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다시 일으켜주시는 주님/요한복음 20장 24-29절

by 【고동엽】 2023. 1. 21.

다시 일으켜주시는 주님// 20010325

2001-12-08 17:16:49 read : 211

 

주일 낮예배// 요한복음 2024-29

 

< 용기를 주는 부모가 되십시오 >

 

오늘날 우리 자녀들이 가장 원하는 부모는 어떤 부모일까요?

말은 안하지만 자녀가 실패했을 때 이해해 주고 용기를 주는 부모를 원할 것입니다.

자녀들이 "우리 부모님은 진정으로 나에게 격려를 주는 분이다!"라는 생각을 하면

그때부터 자녀들은 자기의 고민과 약점과 부끄러움을 다 털어놓게 될 것입니다.

부모에게 자기의 고민을 털어놓는 자녀는 결코 탈선하지 않는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가끔 자녀들은 학교 성적으로 인해 실패를 겪습니다. 그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성적으로 어떻게 하려고 그러냐? 공부도 못하면서 왜 사냐"라고 해야 합니까?

운전면허 시험장에 가면 별 것 아닌 운전면허 시험에서도 벌벌 떠는 부모들이

매달 시험에 시달리며 지내는 자녀들의 심정을 너무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물론 부모의 마음 압니다. 다 자식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런 것 아닙니까?

어느 시대, 어느 문화에서도 부모의 자식 사랑이 정말 대단한 것은 부인 못합니다.

그 사랑이 귀찮습니까? 그렇다면 부모 사랑을 떠나 세차장 일을 하면 좋습니까?

많은 자녀들은 부모 사랑의 귀중함을 모르고, 세차장 일도 괜찮다는 환상을 합니다.

 

어쩔 수 없어서 고학하면서 세차장 일을 하며 꿈을 키우는 것은 위대한 일이지만

부모 사랑이 귀찮다고 집을 떠나 세차장 일을 하는 것이 무슨 그리 좋은 일입니까?

제가 18살에 집을 떠나 남산에서 세차장 일을 했었는데 이틀 하니까 못하겠습니다.

이틀째 되는 날 밤에 세차하던 자동차 바퀴 옆에 물걸레를 놓고 털썩 주저앉아

부모님의 품을 떠나는 것은 환상적인 일이 아니고 비참한 일이라는 생각을 하며

부모님 마음 상하게 한 것을 죄송하게 생각했습니다. 우리에게는 부모님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삼 일째 되는 날 말도 없이 세차장에서 돈도 안 받고 그곳을 탈출했습니다.

미국에서 공부할 때는 틈틈이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7개의 직업을 가졌었는데

그때는 세차장 일보다 더 몸이 고된 적도 많았지만 꾸준히 일할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일 자체가 보람있고, 좋은 일이고, 뚜렷한 목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부모님 싫다고 집 떠나서 세차장 일 하는 것은 하나도 좋은 일이 아닙니다.

 

절대로 그런 일은 따라 하지 마십시오. 추억도 별로 없고 환상적인 일도 아닙니다.

우리 자녀들은 부모님의 헌신적인 사랑에 대해서는 <큰 감사>로 보답해야 합니다.

자녀 사랑하는 방법이 조금 부족한 것을 가지고 <큰 감사>마저 망각하면 안됩니다.

그러나 그런 문제점을 줄이기 위해 부모들도 자식을 <큰 사랑>으로 키워야 합니다.

 

< 자녀의 사랑을 존중해주십시오 >

 

공부하는 문제와 더불어 자녀들에게 이성 문제가 생기면 부모들은 바짝 긴장합니다.

물론 자녀들에게도 사랑이 필요하기에 이성교제를 원하고 사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 사실을 알지만 솔직히 말해 자녀의 이성교제 문제는 부모들에게 불안감을 줍니다.

그러나 마음은 불안해도 불안감과 의심을 은근히 표현하여 반발심을 주기보다는

"나는 너를 믿고 있다"는 믿음을 자녀에게 표현하여 그들의 판단을 존중해주는 것이

오히려 자녀들의 정신을 번쩍 나게 해서 그의 행동을 바르게 만들게 될 것입니다.

 

우리 자녀들이 어느 순간 사랑의 감정을 느끼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바라보는 부모의 시선도 매우 자연스러워야 합니다.

그리고 흐뭇하게 바라보면서 사귀는 아이가 좋은 아이라면 같이 축하해주어야 합니다.

불안하고, 불량한 것처럼 보여도 공개하여 사귀게 하면 별 일이 아닌 것처럼 됩니다.

 

우리의 눈에는 자녀의 사랑이 시시하게 보여도 자녀들에게는 매우 소중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에 불안감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아이의 사랑을 존중해야 하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후원해서 밝은 곳에서 사귀게 하고 자기를 지키는 법을 가르쳐주며,

때로는 자녀의 이성 친구에 대해서 넌지시 물어보는 여유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또한 사랑의 기회를 붙잡기 위해서는 땀흘려 준비하는 인생이 되어야 함을 가르치고,

자녀들의 사랑이 순수한 만큼 쉽게 상처받을 수 있다는 것도 미리 말해주어야 합니다.

그런 식으로 자녀의 사랑을 흐뭇하게 지켜보아 주시면 자녀는 크게 잘못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태풍이 강하게 불어도 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바람이 가라앉게 되는 것처럼

자녀들이 쉽게 사랑의 열병에 빠지는 만큼 그 사랑은 쉽게 가라앉을 수도 있습니다.

 

그처럼 조금만 기도하면서 기다리면 되는데 그 사랑과 우정을 억지로 막아 보십시오.

그러면 시간이 지나면서 오히려 둑이 터지듯이 큰 문제가 발생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므로 자녀의 판단을 믿어주십시오. 우리가 정말 바르게 키우려고 노력했다면

틀림없이 정상적인 판단을 가지고 사귈 것이고, 잘못된 아이라면 멀리할 것입니다.

그런 판단 정도는 우리 자녀들이 할 수 있게 키우고, 또한 할 수 있다고 믿어야 합니다.

 

이제 생각을 조금 바꿔보십시오. 젊었을 때 잠깐의 사랑의 기분을 맛보게 하는 것은

오히려 인생의 목표의식을 세우고, 정신을 차리게 하고, 유치함에서 성숙함으로 이끄는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기회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저는 사실상 84년까지 그런 진지한 사랑의 감정이 없어서 삶의 목표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84년에 하나님을 깊이 섬기면서부터 진정한 사랑의 실체를 아는 순간,

그때부터 삶의 진지해지고, 의식이 생기고, 인생의 진로를 생각해보는 눈이 생겼습니다.

그런 과정을 우리 자녀들이 일찍 겪는다고 해서 너무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자녀들이 그런 사랑과 우정의 탑을 쌓는 과정에서 양보와 이해를 배우게 되고,

사랑의 탑을 쌓다가 실패하면 실패를 통해서도 얼마나 많은 것을 배우는지 모릅니다.

 

여러분! 우리의 자녀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봐 주십시오.

멀리 지켜보면서 자녀들을 믿어주면 자녀들은 절대로 그 믿음을 배신하지 않습니다.

성급한 판단으로 자녀를 의심하고 불신하면 자녀들의 마음과 정신이 병들게 되지만

자녀를 믿어주고 그를 향해 따뜻한 사랑과 격려와 위로의 말을 해주면

그런 모습이 실패와 고난을 딛고 일어서게 하는 가장 소중한 자양분이 될 것입니다.

 

< 도마에게 다시 찾아오신 주님 >

 

이제까지 말한 모든 자녀 교육방법은 사실상 성경에 나오는 주님의 교육방법입니다.

그처럼 부드럽게 사랑하는 자녀를 이끄는 모습이 오늘 본문에도 잘 나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은 실패한 제자 도마입니다. 그 도마의 모습은 우리의 모습인데,

실패한 제자 도마를 부드럽게 이끄시는 주님의 모습은 우리에게 정말 감동적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오셨을 때 도마는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왜 없었을까요? 그 추리를 위해서 도마의 성향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요한복음 1116절을 보면 주님께서 나사로에게 가자고 할 때 도마가 말합니다.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그 모습을 보면 도마는 참으로 열정적인 사람입니다.

 

열정은 참으로 필요한 것이지만 문제는 열정이 쉽게 극단적이 될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선천적으로 열정이 있는 분들이 있는데 그 열정은 꿈과 지혜가 겸비되도록 해야 합니다.

가끔 보면 열정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면서 엉뚱한 곳에서도 열정을 보이는 분들이 있습니다.

어떤 분은 차 먼저 빼는 문제를 가지고 열정적으로 사생결단을 하는 합니다.

어떤 분은 남편이 생일을 한번 잊었다고 한달 이상 말을 하지 않는 경우도 있고,

어떤 분은 퇴근해서 집에 돌아왔는데 아내가 자고 있다고 다시 나가 버립니다.

도마도 그처럼 속이 상하면 말없이 뛰쳐 나아가는 극단적인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극단적인 성격의 도마는 주님이 돌아가신 허탈함에 감정을 절제하지 못하고,

아마 어디에 가서 방황하면서 자기의 생을 한탄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나중에 와서 하는 말이 "! 주님의 부활을 못믿겠다"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말합니다. "내가 그 손의 못 자국을 보고 그 못 자국에 손가락을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다"라고 말입니다(26).

 

가까이 가서 눈으로 꼭 확인해야 믿음이 생기고 사랑이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어느 정도 거리가 떨어져 있는 것이 사랑의 확인에 좋을 수도 있습니다.

자칫 하면 가깝다는 이유로 무례한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않는 것인데 허물없음과 무례를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 사이에는 적당한 거리가 때로는 필요합니다. 그래야 서로가 잘 보입니다.

거리 없는 사랑은 맹목입니다. 거리를 두는 것이 사랑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명목으로 무례하게 행해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과 믿음에는 가까운 친밀성도 필요하지만 거리를 둔 존경심도 필요합니다.

 

그런데 도마는 존경심과 신비를 부인하고 자기 눈과 손으로 확인하겠다고 합니다.

그처럼 도마는 의심이 많고 비판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얼마나 답답한 일입니까?

사람과 함께 일을 하다 보면 이런 안타까운 일을 만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떤 분은 분위기를 답답하게 만듭니다. 오히려 일을 꼬이게 만드는 길로 갑니다.

그대로 직선적으로 말해서 상대방과 동료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항상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모든 것을 삐딱하게 보고 송곳처럼 꼭 찌르는 말을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자기의 맡은 일을 잘 감당하느냐 하면 사실상 그렇게 하지도 못합니다.

그렇게 사니까 자신도 말을 한 다음에는 불편하고 답답하고 공동체도 답답해집니다.

우리는 항상 답답하게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시원하게 만드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처럼 주님도 안믿고, 제자들도 믿지 않는 도마의 모습을 보십시오. 답답한 일입니다.

정말 주님으로서는 속상한 일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다시 그를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그를 만나 주시고 그를 만족케 하시고 그의 믿음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그래서 오늘 26절에 나오는 '다시'라는 말이 얼마나 감동적인 말인지 모릅니다.

연약해서 도마가 주님을 아프게 하지만 다시 주님은 그를 찾아와 일으켜 주십니다.

 

< 감정의 깊은 터치가 필요합니다 >

 

이 장면을 보면 우리 주님이 우리를 어떤 모습으로 만나기 원하는지를 알게 됩니다.

주님은 우리와 머리로 만나기를 원치 않습니다. 뜨거운 가슴으로 만나기를 원하십니다.

그처럼 신앙생활은 구체적으로 가슴으로 체험해야 하고, 삶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가장 소중한 힘의 원천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이 장면은 실패한 사람을 일으킬 때 감정의 깊은 터치가 중요함을 보여줍니다.

예를 들어, 자녀들이 학교에서 매를 맞고 돌아와 그 말을 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선생님의 매를 받아들이게 하면서도 자녀의 감정을 받아주는 태도는 가져야 합니다.

자녀들이 그 일을 굳이 부모에게 말하는 이유는 자신의 감정을 알아달라는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네가 맞을 짓을 했겠지 그것 가지고 뭘 그러니?"라고 하면 될까요?

물론 맞을 짓는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짓을 했는가 하는 것은 두 번째 문제입니다.

중요한 것은 먼저 감정을 위로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상했겠구나. 지금은 좀 풀렸니?"

그렇게 1차적으로 감정을 위로하고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교육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이미 인정을 받았기 때문에 자신의 잘못도 순순히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조급하게 자녀의 감정은 무시하고 어른 입장만 내세우면 교육이 되겠습니까?

자녀들도 대부분은 꾸중들었을 때 스스로 그럴 이유가 있다는 점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가 그것을 확인시키려고 하기보다 그 감정을 생각하고 위로한 후,

아름다운 교육의 장으로 자녀를 이끌어낸 후 자녀들의 잘못을 깨우쳐주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항상 먼저 감정을 받아들인 뒤 감정의 깊은 터치 후에 교육을 해야 합니다.

감정의 깊은 터치가 없으면 참다운 교육의 의미가 없다는 것을 주님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의심하는 도마에게 다시 찾아와 주셔서 그의 속상한 감정을 이해하는 모습으로

도마에게 접근하셔서 기어이 도마에게 깨달음을 주시는 우리 주님을 보십시오.

우리는 이와 같은 주님의 사랑과 이해가 넘치는 모습을 배우고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 진정한 믿음을 회복하십시오 >

 

그처럼 주님께서 도마의 실패를 덮어주시고 그의 감정을 위로한 후 어떻게 하십니까?

도마의 감정과 마음이 열린 것을 보시고 그 열린 마음에 필요한 한 마디를 하십니다.

어떤 말씀을 하십니까? 29절을 보십시오.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는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주님께서 도마에게 진정 원하시는 것은 <진정한 믿음>의 회복임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진정 원하시는 대로 본 고로 믿지 마십시오. 기적 때문에도 믿지 마십시오.

그런 것이 없을 때 더욱 믿어 보십시오. 하나님이 그 믿음을 보증해주실 것입니다.

때로 어려움이 있다고 믿음을 불신하면 어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이 되겠습니까?

 

서울 강남에 초등학교 3학년 아이가 있었는데 이 아이의 신앙은 정말 대단했습니다.

새벽기도 같이 가자고 조르는데 어리다고 엄마가 새벽기도에 데리고 가지 않자

매일 새벽기도가 끝날 때까지 집에서 엄마를 기다리며 기도하던 아이였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성탄절 2주 전에 교회 가다가 트럭에 치어 그 자리에서 즉사했습니다.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 아이는 강남으로 이사하기 전에 서교동에 살고 있었는데

그 며칠 전에 다니던 초등학교 선생님에게 이런 편지를 띄워 눈물을 흘리게 했습니다.

"선생님! 저는 이곳에 전학 와서 잘 지내고 있어요.

선생님! 저는 선생님을 사랑하는데 선생님이 마음속에 예수님을 모셨으면 좋겠어요.

선생님에게 성경을 보내 드릴 테니까 선생님 꼭 성경 보세요. 선생님! 사랑해요!"

 

지금 그 아이의 부모들은 자기 딸 윤정이의 뜻을 생각해서 윤정 선교회를 세우고

지금까지 약 20년 동안 어려운 사람들, 가난한 신학생들과 목회자들을 돕고 있습니다.

 

믿음생활 하다 보면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신비스러운 일을 만나게 됩니다.

어느 날 갑자기 내 사랑하는 사람이 내 곁을 떠나야 하는 이유를 정말 알 수 없고,

왜 잘 믿으려고 하는 나에게 이런 어려움이 있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그래도 믿음을 가지고 사십시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을 사십시오.

이성적인 존재로 지음 받은 우리는 모든 일에 납득이 될만한 설명을 요구하지만,

설명되어지지 않는 신비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믿음의 축복은 시작될 것입니다.

 

얼마 전에 SBS에서 덕이라는 드라마가 방영된 적이 있었는데 이런 얘기라고 합니다.

덕이를 보면 답답합니다. 가족을 떠나면 충분히 잘 살 수 있는데 가족을 지킵니다.

너무 답답할 정도로 순진합니다. 그러나 그 모습이 현대의 삭막함에 도전합니다.

믿음과 상관없이 그런 모습은 정말 하나님이 보시기에 칭찬할 만한 인물입니다.

 

그 드라마의 작가 이희우 씨는 20년 전 사랑하는 어린 딸을 화상으로 잃었습니다.

마음의 고통을 감당할 수 없어 막막한 느낌으로 지내는 그에게

어느 날 예수님이 찾아왔습니다. 그 감격과 사랑을 항상 마음속에 간직하던 차에

이번에 덕이라는 인물을 통해서 순수하고 우직한 주님의 사랑을 표현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사실상 우리에게 기적을 베풀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오신 중요한 목적은 우리 인생의 주인이 되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삶에 다가오는 풍랑은 잃어버린 예수님을 찾는 계기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기적을 보면 그것으로 예수님을 찾고, 기적이 끝나도 예수님을 찾아야 합니다.

 

< 아름다움을 향해 돌아서는 능력 >

 

믿음이란 무엇보다 예수님 안에서 아름다움을 향해서 돌아서는 능력입니다.

자세히 보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아름다운 면과 추한 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극심한 고통을 가져다주는 기도제목이 나중에 풍성한 축복이 되는 경우가 많고,

"운이 좋았다"라고 좋아하던 그것으로 인생이 망치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생각을 바꾸면 세상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어둔 밤에 보면 모든 사물이 검은 실루엣처럼 보이지만

밝은 아침에 보면 그 모든 사물이 저마다 아름다운 빛을 뽐내지 않습니까?

 

세상의 어두운 면만 보면 어떻게 이 난국을 헤쳐나갈까 하는 생각이 들지만

밝은 면으로 보면 그런 대로 세상에는 많은 희망과 길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사물의 두 면 중에 밝은 면만을 주로 보면 삶도 밝아지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의 능력이고, 그래서 오늘날 우리에게 이 믿음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80년대 초반 우리는 일인당 얼마씩의 빚을 지고 있는 나라라고 염려했습니다.

저도 불안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88올림픽 때까지 급격히 경제가 올라서더니

너끈히 그 어려움을 이겨내고 세계 속에 우뚝 섰습니다.

 

80년대 미국은 거의 망할 것처럼 떠들어댔습니다.

무역 적자가 너무 심하고, 미국의 부가 다 일본으로 들어간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무역은 계속 역조이지만 자본의 유입은 그 이상이 되었습니다.

결국 미국은 90년대에 엄청난 부를 다시 회복해 옛날의 경제 실력을 회복했습니다.

 

다 망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반드시 축복과 행복의 길이 있습니다.

행복은 많이 가진 사람의 것이 아니라 많이 누릴 줄 아는 사람의 것입니다.

채워져야만 만족할 수 있다면 우리에게는 영원히 만족이 없게 될 것입니다.

 

요새 자살 사이트란 것을 통해서 자살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고 합니다.

살아가면서 자살 충동, 이혼 충동을 한번도 느껴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요?

그러나 그런 충동 속에서도 인생을 속단하지 않고 참고 기다리면서

삶의 불씨를 되살려 가는 인생이 멋진 인생이 아니겠습니까?

 

어떤 분은 이제 모든 것이 끝장났다고 말합니다. 아닙니다. 그것은 끝장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반드시 하나님의 선한 계획과 선한 손길이 있을 것입니다.

때로는 그 손길이 너무 섬세하여 우리의 덤벙덤벙한 눈에는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 등불을 들고 희망의 빛을 비추십시오 >

 

그러므로 주님 안에서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특히 실패와 쓰라림을 숙명으로 알고 있는 현대인에게는 더욱 그렇습니다.

그래서 전도하면서 "당신은 죄인이요!"라고 너무 그렇게 윽박지를 필요 없습니다.

어차피 주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런 죄책감에 찌든 인생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가지고 그들에게 <실패한 자를 일으켜주시는 주님>을 전해야 합니다.

그런 안타까움도 모르고 때로 우리의 초청을 거절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야속합니다.

우리의 사랑을 그렇게도 몰라줍니다. 그러나 그분들의 거절을 거절로 보지 마십시오.

우리가 믿었을 때를 보십시오. 우리는 거절 안했습니까?

다른 사람의 사랑에 야속하고 매몰찬 모습으로 반응했던 적은 없었습니까?

그러므로 거절을 거절로 보지 말고 더 큰 사랑을 보여 달라는 사랑의 요청으로 해석하십시오.

 

얼마 전에 인터넷을 통해 "친구야! 정말 미안하다!"는 한 소녀의 글을 읽었습니다.

그 친구를 열심히 전도했는데 전도하지 못하고 교통사고가 나서 먼저 죽었던 친구!

그 친구를 생각하면서 이 소녀는 친구의 무덤에 울었다고 쓰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다시 일으켜주시는 예수님>이 삶의 해답임을 주위에 전해야 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해답을 얻었다고 땅 집고 헤엄치려고 하는 사고를 가집니다.

땅 집고 헤엄치려고 해보십시오. 그러면 결코 수영의 참맛과 기쁨이 없을 것입니다.

진리의 바다 속으로 쑥 들어가려는 기개가 있어야 신앙의 맛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헌신도 하지 않고 무엇인가 소중한 것을 던지려는 용기도 없이 진리를 알겠습니까?

부끄럽다고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교회 밖에서만 맴돈다면 무슨 변화가 있겠습니까?

진정 어둡다면 비를 들고 내가 지구의 한 부분으로 쓸려고 해야 하지 않습니까?

 

어떤 분의 말을 들어보니까 요즘 기독교인이 낀 술자리에서 안주를 안 시켜도 된답니다.

왜냐하면 기독교인들을 입으로 씹는 것만 해도 충분히 안주가 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사실상 우리들에게는 믿는 사람으로서 부끄러운 모습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절망하고 한을 토하고, 때리는 말, 비판하는 말로 남의 흠집만 잡는다면

그러한 질서 없는 맹목적인 분노는 사회에 영향도 미치지 못하고 자기도 해칩니다.

오히려 더 어렵게 만들고, 더 망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그런 자세입니다.

어둡다고 원망만 하기보다는 작은 등불이라도 하나 들고 있는 것이 낫지 않습니까?

항상 주님의 등불을 들고 어둔 세상에서 희망의 빛으로 사는 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