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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 칼빈, 쯔빙글리에 대한 이해

by 【고동엽】 2009. 4. 3.

1, 루터파와 칼빈파 그리고 쯔빙글리파 의 다른 점과 공통점

1, 루터파와 칼빈파 그리고 쯔빙글리파 의 다른 점과 공통점

구 분 루 터 칼 빈 쯔 빙 글 리


국적



독일


프랑스


스위스


신학의 중심



그리스도 중심


하나님의 절대적 중심


하나님 의지 중심


신학의 출발


이 신 득 의


만인제사장


하나님의 절대주권 사상


예정 사상


이 신 득 의




성 찬 론



공 재 설


영적 임재설


기 념 설




국가와의 관계



교회는 국가에 복종


국가와 교회의 분리
민주 헌법, 교권 배격


교회의 정치

. 장로 정치 .


2, 다 개혁자들인데 어디서 나누어지게 됐는지? 역사적 배경은?
교회의 통일을 방해한 가장 큰 문제는 역시 성찬에 대한 이견들 때문이었습니다.


1529년 말브르그에서 루터와 쯔빙글리가 프로테스탄트의 연합을 위해 서로 만났으나 성찬에 대한 신학적 이해를 좁히지 못하였습니다.
이 성만찬 논쟁으로 루터파, 칼빈파, 쯔빙글리파로 구별하게 되었습니다.
1) 루터파...독일과 동북 유럽
2) 칼빈파...제네바를 중심으로 불어를 사용하는 프랑스,스코틀랜드,네덜란드
3) 쯔빙글리파...쮜리히를 중심으로 독일어를 사용하는 스위스와 남부 독일

3, 칼빈파는 루터파와 쯔빙글리파의 중간이다 ?
이 표현은 ''성찬론'에서 연유한 질문인 것 같습니다,

1) 공재설(共在說, consubstantiation)
로마 천주교의 화체설은 성찬의 떡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실제적으로 변한다고 주장하는 반면, 루터의 공재설은 그것들의 본질이 변하지는 않고 대신 그리스도가 그 요소들의 "안에, 함께, 아래에, 몸으로" 임재하신다고 주장한다.

2) 영적 임재설(靈的 臨在說, spiritual presence)
칼빈의 견해로 성만찬의 현장에 말씀과 성령의 사역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영적으로 임재 한다는 해석이다. 그에 의하면 성례전은 "눈에 보이는 징표로서 우리에게 영적인 모든 일을 계시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외부적 증명인데, 그것은 하나님의 여러 약속을 우리 마음에 한층 더 강하게 각인하여 우리가 그 약속을 보다 더 확실하게 믿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3) 기념설(記念說, memorialism)
성만찬을 단순한 하나의 기념으로 해석하는 쯔빙글리의 견해로 개혁교회에 큰 영향을 끼쳤다. 쯔빙글리는 고린도전서 11장을 근거로 성만찬에 대해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기념하는 그 이상의 뜻이 없다라고 말한다. 즉 성만찬은 죄의 대속물로 죽으신 그리스도의 희생을 기념하는 것이다.

<참고> 루터, 칼빈, 쯔빙글리의 신앙
1)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
1483년 11월 10일 독일의 아이스레벤에서 출생한 루터는 사제품을 받고 비텐베르크에서 성서학을 가르치는 중 ‘탑의 체험’을 하고 은총의 중재가 신앙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게 된다. 그의 종교개혁의 불씨는 1517년 비텐베르크 대학 성당 문에 게시된 대사에 대한 '95개항'으로, 알브레히트 대주교는 루터를 교황청에 이단자로 고발하였다. 교황은 루터를 지지하던 작센의 선제후 프리드리히의 요청을 받아들여 1518년 10월 아욱스부르크의 제국의회에서 심문을 받도록 배려해 주었다. 그러나 루터는 자신의 명제철회를 거부하였다. 그래서 1520년 레오 10세는 Exsurge Domine 교서를 통해 루터의 모든 저서를 불태우도록 명령하였다. 그러나 루터는 그해 12월 10일 교회법률서와 파문위협의 교황칙서를 소각함으로써 교회와의 단절을 공식화하였다. 한편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카알 5세는 보름스 제국의회(1512)에서 루터와 그의 추종자들에게 국가적 법익을 박탈하고 추방령을 내리는 ‘보름스 칙령’을 공포하였고, 반면 선제후 프리드리히는 루터를 바르트부르그성으로 데려가 보호하였다. 루터가 바르트부르그에 은거해 있는 동안 독일은 제국의 기사들의 항거(1522)와 지방 영주들에 대한 농민의 봉기로 개혁의 요구가 강하게 일게 되지만 루터는 과격한 지도자들을 비난하면서 독자적인 중도적 개혁운동을 전개하였다.이와 같이 농민들의 요구에 대한 루터의 소극적인 태도와 농민들에 대한 탄압에의 권고는 많은 지지세력을 상실하였고, 상당수의 지지자들이 재세례파로 떨어져 나가게 되었으며, 농민들의 투쟁을 종식시키기 위한 루터와 지방 영주들과의 동맹은 결국 프로테스탄트적 영방교회를 형성하게 된다. 한편 가톨릭을 지지하는 제후들은 1524년 ‘라티스본 동맹’을 맺고 루터파의 확산을 저지하려 하였고, 또 루터파를 지지하는 제후들은 1526년 6월 ‘토르가우 동맹’을 맺어 루터파를 보호하고 있었다.그래서 1526년 제1차 슈파이어 제국의회는 ‘그 지역의 종교는 그 지역 통치자의 종교로’하는 지역별 종교선택의 자유의 원칙이 잠정적으로 결정된다. 그러나 1529년 터어키의 공격에 대비하고 신교운동의 확산방지를 위한 제2차 슈파이어 제국의회가 개최되었고 제국의회에서는 루터를 이단으로 정죄한 보름스 칙령을 재확인하고 제1차 슈파이어 제국의회의 결정사항을 번복하면서 ‘로마 가톨릭 신앙만이 유일한 합법적 신앙이기에 모든 이는 가톨릭 신앙에 남아야 한다’고 결정하게 된다. 왜냐하면 이 때에는 정치적 상황이 제1차 슈파이어 제국의회 때와는 달리 불화 관계에 있던 황제와 교황은 화해를 하였고, 황제와 프랑소와 1세도 평화조약을 체결한 후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결정에 대하여 5명의 제후들과 14개 도시의 대표들이 루터를 지지하면서 제국의회의 결정에 항의하였고 슈말칼덴 동맹을 체결하게 되고 카알 5세는 슈말칼덴 동맹자들에게 선전포고를 하여 1547년 4월 엘베 강변의 뮐베르크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고 프로테스탄트의 헤센의 필립과 선제후 요한 프리드리히를 사로잡게 되어 공의회를 개최하여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으나 교황 바오로 3세와 황제 카알 5세와의 불화는 갖기로 한 공의회 개최를 어렵게 하였으며, 결국 황제는 종교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생각으로 1547년 아욱스부르크 ‘무장 제국의회’에서 자신의 해결 방안을 지시하였는데 1548년 ‘아욱스부르크 잠정 규정’을 잠정적으로 통용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영주들의 혁명’이 일어나 황제는 동생 페르난디에게 종교문제를 맡기도 물러났다. 그리고 페르디난디는 혁명세력과 1552년 파싸우 휴전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양측 종파들에게 상호 간의 관용을 보증하였다. 그리고 1555년 9월 아욱스부르크 제국의회에서 종교협정이 체결되었다. ‘그 땅이 속한 자에게 종교도 속한다’는 지역별 종교선택의 자유의 원칙이 최종 결정되었다. 이로써 독일에서는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동등권이 인정되었으며, 백성들은 영주의 종교를 따르거나 다른 곳으로 이주해야 하였다. 한편 루터는 1546년 2월 18일 개혁운동을 멜랑히톤에게 맡기고 죽었다.


2) 존 칼빈(John Calvin, 1509-1564)
루터와 쯔빙글리와 더불어 종교개혁의 3대 인물로 불려진다. 루터나 쯔빙글리 보다는 한 세대 후배이지만 제네바를 중심으로 전개한 그의 개혁운동은 전 유럽에 큰 영향력을 미쳤다. 루터가 프로테스탄트의 길을 개척했다면 칼빈은 프로테스탄트의 신학을 집대성하였다. 칼빈은 1528년 오르레앙 대학에 입학하여 인문주의를 배웠다. 특히 성서를 프랑스어로 번역했던 인문주의자 올리베탄(1506-1538)에게서 성서의 중요성을 인식하였다. 1533년 파리로 돌아온 칼빈은 친구 니콜라스 콥이 파리대학 학장으로 취임하는 연설문을 작성하는데 영향력을 행사하였고 이 연설문은 소르본 대학과 그 신학자들을 비판하였고, 에라스무스와 루터의 교회개혁운동에 동조하였으며, 복음주의적 신앙을 강하게 표현하였다. 그로 인해 칼빈과 콥은 파리를 떠나게 된다. 그리고 그는 아버지가 마련해 준 성직록을 거부하고 가톨릭 교회와의 결별을 표하고 슈트라스부르그를 거쳐 바젤로 도피하여 프로테스탄트 최고의 신학적 저서인 ‘기독교강요’를 발간(1536)한다. 그런후 종교적 관용정책을 쓰던 슈트라스부르그로 갈 생각으로 제네바에 도착한다. 거기에서 빌헬름 파렐의 제네바의 개혁을 도와달라는 부탁을 받게 되었고 개혁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1536년 10월 로잔에서 가톨릭측과의 신학토론을 벌이고 1537년 ‘제네바 교회의 조직과 예배에 관한 조례’를 시의회에 제시하여 채택된다. 그래서 제네바 시의회는 모든 주민이 ‘신앙고백서’에 대하여 서약하도록 하였으나 주민들의 저항이 강하게 일어났고 1538년 새 시의회가 선출되자 칼빈과 파렐은 제네바에서 추방되었다. 그러나 혼란이 가중되어 1540년 시의회의 요청으로 제네바에 돌아온 칼빈은 1541년 새로운 교회제도를 조직을 위해 ‘교회법규’를 시의회에 제출하여 채택되게 된다. 칼빈은 국가의 독립성을 인정하면서도 교회와 긴밀한 관계 하에 두었고, 제네바시를 하나의 교회적 구조로 이해하였다. 그래서 제네바시의 질서를 유지하고 시민들의 생활을 감독하고 정화하기 위해 목사와 장로들로 구성되는 감시위원회, 즉 ‘종무국’(宗務局)을 구성하였다. 그래서 1555년까지 엄격하게 조직된 신국(神國)이 제네바에 형성되었고, 제네바는 개혁된 교회의 중심지가 되었다. 1559년 칼빈은 제네바 신학교를 설립하여 거기에서 배출된 수많은 설교가들은 전유럽에 칼빈의 교회제도, 신학과 사상 등을 전파하였다. 그리고 그의 종교개혁은 프랑스로 전파되어 박해에도 불구하고 1559년 최초의 국가 종교회의를 파리에서 개최하여 칼빈이 기초한 ‘갈리아 신조’를 채택하고 ‘위그노파’(Huguenots)로 불리게 되었다.


3) 쯔빙글리(Ulrich Zwingli 1484-1531)
흔히 종교개혁의 ‘제3의 사나이’라고 불린다. 그도 성서, 신앙, 의화 개념이나 새로운 교회상의 정립, 정통교회에 대한 투쟁 등에 있어서 루터나 칼빈, 재세례파 등과 공통된 기본원칙들을 갖고 있다. 쯔빙글리는 글라루스에서 사목하던 중 군종신부로서 전투에 두 번 참전하고 용병제도에 대해 비판한다. 그리고 취리히에서 사목하면서 에라스무스적인 개념의 설교를 하고 패스트 발병을 체험하게 된다. 그래서 신앙에 대해 더욱 깊이 탐구하게 되었고 1521년 카알 5세와 전쟁 중이던 프랑소와 1세의 스위스에 대한 용병파병 요청으로 다시 한번 용병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 한편 그에게 있어서 결정적인 교회와의 갈등과 분열은 순전히 외형적인 교회법의 위반 때문에 촉발되었다. 1522년 사순절임에도 아인지델른의 사제인 레오 쥬드와 취리히 교회 지도자들이 금육을 지키지 않고 소세지를 먹은 것이 사건의 발단이었다. 그것에 대하여 취리히를 관장하던 콘스탄쯔 주교는 취리히 시의회에 이들의 처벌을 요구하였고, 시의회는 이들을 투옥하고 벌금형에 처하였다. 그래서 쯔빙글리는 먹는 음식을 금지하는 교황의 법령에 대하여 복음에 의해 선포된 자유를 억압하는 행위라고 비난하였으며, 하느님의 말씀을 제대로 전달하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오직 성서만이 필요하며, 교회, 공의회, 교황이 하느님의 말씀을 정의․해석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은 행위라고 주장하였다. 콘스탄쯔의 주교가 쯔빙글리를 취리히 시의회에 고발하자 1523년 제1차 토론회에서 쯔빙글리는 히브리어․희랍어․라틴어 성서와 자신의 개혁안인 ‘67개 조문’을 근거로 논쟁하였다. 시의회는 쯔빙글리의 ‘67개 조문’에서 나온 개혁안을 채택하였고, 칸톤(Canton)내의 모든 신부들에게 실행하도록 명하였으며 시의회는 4차에 걸친 토론회를(1523-1524)통해 미사제도는 인정하되 성상폐지론은 결정하였으며 신자들의 성가, 오르간 음악 등, 성서에 명시되지 않은 모든 예배수단을 제거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미사와 관련된 가톨릭 교회의 모든 가르침을 반대하며, 새로운 양식에 의한 성찬식을 거행하였다. 한편, 취리히 시의회가 개혁을 더디게 진행하자 일부(재세례파)가 과격하고 급진적인 개혁을 요구하면서 과격한 개혁운동을 전개하자 쯔빙글리는 그들과 결별하였다. 그리고 쯔빙글리는 루터와도 성만찬 논쟁을 일으키게 되는데, 루터는 성찬식에 상징적 성격이 있다는 것과 영적인 의미의 먹고 마심을 물론 전제하고 있었으나, 이와 동시에 그리스도께서 성찬에 실재(實在)함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쯔빙글리는 이러한 주장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성찬식이 순전히 영적․상징적 성격을 띠고 있음을 주장하였다. 이로써 루터와 쯔빙글리는 입장을 달리하는 교파로 나뉘어졌다. 그리고 1529년 가톨릭 동맹주들이 오스트리아 합스부르그가의 페르디난드 공작과 연맹을 맺자 쯔빙글리는 카펠로 진군하여 가톨릭 속한 주들은 페르디난드와 맺은 동맹을 취소할 것과 복음적 교회들의 존립을 허용할 것을 규정하는 제1차 카펠 평화조약을 체결하였다. 그러나 가톨릭 동맹주들이 오스트리아와의 동맹관계를 취소하지 않자 쯔빙글리는 경제 봉쇄령을 내렸다. 이에 반대하여 가톨릭 주들은 1531년 취리히 주의 카펠을 침입하였고 가톨릭측이 승리하여 2차 카펠 평화조약이 체결된다. 조약 내용은 프로테스탄트들은 더 이상 영토확장을 하지 않고, 신교 안에 있는 소수의 가톨릭파들에 대해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여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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