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 나를 바치는 삶
2002-10-15 15:02:52 read : 6089
고전 10:14-17 // 021006
< 거룩한 삶을 사십시오 >
옛날에 집안에서 가장 큰 문제거리는 '아내가 바람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요새는 집안에서 가장 큰 문제거리가 '아내가 집안에만 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몸은 집에 있지만 컴퓨터로 채팅하면서 "나도 아저씨가 보고 싶어요!" 한다고 합니다.
얼마나 유혹이 많은 시대인지 모릅니다. 이런 유혹이 많은 시대에서도
교회 열심히 다니는 분들의 탈선은 일반인에 비해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래서 요즘 현명한 남편은 아내의 사회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해줍니다.
믿지 않는 남편 중에서도 "당신만은 교회에 나가 보라!"하는 남편들이 많아졌습니다.
왜냐하면 아내가 열린 공간으로 나와야 그만큼 가정이 행복해짐을 알기 때문입니다.
폐쇄된 공간에서는 더 타락하기 쉽고, 열린 공간에서는 거룩한 삶을 살기 쉽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흔히 산 속에 기도하러 들어가야 더 거룩해지는 줄 압니다.
그처럼 일상의 삶과 조금 달라야 거룩한 줄 아는데 사실은 대개 그렇지 않습니다.
목소리가 쉬어야 거룩해 보입니까? 심지어는 욕도 간간이 섞어야 신령해 보입니까?
신령한 것이란 추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일상의 현실을 떠난 거룩이란 없습니다.
믿는 사람은 배우자에게도 인정받아야 하고, 직장 상사에게도 인정받아야 합니다.
옛날에는 갈증이 날 때 '찡한 맛'이 나는 콜라나 사이다를 많이 마셨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찡한 음료보다 담담한 물이나 물과 가까운 2% 섞인 음료를 찾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잠시 찡한 맛으로 시원하게 느껴져도 곧 더 갈증이 나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에서도 뭔가 찡한 체험에 탐닉하면 얼마 후에 영혼이 더 메마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찡한 것을 찾는 삶보다 자기 맡은 일에 충실한 삶이 더 거룩한 삶입니다.
결국 거룩한 삶이란 '우리가 일상적으로 하는 일들을 잘 하는 삶'을 말합니다.
그 삶을 잘 살지 못하면서 일상의 삶에서 뛰쳐나와 거룩하겠다는 것은 잘못입니다.
우리가 교회의 한 식구가 된다는 것은 세상 속에서 세상과 다른 삶을 산다는 것이지
세상과 분리되어 가정과 자녀와 일터를 무시하고 교회만 섬기라는 말이 아닙니다.
< 거룩한 한 몸 공동체 >
오늘 우리는 성찬 예식에서 떡과 잔을 나눔으로 주님의 살과 피를 나누게 됩니다.
이 예식은 거룩한 예식으로 먼저 이 의식에는 예수님을 기념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여기서 기념이라는 말은 '회상'이라는 말로 주님의 성만찬 때를 회상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오늘 성찬식을 하면서 2천년 전의 그 사건으로 빨려 들어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성찬식의 또 한가지 의미는 예수님과 우리가 한 몸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에서 가장 위대한 신비로운 은혜체험의 통로는 바로 성찬예식입니다.
이 예식을 통해 우리가 예수님과 하나가 되면서, 우리도 또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실제로 초대교회에서는 이 만찬을 하면서 교인들이 가족 이상으로 하나가 되었습니다.
서로 끝까지 돕기로 약속한 관계를 혈맹이라고 하는데 성찬식은 영적 혈맹의식입니다.
옛날에 의형제를 맺는 의식을 할 때에 몸에 피를 내고 그 피를 섞었습니다.
그처럼 주의 만찬에 참여해 함께 주님이 주신 떡과 잔을 나눈다는 것은 주님 안에서
이제는 내가 이 혈명관계에 참여한다는 표시이고, 의형제가 되었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관계를 이제는 가족도 뗄 수 없고, 어떤 권력도 뗄 수 없고,
어떤 환난도 뗄 수 없고, 어떤 기분 나쁜 일도 뗄 수 없고, 어떤 유혹도 뗄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한 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제 한 몸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이 시간에는 한 몸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3가지 원리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첫째, 우리는 서로 믿어주어야 합니다.
요새 사람들이 개를 좋아하는 큰 이유는 개는 배신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개는 사람을 배신하지 않습니다. 복날이 되면 오히려 사람이 개를 배신합니다.
그러니까 사람을 못 믿겠다는 말이 나옵니다. 때로는 교회에서도 그런 일을 당합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한 여자 성도가 계를 하다가 도망쳐서 계판이 개판이 되었습니다.
그런 일을 많이 보니까 "사람을 너무 믿지 말라!"는 말이 심심찮게 나옵니다.
맞는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만 믿어야지 사람을 지나치게 믿으면 실망합니다.
그러나 사람을 지나치게 믿지 말라는 것과 사람을 믿지 못하는 것은 엄연히 다릅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다 도둑놈이야!"라고 말합니다. 그런 말에 현혹되면 안됩니다.
그 말에 현혹되면 만나는 사람마다 다 도둑놈으로 보입니다. 그것은 큰 불행입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다 의심하고 산다면 삶이 얼마나 피곤하고 재미없는 일입니까?
우리가 때로 어떤 사람에게 당해도 보편적으로는 사람을 믿으며 살아야 합니다.
훌륭한 자녀는 어떻게 만들어집니까? 부모가 믿어줄 때 만들어집니다.
훌륭한 성도는 어떻게 만들어집니까? 목회자가 믿어줄 때 만들어집니다.
훌륭한 목회자는 어떻게 만들어집니까? 성도가 믿어줄 때 만들어집니다.
옛날 농촌에서 서울로 유학을 간 아들이 책이 필요하다고 돈을 부쳐달라고 합니다.
그러면 농촌의 부모님들은 아들을 믿고 소를 팔고, 땅을 팔아서 돈을 부쳐줍니다.
아들은 그 돈으로 책은 사지 않고 술을 사 먹습니다. 사 먹으면서 마음이 찔립니다.
술을 사 먹으면서도 부모의 믿음을 배신했다는 생각에 고민하다 나중에 회개합니다.
회개한 후에는 부모님의 사랑을 생각하면서 열심히 공부해 결국 훌륭하게 됩니다.
반면에 자녀를 부모의 똑똑한 머리로 처음부터 끝까지 자녀를 간섭하고 감시하면
잘 되어도 마마보이가 되기 쉽고, 못 되면 흔히 말하는 '망할 놈의 자식'이 됩니다.
그래서 어떤 부모들 중에는 자녀들 키울 때 알고도 속아주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왜 속아주기까지 합니까? 자녀를 믿어주는 모습이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서로 믿어주고, 서로 기대하고, 서로 소망을 가지고, 서로 의지하기 바랍니다.
2. 둘째, 우리는 서로 수단화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 나라의 가장 큰 병폐는 무엇입니까? 사람을 쓰고 나면 버리는 것입니다.
사람을 길러주지 않습니다. 명문대 졸업생을 뽑아 회사를 위해 젊음을 바치게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가족, 건강, 여가생활을 다 멀리하고 회사를 위해 충성했는데
30대 후반이 지나면 쓰기 불편하고 봉급만큼 일하지 못한다고 자를 생각부터 합니다.
그처럼 사람을 소중히 여기기보다 그를 통해 무엇을 얻을까 하는 것만 생각하다 보면
나중에 내가 넘어지는 순간에 나를 일으켜줄 사람이 없어 결국 철저히 망하게 됩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서로 이용의 대상으로 보지 말고 사랑의 대상으로 보아야 합니다.
사랑이 무엇입니까? 여러 가지 정의가 있겠지만 '내가 변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내가 변하지 않고 진실로 사랑할 수 있는 법은 없습니다.
사랑하면 그 사람이 이해가 됩니다. 이해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이해가 됩니다.
긴 설명을 듣지 않아도 그 사람이 왜 그렇게 했는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런 사랑이 있기 전에는 내 마음에 안 드는 꼴을 봤으면 금방 비판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런 꼴을 봐도 비판할 마음이 없습니다. 이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제 사랑의 눈으로 보니 그 단점도 소중하고, 기대도 넘치고, 희망도 넘치게 됩니다.
그래서 사랑하면 절망이 없습니다. 진짜 사랑하면 "싹수가 노랗다"는 말을 안 합니다.
"너 왜 나를 이렇게 실망시키냐?"라고 하는 것은 결코 사랑에서 나온 말이 아닙니다.
사람을 사랑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이용의 대상으로 보면 자주 사람에게 실망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대해 자주 실망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 문제인 줄 알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어린아이들을 하나님께 봉헌하는 의식을 합니다.
그냥 봉헌에 참여하지 마시고, 내 자녀를 하나님이 내게 주신 선물로 생각하십시오.
정말 그렇게 여긴다면 어떤 일을 만나도 자녀에 대해 쉽게 실망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잘 인도하실 줄 믿고 인내와 기도로 키우시면 훌륭하게 자랄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의 한 몸으로서 서로를 귀히 여기고 서로 진짜 친구가 되어주십시오.
3. 셋째, 우리는 서로 일으켜 세워주어야 합니다.
교회생활을 하다 보면 살기 어려워하는 분들과 마음이 힘든 분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한 몸으로서 그런 분들을 일으켜 세워주고 격려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지금 이곳에 있는 이유는 이곳에서 격려하는 자가 되라는 주님의 뜻입니다.
그렇게 살 때 그것이 찡한 맛은 없어도 가장 성령 충만한 삶을 사는 것이 됩니다.
성령님은 헬라어로 '파라클레이토스'라고 하는데 '옆에서 돕는 보혜사'란 뜻입니다.
성령님이 우리를 옆에서 도와주듯이,
우리도 성령충만하면 반드시 옆 사람을 돕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특히 우리 주변의 어렵고 힘든 사람을 도와주려는 노력은 끊임없이 해야 합니다.
요즘은 줄었지만 명절 때 가족들이 고스톱을 치면 주변이 소란해질 때가 있습니다.
싹쓸이할 때입니다. 치고 받고 싹쓸이해서 쓰리고에 피박, 광박까지 하면 난리 납니다.
그때 싹쓸이 당하는 사람의 얼굴을 바라보면 얼굴이 비참하게 일그러져 있습니다.
고스톱에서는 어쩔 수 없지만 인생을 살면서 그런 싹쓸이하는 인생을 살면 안됩니다.
남의 얼굴을 일그러뜨리면서 자기 배만 부르면 된다는 식의 삶은 부끄러운 삶입니다.
남은 주린 배를 부여안고 잠 못 이루는데, 혼자 배부르게 눕는 것은 사실상 죄입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 배고픈 자가 없기를 바랍니다. 그 최소한의 안전장치가 우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수입의 일부를 그들 몫으로 알고 따로 떼어 그들을 도와야 합니다.
배가 고파 죽어 가는 사람이 있는데도 내 배만 불리고 헉헉거리고 산다면 됩니까?
그런 모습은 축복이 아닙니다. 배부른 사람을 외면하는 풍요는 오히려 저주입니다.
모든 사람 안에는 천사의 씨앗이 있고, 악마의 씨앗도 있습니다.
어느 씨를 뿌리며 인생을 살아갈지는 전적으로 우리 자신의 선택에 달려있습니다.
어려운 사람을 도우며 살면 우리는 천사의 씨앗을 뿌리며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면 우리는 어려운 사람을 돕는다고 생각하지만 오히려 얻는 것이 많습니다.
무엇을 얻습니까? 우리에게서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얼마 전, 교회에 승합차가 필요한 줄 알고 이은경 집사 부부가 찾아와 말했습니다.
"목사님! 학원 버스를 팔면 4백 만원 정도 받는데 그것을 교회에 헌금하고 싶습니다."
이은경 집사의 백혈병 2차 수술 경과가 좋아서 다행히 더 이상의 목돈이 들지 않고,
남편 김문열 집사가 다른 일을 하면 되니까 헌금을 받아달라는 간곡한 얘기였습니다.
저는 그 말을 듣고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교회에서 가장 어렵게 사는 젊은 부부가 그렇게 말하는데 그저 할 말이 막혔습니다.
게다가 백혈병 완치 판정이 나려면 앞으로 4-5년은 더 지켜보아야 한다고 하는데
앞으로도 병원비가 얼마나 더 들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마지막 남은 재산을 교회에 바치겠다고 하니 무슨 할 말이 더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 얘기를 듣고 재정 집사들과 그 헌금을 받아야 할 것인지에 대해 상의를 했습니다.
그리고 기쁘게 주려는 것을 사양하는 것은 또 다른 인색함의 표시라는 것을 잘 알지만
그래도 젊은 집사 부부의 마지막 희망의 씨앗마저 받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정중하게 이은경 집사 부부에게 말했습니다.
"집사님! 집사님의 사랑하는 마음은 잘 알지만 그 헌금은 도저히 받을 수 없습니다.
헌금은 받지 않아도 마음은 이미 다 받았습니다. 절대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그때 그 대화가 오고간 순간은 성령님의 감격을 느낀 정말 짜릿한 순간이었습니다.
사람이 욕심을 초월해서 남을 위해 나를 바치며 산다는 것은 얼마나 큰 행복인지요?
그처럼 어려운 이웃을 도우며 '나!'라는 말을 '우리!'라는 말로 바꾸며 살아야 합니다.
나의 욕망을 포기하고 너를 향해 나아가고, 너에게 나를 바치는 삶이
우리 예수님의 삶이었고, 그런 삶을 사는 것이 진정 복된 삶입니다.
"이 바쁘고 힘들고 문제가 많은 때에 남까지 신경 쓰며 어떻게 사나?" 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남을 위해 사랑을 베풀 때 신기하게도 나의 문제가 풀리는 축복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힘써 어려운 사람을 도와야 합니다. 또한 힘써 선교해야 합니다.
나 한 사람이 적어도 한 사람의 선교사님을 지정해서 정기적으로 후원해야 합니다.
지금 전세계 여러 선교사님들로부터 얼마나 많은 후원요청이 들어오는지 모릅니다.
도와야 할 선교사님들과 이웃들이 참 많습니다. 그 소리를 외면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이웃의 필요가 많이 보여지고 느껴질 때, 우리의 사랑은 깊어지게 될 것입니다.
< 자기를 죽여야 합니다 >
세례의 뜻이 무엇입니까? "주님과 함께 죽었다가 주님과 함께 부활한다"는 뜻입니다.
성찬의 뜻이 무엇입니까? 세례 받는 사람들이 주님의 피와 몸에 참예하는 것입니다.
세례 받은 사람들이 이 예식에 참여하면서 우리는 다시 한 몸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이제 서로 위해주고 잘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해주십시오. 그런 삶이 행복한 삶입니다.
저는 교회에서 누가 따돌림당하는 것 같으면 참 마음이 아픕니다.
그것은 불행입니다. 하나님은 몸을 아프게 하는 분에게 그 행한 대로 갚으실 것입니다.
그냥 조용히 서로를 위해 기도해주십시오. 우리는 주님 안에서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슬픔이 나의 슬픔이고, 그의 기쁨이 나의 기쁨인 줄 아는 삶이 행복한 삶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한 몸의 삶을 잘 살 수 있을까요?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죽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최고의 신앙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학력이나 지식보다 충성하는 것과 열심을 내는 것을 더 원하십니다.
그런데 열심을 내는 것이나 충성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잘 죽을 줄 아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잘 죽을 때 우리는 행복을 얻게 되고, 사람을 얻게 될 것입니다.
요새 사람의 마음을 얻으려고 여러 가지 다양한 방법을 많이 씁니다.
어떤 분은 폭력으로 사람을 얻으려고 하고, 어떤 분은 허영으로 사람을 얻으려 합니다.
사이비 교주는 감언이설로 사람을 얻으려고 하고,
무속인과 점쟁이들은 사람들에게 두려움과 공포를 주어서 사람을 얻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 기독교에서는 사람을 얻으려면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상대방의 마음을 얻으려면 역시 섬기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냥 조용히 섬겨주십시오.
믿는 사람들이 가장 크게 실수하는 것이 내 신앙 스타일이 최고인 줄 아는 것입니다.
내가 잘났다고 하는데, 솔직히 나만 빼고 다 잘난 줄 알아야 제대로 된 신앙인입니다.
나만 잘났다고 하면 어느 세월에 하나가 되겠습니까? 내가 죽어야 한 몸이 됩니다.
이제 나와 다르다고 배타하지 마십시오. 배타주의는 정말 잘못된 기질입니다.
어떤 곳에서는 그곳으로 옮겨 50년을 살았는데 아직도 "저 놈 외지인이야!" 한답니다.
그래서 지역감정이 생깁니다. 어떻게 몸에 그런 고약한 피가 흐르는지 모르겠습니다.
끼리끼리는 잘 어울립니다. 그러다가 조금 다르면 서로 망할 때까지 싸웁니다.
단일민족이라는 말은 좋은데 그 잘난 민족성 때문에 외국인을 그렇게 차별합니다.
외국인을 차별하는 단일민족 의식이라면 그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망할 생각입니다.
만약 그리스도인까지 그런 의식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정말 회개해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해서 그분의 몸을 십자가에 내어주시고 우리를 구해주셨습니다.
그 주님의 사랑을 생각하며 내 것을 나눠주며 한 몸의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의 욕망을 죽이고 나눠주며 살고, 양보하며 살면 귀한 인생의 동반자를 얻게 됩니다.
오늘 성례식을 통해 다시 한번 한 몸의 삶을 다짐하시는 여러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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