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을 바라보면 사랑을 갈망하게 됩니다 요일4:17-21
대만 제자훈련 세미나에서 만난 중국인 목사님들,
처음 만났는데도 그렇게 사랑스럽다고 느꼈습니다. 신기한 일이었습니다.
서로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제자훈련 섬김이로 가셨던 교우들도 대만교회 교인들과 서로 연합하고
사랑하는 모습이 너무나 흐뭇하였습니다.
사랑은 성도가 누리는 가장 큰 축복입니다.
△처음 교회에 오신 새가족이 주일에 교회에 오셨는데,
처음이라 두리번 거리자 안내하시는 교인 한 분이
“어떻게 오셨어요?”하고 묻더랍니다.
그 말을 듣고 돌아서는데 눈물이 핑 돌더랍니다.
안내하시는 분은 그런 의도가 없었겠지만 참 센스가 없으셨던 것 같습니다.
주일에 교회에 왔는데, 어떻게 오셨냐니요?
이처럼 처음에는 서먹하던 교인들 사이가 친해지게 되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사랑하게 되면 어떻겠습니까?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주 예수님께서 “원수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진짜 사랑이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십자가에서 우리는 이 사랑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도 하나님처럼 사랑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요한 사도는 사랑의 완성이라고 했습니다.
요한일서 4:17절에서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되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십자가의 사랑을 부어주시고,
우리도 하나님을 목숨을 다하여 사랑하고,
이웃도 하나님 처럼 사랑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의 완성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소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정말 하나님처럼 사랑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죠. :17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처럼 사랑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홍해를 누가 가르셨습니까? 하나님이셨습니다.
누가 물을 포도주로 만드셨으며, 누가 오병이어로 5천명을 먹이셨으며,
누가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습니까? 예수님이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신 분은 누구이십니까? 예수님이십니다.
우리를 지옥에서 건져 천국 백성이 되게 하신 분이 누구이십니까?
예수님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하나님처럼 사랑하게 만드실 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믿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처럼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하나님처럼 사랑하는 것이 그렇게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처럼 사랑하는 것이 밥을 먹는 것 보다 더 중요하게 여긴다면
하나님처럼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지금까지는 왜 그렇게 하지 않으신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안하신 것이 아니라 못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사랑하기를 갈망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에서 하나님의 마음의 아픔을 느꼈습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든지 우리가 사랑하도록 하실 수 있지만
우리가 사랑을 갈망하지 않으면 아무리 하나님이시라도
우리가 사랑하게 하실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처럼 사랑하기를 밥먹는 것 보다 더 갈망하십니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기 때문에
갈망하지 않습니다.
사실 우리로서는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없습니다.
죽을 때 가서야 깨닫게 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미리 가르쳐주셨습니다,
죽을 때 가서 깨달으면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처럼 사랑하는 것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하다는
것을 누구나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영생이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처럼 사랑하며 산 자는 심판 날에 담대하다고 했습니다.
영생을 얻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17절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되었다는 사실은 이 점에 있으니,
우리로 하여금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는 것입니다.
어떤 교우들은 죽을 때 편안하게 죽고 싶다고 기도부탁을 하시지만
사실 더 중요한 문제는
“두려움 없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해주세요.” 하는 기도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담대해지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사신 대로
또한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렇게 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지 않은 사람은 두려워서 심판 날을 견딜 수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것입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속성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처럼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죽고 난 다음 어떤 처지에 빠질지
주님은 눅16장에서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를 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부자의 죄가 무엇입니까? 성경에 특별한 죄가 나오지 않습니다.
날마다 잔치하고 산 것이 죄입니까?
부자의 죄는 하나님처럼 사랑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부자에게도 사랑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얼마나 간절히 형제들이 지옥에 오지 않게 해 달라고 간청했습니까?
그에게도 사랑은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족이나 형제는 사랑했지만,
집 앞에서 굶어 죽어가는 나사로에게는 사랑이 가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자의 죄였습니다. 여러분, 심각하게 자신을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분명한 것은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요한 사도가 요한복음에는 분명히 “믿음”으로 영생을 얻는다고 썼습니다.
요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그런데 이 말은 유대인과 이방인, 구별없이 누구든지
예수님이 구주이심을 믿으면 영생을 얻는 길이 열렸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율법이나 혈통이 아니라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요1:12-13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그런데 요한 서신에서는 믿음을 “사랑”으로 바꾸었습니다.
요일 3:14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이것은 거짓말쟁이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누가 거짓말쟁이라는 것입니까?
예수님을 믿는다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입니다.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말만 믿는다고 했지 실제로는 믿지 않는 자입니다.
▲20절 ... 자기 형제자매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보이는 자기 형제자매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전도할 때, 믿음으로
사망에서 영생으로 옮겨졌다고 가르쳐야 합니다.
그러나 믿는 자들에게는 사망에서 영생으로 옮겨진 증거,
곧 사랑이 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이것은 다른 기준이 아닙니다.
요1:12절에서 ‘분명히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을 믿음’이라 말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았을 때는 믿고 영접하여야 하지만
예수님을 믿은 후에는 예수님께서 그 사람 안에 오셔서,
그의 삶을 바꾸셨다는 증거가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인 거죠.
여러분, 누군가를 미워하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인도 의견 대립이 있을 수 있고 화를 낼 수 있고, 싸울 수도 있죠.
그러나 미워하고 살 수는 없습니다. 형제를 미워한다는 것은
자신이 영적으로 매우 위험한 상태임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미움의 영은 사탄입니다.
요일3:15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베드로는 사도 바울로부터 공개적으로 책망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갈2:11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할 일이 있기로
내가 저를 면책하였노라
이 일은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의 명예에
심각한 손상을 입는 일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사도 바울을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사랑하였습니다.
벧후3:15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하나님처럼 사랑하여야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18절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쫓습니다.
두려움은 징벌과 관련이 있습니다.
두려워하는 사람은 아직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완전한 사랑이란 하나님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라는 증거가 있으니 세상에서 좋은 것 다 빼앗기고
바보 소리를 들어도 마음이 평안합니다.
그러나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세상 온갖 것을 다 가지고 누려도
마음이 불안합니다. 죽음의 순간이 다가오는 것이 두려운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두렵기만 하고 가슴이 뛰어서 견딜 수 없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일평생 편안하게 잘 살았으면 뭐하겠습니까?
그러므로 가정이나 교회에서나 옳고 그른 것도 살펴야 하지만
사랑을 놓치면 안되는 것입니다.
△단기 선교 여행을 가는 것을 부모가 반대합니다. 그래서 부모와 싸웠습니다.
선교회장이 일을 처리하는 것이 상식에 어긋났습니다.
그래서 회장과 다투었습니다.
세례냐, 침례냐 하는 문제로 논쟁을 하다가 서로 다투게 되었습니다.
항상 명심해야 할 것은 언제나 사랑이 제일이며, 싸우지 않아도
하나님의 뜻대로 처리할 수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성도들 중에 봉사 열심히 하고 성경을 많이 읽고 기도 열심히 하면,
하나님처럼 사랑하지 못해도 교회 중직이 될 수 있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죠.
그러나 사도 요한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기억하라고 했습니다.
▲21절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자매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계명을 주님에게서 받았습니다.
마22:37-40절에서 예수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전13:2절에서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요” 라고 했죠.
이처럼 성경에 하나님처럼 사랑이 얼마나 중요하지 말씀하고 있는데도
왜 하나님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생각이 희미할까요?
천국, 지옥, 심판에 대하여 듣기만 했지
자신의 현실 문제라고 여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천국을 바라보면 누구나 사랑만 하게 됩니다.
미워하고 원수맺고 싸우고 살 사람이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아프리카 싸이어에서 선교사로 평생을 사역하신 헬렌 로스비어 선교사는
영국 캠브리지대학 출신의 여의사입니다.
그는 선교지에서 일어난 반란 때 반란군에게 겁탈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끝까지 그곳에 남아서 미워해도 모자랄
그들을 위하여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희생]이라는 책을 써서 세계적인
강사가 된 그녀의 얼굴은 보는 이들마다 천사를 연상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혹시 여전히 하나님처럼 사랑할 자신이 없어서 걱정하는 분이 계십니까?
아닙니다. 걱정이 왠 말입니까? 오히려 이기적인 여러분을
하나님처럼 사랑하게 하실 주 예수님에게 기대를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성령의 열매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사랑하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갈5: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우리가 회개해야 할 것은 사랑이 없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게 해 달라는 갈망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을 갈망하면 반드시 주님이 사랑하게 해 주십니다.
고전12:31절에서 사도바울은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하시고는
고린도전서 13장 사랑장을 말씀하셨습니다.
철저히 이기적인 우리가 하나님처럼 사랑할 수 있는 길은
오직 십자가의 주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 뿐입니다. 예수님입니다. “예수님!”
△[The Passion of Christ] 영상 한 부분을 보시겠습니다.
이 영상을 처음 보는 분들은 충격을 받고 회개하며 또 감사하며
변화된 삶을 살아야겠다.. 결단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여러번 이 영상을
본 분들은 ‘또 저 영상을 보여주시네.’ 하실 것입니다.
놀라운 은혜를 받아도 시간이 지나가면 다 흐릿해지는 것 같습니다.
처음 십자가 복음을 들었을 때, 어떤 사람도 다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1년이 지나고 10년이 지나고 30년이 지나면 달라집니다.
1만 달란트(5-6조원) 탕감받은 자가 어떻게 1백 데나리온(천만원) 빚진 자를
용서하지 못할 수 있습니까?
탕감받은 지 오랜 세월이 흘렀다고 생각해 보면 이해가 됩니다.
그렇지만 영상으로 보는 예수님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바라본다면 어떻겠습니까?
17절 말씀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대로 또한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렇게 살기 때문입니다.” 했는데,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께서 사신대로 살 수 있겠습니까?
영상에서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바라보시는 장면을 기억해 보십시오.
정말 예수님을 그렇게 바라본다면
어찌 예수님처럼 사랑하며 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십자가 사건은 과거 한 번의 사건이 아니라
우리에게는 매 순간 순간의 십자가가 되어야 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습니까? 십자가에 달리신 주 예수님을
24 시간 바라보는 자는 그렇게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미움과 판단이 계속하여 일어납니다.
저절로 사랑만 하게 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24 시간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을 바라보는 중에만, 예수님 안에 거하는 중에만 사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나는 죽고 예수로 살며’
24 시간 예수님을 바라보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까?
천국과 지옥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처럼 사랑하며 살고 싶은 갈망이 일어나게 마련입니다.
하나님의 엄청난 사랑을 받았으면서도 하나님처럼 사랑하지도 못하고
그렇게 사랑하게 해 달라고 구하지도 않는 너무나 위험한 모험을
이제는 중단해야 합니다.
하나님처럼 사랑하는 것이 영생의 길입니다.
그리고 진정한 축복의 길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담대한 삶을 사는 비결입니다.
우리를 하나님처럼 사랑하게 해 주시는 주 예수님이 왕이심을 고백하며
24 시간 주 예수님을 바라보고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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