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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해석학(고광필) 9강 - 비유해석의 논리

by 【고동엽】 2021. 11.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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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유해석의 논리

성경에는 여러 문학의 장르가 있다. 역사, 시, 이야기, 편지, 비유등이다. 그렇다고해서 이런 장르가 문학, 시, 역사를 이야기 하기 위해서 사용된 것은 아니다. 메시아로 예언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워지는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과 역사를 인간이 잘 이해하고 받아드릴 수 있도록 설명하고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이 당신의 예정과 섭리 가운데 여러 문학의 장르를 통해서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 역사를 계시하신 것이다. 성경에 기록된 여러가지 장르 중에서 우리 주님께서 사용하신 문학의 장르의 하나가 비유이다. 예수님의 가르치는 방법 중에서 비유에 의해서 계시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담론(discourse)은 중요한 신학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복음서에 등장하는 비유의 수는 상당히 많으며 공관복음서에서 발견되는 예수님의 교훈 중의 삼분의 일이 비유로 추정한다. 로버트 H. 스타인, 오광만 옮김, <비유해석학>(도서출판 엠마오, 1993), 15. “No less than 35% of our Lord's teaching is in paarable. The amounts of parabolic teaching, vis-a-vis straight teaching, in the four Gospel sources are these: Mk:16%; Q:29%; M:43%; L:52%”( A.M. Hunter, Interppreting the Parables: I. the Interpreter and the Parables, Interpretation[Jan., 60]:14:70).


이 글은 예수님이 가르치는 방법 중에 여러가지 방법이 있는 데 예수님은 왜 비유를 통해서 가르치셨는가? 비유는 무엇인가? 비유의 중요성이 무엇인가? 비유를 통해서 주님은 무엇을 가르치셨는가?라는 질문을 가지고 비유 전반에 대한 이해에 기초를 둔다. 마지막에 두가지 비유를 언어적인 접근방법을 시도하여 비유해석을 시도한다. 그렇게 함으로서 비유해석의 논리를 살피게 될 것이다. 언어적인 접근방법은 성령의 내적 조명을 전제제하며 성경 언어의 사용을 문맥에서 살피므로서 성경의 자연스럽고 분명한 의미를 드러내는 데 역점을 둘 것이다.

I. 비유의 정의

로버트 스타인은 비유란 “천상적인 의미를 지닌 세상의 이야기”(an earthly story with a heavenly meaning)라고 주일학교에서 가르침을 받았다고 했다. 이 비유에 대한 정의가 완전한 것이 아닐지라도 이해의 인식이 완숙하지 못한 어린애들에게 가르쳐진 점에서 본다면 상당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비유란 세상의 이야기를 통해서 천상적인 의미를 보여주는 특성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영어사전 혹은 백과 사전에서 내린 비유의 정의는 대체적으로 “어떤 진리나 도덕적인 교훈을 전할 목적으로 사용되는 짤막한 우화(allegorical story)”나 “도덕적, 영적 진리를 밝히기 위해 일상 생활의 사건들, 혹은 사실들을 사용한 간단한 이야기”로 정의한다. 이 정의에서 보여지는 특성을 보면 도덕적 영적인 교훈을 전달하기 위해서 일상생활의 사건이나 사실을 사용한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유를 통해서 도덕적인 교훈이나 영적인 진리를 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비유를 정의하는 것은 비유의 전부를 말한 것이 아니라 일부분을 말하는 것에 불과이다.
비유라는 말은 헬라어로 파라볼레(παραβολη)이다. 그렇지만 신약 성경은 히브리 사상과 헬라적인 사상이 영향을 주었다. 히브리적인 사상은 구약이 히브리어로 쓰여졌으며 신약은 헬라어로 쓰여졌다는 사실만으로도 신약 성경의 비유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두 가지점을 다 고려 해야함을 알 수 있다.


희랍사상에 있어서 파라볼레라는 말은 비교(comparison). 예증(illustration), 유비(analogy)라는 의미로 쓰였다. 따라서 희랍사상에서는 파라볼레라는 말은 비교, 예증, 유비라는 말로 쓰여졌음을 알 수 있다. 우리 주님이 살으셨을 당시에 예수님의 모국어는 희랍어가 아니라 아람어였다(마 6:24; 12:27; 13:33; 5:22; 10:25; 16:17; 막 9:47; 15:34; 3:17; 5:41; 14:36; 요 1:42).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자들에 의하면 예수님이 희랍어를 알으셨을 개연성을 말하고 있다(막7:24-30, 31f; 15:f). 예수님에게 있어서 파라볼레가 무슨 의미를 가졌지는 알기위해서는 예수님이 사용하셨던 파라볼레라는 말이 희브리어와 아람어에서 무슨 의미를 갖고 있는가를 살펴보는 것은 중요하다. 파라볼레라는 말은 히브리어로는 마샬(לשׁמ)이며 아람어로는 마슬라(malthla)라는 말이다. 주전 2-3세기에 경에 희브리어로 된 구약성경은 헬라어로 번역되었다. 이 성경이 70인 성경 혹은 셉투젠트(Septuagint/LXX)이다. 이 성경에서 희브리어 마샬이라는 단어가 헬라어 파라볼레로 번역되었다. 따라서, 파랄볼레의 의미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마살이라는 단어를 생각해봐야한다.

II. 구약에서 마샬(לשׁמ)의 의미

구약에서 마샬이라는 단어는 ~과같다(to be like)는 동사에서 유래되었다. 선지자 에스겔은 “무릇 속담하는 자가 네게 대하여 속담하기(לשׁמי)를 어미가 어떠하면 딸도 그렇다 하리라”(16:44)에서나 삼상 12:12에서 “그곳의 어떤 사람이 말하여 이르되 그들의 아비가 누구냐 한지라 그러므로 속담(לשׁמל)이 되 가로되 사울도 선지자들 중에 있느냐 하더라”(12:12). “내가 입을 열고 비유(לשׁמ)를 베풀어서 옛 비밀한 말을 발표하리니”(시편 78:2). 이와같이 구약에서 마살의 의미는 속담(proverb/잠언)의 의미로 사용된다. 또한 마샬은 웃음거리 말(byword), 풍자(satire), 비웃음(taunt) 조소의 말(word of derision)을 언급하기도 한다. 로버트 H. 스타인, <비유해석학>, 18.

III. 신약에서 파라볼레의 의미

신약성경에서 사용된 파라볼레라는 용어의 의미는 속담(잠언/proverb)이라는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반드시 ‘의원아 너를 고치라’ 하는 속담(παραβολη)을 인증하여 내가 말하기를...”(눅4:23) 뿐만아니라, 파라볼레는 비유적 말(figurative saying) 혹은 은유적인 비유(metaphor)를 의미하기도 한다. 은유와 직유는 서로 다르지만 그 차이는 극소이다. 은유는 두 상이한 사이의 은근한 비교(implicit comparison)를 말하는 반면 직유(simile)는 ~(like) ~같이(as), 마치 ~인 것처럼(as if), ~보이다(seems)와 같은 언어를 사용하여 직접적인 비교(explicit comparison)를 말한다. 비유적인 말이란 이와같은 것의 확장(expansion)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갈길로 갓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6/All we like sheep have gone astray)에서 우리는 양 다 같아서라는 말은 직유(simile)이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의 누룩을 조심하라”(마16:6)에서 “누룩”은 은유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수사학>(Rhetoric) 2권 20장 2항에서 다음과 같이 직유와 은유의 차이점이 극소임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직유도 은유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둘 사이의 차이란 극소이기 때문이다. 만약 시인이 아킬레스(Achilles)에 대해 말하기를, “그는 사자처럼 질주했다”고 했다면 이는 직유이지만, 만약 그가 “사자”, 그가 질주하였다고 했다면 이는 은유가 된다. 직유나 은유로 표현된 것 모두가 용감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에 시인은 아킬레스(Achilles)를 그 의미가 내포된 사자라고 부른다(Loeb). Robert W. Funk Language , Hermeneutic, and Word of God(Harper & Row, 1960), 137. 펑크에 의하면 직유는 단순히 예증적인 것인 반면에 은유는 의미의 창조, 즉 의미가 발견되어지는 수단이라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비유에서 직유와 은유는 극소의 차이가 있다 했다. 그러나 직유와 은유는 서로 다른 의미를 갖고 있다. 예를 들면, “나는 선한 목자다”(요10:11)라는 문장과 “나는 선한 목자와 같다”에서 전자는 확장된 은유(παροιμια/ extended metaphor or metaphorical saying)이며 후자는 직유이다. 전자나 후자에 있어서 “나”는 예수님을 가르킨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선한 목자이시다 와 예수님은 선한 목자와 같다라는 말의 의미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에수님이 선한 목자라는 말은 요한 복음에서 보면 양을 위해서 자기 생명을 직접 버리신 유일하신 분이다. 그러나 선한 목자와 같다는 말에서는 유일하신 선한 목자라기보다는 그럴 수 있는(다른 사람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자기 목슴을 버리는 사람) 한 사람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직유는 예증적이지만 은유는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게 된다.

따라서, 비유에 있어서 직유와 은유는 한가지 점을 비교함에 있어서 직유는 직접비교하며 은유는 은근히 비교한다는 점에서 서로 다른 차이점이 있다. 비유에 있어서 직유가 명백한 비교의 차원을 넘어서 그림(picture)의 차원으로 발전할 때 우리는 이를 유사비유(similitude)라 하며 그림의 차원에서 이야기 차원으로 발전될 경우 이를 우리는 이야기식 비유(story-parable)라 한다. A.M. Hunter는 이야기식 비유와 유사비유의 차이를 말하면서 유사비유란 서로 유사한 진리나 과정을 기초로 하는 반면 이야기식 비유는 사람들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한 사람이 무엇을 하는가에 즉 과거 사건에 기초하고 있다고 했다. A.M. Hunter, “I. The Interpreter and the Parables,” Interpretation(Jan., 60), 14:72. 예를 들면 잃은 양의 비유는 유사 비유이지만 탕자의 비유는 이야기식 비유이다.

IV. 비유와 풍유(allegory)

비유와 풍유는 하나의 문학의 장르라는 점에 있어서는 풍유나 비유가 비슷하다. 비유는 대체로 보다 길어진 직유의 한 형식이지만 풍유는 보다 길어진 은유의 한 형식이다. 마이클슨은 비유와 은유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A. 버클리 마이켈슨, 성경해석학, 김인환 옮김 (크리스찬 다이제스트, 1995), 301-2.

그러나 그 용도에 있어서는 서로 다른 의미르 가지고 있다. 비유는 인간의 일상생활에 기초해 있고 단 하나의 의도를 가지고 있지만 풍유는 각 단어에 의미를 부여한다. 존 번얀의 <천로역정>이 그 일례이다. 번연은 많은 풍유를 사용하여 거룩한 순례자의 여정을 실감있게 이야기식으로 묘사한다.

V. 비유의 목적

예수님께서 비유라는 문학의 장르를 사용하셔서 무리들과 바리세인 서기관들에게 천국에 대한 교훈을 주셨다. 문제는 성경에 여러가지 문학의 장르가 있는데 왜 하필 비유를 사용하여 천국에 대해서 가르치셨는가이다. 여기에 비유의 독창성이 있다.

i)감추인 것을 드러냄

마태복음서 13: 34-35에서 마태는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시지 않으셨다고 했다. 그 목적이 무엇인가? 마태의 말을 들어보자: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譬喩)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 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선지자로 말씀하신 바 내가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ερευξουμαι κεκρυμμενα απο καταβολης κοσμου)함을 이루러 하심이라”(마13:34-35). 마태는 시편 78:2절을 말씀을 인용하여 예수님께서 비유롤 말씀하신 목적을 말하고 있다. 시편 78:2-3 말씀은 다음과 같다. “내가 입을 열고 비유를 베풀어서 옛 비밀한 말을 발표하리니” 에서 비유라는 말은 히브리어 마샬(לשׁמ)이다. 시편기자에 의하면 마샬을 사용하여 감추어진 옛 비밀을 선포한다(I will open my mouth in parables, I will utter things hidden from of old)는 말이다. 구약에서나 신약에서 비유란 창세때 부터 감추어진 것을 드러내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비유란 감추어진 것을 드러내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감추인 것을 “드러낸다”는 말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하면, 말로 설명하기가 어려운 것을 비유를 통해서 보여준다고 말 할 수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이다. 비유가 아니고서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사실적으로 실감있게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참으로 놀라운 방법이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은 보여지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일상생활의 사건이나 이야기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보여주었다. 결국 말할 수 없는 것은 말할 수 있는 것을 통해서 말하거나 보여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예수님은 말로 사실적으로 생동감 있게 설명하기 어려운 하나님의 사랑, 은혜, 심판, 보호하심, 인도하심, 통치, 주권, 부르심등을 비유를 통하여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말씀해 주셨다. 여기에 비유의 독창성이 있다.

ii) 마음의 깨우침(to awaken the heart of human being)

비유는 알레고리처럼 직접적인 대화방법(a form of indirect communication)이 아니라 간접적인 방법(a direct form of communication)이다. 알레고리는 독자가 알레고리를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것(심볼)을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그러나 비유는 일상적인 것을 통해서 천상적인 것을 보여줌으로서 그것에 대한 새로운 통찰력을 갖게해준다. 그렇게 함으로서 독자의 상상력에 충격을 주며 일상적인 비유를 통해서 보여준 것을 새롭게 보게(seeing something in a new way)한다. 즉 비유는 거울과 같은 역활을 한다. 비유는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방법이 아니라 독자의 잠재력을 발동시켜서 비유에서 보여준대로 살도록 도전한다. 즉 결단을 촉구한다. 따라서, 비유해석이란 청자가 비유를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청자가 비유에 의해서 해석되어지는 것이다. Sallie McFague, Speaking in Parables(Philadelphia:Fortress Press, 1975), 77.

제자들이 예수님께 왜 비유로 말씀하시는가에 대해서 질문을 했을 때, 예수님은 이사야의 예언이 이루어졌다고 말씀하시면서 비유로 말씀하신 것은 비유의 말씀을 깨닫는 자에겐 비유가 의미가 있지만 비유를 듣고도 깨닫지 못하면 그 의미가 은폐(to conceal) 됨을 말씀하셨다(마 13:11-17). 비유를 이해하려면 들을 귀가 있어야한다. “들을 귀”란 은유로서 육신적인 귀를 의미하지 않은다. 성령님의 조명과 감화에 의해서 들을 귀가 생겨야 한다는 말이다. 귀가 있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다 비유를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들을 귀가 있어야 비유를 이해할 수 있다. 말씀을 간절히 듣고자 하는 심정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비유를 말씀하시고는 늘 들을 귀가 있는자는 들으라고 말씀하셨다.


“깨우치다”란 말은 희랍어로 수니에미(συνιημι)로서 “함께 모으다”(bring togather)라는 말에서 왔다. 신약에서는 26번이 나오며 그중에 18번이 공관복음서에 나온다(마태복음9번, 마가복음 5번, 누가복음 4번). 공관복음서에 있어서 수니에미는 은유적인 의미로사용되며 동사로서는 “이해하다,” 그리고 명사로서는 “영적인 통찰력”(spiritual insight)이라는 의미로서 하나님과 예수님의 메세지와 관련을 갖고 있다. Exeget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Vol. 3, Hortst Balz and Gehard Schneider(Michgan: Willia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93), 307.


예수님은 듣어도 깨닫지 못한다에서 깨달음이라는 말은 마음으로 깨달음을 의미한다(마13:15). 마태복음 13:15에서 눈으로 보며, 귀로 들으며, 마음으로 이해한다라는 문맥에서 깨달음의 의미를 보면 하나님의 말씀의 이해는 머리로 하는 것이라는 보다는 마음으로 해야한다. 마음으로 이해하란 중요한 의미르 가지고 있다. 마음으로 이해란 깊은 이해를 의미한다. 성 어거스틴은 자신의 <참회록>에서 자신은 로마의 서사 시인 버질을 마음으로 이해했다고 고백했다. 칼빈도 그의 회심 후에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게 되었다고 고백했다. 깊은 이해란 사랑의 단계에 접어들어야 한다. 관계에서도 사랑의 관계성이 가장 깊은 관계성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아주 흥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다. 성경을 잘 알고 신학도 공부한 사람이 말하는데 성경을 읽는데 재미가 없다고 고백했다고 한다. 과연 우리는 성경을 재미로 읽어야 하는가? 재미로 읽어야 할 것이 따로 있다. 만화책은 재미로 읽지만 성경은 재미로 읽는 것이 아니다. 사도 바울에 의하면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배우며, 책망을 받으며, 책망받은 것을 고치며, 의으로운 생활을 훈련을 받어서 결국은 하나님의 사람(the man of God)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은 이 세상에서 선을 행하는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삶을 통해서 깨달음에 이르는 것이다(딤후 3:16-17). 따라서, 깨우침이란 비유에 의해서 자신이 해석되어져서 자신이 누구인가를 알게 되고, 알게된 그 말씀대로 살므로서 얻어지는 깨달음이라고 볼 수 있다. 비유는 거울과 같이 우리 자신을 사회를 기독교 공동체를 들여다보게 한다.

iii) 사실성과 생동감

예수님의 비유는 사실에 기초해 있으며 청자에게 생동감을 준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하나님의 나라를 정말로 사실적으로 생동감있게 묘사해준다. 가령 얼굴이 예쁘다고 할 때 그냥 예쁘다하면 얼마나 예쁜지 감을 잡을 수 없다. 그러나 달처럼 예쁘다고 할 때 “예쁘다” 말은 얼마나 사실적이고 생동감이 있는가? 마찬가지로 탕자의 이야기식 비유처럼 집을 나간 탕자가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야기식 비유가 아니고서 어떻게 다른 방법으로 그렇게 사실적으로 생동감있게 묘사할 수 있는가?

VI.비유의 해석사

비유의 해석사를 보면 초대 교회에서는 알렉산드리아 학파를 중심으로해서 풍유적인 해석을 시도했으며 안디옥학파에서는 문법적 역사적인 해석방법을 시도 했다. 전자는 비유에서 한가지 의도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각 말에 있는 여러 의미를 부각시켰으며 그 일레가 성 어거스틴의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의 풍유적인 해석을 들 수 있다. 후자는 문자적인 의미를 선호했다. 크리소스톰은 그의 마태복음 설교에서 비유는 각 단어에 의미를 부여하지 말고 비유의 주제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Nicene and Post-Nicene Fathers, First Series, Chrisostom Homilies on Gospel of Saint Mathew, Philip Schaff ed.(Hendrickson Publishers, 1994), 392, 394. Matt. 18:34, 35; Matt. 19:27(The saying is parable, wherefore neither it it right to inquire curiously into all things in parbles word by word, but when we have learnt theobject for which it was coomposed, to reap this, and not to busy one's self about anthing further).

종교개혁에 이르러 루터와 칼빈은 성경의 풍유적인 해석에 반대해서 문자적인 의미를 주장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루터는 자기의 주장에 일관성을 결여하여 풍유적으로 해석하는 경향도 있었다. 그러나 칼빈의 비유해석은 일관성이 있고 비유해석에 대한 중요한 통찰력을 준다.


칼빈은 그의 공관복음서 주석에 있어서 비유해석에 있어서 중요한 통찰력을 준다. 그는 포도원 비유(마20:1-16)의 주석에서 “이 비유의 내용을 상세하게 조사하려는 것은 소용없는 호기심의 발로이다. 우리는 그리스도게서 우리에게 말씀하려고 하신 의도가 무엇인지를 탐구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추구하지 말아야한다”고 말했다. John Calvin, Calvin's Commentaries, Vol. 16 (Michigan:Baker Book House, 1989), 409. 번역은 로버트 스탄의 <비유해석학> 80에서 인용.
뿐만아니라 칼빈은 비유해석에 있어서 풍유적인 해석처럼 여러 의미를 찾는 것이 아니라 단일한 요점과 의미를 찾으라고 권면한다. 윗책, 176.


비유가 말하려는 한가지 의도의 자연스럽고 분명한 의미를 드러내도록 칼빈은 권면한다.


근대에 와서 비유해석사에 하나의 획을 그은 신학자는 아돌프 율리허(Adolf Julicher), 다드(C. H. Dodd), 예레미아스(Joachim Jeremias)이다. 율리허는 <예수 비유의 강설>(Die Gleichnisreden Jesu)에서 비유의 해석은 풍유적인 것이 아니라 비유란 단 하나의 비교점(a single point of comparison)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에버하르트 융겔은 율리허의 비유해석에 대한 요점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1. 비유의 기본 양식은 비교화법이다. 2. 비교화법은 두 개념의 유사성에 구성된다. 3. 비유는 논리적 판단들로서 이해된 두 명제의 유사성에 의해 구성된다. 4. 이 명제들은 개념들의 관계들로서 이해된다. 5. 이 개념관계들은 비유의 구상부(具象部)와 내용부(內容部)로서 서로 구별된다. 6. 이 둘 사이에는 하나의 오로지 비교점(vergleichspunkt), 하나의 비교점(tertium comparationis)이 있는데, 이것은 두 명제 사이에서의 판단관계로서 구상부와 내용부 사이의 유사성을 구성한다. 7.이 유사성(ομοιον)은 동일성(ισον)의 근소치로서 이해될 수있다. 8. 비유는 증명수단으로 이해되면서 회의의 극복에 도음을 주며 동시에 이해력으로 이해력을 극복하는 바, 이때 우리는 분명히 판단 능력, 즉 논리적 판단들(명제들)을 형성하는 능력으로 이 이해력을 이해해야 한다. 9. 비유는 지식의 확대를 위해 이른바 인식 수단으로서 이용된다. 에버하르트 융겔, <바울과 예수> (이화여자대학출판부, 1990), 147-48.


율리허의 비유해석이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비유의 의미를 구약 성경보다는 헬라적인 전통에서 보려고 한점이 취약점이다. 뿐만아니라 비유에 있어서 하나의 의미를 도덕적인 면에서 조명하려고 한 것은 올바르지 못하다.


다드와 예레미아스는 비유는 단순히 도덕적인 교훈을 주는 것이라기 보다는 종말론적인 이해을 통해서 분명해질 수 있다고 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종말론적인 이해를 의미한다. 다드에 있어서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나라란 현재적이고 미래적인 의미의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다. 미래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 사역을 통해서 이미 왔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의 전체(in its entirity)가 왔으며 그 나라는 현제적이라는 것이다. 다드는 하나님의 나라가 근접해 있을지라도 미래적인 사건으로 이해하고자 한 철저한 종말론이 아니라 현제에 실현된 종말론이라고 한다. C.H. Dodd, The Parables of the Kingdom(New York:Charles Scribner's Sons, 1961),35. 다드가 미래에 완성될 될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의 도래가 이미 현재로 예수님의 사역에서 이루어졌음을 강조함으로서 미래적인 종말을 무시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 에레미아스는 다드의 종말론적인 베유해석을 더 상세하게 발전시켰다.


다드와 예레미아스의 종말론적 비유해석은 비유의 삶의 자리(Sitz im Leben)를 찾는 것을 중요시 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비유가 말해진 삶의 정황 즉 말해진 콘택스를 중요시 여겨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비유해석에 있어서 중요한 키가 된다는 것이다.

VII. 언어적인 접근

비유해석에 있어서 언어적인 접근은 푹스(Ernst Fuchs)에 의해서 시작된다. 푹스는 비유해석에 있어서 종말론적인 해석이나 삶의 자리를 중요시하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적인 각도에서 비유해석을 시도를 한다. 언어를 통한 비유의 해석이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푹스는 자신의 책 <해석학>에서 비유들을 “신약성서에서 움직이는 언어 활동들로서” 설명하며 예수의 선포를 명시하는 “언어사건”(sprachgeschen)으로 이해한다. 여기서 언어사건이라는 말은 언어를 통해서 일어난 사건이라는 말이다. 비유와 연계시켜 생각한다면 비유는 비유의 언어양식 즉 비유의 내용(content)과 형식(form)을 분리시키지 않고 이해되어져야한다는 의미이다. 비유는 비유의 언어양식에 의해서 이해되어져야한다는 말은 중요한 말이다. 가령 예수님의 비유를 통해서 말해진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이해는 하나님의 지배를 비유로서 화제에 올린다. 비유들 속에는 하나님의 나라 그 자체가 표현되어 있고 비록감추어진 형태로 표현되있기는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인격과 사명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따라서, 예수님의 비유에 대한 청중의 응답은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 자신에 대한 응답이다.


푹스의 비유해석에 대한 언어 접근적인 방법은 비유해석에 새로운 점을 부각시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푹스는 언어의 생명력이나 언어가 갖고 있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차원의 언어의 힘을 묘사하는데 있어서는 취약점이 있다. 푹스는 일상 언어의 사용에다 성경언어를 대치시킴으로 성경의 언어를 이해하고자한다. 이것은 불트만처럼 실존상황에 성경언어를 적용시키는 것과 같다. 그렇게 함으로서 푹스는 택스트의 지평보다는 해석자의 지평을 강조함으로 성경의 객관성을 무시함으로서 주관적인 성경이 된다. James M. Robinson and John B. Cobb, Jr. eds., New Frontiers in Theology Vol. II. The New Heremeneutic(New York:Harper & Row, Publishers, 1964), 111-146.
이글의 마지막에 가서 또 다른 언어적인 차원에서 비유해석을 시도할 것이다. 문맥에서 성경언어의 사용을 보는데 역점을 둘 것이다. 언어적인 접근방법은 성령의 조명을 전제한다면 비유해석에 하나의 빛을 던져주는 방법이 됨을 보여주게 될 것이다.


VIII. 하나님의 나라의 개념

예수님의 비유는 교훈적인 면도 있지만 그것이 비유의 전부는 아니다.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말했다. 이것은 중요한 신학적인 의미를 시사해준다. 하나님의 나라의 개념은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이다. 더군다나 하나님 나라의 개념을 어느 한 국가의 개념에서 본다면 더욱 그렇다. 하나님의 나라는 한국이나 미국과 같은 한 나라의 국가개념으로 파악하기는 매우 어렵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희랍어로 나라라는 말은 바실레이야(βασιλεια)이다. 그렇지만 그렇게 선명하게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의 의미를 부여해 주지 않은다. 바실레이야는 히브리어로 말쿠스(תוכלמ/malkuth)로서 왕도(kingship), 왕의 지배(kingly rule or rein), 하나님의 주권(sovereinity)을 의미한다. 구약에서 특히 선지서에서 하나님 나라의 개념은 미래적인 대망으로 이해되어졌다. 이점에서 본다면 하나님의 나라는 종말론적인 개념으로서 하나님께서 창조한 우주와 인간을 다스리시는 왕으로서, 주권자로서 하나님의 통치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고자 하시는 목적의 성취을 의미한다. <구석사와 하난님의 나라>, 오광만편역 (풍만출판사, 1989), 139. C. H. Dodd, The Parables of the Kingdom, 22-23.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을 통해서 시작되었으며, 예수님의 사역(기적, 복음 선포, 십자가와 부활)을 구체화 되었으며 그리스도가 다시 오심으로 완성될 것이다. 그렇다면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나라는 현제적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미래적이다.

a)현제적 하나님의 나라

예수님은 여러가지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말한다. 겨자씨의 비유, 누룩비유, 가라지의 비유등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비유이며 현제형으로 서술한다. “for the kiingdom of God is like”라는 표현이 반복된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하나님의 나라는 현제적인 것으로 묘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희랍어 현제형이 현제이면서 현제진행도 포함한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이 오심으로 현제 진행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예수님은 자신이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내쫓는다고 비방한 무리들에게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고 말했다(눅11:20/ But if I drive out demons by the finger of God, then the kingdom of God has come upon you/NIV; RSV; KJV:is come upon you). 여기서 임하였다는 동사는 에프사센(εφθασεν)로서 파사센(φθανω)의 부정과거(the aroist tense)로서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는 그 자체가 하나님이 나라가 이미 왔음을 시사한다.


세레 요한은 예수님의 선구자로서 예수님의 길을 예비한 세례 요한도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라고 전했다(마3:2).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례 요한은 감옥에서 정말로 그가 전파한 예수님이 참으로 오실자인가를 확인하고 싶어서 자기 제자들을 예수님게 보내어 그 사실여부를 질문할 때 예수님은 자신의 사역을 말함으로 대답했다.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 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긋함을 받으며 귀머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더라”(눅7:22)고 말하라고 하셨다. 여기서 직접 하나님의 나라라는 말이 나오지는 않지만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의 도래(사29:18-19)를 암시하는 것을 예수님 자신이 행하시는 이적과 연결시키고 있다. 다시말하면, 구약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예언된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약속의 성취이다. 이것은 역사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일어나는 획기적인 새로운 사건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분리될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과 기적들과 비유들과 가르침과 전파하심 속에서” 역동적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사람들 가운데 나타나게 된다. 안토니 A. 후크마, 유호준 역(기독교문서선교회, 1990), 64.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서 이미 왔으며 진행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b)미래적 하나님의 나라

예수님은 자신의 공생애를 시작함에 있어서 그이 처음 메세지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박했다고 선포하고 있다. 마가복음 1:15에 “가라사대 때가 찾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때(καιρος)가 차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육신을 입고 이땅에 보내셨다. “때가 찾다”는 말은 구약에서 선지자들에 의해 예언된 때가 지금 찾고 그 왕국은 지금 예수님 자신의 인격속에 존재하고 있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왔으니”(ηγγικεν) 라는 말은 에기소(εγγιζω) 현제완료형으로서 “임박하다,” “가까이 오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번역에 있어서 현제완료형인 에기소를 어떻게 번역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안고 있다. 에기소가 현제완료형이지만 “임박하다,” “가까이 오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면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이 오심으로 시작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나라가 구체적으로 인간에게 실재적 영향은 예수님의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메세지를 받아드림으로서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 주님이 다시 오심으로 완성될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는 현제적이면서도 미래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회개하고 믿으라”는 예수님의 메세지는 하나님의 나라에 초청이다. 이 초청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복음이 영접되고 영접하고 회개할 때 하나님의 통치가 우리 가운데 시작한다. Calvin's Commentaries, Vol.16, i, 224-225.


그래서, 예수님을 믿고 살 때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된다. 이 세상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통치하심에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에서 산다. 따라서,우리의 사명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며 거룩한 순례자로서 다시 오실 주님을 대망하며 살아가고 있다.


비유를 통해서 묘사된 하나님의 나라는 ?재, 인간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유토피아나 인간의 마음 속에 있는 도덕적인 성향이 아니라 예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인간을 입으시고 역사 안으로 오심(the decisive intervention of the living God on the staage of human history for man's salvation)에 있다. 둘째,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역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역사(the proclamation of an act of God in Jesus Christ)의 선포 즉 복음의 선포에 있다. A.M. Hunter, I. “The Interpreter and the Parables,” Interpretation(Jan., 60), 16:84.
따라서,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의 통치와 주권의 특성을 우리에게 제시해준다고 볼 수 있다.


요약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종말론적인 개념으로서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시작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나라의 마지막은 우리 주님이 다시 오심으로 끝을 맺는다. 하나님의 나라는 영역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에 있다. 따라서, 비유는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의 특성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스타인은 그의 저서 <비유해석학>에서 “현재적 실재로서 하나님의 나라,” “결단을 요구하는 하나님의 나라,” “비유에 나타난 성부하나님,” “최후신판”으로 비유에 나타난 하나님의 나라를 특정지운다. 다드는 그의 저서, The Parables of the Kingdom에서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비유(parables of crisis) 성장에 대한 비유(paraables of growth)로 나눈다. 예례미아스는 그의 저서, The Parables of Jesus에서 예수의 비유의 메세지라는 제목하에 비유를 통해서 보여준 하나님 나라에 대한 특성을 다룬다. 필자는 예수님의 비유 중에서 둘을 택하여 언어적인 접근방법을 시도할 것이다. 여기서 언어적인 접근은 성령님의 조명을 통해서 성경의 문맥에서 언어의 사용을 중요하게 보는 데 역점을 둔다. 다시 말하면 누가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성경언어를 사용하는가를 보는데 역점을 두고 그 의미를 파악하는 접근방법이다. 하나는 씨뿌리는 자의 비유요 다른 하나는 잃은 양의 비유이다.

IX. 비유해석의 실재

I)씨뿌리는 자의 비유

씨뿌리는 자의 비유는 공관복음서(마태 13:1-9; 막4:1-9; 눅8:4-8)에 나온다. 다소 뉴앙스의 차이는 있지만 서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공통점이란 다 같이 씨뿌리자의 비유이다.

a)비유의 주제

마태복음 13:2에 보면 예수님께서 바닷가에 앉으시매 큰 무리가 예수님께 모여들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씨뿌리는 자의 비유로 큰 무리를 가르치있다. 왜 큰 무리가 예수님께 모여들었는지 구체적인 말씀은 없지만 이 무리들이 의에 굶주리고 영적인 양식을 구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따른 것은 아니다. 대다수의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주옥같은 산상수훈 주시고 병자을 고치시며 복음을 전파했지만 귀신의 왕 바알세불의 힘을 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하는 헐뜻는 바리새인도 있었다(마12:25). 예수님은 그 당시를 말하여 “악하고 음란한 세대”(마 12:39)라고 하시며자신의 마음 아픈 심정을 토로하기도 했다. 무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떡을 먹고 베부리기 때문이었다(요6:26). 이러한 무리에게 예수님은 비유로 천국에 대해서 가르치셨다.이런 사람에게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가르칠 수 있는가? 비유로 가르치셨다.


호크마 주석에 의하면 씨뿌리는 자의 주제는 “천국복음 전파와 이에 따른 반응을 보여주는 씨뿌리는 자의 비유”라고 했다. 레마 주석에서는 주제는 “땅”에 있으며 그래서 “네 종류의 마음”이라고 했다.


칼빈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령한 가르침(교리/doctrine 마땅히 믿어야할 교리)을 씨에 비교한다고 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씨의 교리” 혹은 “복음의 교리”(the doctrine of gospel)이다. 이 교리는 아무데서나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라 좋은 땅(잘 가꾸어진 밭/ fertile or well cultivated soil)에서 열매를 맺음을 알려준다고 했다. Calvin's Commentaries, V.16: ii, 100.


칼빈의 경우는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열매맺는 마음에 초점이 있다. 칼빈의 주제가 말씀에서 뜨지 않는 주제라고 볼 수 있다. 칼빈의 것을 좀더 구체화 시킨다면 마태복음 13:19에서 찾을 수 있다. 마태복음 13:18-23은 씨뿌리는 자의 비유에 대한 우리 주님의 해석이다. 씨는 천국의 말씀(the word of kingdom/τον λογολ της βασιλειας)이다. 이렇게 보면 씨뿌리는 자의 비유의 주제는 “천국 말씀의 교리”라고 볼 수 있다. 천국 말씀은 자체가 항상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씨와 같지만, 사람 안에서 열매를 맺는 것은 인간 밭(마음)의 성질에 따라서 다르다. Calvin's Commentaries, V.16:ii, 114.


여기서도 천국 말씀인 씨가 문제가 아니라 인간 마음의 밭이 문제가 된다. 따라서, 예수님은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마음의 밭에 심어야 잘 자라서 풍성한 열매를 맺는가를 비유를 통해서 말씀해 주신다.

b)주제의 비유의 전개과정

시부리는 자의 비유에 의하면 인간은 네가지 종류의 마음의 밭을 가지고 있다. 길가와 같은 마음의 밭, 돌밭같은 마음, 가시나무밭같은 마음, 좋은 밭과같은 마음이다. 그렇지만, 결과적으로 본다면 열매를 맺는 마음의 밭과 열매를 맺지 못하는 마음의 밭으로 나눌 수 있다. 본문이 제시하는데로 나눈다면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와 깨닫지못하는 자로 대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하면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없기 때문이다.


천국의 말씀은 인간의 머리에 심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심어야한다. 그런데 말씀이 자라서 열매를 맺으려면 말씀을 듣고 깨달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 그렇다면 비유에서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는 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 본문에서 “깨닫는”(συνιεις)다는 말의 의미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마음의 밭의 문제를 아는 것이다. 깨달음이란 영적인 통찰력이라고 할 수 있다. 통찰력이 없는 사람은 아무리 가르쳐도 이해를 하지 못한다. 인간에게서 깨달음이란 무엇에 의해서 깨닫는 것이지 억지로 넣어줄 수는 없는 것이다. 만약에 넣어줄 수 있다면 신앙생활을 하기가 어렵지 않을 것이다. 병원 의사가 처방하듯이 머리가 아프면 아스피린을 먹으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앙생활에서 깨달음이란 그것과는또 다른 논리를 갖고 있다. 본문에 보면 천국 말씀을 듣고 살다보면 그것 때문에 환난이나 핍박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말씀으로 견디고 이기면 신앙의 뿌리가 자라게 된다. 이런점에서 보면 환난이난 핍박은 괴로운 것이 아니라 믿음의 뿌라가 자라게 하는 비료와 같은 것이다.


이 세상에 살다보면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을 벗어나기 어려운 것이다. 세상은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세상 것에 마음을 빼앗기거나 지나친 애착심을 가지면 이런한 세상 것이 우리 마음을 오염시켜서 말씀이 자랄 수 없게 만든다. 그래서 결국 결실을 맺지못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아는 것이 깨달음이다. 그렇다면 결국 천국에서 사는 신자의 깨달음이란 고난과 핍박과 세상의 염려와 유혹에서 견디어 냄으로써 옥토와 같은 마음의 밭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깨달음이란 누가복음 8:15에 보면 “무엇을 하지말라”는데 중점이 있는것이 아니라 천국말씀을 굳게 붙드는데 중점이 있다(눅 8:15/hearing the word, hold it fast in an honest and good heart). 파도가 치고 바람이 불면 배가 흔들리지만 굳게 닷을 내리면 파산하지 않은 것처럼 천국 말씀을 우리 마음의 닷으로 삼고 굳게 붙잡고 있으면 다소 어려움은 있지만 오히려 어려움이 어려움이 아니라 믿음의 뿌리를 자라게 하여 열매를 맺는 풍성한 삶을 살게한다.


마가복음에서는 말씀을 듣고 받아드린다고 했다. 여기서는 말씀을 듣고 받아드린다는데 역점이 있다. 말씀을 받아드린다는 말은 순종한다는 말이다. 우리 주님도 고난으로 순종을 배웠다(히8:5). 그렇다 순종하기 위해서는 고난이 따르기 마련이다. 우리 마음 안에 심기워진 천국 말씀은 순종으로 자라가는 것이다. 화분에 심기운 나무는 물을 주어야 자라지만 우리 마음에 심기워진 천국 말씀은 순종함으로 자라가는 것이다.

c)주제 비유의 적용

우리 주님은 천국 말씀을 큰 무리에게 가르치셨다. 그렇게 함으로서 그들이 천국에서 100배, 30배 60배 결실을 맺는 풍성하고 감격에 찬 삶을 살도록 원하신다. 그래서 비유로 가르치신 것이다. 1996년전에 비유로 무리를 가르치신 주님은 동일하게 오늘 우리에게 천국말씀의 교리를 비유로 말씀하신다. 우리 주님의 천국 말씀의 교리를 마음에 받아드리십시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의 밭에 심기워 진 하나니의 말씀이 순종을 통해서 자라 풍성한 열매를 맺도록 하십다.


우리는 누구나 천국에서 살고 싶어한다. 그리고 풍성한 열매를 맺고 살고 싶어한다. 어떻게 그러한 삶을 살 수 있는가? 비록이 세상은 고난과 핍박이 있으며 세상에 유혹과 염려가 있을지라도 두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우리 믿음의 뿌리를 자라게 하여 풍성한 결실을 맺개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천국 말씀을 굳게 붙들면, 우리의 마음은 옥토와 같은 마음의 밭이 될 것이다. 우리의 삶은 감격과 환희가 넘치는 풍성한 삶을 살 것이다. 깨닫지 못한자에게는 천국의 비밀은 비밀로 남어있을 뿐이다. 귀있는 자는 들어라.

ii)잃은 양의 비유

a)비유의 주제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우리 주님께 나아왔다. 그런데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어떻게 우리 주님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함께 먹을 수 있는가? 하며 원망했다. 따라서 우리 주님은 세가지 비유로 가르치신다. 잃은 양의 비유(3-7), 잃은 드라크마 비유(8-10), 탕자의 비유(11-32)이다. 잃은 양의 비유는 그 중의 하나이다.


본문에 나오는 세리와 죄인들은 당시에 죄인들로 취급받았던 사람이다. “악한 사람과 접촉도 하지말고 율법을 가르치지도 말라”는 랍비의 가르침에 따라 천한 집업의 종사자들, 병약자, 세리 가난한 사람과는 식탁을 같이 안했다고 한다. <레마>, Vol. 5, 누가복음 하(임마누엘, 1991), 231.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인들이라는 말은 실감이 잘가지 않은 말이다. 요즘 인기리에 KBS 2에서 방영하는 “조광조”라는 사극을 보면 이조 당시에 양반이 아닌 쌍놈들과 비교할 수 있다. 신분이 쌍놈이기 때문에 사람대접을 받지못하고 천대를 받으며 살았던 그런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양반동네에 들어가지도 못하며 들어가다가는 맞어죽어도 말을 못하는 그런 사람을 의미한다고 하면 더 실감이 날 것이다.


어떤 주석가는 사람은 모두다 죄인이기 때문에 회개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올 수없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고 했다. 또한 레마 주석을 보면 “죄인들을 영접하시는 예수”가 주제라고 한다. 이것은 죄인을 영접하시는 예수님(눅15:1-2)에 초점이 마추고 있다. 이와같은 주제가 틀린 것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이러한 주제는 본문의 초점에서 다소 빗겨간 주제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주어진 비유의 동기를 무시하는 주제이기 때문이다.


본문에 보면 잃은 자란 말과 찾는다, 회개라는다는 말이 많이 반복되어 나오고 있다. 예수님은 눅 5:32에서 의인을 불으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려 온 것이라고 자신의 오신 목적을 말하고 있다. 눅 19:10에 보면 인자의 온 것은 잃은 자를 찾아 구원하려 오셨다고 우리 주님의 오신목적을 말하고 있다. 본문을 잘관찰ㄹ해보면 잃은 양의 비유를 우리 주님이 바리세인과 서기관들에게 주셨다. 그들은 말씀을 들으러 온 죄인과 세리들과 주님이 함께 먹고 마심보고 원망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잃은 양의 비유를 그들에게 주신 것이다. 눅 15:7에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라는 결론 부분에서 보면 잃은 양의 비유는 죄인들에게 주신 것이라기 보다는 바리세인과 서기관들에게 주신 것이다. 따라서, 본문의 주제는 “한마리 잃은 양을 찾아 회개시키려 오신 예수님”이 되심을 알 수 있다.

b)주제 비유의 전개과정

예수님이 누구에게 잃은 양의 비유를 주셨는가? 당시에 사람 대접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들으로 왔을 때 우리 주님은 그들을 영접하고 함께 먹고 마시셨다. 우리 주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러 온 사람은 누구나 다 영접하시고 함께 먹고 마시셨다. 그런대도 바라세인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원망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주님의 마음으로 세리와 죄인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선입견으로 그들과 우리 주님의 행동을 본 것이다. 주님의 눈으로 사람을 보지 못할 때 불평과 원망이 나오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참기 힘든 말이 원망하는 말일 것이다. 아무리 성격이 온순한 사람도 원망을 들으면 참기가 힘든 것이다. 모세같이 겸손이 지면에 깔린 사람도 백성들이 무리바에서 물이 없음을 원망할 때 하나님이 반석을 명하여 물을 내라 하였는데 반석을 지팡이로 두번치므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했다(민20:1-13). 그러나 우리 주님은 바리세인과 서기관들에게 원망을 들으면서도 그들에게 잃은 양의 비유를 주신 것이다. 우리 주님은 자기를 원망하는 사람까지도 사랑하시고 회개하기를 원하신다. 예수님은 참으로 우리 주님이 되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시다.


그러면 비유에서 잃은 자란 누구인가? 어떤 점에서 회개해야 하는가? 두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한편으로는 잃은 자란 세리와 죄인들이요 다른 한편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서시관들이다. 전자는 예수님을 모르기 때문에 잃은 양이다. 잃은 자들이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러 와서 예수님의 초청에 응답하고 예수님과 함께 먹고 마심으로서 그들은 회개했다고 볼 수 있다. 후자는 어떤점에서 잃은 자인가? 그들은 당시 종교지도자들이었지만 에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지 안했다. 그래서 잃은 자이다. 이런점에서 보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지 않은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잃은 자이다. 탕자의 비유에서는 죽은자라고 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지 않은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살아있으나 죽은자와 같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길이요 생명이요 진리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바리새인과 서기관은 어떤점에서 회개해야할 죄인인가?


바라세인과 서기관들은 당시의 종교지자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우리 주님의 마음이 없었다. 천하의 어느것과도 바꿀 수 없는 한 생명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며 그런 자를 찾아서 회개시키며 구원하러 오신 우리 주님의 마음이 없는 것이 바리세인과 서기관들의 문제점이다. 회개해야할 점이다. 말씀을 들으러 온자의 신분이 누구이든간에 영접하고 함께 먹고 마시는 우리 주님의 마음을 배우려는 마음이 없는 것이 그들의 문제이다.


예수님은 한 마리 잃은 양을 찾아 구원하러 오셨다고 했다(눅19:10). 한 마리 잃은 양을 찾아서 해매시는 우리 주님의 마음을 모르는 자나 배우고자 하는 마음이 없는 자는 바리세인과 서기관들과 같은 사람이다. 바리세인드과 서기관들은 선한 목자가 아니다. 싻군 목자와 같은 자들이다.
한 마리 잃은 양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영접할 때 목자의 기쁨은 차고 넘친다. 목자의 기쁨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바라세인과 서기관들이 회개하고 이런 목자가 되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잃은 양 비유를 주신 것이다. 이것이 천국에 사는 자들의 끼쁨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천국말씀이 있고 회개와 용서와 기쁨이 있는 곳이다.

c)비유 주제의 적용

잃은 양의 비유는 우리 주님이 바리세인이나 서기관에게 줄 뿐만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 주신 비유이다. 우리는 바리세이나 서기관들이 아닌가? 어떤 점에서 우리는 잃은 양이며 회개해할 사람인가?


한 마리 잃은 양을 찾아 해며 찾아서 회개시키고자하시는 우리 주님의 마음이 없는 자가 바로 바리세인이요 서기관이다. 싻군 목자이다. 예수를 주님으로 알지못하는 사람은 길 잃은 양과같은 것이다. 한 마리 잃은 양을 찾아 해매시며 찾아서 구원하시고자 하는 우리 주님의 마음을 배우는 목자가 되어야 한다.

X. 정리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가르쳐 주셨다. 비유를 통해서 보여준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를 의미한다. 비유를 통해서 보여준 하나님의 나라는 현제적이며 미래적이다. 다시말하면, 주님이 이땅에 육신을 입고 오심으로 하나님의 나라는 왔으며, 우리 주님의 사역, 십자가 부활을 통해서 하나님은 당신의 통치의 특성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리고 우리 주님이 다시 오시므로서 하나님의 나라는 완성될 것이다.


우리 주님은 씨뿌리는 자의 비유를 통해서 천국비밀을 보여주셨다. 우리 신자는 천국에서 사는 천국백성이다. 천국백성은 천국말씀을 먹고 사는 자이다. 이 세상에서 천국백성으로서 살아야할 우리에게는 주님을 믿기 때문에 핍박이 있고 환난이 있다.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도 있다. 그러나 천국백성으로서 천국말씀을 마음에 간직하고 굳게 붙잡고 순종함으로서 살아갈 때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당하는 고난, 핍박, 유혹, 염려는 어려움이 아니라 우리 신앙의 뿌리를 자라게 하는 비료가 될 것이다. 하나님을 찬양케 하는 찬송이 될 것이다.


천국말씀은 머리에 심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심어야 한다. 심기워진 말씀이 자라서 풍성한 열매를 맺도록 하기 위해서는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순종은 고난을 수반한다. 주님도 고난으로 순종을 배우셨다(히 8:5). 이것이 천국의 비밀이다. 천국비밀은 깨달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비밀그대로 남어있게 된다. 썩지 않는 밀알이 되는 것이다.


잃은 양의 비유는 잃은 한 영혼에 대한 우리 주님의 한없는 사랑과 마음을 배울 수 있다. 주님은 한 마리 잃은 양을 찾아 구원하려 이 땅에 오셨다. 잃은 한 영혼을 찾아 회개시켜 구원하러 오신 우리 주님의 마음을 아는자가 참 목회자요 전도사요 신자이다. 오늘날의 바리세인과 서기관은 누구인가? 한 영혼을 찾아 구원하시고자 오신 우리 주님의 마음을 배우지 못한 자이다. 이것을 깨닫는 자가 천국의 비밀을 깨닫는 자이다. 들을 귀가 없는 자에게 비유의 의미는 은페된다. 비밀로 남아 있을 뿐이다.


존 번얀은 그의 명저 <천로역정에서>에서 잠을 자다가 꿈을 꾸었다로 시작한다. 그는 자기가 쓴 책을 읽고 깨달음이 없다면 <천로역정>은 신자가 천성을 향하여 가는 거룩한 순례길에서 조심하고 피할 것이 무엇이며 어떻게 순례길을 가야하는가를 제시하는 여로가 아니라 하나의 꿈이야기가 될 것이라고 결론에서 말했다. 마찬가지로 비유의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하면 비유를 통해서 보여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천국 비밀은 비밀로서 남아 있을 뿐이다. 이 세상은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세상이 아니라 악마가 지배하는 지옥같은 세상이 될 것이다.


비유해석은 비유에서 여러가지 의미를 찾는 것이 아니라 비유에 나오는 한가지 의도를 찾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비유해석은 한편으로는 성령의 내적조명을 통해서 비유에 나오는 성경의 언어를 누가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말하는가를 봄으로서 비유의 자연스럽고 분명한 의미를 들어내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비유의 자연스러운 의미를 들어낼 뿐만 아니라 그 의미가 우리 자신의 신앙생활로 표현된 의미가 되어야 한다. 그렇게 될 때 이 세상에 대한 염려, 재리에 대한 유혹, 믿기 때문에 당하는 고난과 핍박이 있어도 그것은 우리에게 두려움을 주는 염려, 유혹, 핍박, 고난이 아니라 우리 신앙의 뿌리를 자라게 하여 풍성한 열매 맺는 삶을 살 수 있게 하는 비료가 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잃어버린 한 영혼을 찾아 구원하시기 위해서 지금도 찾아 해매시는 우리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이 세상을 볼 때 이 세상은 부질없고 허무한 세상이 아니라 천국복음이 전파되어야할 세상이다. 천국복음 전파는 천국백성이 이 땅에서 해야할 궁극적인 사명인 것이다. 이것이 비유를 통해서 배울 수 있는 비유해석 논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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