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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바르트의 기독론적-전이의 해석학

by 【고동엽】 2011. 6.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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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 바르트의 기독론적-전이의 해석학


(Hermeneutik der christologischen Metapher bei K. Barth)

 

O. 해석, 사고유형, 아니면 증언인가?

 

가다머(H.-G.Gadamer)는 "해석학"을 선포(Verk nden), 통역(Dolmetschen), 설명(Erkl ren), 혹은 주석(Auslegen)의 예술이라고 정의한다. 그에 의하면 본래 "해석학"이란 용어는 "헤르메스(Hermes)"라는 말에서 나왔는데, 헤르마스는 神들의 使者로서 신들의 뜻을 세상에 전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런데 신들의 명령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청취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신들이 내린 명령에 대한 설명을 덧붙였다. 따라서 가다머는 "해석학"이란 용어의 근본적인 의미를 "사유에 관한 증언(Aussage von Gedanken)"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특히 신학적으로는 성서가 증언하고자 했던 최초 본래의 내용을 올바르게 해석하는 것이 해석학의 과제라고 말한다. 해석학에 대한 이러한 가다머의 개념정의는, 해석학이 화자의 사유체계 내지 사고유형에 대한 분석을 결코 배제하지 않음을 암시해 주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해석학에 관하여 ( )]란 책에서, 해석학은 종합적인 판단 내지 진리의 논리적 구조를 체계적인 문법 양식에 준하여 탐구하는 논리적 방법이라고 보았다. 특히 신학적으로는 성서가 증언하는 바의 내용 내지 사실(Sache)을 어떠한 사적 견해 없이 정확하게 설명하는 방법이 해석학이라고 정의된다. 이 때에 성서는 단지 객관적 사실에 대한 역사적 증언이나, 독단적 교리를 주장하기 위한 참고서가 아니라, 구체적이며 현실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이라는 전제가 주어진다. 따라서 성서 해석학은 성서가 담지하고 있는 구체적인 사실 혹은 내용을 파악하기 위한 이해방식(Verfassungsmethode)이라고 정의될 수 있다.


20세기 "성서 만으로(sola scrpitura)"라는 명제로 교의학적 신학을 전개한 칼 바르트(K. Barth, 1886-1968)의 신학을 우리는 변증법적 "말씀의 신학"이라고 특징 짓고 있다. 그런데 바르트의 변증법적 신학은 단지 그의 신학적 논리 전개가 변증법적이기 때문에 "변증법적 신학"으로 평가되는 것은 아니다. 바르트는 성서 그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를 - vere deus, vere homo - 로 증언하고 있으며, 동시에 예수가 "참 신이며, 참 인간"이라는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서 변증법적 증언을 담지하고 있다고 본다. 따라서 그의 변증법적 신학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 해석에 기초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성서의 내용(Sache)을 예수 그리스도로 보며, 동시에 최초의 해석학자를 예수 그리스도 자신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눅 24:27) 그렇다면 여기서 다음과 같은 몇가지 질문이 제기된다: 성서의 증언과 기독론적 교리는 - vere deus, vere homo - 어떠한 연관성을 갖는가? 바르트에게 있어서 성서를 해석하는 방식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진술사이에 과연 해석학적 일치성이 존재하는가?


이러한 일연의 질문에 답변하기 위해서 우리는, 바르트가 성서의 증언을 이해하는 해석학적 모형(hermeneutisches Paradigma)을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따라서 아래의 작은 논문에서는 칼 바르트의 초창기 변증법적 신학으로 부터 시작에서 그의 교회교의학(Krichlich Dogmaitk)을 지배하고 있는 해석학적 모형을 분석해 보고자 한다. 그러나 아래 논문은 주로 바르트의 가장 대표적인 사유모델 내지 해석학적 모형을 분석해 내는데 국한 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바르트의 해석학적 모형은 연대기적으로 체계적으로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여러 가지 모형이 복합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 연구를 통하여 우리는 바르트의 해석학적 모형이 철저히 기독론적 변증법임을 재 확인하게 될 것이며, 동시에 기독교의 복음을 시-공간을 초월하여 보편화시킨 그의 탁월한 학문적 공적을 인지하게 될 것이다.


I. 하나님의 말씀의 행위에 대한 증언으로서의 성서

 

바르트에 의하면 성서의 내용(Sache)는 하나님의 행위에 대한 증언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에 관하여 말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계시 행위(Handeln)에 관하여 말하는 것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라. 그렇기 때문에 바르트의 "신론(Gotteslehre)"의 근본적인 동기는 하나님의 계시 행위에 있고, 그의 하나님 말씀론(Die Lehre vom Wort Gotes)는 곧 "하나님의 현실성(Die Wirklichkeit Gottes)"이라는 장에 속한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현실성"이란 장에서 다음과 같은 기본 명제로 부터 출발한다: "하나님은 자기 계시의 행위 속에 있는 바로 그러한 분이다(Gott ist, der er ist, in der Tat seiner Offenbarung)" 따라서 바르트에게 있어서 성서에 대한 해석은 단지 그 말씀을 묵상하거나, 본문을 분석하는데 있지 않고, 오히려 그 말씀이 증언하는 대상 곧 하나님의 계시 행위를 논리적으로 이해하는 데 있다. 더 자세히 말하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자신을 계시하느냐에 대한 분석이 곧 성서에 대한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바르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계시 행위는 구체적으로 <말씀하심의 행위>이다, 즉 "하나님께서 말씀 하셨다(Deus dixit)"는 것이다. 그리고 역으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심"은 곧 하나님의 역사 속에 있는 하나님의 계시 행위를 뜻하다.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하심"은 우리들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들에게는 기적으로 보인다. 따라서 성서 안에 담겨진 기적은 곧 말씀의 기적이다, 곧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들에게 말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비록 하나님의 말씀이 예언자나, 사도들의 인간적인 말의 형식을 빌리기는 하지만, 그래서 그들의 증언 속에는 불일치와 모순이 존재하지만, 그들의 증언을 하나님에 대한 증언, 곧 하나님이 되게하는 것은 하나님 자신의 행위이다.


성서 해석학에 대한 이러한 근본적인 발단을 그는 이미 "자신의 계시 속에 있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관한 교리(Die Lehre vom dreieinigen Gott in seiner Offebarung)"에서 전개하고 있다. 그는 삼위일체론의 영역에서 다음과 같이 아주 간단하게 진술하고 있다: "문장의 주체와 술어와 객체 관한 질문들은 곧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는 것과 상응한다. 이렇듯 바르트는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를 하나님의 계시사건으로 기술하고 있다. 즉 하나님은 자신이 말씀하시는 그 말씀 속에서 자신의 주님으로, 곧 주체(Subjekt)로 계시하시고, 또한 자신을 자기 계시사건의 객체(Objekt)로 계시하신다. 그래서 바르트는 "하나님은 자기 자신이외에 그 어떠한 보다 구체적인 것도, 그 어떠한 보다 믿음 만한 것도, 그 어떠한 보다 생동적인 것도 계시할 수 없다"고 말한다. 융엘(E. J ngel)에 의하면 이러한 바르트의 말씀 계시로서의 하나님 계시는 신약성서적 증언인 요한복음 1장14절: " "에 대한 주석이라고 본다.


이상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바르트에게 있어서 성서 해석은, 하나님의 말씀하심으로서의 하나님 행위에 대한 해석이고, 하나님의 말씀은 곧 하나님의 계시사건이며, 이 계시 사건은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의 화육을 뜻한다. 결과적으로 어쩔 수 없이 바르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에 대한 해석은 기독론적 사유모델을 담지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바르트에게서는 하나님의 이름과 계시에 대한 언급은 등가치를( quivalente) 갖는다. 다시 말하면, "계시를 말하는자(Wer Offenbarung sagt)"는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Das Wort ward Fleisch)"을 말하는 자이고, 따라서 "계시를 말하는 자"는 동시에 "우리와 함께하는 자(Gott mit uns)"를 말하는 자라고 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계시를 말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Deus dixit)"를 말한다고, 바르트는 진술한다. 이러한 근거에서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바르트의 신학을 "그리스도중심의 신학"이라고 특징지어 평한다. 이러한 해석은, 바르트가 성서를 해석하는데 있어서 언제든지 기독론적 해석을 전면에 내어 놓는다는 것을 뜻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행위에 대한 증언으로서의 성서>를 아래와 같은 도식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말씀 (하나님) --> --> 인간 => 따라서


II. 기독론적 역설의 변증법

 

바르트의 초창기 신학에 대한 解釋은 바르트의 다음과 같은 말에 起因한다: "애초부터 삶에 대한 우리의 긍정(Ja)은 그 안에 神의 부정(Nein)을 수반하고 있으며, 그 부정은 반제(Antithesis)로서 일어나며, 그러나 그것은 본래적이고 궁극적인 종합에 대한 명제가 되는 것을 지시한다. 저 否定은 마지막에 다다르게 되는 최고의 진리(Instanz)가 아니다. 단지 ...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물음에 대답을 주는 것에 대한 명칭일 뿐이다". 여기서 즉각적으로 질문이 제기된다. 바르트는 성서를 어떻게 해석하기에 이러한 역설적인 진술을 할 수 있을까?


바르트는 "사회 속에 있는 그리스도인(Der Christ in der Gesellschaft)"이란 논문에서 "그리스도人"을 "세상적인 것"과 "신적인 것"의 변증법적 종합으로본다. 그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은 우리 안에 우리 자신이 들어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계신 사람이다."(4) 그에게 있어서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 사역의 초역사적 혹은 구원론적 보편성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그는 "우리 안"이란 의미를 "우리 위", "우리의 배후" 그리고 "우리를 넘어"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즉 그는 "그리스도인"을 피조물인 인간과 하나님과의 존재론적 혹은 초월적 結合 내지 綜合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종합명제로서의 "그리스도인"에는 언제든지 피조물인 인간과 창조주 하나님 사이의 전적 분리가 전제된다. 왜냐하면 그는 神的인 것을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적인 것은(Das G ttliche), 그 자신 안에 감추어져 있는 것이며, 그 類 있어서는 아주 새로운 것이고, 그리고 세상과는 분리되어 있는, 어떤 전체이다." 반면에 바르트는 世上的인 것 혹은 人間的인 것을 먼지로 규정한다: "너는 먼지니 먼지로 돌아가리라, 이것이 인간성에 대한 바른 선고가 아니며, 인간성에 대한 본연의 신앙고백이 아닌가?"(7)

 

 神的인 것과 人間 내지 人間的인 것의 이러한 예리한 대립을 그는 비유적으로 되물음으로써 확고히한다: "모두가 무의미한 것 뿐인데 의미있는 것이 어디 있으며, 타락한 것 가운데서 근원적인 것이 어디 있으며, 모두가 쭉정이 뿐인데 밀알이 어디있는가?"(6f.).
바르트는 "그리스도인"이란 종합명제에 앞서 신적인 것과 세상적인 것의 예리한 분리를 전제하기 때문에, 神的인 것과 人間的인 것의 아무런 전제없는 결합을 거부한다: "신적인 것을, 만일 그것이 진정 신적인 것이라면 인간들에 눈에 감추어져 있어서 접근을 못하게 돼 있으나, 오늘날 우리는 그것을 즐겨 결합하려고 한다."(6) 그래서 바르트는 "기독교-사회(christlich-sozial)", "복음주의-사회(evangelisch-sozial)" 그리고 "종교-사회(religi s-sozial)" 式으로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을 결합하는 것을 단호히 거부한다.


그렇지만 바르트는 신적인 것과 세상적인 것 내재 인간적인 것의 분리를 기독론적으로 극복한다. 그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인간 되심(Gottes Menschwerdung)"이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의 분리를 극복하는 새로운 운동이다. 그는 말하기를: "그리스도는 위로부터 오시는 전적으로 새로운 분이시고, 길이며, 생명이고, 인간 가운데 계신 하나님의 삶이고, 인간의 아들이다. 그 분 안에서 人間性은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직접성 (Unmittelbarkeit)을 인식하게 된다"(11) 바꾸어 말하면,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의 분리는 최종적이며, 결정적인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 하나님으로 부터 인간에게 오는 길은 아직도 남아 있다고 한다. 그 길은 바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에게로 오시는 하나님의 길이다(참. 12).


신적인 것과 세상적인 것의 분리가 극복되는 이러한 하나님의 일방적인 길을 바르트는 모세가 호렙산에서 하나님을 만난 이야기를 들어 설명한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너는 가까이 오지 말고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곳이다"(출 3,5) 하신 말씀은 인간이 감히 스스로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없는 존재 임을 계시해 주는 것이라고 바르트는 해석한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은, "나는 확실히 애급에 있는 내 백성의 환난을 보았고,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었다. 나는 그들을 애굽 사람들의 손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왔다"(출 3,7-8)고, 말씀하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인간과 전적으로 분리되어 있는 분이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 생명의 구원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 땅에 직접 오신 하나님이시다. 이러한 "위로부터 아래로"의 운동, 곧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인간 되심"은 흙으로 빚어진 인간과 창조주 하나님 사이에 가로 놓인 담을 넘어오는 하나의 "수직선적 (die senkrechte Linie)"운동이다. 그리고 이 운동이 바로 영원한 말씀의 화육사건이다(요 1:14). 따라서 바르트에게 있어서 신적인 것과 세상적인 것의 분리는 기독론적으로 극복된다.


바르트에 의하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러한 하나님의 "수직선적" 운동 속에서 "전적 타자(Das gnaz Andere)"(13)로 계신 하나님을 인식하게 되고,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건, 곧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의 종합으로 말미암아 "흙에서 낳으니, 흙으로 돌아가라"가 아니라, "내가 살았으니. 너도 살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산다. 이러한 의미에서 말씀의 화육 사건속에서 하나님의 말씀하셨다(deus dixit)고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말씀의 내용은 인간이 그리스도를 통하여(durch Christus)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산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의 분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극복되는 과정은 어떠한 변증법적 특징을 갖고 있는가?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수직선적인 운동", 즉 "하나님의 인간 되심"을 소위 명제, 반명제, 그리고 종합명제란 변증법적 용어를 빌어서 설명한다. 그런데 바르트는 종합명제에서 반명제를 본다. 그리고 명제를 반명제의 前提가 아니라, 오히려 반명제 속에 있는 부정과 긍정 사이의 갈등을 극복해야 하는 종합명제의 전제로 본다. 그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독특한 변증법을 설명한다: "근원적인 것은 종합명제(Synthesis)이다, 이 종합명제로 부터 비로서 반명제(Antithesis)가 나온다. 그러나 또한 종합 명제로부터 명제(Thesis) 자체가 나온다." 이를 다시 바꾸어서 다음과 같이 얘기 한다: "단지 명제로부터 참된 반명제가 나올 수 있다. 참된 반명제란 근원적으로 종합명제에서 나오는 반명제를 뜻한다." 이러한 바르트의 변증법적 전개 속에는 논리적 "동시성(Gleichzeitigkeit)"이 내재되어 있다. 그는 논리적 동시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세상의: 역자주) 긍정적인 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으로 부터 나온다. 그러나 세상은 하나님께서 의도했던 것의 부정이다. 따라서 하나님 위에 근거한 것이 아닌 (세상의: 역자 첨부) 모든 긍정적인 것은 부정적인 것이다"(같은곳).


바르트는 자신의 변증법 도식을 구원사적으로 보충 설명한다. 그에 의하면, 하나님이 세상의 창조주이시기에 구원자가 될 수 있고, 구원자이시기에 동시에 종말의 심판주가 될수 있다. 그래서 그는 역사의 종합으로서의 종말론을 시간의(역사의) 끝에서 보지 않고, 인간과 하나님의 갈등이 극복된 예수 그리스도의 화해 사건에서 본다. 그리고 동시에 그는 역사의 참된 시작도 창조로 부터 보지 않고, 역사의 종합인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에서 본다. 왜냐하면, 그에 의하면, 창조 역사의 참된 의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에서 참으로 밝게 계시되었기 때문이다. 이를 바르트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참된 종말론은 단지 (시간상) 앞으로 뿐만 아니라, 또한 뒤로 (소급해서) 빛을 비춘다.

 

예수 그리스도는 오늘에야 비로서 계신 것이 아니라, 어제도 계셨다."(같은곳) 이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역사적 종합명제인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 속에서 계시되었고, 그 나라는 창조 역사의 전제 내지 목적이였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종합명제에 뿌리를 두고 있는 반명제의 관점으로 부터만이 사람들은 명제를 조용히 가치 있는 것으로 놔 둘 수 있다"(24)고 말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르트에게 있어서, 세상의 나라 혹은 현세의 나라는 역사적 종말에 있을 하나님의 나라의 반명제라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의 반명제로 있는 이 세상 나라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극복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그리스도가 자신 안에 있는자는 새로운 피조물로서 이제 "흙에서 낳으니, 흙으로 돌아갈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하는 者라는 것이다. 여기서 문제가 제기 된다: 어떻게 하나님 나라와 세상의 갈등이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하나님의 인간 되심으로 극복될 수 있는가?


이러한 물음에 대하여 바르트는 인간의 삶이 갖고 있는 동시적인 역설적 갈등을 얘기한다. "삶에 대한 우리들의 긍정은 처음부터 그 자체 안에 神的인 否定을 담지하고 있다"(28). 그런데 "신적 부정은 반명제에서 나온 것으로서 선행하는 명제에 대립되어 있고, 근원적이고-최종적인 종합명제를 지시하고 있는 부정"(같은곳) 이라고 바르트는 말한다. 이 말은 우리의 긍정(Ja)은 신적 부정(Nein)이고, 우리의 부정은 신적 긍정이라는 역설적 갈등의 세계가 바로 우리들이 현존해 있는 세상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 편에서의 긍정은 바로 이 否定的인 우리의 삶을 否定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즉 썩어질 세상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긍정적인 사랑은 죽을 수 밖에 없는 부정적인 육체의 죽음으로 (곧 부정)으로 수행되었다. 여기서 인간적인 부정은 하나님의 긍정에 삼킨바 된다. 바꾸어 말하면 인간적 삶에 대한 긍정은 하나님의 부정에 의해서 부정된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긍정 혹은 인간적인 긍정에 대한 부정으로서 위로부터, 곧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분이시라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바르트에 의하면, 세상적인 삶에 대한 하나님의 부정과 그 부정에 대한 하나님의 긍정으로서의 종합이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확실히하고 넘어가야 할 것은,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의 역설적 갈등이 기독론적으로 종합되는 것은, 바르트에 의하면, 쌍방의 노력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에 의하면 "종합은 오로지 하나님 안에서만 발견된다."(34) 다시 말하면, "명제 속에서 의도되었던 종합 명제는 반 명제 속에서 단지 찿아졌고"(같은곳), 밝히 드러났을 뿐이다. 역사적으로 바꾸어 말하면, 종말은 이미 창조에서 계획된 것이고, 그것은 반명제에 대한 극복 속에서 계시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근거에서 바르트는 새로운 종말론을 정립한다: "최후의 것, 終末 ( ), 곧 종합은 다음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마지막에 이르는 연속(Fortsetzung), 그 결과(Folge) 결론(Konsequenz)이 아니라, 반대로 모든 잠정적인 것으로부터의 단절을 의미하고, 그러나 또한 바로 (이 잠정적인 것과의 단절)이기 때문에 근원적인 의미을 갖고, 그 잠정적인 것을 움직이는 힘이다."(35) 이 말은 終末이 이 歷史의 연속이나, 역사적 결과 혹은 끝이 아니라, 전혀 다른 것이라는 뜻이다. 왜냐하면 종합명제가 전적으로 하나님으로 부터 오는 전혀 다른 새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르트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아니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있을 때에, 우리는 전혀 다른 세계의 백성이 되고, 전적으로 다른 새 하늘과 새 땅의 백성이 된다는 것이다.

 

즉 썩을 것이 썩지 않을 것을 입고, 죽을 것이 죽지 않을 것을 입는 것이다(고전 15,53)(32). 그렇다 바르트에 의하면, 그 새 하늘과 새 땅은 이미 창조 때에 하나님에 의해서 계획되고, 목적 되었던 것이다. 즉 새 하늘과 새 땅은 먼저번 하늘과 땅이 인간의 죄악으로 인하여 더러워졌고, 파괴되어서 다시금 새롭게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하나님 안에서 계획되어지고 목적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을, 탈 세상적으로 이 세상을 부인함으로서 소유 것이 아니라, 창조의 목적이며, 이 역사의 歸港地를 희망함으로서 소유하는 것이다.


III. 부정과 긍정의 양면성과 역설의 동시성

 

바르트는 "사회 속에 있는 그리스도인"이란 논문에서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의 예리한 분리를 전제하였던 것과 같이, 그의 논문: "성서적 질문과 통찰과 전망(Biblische Fragen, Einsichten und Ausblick, 1920)"에서도 성서가 제공해 주는 "하나님 인식"과 우리들이 알고 있는 모든 세속적 지식, 역사적 의미, 그리고 삶의 가치를 철저히 二分하여 대립시킨다. 그는 이원론적 대립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일부는 우리들 안에 존재하는 것에(Drinnensein), 그리고 동시에 일부는(teilweises) 우리의 밖에 있는 존재(Drau ensein)에 견고히 붙어 있음으로서 우리자신을 확고히 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우리 자신은 이중성(Zweierlei), 즉 하나의 이원론(Dualismus)을 세워야 하는가? 그렇다면 또한 하나님 인식 다른 인식들에 반대되는 것이기에 우리 안에 다른 공간을 갖고 있지 않는 것인가? 하나님 인식은 다른 인식들에 반대되지 않는가!".

하나님 인식과 다른 세속적 지식의 이러한 예리한 분리 때문에 그는, 우리는 하나님 인식을 감당할 수 없다고, 말한다. 우리는 부분적으로도 하나님의 인식에 대하여는 전적으로 무능력하고 또 무능력한 상태로 자라났다고, 말한다.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그는 성서해석에 있어서 루터의 "성서에 의한 성서 해석(scriptura sacra sui ipsius interpres)"을 수용한다(50).


그러나 바르트는 "하나님 인식"을, 우리가 소유하는 모든 지식의 전제로 이해한다. 그는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지식은 하나님의 지식으로부터 출발한다고 본다. "하나님 인식"을 세속적 모든 인식의 전제로 봄으로서, 그는 "하나님 인식"과 "우리들의 지식"을 "긍정"과 "부정"의 대립 상태로 본다: "그렇게 우리는 긍정(Ja)과 부정(Nein), 그리고 부정과 긍정에 직면하게된다. 그리고 그 속에서 우리가, '귀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하는 말씀의 위기 속에, 그리고 그 위기의 당혹함에, 우리 자신이 있음을 발견한다."(53) 그러나 인간적인 것의 부정과 신적인 긍정은, 바르트에게서, 영원한 분리로 끝나지 않는다. 바르트는 세속적 부정 속에 하나님의 긍정이 전제되어 있는 것으로 봄으로서, 부정과 긍정의 대립 및 갈등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선택으로 극복한다: "선택사상이란 곤경에서 나온 것 이외는 다른 어떠한 말도, 성서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에 관하여 말해야만 했던 것에 관하여 언급될 수 없고, 들여질 수도 없다."(55)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인간의 선택 그 사건 이외는 부정과 긍정의 철저한 분리가 극복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이 선택을 인식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 인식"과 세속적 지식의 종합이라고 할 수 있다. 성서는 바로 이 점을 우리에게 제공해 주고 있다. 그렇다면 인간에 의해서 쓰여진 성서가 어떻게 모든 세속적 지식 내지는 인식을 초월한 하나님 인식을 제공해 줄 수 있는가?


이러한 질문에 대하여 바르트도 성서가 하나의 종교적 문서라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성서의 증언은 그 속에 하나님에 대한 통찰이 있기 때문에 다른 문서와 다르다고 강조한다. 더 자세히 말하면, 우리와 "전적으로 다른 분(totaliter aliter)"(73)이신 예수에 대한 통찰이 성서에 있기에, 성서는 모든 인간적인 문서들과 전적으로 다르다. 이를 바르트는 은유적(methaphorisch)으로 설명한다. 그는, 그류네발트(Gr ndewald)가 예수가 골고다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있는 장면을 그린 그림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는 세례요한의 손과 같은 것이 바로 성서라고 말한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통찰이 없는 다른 문서들과 성서는 전적으로 다른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성서는 세상적 문서들과 내용상 전혀 다른 타자성을 갖는다. 그렇다면 여기서 문제가 제기된다: 어떻게 인간적인 통찰이 "전적으로 다른 분"에 대한 통찰이 될 수 있을까? 어떻게 인간이 "전적으로 다른" 하나님을 통찰 할 수 있는가?


그러나 이점에 있어서도 바르트는 앞에서 전개해온 변증법적 사고를 되풀이 한다. 즉 "하나님 인식"이 모든 다른 인식의 전제가 되듯이. 성서는 모든 종교적 증언의 전제이다. 더 나아가 성서가 증언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은 모든 사건의 전제이며, 동시에 종합이다. 그래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역설적으로 해석한다. 즉 예수의 죽음은,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죄에 대한 심판이다. 즉 인간의 否定적인 죄가 否定되는(거부되는) 하나님의 肯定이다. 그는, 예수에게서 있어난 종말론적 사건을 새로운 창조로 해석한다. 한마디로 말해서, 그에게 있어서, 예수의 부활은 "하나님 통치(Gottesherrschaft)"(72)의 시작이고, 시간이 종식된 "영원(Ewigkeit)"(72)이고, "새로운 세계"(73)이다, 이 종합에 대한 통찰이 바로 성서가 우리에게 증언하고자 하는 내용이다. 따라서 성서의 증언도 철저히 "변증법적"이다. 그의 말을 빌어서 말하면, 모든 질문에 대한 해답은 "거리로 부터(von daher)"(67, u.a..), 곧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부터 온다.


결론적으로 바르트가 본 성서의 통찰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통찰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은 인간의 부정적인 요소들에 대한 부정으로서의 하나님의 긍정이라는 점에서 성서의 증언도 다분히 변증법적이라고 그는 확정한다. 이러한 바르트의 논리 전개는 우선 먼저 성서의 특성, 즉 인간의 종교적 문서와 하나님에 대한 통찰을, 분리시키고, 그 다음 분리되어 있는 내용이 그리스도의 사건에 대한 증언이라는 하나의 사실로 종합 함으로서 양자의 분리를 극복하여 성서의 독특성을 증언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이러한 전개 방식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그것은 하나의 사실 혹은 사건이 갖고 있는 <양면성>을 - 부정적인 면과 긍정적인 면을 - <역설적이면서 동시적으로> - 부정을 긍정으로 그리고 긍정을 부정으로 - 해석하는 방법이다.


IV. 하나님의 주권적 행위로서의 종합 명제

 

바르트는 "신학의 과제로서의 하나님의 말씀(Das Wort Gottes als Aufgabe der Theologie)" 에서 우선 먼저 3 가지 문장으로 강연 제목과 관계되는 명제를 설명한다: "우리는 신학자로서 하나님에 관하여 얘기해야한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이기에 그리고 바로 인간 자체이기에 하나님에 관하여 얘기할 수 없다. 우리는 양자, 즉 우리의 당위와 우리의 무능(할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바로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한다."(199).


우선 바르트는 "신학자로서 하나님에 관하여 이야기 해야 한다"는 명제를 부정적으로 해석한다. 그에 의하면, 인간이란 존재는 처음 부터 존재의 문제를 갖고있는 수수께끼와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에 관하여 얘기할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에 관하여 이야기 해야 한다"는 과제는 갖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하나님과 인간은 "가능성과 불가능성", "생명과 죽음", "영원과 시간"이라는 질적 차이를 갖고 있기 때문에, 인간이 "하나님에 관하여 이야기 해야한다"는 과제는 여전히 곤궁에 빠진 문제로 남게 된다고, 바르트는 강조한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 "해야 한다"는 과제와 하나님과 인간의 현실적인 질적 차이 속에 內在해 있는 이러한 변증법적 대립(dialektische Konstration)이 극복 될 수 있는 방법은 "새로운 사건"의 발생에 의해서만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 "새로운 사건"은 인간 편에서 일어날 아무런 가능성이 없다. 그러므로 결과적으로 바르트의 첫 번째 명제는 두 번째 명제, 곧: "우리는 인간이기에 그리고 바로 인간 자체이기에 하나님에 관하여 이야기 할 수 없다"는 명제로 넘어가게 된다.


두번째 명제가 극복될 수 있는 길은 앞에서 언급한 "새로운 사건"의 발생이다. 이 "새로운 사건"을 바르트는 하나님의 계시 사건으로 특징짓는다. 그런데 하나님의 계시 사건은 바로 말씀의 화육사건, 즉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신 사건"(207)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Deus dixit)"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의미에서 두 명제의 갈등은 기독론적으로, 즉 "말씀의 성육신", 곧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사건으로 극복되어진다. 여기서 질문이 제기된다: 어떻게 "해야한다"와 "할 수 없다"의 변증법적 갈등이 "하나님의 화육사건"으로 극복될수 있을까?


바르트가 이해하고 있는 하나님은, 자기 자신 안에 폐쇄된 채 머물어 계시는 하나님이 아니다. 그의 말을 빌리면, "하나님은 단순히 (자기 자신 안에 머물러 있는: 역자 주) 하나님이 아니다. 그는 무엇인가 다른 존재가 되실수 있는 분이다. 자기를 계시하시는 하나님이 바로 다른 존재로 계신 하나님이다. 인간이 되신 하나님이 바로 그 하나님이다" 또한 바르트는 하나님을 主-客의 構造(Subjekt-Objekt Schema) 속에서 이해하고자 하지 않는다. 즉 하나님은 우리 인식의 대상이 되시는 분이 아니다. 즉 인간은 주체로서 객체인 하나님을 이야기 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도상에 있는 독특하고 고유한 인간 존재(das partikulare Eigensein des Menschen in Wege)"(210)이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객체성 속에 계신 하나님이 자신의 충만함을 갖고 인간이 되시는 곳에서, ... 자신을 긍정(Ja)로서 우리의 부정(Nein) 속으로 들어오시는 곳에서, 그 곳에서 만이 하나님에 관하여 이야기 되어진다" 이러한 "하나님의 인간되심"의 사건이 전제된 곳에서만이, 역설적 해석이 - 부정이 긍정으로, 긍정이 부정으로 - 가능하다. 이러한 전제 속에서 루터의 칭의론(Rechtfertigungslehre: justificatio impii (불경건한 자를 의로 인정함)이 가능하다고, 그는 역설한다.


바르트의 변증법은 이제 역설적 종합에 이른다. 즉 "하나님에 관하여 이야기 해야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하나님에 관하여 이애가 할 수 없다"는 모순이 "하나님의 인간되심"으로 극복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려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이러한 변증법적 도식은 바르트가 "사회 속에 있는 그리스도인"이란 논문에서 제시한 바와 같이 명제와 반 명제가 종합명제에서 나오는 <주-객 일치 변증법> 이라고 특징지울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는 "하나님 자신에 의해서" 이야기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바르트의 변증법적 해석학을 종합해 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하나의 통일된 종합에 내재된 서로 다른 두 가지 요소의 갈등을 예리하게 분리하고, 그 分離가 새롭게 기독론적으로 극복된 것을 찿아 내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서를 "인간적인 문서"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예리하게 분리한다. 그리고 그는 "인간적인 문서"와 "하나님의 말씀"의 갈등을 화육된 말씀인 그리스도로 극복되었음을 천명한다. 그래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 혹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로 봄으로서의 자신이 제시하는 종합명제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이러한 의미에서 바르트는 기독론적 변증법을 전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화육된 말씀을 - 하나님의 인간되심을 - 모든 신적인 것과 모든 인간적인 것의 綜合으로 보고, 이를 자신의 성서 해석학의 출발점이며 동시에 해결점으로 삼는다. 왜냐하면 바르트의 변증법적 해석학은, "명제의 힘과 반명제의 힘이 근원적이고, 절대적으로 (독자적으로) 태동하고 있는 종합명제의 힘에 그 뿌리를 내리고 있기"(33)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과 하나님 - 인간의 언어와 하나님의 말씀 - 사이의 갈등을 극복하는데 있어서 바르트는 언제든지 神 中心, 더 자세히 말하면 그리스도 中心의 극복 방식을 취하고 있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기독론적 갈등 극복을 종말론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바르트의 변증법은 전체성 속에서 하나를, 그리고 하나 속에서 전체를 보는 통전적 변증법으로 특징지어 질 수 있다. 그리고 그의 변증법적 해석은 기독론적 갈등 극복이 갖고 있는 양면성을 - 긍정과 부정, 세상적인 것과 신적인 것, 현세적인 것과 종말론적인 것 - 역설적으로 해석한다. 바꾸어 말해서 바르트는 부정 속에서 긍정을 보고, 긍정 속에서 부정을 본다, 그리고 이 둘이 상존해 있는 현실을 종말론적으로 해석한다. 바르트의 이러한 기독론적 변증법적 해석은 루터(Luther) 더 소급하여 바울(Paulus)의 신학 방법에 근거를 두고 있음을 핀노마(L. Pinnomaa)는 암시하고 있다.

 

V. 유비적 은유(Analogische Metapher)

 

인간의 존재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도 바르트에 이해에 의하면 행위 속에 있는 존재(ein Sein in der Tat)이다. 그는 인간의 존재를 행위 속에서 이해한다. 왜냐하면 그는 "나는 존재한다(Ich bin)"라는 문장을 "나는 행동한다(Ich tue)"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해석 방법은 바르트가 하나님의 행위과 인간 행위 사이에 유비(analogie)가 있음을 전제하는데 기초한다. 즉 인간의 행위 속에서 있는 인간의 존재에 대한 이해를 은유적으로 유비하여 하나님에 대하여 진술한다. 그는 행동이론(Handlungstheorie)을 하나님의 존재와 인간 존재를 설명하는데 동일하게 적용한다. 그렇다면 바르트의 인간존재 이해는 무엇인가?


바르트는 인간의 존재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인간으로 실존한다는 것은 행동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그 행동은 선택하고 스스로 결정한다는 것을 뜻한다". 인간 존재를 이렇게 행동으로 규정하는 것은 자신의 윤리학에서 뿐만 아니라, 인간론에서 아주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래서 바르트에게 있어서 "실존한다(Existieren)"는 것은 "윤리적으로 실존하는(also ethischen existieren)"것을 뜻한다. 따라서 어느 한 사람의 판단과 행동의 연속성과, 그 행동의 가치와 선함은 곧 바로 그 사람의 존재론적 연속성과 가치과, 선함(G te)에 상응하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존재를 행동(Handeln bzw. Akt) 내지 사역(Werk)으로 부터 규정하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를 그의 계시행위로부터 규정하는 것에 상응한다. 왜냐하면 바르트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자신의 행위 속에 계신 분이기(Gott ist in seiner Tat)"때문이다. 더 자세히 말하면 하나님의 행동은 곧 자신의 계시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행동은 곧 계시의 행위 속에 있고, 그 계시의 행위 속에 바로 하나님의 존재가 실존한다. 따라서 하나님 존재의 가치 및 연속성 그리고 선함은 그 행동의 가치 및 연속성 그리고 선함에 상응한다. 이러한 하나님의 존재와 행동의 연관성은 곧 인간의 존재와 윤리적 행동의 연관성과 은유적인 유비를 갖고 있다.


바르트는 하나님의 계시행위를 단지 하나의 행동으로 규정하지 않고, 행동개념 속에 전제되어진 것을 보다 더 포괄적으로 주제화(thematisieren)한다. 다시 말해서 그는 하나님의 존재를 행동하는 주체(das handelne Subjekt)로서 규정한다, 즉 하나님은 계시행위의 주체라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인격개념(Personbegriff)은 곧 행동개념(Handlungsbegriff)이며, 동시에 주체개념(Subjektsbegriff)이다. 그런데 바르트에게 있어서 계시는 곧 말씀사건(Deus dixit)이라는 것을 고려해 볼 때, 그에 있어서 인격개념은 말씀의 주체 개념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곧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분이시고, 그 말씀은 곧 행동이고, 그 행동 속에서 자신을 계시하는 주체이다. 따라서 하나님 말씀의 연속성, 가치, 현실성 등은 곧 하나님 인격 내지 존재의 연속성, 가치 그리고 현실성이다.


바르트는 인간 존재도 "주체(Subjekt)"로 규정한다, 더 자세히 말하면, 행위의 주체, 선택과 결정의 주체로 본다. 즉 자기선택, 혹은 자기 자신을 위한 결정, 혹은 자기규정(Selbstbestimmung)의 주체로 본다. 그래서 바르트는 인간의 실존을 현상학적으로 분석하여 행동의 자율적 주체(ein autonomes Subjekt)로 규정한다. 그러나 인간은 2차적인 주체(ein zweites Subjekt)이고, 하나님이 "1차적인 주체(das erstes Subjekt)"이다. 이 말은 인간도 하나님의 주체적인 행동에 대하여 자기 편에서 자율적으로 행동하는 주체라는 뜻이다. 여기서 하나님과 인간은 외관상 볼때는 경쟁하는(konkurrierende) 그리고 서로 상대방을 억압하는 주체로 해석되어질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상호 갈등의 딜레마(Dilemma)로 부터 바르트의 해석학은 역설적이면서 동시에 은유적인 유비로 나타난다. 그는 한편 하나님과 인간을 자율적 주체로 규정할 뿐만 아니라, 다른 한편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결코 경쟁관계(Konkurrenzverh ltnis)가 아닌 것으로 기술한다. 바르트는 하나님과 인간의 상호 갈등관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상응관계(Entsprechungsverh ltnis)로 하나님과 인간관계를 새롭게 규정한다. 즉 행동하는 인간은 하나님께 상응하는 주체(entsprechendes Subjekt)이다. 따라서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인간 행위의 본래적인 주체이고, 인간은 단지 그에 상응하게 행동하는 주체이다.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상응관계가 이루어지는가?


하나님께 상응하게 행동하는 인간은 바르트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에 상응하게 행동하는 인간이다. 즉 신률적 자율의 목적론적 구조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서 인식된다. 왜냐하면 예수는 항상 자신의 구체적인 행위 속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행동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행동과 인간의 행동 사이에 있는 상응은 우선 먼저 인간의 자율(Autonomie)를 형성해 준다. 그래서 인간의 주체는 신적 행동의 객체가 된다. 따라서 하나님의 행동은 "우리 인간들의 자기규정을 구체화시키기" 위한 일종의 은유(Metapher)이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의 행동에 관한 언급은 우리들의 자율(Autonomie)를 형성하는데, 그 것은 신률(Theonomie)에 상응하는 자율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바르트에게 있어서 인간은 능동적이면서도 수동적인 존재이다. 그 자신의 말을 빌리면, 인간적인 실존은 "능동적 항존자이고, 인간은 하나님에 의해서 철저히 수용적이다. 그러나 인간은 또한 하나님에 대하여 철저히 자발적이다".


여기서 우리는 간단히 요약해 볼 수 있다. 바르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행동과 인간의 행동은 결코 원인과-결과의 관계(Ursache-Wirkungs-Verh ltnis)가 아니라, 철저히 계약 파트너(Bundespartner) 사이에 있는 상응관계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행동과 인간의 행동 사이에는 은유적 유비(analogische Metapher)가 있다. 그래서 바르트는 자신의 인간학과 윤리학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행동을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행동에 상응하게(entsprechend) 행동하는 인간의 행동으로,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는 인간의 행동에 상응하게 행동하는 하나님의 행동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래서 바르트의 해석학은 신인동형론적(anthropomorphisch) 전망 속에서 인간의 행동과 하나님의 행동을 은유적으로 비유시키는 성서의 증언을 부각시키고 있다. 그리고 은유적으로 진술된 하나님의 행동과 인간의 행동을 이해하는데는 "신앙의 유비(analogia relationis)"가 전제된다.


VI. 해석을 위한 형식적 구조로서의 계약

 

바르트에게 있어서 계약은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규정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의 교회 교의학전체를 기초하는 성서 신학적 근거이다. 따라서 그에게 있어서 "계약"의 개념에 대한 이해는 성서 전체를 이해하는 해석학적 구조가 된다. 그는 성서의 증언에 근거하여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계약의 "파트너(Partner)"로 규정한다. 우선 바르트는 그의 선택론에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계약의 파트너로 선택하였음을 진술하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인간을 "계약의 파트너"로 선택하였다는 것은, 하나님이 인간 없이 홀로 계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이 하나님의 "계약의 파트너"로 선택되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결정적으로 그리고 최종적으로 드러났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과 함께 하시고자 하는 하나님과 영원한 결의(Ratuschlu ) 내지 의지(Wille)가 실제적으로 현실화 되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바르트에게 있어서 선택론은 "복음의 총체(Summe des Evangeliums)"이다.


그런데 바르트에게 있어서 "계약관계(Partnerschaft)"는 단지 하나님과 인간 관계 만을 규정하는데 적용되지 않는다. "내재적 삼위일체론(Immanente Trinit tslehre)"을 비롯하여, 인간의 하나님 형상, 하나님과 이스라엘, 남-녀, 더 나아가 만물이 하나님과 "계약관계"에 있음을 증언한다. 바르트 자신이 말을 빌리면, "하나님은 항상 파트너 관계로 계셨다: 아버지는 아들에 대하여, 아들은 아버지에 대하여. 우선 먼저 하나님 자신 안에 있었던 것은, 그리고 또 있고, 앞으로도 있을 것은 바로 이러한 계약 관계 속에 있는 역사이다". 이러한 진술은 창조를 포함한 하나님의 모든 사역을 계약관계의 실현 내지 현실화로 해석하고자 하는 의도의 표명이다. 그리고 그는 실제로 그의 교회 교의학에서 "계약관계"를 교의학 진술의 성서신학적 기초로 전개하고 있다. 동시에 "계약관계"는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Begegnung),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화육을 기술하는 기초가 되며, 더 나아가 신적 행동의 원리(Gotteshandlungsprinzip)된다: "계약관계 속에 있는 역사(Geschichte)는 모든 창조적 삶 앞에 그리고 위에 있는 하나님의 삶이다. ... :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삶은 간격을 넘어가는 것이고, 대립 속에서 중재하는 것이고 그리고 만남을 통한 대화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바르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계명(Gebot)은 하나님과 인간의 계약 조건으로 이해된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계명을 어떠한 경우에도 단지 추상적이고 권위적인 명령이 아니라, 일종의 계약 조건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바르트는 "어떻게 하나님이 인간들에게, 그 자신에게 응답해야 하는 존재로 인간을 표현하는 것보다 더 진지할 수 있겠는가?"라고 묻는다. 그리고 그는 또한 계속해서 하나님은, 우리들이 "독립적으로 행동하는 자유로운 주체로서" 그리고 "성숙한 피조물로서" 우리 자신의 존재를 계약관계 속에서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들에게 "공간과 시간"을 주셨다고 한다.


그런데 바르트가 하나님의 계명을 일종의 계약조건으로 해석하는데는 인간의 존재론적인 전제가 있다. 그 것은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 "계약관계", 곧 남자와 여자가 서로의 계약파트너로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더 자세히 말하면, 이스라엘, 남자와 여자, 교회 심지어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까지도, 그리고 더 나아가 하나님 자신까지도 "계약조건"에 따라서 행동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바르트에게 있어서 하나님과 인간의 역사, 곧 구속사(Heilsgeschichte) 심지어는 창조사(Sch pfunsgeschichte) 까지도 모두 하나님과 인간의 계약사(Bundesgeschichte) 속에 포함된다고 주장한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바르트에 의하면 성서가 증언하는 모든 내용들은 하나님과 인간의 "계약 파트너 관계" 속에서 해석되어져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계약은 바르트 해석학의 <형식적 구조>라고 특징지어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예정론에서 계약을 하나님의 영원한 결의(ewiger Ratschlu )로 규정하기 시작하여 "창조를 계약의 외적 증거"로 시작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화해 사건을 "계약의 성취"으로 증언하기 때문이다. 그가 자신의 교회 교의학 전체를 계약 신학적 전망을 갖고 전개하고 있다면, 그리고 그의 교의학적 전개가 성서가 증언하고 있는 내용들을 교의학적 체계에 따라서 전개하고 있다면, 그의 해석학적 모델은 "계약"이외에 다른 것이 결코 아니다.


VII. 맺는말: 복음과 율법의 변증법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루터의 <율법과 복음>의 구조와는 달리, 바르트는 <복음과 율법>의 변증법을 전개한다. 즉 인간의 죄 인식은 율법으로 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서 온다.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계시사건 없이 자기의 이성으로 스스로 하나님의 사랑을 인식할 수 없다. 오히려 인간은 항상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반항하는 존재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수도 없다. 그러나 예수 안에서 일어난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구속 사건을 통하여 인간은 처음부터 자신이 어디에 있었어야 하며, 또한 하나님에 대하여 어떻게 행동했어야 했는지를 인식하게 된다. 따라서 바르트에 있어서 <복음>, 곧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은, 인간의 죄 인식의 전제이다. 이를 변증법적 용어로 바꾸어 표현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은 <종합명제>이고,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는 인간의 죄된 상태는 <반명제>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하나님과 인간의 화해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의 최초의 의지 내지 뜻, 곧 <명제>를 유추할 수 있다.


그런데 앞에서 요약한 바르트의 변증법적 해석에는 "동시적 양면성(gleichzeitige Doppelseitigkeit)"의 원리가 내재되어 있다. 즉 한 사건에는 두 가지 서로 상반된 요소 내지 내용(Gehalt)가 내재되어 있다는 것과, 그 사건은 항상 동시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바르트의 변증법적 해석학은 이 "동시적 양면성"을 극복하는데 자신의 해석학적 기대(Anliegen)을 갖고 있다고 하겠다. 그런데 그의 "동시적 양면성"은 구체적으로 "직설법(Indikativ)"과 "명령(Imperativ)"이라는 말씀의 양식(Form)을 해석하는 설명모델이 된다. 즉 성서의 말씀은 "직설법"과 "명령"이라는 양태를 갖고 있는데, "직설법"으로 진술된 성서의 증언은 <종합명제>로서 <복음>을 뜻하고, "명령법"으로 진술된 성서의 증언은 하나님의 요구(Postulat)를 행하지 못하고 있는 인간의 죄악을 계시하는 <반명제>로서 나타난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의 계명은 사실상 하나님의 영원한 의지로서 <종합명제>의 전제가 되는 <명제>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의지와 뜻은 <종합명제> 을 통하여 <명제>로 인식된다는 것이다. 어쨋든 분명한 것은 바르트의 해석학은 <종합명제>에서 <명제>와 <반명제>를 통찰하는 기독론적 변증법이라고 특징지어서 말할 수 있다.


그런데 바르트가 기독론적 변증법을 전개하는 신학적 기본구조는 하나님과 인간 관계를 규정하는 "계약(Bund)"이다. 그 계약은 하나님의 우선적이고 주권적인 행동(der initiative Souven nit tsakt)를 전제하는 일방적인 계약(der einseitige Vertrag)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구속사건은 사실상 근원적으로 하나님 자신의 영원한 의지와 결단(ewiger Ratschlu )에 근거한 하나님 자신의 행동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행동에 대하여 인간은 단지 "계약 파트너(Bundespartner)"로서 이에 상응하는 행동을 해야 한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능력으로는 하나님의 행동에 상응하는 주체(das entsprechend Subjekt)로 행동하지 못한다. 결과적으로 바르트에게 있어서 <종합명제>는 필연적으로 <명제>에 상응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계약 파트너인 인간의 행동은 <반명제>로 드러날 수 밖에 없다. 이러한 구도 속에서 바르트는 율법을 "유비적 은유(analogische Metapher)"의 모형 속에서 해석한다. 즉 인간은 하나님의 우선적이고 주권적인 행동에 상응하게 행동해야만 한다.


그런데 바르트의 "유비적 은유"의 해석학 은유적 "상응(Entsprechung)"이란 전망(Perspekt) 위에 서 있다. 즉 하나님의 행동은 동시에 은유적으로 인간의 행동을 계시해 주는 것이다. 이러한 유비는 상응관계는 하나님과 인간의 "계약"에 기초해 있다. 하나님과 인간의 "파트너관계"는 하나님의 행동에 상응하게 행동해야 하는 인간의 행동을 규정하고, 그로 부터 야기되는 모든 관계를 해석하는 전제가 된다. 여기서 바르트는 또 다시 예수의 양면적 역할을 언급한다. 예수는 "선택하는 하나님"이며, 동시에 "선택받은 인간"이다. 이러한 양면적 해석의 전거는 기독론적 고백, 예수는 참 신이며, 참 인간이라는 신앙고백이다. 그리고 이러한 기독론 고백에서 출발하여 모든 성서의 증언을 신인동형론적(anthropomorphisch) 사고를 갖고 해석한다.


이와같은 해석학적 사유모델을 통하여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일어난 하나님의 계시 사건을 "동시성(Gleichzeitigkeit)"이란 해석학적 전망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모든 인간을 위한 사건으로 보편화시킨다. 즉 단 한 번 역사 속에서 일어난 사건을 온 인류를 위한 보편적 사건으로 확장시킨다. 이 원리를 그는 주로 사도 바울의 신학에서 수용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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