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이후의 초기 기독교
(유대적성향의 기독교를 중심으로)
바울은 60년대 초에 순교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따라서 '바울 이후의 기독교사'라고 할 때, 대략 60년대에서부터, 예루살렘 성전멸망 (70년)을 거치면서 기독교가 어떻게 변화, 발전, 전파되는지를 다루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한편 이 역사를 이방인 중심의 헬라기독교와 유대인 중심이며 율법의 유효성을 계속 고수하는 유대기독교로 나누어 관찰해 볼 수 있겠습니다. 우리는 행, 바울의 서신 등을 통해 헬라 중심의 기독교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고, 또 앞으로도 다룰 기회가 많으리라 봅니다. 따라서 이번 글에서는 유대기독교에 초점을 맞추어 기술하겠습니다.
50-60년대
이때 팔레스타인 내에서는 반 로마적인 저항의 분위기가 점점 고조됩니다. 따라서 예루살렘의 초대교회도 이 영향을 받습니다. 행 12,1 이하에 나오는 헤롯왕에 의한 (정확히 말하면, 아그립바 1세, 41-44년 통치) 요한의 형제 야교보의 처형, 베드로의 감금 등은 비록 40년대의 사건이긴 하지만 이러한 당시 사회분위기를 반영합니다.
혹자는 이 사건을 계기로 베드로는 예루살렘을 떠났다고 봅니다. 그리고 갈 2장에서 초대교회의 기둥 중의 하나로 다시 등장하는데 (9절에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 이는 사도회의를 계기로 잠시 예루살렘에 올라와 머문 것이라고 합니다. 이 주장이 맞는지 여부는 판단보류하고 남겨 놓습니다.
'교회의 기둥'의 순서에 야고보가 게바 (베드로)보다 먼저 나오는 데, 이로 미루어 보아 당시 교회의 주도권은 주님의 동생 야고보가 잡고있었던 것 같다. 야고보는 4 복음서에서 예수의 집안을 언급하는 구절에서 (막 6,3이하 그리고 병행구) 만 나오다가 고전 15,7에 부활한 그리스도가 나타난 사람들의 리스트에 등장하고 갈 2에 '교회의 기둥'에 첫 번째로 거명되는 것을 보아, 예수님 살아생전에는 적극적으로 예수운동에 가담하지 않다가 예수님 사후, 예수부활의 사건을 통해 적극적으로 부활의 증인으로 활동했고 예수의 혈육이자, 친형제라는 이유로 예루살렘교회를 이끄는 지위에까지 이르게 된 것 같다.
40년대에 베드로만 예루살렘에서 박해받았고, 야고보가 보낸 사람들에 의해 안디옥 교회가 이방인기독교인들과 공동식사를 하다가 다시 이방인, 유대인으로 나누어 식사를 하게되는 것을 보면 (갈 2,11이하 - 유대인들은 정결법에 따라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이방인들과 같이 식사하는 것이 금지되고 있었다. 이에 비해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통해 믿음 안에서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모두 같다고 보고 함께 교회 안에서 공동식사를 하도록 했다) 야고보의 경향은 복음을 믿되 율법도 함께 지켜야 된다는 견해을 (유대기독교의 입장) 가진 것 같다 (이런 이유로 40년 대에 유대인들의 박해를 받지 않는다. 물론 그도 대제사장 한나스에 의해 62년 처형될 때 죄목이 율법을 위반했다는 것입니다. 요세프스의 Ant 20,200이하 참고). 기독교로 개종한 이방인이 율법을 지켜야 할 것인가에 대해 포용적인 태도를 취한 베드로가 아니라 (갈 2,11이하 참고) 야고보가 40-50년 대에 예루살렘 교회의 실권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유츄해 볼 때, 당시 예루살렘 교회는 위에서 말한 팔레스타인의 사회분위기와 맞물려 전반적으로 (특별히 이방인에게 율법이 계속 유효한 가의 문제에 관해)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는 경향에 있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50년대의 분위기를 알려면 요세프스의 유대전쟁사 2,254이하를 참조).
유대전쟁 (66-70) 이후의 유대기독교
이 부문은 우선 다음의 간략하게 설명한 초대교회사 '신약관련역사(개요)'중 "유대전쟁과 성전멸망" 항목 참조하십시오.
* 유대전쟁과 성전멸망: 유대 땅에서는 기원후 50대 이후부터 젤롯당을 중심으로 로마에 항거하는 저항의 물결이 점차 거세집니다. 결국 66년 유대 전역에서 로마에 대항하는 전면전이 벌어집니다. 그러나 이 항쟁은 로마의 군사력 앞에 처참히 분쇄되는 것으로 끝납니다. (예루살렘 성전 파괴: 기원후 70년). 그 후 3년을 끌며 최후의 일인 까지 저항했던 사해근처 맛사다 전투를 끝으로 팔레스티나 지역에서 저항운동은 비극적으로 종결됩니다. 이로 말미암아 팔레스타인 본토에 살던 많은 유대인들이 당시 로마 전 제국으로 흩어집니다. 이에 따라 예루살렘에 본부를 둔 유대인 중심의 기독교는 급속히 초대교회사에서 그 영향력을 잃어 버립니다. 그리고 이방인 중심의 기독교가 상대적으로 이후 기독교 전파의 중심이 됩니다.
영향력 감소
성전멸망은 유대교에 (엄밀하게 말하면 유대교 성립은 성전멸망이후입니다. 하지만 편의상 사용합니다) 그랬던 것처럼, 예루살렘을 거점으로 한 유대기독교에 큰 타격을 줍니다.
예루살렘은 구약의 예언에 따르면 장차 메시아가, 즉 그리스도가 재림할 곳이요 (롬 9,33; 11,26), 여기에서 복음이 시작되기에 (롬 15,19), 이방인은 예루살렘에 복음의 빚진 자들 (롬 15,27)로 이해되었다. 이런 점에서 예루살렘 교회는 초대기독교사 모태요, 출발점이라고, 특별히 예루살렘에 자리잡은 예루살렘 교회 교인들은 (주로 유대인기독교인) 생각하였다. 실제로 행의 여러 기사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예루살렘교회에 대해 정도에 따라서는 비판적이였던 바울의 서신에서도 예루살렘 교회가 당시 초대기독교사에서 가진 권위가 (갈 2,11이하) 확인된다.
이런 점에 비추어 볼 때, 예루살렘의 함락은 예루살렘교회가 가진 위의 생각이 잘못이었다는 쪽으로 이끌어가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이 공동체가 이전에 가졌던 초대기독교 내에서의 위상이나 영향력을 현저히 약화시켰다.
그러나 성전 멸망에도 불구, 예루살렘 내에 유대기독교가 남아있다고 본다. 하지만 이 공동체는 더 이상 멸망 전의 예루살렘교회가 아니였다. 주 세력은 유세비우스의 교회사 3,5,3의 전설같은 이야기에 의하면 성전 멸망 직전 계시에 의해 펠라로 (요단 동편의 헬라도시) 옮겼다고 한다. 어찌되었건 초대교회는 예루살렘 멸망과 함께 초대교회사에서 사라져 버렸다 (막 13,14이하에 그러한 암시가 엿보임).
몇가지 주의할 점
그렇다고 해서 유대기독교가 전멸했다고 말해서는 않된다. 우리는 유대기독교와 관련해서 몇가지 편견을 갖기 쉽다.
즉, 교회사적으로 볼 때, 초대교부 이래로 (이레네우스 이래로) 바울신학의 영향을 받아, '율법에서의 자유'를 표방하는 이방기독교가 옳다고 보고, 유대기독교를 율법을 옹호하는 유대교의 한 갈래로 보면서 이들을 이단시하거나 최소한 색안경을 쓰고 비판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혹은 보통 성서에 있는 자료만으로 초대기독교를 재구성하려하면서 유대기독교의 존재를 무시해버리는 잘못에 빠지기도 한다 (특별히 사도행전과 바울의 편지 만을 가지고). 이 결과 기독교사는 현저히 축소되어 버린다. 즉, 예루살렘 중심의 유대기독교와 바울 중심의 헬라기독교 간의 대립 (바울) 내지 협력을 통해 (행) 기독교가 예루살렘에서 로마 쪽으로 진출, 확장되는 작은 그림을 그리기면서 유대전쟁 이후에 유대기독교는 존재가 미미하다고 간단히 생각해 버린다.
그러나 헬라쪽으로 퍼져나가는 복음은 특별히 바울의 지휘 하에서 만 (행의 기본구도)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바울은 그 중 한 부분이다. 유대 명절에 (특별히 유월절에) 당시 세계 각지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이 제사들 드리러, 혹은 순례하러 예루살렘에 왔다. 이들은 여기서 (예루살렘 초대교회를 통하던 아니면 소문으로 듣던 간에, 그리고 예루살렘에 초대교회가 하나만 있었던 것도 아니다. 언어의 차이로 아람어 중심으로 예배드리던 교회와 헬라어로 예배드리던 교회가 -엄밀히 말하면 개인 집, 한번에 예배드릴 수 있는 인원 20-30명에 불과- 각각 여러개 있었다.)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접하고 각자 살던 곳으로 가서 이 복음을 전한다. (참고 행 11,19이하 "때에 ...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그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도를 ... 전하는데,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 주 예수를 전파하니..."). 혹은 각 헬라교회나 예루살렘교회도 전도자를 파송한다 (행 11,27; 갈 2,11이하; 행 13,1이하). 즉, 복음전파는 동시다발적이며 다양한 방식과 경로를 거쳐 이루어진다.
그리고 (바울서신에 의거) 유대기독교와 이방인들은 서로 상반되는 것이라고 만 생각해서도 않된다. (바울에 의하면 유대적 기독교는 복음에 의해 자유인이 된 이방그리스도인들을 다시 속박시키는 것이다 - 예: "... 저희가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갈 2,4,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3,3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5,1). 그러나 마태복음의 "이 악한 자들을 (포도원 주인의 아들을 죽인 이들, 즉 유대인들) 진멸하고 포도원은... 다른 농부들에게 (즉 이방인들에게) 세로 줄찌니이다" 마 21,41,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 세례를 주"라는 예수님의 명령과 (28,19)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5,17,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를 버리고 또 그같이 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5,19의 두가지 견해는 (적어도 바울의 경우를 놓고 볼 때) 서로 상치되는 이야기가 같이 있는 것 처럼 보인다 (율법준수와 이방인이 마태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것). 그리고 이방인을 이미 그 구성원으로 상정하면서도 율법과 복음에 대해 어떤 갈등도 내비치지 않는 도마복음서도 많은 것을 시사한다. 즉, 바울적인 잣대로 만 유대기독교를 보면 이 기독교 자체에 대해서도 그러하거니와 초대교회사을 서술할 때도 편협되고 제한된 그림을 그릴 수 밖게 없게 된다.
유대교와의 관계
초대교회사 '신약관련역사(개요)'중 "바리새인 중심으로 재편된 유대교" 항목에서 일부 밝힌 대로 성전멸망은 당시 유대교에 큰 변화를 일으킵니다 (위에서 밝혔듯이 엄밀한 의미의 유대교는 이제부터 시작됩니다). 멸망전까지 유대교는 성전 중심으로 운영되었습니다. 그리고 느슨한 연계상태였고 내부에 다양한 분파들이 많았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사두개파, 바리새파 등등)
성전이 파괴는 지금까지 유대교를 결집시켜주던 핵심이 사라지게 된 것을 의미하는 것이였습니다. 그래서 유대교를 잇는 정신적인 지주로 경전을 정합니다. (90년 지중해 연안의 도시 얌니아에서 구약이 확정됩니다) 그리고 성직자계급의 사두개인들 대신 평신도들인 바리새인들이 주도권을 잡습니다. 이제부터 중요한 것은 성전이 아니라 경전이요, 그 경전을 어떻게 해석하는냐 였습니다. 대표적인 학파로 개방적인 힐렐과 엄격한 샴마아이 두 파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유대교 내의 이단들을 척결, 청소하는 작업이 벌어집니다.
이와 관련 아주 유용한 자료가 하나 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드렸던 18개로 이루어진 기도문 중에 12번 째 기도문: "변절자에게 희망이 없게하시고 폭력의 나라를 우리의 시대에 주님께서 근절하소서. 나사렛인과 이단자들은 이 순간 죽게하소서. 그들은 생명의 책에서 지워지게 하시고 의인과 함께 계수되지 말게 하소서. 폭력을 행하는 자를 무릎꿇게 하시는 야훼여 찬양을 받으소서"
이런 와중에 지금까지 유대교의 한 분파로, 유대교 내에 있었던 유대기독교는 (바리새인 주도하의) 유대교에서 쫓겨납니다. '마태복음 연재'에서 여러차례 밝힌 것 처럼 마태복음 내에서 유독 예수와 바리새인과의 논쟁이 많은 것은 마태의 공동체가 그런 쓰라린 경험을 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에도 그리스도인들이 바리새인들에 의해 공동체에서 추방당했던 역사적인 사실을 반영하는 기사가 나옵니다. 이도 바리새인 중심으로 재편되어가는 성전멸망이후의 유대교를 배경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 부모들이 이렇게 말한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저희를 무서워함이러라" 9,22, "그러나 관원 중에도 저를 믿는 자가 많되 바리새인들을 인하여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니 이는 출회를 당할까 두려워함이라" 12,42, "사람들이 너희를 출회할 뿐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 하리라" 16,2).
즉, 전체적으로 볼 때 율법준수의 문제에 개방적이였던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나 헬라지역에 사는 유대인으로서 그리스도인이 된 이들은 (대표적인 사람이 바울)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율법으로으로 부터 자유로움을 의미한다고 생각했다. 혹은, 율법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유대인들처럼 그렇게 엄격하게 정결법이나 율법조항들을 준수하지는 않았다. 이들의 주위환경은 팔레스타인이 아닌 이방지역이였고 따라서 자의적으로, 혹은 자연스럽게, 혹은 유대교에 의한 박해로 (참고: 스데반의 박해) 유대교와 처음부터 구분되어 있었다. 이에 반해 유대기독교는 율법에 충실했고 따라서 다양한 분파를 가지고 있었던 유대교 내에 주후 70년 까지 머물러 있었다. 그러다가 성전 멸망이후 바리새인들에 의해 유대교가 강경노선으로 재편되는 과정에서 예수그리스도를 구약에서 예언한 메시아로 믿는 유대그리스도인들은 사교로 몰려 유대교에서 추방당한다.
유대기독교의 존재
사도행전은 서방쪽으로 (즉 로마쪽으로) 진출하는 바울 중심의 헬라기독교에 관해서만 다루며 (요단) 동쪽에 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바울이 회심후에 아라비아로 갔다는 사실은 [갈 1,17] 비록 바울적인 공동체이긴 하겠만 아라비아에도 교회가 있었음을 추측해 볼 수 있게한다. -단, 바울이 거기서 선교를 했다는 가정하에).
그러나 일반적으로 시라아에 초기 단계부터 유대적기독교적인 성향의 공동체가 있었다고 여겨진다. 유대적인 경향의 마태복음, 히브리서, 그리고 요한 계시록도 (비록 전적으로 유대기독교을 대변한다고 볼수는 없지만) 유대기독교가 존속했다는 간접적인 증거이다.
그리고 150년 경의 주교 Papias von Hierapolis에 의하면 "선교사 빌립은 소아시아에 정착했는데 이는 예루살렘교회에 속한 이가 소아시아로 온 것이다"라는 설명이나 교부들의 글에서 언급되는 "나사렛복음서", "에비온복음서" 혹은 "히브리복음서"등도 유대기독교 공동체의 계속적인 존재을 시사한다.
예루살렘 내의 유대기독교 공동체의 최후
초대 교부 헤게쉽의 글에 의하면 (대략 180년 경 이 글은 유세비우스의 교회사에 인용됨 교회사 3,11) 야고보의 처형이후 예수의 친척인 클로파스의 아들 시몬이 그 뒤를 이어 예루살렘교회의 수장이 된다. 그는 이 공동체를 펠라로 옮겼다가 다시 예루살렘으로 이끌어 온다. 도미티안 황제 치하에 (81-96년) 예수의 친척들은 황제로부터 심문을 받았으나 무죄로 판명받고 풀려 나온다 (교회사 3,10). 시몬은 107년 유대교의 한 분파이며 이단이라는 죄명으로 처형된다. 이러한 헤게쉽의 증언이 역사적인 사실인 지는 확인할 수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예수와 혈연관계에 있는 이들이 계속 이 공동체의 지도자였다는 점과 바 코바의 난 까지(팔레스타인 유대인의 로마에 대한 항거 115년 경 발생) 이 공동체가 계속 예루살렘에 있었다는 점이다. 유대기독교인들은 바 코바에 의해 이미 박해받았음으로 이 항거 운동에 참여할 수 없었다. 그리고 바 코바의 항거 이후 아에리아 카피톨리나로 개명된 예루살렘에서 유대인이 거주하는 것이 전면 금지된다. 그러므로 이 공동체도 더 이상 예루살렘에 있을 수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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