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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기 목사 설교 101편~110편

by 【고동엽】 2023. 1.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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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

선택> 제 목 :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뜻

자료원 : 여의도순복음교회 기하성 조다윗목사

사람들은 하나님의 전인격적인 성품에 관하여 분명한 지식이 없을때

구 절 : 창세기 1:1-31

 

 

가 많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 선생은 하나님의 신선이 그 만드신 만

물을 통하여 분명히 나타나 있다고 로마서에 기록하였습니다. 그러므

로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신 창세기의 과정을 살펴봄으로 우리 하

나님의 우리에 대하신 전체적이고도 근원적인 태도와 성품을 살펴보도

록 하겠습니다.

 

1. 빛을 지으신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어둡고 캄캄한 우주 속에 광대하고 찬란한 빛을 지으셨

습니다. 여러분, 어두움이란 절망, 죽음, 고통, 낭패와 마귀를 상징합

니다. 아담의 타락이후 마귀는 이 어두움의 권세를 가지고 인류를 지

배해왔습니다. 고로 죄와 질병, 저주와 절망과 죽음 등은 마귀의 무기

인 것입니다. 마귀는 어두움의 사자로서 어두움의 권세를 가지고 이

땅을 다스린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께서는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은 어두움을 짓지 아니한 분으로 어두움이 지배하고 주장하는 세계 속

에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빛을 던져주

는 성품을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빛은 무엇을 상징합니까? 희망을 상징합니다. 생명을, 해방을, 성공

을 의미합니다. 또한 빛은 축복을 의미하고 그 무엇보다도 우리 주 예

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십자가의 보혈을 통해 우리를 어두

움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당신의나라, 빛의 나라로 옮겨주셨습니다. 그

러므로 태초의 어두움 속에서 빛이 있으라고 하신 하나님께서는 오늘

날 마귀의 캄캄한 집에 들어가는 우리들을 향해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

는 것입니다.

 

그 빛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이며 우리가 이

그리스도를 모셔들이면 우리는 어두움의 나라에서 건져지어 빛의 나라

로 옮겨진 것을 알아야만 되는 것입니다. 어두움의 나라, 죽음 절망

슬픔 고통 괴로움에서 건져내어져 용서받은 의인이 되며 성령으로 충

만함을 받아 믿음 소망 사랑으로 넘쳐나게 됩니다. 또한 모든 연약을

치료받고 아브라함의 축복에 참여하며 천국의 영광과 소망에 참여하는

우리들이 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우리 주님은 어두움에서 '빛이 잇으라'고 명하셨던 것입니

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면 어두움의 권세에서 빛의 나라로 옮겨진

다는 것을 알고 그리스도를 믿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

다.

 

2. 궁창을 지으신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바다 아래 물과 하늘 위의 물을 가르시어 하늘이 나타

나게 하시고 궁창이 있으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혼돈이 꽉 들어찬 이

우주속에 비로소 푸른 하늘이 드러났습니다. 찬란한 하늘이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사람들은 절망상태에 있을 때 하늘이 캄캄하다고 말합니

다. 하늘이 보이지 않을 때 희망은 사라지고 방향감각을 잃고 마는 것

입니다.

 

 

 

 

오늘날 비행기를 타고 가는 사람이나 항해하는 사람은 끊임없이 하늘

을 쳐다봅니다. 북극성을 보고 그들이 있는 위치와 방향을 알아내기

때문입니다. 하늘이 닫혀 버리면 희망이 없을 뿐 아니라 삶의 방향감

각도 다 잃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자 그들이 가슴 속에 하늘이 닫혀버리고 말았습

니다. 그들의 영혼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로 인간은 캄캄한 절

망을 가슴이 안고 살게 되었으며 어디서 와서 왜 살며 어리로 가는지

모르는, 방향감각을 잃은 채 우주 속에 표류하는 비극적인 존재가 되

고 만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늘이 있으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

나님은 우리의 가슴 속에 하늘이 들어오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회개하

고 예수를 믿으므로 우리 영혼이 되살아 나자 하나님과 교통이 이루어

지고 우리의 마음속에 하늘이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신 사람 속에는 모두 다 하늘나라가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계심을 깨닫고 삶의 목적과 가치를 깨닫게

되는 것이고 장차 육신의 장막집을 벗어버리면 하나님과 영원히 살 것

이라는 확실한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 아래로 타락하고 영적으로 죽어서 물질 중심으로 살고

육적으로만 되어 버리는 인간 속에 하나님께서는 하늘나라를 주심으로

말미암아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게 만들어 주시고 하나님께 찬

미와 감사를 드리고 섬기며 사는 신비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시는 것입

니다.

 

3.육지를 만드시고 각정 열매 맺는 나무와 풀이 나게 하신 하나님

혼돈의 세상,윤리의 도덕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세계 속에서 하나

님께서는 우리의 삶에 분명히 우리가 설 수 있는 육지를 주신 것입니

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구원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혼돈 속에 있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

로 말미암아 확실하게 일어설 수 있는 발판을 얻게 된 것입니다. 우리

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의지하고 일어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총속에 선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확실한 하나님의 은총의 땅 위

에 서서 살면서 이제는 열매맺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니 열매를 만드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성경도 하나님은

농부요,그리스도는 포도나무요,우리는 가지라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

는 예수 그리스도께 붙어있는 가지로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의 삶

속에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육지가 생기고 그곳에 열매 맺는 나무와 풀이 생겨난 것처럼 우리가

은혜의 땅 위에 서 있으면 이제 은혜의 땅에서 그리스도 포도나무의

가지가 된 우리들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맺는 삶을 살아야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열매를 맺어야 합니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

아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되는 것입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와 같은 그리스도를 믿음으

로 성령께서 주시는 열매를 맺도록 우리는 간구하고 기도해야 하는 것

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계명을 지키는 삶의 열매를 우리의 생활 속에

서 실천적으로 맺어야 합니다.

 

 

 

 

나아가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사람이니 열심히 뜨거운

마음으로 이웃에게 전도해서 많은 영혼을 주께로 거두어 드리는 구원

의 열매를 맺어야 하는 것입니다. 열매맺지 않는 나무는 주님께서 저

주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감람산 언덕에서 열매가 없는 무화과 나무

를 보시고 그 자리에서 저주하셨습니다.

 

오늘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종교로써 예수를 믿고 입술로만 '주여,주

여' 하면서 은혜의 땅 위에서 열매를 맺지 않습니다. 열매없는 삶을

삽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로부터 저주받은 바 되고 버림받은 바 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러한 교회가 바로 오늘의 구라파 교회인 것입니다. 구라파는 역사

적으로 볼때 그리스도를 믿고 크게 축복을 받았습니다. 지금도 도시마

다 한 가운데에 교회당이 우뚝 서있고 그들은 관습적으로 기독교 문화

에 젖은 삶을 살지만 그 은혜의 땅 위에 열매는 전혀 없습니다.

 

성령의 열매도 없고 계명을 지키는 열매도 없고 전도하는 열매도 사

라진 지 오래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미암아 오늘날 하나님께 심판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열매를 맺어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즐

거워하시는 것입니다.

 

4. 해와달과 별들을 지으신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가슴 속에도 해와 달과 별들이 떠오르기를 원하

십니다. 해는 지혜를 상징합니다. 어둡고 캄캄한 무지에서 해와 달과

같은 지혜를 주셔서 자유와 생명을 넘치게 얻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

님께서는 우리가 무지한 동물과 같은 인생이 되길 원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나와서 지혜를 얻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바로 지혜의 말씀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면 하나님께

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지혜있는 개인이나 지혜있는 민족은 머리가 되고 꼬리되지 않고 위에

있되 내려가지 않습니다. 인간에게 다가오는 여러가지 문제들을 해결

하고 어두움에서 광명한 빛을 가져오는 것이 지혜인 것입니다. 그러므

로 태양은 바로 지혜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태양을 지으신

것처럼 우리의 소우주의 가슴 속에 태양을 찬란하게 비추어서 무지의

어두움을 제하여 주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또한 우리의 마음속에 별과 같은 총명을 주시길 원하시는

것입니다. 별은 총명을 상징합니다. 총명은 깨달음을 주어 참과 거짓

을 분명케 하고 모든 사람을 밝히 이해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활 속에서 모든 사물을 밝히 이해하고 어두움과 빛을 분별

하며 죄와 의를 분별하고 사단과 하나님의 나라를 분별하여 올바른 삶

을 살게 하는 이 총명이 우리에게 얼마나 필요한지 모릅니다. 총명한

개인, 총명한 민족이 되어야 이 어두움의 세계 속에서 살아남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 마음속에 총명을 주시길 원하시는

것입니다.

 

달은 감정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달은 믿음, 소망, 사랑,동정 같은

우리 마음속에 참으로 있어야 할 삶의 향기를 상징합니다. 아무리 지

혜있고 총명이 있어도 그의 가슴속에 믿음도 없고 소망도 없고, 사랑

도 없고 동정이 없으면 그는 하나의 기계에 불과한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됨은 그 가슴 속에 훈훈한 인정과 사랑과 동정과 믿음과

그리고 꿈을 주는 소망이 있을 때에 참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

와같은 마음을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시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지혜와

총명 그리고 아름다운 감정을 주님께서 우리에게 만들어 주시기를 원

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을 알고 하나님께 구해야 될 것입니다.

 

5. 새들과 물고기들을 지으신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공중에는 새들로 들어차고 물 속에는 물고기로 들어차

고 그리고 그냥 있으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난하게 한다

고 생각하며 가난하고 헐벗으며 사는 것이 참으로 하나님의 섭리를 좇

는 좋은 신앙생활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섭리에 너무나 어긋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새들

과 물고기들에게도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저들은

예수께서 헐벗고 가난하게 사셨으니 우리도 그 발자취를 따라가지고

말합니다.

 

그러나 바울 선생은 고린도후서 8장9절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

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가난과 고통은 우리를 가난과 고통과 낭패

와 실망에서 구원하시기 위한 대속적 고통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섭리는 생명으로 넘치게 하고 풍성하게 하는 것입니

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번창하고 더 번창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번창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갈 때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며 하나님을 향하여 입을 넓게 열고 기도해

야 하는 것입니다.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고 말씀하신 것

입니다. 하나님은 채우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윗은 '야웨는 나의 목

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같이 계신

데 왜 우리가 영육 간에 부족함이 있다고 생각합니까? 우리는 생각을

바꿔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넘

치도록 능히 하시는 하나님을 찬미하며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언제나

긍정적이고 적극적이며 창조적인 생각을 가지고 살아야 되는 것입니

다.

 

6. 각종 짐승과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공중의 새와 물속의 물고기들로 만족하지 않으시고 더

욱 풍성한 것을 주시기 위해서 땅에 각종 동물들을 가득 채워 생육하

고 번성하게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의 세계는 하늘과 땅과 바닷속이 다

왕성하고 생명이 넘치고 풍성한 것이지, 메마르고 헐벗고 굶주리고 고

갈되고 죽어버리는 이런 세계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 마음속에 깊이 알

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하

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었다는 말은 내용이 하나님이라는 말은 아

닙니다. 인간은 그 안에 하나님이 없으면 텅빈 인간입니다. 껍데기 인

간인 것입니다. 형상과 모양은 가지고 있지만 내용이 없습니다. 내용

이 없는 것은 죽은 것입니다. 영혼없는 몸이 죽은 것처럼 내용에 하나

님을 모시지 않은 인간을 살았다 하나 죽은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참삶을 사는 것은 예수를 구주로 모시고 우리 삶의 내용에 하

 

 

 

나님이 계셔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면 우리

는 영광으로 충만한 삶을 살게되며 영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눈물과 근심과 탄식과 곡하는 것이나 앓는 것이나 죽는 것이 없

는 영광의 세계 속에서 영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신하여 만물을 다스리는 권세와 위엄을 안게 됩니다. 하

나님이 우리 속에 들어와 계시니 우리들은 하나님의 위엄과 권세를 가

지고 우리의 운명과 환경을 다스리며 승리자로서, 지배자로서 살게 되

는 것입니다. 사람은 본래 종으로 지음받지 않았습니다. 타락하므로

본래의 모습을 잃어버렸던 것 뿐입니다.

 

이제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새로운 피

조물이 되어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이 되고 난 다음에는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왕노릇하게 된 것입니다. 영혼이 잘 됨같이 범사

가 잘 되며 강건하고 넘치는 생명 안에서 왕노릇하며 다스리는 삶을

살도록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시고 재창

조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6일동안 만물을 다 완성하시고 제7일에는 쉬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

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품에 들어가

면 쉼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편에서 볼 때 모든 일은 이미 다

끝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주와 만물을 다 완성하셨고 인간

의 구원을 위한 일도 다 완성하셨고 우리의 모든 필요도 이미 주님께

서 다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주님은 알파와 오메가 되시며 처음이 되시고 나중이 되십니다. 하나

님게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를 위해서 예비해 놓으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마음으로 생각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

러나 하나님의 성령이 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니, 성령은 하

나님의 깊은 곳도 통달하신다고 성경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람 편에서는 아무것도 안 이루어진 것 같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처

지와 만물도, 영적인 구원도, 우리의 일생도 이미 다 완성된 것입니

다. 그 가운데서 우리가 주셔서 하나님의 예비한 세계 속에서 영광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창조의 섭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태

도를 우리는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같이 살면서 하나님의 창조의 성품이 우리 생활 속에 넘쳐나

도록 하는 이러한 삶을 계속 살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

다.

 

발행일 : 930912

분 류 : 설교

 

 

 
 
 

제 목 : 큰 기쁨이 있더라

자료원 : 순복음가족 조다윗목사

구 절 : 사도행전 8장 4절-8절

 

 

휘발유가 자동차의 동력이 되는 것처럼 인간이 이세상에서 움직일 수

있는 동력은 바로 마음의 기쁨입니다. 마음의 기쁨을 잃고 슬픔과 우

울증으로 가득찬 사람은 활동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은 사람들과 만

나기를 꺼려하고 집안에만 칩거하며 자살하기도 합니다. 이러므로 기

쁨은 살아갈 수 있는 용기와 힘이 됩니다.

 

기쁨이 크면 클수록 살아갈 수 있는 용기와 힘도 더 많이 생겨 더욱

활발하게 일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마음 속에 있는 기쁨은 우리를 치료하고 양약입니다.

성경 잠성서 17장22절에도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

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나아가서 기쁨은 우리 크리스천의 상표입니다. 아무리 전도를 해

도 전도하는 사람의 생활속에 기쁨이 없으면 열매가 맺히지 않습니다.

전도자의 얼굴과 생활에 기쁨이 넘칠때 그들이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

다. 그 때문에 바울 선생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

노니 기뻐하라"고 명령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어디에서 우리가 위대한 삶의 동력이 되는 기쁨의 원

천을 발견할 수 있을까요? 본문 말씀에 보면 사마리아 성에 있는 사람

들에게 기쁨이 있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작은 기쁨이 아니라 큰

기쁨이라고 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기쁨을 얻게 된 비결을 알아

봄으로 우리도 그와 같은 기쁨을 얻고 인생을 승리로 이끌어 나가야

되겠습니다.

 

1. 빌립의 전도로 사마리아에 기쁨이 왔다.

 

성경은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매 이를

듣고 일심으로 빌립이 말하는 것을 좇은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큰 기쁨

이 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복음을 들을 때 마음에 기쁨이 왔을 까

요?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는 종교 이상이요, 철학이상입니다. 예수님

께서는 구원자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인류의 조상 아담이 타락함으

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마귀의 종이 되어 속박의 세계에 빠

져야 했던 인류를 자유케 해주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오신 것입니다.

 

일정 36년의 속박에서 해당되던 날 우리는 얼마나 기뻤습니까! 하물

며 아담의 타락으로 마귀에게 속박당하고 짓밟히고 잃어버렸던 참 생

명을 예수님께서 다시 찾아주셨으니 어떻게 큰 기쁨이 되지 않겠습니

까? 그 때문에 빌립이 사마리에 가서 그리스도를 전하매 사마리아에

큰 기쁨이 다가온 것처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할 때 그 말씀을

믿고 따르는 사람에게 큰 기쁨이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큰 기쁨이 다가오게 될까요?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으면 영혼이 죽음에서 건져냄을 받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말슴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고

그 영이 죽었습니다. (창 2:17). 영이 죽었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교제

가 끊어진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지막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으면 죽은 영이 살

아나고 영생을 얻게 되며 성령이 거하시게 되어 하나님과의 교제가 회

복됩니다 (롬5:17-19). 아담 한 사람이 죄를지어 모든 사람들이 다 죄

인되었으나 예수 한 사람의 순종으로 모든 사람이 의롭게 되었습니다.

아담 한 사람으로 의의 행동으로 말미암아 생명이 왕노릇하게 되었습

니다.

 

아담이 잃어버린 것을 예수님 안에서 찾았기 때문에 우리는 기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죄를 짓고 불의하며 추악하고 버림을 받아야 마땅

한 우리들, 죄값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종이 되고 마귀의 종이 되어 있

던 우리들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값었이 종살이에서 해방을 얻고 죄 사

함을 의롭다함을 얻고 사망에서 생명을 얻게 되었으니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습니까?

 

또 나아가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으면 우리의 생활 가운데 가

시와 엉겅퀴처럼 솟아난 저주와 수고에서 해방을 얻기 때문에 우리는

기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땅을 저주한 이 이야

기(창 3:17-19) 보다 더 비극적인 이야기는 이 세상에 결코 없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마치 폭풍우처럼 휘몰아쳐 왔고 인간의 모든 희망은

다 사라지고 인간의 삶은 절망의 벽에 부딪쳐야 했습니다. 이때로부터

시작해서 인류는 도적질당하고 죽임을 당하고 멸망을 당하며 전쟁과

전쟁소문 속의 요한한 세상 가운데 피로 젖은 역사의 페이지를 이루고

만 것입니다.

 

이와같은 저주와 절망 가운데서 누가 우리를 건져낼 수 있습니까?

사람은 죄책과 정죄의 절망, 허무와 무의미의 절망, 죽음과 절대 무의

절망에서 산산조각 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인생의 절망에서 누가

우리를 건져줄 수 있습니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소식만이

이간을 저주에서 속량할 수 있는 것입니다.

 

처음 아담이 하나님을 반역하고 이 세상에 저주를 가져왔지만 마지막

아담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대신하여 저주를 짊어지심으로 우리를 저주

에서 해방시켜주셨습니다. 그 때문에 성령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

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

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갈3:13)

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소식을 들을 때 우리는 이마에 땀을 흘려야 먹고 살며, 고통당하

고 괴로움을 당해야 하는 삶에서 새로운 믿음이 생긱고 용기, 희망이

생겨납니다. 그래서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창조적이며 생산적인 믿음

으로 나날이 더 좋아지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셔서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말미암아 우리가 짊어지게 된 무거운 짐을 다 젖혀버리셨습니다.예수

님께서는 분명히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므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을 때 기뻐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나아가서 아담 안에서 인간에게 가장 처절한 절망은 흙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사람이 살면 70이요 강건하면 80입니다. 어떠한 영웅이나

열사라도 이와같은 인간의 운명을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으면 영생을 얻어 흙으로 돌아가는

 

 

 

절망에서 벗어나게 되니 우리는 기뻐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한다고 성경은 분명히 말

씀하고 있습니다. "죽은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

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

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

라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나니"(고전 15:42-45).

 

흙으로 돌아가 영원히 버림받을 수밖에 없는 우리가 예수를 구주로

모셔들이면 영생을 얻고 우리 속에 예수님의 부활의 씨앗이 심어짐으

로써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욕된 것이 영광스러운 것으로, 약

한 것이 강한 것으로, 육의 몸이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와같은 소망을 가졌으니 어찌 우리가 기쁘지 않겠습니까?

 

마지막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으면 아담 안에서 쫓겨난다는

것처럼 슬프고 비참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쫓겨난 방랑의 삶에서

다시 집에 돌아와 영접을 받으면 얼마나 기쁘고 즐겁겠습니까?

 

창세기 3장 23절에는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

어 보내어 그의 근본된 토지를 갈게 하시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번역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아름답고 영광

스러운 곳에서 내어쫓김을 받고 난 후 이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짊어진 채 저주받은 땅에서 이마에 땀을 흘리며 살아가게된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운명이 달라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

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신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 (요 14:23).

 

여러분, 쫓겨난 우리들이 예수님을 구주로 모셔들이면 하나님께서 예

수님과 함께 우리에게 직접 오셔서 우리에게 거처를 함께 해주시겠다

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쫓겨난 것이 아니라 하

나님과 거처를 함께 한 한가족이 된 것입니다. 이러므로 지금 이 시간

에도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여러분과 내 안에 계신 것입니다.

 

2. 복음을 통해 귀신이 쫓겨가니 큰 기쁨이 오다

 

오늘날 귀신 이야기를 하면 현대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무슨 허무맹

랑한 소리를 하느냐"? 고 말할지 모르겠지만 있는 귀신을 부인하다고

해서 없는 것이 되지는 않습니다. 소위 과학적인 교육을 받은 사람들

은 '귀신이 없다'고 주장하지만 귀신은 분명히 존재하면서 우리를 도

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우리는 성서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그 실상을 가르쳐

주실 때 그것을 받아들어서 인정해야만 합니다. 성경에는 여러가지 귀

신이 우리를 억압하고 있는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먼저 성

경을 통해서 더러운 귀신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귀신은 이

름 그대로 우리에게 도덕적,윤리적,생활적,기타 여러 면에서 더러운

것을 가져다줍니다. 음란하고 방탕하고 추악한 것을 가지고 와서 이

세상을 부패케 하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 더러운 귀신이 하는 일입니

다.

 

또한 악한 귀신이 있습니다. 이 귀신은 악을 가져오는 일을 합니다.

 

 

 

그래서 가는 곳마다 시기, 분노, 질투,분쟁을 일으켜 부부의 사이를

갈라놓으며, 가정을 파괴하고 형제간에 미움을 일으키게 하며, 부모

자녀 사이을 이간시켜 놓고, 이웃과 싸우게하며, 나라와 나라,민족과

민족이 대결하여 일어나게 하는 것을 합니다.

 

그 다음에는 거짓말하는 귀신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 얼마나 거짓이

횡행합니까? 오늘날 사람들은 참과 거짓을 구별하지 못하고 의심하고

있습니다. 거짓말하는 귀신을 수없이 많은 거짓말을 가지고 이 세상에

횡행하면서 사람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고 있습니다.

 

또한 점치는 귀신이 있습니다. 이 귀신은 인간의 불안, 초초,공포를

일시적으로 무마해서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고 영원한

지옥으로 들어가게 하고 있습니다. 나아가서 병들게 하는 귀신이 있습

니다. 이 귀신은 수많은 사람을 병으로 고통당하게 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이렇게 여러가지 귀신으로 고통당하고 있습니다. 누

가 이 귀신의 세력에서 위를 해방시켜 줄 수 있겠습니까? 귀신은 영적

은 존재이기 때문에 지식이나 과학, 정치제도로서써 쫓을 수 없습니

다. 왜냐하면 귀신은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영은 영으로 대결해야지

물질과 육으로는 대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3차원 세계의 힘을 가지

고는 4차원 세계인 영의 세계를 이길 수 없습니다.

 

오직 나사렛 예수의 복음이 전파될 때,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넘쳐나오는 성령의 능력은 악령을 능히 이김으

로 악령은 한 길로 왔다가 일곱 길로 도망가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씀했습니다.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저희를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

(요일4:4).

 

이러므로 우리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은 악령보다 크시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원수 귀신을 단호하게 대

결하고 내어 쫓을 때 귀신은 성령의 공격을 이기지 못하고 쫓겨나가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생활 속에서 진실,믿음,소망,사

랑,화평이 넘쳐나게 될 것입니다.

 

요한일서 3장8절에도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죄를 짓는 자는 마

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

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은 마귀의 일을 멸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고 지금도

하나님의 아들은 여러분을 통해서 마귀의 일을 멸하고 계십니다. 그러

므로 여러분이 바로 예수님의 손이요, 발이요,귀요, 입이 되어 마귀를

대적하면 마귀는 쫓겨가고 영적, 혼적, 육체적, 생활환경적인 오염에

서 이 세상을 정결케 하는 위대한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귀의 놓여남을 받을 때 우리는 비로소 마음 속에 기쁨이 넘쳐납니

다. 우리를 비로소 마음 속에 기쁨이 넘쳐납니다. 우리를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킴으로 우리의 기쁨을 빼앗아간 마귀로부터 우리가 해방

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기뻐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마귀를

내어쫓을 때만이 우리의 개인과 가정과 생활과 사업 전체에 진실한 기

쁨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3. 중풍병자와 앉은뱅이가 고침받음으로 큰 기쁨이 오다

 

본문에서 귀신들의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간 다음 많은 절름발이와

 

 

 

앉은뱅이가 나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불구자된 인생이 고

침을 받았다는 것을 말합니다.불구가 된다는 것은 대단히 슬픈 일입니

다. 불구가 되었다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불구에서 놓여남을 받게 되면

마음의 기쁨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나사렛 에

수의 이름으로 불구에서 놓여남을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습

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그러나 육체의 불구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이 마음의 불구입니다. 마

음의 희망을 잃어버린채 늘 불안해 하고 초조해 하고 침울해 하며 분

을 참지 못하는 사람은 정말 중병을 앓고 있는 사람입니다. 육체의 병

은 사람들 눈에 보이니까 동정을 받을 수 있지만 마음의 병은 눈에 보

이지 않아 동정도 받지 못합니다. 그러면서 당사자는 한없이 괴롭고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오늘날 산업화 시대, 도시화 시대에 스트레스로 말미암아 마음에 병

이 걸려 고통다하는 사람이 수없이 많습니다. 겉으로 보면 아무렇지도

않지만 속으로는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안

보이니까 가족들의 동정도 받지 못하는 이러한 사람을 누가 고쳐줄 수

있겠습니까?

 

나사렛 예수님만이 이러한 사람을 놓아줄 수 있습니다. 마음의 불구

가 되어 방황하는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성령으로오셔서 마음속에 불안

과 공포 대신에 확신을, 미움 대신에 사랑을, 좌절감 대신에 삶의 용

기를, 죄책감 대신에 용서와 의로움을 채워주심으로 마음의 불구를 고

쳐주셔서 새로운 사람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이러한 은총이 예수님께

로부터 나오기 때문에 복음을 듣고 안 기뻐할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나아가서 생활의 불구가 있습니다. 일을 아무리 열심히 하고 애를 써

도 못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게으르고 성실치 못해 못사는 거야 하나

님께서 도와주실 수 없지만 있는 힘이 다하여 아침 일찍 일어나 저녁

늦게까지 일해도 먹고 살지 못하고 생활의 불구가 된 채 고통당하고

있다면 예수님께 나아가 그 모든 고통스러운 짐을 내어놓으십시오. 그

러면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손길로 생활의 불구를 고쳐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을, 아담의 타락으로 인한 모든 속박에서 자유케

하시고 성령을 우리 속에 보내주심으로 우리의 삶에 위대한 승리를 갖

다주셨습니다. 그 때문에 예수님의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의지하는 우

리들의 마음 속에는 언제나 기쁨이 충만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예

수님을 통해서 얻은 이 기쁨만이 영원하고도 참된 기쁨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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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예수님 부활,너무나 기쁜소식

자료원 : 순복음가족 조다윗목사

절 기 : 부활절

구 절 : 고린도전서 15장1절-11절

 

 

온대지방에서는 봄은 자연의 부활을 가져오는 계절입니다. 겨우내 꽁

꽁 얼어붙은 대지에 앙상하고 샛노랗게 말라버린 나무가지나 풀이 봄

의 따스한 햇살이 비취면 파아란 싹을 내어밀고 순식간에 천지가 푸른

생명, 아름다운 꽃으로 가득하게 됩니다. 충만한 부활의 장면을 이루

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는 사상은 인간의 생각 속에는

원래부터 없었습니다.어느 종교에서도 인간의 사후 영혼 불멸은 믿었

지만 죽은 자가 다시 부활한다는 것은 믿지 않았습니다. 죽은 자가 다

시 살아난다는 사상은 인간의 마음속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이

는 하나님께서 히브리 민족을 통해서 계시하신 사상인 것입니다.

 

사오 바울 선생은 고린도 교회에 편지할 때 예수님의 부활을 본 5백

여 형제들이 바울 생존 당시 태반이나 아직 살아 있었고 바울 선생 자

신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고전15:3-8).

 

그러면 우리 주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의 삶에 어떠한 의미를 가져오

는 것일까요?

 

1. 절망에서 소망을 부활시킨 예수님

 

아담과 하와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생존은 완전히 절망에 빠져

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거역하고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와 그 자손들의 영혼이 즉시 죽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영혼이 죽어서 하나님과의 교통이 끊어졌으니 절망에 처하게

되고 만 것입니다.

 

그린고 인간의 육체가 병들고 노쇠돼서 죽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고 하셨으니 인간의 생명은 한정되어

살다가 병들고 노쇠해서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죽음의 절망에 떨

어지고 만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환경적인 절망에 부딪쳤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이 땅을 저주했습니다. 그래서 이 땅은 가시와 엉겅퀴

가 나고 너희는 이마에 땀을 흘려야 먹고 살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

다. 그러므로 저주의 절망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실존주의 철학자들도 인간의 상황을 절망으로 평가했습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인간은 죄책과 정죄의 절망에 놓여 있는데 그것을 결코 이

간의 이겨낼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인간은 허무와 무의미의 절

망에 빠져 있어서 이 세상에서 아무리 영화롭더라도 그 삶의 의미와

가치는 알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들은 또 이렇듯 '자니간은 허무와

무의미의 절망에 빠졌으며 또 죽어서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니 죽음과

무의 절망에 빠진 존재'라고 말했습니다.

 

이러므로 이간은 정서적으로나 철학적으로 보아서도 절망적인 존재인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적인 절망을 어떠한 사람도, 어떠한 문명도, 과

학도, 어떠한 사회개혁도 건져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의 모든 절망을 당신의 몸에 짊어지

고 십자가에 못박혀 몸찢고 피흘려 죽으셨다가 사흘만에 모든 사망과

절망의 세력을 다 정복, 부활하심으로 소망의 부활을 이루신 것입니

다.

 

예수님께서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것은 죄악을 청산하고 부활하신 것

으로 우리의 영혼을 용서로써 살려주시고 하나님과 교통하게 하셨으니

영혼 부활의 소망을 채워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육체로 부활하심으로

인간 부활의 소망을 주셨습니다. 또한 저주를 청산하고 부활하심으로

축복의 소망을 우리에게 주셨으며 용서와 의, 삶의 목적과 의를 부활

시켜 주셨으며 영생의 부활을 가져다 주신 것입니다.

 

인간의 원래 절망적인 존재였으나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내일은 오

늘보다 다음달은 금번달보다 명년은 금년보다 영원한 미래는 현재보다

더 나아진다는 소망을 가지고 살수 있는 존재로 예수님은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부활을 통하여 인간의 가슴속에 영원

히 소망을 부활시키셨습니다.

 

2. 예수님은 미움에서 사랑을 부활시키셨다.

 

마귀는 아담을 꾀어 타락시킴으로 하나님과 인간이 원수가 되게 하였

습니다. 그 결과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쫓겨나고 하나님의 심판의 대

상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귀는 인간과 인간 사이에 미움을 심어 주었습니다. 아담은

하나님 앞에서 하와를 원망했습니다. '당신이 내게 죄를 짓게 했소'하

와는 또 뱀을 원망했습니다. 여기서부터 부부의 갈등이 생긱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때부터 오늘날까지 어느 가정이나 부부의 갈등이 없는 가

정이 없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함으로 마귀가 심어놓은 갈등인 것

입니다.

 

그리고 아담과 하와의 가정에는 비극이 다가왔습니다. 첫 아들 가인

이 둘째 아들 아벧을 시기하고 질투해서 밭에서 돌로 쳐죽인 것입니

다. 친족살상의 비극의 시작입니다.형이 아우를 죽인 비극이 일어난

이후로 인류 속에는 미움이 꽉 들어차게 되었습니다.

 

이래서 오늘날까지 인간의 역사는 오로지 전쟁의 역사입니다. 민족과

민족 간, 부족과 부족 간의 전쟁으로 이어진 것이 인간의 역사인 것입

니다. 인간은 전쟁을 하기 위해서 평화했고 또 평화할 동안에는 전쟁

준비를 하고, 그후에는 또 전쟁을 했습니다. 이러므로 이 세상이 생겨

난 이후로 전쟁이 없는 때가 한번도 없었습니다.

 

인류는 제1.2차 세계대전을 통해서 세상을 오염시키고 수많은 인명을

파멸시켰습니다. 공산주의와 민주주의라는 사상 대결로 말미암아 5대

양 6대주가 모두 다 전쟁터가 되고 만 것입니다. 그리고 이 피흘림이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같은 미움이 온

세상에 가득했는데 미움을 청산할 힘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미움을 에수님이 오셔서 짊어지신 것입니다. 예수님

은 로마인, 유대종교지도자들, 일반 군중들의 미움의 대상이 되었습니

다. 심지어는 하나님께로부터도 미움을 받고 버림을 받았습니다. '하

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것은 온 인류의 미움을 주님이 대신 짊어지신 것입니다. 예수님께

서는 십자가에 못박혀 이 미움을 멸하시고 위대한 사랑의 화신으로

 

 

 

부활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는 사람을 보고

'주여 저들을 용서하옵소서 저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아무와도 대결하지 않고 크신 사랑으로 이 모든

것을 감사하고 극복하며 사랑으로 부활하신 위대한 사랑의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이러므로 예수님은 바로 사랑의 원천이되는 것입니다. 오늘이 이 예

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셔들일 때 하나님과 인간은 사랑으로 연결되

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원수된 담은 허물어지고 미움은

사라지고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햇빛

과 같이 비춰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성령으로 우리 마움속에 부은 바 됨으로 우리의 영

혼 속이 사랑 가운데서 기쁨으로 뛰게 되는 것이빈다. 그래서 오늘 그

리스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사랑을 연결하는 가교가 된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믿고 나오는 사람을 지극한 사랑으로 사랑

해 주시고 넘치는 은혜를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인간과 인간 사이를 사랑으로 연결시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속에 들어와서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 주시면 받은

그 사랑으로 말미암아 이웃을 사랑하게 됩니다. 남편을 아내를 사랑하

고 부모와 자식을 사랑하게 됩니다. 친구를 사랑하게 됩니다.

 

성경에는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했는데

인간으로 행하기에는 도저히 불가능한 명령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으로는 할 수 없지만 모든 미움을 극복하신 예수께서 우리 속에

들어와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주심으로 원수조차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의지해서 우리의 삶 속에 사랑의

운동을 전개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 이외에는 우리의 운명을 변화시

킬 것은 없습니다. 율법과 칼로서는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구약

4천년 동안 하나님께서 준엄한 율법의 심판을 행했지만 결국 무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친히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가 그리스도의 사랑은 수천만, 수억의 의인들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만이 우리를 변화시키고 새 사람을 만드는 것

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사랑은 인간과 자연을 사랑으로 연결시킵니다. 오

늘날 우리는 대지와 환경의 오염을 통해 스스로의 생명을 자멸로 이끌

고 있어 마음이 아픕니다.저는 미국이나 구라파에 갈 때마다 부러운것

이 있습니다. 도시가완전히 푸른 동산입니다. 도시에 나무가 많고

공원이 많아 도시인지 산인지 모르는 그런 도시계획인것입니다.

나무 한그루를 살리기 위해서 그 주위의 도시계획을 바꿔서 집을 짓습

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도시계획을 세우면 수십년 수백년된 나무도 파헤

치고 그곳을 벽돌의 숲으로 만듭니다.이러고도 잘 살 수 있다고 생각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에덴을 벽돌동산으로 만든 것이 아닙

니다. 수풀이 우거지고 나무가 울창한 곳에 아담의 거처를 만드셨습니

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나라들은 에덴동산의 개념을 살려서 건축을

하여 자연환경이 좋은 도시를 만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모셨으니 자연과 화해하고 자연을 상

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새 한마리도 사랑해

 

 

 

야 하는 것입니다. 자연을 죽이면 우리도 죽습니다. 공장을 많이 세우

돈을 많이 번다고 한들 그 폐수로 인해 물을 마실 수 없게 되고, 마신

사람이 중금속 병이 들어 생명이 단축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들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자연에 대한 사랑이 충만

해져야 하며 그리스도의 부활은 바로 이것을 이루어주시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은 참된 믿음을 부활시키셨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이후 인간 구원에 대한 믿음이 다 사라졌습니

다. 예수님의 제자들조차도 불신앙의 포로가 되어 뿔뿔이 흩어졌습니

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고백한 것을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하나님께 인정받고 기사와 이적을 행하던 나사렛 예

수가 우리를 구원할 줄 알았는데 빌라도에게 심판받고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었으니 우리의 구원의 소망은 사라졌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죽음은 모든 인간의 마음 속에 구원의 소망을 다

빼앗아버리고 믿음을 파괴해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에수님의 부활은

인간 구원에 대한 궁극적인 믿음을 다시 부활시킨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았으면 그리스도의 모든 가르침은 십자가에서 종말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죽은지 사흘만에 부활하심으로 십자가는 지해석되

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실패도, 패배도,절망도 아니요, 우리를 구

원하는 위대한 대속의 근원이 되었다는 것으로 재해석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희생을 통해서 죄사함의 믿음이 부활했습니다. 성

령 충만의 믿음이 부활했습니다. 치료의 믿음이 부활했습니다. 그리고

영생 천국의 믿음이 부활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심으로 십자가 고난을 통해 대속하신 은혜의 보

증이 되셔서 모든 믿는 자의 가슴속에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부활시키

신 것입니다. 주께서 부활하사 당신의 십자가에서 몸찢고 피흘려 값주

고 사신 은혜가 반드시 집행하도록 지금 보장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

수님의 성령이 그것을 보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우리는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지고 십자가의 오중복음과

삼중복음을 믿고 나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부활

이야 말로 우리의 깨어진 믿음을 다시 부활시켜 주시고 우리의 마음속

에 흔들리던 믿음을 다시 확고하게 하신 것입니다.

 

4. 예수님의 부활은 천국의 부활

 

예수께서는 이 세상에 오셔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고 가

르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가는 곳마다 죄를 용서받게 하시고, 성령의 감동을 받아

서 영의 세계를 깨닫게 하심으로 이것이 바로 천국임을 가르치셨습니

다. 그리고 가는곳마다 병든 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내쫓으시고, 배고

픈 자를 먹이심으로 천국의 역사와 속성을 가르치셨습니다. 천국에는

가난이나 저주가 있을 수 없고 배고픔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주님께

서 보여주셨습니다.

 

주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면서 죽음은 오직 이 세상의 산물이며 천국

에는 죽음이 없다는 것을 확증하셨습니다. 또 예수님은 풍랑을 잠잠케

 

 

 

하심으로 천국에는 마음의 풍랑, 가정의 풍랑 등 풍랑은 있을 수가없

고 오직 주님의 의와 평강과 희락만이 꽉 들어차 있다는 것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백성들에게 천국의 속성을 보여주심

으로 그리스도가 가는 곳마다 사람들은 인산인해로 그를 따랐습니다.

세상에서 고난당한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들어가는 천국의 영광

을 바라보고 맛보고 체험하고 새 삶을 얻었기 때문에 너무나 기뻐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천국의 나타남도 사

라져버리고 만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고 장사된 후 40일 동

안에 한 사람의 죄인도 용서받지 못했습니다. 한 사람의 병자도 낫지

않았고 귀신도 쫓겨나지 않았습니다. 죽은 자가 산 적도 없습니다. 바

로 모든 것은 어둡고 깜깜하고 절망이었습니다. 완전한 어두움과 절망

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순절날에 이르자 다락방에 성령이 강림하시자 부활하신 예

수 그리스도의 믿음이 모든 사람 마음속에 확실히, 천국의 역사가 또

다시 나타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은 천국의 나타남의 부활인 것입니다. 예수님

의 부활로부터 천국복음이 만국에 전파되었으며 천국의 역사로 부활한

것입니다.

 

오늘날 천국은 이제 죽은 천국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부활하심으로 천

국의 역사를 우리 가운데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의 역

사는 우리 가운데 계속 나타나고 있는것입니다. 죄사함의 역사, 회개

를 통한 구원의 역사, 성령의 충만의 역사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고 있

는 것입니다. 영혼육 간의 치료의역사,축복의 역사도 일어나고 있는것

입니다.

 

우리가 성수주일하고 십일조도 도둑질하지 않고 주님을 공경할 때 아

브라함에게 내린 축복의 역사가 오늘 나타남으로 저주의 세상일을 멸

하고 천국의 축복의 역사를 우리 가운데 나타내 보이는 것입니다.

 

영생 천국으로 소망의 역사도 일어납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우리가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 영생 소망의 역사

가 우리 마음 속에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또 예수를 믿음으로 의의 역

사가 일어나서 의로운 천국 역사가 우리 가운데 가득하며 평강과 희락

이 마음 속에 넘쳐나서 말씀을 듣고 기도할 때 말할 수 없는 기쁨이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셨다가 부활하셨다는 것은 한 역사적 객관적 사실입

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부활사건은 '조작이다, 십자가에서 기절한

것을 무덤에 두었다가 살아난 것을 부활했다고 하는 것이다' 혹은 '제

자들이 시체를 훔쳐가고 부활했다고 한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사실 예수가 살아나지 못했는데 너무나 사모하던 제

자들이 모두 다 히스테리에 걸려 환상을 보았다고도 합니다. 여러분,

12명의 제자와 500여명의 사람이 동시에 히스테리에 걸려서 환상을 본

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거짓말을 사탄은 오늘날도 예수님의 부활을 부정하려고 하

지만 그것이 불가능한 것은 부활 후 세운 교회 가운데에 부활의 성령

 

 

 

이 와계셔서 그리스도의 부활의 역사로 천국이 우리 가운데 이루어지

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지금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고 성령받고 방언하고 성령의

은사가 나타나고 지금 병이 낫고 귀신이 쫓겨나가고 지금 저주가 물러

나고 하나님의 축복이 아브라함의 축복으로 임하고 마음에 죄 대신

의, 불안 대신 평안, 슬픔 대신 기쁨을 부어주는 천국 체험이 우리 가

운데 능력있게 나타나고 있으므로 사탄의 모든 말은 거짓으로 드러나

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부활 사실을 믿고 받아들이는 자에게는 엄

청난 삶의 내용의 변화와 소망과 사랑과 믿음과 천국의 나타남의 부활

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과거의 역사적인 사건이나 성경 속의 이야기가 아

닙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의 사건은 현실적인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부활이요 생명으로 우리 가운데 계시는 것입니다. 이 그리스도를 모셔

들일 때 그 부활의 역동적인 역사가 여러분의 생활 속에 나타납니다.

여러분의 생애 속에 모든 사망의 세렬은 철폐되고 하나님의 영광의 천

국 역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발행일 : 930418

분 류 : 설교

 

 

 
 
 

103

제 목 : 깊은 곳으로 가는 길

자료원 : 여의도순복음교회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조다윗목사

구 절 : 누가복음 5장1-7절

 

 

베드로는 아이 때부터 갈릴리에서 자랐습니다. 그래서 잔뼈가 굵어

중년에 이르기까지 어부였고 뱃사람이었습니다. 고기잡는 일을 통해서

결코 부자가 될 수 없었고 그는 겨우 살아갔습니다. 그날도 베드로는

갈릴리 바다에서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지만 한 마리도 잡지를 못했습

니다. 아침이 되어 배를 육지에 댈 때, 베드로는 허기져 자신을 기다

리는 처자들이 눈 앞에 어른거려 깊이 절망했습니다.

 

바닷가에 배를 대고 찢어진 그물을 깊고 있는데 많은 군중들이 해변

가로 오던중 그 앞에 서신 예수님이 성큼 배 안으로 들어서셨습니다.

그리고는 베드로에게 명령하셨습니다. '배를 해변에서 좀 띄어라'그대

로 시행하자 예수님은 그 자리에 앉으셔서 수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증

거했습니다.

 

베드로는 경청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마음이 고통스럽고 답답하고

외로왔던 그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지 답답한 가슴이 뚫리는 것 같아

눈물이 나며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그리고 그가 알지 못하던 새로운

세계가 그 마음속에 열려지는 것 같았습니다. 슬픔이 사라지고 그 마

음속에 열려지는 것 같았습니다. 슬픔이 사라지고 기쁨이 다가왔습니

다. 소망이 다가왔습니다. 그는 자신이 갑자기 달라지는 이상한 체험

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마치시자 당신 말씀에 취해 있는 베드로에게 '이제

깊은 데로 가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잡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전같았

다면 '당신은 선생이고 우리는 어부인데 바다와 고기잡는 일을 우리가

알지 당신이 아시겠습니까? 그만 두겠습니다' 했을텐데 예수님의 말씀

을 통해 새로운 깨달음과 깊은 세계를 알게 된 그는 '네'하고 순종했

습니다. 베드로의 가슴 속에 열린 깊은 세계가 그리스도의 말씀에 공

감한 것입니다.

 

인간의 이성으로 생각할 때 바다 한가운데로 들어가는 것은 금기였습

니다. 그러나 가슴 깊은 곳에서 '이제 새로운 삶을 살아보자, 얕은 생

각이 아닌 하나님의 계시로 살아보자'하는 생각이 나서 그리스도와 함

께 깊은 바다로 나가 그물을 던졌던 것입니다. 그후 그물을 당겨보니

까 이게 웬일입니까? 고기가 가득하여 배가 물에 잠기려고 합니다.

 

베드로는 너무나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얕은 곳에서 생각을

하면서 얕게 인생을 살다가 마음에 그리스도가 들어와 깊은 지혜가 열

리여 주의 말씀에 순종한즉 많은 고기를 잡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시간에 우리들도 얕은 인생을 살지 말고 깊은 인생

을 살고 깊이 생각하고 하나님과 깊은 곳에서 교제를 하며 깊은 곳에

그불을 던지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1. 깊은 곳에서 쫓겨난 인간

원래 인간은 깊은 곳에서 살도록 만들어졌으나 그곳에서 쫓겨나 얕은

곳으로 나온 것이 현존의 인간입니다. 하나님은 깊은 곳에 계십니다.

진리는 깊은 것이며 진리는 바로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얕은 데에는

진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안계십니다. 인간의 속사람은 하나님의 형

상과 모양대로 지음받았으므로 인간 역시 깊은 세계를 가지고 있는 것

 

 

 

입니다.

 

에덴 동산은 깊은 곳입니다. 하나님은 깊은 곳에 계시고 우리 속에

잇는 깊은 영혼이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은 그

곳에서 대화를 했습니다. 또한 찬미하고 동행했습니다. 깊은 곳,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과 깊은 대화를 나누고 깊은 기쁨 깊은 진리, 영광,

평화를 누리면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마귀의 꾐에 빠져 범죄함으로 그의 깊은 세계인 영혼

이 죽어버리고 만 것자비니다. 영혼이 죽어서 깊은 세계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깊은데 계신 하나님과 대화가 끊어져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리

고는 결국은 얕은 곳, 세속으로 쫓겨난 것입니다. 얕은 물과 본능의

세계로 쫓겨나버리고 만 것입니다.

 

깊은 세계에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는 세계를 잃

어버린 인간은 오직 자신의 수다과 힘으로 사는 수밖에는 없었습니다.

그 길밖에는 알지 못했습니다. 바로 베드로의 삶이 그것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아침에 깨어나 하루종일 그물을 깊고 저녁이 되면 얕은 곳에

가서 인간의 지혜와 방법, 경험을 통해 인간의 힘으로 그물을 던졌습

니다.

 

그에게는 전지전능,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산다는 것은 상

상도 할 수 없었습니다. 오직 사람의 힘으로 살아야 하고 힘이 모자라

면 절망하고 힘이 미치면 성사하는, 인본주의로, 인간의 힘으로, 능력

으로사는 것밖에 몰랐습니다.

 

이러므로 인간의 능력이 한계에 도달하자 그는 인생에 지쳐버리고 만

것입니다. 자신의 능력으로 아무리 애를 써도 고기는 많이 잡히지 않

고 부양해야 할 가족은 늘어나고 절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깊

은 세계를 갖고 있지 않고 얕은 세계 속에서 인본주의로 육신적인 인

간의 생각으로 살았습니다.

 

그가 절망에 처한 때에, 예수님이 배에 들어오셨습니다. 예수님의 말

씀을 듣고 있는 동안 그의 마음에 크나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베드

로의 변화는 획기적인 변화입니다.

 

2. 깊은 곳이 열려진 베드로

얕은 곳에서 인간의 힘만으로 환경에 부딪치며 사는 삶은 베드로에게

너무나 고달팠습니다. 이런 베드로의 인생의 배 속에 예수님이 들어오

셨습니다. 베드로가 고기잡던 배 속에 예수님이 들어오신 일은 인생의

배인 육체 속에 예수님 들어오신 일의 비유인 것입니다. 에수님은 참

하나님이 사람으로 되신 분으로 깊은 더 게신 분입니다. 그는 육신을

가지고 계셨지만 하나님이심으로 깊은 세계 속에 계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얕은 사람은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보통

성자, 도덕군자, 정치적 지도자, 나사렛 목수의 아들이라고 얕게 알았

습니다. 예수님을 육신으로만 알고 깊이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

수님은 깊은 곳에서 오신 분이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는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 말씀으로 사시는 분입니다. 그는 깊은

곳에서 왔기 때문에 죄를 사하고 귀신을 쫓아내며 죽은 자를 살리며

파도를 잠잠케 하는 등 사람의 얕은 생각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온갖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대인의 지도자 니고데모 조차

도 예수께 나와서 '당신은 깊은 곳에서 오신 분이 틀림없습니다. 사가

으로서는 이와같은 이사와 기적을 행할 수가 없습니다'하고 고백한 것

 

 

 

입니다.

 

이러한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배에 성큼 올라타셨습니다. 그리고 깊은

세계에서 나오는 천국의 복음을 증거해 주셨습니다. 얕은 데 사는 인

생은 그런 말을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자기들의 이성이나 사상, 경

험 속에서 그런 말을 들어본 기억이 없습니다. 베드로의 영혼은 흔들

렸습니다. 영혼이 깨어났습니다. 살아났습니다.

 

그는 물질적, 인본주의 세계 건너편에 영원한 세계가있다는 것을 깨

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우리를 찾

아오신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렇듯 그의 영이 살아나자 깊은

곳에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그 영혼에 메아리칩니다. 영혼에

공명합니다. 가슴이 울렁거리고 눈물이 나고 마음에 기쁨과 소망, 힘

이 다가왔습니다.

 

그에게는 새로운 세계가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잃어버

린 그 깊은 세계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영혼 속에 다시 복귀

되면서 깊은 데 계신 하나님과의 대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깊은 데로 가서 그

물을 던져 고기를 잡으라' 의미심장한 말입니다. 얕은 인간의 지혜와

지식, 능력으로 살았던 삶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믿고 그 도우심과 기

적으로 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얕은 곳에 그물을 던질 때에는 너

혼자 함께 그물을 던지노라. 깊은 곳으로 가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깊은 곳으로 가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베드로의 영혼속에 깊이 메아

리쳤습니다. 그는 깊이 감동되어 '주여 원리 깊은 곳은 낮에 가서 그

물을 던져도 고기를 잡지 못합니다. 그러나 주님 말씀에 의지해서 내

가 깊은 곳으로 나가겠나이다'하며 배를 저어갈 때 예수님이 함께 가

셨습니다. 얕은 곳에서는 주님께서 함께 하지 않지만 깊은 곳에 가면

주님께서 함께 거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깊은 곳으로 간 베드로는 멀리 그물을 던졌습니다. 그

는 인간의 지식이나 능력을 의지하고 던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에 의지하여 그물을 던지지 많은 고기가 잡힌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는 인간이 자신의 수단과 방법, 노력 등 얕은 것으로만 살 것이 아니

라 깊은 곳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이를 시행했을 때 잡힌 고기가 많아 자기 배만 채운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배까지도 가득 채웠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

는 것뿐이요,인자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게 함이라'

고 얕은 곳에는 죄가 있고 미음이 있고 저주와 가난이 있고 절망과 죽

음이 있고 깊은 곳엔 그런 것이 없습니다. 깊은 곳에는 하나님의 의와

용서, 사랑, 건강과 치료가 있고, 축복과 영광, 영생이 있는 것입니

다.

 

하나님은 깊은 곳에 계시면 위대한 생명의 역사를 베풀어 주십니다.

이렇기 때문에 베드로가 깊은 곳에 들어가자 많은 고기를 잡아 자기는

물론 남의 배까지 채워준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깊은 신앙

속에 들어가서 깊은 교제를 하고 살면 우리는 우리만 위해서 사는 것

이 아닙니다. 우리의 영혼이 잘 됨같이 우리의 범사가 잘 되고 강건해

서 우리는 물론 남까지도 채우면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 배만 채우며 사는 삶은 참 삶이 아닙니다. 남도 채워주어야 하

는 것입니다. 남에게 기쁨을 주고 소망을 주고 사랑, 치료, 은혜를 주

고 복을 채워주는 그런 삶을 살아야 하며 이것이 바로 깊은 데로 들어

가서 사는 삶인 것입니다.

 

베드로는 새로운 세계를 발견했습니다. 얕은 곳에서 밤이 맞도록 수

고해도 얻은 것이 없어 좌절 중에 있을 때 그리스도가 그에게 오시므

로 그 마음속에 깊은 세계가 열려 그때부터 그도 깊은 세계를 좇아

살게된 것입니다. 얕은 인생의 지혜나 지식이나 총명이나 능력을 통해

서 살지 않고 그의 속에 들어온 깊은 세계를 따라서 살게 되니 하나님

의 축복과 영광, 승리가 있게된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여러분께서 깊은 곳에서 살 때 영혼이 잘 됨같이 범사

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는 하나님의 기적을 베풀

기 원하십니다. 깊은 그곳에서는 인간의 힘이 아닌 하나님의 기사와

기적과 능력으로 사는 것입니다.

 

3. 환경이 달라진 것이 아니라 베드로가 달라졌습니다.

우리 얕은 데 사는 사람은 환경이 달라지기를 기다립니다. '좋은 정

부가 정치를 잘하면 잘 살게 될 것이다. 세계가 달라져서 환경이 달라

지면 우리가 잘 살것이다.' 등등 그러나 베드로가 달라진 것은 환경이

달라졌기 때문이 아닙니다. 얕은 인본주의적, 물질적 환경은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었습니다.

 

갈릴리 바다도,빈 배도, 찢어진 그물도 그대로 있었고 가난도 그대로

있었습니다. 이렇듯 환경이 변환 것이 아니라 베드로가 달라졌습니다.

예수님 즉 깊음의 주인공이 들어오시자 베드로의 얕은 육신적 삶 가운

데서 죽었던 영혼이 깨어난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운명과 환경이 달라지기를 기다리지 마십시오. 여

러분이 달라져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속에 깊음이 들어오고 그 깊

음을 좇아 살게 되면 얕은 환경은 자연적으로 달라져 버리고 마는 것

입니다. 얕은 것은 깊은 것을 변화시키지 못하지만 깊은 것은 얕은 것

을 변화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환경을 변화시켜 달라진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달라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회개하여 예수님을 믿지 않고는 결코

속사람, 깊음의 사람은 영원히 살아나지 못합니다.

 

베드로의 배 속에 예수님이 들어오셔서야 베드로가 얕은 세계에서 깊

은 세계로 전향한 것처럼 오늘 우리의 인생 속에 예수님이 들어와야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만 이 깊은 하나님의 세계를 얕은 세계에 가지

고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

하지 않고는 깊은 하나님께로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깊음으로 인도하기 위해서 우리의 얕은 데 있는 모

든 죄악을 담당하시려고 십자가에 올라가셔서 우리 죄를 대신 짊어지

신 것입니다. 우리의 미움과 질병과 저주와 죽음과 불의와 추악을 대

신 질어지고 몸찢고 피를 흘리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미암아 얕은 데 있는 모든 세계에서 깊은 데로 들어가는

 

 

 

문을 열고 만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서 우리

가 하나님께 나오면 얕은 곳을 떠나서 우리는 깊은 하나님의 품안에

안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깊음은 깊음을 향하여 부르짖습니다. 여러분의 영혼 속에 예

수님이 들어오셔서 영이 살아나면 그 깊은 영은 깊음인 하나님을 향하

여 부르짖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때부터 하나님과 대화가 됩니다.

하나님 말씀이 내 마음을 뜨겁게 변화시키고 기쁨, 소망, 믿음을 가져

오며 또 내가 부르짖을 때에 깊은 곳에서 계신 하나님께서 내게 응답

하는 것입니다.

 

깊음은 깊음의 방법으로 삽니다. 얕은 인생의 수단과 방법으로 살지

않고 깊은 말씀과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떡으로만 살아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깊은 세계가 마음 속에 들어오매 깊은 데에서 나오는 하나

님의 세계를 좇아 살았습니다. '내가 밤이 맞도록 그물을 던졌으나 얕

은 데서 잡은 것이 없지만 주님의 말씀에 의지해서 나는 깊은 곳으로

들어갑니다' 하는 생각을 좇았습니다. 그 결과 그의 운명이 달라졌습

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과 능력을 믿고 의지하고 깊은 바다로

가서 그물을 던져 많은 고기를 잡게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의 인생의 배에 들어오신 예수님은 우리의 깊은 곳 즉,

속사람, 영혼의 사람을 살려주시고 우리를 향하여 말씀하고 계십니다.

'깊은 데로 가라 깊은 곳에서 살아라 깊은 곳의 가르침을 좇아 일하라

얕은 곳에서 죄에 묶이고 미움에 짓밟히고 병들고 가난하고 슬프고 고

통스럽게 살지 말아라 얕은 데서 나와 깊은 곳으로 들어가라.

 

깊은 하나님의 세계, 하나님께서 일하시고 돌보시는 세계에 믿음과

순종으로 들어가 하나님과 함께 살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우리의 인생

의 배 속에 모셔들여야만 합니다. 예수님 없이 깊은 곳으로 들어갈 수

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없이 깊은 곳으로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곧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

다. 그리스도가 깊은 곳에 들어가는 문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모두 여러분 속에 깊은 영혼을 가지고 왔습니다.

이 영혼이 죽어있을 때에는 얕은 곳의 인생을 삽니다. 인본주의로 물

질주의로 인간의 수단과 방법으로 삽니다. 그러나 깊은 영혼이 깨어나

면 하나님과 대화하며 깊은 하나님의 능력과 권능을 의지해서 살게되

는 것입니다.

 

얕은 곳에 그물을 던지지 말고 깊은 곳에 그물을 던지십시오. 여러분

의 운명과 환경이 변화되어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깊은 데로 들어가 그물을 던지면 여러분의 얕은 운명과 환경은 하

나님의 기사와 이적과 능력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제 사람의 힘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 삽니다. 하나님

의 성령으로 삽니다. 하나님의 기적으로 삽니다. 얕은 데 살지 않고

깊은 데 삽니다. 그곳에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이 모든 것을 돌보아

주시는 에덴이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발행일 : 930829

분 류 : 설교

 

 

 
 
 

104

제 목 : 예수께서 당하신 3대 고난

자료원 : 순복음가족 조다윗목사

절 기 : 부활절

구 절 : 마태복음 26장 36-46절

 

 

욥기에는 불티가 하늘로 올라가는 것처럼 인생은 고난을 위하여 태어

났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수많은 고난이 다 같은 유의 고난

은 아닙니다. 절대다수의 고난은 인간의 범죄와 잘못으로 인하여 다가

온 고난입니다. 그것은 자업 자득적 고난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은 결코 자업자득적 고난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고난당하실 어떤 범죄와 잘못을 저지른 적이 전

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극한적 고난을 당하셨습

니다. 예수님의 당하신 고난은 타락한 인류를 그 죄악과 저주와 사망

에서 건지시려고 자원하셔서 당하신 대속적 고난이었습니다.

 

그것은 인간을 지극히 사랑하셔서 인간이 마땅히 당해야만 할 고난을

대신하신 것입니다. 그 때문에 예수님의 고난은 용서와 구원과 치료와

축복의 샘을 터뜨린 견줄바 없이 고귀한 고난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3가지의 극한적인 고난입니다. 이제 고난주간을 맞아 예수 그리스도께

서 당하신 고난을 깊이 생각해 보며 경건하고 겸허한 마음으로 그리스

도를 경배해야 하겠습니다.

 

1. 예수님께서 당하신 영적의 고난

 

제일 먼저 예수님께서 당하신 고난은 영적인 고난입니다. 성경에 의

하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짐어지셨다'고

말하고 계신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반역함으로 지은, 인

간의 어떠한 노력으로도 벗어날 수 없는 인류의 원죄와 인간 스스로

지은 자범죄의 형벌을 주님께서 대신 짊어지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하나님께서는 원죄와 자

범죄로 가득찬 추악한 죄의 잔을 예수님께 마시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죄를 알지도 못하고 지은 적도 없으신 예수께서는 이 죄의 잔을 바라

보시고 처절한 영적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하나님께 할 수만 있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소서'하

고 기도드리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내가 죄의 잔을 마시지 않

아 인류가 구원을 받지 못한다면 제 뜻은 개의치 마시고 아버지 뜻대

로 하옵소서'하고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잔을 거부하면 온

인류는 영원한 죽음에 처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은 인류를 위해 당신이 죽으시기 위해 그 잔을 마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죄악의 잔을 마신 후 체포당하신 때

부터 십자가에서 운명하실 때까지 하나님께 버림당한 처절한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죄악의 담이 하나님과 예수님의 사이를 분리시킨 것입

니다. 이로 인해 예수님의 영적인 극한의 고통의 시작된 것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은 창세이후로 갈라진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죄아그

이 잔을 마시고 난후 영적인 절망과 고독이란 말로 다 할수가 없습니

다. 영적인 지옥을 체험하신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께서 당하신 영적

인 깊은 고통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므로 겟세마네 동산에서 죄악의 잔을 마신후 체포당하신 때부터

 

 

 

십자가에서 운명하실 때까지 하나님께 버림당하신 그 고통을 겪으셨습

니다. 예수님의 당시의 처절한 상황을 시편 22편1.2절은 다음과 같이

예언하고 있습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

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내 하나님이요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치 아니하오나 응답

지 아니하시나이다"

 

예수님의 부르짖음에 하나님은 응답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하여 예

수 그리스도를 완전히 영적인 포로로 잡아버리고 말았습니다. 모든 악

마들이 그를 향하여 몸부림치고 아우청치며 그를 짓밟았습니다. 예수

님은 영적으로 극한의 고통을 당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하시 다

고통은 이 죄악의 잔을 마심으로 일어난 것입니다.

 

2. 예수님께서 당하신 심적 고난

 

예수님은 심적으로도 극심한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이 가장 믿고 사랑했던 제자 가롯유다에게 배신당한 것입니다. 사람이

원수에게 배신당하는 일이야 있을 수 있지만 자신이 사랑하고 돌봐준

제자가 배신할 때, 그 고통은 말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가롯 유다는 총명하고 똑똑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유다를

신뢰하고 사랑하여 돈궤를 맡기셨을 정도였습니다. 이 유다가 예수님

을 은전 30냥에 팔아넘긴 것입니다. 이 배신으로 인해 예수님이 당하

신 고통은 말로 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당해 보지 않고는 알 수 없

는 극심한 고통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체포당할 때, 제자들

은 모두 주님을 버리고 도망갔습니다. 그들은 주님과 함께 감옥이나

죽는 곳까지라도 가겠다고 말하며 늘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사람들이었

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대제사장 가야바와 안나스의 뜰로 끌려가셔서 밤새도록

모진 고통을 당했습니다. 주먹으로 맞아서 얼굴이 너무나도 퉁퉁히 부

어올랐고 피투성이가 되었습니다. 수염이 뽑히어 생살이 묻어나왔습니

다. 그리고 침을 뱉아서 얼굴과 몸이 침투성이가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이같은 고통을 당하실 때 예수님을 따라와 있던 수제자 베

드로는 예수님이 보시는 앞에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번이나 부인했습

니다. 나중에는 저주하고 맹세까지 하며 저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심적 고통이 어떠하셨습니까?

 

거기에다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다의 언덕으로 걸어가

실 때 평소에 예수님께 사랑을 받고 병고침을 받고 은혜를 받은 군종

들이 그 받은 사랑과 은혜를 원수로 같았습니다. '저를 십자가에 못박

으라'고 외친 것입니다. 은혜를 원수로 갚는 것, 이것보다 처참한 것

이 어디 있겠습니까!

 

오늘날도 사람들은 그렇습니다. 아무 은혜도 베풀면, 원수로 갚지도

않습니다. 대개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이 그 마음의 부담에서 벗어나

기 위해 은혜받은 것을 원수로 갚습니다. 주님께서 사랑을 베푸신 군

중들이 돌이켜 그 사랑을 원수로 예수님께 갚으려 하니 그 마음의 고

통이 얼마나 크셨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박혀 높이 달리심으로써 위로는 하나님께로

부터 영적으로 버림받고 아래로는 모든 제자들과 사람들에게서 버림받

았습니다. 사람이 버림받아 고독해지는 것, 굉장히 무서운 일입니다.

인간은 사회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외롭고 고독하고 버림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철저히 버림받았습니다. 이미 영적으로 하나님께 버

림받은 주님께서 제자들에게는 정신적으로 완전히 버림받아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정신적으로 한없는 고통과 고독을 체험

하셨습니다. 심각한 심적 고난을 당하신 것입니다.

 

3. 예수님께서 당하신 육체적 고난

 

예수님께서는 영.혼(마음)의 고난 뿐만 아니라 육체적으로도 극한 고

난을 당하셨습니다. 목요일 중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붙잡혀 가야바의

뜰에 끌려오신 예수님께서는 이곳에서 밤새도록 심문받고 매맞으며

모진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 집 가속들이 예수님을 주먹으로 치고 발

로 차며 수염을 뜯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예수께서 당하신 모욕

과 고통은 말로서는 표현할 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

이는 된 것이 없다'고 성경에 이르신 그 창조주, 만왕의 왕께서 인류

구원을 위해 육신을 입고 오셔서 그러한 처참한 취급을 받으신 것입니

다.

 

목요일 밤새도록 심문과 고문을 당하신 예수님은 금요일 새벽 또다시

빌라도의 뜰에서 빌라도에게 심문을 당하신 후 사형언도를 받았습니

다. 로마의 군인들은 예수께서 홍포를 입히고 머리에는 가시관을 씌우

고 채찍으로 등어리를 때렸습니다. 밤새도록 한숨도 못주무시고 아무

것도 잡숫지 못하신 예수님을 또 나무에 묶고 40에 1 감한 강한 매를

때립니다.

 

그 당시 로마 군인이 사용한 채찍은 다섯개의 가지고 있는데 가지마

다 그 끝에 쇠고리가 붙어있습니다. 한번 채찍으로 때리면 다섯 가지

가 몸에 파고 들어가고 채찍을 당기면 등어리가 그대로 파헤쳐집니다.

이것을 39차례나 때렸습니다. 예수님의 등은 다 찢어져 피가 강물처럼

흘러내렸습니다.

 

성경은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가 나음을 입었다'고 말씀합니다.

주님께서는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실 때 그 당한 고통을 우리의 질

병을 갚는 대가로 삼은 것입니다. 그리고난후 주님께서는 그 무거운

십자가를 등에 짊어지고 갈보리 산을 향해서 걸어가는데 수도 없이 넘

어졌습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갈보리 언덕에서 발가벗겨진 채 십자가에 양손과

발을 대못으로 박히신 후 하늘과 땅 사이에 높이 매달렸습니다. 이 얼

마나 처참한 일입니까! 예수님께서는 너무도 괴로우셔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

고 외치신 것입니다.

 

금요일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은 6시간만인 오후 3시

에 운명하셨습니다. 예수님 좌우에 못박힌 강도는 아직 죽지 않아서

해지기 전 그들을 십자가에서 내려놓기 위해 로마 군인들이 그들의 무

릎을 잘랐습니다. 그래서 피를 흘리게 해서 죽게 됐지만 예수 그리스

도는 이미 운명했기 때문에 그들이 창으로 옆구리를 찔러 창이 심장을

 

 

 

꿰뚫자 물과 피가 흘러 내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보통 인간적인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무릎을 잘리우지 않았습니다. 그의 죽으신 이유는 심장이 안에서 터졌

기 때문이었습니다. 영적으로 버림받은 극한 고통과 정신적으로 배신

당한 괴로움, 고독 그리고 육체의 고통이 예수님을 짓눌러 더 이상 감

당하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내가 다 이루었다 아버지여

내영혼을 부탁하나이다'고 할 때 그의 심장이 터져버린 것입니다.

 

이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은 심장이 터질 듯한, 아니 터져버린

고통이었습니다. 주님이 당한 이 고통을 우리는 이 고난주간에 깊이

생가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위대한 힘에 잡혀 우리를 대신하여 고난당하신

것입니다. 억지로 당하신 것이 아닙니다. 원수들은 그를 향하여 네가

과연 하나님의 아들이면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조롱하고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하지 못한다고 조롱했습니다.

 

그 말은 참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는 구원하였되 자신을 구원할

수는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사랑하시고 때문에 자신이 십자가

에서 내려오시면 우리가 모두 죽어야함으로 주님 혼자서 그 모진 고통

을 당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기로 깊이 결심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깊은 사랑을 이해

하지 않고는 깨달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랑은 모든 고난을 참고 자

기를 희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요

3:16)는 말씀은 매우 의미심장한 말씀입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은 무시시한 대가를 지불한 것입니다. 대가를 지불

하지 않고는 우리들을 사랑할수가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시기 6백여년전에 성령께서는 이사야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를 위한 대속의 고난인 것을 명백하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

하기를 그는 질병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

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

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사53:4.5)

 

그리스도의 고난은 전적으로 우리 때문에 고난 당한 고난입니다. 고

난을 통하여 우리에게 영원한 속죄를 이루시고 영원한 의로움을 선물

로 주시고 끝없는 구원을 주시고 하늘의 영광을 값없이 허락하여 주신

것입니다.

 

이제 주님은 고난당하신 그 결과로 못박힌 손을 활짝 내미시고 '수고

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예수님 앞에 우리는 믿음으로 나가고 감사함으

로 나가고 사랑으로 나가고 흠모하면서 나가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발행일 : 930411

분 류 : 설교

 

 

 
 
 

105

제 목 : 삶에 실패했을 때

자료원 : 조용기목사

구 절 : 눅 5:1-10

 

 

제목:삶에 실패했을때

본문:누가복음 5:1-10

말씀:조 용 기 목사

 

인생에 있어 사람이 모든 면에 성공하지만은 않습니다. 그렇다고 사람이

모든 면에 실패만 하고 낭패만 당한다고도 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

에 살아가면서 성공도 하고 또 실패도 합니다. 우리는 삶에 낭패를 당했을 때

다시 정상궤도를 이렇지 못한 인생은 파멸을 당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에 대한 교훈을 베드로의 체험을 통해 배울수 있습니다.

따라서 베드로는 고기잡이에는 일가견이 있는 전문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때 베드로는 삶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그의 장모는 병들어 누었습니다.

한 날은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으나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했습니다. 병들어

누워있는 장모의 약값도 마련해야 하고 가족의 생계도 꾸려 나가야 할 베드로

인데 밤새 한 마리의 고기도 못잡았으니 그의 심정이 오죽했겠습니까. 그는

참담한 절망을 느끼며 해변에서 그물을 씻고 있었습니다.

이 때 베드로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예수님께서 베드로의 배를 빌려 타시

고 복음을 증거하신 후 깊은 데로 가서 고기를 잡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이 말씀대로 하니 얼마나 많은 고기가 잡혔던지 그물이 찢어질

지경이 되었고 다른 배에 고기를 나누어 실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이런 체험을 통해 인생의 대변혁을 맞았습니다.그는 실패를 안고

있던 어부였으나 예수님을 만나 놀라운 체험을 했고 위대한 하늘나라의 사도가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베드로의 이런 체험에서 몇 가지 중대한 사실을 깨달

을 수 있습니다.

 

1.상식이 통하는 정통적인 삶.

먼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베드로가 상식이 통하는 전통적인 삶을

살았다는 사실입니다. 일반적으로 누구나 전통적인 삶의 방법과 지혜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살다 상식이 통하지 않는 고난과 실패에 처했을 때

전통적인 삶의 방법과 지혜로는 그 문제를 풀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바로 그랬습니다.

베드로는 갈릴리 어부라면 누구나 행하는 방법으로 고기를 잡으러 늘 나갔

습니다 전통적으로 갈릴리에서는 밤에 고기를 잡습니다. 왜냐하면 밤에 고기

들이 얕은 곳으로 모이기 때문입니다. 낮에는 물이 맑아 고기들이 잘 나타나지

않는 곳이 갈릴리입니다. 베드로는 이 전통적인 방법으로 밤이 잡으려고 했으나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이 때문에 염려와 근심이 무거

운 바위처럼 그의 마음을 짖누르고 있었습니다. 그는 사무치는 절망을 안고 배

곁에서 허탈한 심정으로 그물을 씻고만 있는 `처량한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인간의 모습입니다. `빈 배 곁에서 빈 그물을 만지는

존재가 바로 인간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인생을 살 때 상식적이고 수평적인

사고를 갖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경험에 의한 수평적 대응을

하며 그러다 안될 때는 한계를 느끼고 절망하는 것이 바로 인간입니다.

최근 우리는 신문을 펴들 때마다 우루과이 라운드협상에 관한 기사를 보며

걱정을 합니다. 우루과이 라운드는 가트가 우루과이에서 맺은 통상협약으로,

모든 나라가 관세장벽을 허물고 물자교환을 자유롭게 하자는 협약입니다.

그런데 이 우루과이 라운드대로 하면 우리의 농업은 큰 피해를 입게 됩니다.

왜냐하면 한국의 농업은 국가에서 보조를 하고 또 비싼 값으로 사들여 운영

되는데 미국이나 캐나다 또는 호주의 막대한 잉여 농산물이 쏟아져 들어오면

농촌은 살 길이 막막해지고 마는 것입니다. 예들 들어 말하면, 한국의 쌀이

한 톤에 300불 한다면, 미국의 쌀 한 톤은 30불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이 판매가 경쟁이 되겠습니까.

 

 

 

이러므로 우루과이 라운드가 실시되면 한국의 농촌은 황폐해질 것이 뻔한

노릇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국제적인 협약을 무시하면 고립화되어 살아갈

수가 없으며 또 다른 나라에 상품을 수출할 수도 없게 되고 맙니다.

이런 전망은 수평적 사고의 계산에서 나온 전망입니다.이런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수직적인 사고방식입니다. 우리는 수평적 사고로 현실을 해석

하고 비관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수직적 사고로 현실에 대응해

야 할 것입니다. 이 기회에 우리는 농촌에의 혁명을 생각해 봐야 하겠습니다.

이런 획기적인 방법이 한동안 진통과 부작용이 있겠지만 세월이 지나가면 더

나은 결과를 우리가 얻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말하면 현재 일본 사람들은 한국 사과에 완전히 반해 있습니다.

일본 사람들은 한국사과 때문에 일본의 과수산업이 흔들린다고 할 정도입니다.

나는 최근 일본에 갔을 때 일본 사람들이 "한국 사과를 맛본 다음 일본 사과는

먹지 못하겠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일본의 인구는 무려 1억2천입니다.

따라서 우루과이라운드로 농가가 근심에 휩싸이는 이 때 우리가 탄식만 할 것

이 아니라 국가적인 차원에서 사과를 재배해 일본과 구라파, 미주에 판로를

개척하는 것도 한 방법이 될 것입니다.

벼농사만 해야 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전통적인 수평사고입니다. 이런 때

우리는 획기적인 방법을 구상해야 할것입니다. 베드로는 언제나 밤에 얕은

곳에서고기를 잡았습니다.

이것은 전통적인 수평적 대응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수직적 대응은 무엇이었습니까. 깊은 곳으로 가 그물을

내리는 획기적인 방법이었습니다.

나는 핀란드의 헬싱키에 있는 `바위교회'를 보고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지혜에 탄복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루터란 교회에서 헬싱키 시내에 교회를

세우려고 할 때 그들은 한계에 부딪치고 말았습니다. 수평적 사고로 볼 때 시당

국에서 교회를 위해 시내에 건축하기를 내어줄 터가 없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도시계획상 시내에 교회가 세워질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런데 건축학도인

젊은이는 수평적 사고로 현실을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시내 한 가운데

있는 큰 바위 위에 올라가 시내를 보며 교회건축을 위해 기도하다가 "바로

이곳이 교회터"란 수직적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익은 계란에서 노른자를 파내듯 바위를 파내 교회를 지으면 된다는

아이디어를 얻어 시의 허락을 받은 다음 그대로 시행, 아름다은 교회를 건축

했습니다. 지금 이 `바위교회'는 핀란드의 관광소가 되었습니다. 핀란드에 방문

한 사람들은 이곳을 들러 인간의 지혜와 예술에 탄복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요,방법이었습니다.

만일 세 젊은이가 수평적 삶의 틀만 고집했다면 이런 결과를 얻을

수 있었겠습니까. 이들은 전통적인 방법이 아닌 하나님의 방법,그 수직적

방법을 모색해 한계의 돌파구를 성도 여러분, 우리가 맞은 고난을 우리는

오히려 수직적인 삶을 개발한

기회로 삼고 생활의 변화를 일으켜야 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인간적인

방법으로 획득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것은 하나님과의 만남과 그에 따른

믿음 없이 안 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2.종교적 체험과 현실적 삶.

많은 사람들이 종교와 현실을 분리해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신앙의 연장임을 우리 주님께서 본문의 기사를 통해 우리에게 가르치셨습니다.

베드로가 빈 배를 저어 해변으로 왔을 때 그의 마음도 텅 비었습니다. 그의

그물은 끊어지기도 했으며 쓸데 없는 해초로 지저분해지기도 했습니다.

우리도 오늘날 살아가면서 인생의 빈 배처럼 되고 훼손된 그물처럼 될 때가

있습니다. 인간의 수단과 방법이 물거품처럼 되는 때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실패의 현장'에 예수님께서 오셨다는 것은 큰 은총입니다.

이것은 인생의 획기적 기회입니다. 베드로의 실패의 현장에 는 그 배를 빌려

타셨습니다. 여기에 하늘나라의 은총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실패한 인생을 예수님께서는 실패한 인생을 예수님께서

오셔서 "네 시간을 다오. 복음에 관해 이야기하자"고 말씀하셔도 무시

 

 

 

합니다. 그러나 황폐해진 인생, 경제수단이란 그물이 찢어지고 행복과 기쁨이 빈

그런 배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오실 때 예수님을 모셔들이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빈 배를 타신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배에 올라 타신 다음 육지에서 조금 떨어지게 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이런 베드로의 모습을 다른 동료들이 보았다면 아마 기가 막혔을 것입니다.

혹시 어떤 동료는"세상에 고기를 잡아 처자를 살려 먹어야 할 사람이 배에

웬 청년을 모시고 예배를 드리고 있다니.....미쳐도 보통 미친게 아니다. 저

사람 이제 갈 때까지 다 갔다"라고 손가락질 했을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현실의 삶을 생각지도 않고 종교행사에 참여한 베드로의 모습은,

오늘날 낭패와 실망을 당한 뒤 부인 따라 교회에 나와 예배 드리는 한 인생의

모습과도 같습니다. 과거 화려하게 사업하다가 패망한 후 교회에 와서 예배

드리는 이런 사람을 보고 주위에서는 "저 사람, 이제 돌았군. 한때 그렇게

명예를 뽑내던 사람이 부인 따라 교회에 가서 손뼉치며 할렐루야 하니 갈

때까지 다 갔다"라고 비난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이웃이 현실생활과 동떨어졌다고 비난하는 그 자리가

바로 수평적 인생에서 수직적 인생으로 바뀌는 자리임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수평적 인생 생활에 실패한 사람이 수직적 삶으로 귀환, 출발하는 그 훈련장이

교회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시고 가졌던 빈 배에서의 종교적 체험은 지금까지

체험하지 못했던 놀라운 체험이요,한 인생을 바꾸어 놓은 획기적인 체험이었

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 증거를 마친 다음 복음을 증거할 수 있도록 빈 배를

마련해 준 베드로를 향해 "자, 이제 되었다. 그냥 가라"고 말씀하시지 않았

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에 대해 말씀하신 다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눅 5:4)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수평적 사고에서

완전히 어긋나는 말씀입니다. 상식이 통하는 전통적인 삶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 오신 분입니다. 예수님의

사고방식은 인간의 수평적 사고를 초월하십니다.

누구를 불문하고 예수님의 계시적인 이 수직적 말씀을 무시하고 받아들이지

않은다면 인생개혁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회개하고 구원받는 것 뿐 아니라 계시

적이며 신앙적인 수직적 삶의 방법으로 인생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은

말씀 하셨습니다.[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히 10:38).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 4:4)

 

3. 예수님께서 주시는 삶의 아이디어

 

예수님께서는 현실적인 삶의 중요성을 절대 무시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도가 삶의 순서를 바로 잡기를 원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신앙을 가지면 현실을 저버리고 빈궁하게 살아야 하는 것으로

여기는데 이는 오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현실을 무시하셨다면 그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구하라고만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신앙인의 삶의 순서 즉 하늘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고

나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에 대한 현실의 삶을 생각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아 알 수 있습니다.요한3서 2절에도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

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고 말씀하

셨습니다.

이러므로 우리는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고, 영혼이 잘 되는 일을

 

 

 

먼저 생각하고 그대로 해야 할 것입니다.

배를 빌려줌으로써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한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는

깊은 곳으로 가서 고기를 잡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꿈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획기적인 말씀입니다. 전통적으로나 상식적으로는 밤에

얕은 곳에서 고기 잡아야 합니다. 그런데 낮에 깊은 곳에서 고기 잡으라니

이것은 비상식적인 일입니다.

이 때문에 베드로는 얼떨떨해서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고기잡는데는 베드로가 전문인입니다. 그는 어느 때 어디에

고기가 몰리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증거하시는 동안 베드로의 마음은 큰

변화를 받았습니다. 베드로는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절망의 상황에서 상식적이고 전통적인 방법으로 살것이 아니라

계시적이고 신앙적인 방법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무엇보다 베드로

는 메시야라는 것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그 때문에 베드로는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라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예수님과 함께 깊은 곳으로 배를 저어 갔습니다.

이제 베드로는 혼자가 아닙니다.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동행하게

되었습니다. 교회에서만 예수님을 느끼고 사업할 때나 가사를 돌볼 때 예수님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타고 고기잡이하러 나가신 예수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성전에서 성도와 함께

하신 예수님께서는 상식적이고 전통적인 방법이 아닌 계시적이고 기적적인 방법

으로 새로운 아이디어와 능력을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심으로 예수님께서는 성도가 세상에서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아니하며 위에 일하시니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결과 얼마나 고기가

많이 잡혔던지

그물이 찢어질 정도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의 복음을 전하셨을 뿐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인간과 함께 일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구만리장천에 계시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도와 함께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 끝날까지 성도와 함께 하십니다.

낭패와 실망에서 예수님을 모신 베드로는 주님의 아이디어를 받아 획기적인

삶의 변화를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풍성한 생명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요한복음10:10)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만나 획기적으로 변화를 받은 베드로는 예수님의 실상을 알고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눅 5:10)고 말씀하셨고 그들은

예수님을 좇아 위대한 인생을 새출발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수평적인 인생을 살다 실패했다고 해서

그것이 인생의 마지막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상한 심령, 생활이

훼손된 사람을 구하십시오.

그러면 예수님께서 이런 일생을 책임지십니다. 이런 인생에서 수직적인 삶을

살게 하셔서 실패한 그 자리에서 성공의 꽃을 피울 수

 

기도

살아계신 하나님. 저희들의 인생에 으로 살다 절망하고 탄식했습니다. 이제

신아의 전기를 마련하고 수직적으로

살아가기 원합니다. 믿음으로 살겠습니다. 말씀으로 살겠습니다.

인본주의적으로 살았던 모든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저희들의 삶을 개선시켜 주시고 힘과 소망을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발행일 : 901020

분 류 : 설교

 

 

 
 
 

106

제 목 :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라

자료원 : 순복음 소식지 조용기목사

구 절 : 눅 18:1-8

 

 

제 목: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라

말 씀: 눅 18:1-8

설교자: 조 용 기 목사님 *** 순복음지 ***

 

많은 사람들이 내게 와서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이런 말을 합니다. 목사님, 우

리 가족은 주일을 꼭 지키고 십일조도 반드시 드리며, 남편과 저도 열심히 봉사하

는데 왜 일마다 안되고, 저는 교회에 나온지 오래 되어 남편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는데 남편은 더 완악해지고 예수님을 믿지 않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기도를 응답해 주지 아니하실까요?

라고 말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렇게 애를 쓰고 기도하는데

왜 병이 낫지 않습니까? 라고 하기도 합니다.

성도 여러분,우리가 사는 현실세계는 하나님을 반역하고 마귀의 지배를받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인생 문제도 간단히 대답할 수 없습니다. 또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지 못하기 때문에 성도가 기도응답을 받지 못하기도 합니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문제의 해결을 받고 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께서는 여러가지 문제를 갖고 고민한은 사람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라고 하시면서 이런 비유를 드셨습니다.

 

1.예수님의 비유

 

한 도시에 재판관이 사람은 위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땅으로는 사람을

완전히 무시할 만큼 불의한 재판관이었습니다.

그런데 같은 도시에 억울한 사연을 간직한 불쌍한 과부가 할 곳도 도움을 받을

곳도 없는 연약한 여자였습니다. 이 여인은 자신의 억울한

사정을 해결하기 위해 몰인정한 재판관에게 자기 원수를 갚아달라고 호소했습니다

재판관은 처음에 그 과부의 호소를 듣고 비웃었습니다.재판관은 원,이런 여자가

다 냐? 라고 생각하고 그의 호소를 무시했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아침에도,점심

때도, 저녁때도 계속 재판관을 여인이 계속 는 나중에 야, 이거 번거로워서 견딜

수 없다. 마음이 괴롭다. 편안하게 의식주 생활을 할 수가 없다. 내 자신의 편안

함을 위해서라도 문제를 해결해 주어야 하겠다 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한 과부의 끊임없는 호소가 불의한 재판관의 마음을 변화시킨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드신 후 불의한 재판관의 말한 것을 들으라 하물며하나

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지 아니하시게쓰냐 저희에

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주리라 (눅 18

:6-8)고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의 생각과 하나님의 뜻은 다릅니다. 사람들은 혹시 하나님게서 너무오래

지체하시는 것이 아닌가 라고 생각하고 속히 응답되는 것이 하늘나라 법칙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어떤 환경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믿고 끝까지

불퇴진의 기도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2.왜 불의한 재판관에 비유했는가?

 

그러면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왜 불의한 재판관으로 비유하셨을까요? 정말 하나

님은 이 불의한 재판관처럼 몰인정하고 냉혹한 분이실까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아는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하나님께서는 인정이 많으시고 자비와 긍휼

이 끝이 없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 주시기까지 우리를 구

원하신 분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도의 응답을 받지 못하고 쩔쩔맬 때 하나님이

해도 너무 하신다. 왜 이렇게 응답하시지 않는가? 너무 무정하시다. 왜 밤낮 부르

짖는, 택하신 자들의 기도를 듣지 아니하실까? 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실사은 우

리의기도를 들어주시는,지비와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신데 당장 기도 응답을

 

 

 

받지 못해 실망하는 우리의 생각이 하나님을 불의한 재판관 으로 만드는 것입니

다.그러니까 우리가 한마디로 영적 실상을 알지 못하면 이처럼 왜곡처럼 왜곡해석

을 할 수 하나님께서는 하늘의 보좌에 앉아 계시고 타락한 마귀의 공중에 진을

치고 니다. 그래서 타락한 마귀는 인간이 하나님께 오는 것을 막으며 인간을

참소합니다.

그래서 마귀는 안간이 하나님을 떠나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 세상의 자

랑을 좇아 살도록 끊임없이 미혹하고 공작하고 더욱이 공중의 권세를 잡은

사탄은 타락한 인생을 지배하면서 구원받은 사람들이 올리는 기도를 총력을

기울여 방해화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구약 다니엘서 에서는 이런 기록이

들은 기도하다가 한 두 사람 떨어져 나갔습니다. 그러나 다니엘른 끝까지 견디며

기도했습니다.

21일째 하나님의 천사가 나타나 이렇게 말했습니다. 은총을 크게 받은 사람 다

니엘아 내가 네게 이르는 말을 깨닫고 일어서라 내게 네게보내심을 받았느니라

그가 내게 이 말을 한 후에 내가 떨며 일어서매 그가 내게 이르되 다니엘아두려

워하지 말라 네가 깨달으려 하여 네 하나님 앞에 스스로 겸비케 하기로 결심하던

첫날부터 네말이 들으신바 되었으므로 내가 네 말로 인하여 왔느니라 그런데 바사

국군이 이십 일일 동안 나를 막았으므로 내 미가엘이 와서 나를 도와주므로이제

내가 말일에 네 백서의 당한 일을 네게 깨닫게 하러 왔노라 (다니엘 10:11-14)

다니엘과 같은 기도의 용사가 기도하는데 21일 동안 바사국군,즉 바사를 지배하

는 마귀가 공중에서 다니엘의 기도를 막았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이 끝까지 불퇴진

의 기도를 하자 결국 미가엘이 도와 마귀의 진이 무너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다. 바울선생은 기도를 마귀와의 씨름으로 말하고 성도

여러분, 씨름하는 사람이 무기력하게 서서 싱글싱글 웃어서야 되겠습니까.

씨름은 결사적으로 매어달려야 승산이 그런 로맨틱한 행동이 아닙니다. 기도는

생명을 내어놓고 끝까지 달라붙은 간절험

과 긴장의 행동입니다. 바로 얍복강에서 천사와 씨름하던 야곱이 그런 모습을 보

여주고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정사와 권세와 이 세상

어두움의 주관자들과 하늘에 시조 읊조고 어떻게 합니까? 모든 힘을 다바쳐 승리를

위해 땀흘리지 않습니까?

우리는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성경 요한계시록 12장 7절로 11절에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더불어 싸울새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 이기지 못하여 다시 하늘

에서 저희의 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자라 땅으로 내어 쫓기니.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 쫓기니라 내가 또 들으니 하늘에 큰 음성이 원과 능려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이루었으니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고 또 여러 형제가어린 양의 피와 자기의 증저

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

도다

이 말씀을 보십시오. 마지막 때 하나님께서 하늘의 군대를 동원해 공중의 권세

잡은 마귀를 청소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말씀에서 보면 공중에서 전쟁이 벌어

졌다고 말했습니다.그런데 이 공중에 권세잡은 용, 곧 옛 뱀이라고도 하고 마귀라

고도 하는 사탄이 그 사자들과 더불어 밤낮 성도들을 참소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시간에도 여러분, 우리가 기도하려고 하 때 원수 마귀는 공중

에서 진을 치고 우리 기도를 막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담대하고 끈질긴 마음

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약속의 말씀을 의지해 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기도해

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기도가 하늘 보좌에 상달될 것입니다.

 

3.과부의 기도

 

기도는 이처럼 비장한 각오와 끈질긴 인내를 요구합니다. 이 때문에 주님께서

불의한 재판관에개 매어 달리는 과부의 모습을 통해 성도의 기도가 어떠해야 하는

가를 우리에게 기르쳐 주셨습니다. 처음에 이 과부가 불의한 재판관을 만났을 때

한 마디로 거절받고 크게 절망했을 것입니다.성경에 고아와 과부는 힘없고 소외된

전형적인 인물로 등장합니다. 예수님께서 과부를 비유로 말씀 하신 것은 힘없이

문제를 갖고 하나님께 나오는 신자의 모습을 보여주고 했을 때 아무 응답을 못 받고

 

 

 

절망한 것처럼 성도도 그런 느낌을 받습니다.성도

가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원수 마귀는 전력을 기울여 이를 방해합니다. 이 때문에

성도는 힘이 들어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고 이 원망이 하나님을 불의한 재판관으

로 생각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사실 기도는 힘이 듭니다. 영적인 싸움인데 힘이 안 들 수 도가 철야기도, 금식기도,

새벽기도, 모임 기도를 갖다가 포기하는 이유가 여기

성도의 기도가 자신들의 진을 훼파하고 하늘나라를 확장하기 때문입니다. 이러므

로 마귀는 기도하는 성도, 기도하는 교회를 가장 경계합니다.

따라서 성도는 끊임없이 기도함으로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앙야 합니다.성도가 끊

임없이 기도하면 반드시 마귀의 진은 훼파되고 맙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미

십자가에서 승리하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처음 불광동에서 교회를 개척했을때 정신병자들을 위해 기도를 많이했는

데 이 정신병자들와 기도할 때 한 5분이나 10분 동안 인간을 억압하고 다. 이 때문에

이들을 위한 기도는 두시간이고 세시간이고 계속 해야 합니다. 장

시간 기도하면 끊임없는 타격을 받고 무너지는 벽처럼 원수 마귀가기도의힘에

의해 인간에게서 떠나고 맙니다. 우리의 기도는 마귀에게 큰 타격을 줄 수밖에 없

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불과 같습니다.마귀는 이 불 앞에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기도의 방법에는 여러가지가 그런가하면 철야기도, 기도원 기도, 금식기도도 에

따라 기도할 때 불안하고 답답하고 무력함을 느낍니다.그것은 재판관의 위력

에 부딪친 과부의 심정과도 같습니다. 처음 과부가 탄원해도 거부 당했을때 얼마

나 절망했겠습니까?

그러나 과부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탄원했습니다. 그래도 상당 기간 냉대를 받

았습니다. 그렇습니다.우리가 기도할 때도 상당 기간 저항감과 절망감을 느낍니다

.그래도 우리는 절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무엇보다 원망,불평하지 말아야 합니다.왜냐하면 결국 하나님께

서는 우리 편이라는 사실을 쉽게 잊어버리고 원망, 불평하는데 이것은 바로 마귀

의 작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의 편이시라는 것을 생각하면 어떤 환경에

처하든지 원망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당자의 현실만 생각하고 원망하고

불평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

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푸어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눅 18:7)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며 이내하는 자를 복되게 하십니

다.

나는 우리 교회에 나오시는 한 부형님의 이런 간증을 들었습니다. 이 분은 1979

년도에 지방에서 택시업을 하다 지금의 아내를 만나 결혼했는데 아내가 상한 이빨

을 치료하지 않고 결혼했다고 하여 신혼여행에서부터 구박했고 이에 대한 거부감

으로 아내를 몹시 싫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잠자도 피했고 나중

에는 주색잡기에 빠져 재산을 탕진하고 말았씁니다.

이러다 아버지게게 크게 야단을 맞은 후 부부가 서울에 올라와 평화시장에서 장

사를 시작했는데, 이 부형님은 장사해서 번 돈으로 다시 친구들과 어울리며 주색

잡기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동안 아내는 제발 그런 생활을 청산하라고 간곡히 만류했지만 이 부형님은 아

랑곳하지 않고 지냈는데 하루는 함께 방탕하던 친구가 사람이 되어 교회에 다니고

우리 교회에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날 따라 설교가 자신을 보고 하는 것 같더랍니

다. 이 분은 어 그러나 이 분이 예수님을 믿었어도 여전히 아내가 미워 보였습니다.

그러는 동안

이 분은 금요철야, 기도원 예배 등을 다니며 과거의구습을 버리고 새로운 사람으

로 변화되어 갔습니다.그러자 아내를 미워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자꾸 사

랑해 보려고 했으나 소용이 없었습니다.이 분은 아내를 미워하는 감정을 없애려고

40일을 철야기도하기로 하고 계속 기도를 드리는데 열흘를 해도, 20일을 해도 좀

체로 미움이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이분은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 아내를 사랑하게 하옵소서 라고 계속 기

도를 해쓴데 40일째 되던 날 믿음,소망,사랑 이 세가지 중에 제일은 사랑이며

이 중에서도 먼제 베풀는 사랑이 값진 사랑이다 라는 말씀을 듣다가 성령역사로

 

 

 

참된 회개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 후에 아내에 대한 미움이 아침 햇살에

걷히는 안개 처럼 사라지고 아내에 대한 사랑이 솟아났고 볼수록 아내가 예뻐 보

였습니다.이 때부터 이분은 아내를 사랑하게 되었고 지금은 아주 행복하게 잘 살

고 이 분이 아내를 그토록 미워하게 된 것은 마귀의 역사였습니다.이 마귀의 역사가

인간의 노력으로 물러갈리 이 분이 40일 동안 기도를계속하자 마귀가 그만 견디지

못하고 물러났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미움이 없어진 다음 이 사람은 정상적인 생할을 할 수 정의 문제를

안고 제를 위해 기도하가가 중도에서 포기하면 하나님의 은총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기도하되 끝까지 해야 합니다. 이 때문에 우리 주남께서는 항상 기도하되

낙망치 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은총을 준비하고 여러분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사람 편에 서 계십니다. 이것을 마귀는 어떻게 해서든

지 막으려고 성도를 기도하지 못하게 합니다. 기도하는 민족.개인, 교회는 삽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기도를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

되 어떤 괴로움을 당해도 끝까지 매어달린 본문의 과부처럼 어떤 상황에서도 끝까

지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들과 함께 하십니다.

 

기도:

저희들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하나님께서 언제나

저희편에 계신데 저희가 원망하고 불평할 때가 주여,용서하여 주옵소서.

이제 주님을 위해 살고 하늘나라의 확장을 위해 살기원

합니다. 저희가 기도하되 포기하지 않고 인내의 기도를 할수 붙들어 주시고

가정과 환경을 경건하게 이끌어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자료 제공:광주지회

 

발행일 : 900724

분 류 : 설교

 

 

 
 
 

107

제 목 : 나라를위한 특별기도회

자료원 : 여의도순복음교회 조다윗목사

 

*** 나라위한 특별기도회 설교문 ****

 

= 여의도 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 =

 

오늘도 한반도를 중심한 아시아. 태평양지역의 정세는 내일을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급변하고 있습니다. 이런 어려운 시기에 우리 일천만

성도는 마음을 합하고 무릎을 꿇어 모든 계층의 화해와 국가를 위해기

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화해와 안정을 얻을 수있

을까요.

 

첫째로 국가와 국민을 다스리고 이끌어 나가는 정부와 정치인들이 공

의와 경제, 도덕면에서 솔선수범해야 합니다. 그래서 계층간의 격차를

좁히고 경제 정의가 실현돼야 합니다.

통계에 의하면 국민의 가진 자 5%가 1988년 부동산으로 얻은 자산이

무려 2백 12조원이 된다고 합니다. 이것이 사회의 과소비로 연결되고

경제질서를 교란시켜 계속적인 인플레를 유발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조석으로 변하는 정책과 알맹이 없는 공약이 가져온 결과라는

것을 정부와 정치인이 인식하고 반성해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이성과 법과 질서가 통하는 사회가 이룩돼야 합니다.

정당과 재야, 경찰과 학생, 기업주와 노동자가 자신의 의견을 내세우

는데 이성과 법, 질서를 내던지고 집단의 이익을 위해 잘못된 공권력

과 폭력을 휘두른다면 이 사회에 화해와 안정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국민은 더 이상 사회의 혼란을 원치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모든 일에 이성과 대화를 통해 법과 질서 속에서 변화와 개혁을 시도

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 기독교인들이 더 이상 잠잠히 있지말고

일어나야 할 때가 왔습니다. 이제야 말로 시민운동이 일어나 사회의폭

력과 불법을 추방하고 화해와 안정을 이뤄야 할 때인 것입니다.

 

셋째로 화해와 안정을 위해 우리 국민 모두가 지켜야 될 일이 있습니

다. 그것은 이 사회에 정직을 회복시키는 일입니다. 진실을 앞세울 때

화합이 이뤄집니다.

또 삶 속에서 성실함을 다시 찾아야 합니다. 배금주의사상이 되는 풍

토가 사라져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소속한 단체에 사랑과 충성심을 가져야 합니다.

이와 같은 일들이 있어야만 국민이 화해하고 안정이 이룩될 수 있습니

다. 공의와 공평과 진실이 통하지 않는 곳에 화합이나 안정은 사상누

각에 불과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워 왔느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살아계십니다.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앞에 돌아와야합

니다. 하나님께서는 살아계십니다.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앞에 돌아

와야 합니다.

우리 국민 각계각층이 오늘 우리 국가와 국민이 처한 현실을 깊이 깨

닫고 잘못된 현실과 삶을 회개하고 고쳐나갈 때 진정한 화해와 안정이

이룩될 수 있습니다.

 

발행일 : 940215

분 류 : 설교

 

 

 
 
 

108

제 목 : 돌을 옮겨 놓으라

자료원 : 여의도순복음중앙교회 조다윗목사

구 절 : 요한복음 11장 37-44절

 

 

예루살렘 베다니에는 예수님께서 평소에 대단히 사랑하셨던 3남매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이름은 오라버니 나사로와 자매 마르다와

마리아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멀리 요단강 건너편에 계실 때 갑자기 나사로가

병에 걸려 죽고 말았습니다. 예수님 오시기를 학수고대하다가 이 슬픈

변을 당한 마르다와 마리아는 극한 슬픔 가운데 오라버니 나사로를 굴

로 된 무덤에 장사지내고 그 굴 입구를 큰 돌로 막았습니다.

 

오라버니를 장사한지 나흘만에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오셔서 초췌해진

마르다와 마리아를 데리고 수많은 유대인들과 함께 나사로의 무덤에

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르다에게 무덤의 돌을 옮겨놓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당황한 마리아는 어쩔줄을 몰랐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주님 오라버니가 무덤에 장사된 지 이미 나흘이 되어

그 몸에서 썩은 냄새가 나나이다'라고 말하며 주님 말씀을 실행할 수

없음을 아뢰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단호히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

리라 하지 않았느냐 꾸짖으셨습니다.

놀란 마르다와 마르다가 필사의 노력을 기울여 돌을 옮겨 놓자 예수님

께서는 그 입구에 서서 기도하신 후 '나사로야 나오라' 고 명하시자

죽은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채로 살아서 나왔습니다.

 

이 놀라운 기적의 이야기는 우리들에게 믿음에 관해 다음과 같은 깊

은 교훈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 믿음은 하나님의 말슴을 들음에서 나다

 

로마서 10장 17절에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

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다니에서 처음 마르다를 만나셨을 때 이미 '네 오라

버니가 살리라'고 하셨습니다. 마르다는 이 말씀을 액면 그대로 받아

들이지 못하고 '예, 마지막 날 부활에는 오라버니도 다시 살 줄을 내

가 아니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그 말을 고쳐서 '아니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

지 아니하리라'고 강조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마르다와 마리아를 데리고 무덤에 가셔서 '돌을

옮겨 놓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믿

음으로 실천에 옮겼고 큰 기적을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믿습니다]라고 고백하려면 믿을 만한 이유가 있어야

만 합니다. 믿을 이유도 없는데 허공을 바라보고 [믿습니다]라고 한다

면 그는 정신적으로 부실한 사람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님의 '하나님을 믿으라','네 오라버니가 산

다. 돌문을 옮겨 놓으라'는 말씀이 있었기에 믿을 수 있는 이유가 있

었고 또 믿었기에 그들의 오빠가 사는 기적을 체험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슴은 두가지 의미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하나는 창세기

부터 계시록가지의 천하만민 모든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의 일반적인

말씀으로 이 말씀을 읽고 들을때 은혜와 생명의 양식이 됩니다.

 

다른 하나는 내게 기적을 가져오는 믿음을 허락하는 직접 내게주신

말씀으로 이 말씀을 읽고 들을 때 은혜와 생명의 양식이 됩니다.

 

다른 하나는 내게 기적을 가져오는 믿음을 허락하는 직접 내게 주신

말씀입니다. 이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바로 내 마음에 친히 주어진 말

씀입니다.

 

오늘 우리가 나사로의 부활에 대한 말씀을 읽을 때 마음에 큰 은혜가

되고 양식이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나도 그렇게 해보자 하고 가족묘

지에 가서 무덤을 파헤쳐 놓고 이름을 부르며 나오라고 한다면 그것

은 큰 잘못입니다.

 

왜냐하면 마르다와 마리아는 부활에 대한 일반적인 말씀을 따라 행동

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직접 주신 말씀 즉 내게 주신 말씀을 따라

행동한 것입니다.

 

성경 로마서 10장 17절에 기록된 '그리스도의 말씀'이라는 이' 말씀'

은 일반적인 말씀인 '로고스'가 아니고 내게 주신 말씀인 '레마'라는

헬라오입니다. 기적을 낳는 믿음은 이 '레마'즉 '내게 주시는 말씀'을

받았을 때 생깁니다.

 

오늘날 많은 살마들이 '내가 하나님을 믿는데 왜 하나님의 역사가 일

어나지 않는가'하고 불평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그 지식만을 가지고 행동에 옮겨서는 안됩니다.

 

말씀을 읽고 기도할 때 성령께서 도와 주셔서 그 말씀이 내게 직접

말씀하는 것으로 감동이 될 때 그것은 하나님이 개인적으로 내게 행하

라고 주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 말씀은 로고수가 아니라 레마인 것입니다.

그 말씀을 믿으면 그 말씀은 하나님의 기적을 나타내 주시는 것입니

다.

 

2. 돌을 옮겨 놓으라

 

주님께서는 마리아와 마르다를 향해서 '돌을 옮겨 놓으라'고 말씀하

셨습니다. 아무리 믿음이 생겨도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지 아니하면 하

나님께서는 성도들의 행동하는 믿음에 따라 그 능력을 나타내십니다.

 

우리들은 흔히 '하나님께서 병을 고쳐주시면 헌신하겠습니다.

축복해 주시면 많이 바치겠습니다'하고 기도합니다. 이것은 순서가 바

뀐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먼저 한 발자욱 옮겨 놓아야 그 다음에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행동하기 위해서는 참으로 어려운 결단이 필요합니다. 돌을

옮겨 놓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 나오는 사렙다 과부의 이야기를 상고해 보십시다. 당시

는 엘리야 시대였는데 삼년 육개월 동안 가뭄이 들어 많은 사람들이

굶주려 죽었습니다.

 

이 여인도 한웅큼 남은 밀가루와 조금 남은 기름으로 떡을 만들어 아

들과 나누어 먹고 죽으려고 나무를 줍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엘리야가

나타났습니다.

 

엘리야는 이 과부에게 레마를 주었습니다.

'그 떡을 만들어서 먼저 내게 가져오라, 야훼께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그 떡과 물 한사발을 내게 대접하면 이 가뭄이 지날 때까지 네 밀가루

통에 밀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기름병에 기름이 마르지 아니하리라

고 하신다'라고 이것은 하나님이 직접 사렙다 과부에게 주신 말씀입니

다.

 

이 레마를 들은 그 여인은 믿을 수 있는 이유는 생겼지만 굶주린 어

린 자식을 바라볼 때 실천하기가 너무도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믿음의 결단을 내리고 믿음으로 떡을 만들어서 물

한사발과 함께 엘리야를 대접했습니다.

 

엘리야가 그 떡과 물을 다 먹고 난 때부터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밀

가루 통에 밀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기름병에 기름이 마르지 않는

것입니다. 레마를 듣고도 실천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기적은 일어나

지 않습니다.

 

벱새다 광자에서 오병이어의 기적도 같은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그곳에서 말씀을 전할 때 수만명이 모였는데 해질녘이 되

었지만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 고 하셨을 때 빌

립은 음식도 없고 돈도 없으니 그만 흩어보내는 것이 좋겠다고 말씀드

렸습니다.

 

그러나 안드레는 예수님의 레마를 그대로 실천하기 위해 떡을 구하러

다녔습니다. 예수님께서 '먹을 것을 주라' 고 직접 말씀했으니 이것은

예수님의 레마입니다. 직접 주신 이 말씀은 믿을 수가 있습니다.

 

안드레는 현재 떡도 없고 돈도 없지만 어떤 방법으로든 이 사람들을

먹일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 믿음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 하던 중

그는 한 어린아이가 도시락으로 물고기 두마리와 보리떡 다섯개를 가

지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안드레는 이 아이에게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이것을 예수님께 드

리면 예수님이 기적을 베푸셔서 모든 사람이 배부를 수 있게 되니 예

수님께 드리라고 설득했습니다.

 

이것은 소년에게는 힘든 일인 것입니다.

매우 시장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소년은 결단을 내렸습니다. 그는

돌문을 옮겨 놓았습니다.

 

불신앙의 돌을 옮겼습니다.

그는 그 떡을 안드레에게 주었고 안드레가 예수님께 가져오자 예수님

은 그 떡을 축사하시고 떼어 주시매 모든 군중이 다 배불리 먹고 열두

바구니가 남게 된 것입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도 진퇴양난에 빠졌습니다.

장사한 지 나흘이 지나 이미 시체가 부패하여 냄새가 나는데 예수께서

는 '네 오라버니가 살리라. 무덤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셨으니 실행

할 수도 안할 수도 없는 처지에 빠졌습니다. 인간사에 그런 일이 일어

난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거기에는 많은 유대인들이 증인으로 와서 보고 있었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가 만일 돌문을 옮겨놓았다가 나사로가 살아나지 않는

다면 그들은 그 동리에서 얼굴을 들고 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두 자매는 당황하고 주저하며 이미 썩은 냄새가 나는데 왜 돌

문을 옮겨 놓으라고 합니까 하고 말씀드렸던 것입니다.

 

그때 주님은 '네가 하나님을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않

았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믿음에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살든지 죽든지 흥하든지 망하

든지 성하든지 쇠하든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결단을 내려야 합

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사람들이 비웃든 말든 이 성과 감정이, 내 경험이

거부하든 말든 주님께서 네 오라버니가 살리라고 하셨고 돌을 옮겨 놓

으라고 하셨으니 그 말씀을 믿고 실행함으로 결단을 내린 것입니다.

 

이 신앙의 결단은 대단히 중요하고 필요한 것입니다.

자꾸 의심을 하면 마귀가 와서 신앙의 상처를 입힙니다.

예수 믿기로 결단을 내렸으면 천국이 있음도 믿고 한결같은 믿음으로

나아가야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 믿음 가운데 역사하는 것입니다.

 

또한 성경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

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진퇴유곡에 빠졌으나 의심이나 세상 논리를 따

라가지 않고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가기로 결단했습니다.

 

그래서 무덤문을 옮겨 놓기 우미해 필사의 노력을 했고 하나님의 기

적을 체험케 된 것입니다. 행함이 중요합니다.

 

3.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습니다. 믿음이 하나님의 영광의 문을 여는 열

쇠가 되는 것입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단호한 믿음의 결단을 하고 필사적으로 실천했습

니다. 자매는 돌에 매달려 손톱이 긁히고 피가 흐르는데도 밀고 당기

고 해서 결국은 그 무덤의 돌을 옮겨 놓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인간이 믿고 행할 수 있는 것은 다 행했습니다. 그 다음은 하

나님께서 일하실 차례인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을 믿고 3백만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해 냈습니다.

그가 할 일은 다 했습니다. 그후 그가 할 수 없는 일은 하나님께서 다

하셨습니다. 홍해수를 모세가 갈랐나요?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여호수아를 보십시오. 여호수아는 믿음으로 칠일동안 여리고 성을 돌

았습니다. 그가 할 일은 다했을 때 하나님은 여리고성을 무너뜨렸습니

다.

 

5년 전, 제가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께서 국민일보를 시작하라는 말씀

을 주셨습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하나님께서 이 나라를 복음화하기

위해서,통일이 되면 북한을 복음화하기 위해서 복음실은 국민일보를

발행하라는 레마를 주셨습니다. 저는 그 그 레마로 말미암아 진퇴유곡

에 빠졌습니다.

 

신문에 대해 알지도 못했지만 신문을 발행하는데 엄청난 돈이 든다는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 사람들 마다 고개를 갸우뚱했습니다. 전문가들

은 더욱 이것은 안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기도할 때 하나님은 반

복해서 신문을 발행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마르다와 똑같이 말했습니다. 마르다가 '주여, 내 오라버니가

무덤에 들어가 나흘이 되어 썩은 냄새가 나나이다'고 한 것처럼 '주

여,나는 할 수 없습니다.

 

나는 전문가도 아니고 그 많은 돈을 우리 교회에서 조달할 수도 없습

니다'라고 했습니다.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저의 마음 속에 레마를 계속

해서 주셨습니다.

 

이 무거운 돌문을 옮겨 놓는 것이 말할 수 없는 정신적인 고통이었습

니다. 저는 혼자 고민하고 또 고민하고 기도하다가 결단을 내렸습니

다. '살든지 죽든지 흥하든지 망하든지 상하든지 쇠하든지 주의 말씀

대로 하겠습니다'라고 기도하고 돌을 옮겨 놓은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할 일을 하니 하나님께선 계속해서 기적을 일으키셔서

오늘날 국민일보는 한국의 5대 일간지 중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처

럼 우리가 할 일을 하면 그 다음은 하나님이 할 일을 해 주시는 것이

빈다.

 

우리들은 모두 다 크고 작은 나사로의 무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

이 남편이든, 아내든, 자녀든, 사업이든 간에.. 그렇다면 우리도 마라

드와 마리아가 한 것처럼 에수님께 편지를 보내야 합니다.

 

'빨리 도와 주소서 당신의 사랑하는 자가 병들었나이다'라고 말입니

다.

 

오늘 우리의 편지는 기도인 것입니다. 마리아와 마르다는 예수님의

레마를 듣기 위해서 편지를 보냈는데 우리도 우리의 문제에 대한 주의

말씀이 임할 때까지 부르짖어 기도해야만 되는 것이빈다.

 

기도하고 또 기도해서 성령께서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주실 때까

지 부르짖어야 합니다.

 

우리 주님으로부터 우리에게 레마가 와서 우리가 불신의 돌을 옮겨

놓고 단호히 믿음으로 실천할 때 우리 하나님은 오늘날도 기적을 행하

여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변하지 않습니다. 오직 우리가 믿지 아니하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합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은 계속해서 '네 믿음대로 될

지어다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늘과 땅을 지은 하나님께서는 불가능이 없습바니다. 사람으로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하십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낙심과 불신앙의 돌을 다 옮겨버리고 우리 하나님

앞에 '주여 내가 믿습니다. 내 입을 넓게 열었으니 말씀으로 채워주시

옵소서 내가 주의 말씀을 믿고 행하겠나이다'라고 믿음의 선언을 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발행일 : 920914

분 류 : 설교

 

 

 
 
 

109

제 목 : 불의한 재판관과 하나님

자료원 : 여의도순복음교회 조다윗목사

구 절 : 누가복음 18장 1-8절

 

 

지난 금요일(10.2) 여러분은 잠실 올림픽 스타디움에서 정말로 기도

를 잘 해주셨습니다. 한시간 동안 우리 성도들이 함께 모여 기도드리

기는 처음인 것 같습니다.

 

어떤 이들은 기도를 드린다 말고 멍하니 앉아 있기도 하고 또 어떤

이들은 기도 도중 자리를 뜨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절대다수의 성도들은 끝까지 기도를 잘 드렸습니다. 이제 이

기도가 우리 개인과 생활, 교회와 국가와 세계의 장래에 큰 변화를 가

져오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왜 기도드리는 것이 그렇게 힘들고 어려울까요? 왜 하나님께

서는 기도에 쉽게 응답해 주시지 않을까요? 그 이유에 관해 예수님께

서는 다음과 같이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한곳에 불쌍한 과부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억울한 일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재판관에게 가서 [나의

억울한 사연을 공평하게 재판해 달라]고 청원했습니다.

 

그런데 이 재판관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불의

한 자였습니다.

 

하물며 과부는 더 무시했습니다. 그는 한동안 이 과부의 호소를 들어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과부가 하도 자주 와서 부르짖고 번거롭

게 한지라 견딜 수 없는 괴로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해도 이 여

인이 하도 나를 괴롭히지 내가 공평하게 이 재퍼을 해주리라]하고 그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 주님께서는 기도에 대한 깊은 내용을 잘 보여

주고 계십니다.

 

1. 과부로 비유된 신자

 

과부는 남편을 잃어버려 의지할 자가 없이 외롭고 슬픈 상태에 있는

사람입니다. 또 인간적으로 무력하고 나약한 처지에 있으며 악한 이들

에게 업신여김으리 당하고 불이익을 당해도 대항할 힘이 없음을 대표

적으로 상징하는 이들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기도드릴 때 꼭 이러한 과부와 같은 느낌이 들 때가

많습니다. 문제를 짊어지고 하나님께 기도드리는데 너무나 힘들고 괴

롭고 자신이 무력하게 느껴집니다.

 

원수 마귀가 나를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데도 내 힘으로는 어

찌할 수 없는 불쌍한 처지에 있는 것같이 느껴집니다.

 

성도들이 죄와 악한 습관에 포로가 되거나 마귀에게 억압당하거나 병

들거나 생활에 실패하고 절망하거나 죽음의 위협을 당했을 때 성경속

의 이 과부와 같은 심정을 갖게 됩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불의한 재판관같이 느껴집니다. 하나님

께서 우리의 기도를 무시하는 것 같아 기도가 힘이 들고 땀이 나며

마음이 집중되지 않습니다.

 

믿음이 생겨나지 않습니다. 내가 아무리 기도해도 소용이 없는 것 같

아 기도를 포기해 버리고 맙니다.

 

또한 마귀는 계속 우리에게 참소합니다.

[너 같은 위인의 기도는 하나님이 응답지 아니한다. 하나님은 너를 조

소한다. 너같은게 무슨 기도냐, 하나님은 너같은 것 알지도 못한다,

너는 멸시당하고 있다. 기도는 집어치워라]

 

이러기 때문에 여러분께서 하나님께 기도 드리러 나갈 때 이 과부처

럼 너무나 외롭고 슬프고 무력하여 업신여김을 당하고 불이익을 당해

도 아무의 도움도 받을 수 없는 처지에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게 됩니

다.

 

불의한 재판관에게 나아가 나의 원수에 대한 원한을 갚아주소서 하되

전혀 무시당하고 마는 것과 같은 심정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2. 이 불의한 재판관이 하나님을 상징하는가?

 

성경은 이 자리에서 왜 하나님을 불의한 재판관처럼 비유하고 있을까

요? 과연 하나님께서는 이 성경에 말씀한대로 불의한 재판관이실까요?

도대체 하나님은 누구이십니까?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은 결코 불

의한 재판관이 아닙니다.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지으셨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형상과 모양

대로 지으셨습니다. 이는 우리가 영적인 존재로 비음받았다는 것을 의

미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같이 죽을 수 없는 영원히 사는 영적인 존재로 지음

받고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서 살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를 지극히 사랑하사, 오직 인간만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얻도록

지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하나님은 빛과 질서와 생명과 풍요의 하나님이신 것입니

다. 어두운 가운데서는 빛을 지으시고 혼돈 가운데서는 궁창을 짓고

질서를 지으셨으며 그리고 물가운데서는 육치자 나타나서 모든 풍요한

오곡백과가 열매맺게 만들어주셨습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되 풍성히 주시는 생명의 하

나님인 것입니다.

 

비록 우리 조상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반역하고 타락해서 마귀의

종이 되어 처절한 고통과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져있을 때도 우리 하나

님께서는 그 아들 예수님을 보내셔서 우리를 구속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 추악과 저주, 절망

과 죽음을 십자가에서 대신 청산하게 하시고, 아무 조건없이 믿기만

하면 구원얻고 영생얻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의 댓가를 지불하여 우리를 값주고 사신 하나

님,이 어찌 좋은 하나님이 아니십니까!

 

그 위에다가 하나님은 우리가 주를 믿을 때에 성령을 보내주셔서 하

나님의 자녀된 것을 우리 마음속에 확정해 주시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만드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위하여 출생시부터 영원 천국에 이르기까지 필요한 모

든 것을 예비하신 이레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병들어 기도할 때

치료해 주시는 라파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를 위해서 대신 싸워주시는 닛시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에게 평안

을 주시는 샬롬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목자가 되시어 우리를

보호하고 이끌어 주시는 로히 하나님이십니다.

 

또 항상 우리를 의롭게 하시는 쯔디케누 하나님이십니다. 또한 우리

와 항상 함께 하시는 삼마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요한3서 2절에 기록된 대로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하시는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3. 불의한 재판관은 누구인가?

 

불의한 재판관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입니다. 그는 원수 마

귀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반역하고 타락한 천사장 루시퍼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매우 아름답게 만드셨는데 그는 자기가 하나님이

되고자 반역을 꾀했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하늘에서 쫓겨날 때 하늘의 천사 3분

의 1을 꾀어가지고 함께 내려와 지금 공중 권세잡은 자로 있습니다.

마지막 때에 그는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지울 것입니다.

 

또한 불의한 재판관은 사람을 무시합니다. 그러므로 바로 이 불으리

한 재판관은 루시퍼 원수 마귀를 상징합니다. 그는 공중권세를 잡고

하나님을 대적하고 사람을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사람을 무시하고 멸시하는 원수 마귀가 하

나님과 사람 사이에 진을 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됩니

다.

 

원수 마귀는 사람들 가운데 와서 영적으로 우상이나 사신을 섬기게

합니다. 모든 우상종교나 사신은 이 원수 마귀가 사람을 유혹해서 생

겨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영혼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어서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심령이 있습니다. 자식은 부모를 찾는 것처럼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을 찾는 마음이 있는데 원수 마귀가 이를 가로채서 참

하나님을 찾지 못하고 우상과 사신을 찾아나가도록 하고 있는 것입니

다.

 

 

 

 

그렇지 않으면 이 원수 마귀는 사람들의 정신 속에 들어와서 정신적

으로 교만하거나 무신론자가 되게 하고 있습니다. 이래서 [하나님은

없다, 신은 죽었다] 고 말하게 만들고 인간이 하나님이 된 것처럼 교

만하게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또 육신적으로는 이 마귀가 사람을 억압하여 여러가지 병들게 합니

다. 오늘날 육신의 병의 대다수는 원수 마귀가 가져다 준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이름으로 이 원수 귀신으리 쫓아내야 하고 그리하면

병은 자연적으로 낫게 되는 것입니다.

 

또 이 원수 마귀는 사람들로 하여금 세속을 따라 살게 합니다.

오늘날 신문.잡지.라디오.TV등 각정 매스미디어는 홍수처럼 사람들의

관심을 하나님께로부터 돌이켜 세상으로 향해서 향하게 합니다.

 

세상 풍속을 좇고 세속에 머물러 있다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주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채 멸망받게 하려고 전력을 기울이고 있습니

다.

 

이 세속의 홍수와 같이 와서 사람들의 관심을 부여잡고 세상으로 떠

내려 가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도덕적으로 부패하고 약하게 만들어서 인생으로 하여금 파

멸하게 합니다. 에덴에서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여 타락시켰고 광야에

서 예수님을 시험하였고 종국에가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게한 장본

인입니다.

 

이 마귀가 하나님 보좌와 인간 사이, 즉 공중의 권세를 잡고 결사적

으로 우리들의 기도를 막고 있어 내용을 모르는 사람은 마치 하나님께

서 몰인정하고 무정하게 우리를 저버리고 돌보아 주시지 않는 것처럼

느끼게 만드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을 원수 마귀가 노리는 것입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

을 오해하게 하여 하나님을 저버리고 돌아서게 하려는 것입니다.

 

4. 과부의 작전

 

성경은 이 과부가 늘 와서 재판관을 괴롭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야로 재판관에게 나아가 [내 원수에 대한 원한을 갚아주소서]하고

끈질지게 간구했습니다. 재판장은 괴로워 견딜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성경에 의하면 그 재판관은 '나를 번거롭게 하니 정신적으로 불안하

고 고통스러워 견딜 수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 여인은 끊임없이 찾

아가 간청함으로 그를 번거롭게 한 것입니다.

 

그는 한동안 그 과부를 모른척 무시하였으나 계속된 간청에 번거로워

그만 견딜 수 없게 되었습니다. 정 괴롭게 되지 재판관은 항복하고 그

여인은 원하는 바를 들어주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라고 이 비유를 드셨는데 우

리가 기도드릴 때 이 과부처럼 늘 부르짖어 기도해야 되며 그래야 원

수 마귀의 진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 보좌에 상달되는 것입니다.

우리를 막고 있는 원수 마귀는 이미 십자기에서 무장해제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이름과 보배로운 피를 의지하고 말

씀으로 계속 마귀의 진을 침노해 가면 마귀는 무너지는 것입니다.

 

다니엘을 보십시오. 다니엘으느 자기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기도하기

로 각오하고 강가에서 친구들과 함께 기도하는데 한 주일을 기도해도

아무 소식이 없어 하나님께 멸시와 무시를 당한 심정이었습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끈질지게 기도하고 침노하고, 두드리고, 찾고 찾으

니 결국은 원수의 진이 무너지고 스무하루만에 군장 미가엘이 응답을

가지고 온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기도는 여리고성을 돌듯이 끈질지게 인내를 가

지고 계속해야 합니다. 한바퀴, 두 바퀴, 세 바퀴 마지막에는 한꺼번

에 일곱 바퀴를 돌았듯이 우리도 끊임없이 낙심말고 주님께 부르짖으

면 하나님은 응답하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끈질긴 기도를 통해 마귀가 불안하고 고통스러워 한길로

왔다가 일곱 길로 도망치도록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반드시 하나님의 응답이 그 뒤에 다가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친히 항상 기도하고 낙심치 말라고 말씀

하신 것입니다. 한동안 마귀는 저항하고 버팁니다. 그러나 끝까지 대

항하거나 버티지는 못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혔을 때 그 흘리신 보배로운 피로

말미암아 마귀의 모든 정사를 다 무너뜨리고 권세를 빼앗고 무장을 해

제해 버리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마귀는 영구히 우리를 대적할 힘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진정한 뜻은 우리가 체험하는 실상과는 대단히

차이가 있습니다. 누가복음 18장 6절로 8절에서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

씀했습니다.

 

"주께서 또 가라사대 불의한 재판관이 말한 것을 들으라 하물며 하나

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지 아니하시겠

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는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

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주님이 오실 마지막 때에는 사람들의 믿음이 타락하고 편한 것만 좋

아해서 이 과부와 같이 불퇴전의 기도를 할 사람이 있겠느냐고 예수님

께서 탄식하고 계신 것입니다.

 

밤낮 부르짖고 원한에 차도록 간절하고 그리고 끝까지 인내하는 믿음

을 갖고 기도할 때 불의한 재판관과 같은 마귀의 진을 타파되고 위대

한 하나님의 응답과 승리가 봇물 터지듯이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원수 마귀는 이와 같이 낙심하지 아니하고 끈질지게 기도하는 사람

앞에 무너져 내립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응답은 다가오는 것입니다.

가족이 구원받고 귀신을 쫓겨나며 하늘나라의 축복이 임하게 되는 것

입니다.

 

성경은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라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열

릴 것이니...' 라고 말합니다.

 

 

 

 

이러므로 여러분, 구하고, 찾고, 두드리고 절대로 낙심하여 물러가지

않는 단호한 각오로 기도하십시오. 그냥 기도해서 안되며 철야기도,

금식기도로 주님께 매달려 기도하는 사람은 결국은 천국을 소유하게

되실 것입니다.

발행일 : 921012

분 류 :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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