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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서】예화 모음 22편

by 【고동엽】 2011. 6. 7.

1. 질서가 곧 자유

잇단 파업 소식으로 나라가 어수선하다. 한 건이 타결되는 것 같으면 다른 건이 꼬리를 문다. 가뜩이나 경제가 불안한데 저만치에서 더 짙은 먹구름이 몰려오는 듯하다. 나름대로 이유가 있겠지만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가? “이젠 제발 조용하면 좋겠다”는 국민의 여망이 이루어지는 길은 없는 것인가?
윈스턴 처칠이 이런 말을 했다.
“인생의 처음 25년동안 나는 자유를 갈구했다. 그 다음 25년동안 나는 질서를 추구했다. 그 다음 25년동안 나는 질서가 곧 자유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법과 질서는 본래 국민 전체의 공익을 위해 세워진 것이다. 만일 그것이 국민 전체의 생명과 인권과 재산을 보호하는데 부적절하다면 합법적인 과정과 절차를 통해 개정되는 것이 우선이다. 법과 질서를 고치기 전에 기존법과 기존 질서의 테두리를 벗어난 행동을 마구 하는 것은 장기적으로는 공멸의 길로 가는 것이다. 비약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침몰하는 타이태닉호에서 투쟁의 결과로 보물을 더 많이 차지해본들 진정 무엇을 차지했다는 것인가. 보물을 아무리 많이 안고 있어도 배가 침몰하면 건질 수 있는 보물은 하나도 없다. 못 건지는 것은 비단 보물만이 아니다. 보물을 안고 있는 사람의 생명도 건지지 못하는 것이다. 아니 배를 타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생명이 함께 가라앉아 버리는 것이다. 관련 당사자들이 어떠한 변명을 하든지간에 국민은 지금 가라앉고 있는 타이태닉에 타고 있다고 느낀다는 데 문제가 있다. 점점 죄어오고 있는 침몰의 압박을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나라가 소용돌이치며 가라앉고 있는 것 같은 지금이 과연 갈등과 투쟁으로 무엇을 얻어내야 할 때인가? 국민 모두가 일치단결하여 우선 나라의 안정을 추구해야 할 때가 아닌가? 질서를 지키는 것이 바보처럼 여겨지는 것이 현실이다. 집단의 물리적인 힘으로 원하는 것을 따내는 것이 지혜로워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질서 속에 안정과 번영을 향한 자유가 있다. 레일을 이탈한 열차는 자유로워 보여도 자유가 없다. 레일 위를 달리는 열차는 속박되어 있는 것 같으나 자유롭다.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고전 14:40)
/권성수 목사(대구동신교회 목사)

2. 미국 학생의 새치기

오늘은 외국에서 오래 살다 온 어떤 사람의 이야기 한 토막을 소개하겠습니다. 하루는 그 분이 학교에 다니는 아이의 야외 수업을 참관했다고 합니다. 수업을 마치고 돌아온 아이들이 각자 점심을 받기 위해 줄을 지어 서 있었습니다. 그 때, 어떤 학생 하나가 중간에 새치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그 학생을 꾸짖거나 밀쳐 내거나 하지 않더랍니다. 내심으로 '참 묘한 일도 다 있구나.'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끼어든 학생의 차례가 되었습니다. 그제서야 바로 뒤에 서 있던 학생이 '이 아이는 새치기한 학생입니다.'하고 배식하는 사람에게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배식하던 사람이 학생에게 그 사실을 확인하고서는 맨 뒤로 보냈습니다. 그 사람은 이것을 보고 '바로 이것이 이 나라를 강대국으로 만든 저력이었구나!' 하고 감탄했다고 합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의 질서 의식도 이제는 선진국 수준에 비길 만큼 향상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후진성을 버리지 못한 사람들이 눈에 띕니다. 극장이나 역 앞, 또는 공공 장소에서 새치기를 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이 있습니다. 또 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면 약삭빠르게 갓길로 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러한 그릇된 생활 자세를 버리고, 문화 국민답게 질서를 지키도록 노력합시다. 아울러 불의에 관대하지 말고 정의를 실현하는 데 앞장섭시다. 그러면 우리도 금세 선진 강대국의 국민이 될 수 있습니다.

3. 질서에 대한 입장차이

차에 타고 있을 때는 늦게 가는 행인을 욕하고,
횡단보도를 건널 때는 "빵빵"대는 운전사를 욕한다.

남이 천천히 차를 몰면 소심운전이고,
내가 차를 천천히 몰면 안전운전이다.

남이 신호 위반을 하는 것은 기본 법률도 무시하는 파렴치한 행위이고,
내가 신호 위반하는 것은 피치 못할 급한 사정이 있기 때문이다.

지하철에서 서 있을 때,
남이 조금만 양보해서 한 자리 만들어 나를 앉게 해야 하고,
나는 한 사람 더 끼면 불편하니까 계속 넓게 앉아 가도 된다.

남이 무단 횡단을 하는 것은
목숨 따윈 가볍게 여기는 경박한 행동이고,
내가 무단 횡단을 하는 것은
목숨마저 아깝지 않을 만큼 급한 일이 있어서이다.

남이 새치기를 하는 것은 용납 할 수 없는 얌체 행위이고,
내가 새치기를 하는 것은 급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는 것이다.

공중전화에서,
남이 통화를 오래하면 쓸데없는 수다가 긴 것이고,
내가 오래 하면 그만큼 용건이 긴요한 것이다.

복잡한 버스나 지하철에서
나를 밀치는 것은 저만 편하려는 이기적인 욕심 때문이고,
내가 남을 밀치는 것은 다른 사람이 밀쳐서 별 수 없이 밀린 것이다.

주말에 여행할 때,
남은 길 막히는 것을 생각해서 대중교통 수단을 이용해야 하고,
나는 ... 그래도 자가용이 편하더라.

남이 단체 생활을 싫어하는 것은 고립적 성격 탓이고,
내가 단체 생활을 싫어하는 것은 독립적 성품 탓이다.

버스 안에서 노인이 탔을 때,
남은 일어나 자리를 양보해야 하고,
나는 그냥 앉아서 눈 감고 자는 척하는 게 상책,
(속으로 그날 일진을 탓하면서...)

남이 택시에 탈 때는 합승을 해도 되고,
내가 택시에 타고 있을 때는 절대 합승해서는 안된다.

내가 길을 건널 때는 모든 차가 멈추어 서야 하고,
내가 운전을 할 때는 모든 보행자가 멈추어 서야 한다.

4. 영국경찰

영국경찰은 천천히 걷는 훈련을 받을 뿐 아니라 철저하게 비무장을 원칙으로 한다는 것이었다. 경찰이 뛰면 시민들이 뛴다는 것이 천천히 걷는 철학이라면, 경찰이 무장하면 시민들이 사나워진다는 것이 경찰비무장의 원리라는 설명이었다. 흥미로운 논리가 아닐 수 없다. 아닌게 아니라 영국경찰을 보노라면 아무 것도 몸에 지닌 것이 없다. 품속에 권총이라도 가지고 다니겠거니 했는데, 그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영국에서 경찰이 가끔 불량배들한테 습격을 받아 부상을 입고, 가끔은 더러 생명을 잃게 되는 일이 없지 않은 것이다. 그럴 때마다 시민들이 나서서 경찰을 무장시켜야 된다고 여론을 거세게 부추기지만, 정작 경찰당국은 경찰무장을 반대하는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역설적으로 경찰이 시민들의 따뜻한 보호를 받고, 진정한 '민중의 지팡이'로서 사랑과 존경을 받고있는 것은 아니겠는지. 영국 어린이들의 장래 희망하는 직업 속에 경찰이 되고자 한다는 소리가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만 보아도 경찰의 인기가 대단한 것임을 알 수 있다는 설명이다.
영국경찰의 비무장원칙 소식을 들으면서, 온갖 정쟁(政爭)으로 지새우고 있는 요즘, 새삼 주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게 된다.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마26:52)

5. 질서의 노예

어느 날 한 가족의 초청을 받아 그의 집을 방문하였습니다. 그의 집은 대문부터 철저한 질서가 시작되었습니다. 마루는 물론 방마다 모두 질서가 정연했습니다. 화병에는 꽃이, 어항에는 금붕어가 있었습니다. 집안에 어느 곳에서든지 먼지 하나 조차 찾아 볼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방바닥은 니스칠로 넘어질 듯 광을 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왠지 그 곳에 있는 시간이 불안했습니다. 움직이면 무슨 일이 있을 것 같고 혹 먼지 하나라도 떨어질까 괜한 걱정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그 집의 안 주인은 하루 왼 종일 쉴틈 없이 하루종일 쓸고 닦고 훔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재미 그런 낙으로 산다고 하였습니다.

 


내가 있는 순간에도 닦고 훔치는 모습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를 보니 질서의 노예였습니다. 숨막히는 질서로 스스로 올가미를 걸고 있었던 것입니다.
왜일까요! 너무 지나치게 잘 정돈되어 있어도 너무 지나치게 무질서한 것과 같이 불편한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하늘에 뜬구름을 보노라면 삼각형이나, 사각형이나 동그라미 구름을 본적이 없습니다. 산도, 들도, 강도 이 세상 자연은 있는 그대로 규격화되어 있지 않아도 무질서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부드러운 조화를 아름다운 선으로 진행하고 있으심에 찬양 드리고 싶습니다.
그 날 나는 "지나친 질서보다 숨막히는 무질서는 없다"는 생각을 하며 나왔습니다. 하나님은 박제된 목소리를 원치 않으십니다. 진리와 자유의 목소리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수 있는 목소리를 원하십니다.

6. 옹달샘

어느 마을에 옹달샘이 있었습니다. 물맛이 좋아 동네 사람들이 와서 퍼다 먹었습니다. 그런데 구두쇠 주인 영감이 그 옹달샘 주변에 울타리를 쳐서 남이 떠가지 못하게 했습니다. 혼자서 먹었습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6개월이 지나고 1년이 지나니 물이 마르기 시작했습니다. 물이 완전히 말라 버렸습니다. 옹달샘은 물을 계속 퍼내야 나오는 법인데 그걸 모른 것입니다. 고인 물은 썩지만 흐르는 물은 썩지 않습니다. 이것은 자연의 질서 입니다.

7. 자연의 질서

본문: 눅12:24-28 * 찬송: 78장, 307장
"까마귀를 생각하라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으되 하나님이 기르시나니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독일의 담스타트라는 곳에 바슬리에 슈링크라는 분이 개설한 신교 수도원이 있습니다. 그는 철학박사이며 심리학 박사로서 이 수도원을 운영하는데 직접 농사를 지어가며 약 200명의 식구들을 자급자족하게 했습니다. 처음에는 농약을 많이 쓰며 농사를 지었는데, 어느 날 하나님께서 계시하시기를 "너희들만 먹고 살려고 하느냐, 새도 먹고 벌레도 먹어야 되지 않겠느냐"는 말씀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 이후로는 아무리 어려워도 농약을 전혀 쓰지 않고 그대로 농사를 지었습니다. 벌레가 많이 끼어도 내버려두니 자연히 새들이 모여들고 새들이 모이니 농사가 잘되고 공기는 맑아지며 결과적으로는 공해없는 좋은 농사가 되어 200명이 건강하게 잘사는 수도원이 된 것입니다. 여기에다 하나님은 보너스까지 주셨습니다.

 


그 땅은 원래 메마른 곳에 버려 둔 땅인데 농장 한 가운데서 샘이 솟아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샘을 기적의 샘이라 하여, 많은 사람들이 구경을 갈 정도입니다.
사람들이 근시안적인 식견으로 자연의 질서를 깨뜨리면 오히려 더 크게 어려움을 당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셨음을 믿는다면 먹을 것도 겸하여 주셨음을 사람들은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밀림 지대인 아프리카의 나무들은 사람들이 마구 잘라내어 아프리카 밀림의 삼분의 일이 모두 사막화가 되고 말았다니, 정말 놀라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목숨을 내신 분도 하나님이시며 목숨도 보존하실 분도 하나님이십니다(마6:26-32, 욥38:41).
"예수께서 낮이면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밤이면 나가 감람원이라 하는 산에서 쉬시니"(눅21:37).
* 기도: 이 땅위의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질서를 세우신 하나님, 사람들이 어리석게도 자연의 질서를 파괴하여 생존의 위협을 겪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주신 자연을 보호하고 사랑하며 아름답게 가꾸어 주님의 영광을 더욱 드러나게 하옵소서

8. 질서와 작은 약속

개인주의와 집단이기주의가 만연되어 있는 사회에서 질서와 봉사를 기대한다는 것은 마치 사막에 물이 있기를 기대하는 것 만큼이나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러나 질서란 일시적인 자신의 욕구를 인내하고 작은 약속을 지킴으로부터 시작될 수 있다. 실제적 교훈이 담겨있는 이야기 한토막을 여기 소개한다.
미국 아마즈나 사막을 가로질러 가노라면 햇빛 뜨거운 사막 중간쯤에 좁은 길이 있는데, 그 길 옆에서 물펌프를 발견하게 된다. 행인들은 목이 타서 반가움에 펌프의 손잡이를 잡고 물을 푸려고 한다. 바로 그 펌프의 손잡이에는 깡통이 하나 매달려 있는 데 그 속에는 다음과 같은 편지가 담겨져 있다.

 


"이 펌프에 물을 붓고 펌프질만 하면 물이 틀림없이 나옵니다. 이 땅 밑의 샘에는 언제나 물이 흐릅니다. 펌프 옆의 바위 곁을 파헤치면 큰 병에 물이 담겨져 있는 데 그 물을 펌프에 다 붓고 펌프질을 하면 물은 얼마든지 필요한대로 충분히 나옵니다. 그리고 펌프질을 끝내고 물을 마신후에는 병에 물을 가득 채워서 마개로 꼭 막고 처음있던 그대로 모래 속에 묻어 두십시요. 다음 오는 사람을 위해서 말입니다.
* 추신 : 목이 마르다고 하여 병의 물을 먼저 조금이라도 마시게 되면 당신의 목은 잠시 축일 수 있어도 뒤에 오는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아마즈나 사막에 있는 펌프의 이야기에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이 혼탁한 사회를 시원스레 밝고 맑게 하기 위해서는 작은 일 같지만 새치기를 하지 않고 줄을 서는 일이나, 남이 보지 않는 곳에서도 교통신호를 지키는 일이며, 지극히 미미한 약속이라도 지킬 때 사회질서는 세워지는 것이며, 우리의 갈증을 해결하는 펌프의 물은 계속 솟아 나올 것이리라.

9. 내면생활의 질서

맑고 투명하며 아름다운 다이어몬드는 그 아름다움에 걸맞게 고가의 보석이다. 이런 다이어몬드를 쪼개고 쪼개어 원자 단위까지 분석하면 영롱한 빛을 발하며 아름다움을 뽐냈던 다이아몬드가 흑연 성분과 같은 하찮은 탄소의 결합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흑연덩어리와 다이어몬드는 같은 원소로 구성되어 있다. 다이어몬드와 흑연덩어리의 차이는 다름 아닌 탄소 원자의 배열과 결합 질서가 다를 뿐이다. 결국 탄소 원자의 배열이나 결합 질서에 따라 고귀한 다이어몬드가 되기도 하고 하찮은 흑연덩어리에 불과하기도 한다.
생명이 없는 것들조차 내부 구조의 질서에 따라 그 가치의 차이가 엄청나게 달라지는 것처럼 사람에게 있어서도 내면생활의 질서가 어떠하느냐에 따라 삶의 질이 달라진다. 무질서하게 증식하는 암세포나 생활의 질서가 무너지면서 나타나는 온갖 병적 상태 역시 약이나 의술보다도 내면생활과 삶의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 치료의 첩경이다. 삶을 지배하는 자연법칙의 특징은 질서다. 하나님은 자연법칙을 정하신 분이시고 운행하시는 분이시다. 곧 질서의 하나님이시다.
/이상룡(우석대한의대학장)

10. 낡은 질서 개혁

부활하신 주님의 은총이 온갖 역경 속에서도 희망으로 세상을 아름답게 일구는 여러분에게 가득하길 기원합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역사의 완성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변혁의 과정입니다. 끊임없는 삶과 죽음의 반복이 진보의 올바른 의미입니다.
왜곡된 역사와 정치는 죽음의 다른 모습이며,역사 발전을 위한 몸부림은 삶의 다른 얼굴입니다.우리 모두 그리스도의 부활에 동참합시다. 오랜 세월 이 땅의 민중을 억압하고 역사를 유린하던 묵은 질서를 걷어내야만 합니다. 낡은 질서의 개혁은 한국교회가 갈망해왔던 민족의 평화통일과 인류화해의 지름길이 될 것입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총무 백도웅 목사)

11. 하나님을 거역한 인간

하나님을 거역하고 떠난 인간들이 극을 향해 치닫고 있는 몇 가지 예를 들고자 합니다.
미국에는 신좌익(New Left)이라는 학생 단체가 있는데, 미국 학생의 2%가 가입되어 있으며, 10%의 학생들이 동조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들이 주창하고 있는 것은 현실 불만에 근거한 ‘파괴’입니다. 하나님이나 도덕이나 정부나 기존 권위나 질서나 가치들을 부정하고 산산이 부서뜨리겠다는 것입니다.
또한 어른들이 젊은 세대의 패륜을 나무라면, 젊은이들은 무조건적인 반항과 폭력으로 대항합니다. 이것은 이미 기성세대가 하나님의 절대적인 도덕 기준을 저버린 결과, 아무리 입으로만 도덕을 말하고 젊은 세대를 훈계해도 그 힘을 발휘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한 설문조사 결과에 의하면, 일본 주부들의 50% 이상이 만일 들키지 않는다면 바람을 피울 용의가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없으면 못할 것이 없다.’고 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말을 생각나게 해줍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을 거역하는 인간의 모습 속에서는 더이상 희망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오직 하나님의 엄중한 진노만이 남아있을 뿐입니다.
인간에게는 하나님을 믿고 영생을 얻느냐, 아니면 그를 거역하고 영벌을 받느냐 하는 두 가지 선택만이 있을 뿐입니다.

12.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속한 자로서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다. 반면 불신자는 마귀의 종들이다. 그래서 마귀의 생각을 가지고 살아간다. 마귀는 예수님을 시험하면서 선뜻 속셈을 드러낸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 마귀란 놈은 오늘날도 사람들의 마음에 악한 생각을 집어 넣기에 여념이 없다. 왜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돌을 떡덩이가 되도록 할 수 있다고 생각해야만 하는가? 여기 기막힌 함정이 있다. 돌로 떡을 만드는 일은 온 우주를 발칵 뒤집어 놓을 일이다. 이는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에 정면으로 대항하는 일이다. 돌은 돌이고 떡은 떡이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나님은 돌이 떡이 될 수 없도록 하셨다. 그런데 이것을 바꾸라는 것이다. 그것도 못바꾼다면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일 수 없다는 수작이다. 만일 예수님께서 마귀의 말을 듣고 돌을 변하여 떡이 되게 하셨다면 실상은 하나님께 대한 반역과 도전을 하신 꼴이 된다. 예수님은 돌로 떡을 만듦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심이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그런 마귀의 수작을 간파하시고, 마귀의 충동질에 자존심 상해 하지 않으시고 마귀를 대적하심으로 하늘로써 오신 참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극명하게 보여주신 것이다. 마귀를 향하여 주님은 신명기8:3을 인용하셨다.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이 말씀에서 마귀는 예수님의 허기지신 배를 보고 주님을 유혹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제 아무리 인간의 식욕이 본능이라 할지라도 사람이 사는 것은 궁극적으로 떡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이심을 천명하신 것이다. 떡이 우리에게 의미와 생명을 주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인생으로 기름지게 하고 윤택하게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돌로 떡을 만들지 않으심으로 당신은 철저히 하나님의 질서에 순응하시는 분이심을 보여 주셨다. 마귀는 오늘도 여전히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면 의당 돌이라도 변하여 떡이 되게 하셔야 한다고 소리친다. 우리는 그 마귀에게 이렇게 말해야 한다.

 


"마귀야 잠잠하고 물러가라. 내게는 돌이 변하여 떡이 되는 일이 필요치 않다. 난 네 말에 의해 요동치 않는다. 오로지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삶을 살겠노라."

13. 삼위일체(三位一體)

삼위일체란 하나님 아버지와, 그 아들 독생자 예수님과, 보혜사 성령님은 각각 다른 역할을 하는 독립적인 존재이면서도 동시에 한 분(一體)이라는 기독교 교리의 핵심입니다. 325년 니케아공의회에서 교회의 정통신조로 공인되었으며, 451년 칼케돈공의회에서 추인됨으로써 천주교와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교리가 되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돕는이라 하니까, 아버지 밑에 아들이 있고, 아들 밑에 수행비서쯤 되는 성령님이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님이 그 맡은 역할은 다르지만 동일하게 한 몸이라 그래서 한문으로는 一體(일체), 즉 수직관계가 아니라 수평관계 一입니다.
삼위일체 교리가 주는 교훈은 교회 안에서 성도들의 관계가 어떠해야하는지의 본보기입니다. 교회 안에서의 질서는 목사, 장로, 권사, 집사.... 이런 수직으로 된 상하관계가 아니라 그런 직분은 일을 잘 하기 위한 기능이고, 실제로는 동일하게 한 몸인 一體(일체)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다른 사람보다 나아 보인다면 그건 내가 병든 것입니다. 다른 지체들을 나보다 낫게 여겨야 합니다. 누구든 잘 살펴보면 나보다 잘하는 것이 몇 가지는 있습니다. 어떤 분이 고백하기를 교회 안에 심한 지체장애로 거의 바닥에 붙어 생활하는 분이 있는데, 그분이 뭘 할 수 있을까... 그분은 교회 안에서 신발정리를 가장 잘하는 사람이라 합니다.
다른 것은 다 제쳐두고 교회가 삼위일체(三位一體)교리만이라도 제대로 믿고 적용시킨다면 교회는 이 땅에서 작은 천국을 이룰 것입니다.
/최용우

14.순서가 있습니다

나무(木)의 뿌리에 작대기를 걸치면 본(本)이 되고
나무(목)의 가지에 작대기를 걸치면 말(末)이 됩니다.
즉, 나무의 시작은 뿌리이고 나무의 끝은 가지라는 뜻입니다.
뿌리와 가지가 모두 한 나무이지만 뿌리가 먼저 라는 말입니다.
하나님 사랑이 이웃사랑보다 먼저입니다.
기도와 행동이 다 중요하지만 기도가 먼저입니다.
아기를 낳을 때도 머리가 먼저 나와야지 발이 먼저 나오면 위험합니다.
하나님이 먼저이고 사람이 나중입니다.
사람이 먼저이고 돈은 그 다음입니다.
이 순서가 바뀌니까 세상이 온통 뒤죽박죽!
/최용우

15. 사랑의 질서

현대인 중에는 애완동물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이들이 있다. 한 TV에서 이 문제를 심각하게 다룬 적이 있다. 고양이를 얼마나 사랑했던지 남편이 고양이를 아파트에서 집어던지자 따라 죽은 이도 있었다. 애완동물을 사랑하는 것 그 자체는 하등의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라면 사람보다 동물을 더 사랑하는, 사랑의 뒤집힌 질서에 있을 것이다.
사랑의 대상도 중요하지만 사랑의 방향 정위가 훨씬 더 중요하다. 더 선한 것은 덜 사랑하고, 덜 선한 것은 더 사랑하는 우리의 왜곡된 의지가 문제인 것이다. 돈과 사업이 아무리 좋기로서니 이웃 사랑보다 앞설 수 없다. 학문과 연구가 아무리 중요하기로서니 가정을 내팽개치고 거기에만 매달릴 수 없다. 권력과 명예가 아무리 귀중해도 가족관계나 이웃관계를 도외시할 정도로 전부는 아니다. 여러 자녀 가운데 어느 한 아이가 아무리 귀엽고 똑똑하기로서니 유독 그 아이만 더 사랑하는 것도 건강치 못하다.

 


성 어거스틴은 말한다. “의롭고 경건한 삶을 사는 사람은 사랑의 질서를 잘 잡아서 사랑하지 말아야 할 것을 사랑하지 않고, 사랑해야 할 것을 반드시 사랑하고, 보다 적게 사랑해야 할 것을 너무 많이 사랑하지 않고, 어느 한 편을 더 많이 사랑하거나 덜 사랑해야 할 경우 똑같이 사랑하지 않고, 똑같이 사랑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어느 한 쪽을 더 사랑하거나 덜 사랑하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당연히 최고의 선이신 하나님을 비길 데 없이 최고로 사랑해야 한다. 만일 창조주보다 피조물을 더 사랑한다면 그것은 방향을 잘못 잡은 사랑이다. 존 웨슬리가 15세나 연하인 소피아 합키와 실연한 것은 유명하다. 합키를 사랑했던 웨슬리였지만 만나고 돌아설 때마다 숙망했던 인디언 선교가 걱정스러웠다. 결국 결별을 선언했는데 그 논리가 중요하다. 자신은 창조주보다 피조물을 더 사랑할 수 없기 때문에 헤어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어려서부터 하나님 사랑을 최고로 알아온 웨슬리 역시 자기 안에 사랑의 질서가 흐트러지는 것을 제일 두려워했던 것이다. 어거스틴은 부르짖는다. “주여, 내 안에 사랑의 질서를 세워 주소서!” 오늘 우리도 이렇게 기도해야 할 것이다. 더 좋은 선을 버리고 덜 좋은 선을 향하여 떨어지지 않도록. 무엇보다 영원하신 하나님을 제쳐놓고 덧없이 소멸되고 말 세상적인 것을 더 사랑하지 않도록. 그리하여 시들지 않는 행복을 누리며 살 수 있기를.
/김흥규(내리교회 목사)

16. 질서를 지키자

미국 유니버설 스튜디오를 방문하면 이곳저곳 볼거리가 많다는 것과 그 규모에 놀라게 된다. 그곳을 소개하는 기록영화관에서 있었던 일이 떠오른다.
어림짐작으로 500여명이 입장할 수 있는 영화관 안에는 이미 세계 각처에서 온 관광객들이 가득 차 있었다. 10여분쯤 지났을까 안내방송이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신사 숙녀 여러분,저희 스튜디오를 찾아주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곧 영화를 시작하겠습니다. 죄송하지만 뒤에 서 계신 분들과 늦게 들어오실 분들을 위해 앉아 계신 좌석에서 안쪽으로 한칸씩만 움직여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이 방송이 끝나자마자 30초만에 빈 자리를 메우는 이동을 끝내는 것이 아닌가.
필자의 경우 “앞자리부터 채워주세요,빈자리부터 앉아주세요”에 입이 닳아온 터라 마치 신기한 구경거리를 보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빨리빨리,새치기,그리고 끼여들기에 조련된 필자로서는 가는 곳마다 줄지어 차례를 기다리는 그네들이 마치 밥 먹고 할일 없는 사람들처럼 보이는가 하면 신기해 보였다. 결국 그날 겨우 세 곳만 둘러보고 그곳을 떠나긴 했지만 그들의 질서 지킴이 곧 민주주의의 텃밭이라는 생각엔 지금도 변함이 없다.

 


자동차의 경우 무조건 끼여들고 손만 흔드는 사람들,버스 전용차로도 아랑곳하지 않고 달리는 승용차,어쩌다 추돌이나 접촉사고라도 나면 길거리에서 멱살 잡고 덤비는 사람들,파출소든 동사무소든 가리지 않고 덤비는 사람들,그래서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는 통설이 적용되는 사회라면 민주주의는 요원하다.
본래 민주주의는 다수 의견을 존중한다는 윤리적이고 합법적인 절차를 근간으로 한다. 그러나 다수 의견이 큰 목소리나 집단행동에 의해 유린된다든지 폭력이나 물리적 작용이 집합되어 어떤 결과를 결정한다면 그것도 민주주의일 수 없다. 신호등 없는 교차로에 먼저 온 차가 건너가고 기다리던 차가 그 후에 건너가고 그래서 차들의 뒤엉킴 없이 소통질서가 이어지는 거기가 민주주의의 교실이어야 한다.
공동체란 상호 유기적 관계를 유지하는 질서를 필요로 한다. 신체의 경우 유기적 관계가 무너지면 신체대란이 일어난다. 머리 따로,눈 따로,손발 따로 허우적거리는 것을 상상하면 끔찍하다. 국가공동체의 경우 철저한 유기적 관계와 질서가 쇠기둥처럼 축을 이룰 때 문제를 풀고 국가 발전을 일궈낼 수 있다. 그러나 각 부처가 손 따로,발 따로처럼 기능과 역할 및 사고를 달리하면 후진에 가속이 붙게 마련이다.
교회는 어떤가. 교회질서의 기본은 성경이다. 교단? 교회의 헌법이나 장정 위에 성경의 권위가 우선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고 권위인 성경은 제쳐놓고 집단의 이해를 따라 갈팡질팡한다든지 사람이 만든 법이나 제도를 절대화하기 위해 말씀의 권위를 제치기 시작한다면 교회와 시장이 다를 바 없다.
질서를 위해 법은 존재하고 그 법은 지켜야 한다. 그러나 너는 지키고 나는 빠져나가도 된다는 저급 발상을 거듭하는 사람들 때문에 공동체의 균열이 오고 아픔이 배증된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다. 돌로 떡을 만드는 것은 사단의 질서지만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000명을 먹이는 것은 하나님의 질서인 것이다. 크든 작든 정해진 질서를 그날 거기서 지킬 때 하나님의 공의가 이 땅에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박종순<충신교회 목사>

17. 일반적인 호칭에 관한 에티켓

친구나 동료처럼 대등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면 자연스럽게 이름을 부른다. 그러나 회사내에서는 이름 뒤에 ‘씨’자를 붙여 부름으로써 상대를 존중함은 물론 사무실내의 공적인 질서를 유지하도록 한다. 나이와 지위가 다르더라도 상급자로부터 어떻게 불러달라는 말이 있게 되면 그에 따라 호칭하도록 한다.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이나 전문 직업인, 손윗사람에 대해서는 그에 맞는 경칭을 사용하도록 한다.

18. 인면수심(人面獸心)

영국 대영 박물관에는 옛날 앗수르 제국이 왕궁 입구에 세워놓았던 수호신 형상이 있다. 돌에 새긴 얼굴 형상은 사람이고 몸은 독수리 날개로 덮여 있고 발은 사자이다. 사람의 지혜와 하늘을 높이 나는 독수리의 날개와 힘이 센 사자를 통합한 그 형상이 앗수르를 지키는 수호신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세상의 모든 부조화와 불행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변질시킨 데 있다. 사람과 독수리 그리고 사자는 하나가 될 수 없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도전이고 우상숭배다. 사람 속에 짐승의 형상이 있는 것이 죄로 타락한 인생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얼굴은 사람인데 속에는 돼지 염소 공작 뱀 호랑이 같은 짐승이 들어 있는 인면수심(人面獸心)을 가리켜 화가 임할 외식자들이라고 책망하셨다.
사순절에 그리스도인들이 할 일은 우리 안에 남아 있는 짐승들의 형상을 십자가에 못 박고 그리스도의 형상을 회복하는 일이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
/최낙중 목사(해오름교회)

19. 하나님의 통치와 자유

성경: 시편 97 장 1 절
"여호와께서 통치하시나니 땅은 즐거워하며 허다한 섬은 기뻐할지어다"

한 나라의 국민은 통치자가 누구냐에 따라 기쁨을 경험할 수도, 슬픔을 경험할 수도 있습니다. 일제의 압박 속에서 우리 나라의 많은 사람들이 독립 투쟁을 전개했습니다. 광복절은 환희에 찬 날이기도 하지만 이민족에게 유린당했던 치욕을 되새기게 해주는 날이기도 합니다. 한민족의 가슴 속에 맺혔던 한은 풀렸지만, 속박의 굴레에서 권리를 빼앗기고 절망과 한탄 속에 지내던 고통을 우리는 쉽게 잊어버릴 수 없습니다.
광복절은 우리가 누구에게 지배받으며 사느냐에 따라 삶의 질이 달라질 수 있음을 교훈해 줍니다. 그러나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돈과 명예와 지식 등, 수많은 것들에 의해 자유를 빼앗긴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실 이 사회에 자유가 없는 것은 근원적으로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어기며 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의존하기 보다는 자만 속에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신학자 라인홀드 니버는 죄의 특성을 ‘자만’(pride)으로 묘사했습니다. 자만 속에 기쁨이 있을 수 없습니다. 나의 힘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만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통치에 복종하는 것이 기쁨을 회복하는 길입니다.
* 기도: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의 통치 속에서 광복의 기쁨을 누리며, 창조 질서를 어기지 않는 가운데 진리 안에서 자유롭게 살게 하소서.
/시편을 통한 매일묵상집

 

20. 질서를 찾자

한 남자가 결혼했다. 그는 신혼여행이 끝나자 곧 사라졌다. 그리고 몇 달 후 나타났다. 화를 내는 신부에게 그가 말했다. "왜 화를 내는 거요. 우리는 분명히 결혼했고 사랑하는 사이잖소. 생활비도 보냈는데 무엇이 불만이오"
한 어린이가 학교에 입학했다. 그런데 이튼날 부터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가정 방문한 교사에게 어머니가 말했다. "우리 아이는 학교에 가지 않아도 돼요.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걸요" 이렇듯 형식과 규칙을 무시하면 세상은 난장판이 되고 말 것이다.
세상이 점점 질서를 잃어가고 있다. 지금 이 시대에 우리에게 시급한 것은 "질서 찾기"다. 영국의 저술가며 사회개혁가인 새뮤얼 스마일즈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질서는 시간의 가장 훌륭한 지배자이다. 왜냐하면 일이 효과적으로 처리되지 않는 한 시간은 그대로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시간은 한 번 잃어버리면 영원히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질서는 많은 중요한 문제들과 결부된다. 도덕이나 물질에 따른 법칙에 대한 복종도 질서다. 세상은 질서로 시작했다. 질서가 있기 전에는 혼돈이 지배했다."

21. 질서의 파괴

한 남자가 결혼했다. 그는 신혼여행이 끝나자 곧 사라졌다. 그리고 몇 달후 나타났다. 화를 내는 신부에게 그가 말했다. "왜 화를 내는거요. 우리는 분명히 결혼했고 사랑하는 사이잖소. 생활비도 보냈는데 무엇이 불만이오"
한 어린이가 학교에 입학했다. 그런데 이튼날부터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가정방문한 교사에게 어머니가 말했다. "우리 아이는 학교에 가지 않아도 돼요.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걸요" 이렇듯 형식과 규칙을 무시하면 세상은 난장판이 되고 말 것이다.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고전 14:40)
합리적인 사고는 이성적인 질서의 실천 방법입니다. 합리적인 사고는 명석한 판단을 도출합니다. 우리가 명석한 판단을 못하는 이유는 첫째로는 우리의 사고 체계가 확립되지 않았기 때문이고 둘째는 우리가 판단해야 할 사안이 복잡하기 때문입니다. 사안이 아무리 복잡할지라도 합리적으로 풀어나가면 최선의 결과를 가져오게 되고 사안이 아무리 단순할지라도 비합리적으로 접근하면 큰 실수를 저지르게 됩니다.합리적인 사고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사고하는 주체인 자기 자신도 그 합리적 사고의 결과에 순응해야 되는 것입니다.

22. 상식과 질서

이탈리아와 프랑스 국경지대에 몬데인이라는 곳이 있다. 그곳을 아는 사람들의 뇌리 속에서 비극적인 장소로 기억되는 곳이다.
2차대전 당시 국경을 지키던 1200명의 프랑스 군인들이 크리스마스 특별휴가를 받아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기차를 탔다. 너무나 많은 군인들이 올라타 발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다. 사람들은 기쁨에 들뜬 나머지 빨리 가자고 소리쳤다.그러나 기관사는 “얼마 못가서 급경사와 급커브가 있는데 이렇게 많이 태운 채 가면 대형사고가 날 겁니다”라며 기차를 출발시키지 않았다. 군인들을 인솔하던 장교 중 하나가 기관사에게 총을 빼들고 “당장 이 기차를 움직이지 않으면 총을 쏘겠다”고 위협했다. 그 장교는 기관사가 나라를 지키기 위해 수고한 자기들을 무시한다고 생각한 것이다.기관사는 할 수 없이 기차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얼마 안가 급경사가 나타났다. 기차는 점점 더 빠른 속도로 내려갔다. 결국 기차는 급커브를 돌지도 못하고 탈선, 엎어지고 말았다. 전장에서도 목숨을 지켰던 군인들이 어처구니 없이 목숨을 잃었다. 상식과 질서를 무시한 한 장교의 고집 때문에 수많은 생명이 이슬처럼 사라진 것이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신나게 달리다가 삶의 급커브에서 제대로 돌지 못하고 사고를 만난다.
/김의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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