 ‘내가 주님과 정말 사귐을 가질 수 있을까?’ 
믿어지지 않는 분이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저 자신의 경우를 보아서 
여러분도 분명히 주님과 사귐을 가질 수 있다고 믿습니다.

▲저는 고등학생 때, 고후13:5절 말씀으로 설교를 듣고 
도무지 믿어지지 않아서 상담을 하였습니다.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 고후13:5

전도사님과 상담을 해도 믿어지지 않아서 믿는 척 해야 했습니다. 
오늘 본문을 신학생 때도 읽었고 전도사 때도 읽었지만, 
흔쾌히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목사 안수를 받고 한 달 뒤 군목훈련을 받다가 
주님의 임재를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모든 것이 달라지는 것 같았습니다. 
부산에서 담임목회를 할 때, 주님과 교제에 눈이 뜨이고, 
안산에서 그 교회제가 더 깊어지고 
지금 성남에서 ‘24시간 주님 바라보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저는 요한일서 설교를 준비하면서 너무나 감사하였습니다. 
가슴이 떨렸습니다. 이 구절이 아멘으로 이해되고 믿어지고 누려지고 
있다는 것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저와 같은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요한 사도는 먼저 우리에게 희망을 주고 있습니다. 
이 요한일서를 읽어가다 보면 우리의 기쁨이 넘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4절 우리가 이 글을 쓰는 것은 
우리 서로의 기쁨이 차고 넘치게 하려는 것입니다.

기쁨은 주님과 사귐을 가지는 자가 누리는 가장 놀라운 축복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악하고 험해도 하나님은 성도들이 기쁨이 차고 넘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약속을 믿고 요한일서를 읽어 가면 좋겠습니다. 
오직 주님과 친밀해지기만 갈망하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C T 스터드 선교사의 선교관에도 많은 아프리카 원주민들이 찾아왔습니다. 
그들에게 스터드선교사는 말했습니다.

“당신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여기엔 돈이 없습니다. 
우리가 해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에 대해 가르쳐 주며 
그 분의 말씀을 들려주는 것 뿐입니다." 

그들은 대답했습니다.
“돈은 조금도 관심 없습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하나님입니다."

D L 무디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영국 거리에서 걸어 다니는 사람은 가난한 사람이란 뜻입니다. 
마차를 타고 다니는 사람은 좀 나은 사람이고, 
마차 뒤에 시종을 거느리고 있는 사람은 부자라는 뜻입니다. 
만약에 시종을 두 사람 거느리고 있다면  *시종이 마차 뒤에 서서 매달려 감
그는 유산을 많이 받은 사람일 것입니다. 

그런 뜻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가난한 사람이 없습니다. 
왜냐면 항상 시종 둘을 뒷자리에 태우고 다니기 때문입니다.”

시23:6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선하심’과 ‘인자하심’의 두 시종이 늘 함께 뒤따라 다니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뒤를 한번 보십시오!
정말 여러분은, 이 사실을 느끼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사귐을 갖고 있다는 증거이고, 말씀으로 사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정통 보수신앙으로 만족하면 안됩니다.
가장 중요한 질문은 “당신은 주 예수님과 친밀하십니까?"

...............................................

▲적용 :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알아보는 눈을 가져야

사도요한은 1절과 2절에서 '우리가 그를 보았다'고 증거합니다. 

1:1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2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요한복음에서는 이렇게 증거합니다. 

요1:14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보통 사람들이 갈릴리에서 설교하시던 예수님을 보면, 
'그냥 어느 집 아들 청년이, 별로 많이 돈 버는 일도 아닌데, 나름 애를 쓴다' 
이 정도로 보았을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았을 때, 훨씬 더 낮게 깎아서 바라보았죠.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눅7:34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을 뭔가 다르게 보았던 것입니다.
언제부터 그렇게 본 것인지, 그 시점은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아마 변화산 사건부터 였을까요? (그 시점은 중요하지 않고요)

어쨌든 흰 옷 입고, 샌달 신고 다니시는 보통 사람 예수님에게서
그들은 '하나님의 신성(영광)을 본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증거합니다.

요1:14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어느 목사님은 스카이 대학의 법대를 졸업하고, 은혜를 받아서
판검사가 되지 않고, 목회자가 되었습니다. 그런 분들이 간혹 있죠.

그런데 부친은 영 마음에 섭섭함이 있었던 것입니다.
'잘 키운 아들인데, 목사가 되겠다니...'

그런데 세월이 흘러, 어느 듯 그 부친의 소천이 가까와졌습니다.
부친은 아들 목회자를 불러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아들아, 네가 젊어서 명문대 법대를 졸업하고, 목회자의 길을 갔을 때
말은 안 했지만, 지켜보는 내 마음이 참으로 섭섭했단다. 
그런데 이제와서 돌이켜보니, 그때 네가 참 잘 선택한 것 같구나!
사람의 영혼을 살리는 일이, 세상 그 어떤 일보다 소중한 일이지...!'

시49:7~8 '아무도 자기의 형제를 구원하지 못하며 
그를 위한 속전을 하나님께 바치지도 못할 것은
그들의 생명을 속량하는 값이 너무 엄청나서 영원히 마련치 못할 것임이니라'

(한 영혼, 한 생명 구하는 일이, 재벌 회장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을 하는 거죠)

예수님과 사귐이 있으려면, 예수님을 보는 나의 눈부터 바뀌어야 합니다.
그냥 명품도 아니고, 보통 사람들 입는 옷을 입고 다니고, 
요즘으로치면 프라이드 타고 다니고, 그렇게 또 잘 생긴 외모도 아닙니다. 

사53:3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2022년에 가톨릭 사제 서품 숫자가 지난 30년만에 최저라고 합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가톨릭 대학의 신학부 입학생 숫자는
더욱 저조하고, 어떤 지방의 가톨릭 대학은 한 자리 숫자도 있다고 합니다.

이런 현상은, 비단 가톨릭 뿐만 아니고, 개신교도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정확한 소문인지는 모르나, 정말 지방에는 한 자리 숫자라는 루머가 들릴
정도로 신학과 지원자가 적다는 것입니다.

그럼 교회의 미래가 암담한 것이죠. 유럽이 그렇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이제 한국도 어느새 비슷한 형편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이제 교단 차원에서, 강제동원령, 공권력이라도 발휘해서
'성도 3백명 이상에 1명씩 차출해서 신학교에 보내라'
그럴려면 교회에서 4년간 전액 장학금 + 학사관 제공 등 혜택을 줘야 되겠죠.

그런데 그것도 문제라는 것입니다.
왜냐면 교회에 청년들이 좀 남아있어야, 차출이라도 할 텐데,
아예 청년들의 씨가 마르면.. 아무리 특전을 제공한다 한들... 
(물론 그런 특전을 제공해서 모집하는 것은 옳지 않죠.)

△신학생이 줄어든다는 얘기를 하자는 게 아니고, 
거기에 더 근본적인 원인이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 1~3절에, 사도요한은 예수님을 '보았고', '만졌고', 사귐이 있다고 했는데
요1:14절에는 '예수님에게서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을 보았다'고 했는데,

요즘 기독교인들이 보는 예수님은 '멸시 받고, 버림 받고, 간고를 많이 겪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교인들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노라'
그렇게만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 영원한 영광을 못 보고 있는 것이죠!

예수님의 가신 길을 뒤따르는 목회자도 그렇게 비참하게만 보고 있으니, 
목회자로 부름 받은 그 영원한 영광을 전혀 보지 못하니
신학교 지원율이 저조할 수밖에 없죠.

이것은 "한국 기독교의 기복주의적 성향"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을 것입니다.
세상적 가치로 '좋다'는 것을.. 교회에서도 좋다고 얘기했고
기독교적 가치로 '좋은' 것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한 것입니다. 
이런 현상의 주범은 '기복주의적 기독교!' 그 뿌린 열매를 어쩌면 거두는 거죠.


그러나 염려해서 될 일도 아니고, 염려할 필요도 없습니다.
역사를 보면 하나님은 언제나 '남은 자'를 남기십니다.

예수님에게서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을 보는 이들은, 반드시 있으며
'사람의 생명을 속량하는 값이 너무 엄청나서 
그 일이 영원히 값지고 소중한 일 임을 보게 깨닫는' 시49:7~8 
사람들이 반드시 있고, 그들은 계속 이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신학교 지원율이 저조한 것이 다행인지도 모릅니다.
적어도 '주의 종의 길에 대한 환상 fantasy 은 깨졌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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