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자료 18,185편 ◑/자료 16,731편

칼 바르트(K. Barth)와루터(M. Luther)의 해석학*

by 【고동엽】 2011. 6. 3.
click 

                             루터(M. Luther)와 바르트(K. Barth)의 해석학*

 

- 문자와 영의 변증법과 기독론적 변증법 -

 

대화의 문을 연다.

 

마르틴 루터가 (M. Luther, 1483-1546) 주도한 16 세기 宗敎改革의 신학적 공헌을 한 마디로 요약 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성서의 재발견> 이라고 특징지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바우어(K. Bauer)에 의하면, "루터는 그의 새로운 성서 해석으로 종교 개척자가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루터의 성서해석 방법을 함부르크 개신교 신학부의 로제(Bernhard Lohse)는 "문자와 영" 혹은 "율법과 복음"의 변증법이라고 특징짓고 있다. 그는 루터의 초창기 시편 강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루터는 동시에 율법과 복음의 변증법적 종속, 곧 칭의론에 관한 종교 개혁적 이해와 사실상 아주 밀접히 연관되어진 (변증법적 종속)을 예리하게 전개하도록 충동 받았다. 그래서 끝내는 성령에 의한 성서 해석과 관련해서 루터는 문자와 영의 연관성을 강조하였다: 즉 우선 역으로 성서는 마치 성령의 계명(Erleuchtung)에 의한 성서의 고유한 의미 안에 갇혀 있기나 한듯이, 성령은 성서의 문자를 사용한다." 이러한 로제의 해석은 루터가 자신의 "De servo arbtrio" (노예된 의지, 1525)에 관한 논문 속에서 에라스무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 것에 기초해 있다고 볼 수 있다 (나도 역시 수사학적으로 또는 변증법적으로 다소 나의 뛰어남을 과시하기 위하여 말한다면, 하나님과 하나님의 성서는, 창조주와 피조물이 서로 별개인 것과 같이, 서로 다른 별개의 두개이다 (Sic habet mea distinctio, ut et ego parum rhetoricer uel Dialecticer, Duae res sunt Deus et scriptura Dei, non minus quam duae res sunt)"(WA. 18, 606, 11f.)


그런데 19 세기 하르낙(A.v.Harnack, 1851-1930)과 헤르만 (J.W.Herrmann, 1846-1922)에 의해서 주도된 자유주의 신학에 정면으로 도전하여, "성서 만으로(sola scrpitura)" 라는 표어로 종교 개혁적 전통을 재 수립하고, "말씀의 신학"을 전개한 칼 바르트(K. Barth, 1886-1968)의 신학도 우리는 소위 "변증법적 신학"이라고 특징 짓고 있다. 몰트만 (J.Moltmann) 역시 바르트의 초창기 "변증법적 신학"을 "하나님 말씀의 신학"으로 특징 짓고 있다. 바르트의 초창기 신학에 대한 이러한 解釋은 바르트의 다음과 같은 말에 起因한 것이다: "애초부터 삶에 대한 우리의 긍정(Ja)은 그 안에 신의 부정(Nein)을 수반하고 있으며, 그 부정(Nein)은 반제(Antithesis)로서 일어나며, 그러나 그것은 본래적이고 궁극적인 종합에 대한 명제가 되는 것을 지시한다. 저 부정(Nein)은 마지막에 다다르는 최고의 진리가 아니다. 세상에서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물음에 대답을 주는 부름이다."


그런데 여기서 곧 바로 질문이 제기된다: 루터나 바르트의 신학적 특징을 "성서의 재 발견" 혹은 하나님 "말씀의 신학"으로 특징 지어 해석할 수 있다면, 루터의 "문자와 영" 혹은 "율법과 복음"의 변증법은 어떠한 것이며, 바르트의 기독론적 변증법은 어떠한 신학 방법인가? 더 나아가 루터의 변증법과 바르트의 변증법은 어떠한 신학 방법상의 유사점 혹은 상이성을 갖고 있는가? 이러한 질문에 답변하기 위하여 아래의 작은 논문에서는 주로 루터의 "문자와 영" 혹은 "율법과 복음"의 변증법적 성서 해석 방법과 바르트의 변증법적 신학 방법을 분석해 보고자 한다. 왜냐하면 핀노마(L Pinnomaa)는 바르트의 "변증법적 신학방법"은 루터(Luther) 더 소급하여 바울(Paulus)의 신학 방법과 유사성이 있음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하여 우선 루터의 "첫번째 시편 강해를(Dictata super psalterium, 1513-1515)" 중심으로 성서해석 방법, 자세히 말해서 말씀의 "문자와 영"의 변증법적 해석 방법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한다. 그리고 이러한 해석학적 방법이 "De servo aribitrio(노예된 의지에 관한 논문)" 에서는 에라스무스 (Desiderius Erasmus von Rotterdam, 1466<1469> - 1536)와의 논쟁을 통하여 어떻게 신학적으로 적용되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제 2 장에서는 바르트가 1919 년에서 로마서 2 판이 나오는 어간에 행한 강연들을 중심으로, 특히 "사회 속에 있는 그리스도인(Der Christ in der Gesellschaft, 1920)", "성서적 질문과 통찰과 그 전망(Biblische Fragen, Einsichten und Ausblick, 1920)", 그리고 "신학의 과제로서의 하나님 말씀(Das Wort Gottes als Aufgabe der Theologie, 1922)"을 중심으로 "하나님과 세상" 그리고 "하나님 말씀과 성서"가 기독론적으로 어떻게 종합되고 있는지 분석해 보고자 한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루터와 바르트의 신학 방법에 -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와 관련하여 - 어떠한 類似性과 相異性이 있는지 알아 보겠다.
이러한 연구를 통하여 우리는, 어떠한 의미에서 바르트 신학이 "新-正統主義(Neo-orthodoxie)" 신학으로 해석되고 있는지, 그 이유를 분명하게 이해하게 될 것이다. 동시에 루터의 종교개혁 신학이 어떠한 신학적 방법론 위에 정초 되어 있었는지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우리는 개신교 신학이 신학적 작업을 어디로 부터 시작해야 하는지도 분명히 깨닫게 될 것이다. 결과적으로 바르트가 과연 헤겔 철학적 "변증법"을 자기 신학에 수용 하였는지도 암시적이나마 이해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I. 루터의 "문자와 영" 혹은 "율법과 복음"의 변증법

 

루터 신학자 에벨링(G. Ebeling)에 의하면 루터가 성서를 해석 하는 데는 두 가지의 해석 방법이 있다. 그것은 우선 성서의 의미를 "문자와 영"으로 구분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중세 전통에 따라서 하나의 문자를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다. 전자의 이원론적 분리는 우선 루터의 "De servo aribtrio" (노예된 의지)에 관한 논문에서 명백하게 나타난다. 그런데 "노예된 의지에 관한" 논문에서는 이원론적 분리가 성서의 "모호성과 명백성" - 더 자세히 말하면 성서의 "외적 명백성과 내적 명백성 - 으로 그리고 "Deus revelatus" (계시된 하나님)과 "Deus absconditus" (숨어 계신 하나님)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의 나라"의 개념으로 바뀌어 나타난다. 따라서 아래에서는 먼저 루터가 자신의 시편강해 속에서 동일한 하나의 말씀을 어떻게 문자적 의미과 영적 의미로 구분하고, 그것을 어떻게 다시 기독론적으로 종합 하였는지 알아보고, 이러한 해석학적 방법이 "노예된 의지에 관한" 논문에서는 어떻게 신학적으로 전개 되었는지 살펴 보겠다.

 

 

I-1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의 말씀
- "in christo omnia verba sunt unum verbum"

루터는 우선 그의 시편 講解에서 성서의 증언을 "문자와 영"의 이원론적 의미로 구분한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문자와 영"의 이원론에 기초하여 해석한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이 영적인 것과 문자적인 것을 이분하여 서로 대립시킨다: "문자적인 것은 실로 지상적인 것이고, 그러나 영적인 것은 천상의 것이다. 그리고 문자적인 것은 최하의 것이고, 영적인 것은 최고의 것이다 (Litera enim terra est, spiritus autem coelum. Illa infimum, hic summun"(WA. 3,164,22f.). 이러한 이론론적 이분은 더 자세히 세분하면: "영적인 것 - 육적인 것; 보이지 않는 것 - 보이는 것 (감추인 것 - 나타난 것); 지적 - 감성적인 것; 내적 - 외적; 우위 - 하속; 신적 - 인간적 (하늘적 - 땅적); 영원 - 시간; 장래 - 현재; 존속할 것 - 존속 못할; 변치 않는 것 - 지나가 버릴 것"이 된다.


이러한 이원론적 대립은 루터의 초창기 시편 강해에서 뿐만 아니라, 그 이후 계속된 작품들 속에서도 발견되어진다. 로제에 의하면, 적어도 1518 년 두번째 시편 강해 때 까지 루터는 이러한 이원론적 성서해석 방법을 - Glossa와 Scholia - 고수 하였다. 그러나 그 이후 "간단한 언어-신학적 해석 (philolo- gisch-theologische Interpretation)" 을 위하여 이러한 어려운 강해 방식을 포기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터는 단순히 성서의 말씀을 "문자와 영"으로 분리시켜 놓지만은 않는다. 그는 다시 "문자와 영"이란 극단의 이원론적 대립을 기독론적으로 종합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인간이 마음에 감동을 받는 것은 심리적인 혹은 신비적인 체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말씀, 곧 문자로 표현된 말씀에 의해서 감동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아래와 같이 진술한다: "그리스도인의 기쁨은 마음 만으로 맛 볼 것이 아니고, 말로도 표현 될 것이다." (WA.4,411,5) 따라서 루터는 다음과 같이 단정한다: "하나님께서 노래하심은 글자에 부합하게 하신다. 그러나 또한 영적으로도 (ad literam et spiritualiter) 노래하신다." (WA. 4,192,9) 따라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내적 행위만 아니고, 외적 행위도 행하여야 한다." (WA 3, 231,9f.) 결과적으로 루터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役事는 "문자와 영"의 同時 使役이라고 볼 수 있다. 즉 하나님의 징벌의 행위는 마음과 육체에서 함께, 하나님의 품에서와 인간적 마음에서 함께 일어난다 (참. WA. 4, 423,9: "in anima et corpore, coram deo et hominibus"). 이 말은 하나님의 말씀은 문자적인 의미와 영적인 의미를 동시에 내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이 세상 안에서 歷史的으로, 즉 現實的으로, 그리고 靈的으로 일하신다는 뜻이다. "문자와 영"의 이러한 종합은 "성서의 統一性"에 관한 論議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다시 말해서 루터에게 있어서 하나님 사역의 二重性은 성서 말씀의 二重 意味에 상응한다.


루터는 우선 하나님의 말씀을 단순하게 "율법과 복음"으로 구분하지 않는다.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처음부터 율법과 복음으로 구분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 말씀이 지향하고 계시하는 바는 율법이나 복음이나 동일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하나이고, 단순하며, 동일한 말씀이다. 왜냐하면 여러 가지 방식으로 표현된 모든 <말씀은> 하나로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omnia verba de sunt unum, simplex, idem, verum, quia unum omnia tendunt, quantum vis multa sint)"(WA 3,356,35f.) 그런데 그에게 있어서 울법과 복음의 동일한 목표, 즉 하나님의 말씀이 계시하는 동일한 객체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이를 증언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말씀은 하나의 말씀이고, 그리스도 밖에 있는 말씀은 잡다하고, 무가치한 것이다 (in Christio onmia verba sunt unum verbum, et extra Christum sunt plurima et vana)" (WA.4,439,20f.). 결과적으로 루터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은 "문자"적 의미와 "영"적 의미를 갖고 있지만, 그 말씀이 계시하는 客體 내지 內容은 하나의 方向性을 갖고 있다.

 

그리고 그 方向性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성서의 모든 말씀은 바로 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속하고, 그 분 안에서 동일한 가치를 갖고 있다. 이러한 해석은 바로 "문자와 영"적 의미를 갖고 있는 하나님 말씀의 기독론적 종합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이러한 하나님 말씀의 기독론적 종합 위에서, 루터는 비로서 구약과 신약의 統一性을 얘기하고 있다. 즉 구약과 신약은, - 그 증언의 양태에 있어서 율법과 복음의 형태를 갖고 있다 하더라도 - 그 증언하는 내용과 계시하는 객체에 있어서 하나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만일 구약이 신약 없이 인간 생각에 의하여 해석 될 수 있다고 한다면, 나는, 신약은 바로 은총으로 주어진 것이라고, 가르치겠다 (Si vetus testamentum per humanum sensum potest exponi sine nove testamento, dicam quod novum testamentum gratis datum sit)" (WA. 3,12,29f.)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잠정적인 결론이 나온다: 초기 시편 강해에 나타난 루터의 성서 해석 방법은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문자와 영" 혹은 "율법과 복음" 으로 구분하여 놓고, 이를 다시 기독론적으로 종합하는 해석 방식을 취하였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루터는 모든 하나님의 말씀을 기독론적 전망을 갖고 해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루터에서 있어서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그리스도의 증언에로 수렴하게 된다. 성서의 이러한 해석 과정을 루터는 <<문자와 영>>의 도식 속에서 중세의 전통인 성서의 4 중 의미 (quadriga-viertel Schriftsinn), 곧 문자적 (literarisch), 비유적 (allegorisch), 상위 개념적 (anagogisch) 그리고 윤리적 (tropologisch) 으로 해석함으로서 가능케 하였다".
이상으로 지금까지 분석해 온 루터의 하나님 말씀의 해석 방법, 곧 "문자와 영"을 분리하고 이를 다시금 기독론적 종합하는 해석 방식을, 우리는 "변증법적 성서 해석 방법"이라고 특징지어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개념상 "변증법 (Dialektik)"이란 플라톤에게 있어서는 "서로 다른 생각들과의 토론 속에서 발전된 지식이론(Theorie des Wissens)" 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변증법"은 어떠한 개념을 분석하고 종합하는 원리를 그 방식으로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변증법"적 신학 방법은 루터의 "노예된 의지"에 관한 논문에서 더욱 더 분명하게 나타난다.

 

 

I-2 성서의 모호성과 명백성

루터가 주도한 종교개혁이나, 에라스무스와의 논쟁에서 신학적으로 가장 중요시 되었던 문제는 바로 성서의 권위와 해석에 관한 것이었다. 성서해석에 관한 문제는 단순히 로마교회와의 논쟁에서 뿐만 아니라, 종교개혁의 극단적 추종자들과의 - 예를 들면 쯔빙글리(Zwingli)와 뮨쳐 (M ntzer) - 논쟁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論題였다. 그런데 성서해석에 관한 논쟁 속에서 루터는 언제든지 성서의 권위와 그 증언하는 바의 명백성, 곧 "claritas scripturae (성서의 명백성)"을 (WA. 18,606,1 - 609,14. 여기에 덧붙여서: WA 18,652,23 - 661,28.) 주장한다. 이를 더 세분하여 루터는 "성서의 외적 명백성"과 "내적 명백성"을 얘기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터는 언제든지 다시금 성서의 "두 가지 모호성"에 관하여 얘기한다: "성서에는 두가지 종류의 명백성과 두 가지 종류의 모호성이 있다 (Duplex est claristas scripturae, sicut (et) duplex obscuritas)" 하나의 성서가 더 없이 명백하다고 말하면서, 동시에 모호하다고 말하는 이러한 루터의 주장은, 그가 성서를 변증법적으로 해석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


루터의 변증법적 성서해석 방법은, 우선 먼저 그가 하나님 자신과 성서를 예리하게 분리하는데서 시작한다: "나도 역시 다소 수사학적으로 또는 변증법적으로 나의 뛰어남을 과시하기 위하여 말하면, 하나님과 하나님의 성서는, 창조주와 피조물이 서로 별개인 것과 같이, 서로 별개의 두개이다 (Sic habet mea distinctio, ut et ego parum rhetoricer uel Dialecticer, Duae res sunt Deus et scriptura Dei, non minus quam duae res sunt creator et creatura Dei)"(WA 18,606,11f. 본인이 진하게). 이러한 분리는 - "창조주와 피조물"; "하나님과 성서"의 분리 - 루터가 초창기 시편 강해에서 "문자와 영"을 예리하게 분리 하였던 것에 곧바로 일치한다. 왜냐하면 그는 시편 강해에서 "文字"을 "현세적"이고 "인간적"이며, "드러난 것" 등으로 해석하고 "靈"을 "감추인 것", "신적인 것", "하늘에 속한 것" 등으로 해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루터는 "문자와 영"의 분리에 상응하게 "하나님 자신과 성서"를 이원론적으로 이분하고 "문자와 영"의 갈등을 문자의 靈的 意味로 극복하듯이 "하나님과 성서"의 분리를 하나님의 영, 곧 성령으로, 극복한다: "어느 누구도 성령을 갖지<받지>않고는 성서의 요타 하나도 인식하지 못한다 (nullus homo unum jota in scripturae videt, nisi qui spiritum Dei habet)"(WA. 18,609; StA. Ebd.). 그래서 "성령은 성서 전체 또는 성서의 일부분를 이해 하는데 필요 불가결하게 요청된다 (Spiritus enim requiritur ad totam scripturam (et) ad quamlibet eius partem intelligendam)"(WA. 18,609; StA. Ebd.)


이러한 증언을 종합해 볼 때에, 루터에게 있어서 "성서의 명백성"은 곧 "하나님의 명백성"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더 나아가 그에게 있어서 "성서는 곧 하나님 자신이다". 왜냐하면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담고 있기(fasset gottis wortt)"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루터에게 있어서 곧 말씀이 화육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를 다시 종합하면, 성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성서의 본질적인 내용으로 갖고있다. 루터는 이를 반어적으로 표현한다: "성서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제거하고 나면, 무엇이 남는가? (Tolle Christum e Schripturis, quid amplius in illis invenies?)"(WA.18,606,29.) 결과적으로 성서와 "하나님의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는 이제 직접적으로 서로 서로 속한다. 그래서 루터는 예수 그리스도가 성서의 본질적이고 고유한 내용이라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인 그리스도가 없는 형식상의 말씀으로서의 성서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다는 것이다. 결국 루터가, 하나님 자신과 성서의 이원론적 분리를 성령론적으로 극복하고자한 시도는 결과적으로 "하나님 자신과 성서"의 기독론적 종합에로 이른다. 이러한 근거에서 우리는 루터의 성서 해석 방법을 "하나님 자신과 성서"의 기독적-변증법적 종합이라고 특징지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성서의 증언을 "문자와 영"으로 분리하고, 혹은 성서 그 자체와 하나님 자신을 구분하여 놓고, 이를 다시금 성령론적으로 혹은 기독론적으로 종합한다면, 여기에서 문제가 제기된다: 어떠한 의미에서 성서가 모호하단 말인가? 이 물음에 대한 루터의 답변에 의하면, 성서는 無知한 인간 理性에는 "모호"하다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인간의 理性이 성서의 "언어와 문법에 대하여 無知하고 불확실한 지식을 갖고 있기 때문에" 성서를 읽어도 깨닫지 못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루터에 의하면 성서가 모호한 첫번째 이유는, 성서 언어에 대한 인간 이성의 무지 때문이다. 두번째 이유는 타락한 인간의 본성 때문이다. 즉 타락으로 인하여 "어두어진 마음은" 성서가 증언하는 바를 아무리 많이 알고, 입으로 외워도 그 의미를 정확히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타락한 인간이 성서를 "문자"적 의미로만 해석한다면, 성서는 그 자체가 모호하기 그지 없다는 것이다. 성서를 문자적 의미로만 해석한다면, 성서가 증언하는 진술 그 자체는 서로 모순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서가, 곧 그 문자가, 영적 조명을 받아서 해석 되어진다면, 그것은 더 없이 명백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문자와 영"은 서로 분리된 개념이지만, 靈적 도움에 의한 성서해석이라는 점에서 "文字와 靈"은 종합을 이룬다. 그러기에 성서는 外的으로는 - 문자 그대로 - 모호한 것이지만, 內的으로는 - 성령의 해석에 의해서 - 명백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문자로 되어있는 성서가 어떠한 면에서 명백한가?


문자로 되어 있는 성서의 명백성은 루터에게 있어서 우선 "성서의 외적 명백성"에 근거한다. 그에게 있어서 "성서의 외적 명백성"은 한 마디로 말해서: "성서가 성서자체를 해석 (scriptura sacra sui ipsius interpres)"하는 것이다. 더 자세히 설명하면: "성서는 성서 그 자체를 아주 정확하고, 아주 쉽게 이해 할 수 있도록, 아주 분명하게 설명해 주고 있다. 그래서 성서는 그 자체의 해석자이다. 곧 모든 것이 시험되어지고 풍부하고 그리고 아주 밝게 해명되도록 <해석하는 해석자이다>" 이에 반하여 "성서의 내적 명백성"은 성령의 조명에 의한 해석이다 (참. 고전 2,10: "오직 하나님의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WA.18,662).
어쨋든 루터는 한편에서 "성서의 모호성"을 얘기하고,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는 "성서의 명백성"을 얘기하고 있다. 그리고 이 두 개념의 모순을 루터는 다시금 성령에 의한 성서 해석으로 종합한다. 다시 말해서 그는 이 兩者의 갈등을 - 성서의 모호성과 명백성의 갈등 - 예수 그리스도가 성서의 유일한 내용이라는 근거에서, 기독론적으로 극복 하고자 한다. 즉 그리스도가 성서의 기준이며, 내용이고, 성서의 主로서 그리고 성서의 유일한 영이다. 이러한 변증법적 신학 방법은 루터가 "숨어 계신 하나님 (Deus absconditus)"과 "계시된 하나님(Desu revelatus)"의 관계를 설명하는 것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그리고 그 뿐아니라 소위 "두 왕국설"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I-3. "계시된 하나님" 과 "숨어 계신 하나님"은 한 분 하나님.

루터는 먼저 "숨어 계신 하나님"과 "계시된 하나님"을 구별한다. 즉 자신의 자비 속에 숨어 계시며 보좌에 앉아 계신 숨어 계신 하나님과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하신 하나님 자신을 구별한다. 이러한 구별은 루터의 초기 신학 작업 속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1513/1515 에 있었던 시편 강해 강의에서 루터는 이러한 사고 방향으로 자신의 시편 강해를 이끌어가고 있다. 특히 그는 로마서 강해에서 "내부로 혹은 자기 자신으로 향하는 하나님(Deus intrinsece)"과 "밖으로 향하는 하나님(Deus extrinsece)"을 구별한다. 그래서 그는 "자비로우신 하나님(Deus in maiestate)"과 "말씀 속에 계신 하나님(Deus in verbo)" 혹은 "선포된 하나님(Deus praedicatus )"을 구별한다. 이러한 구별을 루터는 다음과 같이 아주 자세하게 표현한다: "우리는 대답하고자 합니다. 설교의 대상이 되고 계시되고 우리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의 의지와 설교의 대상이 되지 않고, 계시되지 않고, 주어지지 않고, 예배드릴 수 없는 하나님의 의지에 대하여서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논해야 한다고 대답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신을 숨기시고 알게하시지 않으신다면, 그러한 하나님을 아는 것은 우리의 관심사가 아닙니다 (Respondemus, ut iam diximus, Aliter de Deo uel uoluntate Dei nobis praedicata, reuelata, oblata culta, Et aliter de Deo non praedicato, non reuelato, non oblato, non culto disputandum est. Quatenus igitur Deus sese abscondit (et) ignorari a nobis uult, nihil ad nos. Hic enim uere ualet illud, Quae supra nos, nihil ad nos.)"(WA.18,685; StA. 253) 이러한 진술 속에는 이미 "숨어 계신 하나님(deus absconditus)"과 "계시된 하나님(deus revelatus)"의 명백한 분리가 나타나 있다.


그러나 루터에게 있어서 "숨어 계신 하나님"은 계시된 말씀이 없는 하나님 그 자신(Gott an sich) 만을 뜻하지 않는다. 또한 "숨어 계신 하나님"은 단순히 "계시된 말씀"인 그리스도에 상반되는 개념 만을 뜻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숨어 계신 하나님" 개념은 하나님에 대한 총괄 내지는 종합 개념으로 나타난다. 더 자세히 말하면 유일회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되고, 제한된 인간의 몸을 입으신 하나님에 대한 개괄적인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하겠다. 따라서 "숨어 계신 하나님"은 "계시된 하나님"이 전제되지 않는한 전혀 論議 조차 되어 질 수 없는 하나님이다. 왜냐하면 그에게 있어서 "숨어 계신 하나님"은 하나님의 救援의 意志와, 救援을 위한 豫定과 攝理와 관계되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은 자신의 의지를 자기 자신 안에 간직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알지 못하게 막으시는" (WA. 18, 684) 하나님이다.


역설적으로 말해서, 루터는 계시된 것이 있다면, 감추인 것이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이 말은 "숨어 계신 하나님"은 "계시된 하나님"과 사역의 동시적 차원에서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사역은 시간적 同時性과 同質性를 갖는다. 하나님의 役事는 현재 여기와 장래에도 일어난다 (hic et futaro). 그리고 "선포되고 베풀어진 하나님의 자비(praedicata et oblata misericordia Dei)"는 곧 하나님 자신 속에 숨겨져 있는 자비하심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루터에게 있어서 "숨어 계신 하나님"은 "계시된 하나님" 개념의 변증법적 종합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루터에게 있어서 "숨어 계신 하나님"과 "계시된 하나님"은 서로 구별되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의 구원의지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의미에서,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여전히 인간에게 숨겨져 있다는 의미에서, 양자는 서로 구별된다.

 

그러나 "숨어계신 하나님"과 "계시된 하나님"은 하나님 사역의 동시성과 동질성이라는 차원에서 한 분 하나님이시다. 다른 말로 바꾸어 말하면, 계시되고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신 예수 그리스도, 곧 계시된 하나님은 숨어 계신 하나님이시다. 여기서 "계시된 하나님"과 "숨어계신 하나님"은 <<계시하는 자>>와 <<계시된 자>>란 계시-변증법적 종합을 이룬다.


그러나 "숨어 계신 하나님"과 "계시된 하나님"의 이러한 사역의 동시성과 동질성은 초창기 일부 신학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독재성 내지는 비 도덕성의 문제로 인하여 거절되어 왔다. 그래서 "숨어 계신 하나님"은 단순히 "계시된 하나님"의 반대 개념으로 밖에는 설명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만일 "숨어 계신 하나님"을 단순히 "계시된 하나님"의 근원이나, 상대적인 개념으로 사용할 경우 하나님의 개념을 思辨化 할 위험이 있다. 즉 "숨어 계신 하나님"과 "계시된 하나님"을 상대화 시킬 경우 플라톤적 이데아(Idea) 론이나, 영지주의적 사고에 더 접근하게 될 위험이 있다.

 

II. 칼 바르트(K.Barth)의 기독론적 변증법

 

 

소위 20 세기 "변증법적 신학운동"은 1920-1930 사이에 바르트(K.Barth, 1886-1968), 고가르텐(F.Gogarten, 1887-1967), 불트만(R.Bultmann, 1884-1976), 부루너(E.Brunner, 1889-1966), 메르쯔 (G.Merz, 1892-1959)에 의해서 1923 년 부터 1933 년 까지 발간된 [Zwischen den Zeiten]를 중심으로한 일종의 신학운동을 뜻한다. 그러나 "변증법적 신학"이란 개념이 "말씀의 신학" 혹은 "위기의 신학"이란 표현을 단순히 바꾸어 표현한 것인지, 아니면 그 개념의 근원이 따로 있는 것인지, 이에 대한 해명은 분명하지 않다. 바르트 자신은 지난날을 회고하듯이 자신의 [결별(Abschied)]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변증법적 신학'이란 이름은 지금으로부터 7 년전 어느 무명의 청중에 의해서 우리들에게 붙여졌다". 바인트커(M.Beintker)는 아마도 바르트가 1922 년 엘거스부룩(Elgersburg)에서 "신학의 과제로서의 하나님의 말씀(Das Wort Gottes als die Aufgabe der Theologie), 1922"란 제목으로 행한 강연에서 어느 청중에 의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본다. 그러나 1919 년 바르트가 탐바허(Tambacher)에서 행한 강연 논문: "사회 속에 있는 그리스도인(Der Christ in der Gesellschaft)" 속에 "변증법"적 사고가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바르트는 이 강연에서 "명제", "반 명제" 그리고 "종합명제"란 단어를 즐겨쓰고 있으며, 주제를 전개하는 방식이 다분히 변증법적이다. 따라서 바르트의 "변증법적 신학" 방법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탐바허 강연회으로 부터 출발하는 것이 옳바른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강연은 로마서 강해 제 1 판 (1919)과 제 2 판 (1922) 사이에 행하여진 것으로서 로마서 제 2 판의 "변증법적 신학" 방법을 아주 간단 명료하게 소개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II-1. 세속적 부정에 대한 긍정으로서의 그리스도

바르트는 "사회 속에 있는 그리스도인"이란 논문을 "세상적인 것"과 "신적인 것"의 변증법적 종합명제에 대한 설명으로 시작한다. 즉 그는 "그리스도人"이란 말로 그리스도와 사회의 변증적 종합명제를 제시한다. 그는 "그리스도人"이란 말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그리스도인은 우리 안에 우리 자신이 들어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계신 사람이다."(4)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있다"는 말이 다음과 같은 뜻은 아님을 단호히 경계한다: "그리스도人이란 세례 받은 군중을 가리키거나, 종교-사회주의자의 선택된 소수(das erw hlte H uflein)를 가리키는 것도 아니고, 가장 존귀하고 헌신적인 그리스도인 부류 속에 있는 총명한 정예의 소수(die feinste Auslese)를 가리키지도 않는다. ... "(Ibid). 바르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은 오히려 그리스도 사역의 超歷史的 혹은 救援論的 普遍性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그는 "우리 안(in uns)"이란 의미를 "우리 위 ( ber uns)", "우리의 배후(hinter uns)" 그리고 "우리를 넘어(jenseits uns)"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참. Ibid). 한 마디로 바르트는 "그리스도인", 즉 "그리스도가 그 안에 있는 사람"을 피조물인 인간과 하나님과의 존재론적 혹은 초월적 結合 내지 綜合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렇다면 어떠한 근거에서 "우리를 초월"하여 계신 분이 "우리 안"에 계신 분이 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이 양자가 어떻게 "그리스도人"이란 단어로 종합될 수 있을까? 어떻게 "우리 위에" 계신 분과 지상에 있는 "우리"가 하나가 될수 있을까?


바르트가 제시한 종합명제에는 언제든지 피조물인 인간과 창조주 하나님 사이의 전적 분리가 전제된다. 왜냐하면 그는 神的인 것을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적인 것은(Das G ttliche), 그 자신 안에 감추어져 있는 것이며, 그 類 있어서는 아주 새로운 것이고, 그리고 세상과는 분리되어 있는, 어떤 전체이다." 반면에 바르트는 世上的인 것 혹은 人間的인 것을 먼지로 규정한다: "너는 먼지니 먼지로 돌아가리라, 이것이 인간성에 대한 바른 선고가 아니며, 인간성에 대한 본연의 신앙고백이 아닌가?"(7) 神的인 것과 人間 내지 人間的인 것의 이러한 예리한 대립을 그는 비유적으로 되물음으로써 확고히한다: "모두가 무의미한 것 뿐인데 의미있는 것이 어디 있으며, 타락한 것 가운데서 근원적인 것이 어디 있으며, 모두가 쭉정이 뿐인데 밀알이 어디있는가?"(6f.).


이렇듯 바르트는 신적인 것과 세상적인 것의 예리한 분리를 전제하기 때문에, 그는 그 당시 종교 사회주의자들이 神的인 것과 人間的인 것을 아무런 갈등 없이 결합시키고자 하는 시도를 비난한다: "신적인 것을, 만일 그것이 진정 신적인 것이라면 인간들에 눈에 감추어져 있어서 접근을 못하게 돼 있으나, 오늘날 우리는 그것을 즐겨 결합시키려 한다."(6) 그래서 그는 "기독교-사회(christlich-sozial)", "복음주의-사회(evangelisch-sozial)" 그리고 "종교-사회(religi s-sozial)" 式으로 종합하는 것을 거부한다 (참. 5). 그는 이러한 무분별한 단순한 결합을 단호하게 거부한다: "두개의 (하나님에 관한 것과 세상에 관한 것) 서로 등차가 다른 사물들 사이의 철저한 대립이 있다. 우리는 이 둘을 명백히 분리해야 하겠다. 이것은(이러한 결합은: 역자 주) 우리가 한편 그리스도인이며, 다른 한편 사회의 일원으로서 갖고 싶은 희망과 필요일 뿐이다"(9)


바르트는 그러나 신적인 것과 세상적인 것, 곧 인간적인 것의 분리를 기독론적으로 극복한다. 그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인간 되심(Gottes Menschwerdung)"이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의 분리를 극복하는 새로운 운동이다. 바르트는 말하기를: "그리스도는 위로부터 오시는 전적으로 새로운 분이시고, 길이며, 생명이고, 인간 가운데 계신 하나님의 삶이고, 인간의 아들이다. 그 분 안에서 人間性은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직접성 (Unmittelbarkeit)을 인식하게 된다" (11) 그에 의하면,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의 분리는 최종적이며, 결정적인 것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 하나님으로 부터 인간에게 오는 길은 아직도 남아 있다고 한다. 그에 의하면, 그 길이 바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에게로 오시는 하나님의 길이다 (참. 12).


신적인 것과 세상적인 것의 분리를 극복하는 이러한 일방적인 길을 바르트는 모세가 호렙산에서 하나님을 만난 이야기를 들어 그림으로 설명한다. 즉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너는 가까이 오지 말고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곳이다"(출 3,5) 하신 말씀은 인간이 감히 스스로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없는 존재 임을 계시해 주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은, "나는 확실히 애급에 있는 내 백성의 환난을 보았고,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었다. 나는 그들을 애굽 사람들의 손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왔다" (출 3,7-8)고 말씀하시는 분이시다. 즉 하나님은 인간과 전적으로 분리되어 있는 분이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 생명의 구원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 땅에 직접 오신 하나님이시다 (참. Ibid). 이러한 "위로부터 아래로"의 운동, 곧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인간 되심"은 흙으로 빚어진 인간과 창조주 하나님 사이에 가로 놓인 담을 넘어오는 하나의 "수직선적 (die senkrechte Linie)" 운동은, 신적인 것과 세상적인 것, 곧 "인간적인 것"의 기독론적 극복을 뜻한다. 바르트에 의하면,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수직선적" 운동 속에서 "전적 타자 (Das gnaz Andere)"(13)로 계신 하나님을 인식하게 된다. 이 때에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건으로 말미암아 "너는 흙에서 낳으니, 흙으로 돌아가라"가 아니라, "내가 살았으니. 너도 살 것이라"는 말씀에 따라서 산다. 곧 인간에게 그리스도를 통하여(durch Christus) 새로운 생명이 주어지고, 그리스도 안에서(in Christus) 새로운 피조물로 산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의 분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극복되는 과정은 어떠한 변증법적 특징을 갖고 있는가?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수직선적인 운동", 즉 "하나님의 인간 되심"을 소위 명제 (Thesis), 반명제 (Antithesis), 그리고 종합명제(Synthesis)란 변증법적 용어를 빌어서 설명한다. 그런데 바르트의 변증법적 전개에는 "동시성(Gleichzeitigkeit)"의 특성을 갖는다. 그래서 그는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하나님께서 자신의 義를 세우는 것을 동시적으로 본다(참. 17). 이러한 동시성을 그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세상의: 역자주) 긍정적인 것은 하나님으로 부터 나오고, 하나님께서 의도했던 부정이다. 반면에 하나님 위에 근거한 것이 아닌 모든 긍정적인 것은 부정적인 것이다."(Ibid) 그러나 이러한 동시적이며, 역설적인 진술은 명제에 대한 반명제 그리고 그 반명제와 명제의 종합으로서의 종합명제라는 식의 발전적 혹은 헤겔적 변증법을 뜻하지 않는다. 바르트는 오히려 종합명제에서 반명제를 본다. 그리고 명제를 반명제의 前提가 아니라, 오히려 반명제 속에 있는 부정과 긍정 사이의 갈등을 극복해야 하는 종합명제의 전제로 본다. 그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독특한 변증법을 설명한다: "근원적인 것은 종합명제(Synthesis)이다, 이 종합명제로 부터 비로서 반명제(Antithesis)가 나온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또한 종합명제로부터 명제(Thesis) 자체가 나온다." 이를 다시 바꾸어서 다음과 같이 얘기 한다: "단지 명제로부터 참된 반명제가 나올 수 있다. 참된 반명제란 근원적으로 종합명제에서 나오는 반명제를 뜻한다."


바르트는 자신의 변증법 도식을 구원사적으로 보충 설명한다. 그에 의하면, 하나님이 세상의 창조주이시기에 구원자가 될 수 있고, 구원자이시기에 동시에 종말의 심판주가 될수 있다. 그래서 그는 역사의 종합으로서의 종말론을 시간의(역사의) 끝에서 보지 않고, 인간과 하나님의 갈등이 극복된 예수 그리스도의 화해 사건에서 본다. 그리고 동시에 그는 역사의 참된 시작도 창조로 부터 보지 않고, 역사의 종합인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에서 본다. 왜냐하면, 그에 의하면, 창조 역사의 참된 의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에서 참으로 밝게 계시되었기 때문이다. 이를 바르트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참된 종말론은 단지 (시간상) 앞으로 뿐만 아니라, 또한 뒤로 (소급해서) 빛을 비춘다. 예수 그리스도는 오늘에야 비로서 계신 것이 아니라, 어제도 계셨다."(Ibid) 이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역사적 종합명제인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 속에서 계시되었고, 그 나라는 창조 역사의 전제 내지 목적이였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종합명제에 뿌리를 두고 있는 반명제의 관점으로 부터만이 사람들은 명제를 조용히 가치 있는 것으로 놔 둘 수 있다"(24)고 말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르트에게 있어서, 세상의 나라 혹은 현세의 나라는 역사적 종말에 있을 하나님의 나라의 반 명제라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의 반 명제로 있는 이 세상 나라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극복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그리스도가 자신 안에 있는자는 새로운 피조물로서 이제 "흙에서 낳으니, 흙으로 돌아갈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하는 者라는 것이다. 여기서 문제가 제기 된다: 어떻게 하나님 나라와 세상의 갈등이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하나님의 인간 되심으로 극복될 수 있는가?


이러한 물음에 대하여 바르트는 인간의 삶이 갖고 있는 역설적 갈등을 얘기한다. "삶에 대한 우리들의 긍정은 처음부터 그 자체 안에 神的인 否定을 담지하고 있다"(28). 그런데 "신적 부정은 반명제에서 나온 것으로서 선행하는 명제에 대립되어 있고, 근원적이고-최종적인 종합명제를 지시하고 있는 부정"(Ibid) 이라고 바르트는 말한다. 이 말은 우리의 긍정(Ja)은 신적 부정(Nein)이고, 우리의 부정(Nein)은 신적 긍정(Ja)이라는 역설적 갈등의 세계가 바로 우리들이 현존해 있는 세상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 편에서의 긍정은 바로 이 否定的인 우리의 삶을 否定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즉 썩어질 세상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긍정적인 사랑은 죽을 수 밖에 없는 부정적인 육체의 죽음으로 (곧 부정)으로 수행되었다. 여기서 인간적인 부정은 하나님의 긍정에 삼킨바 된다. 바꾸어 말하면 인간적 삶에 대한 긍정은 하나님의 부정에 의해서 부정된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긍정 혹은 인간적인 긍정에 대한 부정으로서 위로부터, 곧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분이시라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바르트에 의하면, 세상적인 삶에 대한 하나님의 부정과 그 부정에 대한 하나님의 긍정으로서의 종합이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확실히하고 넘어가야 할 것은,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의 역설적 갈등이 기독론적으로 종합되는 것은, 바르트에 의하면, 쌍방의 노력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에 의하면 "종합은 오로지 하나님 안에서만 발견된다."(34) 다시 말하면, "명제 속에서 의도되었던 종합 명제는 반 명제 속에서 단지 찿아졌고"(Ibid), 밝히 드러났을 뿐이다. 역사적으로 바꾸어 말하면, 종말은 이미 창조에서 계획된 것이고, 그것은 반명제에 대한 극복 속에서 계시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근거에서 바르트는 새로운 종말론을 정립한다: "최후의 것, 終末 ( ), 곧 종합은 다음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마지막에 이르는 연속(Fortsetzung), 그 결과(Folge) 결론(Konsequenz)이 아니라, 반대로 모든 잠정적인 것으로부터의 단절을 의미하고, 그러나 또한 바로 (이 잠정적인 것과의 단절)이기 때문에 근원적인 의미을 갖고, 그 잠정적인 것을 움직이는 힘이다."(35) 이 말은 終末이 이 歷史의 연속이나, 역사적 결과 혹은 끝이 아니라, 전혀 다른 것이라는 뜻이다. 왜냐하면 종합명제가 전적으로 하나님으로 부터 오는 전혀 다른 새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르트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아니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있을 때에, 우리는 전혀 다른 세계의 백성이 되고, 전적으로 다른 새 하늘과 새 땅의 백성이 된다는 것이다. 즉 썩을 것이 썩지 않을 것을 입고, 죽을 것이 죽지 않을 것을 입는 것이다(고전 15,53)(32). 그렇다 바르트에 의하면, 그 새 하늘과 새 땅은 이미 창조 때에 하나님에 의해서 계획되고, 목적 되었던 것이다. 즉 새 하늘과 새 땅은 먼저번 하늘과 땅이 인간의 죄악으로 인하여 더러워졌고, 파괴되어서 다시금 새롭게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하나님 안에서 계획되어지고 목적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을, 탈 세상적으로 이 세상을 부인함으로서 소유 것이 아니라, 창조의 목적이며, 이 역사의 歸港地를 희망함으로서 소유하는 것이다.

 

 

II-2. 부정과 긍정의 양면성에 대한 역설적-동시적 해석

바르트는 "사회 속에 있는 그리스도인"이란 논문에서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의 예리한 분리를 전제하였던 것과 같이, 그의 논문: "성서적 질문과 통찰과 전망(Biblische Fragen, Einsichten und Ausblick, 1920)" 에서도 성서가 제공해 주는 "하나님 인식"과 우리들이 알고 있는 모든 세속적 지식, 역사적 의미, 그리고 삶의 가치를 철저히 二分하여 대립시킨다. 그는 이원론적 대립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일부는 우리들 안에 존재하는 것에(Drinnensein), 그리고 동시에 일부는(teilweises) 우리의 밖에 있는 존재(Drau ensein)에 견고히 붙어 있음으로서 우리자신을 확고히 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우리 자신은 이중성(Zweierlei), 즉 하나의 이원론(Dualismus)을 세워야 하는가? 그렇다면 또한 하나님 인식 다른 인식들에 반대되는 것이기에 우리 안에 다른 공간을 갖고 있지 않는 것인가? 하나님 인식은 다른 인식들에 반대되지 않는가!".
하나님 인식과 다른 세속적 지식의 이러한 예리한 분리 때문에 그는, 우리는 하나님 인식을 감당할 수 없다고, 말한다. 우리는 부분적으로도 하나님의 인식에 대하여는 전적으로 무능력하고 또 무능력한 상태로 자라났다고, 그는 말한다.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그는 성서해석에 있어서 루터의 "성서에 의한 성서 해석(scriptura sacra sui ipsius interpres)"을 수용한다(50).


그러나 바르트는 "하나님 인식"을, 우리가 소유하는 모든 지식의 전제로 본다. 바꾸어 말하면, 그는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지식은 하나님의 지식으로부터 출발한다고 본다. "하나님 인식"을 세속적 모든 인식의 전제로 봄으로서, 그는 "하나님 인식"과 "우리들의 지식"을 "긍정"과 "부정"의 대립 상태로 본다: "그렇게 우리는 긍정(Ja)과 부정(Nein), 그리고 부정과 긍정에 직면하게된다. 그리고 그 속에서 우리가, '귀있는 자는 들을지어다'하는 말씀의 위기 속에, 그 위기의 당혹함에, 우리 자신이 있음을 발견한다."(53) 그러나 인간적인 것의 부정과 신적인 긍정은, 바르트에게서, 영원한 분리로 끝나지 않는다. 바르트는 세속적 부정 속에는 하나님의 긍정이 전제되어 있는 것으로 봄으로서 부정과 긍정의 대립 및 갈등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선택으로 극복한다: "선택사상이란 곤경에서 나온 것 이외는 다른 어떠한 말도, 성서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에 관하여 말해야만 했던 것에 관하여 언급될 수 없고, 들여질 수도 없다."(55)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인간의 선택 그 사건 이외는 부정과 긍정의 철저한 분리가 극복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이 선택을 인식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 인식"과 세속적 지식의 종합이라고 할 수 있다. 성서는 바로 이 점을 우리에게 제공해 주고 있다. 그렇다면 인간에 의해서 쓰여진 성서가 어떻게 모든 세속적 지식 내지는 인식을 초월한 하나님 인식을 제공해 줄 수 있는가?


이러한 질문에 대하여 바르트도 성서가 하나의 종교적 문서라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성서의 증언은 그 속에 하나님에 대한 통찰이 있기 때문에 다른 문서와 다르다고 강조한다. 더 자세히 말하면, 우리와 "전적으로 다른 분(totaliter aliter)"(73)이신 예수에 대한 통찰이 성서에 있기에, 성서는 모든 인간적인 문서들과 전적으로 다르다. 이를 바르트는 비유적으로 설명한다. 그는, 그류네발트(Gr ndewald)가 예수가 골고다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있는 장면을 그린 그림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는 세례요한의 손과 같은 것이 바로 성서라고 말한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통찰이 없는 다른 문서들과 성서는 전적으로 다른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성서는 세상적 문서들과 내용상 전혀 다른 타자성을 갖는다. 그렇다면 여기서 문제가 제기된다: 어떻게 인간적인 통찰이 "전적으로 다른 분"에 대한 통찰이 될 수 있을까? 어떻게 인간이 "전적으로 다른" 하나님을 통찰 할 수 있는가?


그러나 이점에 있어서도 바르트는 앞에서 전개해온 변증법적 사고를 되풀이 한다. 즉 "하나님 인식"이 모든 다른 인식의 전제가 되듯이. 성서는 모든 종교적 증언의 전제이다. 더 나아가 성서가 증언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은 모든 사건의 전제이며, 동시에 종합이다. 그래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역설적으로 해석한다. 즉 예수의 죽음은,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죄에 대한 심판이다. 즉 인간의 否定적인 죄가 否定되는(거부되는) 하나님의 肯定이다. 그는, 예수에게서 있어난 종말론적 사건을 새로운 창조로 해석한다. 한마디로 말해서, 그에게 있어서, 예수의 부활은 "하나님 통치(Gottesherrschaft)"(72)의 시작이고, 시간이 종식된 "영원(Ewigkeit)"(72)이고, "새로운 세계(die neue Welt)"(73)이다, 이 종합에 대한 통찰이 바로 성서가 우리에게 증언하고자 하는 내용이다. 따라서 성서의 증언도 철저히 "변증법적"이다. 그의 말을 빌어서 말하면, 모든 질문에 대한 해답은 "거리로부터(von daher)"(67, u.a..), 곧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부터 온다.


결론적으로 바르트가 본 성서의 통찰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통찰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은 인간의 부정적인 요소들에 대한 부정으로서의 하나님의 긍정이라는 점에서 성서의 증언도 다분히 변증법적이라고 그는 확정한다. 이러한 바르트의 논리 전개는 우선 먼저 성서의 특성, 즉 인간의 종교적 문서와 하나님에 대한 통찰을, 분리시키고, 그 다음 분리되어 있는 내용이 그리스도의 사건에 대한 증언이라는 하나의 사실로 종합 함으로서 양자의 분리를 극복하여 성서의 독특성을 증언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이러한 전개 방식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그것은 하나의 사실 혹은 사건이 갖고 있는 양면성을 - 부정적인 면과 긍정적인 면을 - 역설적이면서 동시적으로 - 부정을 긍정으로 그리고 긍정을 부정으로 - 해석하는 방법이다.

 

 

II-3. 종합 명제에 뿌리를 둔 명제와 반 명제

바르트는 "신학의 과제로서의 하나님의 말씀(Das Wort Gottes als Aufgabe der Theologie)" 에서 우선 먼저 3 가지 문장으로서 강연 제목과 관계되는 명제를 설명한다: "우리는 신학자로서 하나님에 관하여 얘기해야한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이기에 그리고 바로 인간 자체이기에 하나님에 관하여 얘기할 수 없다. 우리는 양자, 즉 우리의 당위와 우리의 무능(할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바로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한다."(199).
우선 바르트는 "우리는 신학자로서 하나님에 관하여 이야기 해야 한다"는 명제을 부정적으로 해석한다. 그에 의하면, 인간이란 존재는 처음 부터 존재 문제을 갖고있는 수수께끼와 같은 존재이기에 하나님에 관하여 얘기할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에 관하여 이야기 해야 한다"는 과제는 갖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하나님과 인간은 "가능성과 불가능성", "생명과 죽음", "영원과 시간"이라는 질적 차이를 갖고 있기 때문에, 인간이 "하나님에 관하여 이야기 해야한다"는 과제는 여전히 곤궁에 빠진 문제로 남게 된다고, 바르트는 강조한다. 그러나 "해야 한다"는 과제와 하나님과 인간의 현실적인 질적 차이 속에 內在해 있는 이러한 변증법적 대립(dialektische Konstration)이 극복 될 수 있는 방법은 "새로운 사건"의 발생에 의해서만이 가능하다고 그는 말한다. 그러나 이 "새로운 사건"은 인간 편에서 일어날 아무런 가능성이 없다고 한다. 그러므로 결과적으로 바르트의 첫 번째 명제는 두 번째 명제, 곧: "우리는 인간이기에 그리고 바로 인간 자체이기에 하나님에 관하여 이야기 할 수 없다"는 명제로 넘어가게 된다.


두번째 명제가 극복될 수 있는 길은 앞에서 언급한 "새로운 사건"의 발생이다. 이 "새로운 사건"을 바르트는 하나님의 계시 사건으로 특징짓는다. 그런데 하나님의 계시 사건은 바로 말씀의 화육사건, 즉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신 사건"(207)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Deus dixit)"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의미에서 두 명제의 갈등은 기독론적으로, 즉 "말씀의 성육신", 곧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사건으로 극복되어진다. 여기서 질문이 제기된다: 어떻게 "해야한다"와 "할 수 없다"의 변증법적 갈등이 "하나님의 화육사건"으로 극복될수 있을까?


바르트가 이해하고 있는 하나님은, 자기 자신 안에 폐쇄된체 머물어 계시는 하나님이 아니다. 그의 말을 빌리면, "하나님은 단순히 (자기 자신 안에 머물러 있는: 역자 주) 하나님이 아니다. 그는 또한 무엇인가 다른 존재가 되실수 있는 분이다. 자기를 계시하시는 하나님이 바로 하나님이다. 인간이 되신 하나님이 바로 하나님이다" 또한 바르트는 하나님을 主-客의 構造(Subjekt-Objekt Schema) 속에서 이해하고자 하지 않는다. 즉 하나님은 우리 인식의 대상이 되시는 분이 아니다. 즉 인간은 주체로서 객체인 하나님을 이야기 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도상에 있는 독특하고 고유한 인간 존재(das partikulare Eigensein des Menschen in Wege)"(210)이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객체성 속에 계신 하나님이 자신의 충만함을 갖고 인간이 되시는 곳에서, ... 자신을 긍정(Ja)로서 우리의 부정(Nein) 속으로 들어오시는 곳에서, 그 곳에서 만이 하나님에 관하여 이야기 되어진다" 이러한 "하나님의 인간되심"의 사건이 전제된 곳에서만이, 역설적 해석이 - 부정이 긍정으로, 긍정이 부정으로 - 가능하다. 이러한 전제 속에서 루터의 칭의론(Rechtfertigungslehre: justificatio impii (불경건한 자를 의로 인정함)이 가능하다고, 그는 역설한다.


바르트의 변증법은 이제 역설적 종합에 이른다. 즉 "하나님에 관하여 이야기 해야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하나님에 관하여 이애가 할 수 없다"는 모순이 "하나님의 인간되심"으로 극복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려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이러한 변증법적 도식은 바르트가 "사회 속에 있는 그리스도인"이란 논문에서 제시한 바와 같이 명제와 반 명제가 종합명제에서 나오는 "주-객 일치 변증법" 즉 "Durch-durch"의 변증법이라고 특징지울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는 "하나님 자신에 의해서" 이야기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끝 맺는말

 

루터에 의해서 주도된 종교개혁의 신학적 공헌은 [성서의 재발견] 이리고 할 수 있다. 그는 "sola scriptura, sola fidei, sola gratia"를 종교 개혁을 위한 자신의 신학적 원리로 삼았다. 그런데 이러한 종교 개혁적 신학 전통은 소위 역사 비평학의 대두 이래로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루터의 종교개혁이, 로마교회가 주장 해온 [聖書와 傳統] 이라는 二重의 신학적 원리를 배척하고, "오직 성서로만" 이라는 개신교 신학적 원리를 수립하였지만, 스트라우스 (D.F.Strau 1808-1874) 에 의하여 주도된 19 세기 역사 비평학의 대두로 다시금 [聖書와 歷史] 라는 二重의 신학적 원리가 재생되었다. 그 후 종교개혁의 신학적 원리였던 "성서만으로"는 20 세기 개신교 신학자 가운데 가장 유명하였던 칼 바르트의 (1886-1968) "변증법적 신학"에 의해서 다시금 회복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루터와 바르트는 시간과 신학적 전승의 간격(Distanz)에도 불구하고, 우선 양자가 모두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서를 자신들의 신학적 출발점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서로 일치점을 갖는다. 이점이 바로 루터의 초창기 성서 해석 방법과 바르트의 변증법적 신학방법을 연구한 결과이다.
바르트가 근세기에 이루어 놓은 신학적 전환 속에, 즉 종교 개혁 전통의 재발견 속에, 나타난 그의 변증법적 신학 방법과 종교 개혁자 루터의 변증법적 성서 해석의 공통성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루터와 바르트의 변증법적 신학 방법의 유사성은 <<통일 혹은 하나 속에 있는 분리를 - 문자와 영, 세상적인 것과 신적인 것 - 보고, 다시금 이 分離 속에서 하나의 統一性 내지는 갈등의 극복을, 즉 성령론적, 혹은 기독론적 분리 극복을, 찿아 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루터는 우선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서를 두 가지 형태로 (Gestalt) - 文字와 靈 (spiritu et litera) 혹은 문자적인 의미와 영적 의미 혹은 내용상 律法과 福音 - 구분하였다. 그 다음 그는 이러한 區分을 다시 기독론적으로 綜合하여, 두 형태를 동일한 하나의 하나님 말씀으로 본다.
바르트도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서를 "인간적인 문서"와 "하나님의 말씀" 혹은 성서를 그 내용상 福音과 律法으로 구분한다. 그리고 난 후 그는 이를 다시 화육된 말씀인 그리스도로 결합한다. 이러한 신학 방법을 그의 논문에 따라서 설명하면: 바르트는 우선 먼저 "사회 속에 있는 그리스도인"이란 통일을 보고, 그 다음 이 사회 속에서 세상적인 것과 신적인 것을 분리하고, 다시금 이 갈등이 기독론적으로 극복 된 것을 기술한다. 더욱이 "신학의 과제로서의 하나님의 말씀"에서는 "인간이 되신 하나님"이 "해야한다"와 "할 수 없다"의 갈등을 극복하는 종합명제가 된다.

2) 루터와 바르트는 변증법적 展開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 혹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로 봄으로서의 자신들이 제시하는 종합명제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이러한 의미에서 양자는 기독론적 변증법을 전개하고 있다. 즉 양자는 基督論的 - 화육된 말씀(하나님의 인간되심)으로 - 綜合을 그들 신학의 출발점이며 동시에 해결점으로 삼는다. 이를 바르트 자신의 변증법적 용어를 빌어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명제의 힘과 반명제의 힘은 근원적이고, 절대적으로 (독자적으로) 태동하고 있는 종합명제의 힘에 그 뿌리를 내리고 있다."(33) 따라서 루터나 바르트의 변증법에서는 헤겔식 변증법이 거부된다.

3) 인간과 하나님 - 혹은 문자와 영 - 사이의 갈등을 극복하는데 있어서 루터와 바르트는 언제든지 神 中心, 더 자세히 말하면 그리스도 中心의 극복 방식을 취하고 있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기독론적 갈등 극복을 종말론적으로 해석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루터나 바르트의 변증법은 전체성 속에서 하나를, 그리고 하나 속에서 전체를 보는 통전적 변증법으로 특징지어 질 수 있다. 그리고 양자는 기독론적 갈등 극복이 갖고 있는 양면성을 - 긍정과 부정, 세상적인 것과 신적인 것, 현세적인 것과 종말론적인 것 - 역설적으로 해석한다. 바꾸어 말해서 양자는 부정 속에서 긍정을 보고, 긍정 속에서 부정을 본다, 그리고 이 둘이 상존해 있는 현실을 종말론적으로 해석한다.


click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