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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가 확장되는 삶 (요한복음 16장 5-8절)

by 【고동엽】 2022. 12. 9.

< 가장 유익한 일 >

요한복음 13장에는 최후의 만찬이 나오고, 14-16장까지에는 주님의 마지막 유언 설교가 나옵니다. 주님의 유언 설교는 상당히 많은 부분이 주님이 이 세상을 떠나는 것에 대해 근심하는 제자들을 위로하는 말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유언 설교의 처음은 어떻게 시작됩니까? 14장 1-3절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내가 하나님께 가서 처소를 예비한 후에 다시 와서 너희를 그곳으로 이끌어주겠다고 하셨으니 얼마나 위로가 되는 말씀입니까? 오늘 본문도 그런 위로의 말씀입니다. 본문 7절은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본문에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실상을 말하겠다”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즉 제자들이 근심하는 것은 사실상 실상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 말씀을 지금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혹시 지금 어떤 근심이 있습니까? 우리는 그 근심하는 것이 실상이 아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사랑 받는 자녀입니다. 그처럼 주님의 사랑 받는 자녀에게 근심거리는 사실상 유익거리입니다.

도대체 주님이 지속적으로 같이 있는 것보다 어떤 것이 더 좋을 수 있을까요? 상식적으로는 그런 것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분명히 주님이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이 유익이라고 합니다. 언뜻 보면 이해가 되지 않는 말씀입니다.

예를 들어, 한 사랑이 많은 어머니가 아주 어린 자녀들에게 이렇게 말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얘들아! 내가 죽는 것이 너희에게 좋은 일이란다.” 그것이 이해가 되겠습니까? 그러나 주님께서는 분명히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즉 주님께서 친히 이 땅에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서 주님을 만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고 싶은 얘기가 얼마나 많을 것이며, 나누고 싶은 사랑의 밀어가 얼마나 많을까요? 그러나 우리가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재림하신 주님을 만나는 것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우리에게 더 좋은 것이 있다고 주님은 말씀을 하십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본문 7절 말씀을 보면 그것은 ‘보혜사 성령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입니다.

성경은 성령을 주신 것이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신 것보다 낫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 말씀을 말씀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지금 그 말씀을 누가 했습니까? 주님 자신께서 친히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 것보다 성령께서 오시는 것이 더 낫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말씀은 성령님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얼마나 실감나게 하는 말씀입니까?


< 성령님의 오심이 유익한 이유 >

왜 성령의 오심이 주님의 현존하심보다 더 좋을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크게 다음과 같은 2가지 이유를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1. ‘주님과의 만남’의 공간적 제약이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 만약 예수님이 눈에 보이는 형태로 계속 제자들과 함께 있었다면 한 번에 한 장소에만 있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은 지엽적이고 한 개인 혹은 공동체의 주님으로만 계실 수밖에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주님이 성령으로 현존하시기 때문에 어디에나 존재하시고, 우리에게 전적인 관심을 보이시며, 동시에 세계 모든 곳에 있는 수많은 다른 심령들과도 개인적인 친밀한 교제를 나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이 ‘무소무재하신 현존하심의 능력’을 지닌 성령으로서 우리들에게 다시 오신 사실에 대해서 정말로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2. ‘주님과의 만남’의 내면적 깊이가 깊어지기 때문입니다.

만약 주님께서 여전히 제자들과 함께 있었다면 깊은 심령의 만남보다는 주님과의 외적인 만남을 통해서만 대화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분의 메시지는 계속해서 인간의 불완전한 언어와 이해력을 통해서만 인간의 귀에 들려졌을 것이고, 주님과의 관계는 외적인 연합만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그분은 우리들의 마음과 영혼에 그분의 영이 임하는 것으로 보다 깊고 보다 차원 높은 방식으로 우리를 만나 주십니다. 그러한 만남은 실제적인 언어와 생각을 통해서 뿐만 아니라 언어로 완전히 전달할 수 없는 신비한 기름부음과 신비한 감각으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처럼 성령을 통해 주님의 사랑을 받아 누리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모릅니다.


< 성령님의 현존하심이 주는 축복 >

구체적으로 성령의 현존하심이 우리에게 주는 복된 의미는 무엇일까요? 먼저 예수님의 성품과 사역이 우리를 통해서도 나타날 수 있게 된 것이 복입니다. 성령님은 예수님의 삶의 향기와 성품을 우리들에게 각인시키시며, 말씀을 깨닫게 하심으로 성령님의 평화를 우리들의 가슴속에 불어넣어 주십니다.

또한 성령님은 우리들의 심령에 하나님의 사랑을 전달하시며, 우리들에게 기도의 부담감을 주시고, 주님의 십자가에 기꺼이 동참하도록 인도하십니다. 또한 성령님은 심지어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들의 몸에 충만한 부활의 능력을 부어 주셔서 우리들의 전 존재가 활력을 가지게 하실 것입니다. 이 모든 역사가 예수님께서 떠나시고 성령으로 다시 오셨기에 더욱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성령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며, 이 세상 끝날 때까지 같이 계실 것입니다. 만약 우리에게 성령님의 임재하심이 더 이상 머물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성도에게 그것처럼 비참한 일은 없겠지만 사실상 그런 일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외롭고 힘들고 어려울 때 더욱 우리에게 가까이 오실 것입니다.

성령님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은혜는 확장되고 보편성을 띄게 되었습니다. 즉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만이 아니요 ‘우리 하나님’으로 오시게 된 것이 바로 성령이 오신 사건이 가진 가장 중요한 의미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한 보편적인 은혜 속에서 정말 은혜를 발견하고 느끼는 사람이야말로 정말 은혜가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입니다.

은혜와 관련된 세 부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1) 대부분의 사람들은 특별히 눈에 보이는 은혜가 있어야 은혜를 받았다고 합니다. 2) 은혜에 눈을 뜬 사람은 평범한 삶을 통해서 그 삶의 이면에 있는 은혜를 깨닫습니다. 3) 그러나 은혜가 충만한 사람은 어려움 속에서도 은혜를 발견하는 사람입니다.

또한 성육신하신 주님이 성령으로 오신 사건이 주는 은혜의 확장성 원리가 우리의 삶에 주는 실제적인 교훈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중보기도와 중보의 삶입니다. 이제 우리도 어느 정도 신앙생활을 했으면 남을 위한 기도도 하기를 더욱 힘쓰고, 남을 위한 삶도 살기를 더욱 힘써야 합니다. 그처럼 우리로부터 은혜가 확장되는 역사가 있어야 우리 자신이 더욱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될 것입니다.

저는 새벽기도가 참으로 좋습니다. 첫 열매를 기뻐하시는 하나님께 하루에 첫 시간을 드리는 것처럼 삶에 보람과 행복감을 주는 일은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다가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고, 기도응답의 확신까지 얻게 되니 이것이야말로 수지맞는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저는 먼저 ‘참석한 사람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상당한 시간이 소요됩니다. 앞으로 기도식구가 더욱 많아지면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어려움에 빠진 사람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세 번째로 ‘교인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래야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사고 많은 세상에서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능력의 손길을 드리우지 않는다면 교인걱정으로 목사가 제 명에 살겠습니까? 그 후에 교회와 선교사님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렇게 기도를 하다 보면 내 가족을 위한 기도, 내 문제를 위한 기도는 줄어들고, 어떤 때는 잊어버릴 경우도 있습니다.

그 경우에 내 문제를 위해 기도하지 않았다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은혜를 내려주지 않을까요? 만약 그렇다면 이런 억울한 경우가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남을 위한 중보기도를 통해 나의 기도까지 받으시는 분입니다.

항상 ‘나만의 특별 은혜’가 아닌 보다 많은 사람이 누리게 될 ‘우리의 보편은혜’ 를 추구해 보십시오. 그러면 신기하게도 하나님의 은혜가 자신의 삶에 더욱 넘치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다른 집사님의 자녀를 위해 기도했더니 나 자신의 사업문제가 풀리는 신기하고 역설적인 은혜를 맛보면 산다면 얼마나 그 신앙생활이 풍성해지겠습니까? 그런 은혜와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 이한규목사(분당 샛별교회)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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