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 지방에서 소수의 추종자들로 시작된 기독교는, 새 천년을 맞이한 오늘날에 이르러 전세계 인구의 약 1/30이 믿는 종교로 성장해 왔다. 기독교 성장의 가장 중요한 힘의 근원은 주기적으로 신앙의 본질을 회복하기 위해 개혁과 갱신에 힘썼던 그리스도인들에게 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 즉위 이후 기독교는 핍박과 환란에서 벗어나 평화와 안정을 찾은 듯했다. 그러나 그 평화와 안정은 교회 쪽에서 볼 때 매우 유리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매우 불리한 상황에 놓이게 했다.
14세기로 접어들면서 중세 교회는 쇠퇴기에 접어든다. 이제 신앙 문제보다는 정치나 경제적인 관심사들이 우선시되었고, 교회는 세상 집권자들 위에 그 권위를 세우기 위해 교회 건물 자체를 하나님의 율법과 사람보다 더 높이 두었다. 부패가 만연했고 거짓 교리와 관행들이 날로 증가했으며 성경의 가르침들은 무시되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로마 교회는 외관상 구원을 베푸는 유일한 기관으로서 난공불락의 위치를 굳혀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실은 불만의 싹들이 이미 자라고 있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로마 교회의 멍에에서 벗어나기를 원했고 저항의 징표들이 점점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저항 세력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반대자는 로마 가톨릭 교회 신부요 옥스퍼드 대학의 철학자요 신학자였던 존 위클리프였다.
옥스퍼드 시절
존 위클리프(John Wyclif, 1329-1384)는 1329년 영국의 북 요크셔 주에서 태어났다. 부친이 위클리프라는 마을의 한 장원 영주였다는 사실 외에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옥스퍼드 베일리얼 단과대학에서 신학, 철학, 법률을 공부한 그는 1360년 동대학의 학장이 되어 후진 양성에 힘쓴다. 그는 옥스퍼드 대학에서 "옥스퍼드의 꽃이요 철학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며 학위 시험 훈련시키는 데도 단연 최고" 라는 평을 들을 정도로 사람들로부터 높은 존경을 받았다. 그러던 중 1366년 당시 통치자로 활약하던 곤트의 존(John of Gaunt)의 후원으로 영국 왕실의 전속 신부가 된다.
교황에 대한 항거
그의 이러한 정치계 입문은, 전부터 교황의 무조건적인 권위에 대해 반감을 갖고 있던 그에게 교황제도의 실정을 직접 파악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다. 그는 후에 이 경험을 토대로 “통치” 내지는 “지배”에 관해 자기 나름대로의 견해를 가지고 가르칠 수 있었다. 그런데 바로 이 가르침이 로마 교회를 몹시 불쾌하게 만들었다. 왕의 권세는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오는 것이므로 왕은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성직자들을 다스릴 권세를 갖고 있다는 견해를 피력했던 것이다. 이처럼 그는, 지배는 은혜에 근거한 것이므로 죄있는 교황에게 복종할 필요가 없으며 오히려 왕에게 교회를 개혁할 의무가 있다고 가르쳤다.
위클리프는 일반 성직자들과 평신도들에게 많은 호소력을 갖고 있던 이 이론을 활용해서 로마 교회의 권력 남용을 공격하고 교황의 권위를 제한하려 했다. 그 결과 로마 교회는 위클리프를 정죄했고, 1377년 성 바울 성당에서 열리는 주교 회의에 나와 이 고발에 대해 답변하라는 소환장을 보낸다. 그러나 일단의 폭도들이 개입하는 바람에 그 회의는 유기되고 만다.
종교 개혁의 불을 당김
그때까지 위클리프는 “은혜의 상태” 안에서의 통치권만 부인했지 교황의 통치권에 대해서는 전혀 반대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로마 교회의 중심 교리라 할 수 있는 화체설을 공격하기 시작한 1378년, 마침내 교황제도와의 결별을 선언한다. 그는 미사드릴 때 그리스도께서 정말 임재하시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영적인 임재일 뿐 실제 몸으로 임재하시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떡과 포도주도 진짜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 신자들이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받는 것일 뿐이라고 선언했다. 그렇다면 신자는 누구나 개인적으로 그리스도를 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되므로 구태여 신부에게 의존할 필요가 없게 되는 것이다.
사실 그의 성례전 교리는 그의 교회론에 의해 결정된 것이다. 그는 교회는 하나님의 택함받은 자녀들, 창세 전부터 구원받기로 예정된 자들로 구성된다고 정의했다. 그렇다면 교황이 반드시 교회의
머리라고 할 수 있겠는가! 위클리프는 하나님의 법인 성경(로마 교회의 가르침과 구분된)의 절대적 권위에 근거해서 이런 견해들을 폈다. 그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모든 사람은 누구나 개인적으로 성경을 연구할 권리가 있으며, 따라서 성경을 보통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로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성체에 관한 그의 개념들은 사람들의 호응을 얻지 못한 채 옥스퍼드 내에 큰 소란을 야기시켰다. 위클리프는 사람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1381년 자신의 고백론을 쓰며 그 속에서 자기 개념들에 대해 변호했지만 그의 지지자 중 많은 사람들이 끝내 받아들이지 않는 바람에 할 수 없이 옥스퍼드를 떠나게 된다. 그의 많은 적들이 그를 화형에 처하려 했지만 곤트의 존(John of Gaunt)의 보호로 그리고 교황에 대항하여 왕권을 지지해 준 대가로 1374년 러터워드에 들어가 살 수 있게 된다.
“최초의 영어 성경”과 “롤라드파”
러터워드에 거할 당시 위클리프는 심한 병에 걸려 있었으나 이전 어느 때보다도 풍성한 열매를 맺는 삶을 살게 된다. 그 첫번째 열매는 성경을 영어로 번역한 일이었다. 당시는 제롬이 히브리어와 헬라어로 된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한 불가타(Vulgate) 성경이 가톨릭 교회의 공인 성경으로 되어 있었다. 때문에 라틴어를 모르는 일반 사람들은 성경을 전혀 알지 못한 채 목회자들이 전해주는 것만을 간접적으로 들을 수밖에 없었다. “교회의 법률은 오직 성경뿐”이라고 믿었던 위클리프는 일반 사람 누구나 성경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라틴어 성경을 영어(잉글랜드 중부 지방의 사투리)로 번역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완성된 “위클리프 성경”은 그의 사후 개정되어 당시 널리 사용되던 공용어로 다시 쓰여졌다.
두번째 열매로 위클리프는 자신을 따르던 추종자들을 모아 “롤라드파”(Lollards:“중얼거리는 자들”이라는 뜻으로 이단자들을 지칭하던 단어임)를 결성했다. 1395년까지 롤라드파는 조직적인 집단으로 발전하였고, 자체적으로 목사가 있었으며 일반 대중의 폭넓은 지지를 받았다. 롤라드파는 위클리프의 많은 사상들에 찬성하였는데, 특별히 사제의 임무는 설교하는 것이며, 모든 사람이 이해할 수 있도록 자신들의 언어로 성경을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위클리프는 말년에 2년간 발작을 일으켜 중풍으로 고생하다가 1384년 12월 세상을 떠났다. 위클리프 자신이 직접 개혁을 시작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사상들은 계속 살아 남아 불만의 응어리를 가중시켰고 종교 개혁을 일으키는 하나의 원동력이 되었다. 이후의 종교 개혁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준 그는 실로 종교 개혁의 선구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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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누스 황제 즉위 이후 기독교는 핍박과 환란에서 벗어나 평화와 안정을 찾은 듯했다. 그러나 그 평화와 안정은 교회 쪽에서 볼 때 매우 유리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매우 불리한 상황에 놓이게 했다.
14세기로 접어들면서 중세 교회는 쇠퇴기에 접어든다. 이제 신앙 문제보다는 정치나 경제적인 관심사들이 우선시되었고, 교회는 세상 집권자들 위에 그 권위를 세우기 위해 교회 건물 자체를 하나님의 율법과 사람보다 더 높이 두었다. 부패가 만연했고 거짓 교리와 관행들이 날로 증가했으며 성경의 가르침들은 무시되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로마 교회는 외관상 구원을 베푸는 유일한 기관으로서 난공불락의 위치를 굳혀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실은 불만의 싹들이 이미 자라고 있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로마 교회의 멍에에서 벗어나기를 원했고 저항의 징표들이 점점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저항 세력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반대자는 로마 가톨릭 교회 신부요 옥스퍼드 대학의 철학자요 신학자였던 존 위클리프였다.
옥스퍼드 시절
존 위클리프(John Wyclif, 1329-1384)는 1329년 영국의 북 요크셔 주에서 태어났다. 부친이 위클리프라는 마을의 한 장원 영주였다는 사실 외에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옥스퍼드 베일리얼 단과대학에서 신학, 철학, 법률을 공부한 그는 1360년 동대학의 학장이 되어 후진 양성에 힘쓴다. 그는 옥스퍼드 대학에서 "옥스퍼드의 꽃이요 철학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며 학위 시험 훈련시키는 데도 단연 최고" 라는 평을 들을 정도로 사람들로부터 높은 존경을 받았다. 그러던 중 1366년 당시 통치자로 활약하던 곤트의 존(John of Gaunt)의 후원으로 영국 왕실의 전속 신부가 된다.
교황에 대한 항거
그의 이러한 정치계 입문은, 전부터 교황의 무조건적인 권위에 대해 반감을 갖고 있던 그에게 교황제도의 실정을 직접 파악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다. 그는 후에 이 경험을 토대로 “통치” 내지는 “지배”에 관해 자기 나름대로의 견해를 가지고 가르칠 수 있었다. 그런데 바로 이 가르침이 로마 교회를 몹시 불쾌하게 만들었다. 왕의 권세는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오는 것이므로 왕은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성직자들을 다스릴 권세를 갖고 있다는 견해를 피력했던 것이다. 이처럼 그는, 지배는 은혜에 근거한 것이므로 죄있는 교황에게 복종할 필요가 없으며 오히려 왕에게 교회를 개혁할 의무가 있다고 가르쳤다.
위클리프는 일반 성직자들과 평신도들에게 많은 호소력을 갖고 있던 이 이론을 활용해서 로마 교회의 권력 남용을 공격하고 교황의 권위를 제한하려 했다. 그 결과 로마 교회는 위클리프를 정죄했고, 1377년 성 바울 성당에서 열리는 주교 회의에 나와 이 고발에 대해 답변하라는 소환장을 보낸다. 그러나 일단의 폭도들이 개입하는 바람에 그 회의는 유기되고 만다.
종교 개혁의 불을 당김
그때까지 위클리프는 “은혜의 상태” 안에서의 통치권만 부인했지 교황의 통치권에 대해서는 전혀 반대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로마 교회의 중심 교리라 할 수 있는 화체설을 공격하기 시작한 1378년, 마침내 교황제도와의 결별을 선언한다. 그는 미사드릴 때 그리스도께서 정말 임재하시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영적인 임재일 뿐 실제 몸으로 임재하시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떡과 포도주도 진짜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 신자들이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받는 것일 뿐이라고 선언했다. 그렇다면 신자는 누구나 개인적으로 그리스도를 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되므로 구태여 신부에게 의존할 필요가 없게 되는 것이다.
사실 그의 성례전 교리는 그의 교회론에 의해 결정된 것이다. 그는 교회는 하나님의 택함받은 자녀들, 창세 전부터 구원받기로 예정된 자들로 구성된다고 정의했다. 그렇다면 교황이 반드시 교회의
머리라고 할 수 있겠는가! 위클리프는 하나님의 법인 성경(로마 교회의 가르침과 구분된)의 절대적 권위에 근거해서 이런 견해들을 폈다. 그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모든 사람은 누구나 개인적으로 성경을 연구할 권리가 있으며, 따라서 성경을 보통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로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성체에 관한 그의 개념들은 사람들의 호응을 얻지 못한 채 옥스퍼드 내에 큰 소란을 야기시켰다. 위클리프는 사람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1381년 자신의 고백론을 쓰며 그 속에서 자기 개념들에 대해 변호했지만 그의 지지자 중 많은 사람들이 끝내 받아들이지 않는 바람에 할 수 없이 옥스퍼드를 떠나게 된다. 그의 많은 적들이 그를 화형에 처하려 했지만 곤트의 존(John of Gaunt)의 보호로 그리고 교황에 대항하여 왕권을 지지해 준 대가로 1374년 러터워드에 들어가 살 수 있게 된다.
“최초의 영어 성경”과 “롤라드파”
러터워드에 거할 당시 위클리프는 심한 병에 걸려 있었으나 이전 어느 때보다도 풍성한 열매를 맺는 삶을 살게 된다. 그 첫번째 열매는 성경을 영어로 번역한 일이었다. 당시는 제롬이 히브리어와 헬라어로 된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한 불가타(Vulgate) 성경이 가톨릭 교회의 공인 성경으로 되어 있었다. 때문에 라틴어를 모르는 일반 사람들은 성경을 전혀 알지 못한 채 목회자들이 전해주는 것만을 간접적으로 들을 수밖에 없었다. “교회의 법률은 오직 성경뿐”이라고 믿었던 위클리프는 일반 사람 누구나 성경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라틴어 성경을 영어(잉글랜드 중부 지방의 사투리)로 번역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완성된 “위클리프 성경”은 그의 사후 개정되어 당시 널리 사용되던 공용어로 다시 쓰여졌다.
두번째 열매로 위클리프는 자신을 따르던 추종자들을 모아 “롤라드파”(Lollards:“중얼거리는 자들”이라는 뜻으로 이단자들을 지칭하던 단어임)를 결성했다. 1395년까지 롤라드파는 조직적인 집단으로 발전하였고, 자체적으로 목사가 있었으며 일반 대중의 폭넓은 지지를 받았다. 롤라드파는 위클리프의 많은 사상들에 찬성하였는데, 특별히 사제의 임무는 설교하는 것이며, 모든 사람이 이해할 수 있도록 자신들의 언어로 성경을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위클리프는 말년에 2년간 발작을 일으켜 중풍으로 고생하다가 1384년 12월 세상을 떠났다. 위클리프 자신이 직접 개혁을 시작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사상들은 계속 살아 남아 불만의 응어리를 가중시켰고 종교 개혁을 일으키는 하나의 원동력이 되었다. 이후의 종교 개혁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준 그는 실로 종교 개혁의 선구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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