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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하고 게으른 종
마태복음 25 : 24 ∼ 30
D. A. 벤톤(Debra A. Benton)이라고하는 교수님이 쓰신 How to think like CEO라고 하는 책이 지금 베스트셀러로 근자에 벌써 얼마 전부터 나돌고 있습니다. 우리말로 번역될 때는 "정상의 법칙"이라고 했습니다. 이 책의 뜻은 어떻게 하면 CEO처럼, 세계를 주도하는 지도자처럼 생각할 수 있을까? 지도자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또 어떻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지도자가 되는가? 이런 것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제가 이 책을 읽으면서 첫 페이지를 열고 깜짝 놀랐습니다. 지도자가 되는 조건의 첫째가 뭐냐하면 "연기력"이라고 되어있습니다. 영화배우와 탤런트 뿐만 아니라 모두가 이 세대를 살려면 연기력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연기력과 연출력이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서 설명은 이렀습니다. 반갑지 않은 사람을 만나도 "아, 반갑습니다. 오랜만입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연출력이 있어야 합니다. 반갑지 않다고 해서 횡하고 돌아서는 사람은 영원히 지도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은 이 시대를 살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보십시오. 재미없는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아, 재미있다고 그러면서 들어줘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남이 말을 하기 시작했는데 그거 벌써 몇 백번째 듣는 이야기인데 그만하라고 이렇게 초 치는 사람이 있습니다. 두고보십시오, 영영 밥먹기도 힘들어요 그 사람은. 그저 좀 들어주면 안되나? 그것이 다 봉사인데. "아 그렇군요. 아유 재미있네요" 그렇게 들어줘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연출력입니다. 재미있어서가 아니란 것입니다. 재미있다고 말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연출을 해야 됩니다. 그것 뿐입니까? 우리가 음식을 대할 때에 좀 맛이 없는 음식이라도 사랑하는 아내가 만들어 주었으면, 또 특별하게 한다고 요리책을 보고 만들었으면 "아 좋구만, 내 일생 이런 것 처음 보누만" 그러고 먹어주지 뭐 한 끼 잘못먹었다고 탈이 납니까? 그런데 그것을 놓고 "돈 없애고 별 짓을 했다" 이거는 안됩니다. 이런 남편은 참 문제올시다. 연기력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또 결혼식에 가서 신랑 신부를 봅니다. 그들에게는 무조건 예쁘다고 해야 합니다. 아주 예쁘다고 이래야 되는데 신랑 신부 보고 예쁘다고 하는 거짓말은 죄가 안된다고 탈무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까지 가서 진실한 사람이 있습니다. "아이고, 신랑이 저 모양이야. 신부가 손해 봤네." 똑똑한 것 같지만 멍청한 것입니다. 그것을 아셔야 합니다. 연기력, 그렇지 않습니까? 참으로 옳은 이야기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이렇게 연출, 연기를 하다 보면 나를 잃어버려서는 안됩니다. 나 자신의 본질을 잃어버려도 안되고, 또 하나 있지요? 나의 진실을 떠나도 안됩니다. 그러니까 연기력과 나의 진실과의 긴장관계 속에서 얼마나 바로 하느냐가 그 사람의 성공 여부를 좌우하는 것입니다. 두고두고 생각해 보십시오.
세계최고의 인터넷 서점인 아마존이라고 있습니다. 여기서 장기 베스트셀러로서 기록되어 있는 인간 경영에 대한 최고의 명작이라고 일컫는 책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The Platinum Rule이라고 하는 책입니다. Golden Rule이라는 것은 들어봤는데 Platinum Rule이라고 하는 것은 못들어 봤거든요. 황금율이라는 것은 들어봤지만 백금율, 이 말은 우리가 못들어 보았습니다. 황금율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대접을 받고저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 그것입니다. 그 말은 기본 철학이 모든 사람의 욕구, 기본 욕구는 같다는 뜻입니다. 같으므로 내가 대접 받고저 하는 마음대로 남을 대접하면 되는 것이다. 이것이 황금율입니다. 내가 싫으면 상대방도 싫을 것이고, 내가 좋으면 상대방도 좋을 것이고. 그러니까 내가 칭찬 받기를 원하면 남을 칭찬하라, 그런 이야기입니다. 황금율입니다. 또 모든 사람이 내게 대하여 제발 입방아 찧지 말고 침묵해주기를 바라거든 너도 말하지 말아, 이것이 황금율입니다. 그러나 이 백금율이란 그렇지 않습니다. 상대가 원하는 방식대로 그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왜요? 기본적으로 사람의 욕구와 성향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입맛이 다 다르고 취미가 다 다르기 때문에 가치관도 이상도 다르기 때문에 부득불 우리는 내 생각을 버리고 상대방이 원하는 대로 그를 대하라는 것이 백금율입니다. 그렇습니다. 제가 인천에서 목회를 할 때에 스물일곱살에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판자집이 많은 곳에서 심방을 하는데 하루에 평균 스물일곱집을 심방했습니다. 참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점심을 먹을 때 이렇게 식사가 나오면 좌우간 이 나무꾼의 밥처럼 밥을 많이 주십니다, 이렇게. 그리고 말 끝마다 "많이 잡수세요. 많이 잡수세요." 거기까지는 괜찮은데 한 반쯤 먹었는데 물을 확 부어줍니다. 다 잡수시라고. 아이고, 이건 정말 힘이 듭니다. 그렇죠? 그런가 하면 그것만도 좀 괜찮습니다. 어떤 분은 자신이 먹던 숟가락를 앞치마에 쓱쓱 닦아서 "잡수세요" 그럽니다. 그거 거절했다가는 큰일납니다. 그런가 하면 방금 점심을 먹고 다음 집에 갔는데 또 막국수를 시켜왔습니다. 그러니 저인들 어떻게 하겠습니까 죽기 살기로 먹어야죠. 그런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가만히 책을 보면서 그 생각이 났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자기 수준에서, 자기 성향에서 남을 대하게 되면 이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무엇을 좋아하는가? 그 수준과 그 입장, 그 욕구를 따라서 그 방법대로 내가 그를 사랑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백금율입니다. 이 백금율로만 21세기를 살아갈 수 있다는 내용의 책입니다. 사실 그러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좋아하는 대로 내가 그를 따른다, 하게 될 때에 기준은 어디에 있고 나는 어디에 가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뜻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심과 진리를 이 백금율의 긴장관계를 바로 찾아나가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공의 평가 기준이 어디에 있습니까? 지난 일년동안 얼마나 성공을 했습니까? 얼마나 벌었으며, 얼마나 출세했고, 얼마나 배웠고, 얼마나 얻었습니까? 그렇게 볼 것입니까? 이것이 성공이 아닙니다. 성공의 판단 기준은 먼저 목적입니다. 얼마나 목적을 향하여 직선적으로 살았는가? 목적에 합당한 일을 했느냐? 내 생에 궁극적 목적을 지향하고 바로 살았느냐? 둘째는 얼마나 자유했는냐? 돈을 많이 가졌더라도 그 돈 걱정을 하느라 잠을 못 잔 사람은 절대로 성공한 것이 아닙니다. 출세했다고 해서 불안에 떨면 그 사람은 절대로 성공한 것이 아닙니다. 소유욕이나 욕망이나 시기나 질투나 또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평판도 다 털어버리고 내 영혼과 양심이 자유로워야 합니다. 얼마나 자유했습니까? 그것이 바로 성공의 기준입니다. 또 하나는 내가 다른 사람에게 어떤 모습으로 나타났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로 인하여 다른 사람이 얼마나 기쁨을 얻었습니까? 나로 인해서 내 가정이 얼마나 행복해졌습니까? 나라고 하는 존재가 다른 사람에게 얼마나 유익한 존재이고 덕을 끼치는 존재로 성숙했느냐, 그것을 물어야 합니다. 여러분, 물어보십시오. 내가 행복하냐고 묻지 마시고 나로 인해서 내 남편이 금년에 얼마나 행복했나? 나로 인해서 내 아내가 얼마나 행복했나? 나로 인해서 내 자녀들이 얼마나 행복했나? 나로 인해서 교회가 얼마나 행복했나? 내가 어떤 역할을 하고 있었나? 그것이 바로 성공 여부입니다. 나로 인해서 내 이웃에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행복했으며 얼마나 그들이 스스로 복되다고 말하게 되었는가? 판단해야 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한 달란트를 받았던 사람, 한 달란트를 도로 가지고 왔는데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말합니다. 게으르다는 말은 인정을 하겠습니다. 그러나 악하다는 말은 좀 마음에 안듭니다. 본전 잘라먹는 사람도 많은데, 가지고 도망가지 않았는데, 본전 가져다가 도로 내놓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왜 악하다고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왜 주인은 그를 악하다고 했을까? 여기서 우리 깊이 이 말씀의 뜻을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여러분, 사람들이 최선이라는 허상에 속고 있고 속이고 있습니다. 가끔 우리는 그런 말합니다. 최선을 다했다. I did my best. 정말 그렇습니까? 사람 앞에는 그것이 통할는지 몰라도 자신의 양심 앞에, 하나님 앞에 물어보십시오. 정말 최선을 다했는가? 최선을 다했다고 속이지도 말고 속지도 마십시오. 스스로 속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그 당시는 그것이 최선인 줄 알았습니다. 그 길밖에 없는 줄 알았습니다. 이제 와서 되돌려 생각해보니 아닙니다. 얼마든지 길이 있었습니다. 얼마든지 기회가 있었습니다. 얼마든지 더 잘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는 그것이 최선인 줄로 착각을 했습니다. 이것이 진실입니다.
오늘 본문에 한 달란트를 가져왔던 사람이 문제가 됩니다. 왜 땅에 묻어 놓았을까? 심리적으로 많이 생각합니다. 이거 분명히 심리학적 요인이 있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사회학적으로 볼 중요한 의미가 여기에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에게는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주면서 내게는 왜 한 달란트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음에 안들었던 것입니다. 시기, 질투 때문에 자기 판단까지 흐려지게 된 것입니다. 예일대학의 피터 살로비라는 교수님이 범죄를 연구한 결과, 사람들이 짓는 범죄의 20%가 시기 질투로 인해서 온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가만히 보십시오. 사업이 망가지는 것 뻔히 알면서도 그저 계속 잘못해가지고 마지막에 크게 무너지고 맙니다. 왜요? 질투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이 성공할 때에 내가 무너질 수 있는가? 다른 사람이 공장을 세우는데 내가 못 세울 수 있는가? 다른 사람이 출세하는데 나라고 출세 못하란 법 있는가? 알고보면 모든 망조가 시기 질투에 있는 것입니다. 나는 나입니다. 저가 백 달란트를 받았든지 내가 한 달란트를 받았든지 내게 주어진 한 달란트가 내게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생각 못하는 것입니다. 그로서리 화이트라고 하는 교수님이 쓴 Clinics of Jealousy라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 대단히 재미있는 책입니다. 질투 임상학입니다. 부부관계, 사업에 실패하는 것, 인격이 망가지는 것, 전부 질투가 원인입니다. 사람이 잠을 못자는 것은 돈을 잃어버려서 못자는 것이 아닙니다. 돈을 잃어버린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말할까?' 질투 때문입니다. 시기 질투 때문입니다. 부부관계가 깨지는 것도 이혼하는 것도 알고보면 전부 시기 질투에서 온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사람이 한 달란트를 받았으면 한 달란트는 소중한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기회는 평등한 것입니다. 얼마를 받았든지 얼마를 가졌든지 이것은 하나님께서 내게 적당히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게 생각해 보셨습니까? 내게 주신 바 물질과 건강과 지혜와 형편과 현실이 하나님이 내게 적당하게 주신 것이다. 하나님은 공평하시다, 하나님은 내게 평등하게 역사하셨다, 그렇게 느끼십니까? 아니면 하나님 참 마음에 안들어. 왜 저 사람에게는 다섯 달란트, 나에게는 한 달란트인가 이것입니다. 이것이 마음에 안드는 것입니다. 영원히 불만인 것입니다. 그래서 문제가 됩니다. 그러는 동안에 소중한 한 달란트의 가치를 땅에 묻어두고 말았습니다.
또 하나는 주인의 평가에 대한 불만이 있습니다. 왜 나를 작게 평가했느냐는 것입니다. 왜 다른 사람에게 주신 재주를 내게는 안주셨는가? 다른 사람에게 주신 건강을 내게는 왜 안주시는가? 나는 최선을 다했는데.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하시는 역사에 이의를 제기하지 맙시다. 얼마를 받았든지 그 받은 바가 소중하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이것을 부인하면 불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자신이 일을 안하게 된 책임을 주인에게 돌리고 있습니다. 주인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곳에거 거두고 헤치지 않은 곳에서 모으는 줄 알았으므로 내가 땅에 묻었다가 가지고 왔습니다. 책임을 주인에게 돌립니다. '내가 일 안한 것은 주인 때문이요, 내가 하고싶지 않은 것도 주인때문이요, 영 마음에 안들어.' 그래서 도로 가지고 왔다는 이야기 아닙니까? 책임을 주인에게 돌리고 있습니다. 참으로 무서운 것입니다. 그리고 주인을 폭군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여러분, 조그마한 나의 행위가 상대방을 나쁜 사람으로 만든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이 사람이 지금 두려워 하고 있고 불만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아버지를, 또 이 주인을 아주 나쁜 사람을 만들고 있습니다. 탕자를 보십시오. 탕자는 밖에 나가서 허랑방탕하면서 다 날려버리고 얼마든지 돌아오고 싶었겠지만 못돌아 왔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무서웠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얼마나 엄하게 나를 책망하실까? 그래서 돈을 좀 벌어가지고야 가지 그냥 갈 수 없다. 아마도 오랫동안 고생한 것 같습니다. 정 죽을 지경이 되니 손을 들고 돌아왔더니 아버지가 이렇게 좋은 아버지일 수가 없습니다. "죽었다 살았고 잃었다 얻었노라." 아들을 위해 잔치를 하는 것입니다. 그 아들 마음속에 생각이 많아 복잡했을 것 같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인식을 전환하는 것입니다. 무서운 아버지인 줄 알았는데 오늘 보니 자비로우신 아버지입니다. 이 좋은 아버지의 품을 왜 내가 떠났던고? 아버지에 대한 인식을 확 바꾸어버리는 시간입니다. 그것이 바로 회개였습니다.
오늘 주인이 어떻게 과거에 대했는지 모릅니다. 당신은 굳은 사람이요, 이 말은 아버지를, 그 주인을 나쁜 분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폭군으로 만드는 시간입니다. 여러분 혹 남편을 무서워합니까? 그러면 남편을 나쁜 사람을 만드는 것입니다. 아내를 무서워하십니까? 그러면 아내를 아주 나쁜 사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전혀 그러지 않을 것이라고 설사 내가 실수를 해도 괜찮다고. 여러분 자녀들이 어떻습니까? 부모님 앞에서 벌벌 떨다보면 아무것도 되는 것이없습니다. 우리 부모님은 너그러운 분이요 자비로우신 분이라서 얼마든지 내 실수가 있더라도 용서해주실 것이라고, 그렇게 좋은 부모님을 만들어야지 '우리 부모님 이러다가는 맞아 죽는다.' 세상에 자식 때려죽이는 부모가 어디에 있습니까? 이렇게 상대방을 나쁜 사람으로 만듭니다. 그런고로 너는 악한 종이라고 그랬습니다. 어째서 나를 이렇게 나쁜 사람을 만들려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내가 언제 네게 그렇게 나쁘게 했더냐? 내가 언제 그렇게 무서운 사람이었더냐? "너는 악하다" 그래서 말씀하는 것입니다. "두려워 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실패가 두렵고 징벌이 두렵고 책망이 두려워서 벌벌떨다가 마침내 가지고 있던 것까지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실패를 두려워 하는 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토마스 에디슨이라고 하는 사람은 발명왕으로 잘 알고 계십니다. 그는 하나를 발명하기 위해서 수백번 시행착오가 있었습니다. 하도 많이 실패하니까 옆에서 조수가 한 번 물었습니다. "선생님 도대체 얼마나, 몇천번이나 실패하신 것입니까?" 토마스 에디슨은 대답합니다. "아니 나는 실패한 일이 없어. 나는 실패한 것이 아니라 성공할 수 없는 몇백가지 방법을 발견했을 뿐이지. 이렇게 하면 안된다는 것을 깨달았을 뿐이지. 그런고로 그것은 발명이요 결코 실패가 아니야. 실패는 반드시 성공을 지향하는 과정일 뿐이야."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실패할까봐 손해를 볼까봐 벌벌 떨고 있는 이 두려워 하는 종이 마땅치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땅에 묻어 놓았다가 가져온 것입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한 해를 다 보내면서 스스로 물어보십시다. 나는 얼마나 최선을 다했는가? 정말 최선을 다한 것이었습니까? 주인의 평가에 대해서 내가 얼마나 만족하게 여겼는가? 주인이 주신 기회에 대해서 얼마나 충실을 다했던가? 주께서 내게 향하신 뜻에 대해서 얼마나 만족하고 감사하며 살아왔던가? 주인을 믿고 주인의 은혜에 감사하며 살아갑니다. 한 달란트든 반 달란트 든 그 마음이 중요한 것입니다. 모름지기 이 종이 나아가서 한 달란트 가지고 나갔다가 그만 홀랑 날리고 빈 손으로 와서 꿇어 엎드리고 "주인이여, 용서하소서. 제가 이렇게 실수했습니다" 했다면 주인은 뭐라고 했을 것 같습니다. 내가 믿는 주인은 다시 두 달란트를 주면서 다시 하라고 다시 기회를 주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가 진실하게 정직하게 자기 자신을 보십시다. 감사한 마음으로 또 다시 감사하는 마음으로 시작하십시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바로 그 말씀을 들을 수 있게 말입니다.
* 기도
하나님 아버지, 일년동안 저희를 지켜주신 것을 감사하며 많은 기회를 주신 것을 감사하며 기다려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이렇다할 열매를 거두지 못했으나 하나님이여 기도하옵는 것은 책임을 남에게 돌리지 않게 하시고 나의 잘못됨과 불신앙을 솔직히 인정하면서 다시 한 번 하나님 앞에 착하고 충성된 자로 설 수 있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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