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 가운데 사는 기쁨 요일1:5~10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중요한 약속을 하나 하셨습니다.
제자들을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 약속은 성령이 임하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이 약속은 제자들만 아니라 모든 성도들에게 동일하게 주신 약속입니다.
그런데 고아처럼 사는 그리스도인이 많습니다. 하나님이 아버지라고 믿지만,
아버지이신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 같지 않은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사도는 우리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와 실제적이고 구체적으로 사귀며
살 수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과 사랑을 주고 받는 기쁨을 누리며 사는 것입니다.
요일1:1절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생명의 말씀”이시기에
“말씀”을 통하여 주님과 사귈 수 있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 요일1:7에서는 “빛 가운데” 사는 것을 통하여
하나님과 사귈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
7절 ‘그러나 하나님께서 빛 가운데 계신 것과 같이
우리가 빛 가운데 살아가면, 우리는 서로 사귐을 가지게 되고’
▲그러면 “빛 가운데 산다”는 것은 어떤 삶을 말하는 것일까요?
쉽게 “빛 가운데 사는 삶”은 죄짓지 않고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죠.
그러나 ‘빛 가운데 산다’ ‘어두운 가운데 산다’는 말은
‘죄 짓고, 안 짓고’와 관련된 말이 아닙니다.
7절에서 “우리가 빛 가운데 살아가면...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해주십니다” 하셨는데,
빛 가운데 행하는 것이 죄 짓지 않는 삶이라면
‘빛 가운데 행하면, 모든 죄에서 깨끗함을 받는다’는 말은
불필요한 말이 되는 것입니다.
죄를 짓지 않았는데, 죄에서 깨끗함을 받을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둠 속에 사느냐, 빛 가운데 사느냐?’ 차이는
‘죄를 숨기고 사느냐, 죄를 고백하고 사느냐?’의 차이입니다.
8절에, 어두운데 사는 자는 자신은 “나는 죄가 없다”
하고 사는 자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빛 가운데 행하는 자”란 어떤 자인가요?
9절에서 ‘죄를 지었을 때마다, 하나님께 솔직히 고백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9절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의로우신 분이셔서,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해주실 것입니다.
▲요한사도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은 빛이라고 알려주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햇빛을 쪼이려면 햇빛이 비취는 야외로 나와야 하듯이
빛이신 하나님과 사귀려면 누구나 빛 가운데 나와야 할 것입니다.
빛 가운데 나오면, 자신을 다 드러내게 됩니다.
당연히 자신의 죄가 드러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관계가 친밀한 사람은 ‘회개하고 고백하고 사는’ 것입니다.
만약 자신의 죄를 고백하지 않는 사람은
영적으로는 빛이 비취지 않는 어두운 곳에 숨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눅18장에서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를 통해 보여주셨죠.
바리새인은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그러나 세리는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바리새인과 세리 중에 누가 더 의인입니까?
세상 기준으로 보면 분명히 바리새인이 더 의인입니다.
죄는 누가 많이 지었습니까? 분명히 세리가 죄를 많이 지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리가 바리새인 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바리새인은 자기가 지은 죄는 일절 말하지 않습니다. 죄 없는 척합니다.
이런 사람이 바리새인입니다. 그러나 세리는 자기는 죄인이라는 것밖에
고백할 것이 없다고 느끼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누가 빛 가운데 살고, 누가 어두움 가운데 사는 것입니까?
‘죄를 많이 지었느냐/ 적게 지었느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의 죄를 주님 앞에서 고백하느냐/ 아니냐 .. 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은 말로 “나는 죄인입니다.” 라고 고백한다고
다 빛 가운데 사는 자는 아닙니다.
그것이 진정한 고백인지 아닌지가 문제입니다.
교리적으로 “내가 죄인이다.” 하고 받아들인 것이지
진정한 고백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것은 남을 정죄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남을 정죄하는 것이야말로
자기는 죄가 없다는 전형적인 태도입니다.
눅15장에 나오는 탕자의 이야기에 보면,
아버지가 집을 나가 재산을 탕진한 채 거지가 되어 돌아온
둘째 아들을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엽니다.
그러나 아버지 말 잘 듣고 집을 지켰던 맏아들은 대단히 화를 냅니다.
맏아들의 말을 잘 들어 보십시오.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맏아들은 동생을 무섭게 정죄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자신은 죄가 없다는 전형적인 태도입니다.
이런 마음을 가진 자는 아버지와 진정한 사귐을 갖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두운 가운데 행하는 자입니까?
빛 가운데 행하는 자입니까?
이 말은 지난 주간 죄를 지었느냐 / 안 지었느냐? .. 그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하였으니 모든 삶을 다 공개하고 살았느냐/
감추고 숨기고 살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숨기고 감추고 누르고 살았습니다.
그것이 잘 사는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오늘도 교회에 오면서 얼마나 거울을 많이 보셨습니까?
예수님을 믿고도 숨기고 감추고 누르고 삽니다.
그래서 진정 예수님을 믿는 자유함과 기쁨을 경험하고 누리지 못하는 거죠.
항상 두려움 속에 삽니다
여러분 하나님과 친밀한 삶을 살기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 자신이 이미 만천하에 공개된 사람임을 아십니까?
하나님을 마음에 모시고 사는데 감추고 숨기고 할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사람이 보느냐/ 아니냐가 문제가 아닙니다.
이제는 솔직히 자신을 드러내고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두렵습니까? 아닙니다. 그것이 큰 기쁨입니다.
4절 우리가 이 글을 쓰는 것은
우리 서로의 기쁨이 차고 넘치게 하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가 사함을 다고 허물이 씻음을 받기 때문입니다.
▲9절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의로우신 분이셔서,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해주실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주 예수님의 피로 우리는 이미 모든 죄에서 구원받았기에
빛이신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또 죄를 지은 것이 있다면
이제는 즉시 회개하면 다시 예수님의 피로 깨끗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빛 가운데 사는 것입니다. 이것은 축복이고 기쁨입니다.
“회개하면서도 늘 똑같은 죄를 반복하게 되는데, 여전히 회개해야 합니까?”
좌절감을 느끼고, 회개하는 것도 소용없다고 여길만 합니다. 그러나 묻겠습니다.
“세수는 왜 매일하십니까? 어차피 또 더러워질 것 아닙니까?”
세수하고 샤워하는 다음 느낌이 빛 가운데 사는 자가 누리는 기쁨입니다.
죄 짓는 순간 순간 회개하지 않는 것은, 어차피 더러워진다고 세수 안하고,
1주일도, 한 달도 사는 자와 같습니다.
영적인 삶에 문제가 안 생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죄를 그때 그때마다 자백하는 자는,
결국은 성령께서 그 죄를 짓지 않게 만들어 주십니다.
☞계속 회개하는 사람이 죄를 이긴다 (tistory.com)
회개의 열매가 맺힐 때까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죄를 자백하는 것
뿐입니다. 이것이 빛 가운데 사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진정으로 회개했다면
다시는 그 죄를 짓지 않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물론 다시 죄를 짓지 않게 되는 것은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능력으로 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다시 그 죄를 반복하지 않아야 회개했다고 인정한다면,
우리는 너무나 절망적입니다.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죄짓지 않게 해 주실 분은 하나님 뿐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회개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쉽고, 간단했습니다.
그것은 죄를 인정하고 고백하라는 것입니다.
“고백한 것을 곧 회개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질문하는 분이 계십니다.
고백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아십니까?
아담이 타락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아담아, 아담아 네가 어디있느냐?”
하고 부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 것을 다 아시면서
“아담아, 아담아!” 하고 부르신 것은
자기 잘못을 고백하고 회개하기를 원하셨다는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그 때 아담이 “하나님 아버지여 죄를 지었습니다.
아버지가 따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따먹고 너무나 두렵습니다.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했더라면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은 자기 잘못의 책임을 먼저 하나님께 돌리고
그 다음 자기 아내 하와에게 돌리며 자기 잘못을 전혀 시인하지 않았습니다.
하와도 뱀이 먹으라고 해서 먹었다고 변명했습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이 회개를 못한 것이 죄의 속성이기도 합니다.
결국 하나님은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를 추방하시고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으로 에덴동산을 지키고
다시 들어오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내가 잘못했습니다.” 하는 것이 어려운 것은
우리 자아의 본성에 거스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부부 싸움 후에, 교인들과 다툰 후에, 길거리에서 교통사고 후에
“제 잘못입니다.” 고백하는 것이 쉬웠습니까?
일본은 수많은 증인과 증거가 있지만 “제가 잘못했습니다” 말을 못하지
않습니까? 우리나라는 어떻습니까? 죄를 고백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성령님은 우리 안에서 우리의 죄에 대하여 근심하십니다.
엡4: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그러므로 진정 구원받은 성도라면 누구나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는 것에 대한 마음의 찔림이 있습니다.
기도하지 못한 것, 말씀대로 살지 못한 것, 말씀을 보지 않고 사는 것,
전도하지 못한 것, 십일조하지 못한 것, 용서하지 못한 것,
사랑하지 못한 것, 성령의 근심입니다.
그 때 빛 가운데로 나올지, 어두움에 숨을 자신이 결정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그가 하나님과 친밀한 사람인지 아닌지가 드러납니다.
▲사울 왕과 다윗 왕의 차이가 빛 가운데 나오는 차이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을 택하셔서 이스라엘 왕으로 삼으시고
아말렉을 쳐서 멸절하실 것을 명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울 왕은 하나님 명령에 순종하지 않았고,
욕심 때문에 아각 왕을 사로잡고 기름지고 좋은 짐승들을 끌고 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진노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사무엘을 통하여
사울 왕을 꾸짖게 했습니다. 사울이 회개하도록 하기 위해 이렇게 하신 거죠.
그 때 사울 왕은 회개하지 않고 변명하였습니다. 두 번이나 기회를 주었는데
두 번 다 변명하고 심지어는 백성의 탓으로 돌리고
나중에는 또 하나님 탓으로 돌리는 사울 왕을 하나님은 버리셨습니다.
다윗은 사울보다 더 무서운 죄를 지은 사람입니다.
부하의 아내와 간음하고 부하를 죽인 자입니다. 있을 수 없는 죄를 지었죠.
그래서 하나님의 무서운 책망을 받았습니다.
그 때 다윗은 사울과 달리 그 자리에서 회개했습니다.
다윗은 변명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공개적으로 자기의 잘못을
통회자복하는 시를 지어서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고백했습니다.
시편 51편 1-12절, 17절이 다윗의 회개문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이 회개하지 않았다면 죽이셨을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과의 사귐은 죄와 허물을 감추지 않고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빛 가운데 사는 것입니다. 이것은 축복이고 기쁨입니다.
▲세계적인 중보기도 사역자들인 독일의 마리아 자매회가
독일 다름슈타트에 있습니다. 그 공동체에서는 매일 [빛 가운데 교제]
시간을 가지고 있습니다. [빛 가운데 교제]란 하루동안 지내면서
서로에게 본인이 미처 깨닫지 못한 그의 모습을 깨닫게 해 주는 시간입니다.
아름답고 복된 모습도, 추하고 악한 모습도 다 말해 줍니다.
서로에게 빛이 되어 주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합니까?
혹시 하루 사는 중에 자기도 모르게 어떤 잘못을 한 것이 있다면
하나님 앞에 회개하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게 된 이유가 있었습니다. 1944년 독일이 대대적인 폭격받는 중에,
다름슈타트에서 그들의 공동체를 건축을 했습니다.
밤마다 무서운 폭격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여서, 자신들 안에 죄가 있음을 느꼈습니다.
그들은 회개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빛 가운데 걷는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모이면 서로 자백하고 또 자백했습니다. 오직 주님의 긍휼만 의지했습니다.
그러한 그들에게 놀라운 평안과 확신이 임했습니다.
공동체의 각 건물들의 건축이 진행되었습니다.
폭격 중에 가나안 공동체가 세워진 것입니다.
마리아 자매회 안에 충만한 기쁨을 발견했습니다.
‘참 회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회개를 강조하니까, 늘 울기만 하고 침울하고 어두울 줄 알았는데 아닙니다.
빛 가운데 교제는 기쁨입니다. 빛 가운데 사는 자는 교만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정확히 알기 때문입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템플턴 상 수상 축하예배 때
“먼저 나는 죄인임을 고백합니다. 나는 일제 시대에 신사참배를 했습니다.
이런 죄인을 하나님께서 사랑하고 축복해 주셔서
한국교회를 위해 일하도록 나에게 이 상을 주셨습니다.”
▲저희 교회에서는 목요일 새벽기도회를 남자 교인들의 특별한 기도 모임을
갖고 있습니다. 처음 이 모임을 가진 것은 [교회를 믿음의 실험실로 만들자]는
취지에서, 남자 성도들이 매주 한 번 만나서 한 주간 동안 믿음으로 살았던
서로의 간증과 기도제목을 나누기 위하여 시작하였습니다.
이름을 [믿음으로 사는 남자들]이라고 붙였습니다.
참여 조건은 이제부터 믿음으로 살 결단을 하는 것입니다.
별의 별 결단이 있었습니다.
“술자리를 피하겠습니다.”
“먹고 사는 걱정 근심하지 않겠습니다.”
“집에서 화내고 짜증내지 않겠습니다.”
“자녀들을 위하여 매일 축복기도해 주겠습니다.”
“정직하고 죄 짓지 않겠습니다.”
“정상적인 상품만 취급하겠습니다.”
“손해 보더라도 거짓말하지 않겠습니다.”
“작은 법도 꼭 지키겠습니다.”
“검소하게 살아 꼭 빚 정리하겠습니다.”
“수입의 십일조를 드리겠습니다.”
“시간의 십일조를 드리겠습니다.”
“수요예배 금요철야 전에 영업을 끝마치겠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사는 남자들] 기도모임은 곧 어려움에 부딪혔습니다.
매주 모여 보니 믿음으로 살았다고 나누는 사람은 몇 사람 안 되었고,
회개할 것만 많은 것입니다. 그러니 모이는 것이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죠.
운영위원들이 다시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곧 응답을 받았습니다.
믿음으로 살려면 먼저 회개 생활부터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사는 남자들 모임]은
[회개하며 사는 남자들 모임]이 되었습니다.
한 주일에 한 번, 남자 성도들이 모여서 자신의 삶을 솔직히 고백하고
서로를 위하여 기도하였습니다. 한 주일에 한번이라도 공개 회개하는 기회를
가진 사람과 그런 기회를 가지지 못하는 사람이 얼마나 다른지 아십니까?
▲제가 안산광림교회에 부임한 첫 제자반이 마치는 날,
기도원에서 수료식을 할 때, 장로님 한 분의 회개가 있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벽을 허무는 축복을 느끼게 해 주셨습니다.
회개 모임이 영성일기 나눔방이 된 것입니다.
영성일기는 24 시간 주님을 바라보고 행복하게 동행하는 방법입니다.
자신의 삶을 기록하고 공개하는 것이 빛 가운데 사는 것입니다.
약5:16절에 보면 초대교회의 능력은 회개에서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죠.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마음이 답답하십니까? 하나님이 빛이라고 하셨는데
하나님 앞에 나아갈 자신이 없습니까?
그런 상태에서 머무르면 큰 일납니다.
여기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자여야 영원한 천국에서도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음에 감추인 죄를 하나님께 조목 조목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바라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이 고백한
그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 달리셔서 피흘려 죽으셨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분명히 “감사합니다. 주님, 제 죄를 씻겨 주시니 감사합니다.”
하고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빛 가운데 사는 삶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의 사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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