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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바빙크-하나님을 아는 지식

by 【고동엽】 2007. 9. 11.

 

하나님을 아는 지식
-헤르만 바빙크


하나님이 사람의 최고선이시라는 것-이것은 성경 전체가 증언하는 사실이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그의 형상과 모양으로 창조하셔서 사람이 하나님을 그의 창조주로 올바로 알게 하고, 그를 마음을 다하여 사랑하며, 그와 함께 영원한 복락 속에서 살도록 하셨다는 기사로 시작한다. 또한 성경은 새 예루살렘의 거민들이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며 그의 이름을 이마에 새기게 될 것이라는 묘사로 마무리한다.

이 두 순간 사이에 하나님의 그 길고 넓은 계시가 주어져 있다. 이 계시는 유일하며 위대하고 포괄적인 은혜 언약의 약속-내가 너희에게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는-을 그 내용으로 한다. 그리고 이 계시의 중심점, 곧 정점(頂點)은 바로 임마누엘, 곧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God-with-us)이시다. 약속과 그 성취는 함께 나아가는 법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 계시의 시작이요, 원리요, 씨앗이며, 그 씨앗이 충만히 실현되게 되는 것이 바로 그 계시의 행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으로 만물을 부르사 존재하게 하셨듯이, 새 하늘과 새 땅도 그가 자기의 말씀으로 생겨나게 하실 것이요 그 속에서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 가운데 있게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말씀이 육신이 되신 그리스도께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고 말씀하는 것이다(요1:14)

그는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그 자신이 하나님이셨던 바 말씀이며, 그러므로 그는 사람들의 생명이요 빛이셨다. 아버지께서 그리스도와 생명을 공유하시고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생각을 표현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충만한 존재가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다. 그는 아버지를 우리에게 선포하시고 그의 이름을 우리에게 나타내실 뿐 아니라, 자신 안에서 아버지를 보이시고 또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표현되는 하나님이시오 주어지는 하나님이시다. 그는 자기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나님이시오 자기 자신을 나누시는 하나님이시며, 따라서 진리로 충만하고 은혜로 충만하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하나님이 되리라 하신 약속의 말씀에는 그 말씀을 하신 그 순간부터 내가 너희 하나님이라는 성취가 내포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이 그들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게 하기 위하여 자기 자신을 그 백성들에게 주시는 것이다.

성경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는 너희 하나님이라”는 선언을 끊임없이 반복하시는 것을 보게 된다. 창세기3:15의 원 약속(mother-promise)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복락과 모든 구원을 포괄하는 이 풍성한 증언이 거듭거듭 반복되고 있다. 족장들의 삶에서도,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에서도, 혹은 신약의 교회의 역사에서도 계속 나타나는 것이다. 그리고 이에 응답하여 시대를 통틀어서 교회는 그 믿음의 끝없이 다양한 언어로써 감사와 찬양을 표현하고 있다. 곧, 주는 우리의 하나님이시며 우리는 주의 백성이요 주의 초원의 양들이라는 고백이 그것이다.

교회의 편에서 토로하는 이 믿음의 선언은 과학적인 교리도, 계속 반복되는 연합의 형식도 아니요, 오히려 깊이 느낀 현실의 고백이요 또한 삶의 체험에서 우러나오는 현실에 대한 확신의 고백인 것이다. 신구약 성경에 나타나는 선지자들과 사도들, 그리고 그 후의 그리스도의 교회에 등장하는 성도들은 가만히 앉아서 추상적인 개념을 갖고 하나님에 대하여 철학적인 사색을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들에게 어떤 분이시며 그에게 어떤 은혜를 받았는지를 삶의 온갖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고백한 것이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이성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 차가운 개념이 결코 아니었다. 그는 살아 계시고 인격적인 존재요, 그들 주위의 세계보다도 무한히 더 현실적인 실체이셨다. 사실, 그들에게 그는 유일하시며 영원하시며 예배할 만한 존재이셨던 것이다. 그들은 삶 속에서 그 하나님을 생각했고, 그 하나님의 장막에서 살았으며, 마치 그 하나님의 면전에 있는 것처럼 그렇게 행했고, 그 하나님의 궁정에서 그를 섬겼으며, 또한 그 하나님의 성소에서 그에게 예배했던 것이다.

그들의 체험의 순전함과 깊이는 하나님이 그들에게 어떤 분이신지를 표현하기 위해 사용한 언어에서 잘 드러난다. 그들에게는 단어들을 사용하는데 긴장이 없었다. 그들의 마음에서 샘솟아 나는 것들이 입술에서 넘쳐흘렀고, 인간 세계와 자연 세계가 풍부한 언어를 제공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왕이시며, 주(主)이시며, 용사시며, 대장이시며, 목자시며, 구주시며, 구속자시며, 도우시는 자시며, 의원(醫員)이시며, 아버지셨다.

 

 그들은 모든 복락과 복지, 진리와 의, 생명과 자비, 힘과 능력, 평화와 안식을 그 하나님에게서 찾았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태양이요 방패이셨고, 빛과 불이셨고, 샘과 물의 근원이셨고, 반석과 피난처이셨고, 높은 망대이셨고, 상급과 그늘이셨고, 성(城)과 성정이셨다. 세상에서 제공받는 그 모든 세세한 좋은 것들이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백성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그 구원의 측량할 길 없는 풍성함의 형상이요 모양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다윗은 시편 16:2에서 여호와께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또한 아삽은 시편 73편에서 이렇게 노래하였다.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 내 육체와 마음은 쇠약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오 영원한 분깃이시라”(25-26절), 성도들에게는, 하나님이 없으면 하늘의 그 모든 복락과 영광도 헛되고 김빠진 것이 되며, 반대로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서 살 때에는 이 땅의 그 어떠한 것에 대해서도 개의치 않는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다른 모든 선을 향한 사랑을 무한히 초월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것이 하나님의 자녀들의 체험이다. 그들이 그러한 체험을 가지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그 사랑하시는 아들 안에서 자기 자신을 즐거워 하도록 그들에게 내어 주셨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영생, 즉 구원의 총체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또한 그가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데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요17:3)

그리스도께서 이 말씀을 하신 때는 정말 경사스런 순간이었다. 그는 겟세마네 동산에 들어가 자신의 영혼의 마지막 씨름을 하시기 위하여 기드론 시내를 건너가시려 하는 찰라였다. 그러나 거기까지 나아가시기 전에, 그는 자신이 우리의 대제사장으로서 당하실 그 고난과 죽으심을 대비하셨고 또한 아버지께 기도하신다.

 

 아버지께서 자신의 고난과 그 이후에 그를 영화롭게 하셔서, 아들이 자신이 죽기까지 드리는 순종으로 말미암아 곧 얻게 될 그 모든 복들을 내어 주심으로써 그도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해 달라고 구하시는 것이다. 아들은 이렇게 기도하실 때에, 아버지 자신의 뜻과 선한 의도 외에는 아무것도 바라시는 것이 없으셨다. 아버지께서는 그 아들에게 모든 육체에 대한 권세를 주셨으므로 그 아들은 아버지께서 그에게 주신 모든 자들에게 영생을 주시는 것이다. 그러한 영생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또한 그 하나님을 나타내시기 위해 보내심을 받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인 것이다(요17:1-3)


여기서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앎, 곧 지식이란 분명 특별한 성격을 지니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이 얻을 수 있는 모든 다른 지식과는 다르며, 이는 정도(程度))의 차이가 아니라 원리와 본질의 차이인 것이다. 이 점은 두 종류의 지식을 서로 비교해 보기 시작하면 곧바로 드러난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창조된 것들을 아는 지식과 그 기원과 대상, 그리고 그 본질과 효과에 있어서 다른 것이다.

첫째, 그 기원부터가 다르다. 그 지식은 전적으로 그리스도께 의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다른 모든 지식은 우리 자신의 통찰과 판단으로, 우리 자신의 노력과 연구를 통해서 얻어진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경우, 우리는 마치 어린아이들처럼 그리스도께서 그 지식을 우리에게 주시도록 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 지식은 그리스도 이외에는 그 어디서도 찾을 수 없다. 탁월한 철학자들에게서도, 학교들에서도 얻을 수가 없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아버지를 아셨다.

 

그는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그의 품에 안기셨고, 그를 직접 대면하여 보셨다. 그 자신이 친히 하나님이셨고,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며, 그의 본체의 형상이셨고, 그 아버지의 사랑하시며 온전히 기뻐하시는 독생하신 아들이신 것이다(마3:17,요1:1,히1:3). 아버지의 존재의 그 어떠한 것도 아들에게서 감추어져 있지 않다. 아들도 동일한 본성과 동일한 속성과 동일한 지식을 공유하시기 때문이다. 아들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는 것이다(마11:27)

그런데 이 아들이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에게 아버지를 선포하셨다. 그는 그 아버지의 이름을 사람들에게 나타내셨다. 그가 육신이 되셔서 이 땅에 나타나신 것은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하시기 위함인 것이다(요일5:20) 우리는 하나님을 알지 못했고 그의 길을 알고자 하는 관심도 없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하여금 아버지를 알게 하신 것이다. 그는 철학자도, 학자도, 예술가도 아니셨다.

 

 그의 일은 아버지의 이름을 우리에게 나타내시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일을 그는 자신의 평생을 통해서 완전히 이루셨다. 그는 그의 말씀, 그의 일, 그의 삶, 그의 죽으심, 그의 인격, 등 그의 존재와 행위에 속한 모든 것들에서 하나님을 나타내신 것이다. 그는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것을 보신 것 이외에는 절대로 아무것도 말씀하거나 행하지 않으셨다.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이 그의 양식이었다. 그를 본 자는 누구든지 아버지도 본 것이었다(요4:34;8:26-28;12:50,14:9)

그가 베푸신 하나님에 대한 계시는 의지할 만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보내심을 받은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 그가 예수라는 이름을 친히 하나님께로부터 받으신 것은 그가 그의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자이셨기 때문이다(마1:21) 또한 그가 그리스도라 칭함을 받는 것은 그가 아버지의 기름부음받은 자로서 하나님 자신에 의해서 그의 모든 직분들을 위하여 선택되시고 자격을 갖추신 분이기 때문이다(사42:1;마3:16)

 

그가 보내심을 받은 자이신 이유는, 많은 거짓 선지자들과 제사장들처럼 그가 자기 자신의 이름으로 오거나 자기 자신을 높이거나 자기 자신의 공로를 구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과연 그렇다. 아버지께서 세상을 지극히 사랑하셔서 그의 독생자를 주셔서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도록 하셨으므로, 그 때문에 그가 보내심을 받은 것이다(요3:16)

그러므로 그를 영접하고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름을 지닐 권세와 자격이 주어진다(요1:12) 그들은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로서, 신적인 성품을 공유하며, 그의 아들 그리스도를 보면서 하나님을 아는 자들이다.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은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마11:27)

둘째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그 대상에 있어서도 다른 모든 지식과 다르다. 다른 지식의 경우는, 특히 현 시대에 와서는 그 범위가 매우 넓어지고 있으나, 여전히 피조물 주변을 맴돌며, 세상의 것들로 제한되어 있고, 따라서 절대로 영원자(永遠者:the eternal)을 찾을 수가 없다. 물론, 하나님의 영원한 능력과 신격에 대한 계시가 자연물 속에도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거기서 나오는 하나님 지식은 미약하고, 희미하며, 오류와 뒤섞여 있고, 게다가 큰 가치를 지니지 못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자연으로부터 하나님을 알면서도, 그를 하나님으로 영화롭게 하거나 찬양하지 않았고, 그 생각이 허망하여져서 썩지 않는 하나님의 영광을 우상으로 바꾸어 피조물처럼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세계는 하나님을 나타내는 계시이면서도 동시에 하나님을 감추는 은폐(concealment)인 것이다(롬1:20-23)

그러나 여기 이 대제사장적인 기도에서(참조, 요17장) 다른 지식은 제쳐두고 그 대신 감히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대해 말씀하는 분이 전면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의 지식의 대상이시라니, 과연 그 누가 그것을 가늠할 수 있겠는가? 무한하신 분이시오 불가해한 분이시며, 시간으로나 영원으로나 측량할 수도 없고, 그의 임재 앞에서는 천사들도 그 날개로 얼굴을 덮으며,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며 아무도 본 사람이 없고 볼 수도 없는 그런 하나님을 대체 사람이 어떻게 알 수 있다 말인가? 그 숨결이 코에 있고 무(無)보다 못하고 허망함보다 못한 사람이 대체 그런 하나님을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아무리 최고의 지식을 가졌다 해도 그저 헝겊을 덕지덕지 붙인 누더기 이상 아무것도 아닌 그런 사람이 하나님을 어찌 알겠는가? 간접적으로 아는 온갖 지식(knowledge about)을 갖고 있다고 하지만, 직접 아는 지식(knowledge of)이 대체 얼마나 되는가? 사물을 그 기원과 본질과 목적까지 다 아는 그런 지식을 얼마나 갖고 있는가? 온통 미스테리의 주변을 맴돌고 있는 것이 아닌가? 미지의 것들의 경계선 상에 항상 서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니 그렇게 보잘것없고 연약하며 오류가 많고 어리석은 사람이, 높으시고 거룩하시며 홀로 지혜로우시며 전능하신 하나님을 대체 어찌 알겠느냐는 말이다.

그런 지식은 우리 한계 바깥에 있다. 하지만 아버지를 보셨고 또한 그를 우리에게 선포하신 그리스도께서 그 지식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그를 의지할 수 있고 그의 증거는 참되며 전적으로 받아들일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 사람이여,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고 싶으면, 지혜 있는 자나 선비들이나 이 시대의 변론가에게 묻지 말고,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희 마음으로. “누가 하늘에까지 올라가며 누가 깊은 곳까지 내려갈까? 라고 말하지 말라. 그 말씀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시는 말씀이, 너희 가까이 있음이라, 그 자신이 말씀이시오, 아버지의 완전한 계시이신 것이다. 그의 모습처럼, 아버지도 그러하시다. 즉, 그리스도와 마찬가지로 의로우시며 거룩하시며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것이다.

그의 십자가에서 구약의 믿음의 충만한 내용이 드러난다. 곧 시편 기자의 말처럼, “여호와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우리의 죄를 따라 우리를 처벌하지는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우리에게 그대로 갚지는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의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신다”는 사실이다(시103:8-13)그리고 그리스도의 말씀의 거울에 비추어 그의 영광을 보면서, 우리는 황홀경 속에 이렇게 외친다. 우리가 그를 아는 것은 그가 먼저 우리를 아셨기 때문이요, “우리가(그를)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일4:19)

이러한 기원과 내용은 또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특유한 본질을 결정 지어준다.

위에서 언급한 그 대제사장적인 기도의 한 구절에서, 예수께서는 그저 정보로만 그치는 그런 지식이 아니라 진정한 앎(knowing)이 되는 그런 지식을 말씀하신다. 이 두 가지는 서로 현격한 차이가 있다. 식물이나 동물, 혹은 사람이나 나라 등에 대한 몇 가지 정보를 책에서 얻었다고 해서, 그런 주제에 대해서 직접적인 인격적 지식을 가졌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 정보는 그저 다른 사람이 그 주제에 대해서 제시해 놓은 묘사에 근거하는 것일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정보는 그저 머릿속에서만 일어나는 사건이다. 그러나 진정한 앎이란 인격적인 관심의 요소와 개입(介入)과 마음의 활동을 내포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주신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관한 묘사를 말씀 속에서 찾을 수 있고,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 뜻하신 하나님을 아는 진정한 앎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하나님에 대한 정보를 갖게 될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다. 그러므로 주의 뜻을 아는 일종의 지식은 있으나, 그 뜻을 행하고자 하는 마음의 준비가 뒤따르지 않는 경우도 가능한 것이다(눅12:47-48)사람들이 주여, 주여, 하면서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수도 있다(마7:21) 사랑에 길을 내어주는 것이 아니라, 마치 마귀들의 믿음처럼 그저 두려워하고 떨기만 하는 그런 믿음이 있다(약2:19) 말씀을 행하기를 원치 않고 그저 그 말씀을 듣기만 하여 두 배나 채찍에 맞게 될 그런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약1:22)

이와 관련하여 예수께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말씀하실 때에는, 자기 자신이 소유하시는 지식과 종류가 유사한 그런 지식을 염두에 두고 계신 것이다. 그는 직업적인 신학자도, 신학 박사나 신학 교수도 아니셨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직접 개별적으로 보고 생각하심으로써 그를 아셨고, 자연에서나 그의 말씀에서나 그의 섬김에서나, 어디서나 그를 보셨고, 다른 무엇보다도 그를 사랑하셨고, 모든 일에서, 심지어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그에게 순종하셨다. 진리를 아는 그의 지식은 모두가 진리를 행하는 그의 실천과 항상 함께 하는 것이었다. 지식과 사랑이 함께 온 것이다.

과연,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그에 관하여 많은 것들을 아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리스도 안에서 그를 바라보는 것에, 우리의 삶의 길에서 그를 대면하는 것에, 또한 우리의 영혼의 체험 속에서 그의 덕과 그의 의와 거룩함과 그의 사랑과 은혜를 알게 되는 데에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지식에는, 다른 모든 지식과는 달리, 믿음의 지식이라는 이름이 붙여지는 것이다. 이 지식은 학문적인 연구와 사색의 산물이 아니라 어린아이 같은 단순한 믿음의 산물이다. 이 믿음은, 다른 이들에게는 물론 나에게도 죄 씻음과 영원한 의와 구원이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아 순전히 은혜로 하나님께로부터 값없이 주어진다는 것을 아는 확실한 지식임은 물론 든든한 확신이기도 한 것이다. 작은 어린아이들처럼 되는 자들만이 천국에 들어갈 것이다(마18:3) 오직 마음이 청결한 자들만이 하나님을 볼 것이다(마5:8) 오직 물과 성령으로 난 자들만이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요3:5) 하나님의 이름을 아는 자들은 그를 의지하며 신뢰하는 법이다(시9:10) 하나님을 사랑하는 정도만큼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이런 식으로 이해하면, 그 지식이 역사하여 그 결과로 영생이 주어진다는 것이 결코 놀랄 일이 아니다. 지식과 생명(혹은, 삶)이 서로 별 관계가 없어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전도서 기자가 참되게 말씀하고 있지 않은가 :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며” “많은 책들을 짓는 것은 끝이 없고, 많이 공부하는 것은 몸을 피곤하게 하느니라”(전1:18, 12:12)

지식은 힘이다. 이 정도는 우리도 이해할 수 있다. 모든 앎은 물질에 대한 정신의 승리요, 땅이 사람의 주권에 굴복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지식이 삶이 되어야 하는데, 그것을 누가 이해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심지어 자연계에서도 지식을 통해서 삶의 깊이와 풍성함이 더해진다. 포괄적인 지식을 가질수록, 그 삶이 더욱 강렬해진다. 무생물은 알지 못하며 또한 살지도 않는다. 그러나 동물의 경우 의식이 발전될 때에, 그 동물의 삶에도 내용과 범위가 주어지는 것이다. 사람들의 경우에는 가장 많은 것을 아는 사람의 삶이 가장 풍성한 삶이다.

 

 정신이상자나 유약한 자나 단순한 자나 발육이 덜된 자의 삶이 대체 무엇인가? 사상가와 시인의 삶과 비교할 때 그런 삶은 초라하고 제한적인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갖가지 차이점들을 찾을 수 있지만, 그것은 그저 정도의 차이에 지나지 않는다. 삶 그 자체가 지식으로 인하여 변하지를 않는 것이다. 그리고 가장 탁월한 학자의 삶이나 단순하기 그지없는 일꾼의 삶이나 필연적으로 죽음으로 끝나게 되어 있다. 그것은 이 세상의 제한된 공급원으로부터만 양식을 얻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는 이 지식은 피조물을 아는 것이 아니라,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들을 아는 지식이 삶을 풍요롭게 할 수 있다면, 하물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야 삶에 얼마나 더한 것을 주겠는가? 하나님은 사망의 하나님도 죽은 자의 하나님도 아니시며, 생명의 하나님이시며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 말이다. 하나님이 그의 형상을 따라 재창조하시고 또한 그의 교제 속으로 회복시키신 모든 사람들은 바로 그 사실로 인하여 사망의 수준 위로 올려지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하셨다(요11:25-26)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알게 되면, 그와 더불어 영생과 흔들림 없는 기쁨과 하늘의 복락을 누리게 된다. 이것들은 그저 효과만이 아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 그 자체가 곧바로 새롭고 영원하며 복된 삶인 것이다.

기독교 교회는 옛부터 신학(Theology 혹은 Divinity)이라 불려온 그 지식 혹은 학문의 체계의 성격을 이러한 성경의 가르침을 좇아서 결정하였다. 신학이란 하나님의 계시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이끌어내는 학(學)으로서, 하나님의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연구하고 사고하며,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도록 그 내용을 묘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름지기 참된 신학자는 하나님을 힘입어, 하나님을 통하여, 하나님에 대하여 말씀하며 또한 하나님의 이름에 영광이 되도록 그 일을 행하는 사람인 것이다.

 

 학식 있는 사람과 단순한 사람 사이에는 그저 정도의 차이밖에는 없다. 두 부류의 사람 모두에게 “주도 한 분이시오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엡4:5-7)

이런 견지에서, 칼빈(John Calvin : 1509-1564)은 그의 제네바 요리문답(Geneva Catechism)의 첫 질문을 “사람의 제일 된 목적이 무엇인가?”로 잡고, 그 질문에 대해 분명하고도 확실하게 대답하고 있다: “그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웨스트민스터 요리문답(Westminster Catechism) 도 그 교훈을 “사람의 제일 된 목적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으로 시작하고, 또한 그 질문에 대해서 간단하면서도 풍성하게 답하고 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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