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기독교강요 해설

by 【고동엽】 2021. 11. 7.

1. 서론, 생애 및 주요 사상

2. 기독교강요의 발전과정 및 주요내용

- 최종판을 중심으로 강의를 함

 

<참고서적>

 

1. 라틴어 직역 기독교강요 / 존 칼빈. 문병호 역 / 생명의 말씀사

2. 기독교강요 요약(최종판) / 존 칼빈, 이형기 / 크리스찬 다이제스트

3. 기독교강요 / 제임스보이스. 지상우 역 / 크리스찬 다이제스트

4. 칼빈, 생애와 사상 / 이양호 / 한국신학연구소

5. 하나님의 절대 주권 / 김봉환 / 다사랑

6. 존 칼빈의 생애와 업적 / 파커, 김지찬 / 생명의 말씀사

7. 종교개혁과 칼빈의 영성 / 정승훈 / 대한기독교서회

8. 교회의 개혁자 요한 칼빈 / 정성구 / 하늘기획

9. 칼뱅신학 / 최윤배 / 장로회신학대학교 출판부

10. 칼빈의 생애와 저서들 / 불페르트 더 흐레이프, 황대우, 김미정 역 / SFC

11. 칼빈과 개혁신앙 / 김은수 / SFC

12. 칼뱅의 인간 / 이오갑 / 대한기독교서회

 

 

1강. 총론

 

1. 현실

1) 성경 이외의 가장 중요한 필독서임에도 읽는 성도들은 극히 소수에 불과하다.

2) 읽더라도 신앙과 신학에 피와 살이 되도록 소화시킨 사람은 극히 드물다.

 

2. 왜 기독교강요를 읽어야 하는가?

1) 성경공부, 신학공부, 경건공부에 가장 유익한 책이다

2) 성경해석의 길잡이다. 안경이요 지도이다.

- 성경의 가장 중심내용은 무엇인가?

- 우리는 성경에 어떤 자세로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가?

3) 종교개혁이전의 신학을 총 정리한 책이다

- 약 1,600년간의 성경해석의 전통을 체계적으로 정리

- 교부신학, 종세신학, 개혁신학의 엑기스를 모아놓은 책이다.

4) 종교개혁 이후의 개신교역사를 이해하는 열쇠다

- 기독교강요가 종교개혁 이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전체 서양문명과 개신교 역사, 특히 장로교와 개혁교회의 역사에 미친 영향은 거의 절대적이다.(기독교강요는 개혁신학의 목차)

- 현대개혁주의 신학은 기독교강요의 내용을 상세하게 발전시킨 결과물이다.

5) 기독교강요는 칼빈의 영적 지적 신학적 자서전으로 현대 목회자들의 산거울이다.

6) 기독교강요의 내용을 통해 나의 수준 및 교회의 수준과 상태, 위치 등을 점검할 수 있다.

- 나는 기독교강요의 내용을 이해할 만큼 신앙과 신학적 수준을 가지고 있는가?

- 우리 개신교회는 어떤 교회인가?

- 우리는 개신교 신앙에 어느 정도 충실한가?

 

3. 기독교강요의 역사적 배경

 

1) 종교개혁 2세대로서의 문제의식과 과업

- 종교개혁 1세대인 루터는 당시 카톨릭 교회의 신학적 혼란 속에서 복음의 핵심인 이신칭의의 문제를 새롭게 발견했다. 즉 개인적으로 ‘내가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는가?’라는 문제에 대한 해답을 성경적으로 찾은 것이다.

- 그러나 2세대인 칼빈은 새롭게 출발한 개혁교회가 카톨릭 교회와 영구적인 분리가 확정된 다음, 개혁교회의 중심을 바로 세워야 했다. 즉 반종교개혁적인 카톨릭 교회와 구분되고 또 잘못된 급진적 개혁파들(재세례파)의 주장을 무너뜨릴 수 있는 참으로 성경적인 교회관과 교회제도를 확고하게 세울 필요가 있었다. 그러므로 평생을 통해 칼빈의 주된 관심은 루터의 구원론적인 관심을 넘어 성경이 말하는 삶의 전 영역에 대한 부분을 전체적으로 종합하되 특히 ‘참 교회란 무엇인가?’라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교회론을 바르게 정립하는 역사적 책무를 가졌다.

 

2) 개혁신학의 총정리 및 기초 확립

- 칼빈이 활동하기 전에 개혁 1세대들은 약 20년간 개혁신학에 대한 나름대로의 뜨거운 토론과 연구를 진행했지만 많은 이견들로 인해 혼란이 있었다. 칼빈은 이러한 1세대들의 신학적 성과를 계승하고 개혁교회의 신학적 기초를 체계화하고 종합할 필요를 느꼈다. 기독교강요로 인해 방향감각을 상실했던 개혁교회가 제자리를 찾게 되었고, 종교개혁이 완성되었다.

 

4. 명칭에 대한 언급

- 중세시대에는 거의 'summa'였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summa theologia'(신약요약본)

- 오늘날 Institute는 학교나 세미나 등지에서 단순히 '강론'으로 사용

- 정확한 의미는 '기독교 교리설명서' 또는 기독교적 신념의 기초교훈'

 

5. 저술목적

- 프랑스 개신교도들에게 기독교의 바른 가르침을 전하기 위해

- 개신교에 대해 무지한 프란시스1세 국왕에게 로마카톨릭의 잘못된 교리를 밝히고 개신교 신자에 대한 핍박을 중단할 것을 호소하기 위해

 

6. 저술의 발전

- 1534년 또는 1535년부터 구상하고 저술하기 시작

- 후기로 갈수록 지식의 성장을 보였다. 첫째, 성경논평으로 성경지식이 깊어졌고, 둘째, 교회선구자들을 계속 연구하여 더 많은 교부들을 인용했으며, 특히 어거스틴에 대한 집중적인 연구가 있었다. 셋째, 다방면의 경험을 축적했다. 제네바에서는 파렐과 함께 반대자들의 줄기찬 대항을 경험했고, 마틴 부처와는 스트라스부르크에서 3년 동안 목회경험을 쌓았으며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 등 많은 신학적 여행을 통해 국제적 문물과 인식을 넓혔다.

- 초판에서 최종판에 이르기까지 계속 형식과 구성이 바뀌어져 갔다. 그러나 내용의 중심적 주제는 바뀌지 않았다. Warfield는 '더하고, 발전시키고, 정의내렸다'고 했다. Battles 박사는 1550~1559년 사이의 칼빈의 발전과정을 도표로 만들어 내었다.

- 번역과정을 통해 세계에 전파되었다. 1559년 라틴어판, 1560년 불어판, 16세기 토마스노튼에 의해 영어판, 존 알렌이 두 번째 번역자, 19세기 헨리 베버리지, 1960년 Battles 등의 영어판이 출간됨

 

7. 기독교강요 평가

- 역사에 가장 영향을 끼친 책 중의 하나다(McNeil)

- 종교개혁에 있어서 가장 설득력 있는 신학적인 글(Steven Ozment)

- 루터는 체계적인 신학을 저술하지 않았다. 루터는 멜랑히톤의 Luci Commune에 의해 정리되고 체계회되었다. 멜랑히톤이 이것을 저술한 1521년에 칼빈은 개신교도가 아니었다. 그러나 칼빈의 기독교강요에 비하면 이 책은 매우 열등하다.

- 파렐도 'Somayer'(신학의 요약)를 썼지만 기독교강요가 출간되자 자신의 책을 더 이상 읽을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8. 기독교강요의 특징

 

① 성경적이다.

- 강요에는 7,000개 이상의 성경구절을 인용했다. 제 2권 뒤에는 성경의 참고문헌 색인이 있다. 칼빈은 우선 성경적인 신학자였고 2차적으로 철학, 논리, 언어, 그리고 인간이 사용하는 다른 모든 도구를 사용했다(Battles). 칼빈은 성경의 표절자이다(Reed 박사/콜럼비아대). 칼빈은 제대로 된 성경해석의 창시자(Warfield). 칼빈은 성경발췌에 있어서 감히 그 누구도 비교될 수 없다(McNeil)

(예) 로마서: 162회(초판)- 598회(최종판) / 시편: 67회- 580회 / 마태: 185회- 542회 등

 

② 신학적이다.

- 기독교강요를 집필하는 중에 칼빈은 신, 구약 주석을 동시에 완성해 갔다. 그만큼 칼빈은 깊이 있는 성경의 연구와 해박한 성경지식을 소유했다. 강요가 전체의 숲을 보는 것이라면 주석은 성경 속의 나무를 보는 것이다.

- 칼빈의 강요는 매우 구조적이고 체계화된 신학이다(Allister McGrrath). 성경적 내용들을 주제별로 잘 배열하고 정돈하여 신학적 기틀을 마련했다.

- 칼빈은 성경을 자기 식으로 창조한 것이 아니라 초대교부들의 해석전통에 충실했다. 그들의 풍부한 신학유산을 존중한 것이다. 즉 성경해석에 있어서는 크리소스톰에게서, 신학은 어거스틴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특히 어거스틴은 칼빈의 영적 스승이었다. 어거스틴의 모든 저작품을 칼빈은 완전히 섭렵했다. 칼빈은 어거스틴으로부터 나왔다. 이외 초판에서 앞의 두 사람뿐 아니라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데마스티우스, 키케로, 오리겐 등을 광범위하게 인용하고 있다.

- <세네카의 관용론 주석>은 칼빈의 이러한 고전 탐구적 자세를 증명하고 있다. 칼빈은 당대 최고의 고전전문가였다.

- 카톨릭의 신학적 토양을 형성한 중세 스콜라신학자들의 신학적 문제점들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비평했다. 안셀름, 롬바르드, 토마스 아퀴나스, 버나드가 칼빈에 의해 연구되어졌다. 유독 버나드는 칼빈에 의해 긍정적 평가를 받았다.

- 기독교강요는 책상머리에서만 쓰여진 것이 아니다. 스트라스부르그와 제네바에서의 목회경험을 담았다. 그래서 메마른 교리책이 아니라 살아있는 신학 전집이다.

 

③ 논증적이다.

- 칼빈은 성경적 진리를 체계화시키고 카톨릭과 재세례파의 잘못된 주장들을 하나하나 배격하고 변증했다. 칼빈은 결론적으로 '이것이 우리가 믿어야 하는 것이고 이것이 오류이고 거짓이며 우리가 믿지 말아야 할 것이다'고 분명히 매우 강하게 선포했다.

- 기독교강요는 적대자들의 논쟁으로 인해 점점 내용이 불어났다. 카톨릭과 극단적인 종교개혁파들은 칼빈의 기독교강요를 두고 끊임없이 공격을 해 왔다.

- 칼빈은 진리를 간단하고 명쾌하게 서술하는 것을 저작의 원칙으로 삼았다. 그는 간결체의 대가였다. 그러면서 힘이 있고 우아하며 감동적인 문학적 요소도 가지고 있다.

 

9. 실천적 문제들

 

1) 26살에 어떻게 이런 대작을 쓸 수 있는가?

- 천재성 때문인가? 시대적 교육환경 때문인가? 신적 계시 때문인가?

- 16세기 유럽의 주된 교육은 토론과 논술, 그리고 수사학을 기초로 하였다. 그리하여 자신의 생각을 분명하게 말이나 글로 표현하는 능력을 어릴 적부터 소유하게 되었고 14~5세에 이르면 대학교육을 통해 어학과 전문교육과정을 이수 받았다.

- 칼빈은 어릴 때부터 라틴어를 섭렵했다. 라틴어를 익혔다는 것은 1,600년간의 신학적 보고를 자유롭게 열람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는 뜻이 된다. 그리고 칼빈은 히브리어와 헬라어에도 능통했다. 오늘날 신학적 대가가 드문 것은 어학공부가 뒷받침이 안 되기 때문이다. 적어도 신학자는 영어 이외 헬라어, 히브리어, 라틴어, 독일어(혹은 불어)까지는 기본적으로 마스터해야 한다.

- 칼빈의 학구열은 무서울 정도였다. 하루 4시간 이상 수면을 취하지 않았다. 평생을 고시생 같이 공부했다. 이로 인해 위장병으로 평생 병약한 생활을 했다.

- 칼빈은 선배들의 어깨를 딛고 일어섰기 때문에 더 멀리 볼 수 있었다. 신앙선배들의 피와 땀의 결실을 흘려보내지 않고 완전히 숙지하였다.(현재 21세기를 사는 우리는 오히려 칼빈보다 더 후퇴하여 초대 교부시대의 현세적, 기복적 신앙의 수준에 머물러 있다.)

 

2) 기독교강요가 너무 어렵다?

- 책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당사자의 신학적 지식이 더 문제다. 기독교강요가 이해되지 않는다면 신학적 탐구와 연구가 부족하다는 반증이 된다. 이해될 때까지 공부하고 영적. 지적인 씨름을 해야 한다.

- 기독교강요를 이해하기 위해선 사전 신학적 지식을 가져야 한다. 특히 종교개혁 당시의 1세대들의 신학 사상과 카톨릭신학, 그리고 급진적 개혁신학을 이해해야 하며 어거스틴을 비롯한 중세신학도 섭렵해야 한다. 그리고 칼빈 이후의 발전된 개혁신학의 요체를 점검해야 한다. 신학서론과 조직신학은 필수 공부에 해당한다.

 

10. 각 판별 주요 내용

 

1) 초판(1536)

- 1535년 8월 23일에 완성. 1536년 3월에 스위스 바젤의 토마스 플라터가 516p의 포켓판 사이즈로 인쇄 출판.

- 저술 동기는 첫째, 교리문답서가 필요했고 둘째, 박해를 중단하도록 왕에게 탄원하며 성경의 원리와 기독교의 교리를 설명할 필요가 있었다.

- 총 6장 중 처음 4장은 루터를 모델로 삼았고 5-6장은 논쟁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다.

- 내용구성

1장. 율법편

1) 하나님을 아는 지식 2-3) 우리를 아는 지식 4) 율법의 의 5-6) 율법의 본질 7-23) 십계명 해 석 24-25) 율법의 완성= 사랑 26-32) 율법의 의의 성취 33) 율법의 3중적 용법 34-38) 하나님 의 의의 전가

2장. 믿음편

1-4) 하나님 말씀을 믿음 5-9) 삼위일체 하나님 10-34) 사도신경 해석 35) 신망애

3장. 기도편

1-13) 기도법 14-30) 주기도문 해설 31-33) 말씀대로 기도하기

4장. 성례편

1-10) 성례의 본질과 의의 11-23) 세례 24-41) 성찬식 42-51) 가증함의 극치-카톨릭미사 52) 오 직 두 가지 성례 53) 성례의 거행

5장. 카톨릭 거짓 성례들

1) 성례의 제정 2-10) 견진례에 대해 11-44) 고해성사에 대해 45-48) 종부종사에 대해 49-66) 신품성사에 대해 67-71) 혼인성사에 대해

6장. 교회편

1-13) 그리스도인의 자유 14-34) 교회의 권세 35-56) 시민정부와 정치

 

2) 2판(1539)

- 1539년 제네바에서 추방당한 후 스트라스부르그에서 거주하면서 저술. 17장으로 내용을 확대했다. 이 때 <로마서주석>도 함께 저술했다.(1540)

- 처음 2장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신론)과 인간을 아는 지식(인간론)으로 구성했고, 삼위일체, 신구약의 관계, 회개, 이신칭의, 섭리와 예정, 그리스도인의 생활 등의 내용이 추가.

- 구속사적 관점에서 교리를 더욱 조직화했다.

- 지식의 경건성과 회개의 장을 신설함으로써 개혁주의 구원론의 길을 열었다.

- 이신칭의와 선행에 대한 교리를 첨가했다

- 신구약의 일치와 차이에 대한 장을 신설함으로서 신구약이 실체에 있어서는 동일하나 경륜에 있어서는 다르다는 원리를 수립했다.

- '황금의 작은 책'이라고 불리는 기독교인의 삶의 교리라는 이름의 장이 신설되었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과 비교되는 개혁신학의 정수가 탄생한 것이다

 

3) 3판(1543)

- 1543년에 교회론 부분을 강화시켰다.

- 맹세에 관한 장을 신설했다.

- 교회와 정부에 대한 논쟁들을 광범위하게 다루었다.

- 사도신경에 대한 해설 부분을 4개의 장으로 분리했다.

 

4) 4판(1550)

- 3판의 연장으로 성경구절과 교부들의 작품인용이 확대되었다.

- 1550년. 구조를 정리하기 위해 21장으로 하고 각 장을 절로 세분화시켰다.

 

5) 최종판(1559)

- 1559년에 완성(1564년에 임종). 루터와 멜랑히톤과 쯔빙글리의 신학을 들여다 볼 필요가 없게 되었다.

- 이 최종판의 출판으로 요약판과 안내서가 봇물처럼 쏟아져 나왔다.

- 총 4권 80장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으로 늘어났으며, 권-장-절의 점강적 구조를 취했다.

- 사도신경의 순서대로 책의 내용을 배열했다. 이것이 가장 합당한 순서와 방법이라고 말했다.

- 내용구성

NO 제목 내용 비고
01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들
하나님의 인식, 인간의 지성, 부지, 부도덕,
지속적인 하나님의 통치, 3위일체 등
1권
1-5장,11-15장
02 성경론 성경의 필요성, 성경의 권위, 신빙성, 6-10장
03 섭리론 선택과 유기, 예정 16-18장
04 원죄론 아담의 타락과 반항, 그리고 저주, 노예상태,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속 2권
1-7장
05 구약과 신약 유사성, 다른 점들 10-11장
06 기독론 중보자, 성육신, 두 본성, 그리스도의 삼중직, 구속자의 기능, 구원자의 자격 12-17장
07 중생, 회개 신앙의 정의, 기독교인의 삶 3권
1-10장
08 이신칭의 정의, 무조건적인 은혜, 유의사항 등 11-16장
09 기도, 예정론 약속들, 자유, 기도, 선택, 에정, 부활 17-25장
10 교회론 참교회, 교역자들, 교황주의, 권징, 서원, 4권
1-14장
11 성례 세례, 성찬, 유아세례 등 15-19장
12 국가와 정부 교회와의 관계 20장

 

 

2강. 칼빈의 생애

 

1. 출생과 성장, 교육

 

- 1509년 7월 10일 프랑스 피카르디주 노용시에서 출생

- 가족: 아버지/ 제라르 꼬뱅(+1531년), 어머니/ 잔느 르프랑, 형/ 샤를, 남동생/ 앙뚜완(+1573), 프랑수아, 자매/ 마리와 무명의 누이

- 어머니는 미모가 출중했고 경건한 여인이었으며 자녀들에게 헌신적이었다. 특히 어린 칼빈을 기도모임에 늘 데리고 다녔으며, 노용 근처의 우르스캄프에서 성인 안나의 신체 일부분에 입맞춤을 했다고 말한다.

- 본처가 죽은 뒤 칼빈의 어머니와 재혼한 아버지는 행정관, 공증인, 참사회 재무관리인 등의 자리에서 일하며 자녀들을 위해 재정적 토대를 마련했고 이를 기반으로 자녀들의 교육에 많은 투자를 했다. 아버지는 아들들이 모두 성직자가 되기를 원했다. 주교 비서관의 직분을 이용하여 귀족들과 교분을 쌓았으며, 자녀들이 귀족들과 교분을 쌓도록 하였고, 12살의 칼빈을 명목상의 자리인 노용 대성당의 보좌신부의 자리에 올렸다.(당시 성당의 직책을 가진 사람은 월급이 주어졌고, 이것으로 충분히 학비를 충당할 수 있었다)

- 12살의 칼빈은 귀족들의 학교이자 노용 대성당 참사회 산하 교육기관인 콜레쥬 드 카페뜨에 다녔다.

- 1523년 8월(14세)에 몽모르 가문의 자녀들과 함께 파리로 유학을 떠나 3달 동안 '콜레쥬 드 라 마르슈'에 다니다가 '콜레쥬 드 몽테규' 학교에 다녔다. 마르슈에서 스승 코르디에(1479~1564)를 만나 라틴어를 연구했으며, 1536년 제네바에서 교육책임자로 스승을 앉혔으며, <데살로니가전서 주석>을 헌정했다(1550.2.17). 그리고 1559년 제네바아카데미를 설립할 때 코르디에는 지도적인 임무를 수행했다.

- 1523년 12월에 에라스무스와 라블레가 수학한 '몽테규'로 전학했다. 신학연구를 위한 예비과정으로서 이 학교는 주로 수사학과 논리학 등 논술훈련을 행했다. 당시 학문의 체계는 이 과정을 이수한 문학사가 된 이후에야 구체적인 학문을 시작할 수 있었다. 이 학교는 매우 엄격했으나 칼빈은 부유한 학생들과 함께 기숙사생활을 했으며 '기소자'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비평적인 정신으로 뛰어난 활약을 했고, 여기서 1533년 파리 소르본 대학의 학장으로 유명한 연설을 했던 스승 니콜라 콥(1505~1540)과 사촌 피에르 로베르 올리베타누스를 만났다. 칼빈은 체계적인 교육훈련에 의해 진지하며 지적 재능과 탁월한 기억력, 예리하고 명확한 판단력, 문제와 상황들을 핵심을 파악하고 그것을 융합하여 자기의 것으로 삼는 능력을 배양했고, 전적인 헌신으로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 그러나 갑자기 아버지의 요구에 의해 칼빈은 1527년 경(18세)에 오를레앙대학으로 옮기어 그곳에서 법학을 수학한다. 이러한 학과변경은 아버지가 노용 참사회와 빚은 갈등으로 파면되었고 이에 아버지는 칼빈을 법관으로 만들어 그들에게 복수하고자 하는 것이 계기가 되었다. 칼빈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고 법학공부에 매진했으며 피에르 레투알로부터 보수적인 학문연구에 영향을 받았다. 오를레앙에서 칼빈은 학생이기보다는 교사 역할을 더 많이 감당했다. 학교에서는 칼빈을 교사로 임명하여 학생들을 가르치도록 허용했다.

- 1529년(20세) 봄 무렵에 칼빈은 부르주대학으로 옮겨 법학을 계속 전공했다. 이곳에서 칼빈은 안드레아 알치아티로부터 고전연구를 통해 르네상스 정신을 수학했다. 베자에 의하면 칼빈은 엄청난 공부벌레였다. 자신이 읽었던 것을 완전히 암송하고 묵상하기 위해 주로 아침시간과 저녁시간을 온전히 헌신했으며, 식사를 자주 거르기 까지 하여 이로 인해 몸이 극도로 심약하게 되었고, 훗날 많은 질병을 안고 살아가는 원인이 되었다. 칼빈은 이곳에서 멜키오르 볼마르(1497~1561)를 만나 헬라어 연구에 깊이를 더했으며 1546년 <고린도후서 주석>을 그에게 헌정했다.

- 1531년(22세) 5월 26일 아버지가 사망하자 칼빈은 법학공부를 접고 1532년(23세)에 다시 파리로 돌아와 '콜레쥬 로얄'에서 공부한다. 이 학교는 프랑수아 1세의 개인적인 보호 아래에 있던 교육기관으로 여기서 칼빈은 러페르브의 성경적 사고에 깊은 감화를 받은 인문주의자들의 스터디그룹에 참여하게 된다. 그는 이 때 (1532년 4월 4일) 첫 번째 대작인 <세네카 관용주석>을 출판했다. 이 책은 학식 있는 인문주의자들의 그룹에서 자신의 분명한 입장을 밝히기 위한 것으로 세네카(4~65)가 네로 황제(54~68)에게 관용을 강권했던 작품을 고전작가들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함께 탁월한 해석을 감행한 탁월한 작품이 되어 사람들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한 마디로 이 작품은 박식한 칼빈이 파리, 오를레앙, 부르주의 수많은 인문주의자들에게 자신의 진가를 여실히 보여준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이 시기에 칼빈에게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이다. 엄청난 지식을 가진 칼빈의 고전 작가들에 대한 관심은 천천히 성경 읽기와 연구에 빠져들게 하였고, 그에 못지않게 교부들에 대한 커다란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칼빈은 이것을 자신의 회심이라 불렀다.

 

2. 회심과 파리사건

 

- 칼빈은 자신의 회심에 대해 루터와는 달리 "차라리 말하고 싶지 않다'며 말을 아끼고 있다. 그러나 시편주석(1557) 서문에서 말한 자서전적 소개를 통해 그의 회심을 엿볼 수 있다. 그는 천주교의 깊은 수렁에서 자신을 끌어내기가 쉽지 않았다고 하면서 공부하는 과정에서 참된 경건의 어떤 맛을 본 뒤 더 순수한 교리를 만났으며 '예기치 못한 회심'이라는 급격한 변화가 생겼다고 표현하고 있다. 즉, 이 칼빈의 참된 경건에 대한 추구는 '더 순수한 교리'로 나아가게 만들었고 그의 회심은 과정과 함께 일어난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보인다.

- 그렇다고 칼빈이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회심을 했다는 것은 아니다. <사돌레토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자신의 내적 싸움에 대해 엄청난 공포가 자신을 사로잡았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러나 칼빈은 복음을 통해 진정한 안식을 얻었으며 그러한 힘으로 천주교와 결별할 수 있었다.

- 한편 베자에 의하면, 칼빈은 오를레앙에서 사촌 피에르 로베르를 만났는데 그가 칼빈이 종교개혁에 접하도록 한 통로였다는 것이다. 칼빈은 오를레앙과 부르주의 학창시절과 러페르브 인문주의자들을 대상으로 이미 여러 번 설교를 행했는데 사촌의 영향을 받아 하나님께 헌신하기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 1533년(24세) 11월 1일, 칼빈의 스승인 콥이 소르본대학의 학장으로 취임하는 날이었다. 그 날은 만성절이었으며 칼빈은 다분히 개혁주의적인 내용의 연설문의 작성자였다. 칼빈은 여기서 기독교철학으로 묘사된 복음에 대한 찬사와 팔복의 의미고찰, 율법과 복음에 대한 성경적 견해, 핍박과 칼로 위협하는 상황에서 진리의 말씀으로 싸워야 한다는 학생들을 향한 호소가 취임석상에서 터져 나오자 참가자들 모두 경악했으며 콥은 며칠 뒤 기소되자 즉시 바젤로 피신하고 말았다. 파리는 술렁이기 시작했다. 11월 말경부터 소르본 신학부는 국왕에게 커져가는 루터파의 영향에 대해 경고하였고, 대대적인 구속조치가 이어졌다. 국왕은 이단으로부터 수도를 보호하기 위해 여러 조치들을 취했으나 독일 개신교 군주들과의 외교적 관계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마련한 것이 추방이었다. 베자가 이 때 추방당했다.

- 칼빈은 잠시 신부인 루이 뒤튀에라는 앙굴렘의 친구집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친구의 도움을 받아 훌륭한 도서관을 이용할 수 있었다. 이 때 기독교강요 초판의 대강을 마련했다. 1534년 초에 다시 마그리트 공주의 보호아래 있던 스승 러페르브를 방문하였고, 푸와티에에서 설교를 했으며, 그곳에서 새로운 성찬식을 선보임으로서 개혁교회를 설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때 몇몇 광신자들에 의한 영혼의 수면교리를 반박하기 위해 '영혼수면설'을 집필했다.

- 그런데 급진적인 종교개혁가인 앙뚜완 마르쿠(+1561)가 파리에 돌풍을 몰고 왔다. 그의 설교에 영향을 받아 많은 공공지역이나 파리의 외곽 등지에 '미사란 견딜 수 없는 악용이다'는 내용의 벽보들이 나 붙었다. 심지어 1534년 10월 18일에는 왕의 침실문에게까지 벽보가 발견되자 프랑스는 난리가 벌어졌다. 국왕은 이것을 뮌스터에서 일어난 재세레파의 폭동사건에 비견되는 혁명적 반란이라 규정하고 대대적인 검거명령을 내렸다. 수많은 희생자들이 발생했다. 검거는 곧 사형이었다. 칼빈의 친구인 에티앙도 이때 처형되었다.

- 1535년(25세) 1월 초 칼빈은 앙굴렘의 친구 뒤티예와 함께 바젤로 급히 피신했다. 그리고 마르티아누스 루치아누스라는 가명으로 바벨의 작은 동네인 성 알반에 정착했다.

 

3. 스위스 바젤과 기독교강요 초판

 

- 바젤은 독일에서 루터의 종교개혁이 있은 지 불과 2년만인 1529년 4월 1일자로 카톨릭의 미사를 중단하기로 결정한 개혁운동의 선구적 도시였다. 에라스무스, 외콜람파디우스, 츠빙글리 등이 종교개혁을 주도했고, 상인단체인 '길드'가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들은 시민들의 성찬 참여를 조사하는 책임을 맡았다.

- 바젤로 온 칼빈은 먼저 피신한 콥을 다시 만났다. 그리고 히브리어를 가르치고 있었던 세바스티안 뮌스터(1480~1553), 바젤교회의 책임자이자 헬라어 전문가인 그리내우스, 법학자인 보니파치우스 아메르바흐(1495~1562)를 만나 교제를 나누었으며 그 해 7월 1일에는 에라스무스를 다시 만났다. 당대의 위대한 인문주의자인 에라스무스는 1년 뒤에 병사했다.

- 1535년 바젤에서 칼빈은 중요한 두 개의 작품을 저술했다. 첫 번째는 올리베타누스가 번역한 프랑스 성경의 서문과 신약성경의 서문을 작성했다. 1530년대에 다양한 성경번역이 있었는데 특히 1534년 러페르브의 신약성경은 23판까지 출판될 정도로 유명했다. 올리베타누스는 원어의 의미에 충실한 번역성경을 완성했고 칼빈은 여기서 성경이 교육받지 못한 대중에게 적합하지 않다는 주장을 반박하며 하나님이 목자들을 선지자로 그리고 어부들을 사도들로 삼았음을 상기시켰다. 두 번째 작품은 앙굴렘의 뒤티예 친구집에서 토대를 닦은 기독교강요 초판을 완성한 것이다. 먼저 칼빈은 1535년 8월 23일자에 프랑스 왕에게 바치는 헌사를 책의 서문으로 실었다. 그는 왕에게 복음주의자들을 핍박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조목조목 변증했다. 칼빈은 작품 구성에 있어서 루터의 교리문답을 연계시켰다. 그는 율법, 믿음, 기도를 연속적으로 취급했다. 4장에서는 세례와 성찬의 중요성을 논했다. 그리고 마지막 장에서 기독교인의 자유, 교회의 권세, 세속정부를 논했다. 칼빈은 마지막 두 장에 매우 특별한 관심을 가졌다. 여기서 그의 문체와 어조는 변증적이며 격렬하다. 그는 자신이 조국의 포악함과 부패한 교회를 고발했다.

- 1536년(26세) 플라터에 의해 기독교강요가 출간되었다. 이 때 칼빈은 샤를 데스페비여라는 가명으로 친구 뒤티예와 함께 페라라로 이동했다. 그곳에는 루이 12세의 딸이자 러페르브의 제자인 레나타(1510~1575)가 복음에 헌신하고 있었다. 칼빈은 그녀의 궁정에 머물면서 그녀와 우정을 쌓았으며 네락의 마그리트공주와도 인연을 맺었다. 짧은 체류기간이었지만 칼빈은 이곳에서 두 통의 편지를 쓴다. 첫 번째 편지는 자신의 옛 친구 니콜라 뒤쉐멩이 카톨릭 미사에 참석하는 문제에 대한 조언을 구하는 문제에 답신을 한 것이고, 두 번째는 제라르 루셀에게 보낸 것이다. 루셀은 마그리트 공주에 의해 올로롱의 주교로 임명되었는데 이에 대하여 칼빈은 교회 직분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 칼빈은 뒤티예와 함께 페라라에서 다시 바젤로 돌아왔다. 이 후 뒤티예는 제네바로 여행을 했고 칼빈은 잠시 파리로 갔다가 1536년 7월 초 어느 날 저녁에 제네바에 도착했다.

 

4. 제네바(1536~1538)

 

- 뒤티예와 여러 통로를 통해 칼빈의 명성은 이미 제네바를 뒤덮고 있었다. 칼빈이 도착하자 파렐은 즉시 칼빈을 찾아갔다. 그리고 칼빈의 계속되는 반대에도 불구하고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을 함께 할 것을 강요하다시피 했다. 그 때의 광경을 칼빈은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자신의 끈질긴 요청에 내가 반응하지 않자 그는 나에게 저주하기 시작했다" "마치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전능하신 손으로 나를 붙잡는 것 같았다."

- 제네바시는 막강한 사보이 공작의 통치하에 있었다. 제네바주교는 거의 공작의 하수인이었다. 1526년 제네바와 베른, 그리고 프라이부르크 세 도시는 불어오는 개혁의 바람을 잠재우기 위해 동맹을 맺었다. 그러나 먼저 베른의 시민연대는 그들의 동맹에 반기를 들었고 결국 1528년 2월 7일 베른이 먼저 종교개혁을 단행했다. 주교의 권한은 소멸되었고 로마 카톨릭 예배는 폐지되었다. 파렐은 베른의 모든 지역에 복음을 선포하는 권한을 부여받았다. 특히 메츠, 스트라스부르그, 아이글에서 지속적으로 활동했으며 베른 서부지역으로 진출하여 1530년 뇌샤텔 신민들이 종교개혁을 하도록 후원했다. 그리고 파렐은 바젤로 활동반경을 넓혀 그곳에 토론회를 조직했으나 이 일로 인해 그는 바젤에서 추방당했다. 파렐은 1532년에 드디어 제네바를 방문한다. 그러나 루터주의자라는 이유로 즉시 추방당한다.

- 제네바를 해방시킨 것은 베른이었다. 처음에 베른은 다분히 프랑스적인 제네바를 도와야 할지를 놓고 망설였다. 하지만 제네바가 사보이 공작과 그 추종자들- 주교들과 상인들-에 의해 고통을 당하자 베른은 제네바에 개입하였고 드디어 1536년 2월에 제네바를 카톨릭과 사보이 공작의 손에서 해방시켰다. 제네바는 먼저 시의회를 조직했다. 매년 1월 시민들에 의해 선출되는 평의회를 중심으로 25명으로 구성된 소의회, 200명으로 구성된 대의회 등이 조직회되었다. 그리고 교황의 면죄부는 교회에서 제거되었고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은 대사면된다는 성명이 체택되었다. 이에 동맹인 프라이부르크는 공식적으로 항의를 했다. 1536년 5월 21일 특별 국민대회합이 개최되었다. 시민들은 시민법을 따라 복종할 것을 만장일치로 약속하고 맹세했다.

- 그러나 무엇이 하나님의 뜻이며, 어떤 것이 거룩한 복음적 규율을 지키는 것인지에 대한 합의는 없었다. 어떤 이들에게 카톨릭으로부터 해방은 모든 규율과 모든 규율로부터의 해방으로 인식되어 도시는 무질서해지고 혼탁해져 갔다. 소위 자유파나 쾌락주의자들에 의해 도시가 점령되듯 하였다. 칼빈은 이들에 맞서 투쟁해야 했다. 교회의 개혁이 시민공동체의 갱신으로 열매 맺기 위해선 많은 노력들이 뒤따라야 했다. 이때의 상황에 대해 칼빈은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내가 처음 이 교회에 왔을 때 아무 것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설교가 전부였다. 사람들이 성상을 불태웠으나 개혁의 형태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모든 것이 혼한 속에 있었다." 칼빈은 이러한 소요를 바라보며 파렐의 손에 이끌려 제네바 종교개혁의 현장 속으로 서서히 끌려들어갔다.

- 잠시 바젤로 돌아가 몇 가지 일들을 정리한 후 1536년 8월에 제네바로 돌아온 칼빈은 약 9일 동안 심한 독감으로 고생을 했다. 그리고 일어서자마자 먼저 바울서신을 강의했다. 헬라어 본문을 가지고 교부들의 작품에 나타난 지식들과 문학적, 역사적 관점에서의 놀라운 그의 성경주석과 바울의 해석에 사람들은 경탄을 금치 못했다. 칼빈은 어떤 직분도 맡지 않은 채 신실한 성경해설가와 신학의 교사 역할에 충실했다. 이 무렵 로마서 강해가 알려지면서 원근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 칼빈이 결정적으로 유명하게 된 것은 1536년 10월 1일 부터 8일까지 열렸던 <로잔토론> 때문이었다. 베른이 주최한 이 행사에는 원래 파렐과 비레가 제네바의 주토론자였다. 천주교의 쟁쟁한 신학자들이 대거 참석한 이 토론회에서 칼빈은 그들이 교부들을 잘못 인용하는 것을 보고 토론을 자청, 키프리아누스, 터툴리안, 아우구스투스의 저술들을 암기하여 인용하면서 그들이 잘못 인용한 것을 낱낱이 지적하고 오류를 수정했다. 토론은 완전한 칼빈의 승리로 끝나고 사람들은 새로운 종교개혁자인 칼빈을 그들의 지도자로 세웠다.

- 1536년 말부터 칼빈은 파렐과 함께 교회법과 교리교육서 등을 만들어 나갔다. 어린아이들을 위한 교리교육서인 '신앙교육과 신앙고백'이 이때 만들어졌다. 이외 예배를 조직하고 성찬을 중심으로 한 교회의 전체적 구조를 조직하였다. 성찬은 연간 4회 시행하는 것으로 수용되었지만 결혼법은 시의회에 위임되었고, 특히 마태복음 18장을 근거로 징계의 도입을 촉구했다. 신앙고백에 대한 일반대중의 수용은 통과되지 못하였다. 왜냐면 도시 안에는 반 삼위일체론자들과 재세례파 등 반감을 가진 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시정부는 신앙고백서 1,500부를 인쇄해 홍보를 했고 결국 1537년 7월 29일 공적 신앙고백이 성 베드로교회의 모임에서 체택되었다. 1537년 8월경엔 시민들의 요구에 의해 칼빈은 목사로 선출된다.

- 반대자들에 의해 많은 시민들이 강제적인 신앙고백서에 맹세하기를 거부했다. 재세례파 선동가들이 소요를 일으켰다가 공개 토론 후에 축출되기도 했다. 이 때 천주교와 종교개혁 사이의 중재자로 자차하는 피에르 카롤리가 등장했다. 그는 파렐과 비레, 칼빈이 삼위일체론을 부인하였다고 비난하며 그들을 아리안주의로 몰아붙였다. 이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로잔과 베른에서 회의를 열었다. 칼빈은 카롤리의 비난이 신학적으로 근거가 없음을 밝히고 모든 신학은 오로지 성경이라는 순수한 원천에 기반을 두어야 함을 재삼 역설했다. 카롤리는 추방당했다.

- 시정부는 신앙고백을 거부하는 자들을 추방하는 조치를 단행했다. 시민들의 격렬한 반대가 이어졌으며 1538년 2월 3일 선거에서 반대자들이 승리했다. 선출된 4인의 평의원들과 시의회는 칼빈파들을 추방했다. 4월 23일 칼빈은 파렐과 함께 제네바를 떠나 바젤로 향했다. 파렐은 1538년 7월에 뇌샤텔로 가 그곳에서 영구 정착했다. 칼빈은 부처의 초대를 받아 스트라스부르크에 도착했다.

 

5. 스트라스부르크(1538~1541)

 

- 자유국가도시인 스트라스부르크는 1524년에 미사를 폐지한 다음 1529년에 종교개혁을 단행했다. 츠빙글리가 여행길에 이 도시를 방문한 다음 참된 경건의 회복이 가능한 지역으로 선포했다. 그러나 시정부는 공공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옛 카톨릭 성직자나 새로운 개혁주의자들의 주도권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러나 마틴 부처(1491~1551)가 주도하는 종교개혁의 열풍을 누구도 잠재울 수 없었다. 칼빈이 이 도시를 방문하였을 때는 이미 종교개혁의 형태가 구조화되고 있었던 시점이었다. 칼빈과 부처는 이후 평생을 부자지간처럼 교제를 나누며 살았다. 두 사람의 신학과 교회관, 그리고 실천에서 일치를 보았기 때문이다. 이외 자크 스트룸, 요하네스 스투름, 카피토 등이 활약했다.

- 칼빈의 심신은 피로했다. 그러나 부처의 강권으로 핍박을 피해 프랑스에서 몰려온 작은 피난민그룹을 돌보기 시작했다. 자연히 그들을 중심으로 교회가 세워졌고 1538년 9월 8일 첫 설교를 행했다. 칼빈이 담임했던 교회는 약 500명의 성도로 늘어났다. 처음엔 니콜라스교회, 막달레나교회, 도미니칸교회로 돌아가며 모였다. 칼빈의 생계는 친구들이 내는 사례비로 충당하다가 김나지움(고등학교) 교사로 임명된 후부터 연봉 52길더를 수령했다. 드디어 자신의 집을 소유하였고, 그의 집에는 많은 학생들이 기숙하였다. 매 주일에 두 번씩 설교를 했고 매주 네 번 예배를 인도했다. 성찬은 1538년 10월 첫째 주에 시행했다. 특히 교회 내 찬송을 증진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칼빈은 시편을 프랑스어로 번역하고 찬송가사를 짓고 있었다. 독일의 곡조를 높이 평가하여 시25편과 46편의 가사를 써 곡조에 붙였다. 베자와 마로, 마티아스 그라이더 등이 이 일에 참여했다. 그리하여 18개의 시편 찬송과 시므온의 찬가, 십계명, 사도신경의 노래가 완성되었다. 훗날 1562년에 찬송집이 발간되어 프랑스와 네덜란드개혁교회의 찬송가로 사용되었다.

- 부처와 카피토가 구약 주석을 맡게 되자 칼빈과 헤디오는 신약주석을 맡도록 임명되었다. 칼빈은 처음에 요한복음을 주석했고, 다음에 고린도전후서를 해설했다. 그리고 바울서신들 중 빌립보서와 로마서주석이 완결을 보았다. 1539년 10월 16일자의 로마서주석을 시몬 그리내우스에게 헌사하면서 그는 성경해설의 이상적인 원리인 '선명한 간결성'을 표명하였다.

- 1539년부터 기독교강교 초판을 증보하기 시작했다. 기존의 형태를 고스란히 유지하면서 변증적 요소를 더욱 강화했다. 책 말미에 그는 이렇게 썼다. "나는 발전하면서 저술하고 저술하면서 발전하는 자들 가운데 속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소책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찬 소고>를 집필했다. 칼빈은 성찬논쟁으로 곤경에 처한 프랑스 교인들에게 가르침과 분명한 지침을 세워 주기를 원했다.

- 스트라스부르크에서 칼빈은 부처의 천거로 독일의 멜란히톤을 비롯한 비텐베르크 학자들과 친교를 나누었다. 1539년 2월 말에는 직접 독일 프랑크푸르트를 방문하고 멜란히톤과 교제를 나누었다. 한편으로 독일의 군주들과의 회합을 통해 프랑스의 국왕과의 중재를 요청하기도 했다. 이후 1540년 6월 하게나우 종교회의와 1541년 레겐스부르크 회의에 참석했다. 그러나 교회관과 화체설에 대한 견해의 차이로 이 회의는 자초되고 말았다. 칼빈은 8월 8일에 스트라스부르크로 돌아왔다.

- 1540년(31세) 8월에 이들레트 드 뷔르와 결혼했다. 이들레트는 1540년 남편을 페스트로 잃었으며 슬픔에 빠진 그녀를 목회적으로 돌보면서 인연을 쌓았다. 그러나 1549년(40세)에 그녀가 질병으로 두 자녀들과 함께 죽었다. 칼빈은 삶의 동반자를 잃은 슬픔으로 실의에 빠졌다. 사람들은 이것을 두고 칼빈을 조롱했지만 칼빈은 자기 자녀들이 온 기독교 세계에 걸쳐 수천 명이 있다고 기록했다.

- 스트라스부르크에서 칼빈은 완전히 정착하기 위해 시민권을 얻고 길드에 등록했다. 그러나 제네바교회의 상황에 대해 늘 관심을 잃지 않았다. 수차례 목회편지를 써서 제네바의 친구들과 신자들을 위로했다. 제네바의 당파들 사이에는 날로 긴장이 증대되었다. 파렐과 파렐의 추종자들인 기에르맹파가 여전히 개혁을 위해 애쓰고 있었다. 그들은 두려움 가운데서도 새로운 성찬식을 예배 때 거행했다. 이 때 제네바를 향한 샤돌레토 주교의 비난에 대해 아무도 응답하지 못하자 다시 칼빈이 답신을 즉시로 써서 카톨릭의 허무맹랑한 주장을 논박했고, 이어 칼빈파가 선거에서 승리를 하게 되었다. 제네바는 다시 칼빈을 요청했다. 1540년 9월 21일 아미 페렝이 칼빈에게 특사로 파견되었다. 칼빈이 머뭇거리자 파렐이 최후통첩을 띠웠다. 마침내 9월 23일 칼빈은 스트라스부르크 시의회와 부처, 그리고 신자들과 시민들의 환송을 받으며 다시 제네바로 귀환한다.

6. 다시 제네바로

 

1) 조직화(1541~1546)

- 칼빈의 제네바 복귀는 거창한 의식 없이 진행되었다. 칼빈은 시정부와 함께 조용히 일하기 시작했다. 먼저 교회조직을 정비하고 교회법을 제정하는 일을 착수했다. 이를 위해 도시는 교구별로 나누고 교회의 치리를 수립했다. 1541년 9월 13일, 시정부와 첫 번째 회의를 가졌다. 칼비은 시의회로부터 교회문제를 다룰 위원회 구성 권한을 위임받았다. 부처의 견해를 수용하여 교회에 4가지 직분(목사, 교사, 장로, 집사)을 두었다.

- 칼빙은 이미 기독교강요에서 안수 하의 임직을 호소한 바 있다. 다음, 정부의 관할 하에 새로 임직 받은 설교자들은 맹세를 한다. 설교자들의 모임은 하나의 제도로 발전하여 매주 금요일 오전 7시에 시정부 강당에서 성경연구모임을 가졌다. 한 사람의 설교자가 성경본문을 강해한 뒤 참석자들 중 한 사람이 해설하고 그 다음, 최종적으로 칼빈이 해설하고 평가했다. 이 '목사회합'은 또한 상호간의 감독을 집행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했다. 특히 '품행감독은 분기마다 한 번씩 시행했다. 주로 이단, 분열을 조장하는 행위, 교회법을 거스리는 반항, 신성모독과 성직매매를 다루었다. 나아가 연구에 대한 열심부족, 무례한 방식의 성경취급, 무익한 문제들을 추구하고 ㄴ무질서한 삶을 사는 것들도 품행 감찰의 대상이 되었다. 한 마디로 제네바의 목사들은 반드시 교회의 모범이 되었다.

- 다음으로 교사직분을 중시했다. 교사들은 복음의 순수성이 잘못된 견해로 인해 부패되지 않도록 건전한 교리로 교육하는 것이다. 교사들은 하나님의 가르침을 보존하기 위한 도구이며 미래의 목사들과 교사들을 훈련시키는 책임을 졌다.

- 장로들은 반드시 각 사람의 생활을 감독해야 한다. 무질서한 삶을 사는 사람을 친절하게 권면해야 한다. 그들음 목사회합에 보고한다. 제네바교회의 장로는 소의회에서 2명, 60인 의회에서 4명, 200인 의회에서 6명을 선출했다. 장로들은 목사들과 마찬가지로 의회의 승인을 받아 정부의 관할 하에 맹세를 한다. 교회법 뿐만 아니라 다양한 행정기관들의 규칙들을 명예롭게 지킬 것을 서약한다. 칼빈은 교회의 당회가 시정부의 권한을 손상하지 말도록 시정부를 완전히 독립시켰다.

- 집사는 두 종류로 구분했다. 일차적으로 돈과 소유물의 모금, 관리를 관장하면서 가난한 자들, 낯선 사람들, 과부들과 고아들에게 분배하는 책임을 맡은 부류와, 두 번째 부류는 병원을 책임지고 신자들의 질병을 관리했다.

- 교회법이 안정되자 다음은 시민법을 갱신하라는 임무를 수여받았다. 칼빈에 의해 법적 절차들이 간소화되었다. 구 제네바 법의 정신을 훼손치 않으며 로마법과 조화시키려고 했다. 1543년 1월 28일 시민총회에서 시민법이 체택되었다.

- 그러나 규칙에 대한 해석의 문제로 시정부와 당회 간의 의견차이가 발생하고 긴장감이 돌았다. 서로의 권한축소에 대해 상호 민감하게 반응했다. 동료 목사들이 점점 칼빈의 계획들을 방해하고 무례하고 거만하게 다툼을 일으켰다. 1541년 11월에 이르러 교회규칙서가 대의회와 시민들의 동의를 얻어 통과되었다.

- 그로부터 사회 전체의 생활이 도시의 모든 구역을 대표한 당회의 감찰 하에 놓였다. 시정부는 당회의 정책을 지지해야 했고, 필요하다면 영적 징벌을 넘겨받아 법적인 선고, 또는 민사적 처벌을 가했다. 모든 영역에서 부패하고 타락한 요소들을 제거해 나갔다. 거부하는 자는 출교 조치했다. 형편없는 신앙지식이나 의심스러운 사상들은 징계를 받았다. 교회출석을 게을리 하거나 성찬 참여를 소홀히 하면 당회에 소환되었다. 특히 칼빈에 대한 모욕과 당회에 대한 반항은 엄히 다스렸다.

- 칼빈의 활동영역은 계속 확장되었다. 사회생활 규정들을 작성하고, 섬유산업을 도입하는 데 적극적으로 개입했으며, 심지어 프랑스나 황제 진영의 군사적 침입을 막기 위한 계획들에도 간여했다.

 

2) 위기(1546~1555)

- 1543년 봄, 페스트로 인해 제네바에 위기가 닥쳤다. 시의회는 페스트를 퍼드린 자들로 의심되는 자들을 마녀사냥식으로 체포해 35명을 사형선고하고 기타 심한 고문을 가했다.

- 김나지움 교장인 세바스티앙 카스텔리오(1515~1563)가 아가서의 정경성과 칼빈의 교리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며 도전했다. 그리스도의 지옥강하에 대한 칼빈의 견해에 동의할 수 없다며 토론을 요청했다. 그리고 그는 목사가 되기를 원했지만 거부당하고 도시를 떠났다.

- 1546년 저명한 시의원 피에르 아모는 카드 제조업자였는데 제네바의 새로운 법의 시행으로 생업을 포기해야 했고, 그의 아내의 광신적인 신앙생활로 이혼위기에 직면하고 있었다. 특히 아내는 하나님의 모든 자녀가 자신의 남편이라며 칼빈에게도 접근하여 남편이 되어 달라고 떼를 썼다. 칼빈의 화해와 중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당회는 사회적 물의를 야기시키는 아모와 아내를 강제로 이혼시켰다. 아모와 그 일당은 칼빈의 지도하에 있는 당회를 격렬히 비난했다. 아모는 킬빈이 피카르디 출신의 불량한 사람이며 거짓된 교리를 설교한다고 주장했다. 아모는 시정부에 의해 속옷 바람으로 횃불을 들고 시내를 순회하면서 회개하라는 선고를 받았다.

- 옛 제네바 귀족들의 반발도 일어났다. 그들은 칼빈과 설교자들에 대항하기 위해 연합했다. 당회가 권력남용을 한다며 복종하기를 거부했다. 칼빈은 도시의 자유를 파괴하는 침입자라고 비난했다. 대표적으로 파브르가문이 이런 저항을 지휘했다. 그들은 당회의 소환장을 무시했다. 설교자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예배를 방해했고, 당회에 출석해도 오만하고 거만하게 질문을 무시했다. 그들은 공식적인 춤 금지를 지키지 않았고, 주사위놀이와 다른 금지된 게임들을 무시하고 즐겼다. 소위 '자유파'라고 불린 이들은 스트라스부르크의 쾌락주의자들을 연상시켰다. 더욱 칼빈을 놀라게 한 것은 1540년 9월 자신을 제네바로 복귀시키기 위해 임명을 맏았던 페랭이 프랑스와즈 파브르와 결혼한 이후 자유파에 가담하여 당회를 비난하자 칼빈은 그를 작은 가이사라고 지칭했다. 1947년 여름에 페랭의 아내는 춤 파티에 참석한 것이 들통 나 당회에 출두하게 되었는데 그녀는 당회에서 그를 고소한 한 설교자를 격렬히 저주하여 추방조치를 당하고 말았다. 그 때 프랑스에 출장을 가 있던 페랭이 돌아와 아내를 고소한 설교자에게 복수를 감행했고, 이후 목사들을 향한 살해의 위협이 제네바를 뒤덮고 있었다. 이외 쟈크 그류사건(1547년 7월 26일 처형), 히예로니무스 볼섹 사건(1551년), 장 트롤리예 사건(1552년), 세르베투스, 사건(1553년) 등이 터져 나왔다. 이 일로 자유파와 칼빈의 관계는 완전히 금이 가고 말았다.

- 사도행전을 내용으로 하는 연극 한 편으로 인해 분란이 일어나 일은 매우 쓰라린 경험이었다. 칼빈은 연극의 상연 이전에 대충 보고 허락을 했으나 그이 어릴적 친구인 미쉘 콥이 연극을 보고 심하게 비난하고 정죄를 한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이로 인해 예술계의 싸늘한 반응이 무거운 짐이 되어 갔다. 또 모든 여관을 폐쇄하자 숙박업자들의 저항이 일어났다. 기타 세례명에 대한 논란 등이 일어났다.

- 점점 자유파의 입지가 좁아져 갔다. 1555년 5월에 페랭 일당이 주도한 폭동이 일어났고 페랭과 4명의 주동자들은 그 해 사형되었다. 이후 자유파는 사라졌다.

 

3) 위대한 사역(1555~1564)

- 1558년 1월 프랑스 피난민 문제로 불편한 관계였던 베른과 영원한 언약을 맺었다.

- 1559년 6월 5일 제네바 아카데미 설립(교장: 베자) ... *김나지움(사립학교), 아카데미(공립학교)

- 1559년, 기독교강요 최종판 완성 / 1560년, 기독교강요 프랑스어판 번역 출판

- 1561년, 교회규칙서 완성

- 1564년 4월 27일, 칼빈은 자신의 침상을 둘러 싼 설교자들 앞에서 자신의 비천함을 고백했다.

"진실로 내개 행한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나는 비참한 피조물이다. 그러나 감히 말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선한 것을 원했고 하나님에 대한 경외가 내 마음 속에 깊이 뿌리 내려 있었다는 사실이다."

- 부처의 지적에 대해,

"안타깝게도 나의 크고 작은 결함들 가운데 내가 가장 힘들게 씨름했던 것은 그러한 성급함이었다. 내가 어느 정도 나아진 것은 분명하지만 나는 아직 이러한 야수를 전적으로 길들이지는 못했다"

- 베자에 따르면,

"그는 온갖 질병으로 인해 몸은 완전히 쇠약했다. 노년의 안색이 매우 수척해져서 거의 살아있는 사람의 얼굴 같지 않았다. 수면 부족, 최소한의 식사, 조마조마한 긴장 상태들, 쉼 없는 노동, 이 모든 것이 그를 쪼그라들게 했다. 거의 침상에 의지해 편지들과 논고들을 받아쓰게 했다.

- 파렐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1564년 5월 27일 저녁 8시에 소천했다. 아멘.

 

 

3강. 칼빈의 신학

 

1) 스콜라신학에 대한 혐오

- 칼빈은 중세 스콜라신학을 마귀의 논쟁술이라 명명했다. 파리 소르본대학의 신학부가 이 논쟁술의 실례였다. 칼빈은 그들이 헛된 호기심으로 하나의 미궁에서 또 다른 미궁으로 빠진다고 경멸했다. 그들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시하지 않은 것을 탐구하지만 결국 그들이 추측하는 것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그들 스스로 확신도 못한 채 언쟁을 일삼고 교묘한 논증으로 마치 신학은 소수의 사람들의 전유물인 것처럼 호도한다고 지적했다.

- 특히 그들은 무익한 문제에 매달려 있기에 근본적인 교회의 건설에 조금도 기여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 위로를 생략한 채, 사람은 모두 자신의 힘, 즉 자유의지를 믿어야 한다고 잘못 가르치며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협력하는 어떤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고 하면서 인간은 선행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획득한다고 호도했다. 칼빈은 이러한 그들의 주장들이 그리스도를 중심에 두지 않은 엄청난 혼란이며 끔찍한 미궁이라고 비난했다.

- 칼빈은 참된 지혜는 하나님이 침묵할 때 침묵하는 것이며, 참된 신학은 크든 작든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의 일이고, 하나님의 자녀들은 반드시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건전한 교리는 소수의 독점물이 아니고 모든 신자들에게 단순하게 전달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2) 에라스무스, 루터, 부처의 영향

- 스콜라신학에 대한 칼빈의 비판은 1533년 콥의 취임연설문으로 공개되었다. 칼빈은 에라스무스에게서 차용한 인문주의적 재료와 부처가 번역한 루터의 재료를 가지고 이 연설문을 작성했다. 칼빈이 회심하기 전에 로테르담 출신의 에라스무스는 칼빈에게 고전문학의 연구와 특히 세네카관용주석을 출판하도록 영향을 주었다. 칼빈은 그에게서 본문을 다루되 소중하게 다루는 비법을 전수받았다. 특히 에라스무스에 의해 출판되었던 교부들의 저작들은 칼빈을 사로잡았고, 인문주의의 수사학은 칼빈의 저술의 방식의 큰 줄기가 되었다. 루터의 영향은 칼빈에게 있어서 명백하고 지속적으로 드러난다. 기독교강요의 초판은 거의 루터의 재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맹목적으로 루터를 따른 것은 아니었다. 칼빈은 몇 가지 루터의 잘못들을 보았다. 칼빈은 루터에서 더 진전했다. 그는 모든 주석의 체계화로 나아갔다. 부처는 칼빈의 성경해석과 실천적이며 경건한 실제 삶에 대한 최고의 기여자였다. 칼빈은 부처가 말한 "참된 신학은 경건하게 그리고 행복하게 살기 위한 학문이다. 신학은 경건한 삶을 살기 위한 기술이며, 하나님을 아는 살아있는 지식이다. 심지어 귀신들조차 참된 신학 없이 많이 알 수 없다"는 언급을 하나의 지침으로 삼았다.

 

3) 다양한 모색, 접근, 그리고 동일한 메시지, 확고한 참 신학

- 칼빈은 서재에서 설교단에서 강의실에서 회의장에서 학술토론장에서 자신의 신학을 논술했다. 칼빈은 자주 로마 카톨릭 신학에 대하여 참된 신학을 변증했다. 특히 자유의지, 은혜의 필요, 성령의 사역에 대해 카톨릭의 잘못된 신학을 정면으로 공격했다.

- 칼빈은 성도들과 학생들을 위해 성경을 가르쳤다, 그의 많은 주석들은 주로 강의에서 비롯된 것이다. 본문의 번역과 실천적 주석, 간결하지만 명확한 메시지, 회중을 향한 간곡한 호소 등은 칼빈에게서 항상 확인할 수 있는 불변의 것드리었다.

- 칼빈의 모든 사역은 하나님이 성경 가운데서 자신을 계시한다는 확신에서 출발했다. 이 점에서 칼빈은 전적으로 루터를 따랐다. 칼빈은 '오직 성경'의 원리를 확립하고 수호했다. 우리는 성경 없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고 또한 그를 창조주로 알 수 없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은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에게로 다가오셨기 때문이다. 이것은 루터의 '이신칭의'의 신학을 더욱 확고히 한 것이다.

- 나아가 칼빈은 성경의 해석학의 기준을 설정했다. 그이 해석학은 성경 전체에서 출발했다. 말씀과 성령의 불가분의 관계 속에 성경은 하나님에 의해 주어진 것이며, 이것에 대한 확신은 교회의 권위가 아니라 성령의 증거에 의해 기초한다고 선포했다. 말씀과 성령은 서로 분리할 수 없는 끈으로 연결되었고, 성경 자체는 성령의 산물이며, 성령의 구술이다.

- 칼빈은 율법주의에 대해 경계했다. 율법과 복음의 관계에서 율법주의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율버의 과제는 복음의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며 이 둘은 구원의 서정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이해된다고 했다.

- 칼빈은 하나님의 언약의 통일성을 강조했다. 모든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본질적인 통일성이 존재하며, 예 언약과 새 언약은 비교급 표현의 방식으로 간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즉, 더 많은 성령, 더 많은 지식, 더 많은 확신으로 신자는 비로소 칼빈의 종말론에서 완전하게 된다고 제시했다.

- 칼빈이 성령의 사역에 대해 말할 때 이것은 특히 그리스도의 은혜를 얻는 방법과 관련된다. 기독교강요 제 3권은 전적으로 은혜를 얻는 방법과 관련되어 있다. 이것은 루터의 경우보다 더 강하고 차이가 나는 승귀하신 그리스도 은혜의 신학이다. 루터의 십자가신학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전적으로 강조하지만 칼빈의 경우, 그 선은 위로 올라간다. 고난과 부활을 통하여 그리스도는 영화롭게 되었고 자신이 속죄를 시행한다. 십자가는 영오가에 이르는 도상의 한 단계이다. 은헤의 효과는 승귀하신 그리스도가 행하시는 능력에 기초한다. 칼빈은 부처에게서 그리스도의 3중직을 차용했다.

- 칼빈은 기독교강요 초판에서 선택교리를 교회에 대한 고백 가운데 두었다. 롬8:30을 언급하면서 영원한 선택은 부르심과 의롭다 하심에서 가시화된다고 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할 때 우리는 이를 통해 우리가 택자들 가운데 속한다는 증거를 받는다는 것이다. 결국 선택은 그리스도 안에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택자들의 신앙고백, 삶의 행실, 성례의 참여가 선택의 표지와 쵸시를 형성한다. 그러나 칼빈은 후기에서 선택교리를 섭리론에 포함시켰다가 최종판에서 구원론의 마지막에 포진시켰다. 그렇다고 선택론이 교회론과 관계가 없다는 것이 아니다.

- 구원에 있어서 교회의 표지들은 절대적이다. 칼빈은 '하나님의 말씀이 순수하게 전파되고 들리며, 성례가 시행하는 곳마다 하나님의 교회가 있다'고 했다. 누구든지 이 공동체에 가입하지 않은 자는 종교 반역자와 배신자로 여겼다. 비가시적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과 일치한다. 가시적 교회는 신자와 불신자들과 위선자들도 포함되지만 우리는 그들을 알아볼 수 없다. 오로지 하나님만이 사람들의 마음을 판단하신다. 그러므로 교회의 치리는 그리스도의 몸을 손상시키는 명백한 죄에만 국한된다. 이러한 징계 수단이 없는 교회란 생각할 수 없으며, 건전한 교리는 교회의 영혼을 구성하고 치리는 몸의 신경들처럼 작용한다고 했다. 교회의 직분자들은 교회 앞에 순수한 교리와 모범적인 삶을 보여야 하고 그들의 권위는 오로지 말씀에 기초한다. 믿음 없는 성찬의 참여는 교회의 파멸이다. 세례는 하나님 자녀의 표시이며, 유아세례는 구약에서 할례를 통해 표시되고 인 쳐진 은혜언약의 약속에 기초하므로 이의 지속은 그리스도인의 자녀들에게까지 적용되는 것이다.

- 칼빈은 두 종류의 체제 즉, 영적 체제와 정치적 체제를 구별했다. 영적 체제는 경건과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양심을 양육하기 위함이요, 정치적 체제는 자신의 의무와 시민 정의의 발전에 봉사하기 위함이다. 정부는 복음 선포의 진전과 보호를 완수하고 감독해야 할 목자의 사명을 띤다. 교회와 정부의 두 과제는 혼합되지 말아야 하고 서로 분리되지 말아야 한다. 이 둘은 영혼과 육체처럼 서로 관련된다. 세속적 삶은 더 높은 목적을 갖는다. 그러나 그 어떤 단체나 개인도 정부를 반대할 권리를 가지지 않는다. 법은 국가의 신경조직과 또한 정부의 영혼을 구성한다. 성직자, 귀족, 평민 모두 순종과 복종은 필수적이다.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자는 십자가를 지든지 망명을 떠나든지 해야 한다.

 

 

4-14강. 기독교강요(최종판) 요약해설

 

01. 인식론-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1-5장, 11-15장)

 

1) 자연계시에 근거한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어느 정도 인정한다 그러므로 자연계시를 통해 자연인은 하나님을 모른다고 핑계할 수 없다.

"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롬1:19-20)

"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행17:27)

 

2)그러나 인간은 자연계시를 통해서는 구속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가질 수 없으며 성령의 경험도 할 수 없고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조차 단편적이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11:3)

 

3) 우리는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엄청난 명령과 요구들 앞에서 혹은 복음이 성령을 통하여 우리 마음에 와 닿을 때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인식과 아울러 우리 자신에 대한 인식을 할 수 있다.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눅24:32)

"이에 명하여 수레를 멈추고 빌립과 내시가 둘 다 물에 내려가 빌립이 세례를 베풀고, 둘이 물에서 올라올새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간지라 내시는 기쁘게 길을 가므로 그를 다시 보지 못하니라"(행8:38-39)

 

4) 하나님 앞에 선 인간의 자기이해

① 죽을까 두려워하고 엎드렸다.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사6:5)

"그 사방 광채의 모양은 비오는 날 구름에 있는 무지개 같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이라. 내가 보고 엎드려 말씀하시는 이의 음성을 들으니라"(겔1:28)

"엘리야가 듣고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고 나가 굴 어귀에 서매~"(왕상19:13)

② 자신의 부패와 무지, 나약함을 고백하다

"아브라함이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티끌이나 재와 같습니다"(창18:27)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보소서 나는 비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게 대답하리이가.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욥403-4)

"내가 네 혀를 네 입천장에 붙게하여 네가 말 못하는 자가 되어 ~ 내가 너와 말할 때에 네 입을 열리니..."(겔3:26-27)

③ 따라서 인간은 하나님의 위엄과 자기를 비교하지 않고는 자기의 낮은 신분에 대하여 결코 깨닫지 못한다.

 

5) 하나님을 인식하기 위하여 신앙에 이어 하나님에 대한 사랑 경외를 지녀야 참 하나님 지식에 도달한다고 주장한다. 사랑과 경외는 경건의 주된 내용으로 칼빈의 신앙개념은 경건으로 집약된다. 하나님에 대한 신지식은 2중적이다.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구속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가능케 된다. 칼빈은 중세교회의 스콜라주의적 이론 내지는 사변적인 신학에 반대하여 사랑과 경외에 찬 신앙을 역설한다. 즉. 경건(piety)=사랑(love)+경외(reverence / fear)

"경건이 결여된 하나님 지식은 전혀 적합하지 않다... "(1권 2장)

"이러한 신앙인은 하나님은 좋으시며 자비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이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모든 역경 속에서도 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구제의 길이 열릴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와 같은 경건에 찬 신앙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사랑하고 경외하기 때문에 그를 또한 주님으로 예배하고 숭상한다. 이것이 바로 죄를 짓지 않게 하는 힘이다."

 

6) 인간의 지성 속에는 하나님에 대한 직관 즉, 종교의 씨앗이 있다. 이는 자연적 본능이며 이들의 양심은 선과 악을 구별할 수 있다. 그러나 한 사람도 그의 마음속에서 발 배양하지 않으며 열매를 맺지도 못한다. 키케로는 아무리 미개하고 야만적인 나라나 백성이라도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다고 말했다. ... 심지어 우상숭배도 이와 같은 종교성의 일그러진 모습이다. 종교성은 학교에서 배우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 하나님은 추상적이요 막연한 하나님이지 성경으로 계시된 하나님이 아니다.

 

7) 하나님에 대한 무지와 몽매는 헛된 교만과 고집을 산출한다. 이들은 자신의 육적인 우매성에 준하여 측정하고 호기심의 발동으로 헛된 사변을 연출한다. 칼빈은 자연신학을 거부한다. 즉 불신자에게는 하나님의 현존이 전적으로 결핍되어 있다고 보았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롬1:21-22)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시14:1, 53:1)

"악인의 죄가 그이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그의 눈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빛이 없다 하니"(시36:1)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엡2;12)

 

8) 우주 만물은 하나님의 예술작품이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한다. 인간은 소우주이고 우주는 대우주이다. 이 인간이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선, 하나님의 지혜를 나타낸다. 하나님의 지혜는 우리의 머리털보다 더 풍성하다(시40:12). 그러므로 시92:5-6 말씀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깊이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의 섭리를 지혜로 보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시107:43).

 

9) 인간의 마음은 미궁과 같다. 각 민족들과 개인들은 각각 자기들의 신들을 소유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미신으로 가득 차 있다. 기껏해야 알지 못하는 신을 예배할 정도이다(행17:23). 그래서 바울은 참 하나님께 대한 예배를 배우기까지는 하나님 없이 있었다고 했고(엡2;12-13), 그리스도께서도 사마리아 사람들이 무엇을 예배해야 할지를 몰랐다고 했다(요4:22)

'큰 샘터에서 물이 끓어오르듯 수많은 잡신들이 인간의 정신으로부터 나온다'(1권 5장 12)

 

02. 성경론(6-10장)

 

- 성경은 하나님을 알게 하는 안내자요 교사이다

- 성경은 반드시 성령의 증거로 확증되어야 한다.

- 성경의 신빙성이 교회의 판단에 의해 좌우된다는 것은 악랄한 거짓이다. 교회의 기초는 성경이다.

- 성령의 증거는 다른 모든 증거보다 강하다. 성경은 자증한다.

- 성경을 떠나 직접 계시로 비약하는 광신자들은 경건의 모든 원리를 파괴한다.

 

03. 삼위일체론(1.10-13)

 

- 성경은 모든 미신의 잘못됨을 지적하기 위하여 참되신 하나님을 이교도의 모든 신들과 대조하고 있다. 하나님을 볼 수 있는 형태로 만드는 것은 불신앙적이다.

- 성경은 창조 이래로 하나님은 한 본체이시며 이 본체 안에 삼위가 존재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 삼위의 구별과 일체성, 그리고 반 삼위일체설에 대한 논박

 

04. 기독론(2.12-17)

 

- 중보자의 직책을 감당키 위해 그리스도는 사람이 되셔야 했다.

- 그리스도는 신성과 인성(육신의 진정한 본질)을 가지셨다.

- 성부께서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신 목적을 알기 위해선 삼중직(왕, 제사장, 선지자)의 직책을 보아야 한다.

-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

-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공로로 하나님의 은총과 구원을 우리에게 얻어 주셨다고 하는 것은 정당한 주장이다.

 

05. 성령론(3.1)

 

- 그리스도의 말씀이 성령의 신비한 역사에 의해 우리에게 유익을 준다.

- 성령은 우리와 그리스도를 연합시키는 디다

- 믿음은 성령의 역사이다.

 

06. 예정론(3.21-24)

 

- 영원한 선택: 하나님은 이 선택에 의해 어떤 사람은 구원에 또 어떤 사람은 멸망에 처하도록 예정하셨다. 선택은 공로에 의한 예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인 목적에서 온다. 선택하신 것은 거룩하게 만드시기 위한 것이지 거룩하기 때문은 아니다. 유기는 선택에 동반되며 하나님의 뜻으로 하는 일이다.

<선택교리의 정리>

- 소명은 선택에 의존하며 전적인 은혜의 사역이다.

- 믿음은 선택의 결과이며 선택은 믿음에 의존하지 않는다.

- 선택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이해하며 인정해야 한다.

- 선택된 자들의 견인은 확실하다

- 버림받은 자들에 대해서도 하나님은 공정하게 처리하신다.

 

<선택교리에 대한 반대론과 변증>

① 선택교리는 하나님을 폭군으로 만든다

: 하나님의 뜻이 의의 표준이다. 하나님은 버림받은 자들에 대해서도 공정하시다. 하나님의 결정은 그의 공의 뒤에도 숨어 있다. 하나님의 숨은 결정은 찾아내려고 할 것이 아니라 공손하게 찬탄해야 한다.

② 선택교리는 사람에게서 죄책과 책임감을 제거한다.

: 하나님께서는 죄로 타락하는 것도 예정하셨다. 아담의 타락과 버림받은 자들의 유기는 하나님이 허락하셨을 뿐 아니라 결정하신 일이다. 그러나 이를 공의로 하셨다.

③ 선택의 교리는 하나님이 편파적이라는 견해가 된다

: 예정을 선포하는 것은 유해하지 않고 도리어 유익하다.(주-예정은 오히려 구원에 대한 확신을 증가시킨다)

④ 선택교리는 고결하게 살려는 열의를 말살하고 모든 충고를 무의미하게 만든다.

: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예정을 바르게 선포하는데 있어서 모범을 보였다.

 

07. 교회론(4.1-13)

 

- 모든 경건한 자의 어머니인 진정한 교회. 우리는 이 교회와 연합되어 있어야 한다.

- 교회의 필요성. 성도가 서로 교통함.

- 가견적 교회와 불가견적 교회

- 교회의 표지와 그 적용, 권위

- 문제가 많은 교회에 대한 바울의 태도

- 악인들과의 교제

- 죄의 용서와 교회

- 교회의 기초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곧 성경이다.

- 거짓교회와 참교회와의 구분: 로마교회는 참교회가 아니다. 거짓교회는 자존심이 강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다.

- 교회의 교사들과 목사의 선정과 직분

- 교황제도의 폐해들: 무자격자의 임명. 성직록 수여 폐해. 부패와 탐욕. 베드로의 수위권 반박. 사람이 교회의 머리가 될 수 없다.

- 교회의 입법권, 재판권, 권징(견책과 출교), 맹세들

 

08. 기타

- 창조론, 섭리론, 인죄론, 율법론, 신앙론, 성화론, 칭의론, 자유론, 기도론, 종말론, 성례론, 국가론 등.

[출처] 기독교강요 해설 (아리엘교회) |작성자 아리엘

출처 : 영적 분별력

글쓴이 : 진실 원글보기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