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δεδομένα 18,185편 ◑/क्वाक पास्टर 1,910편

[송구영신 예배 주일설교말씀] 그리스도로 옷 입은 사람(갈라디아서 3장 23-29절){곽선희 목사}

by 【고동엽】 2022. 12. 3.
목록가기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우리가 어떻게 살았는지 하나님 앞에서 결산하는 시간입니다. 한 해를 어떻게 살았는지 결산하는 시간인데 이것이 우리의 마지막 종말이라고 생각하면 우리 인생의 모든 것을 결산하는 때가 온다는 것도 생각해야 합니다. 송구영신 예배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서 마지막 결산할 때가 온다는 것을 기억하고 믿음 생활을 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새해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스도로 옷 입은 사람(갈라디아서 3장 23-29절)

 

설교자 : 곽선희 목사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 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오늘의 본문 말씀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다'라는 주제에 역시 충실하면서도 이를 또 다른 측면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을 생각하기에 앞서 이미 살펴본 바 율법의 3용법에 대해서 조금 부연할까 합니다.

 

율법은 그 범위를 넓게 잡으면 구약성경을 가리키는 말이 됩니다. 좁게 잡으면 모세 오경, 더 좁게 잡으면 십계명과 이에 따르는 모든 부칙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합니다. 어쨌든 우리는 이 율법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율법은 대체로 세 가지로 나누어 그 용법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율법은 하나님의 뜻을 아는 길입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통하여 당신의 마음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율법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 무엇을 말씀하고자 하시는지, 무엇을 하라고 하시는지, 무엇을 기뻐하시고 무엇을 기뻐하시지 아니하는지를 알게 됩니다. 그런 고로 하나님의 뜻, 그 깊은 뜻을 헤아릴 수 있습니다. 둘째로, 율법을 통하여 그리스도께로 인도함을 받습니다. 이에는 부정적인 면이 없지 않습니다.

율법이 너무 엄하기에 죄를 지은 사람은 도저히 살아남을 수가 없습니다. 죄값은 곧 사망입니다. 그런 고로 많은 죄를 짓고 또 많은 벌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의로, 우리의 공로로, 우리의 선행으로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는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없음을 스스로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긍휼 하심을 구하게 됩니다. 두려운 마음, 저주에 쫓기는 마음-그 공포와 저주로부터 피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밖에 길이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찾게 됩니다. 찾아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하고 부르짖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우리를 간접적으로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길이 됩니다.

그럼에도 예수 안 믿는 사람은 한마디로 교만한 사람입니다. 예수의 복음을 받으면서도 예수께 나오지 않습니다. 나의 의로 하나님 앞에 넉넉히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왜 죄인인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천당 갈 것이다-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입니다.

내 의로 충분하다는 생각을 가졌기에 하나님 앞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제 율법이 그를 심판하게 되고 율법 앞에 서 있는 자기 모습을 발견하게 되면 꼼짝 못 합니다. 내 의와 내 행위로써는 도저히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평생 교회에 한 번도 안 나온 분이 임종을 맞게 되었습니다. 그 자녀들이 돌아가시기 전에 전도하기를 원해서 제가 병원으로 찾아가 환자 옆에 섰습니다. 그리고 첫마디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소 엄하기도 하고 당돌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선생님께서는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행위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죄인임을 인정하십니까?" "그렇습니다." 스스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음을 인정합디다. 그동안 남보다 내가 낫다 하여 잘난 척하고, 심지어 내가 나쁜 것은 다른 사람 때문이다, 그런 고로 나는 죄인이 아니다-이렇게만 생각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죽음을 앞에 두고는 하나님의 그 엄연한 심판 앞에, 그 율법 앞에 꼼짝 못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셨다는 그 공로에 의지하십시다." "그러면 저 같은 죄인도 주님 앞에 갈 수 있습니까?" 이렇게 하여 주님의 복음,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 이 무서운 율법이 이같이 우리를 간접적으로 그리스도께로 인도합니다.

셋째로, 이제는 예수를 믿습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았기 때문에 율법을 지킵니다. 내 의를 세우려는 것이 아닙니다. 벌을 받지 않으려고 율법을 지키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천당을 가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내 선행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 위함도 아닙니다. 마침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을 이루어 드리려는 것입니다. 백 퍼센트가 되든 오십 퍼센트가 되든 십 퍼센트가 되든 최선을 다하여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법을 지켜나가는 것이 당연합니다. 이렇게 지키는 법-바로 그리스도인이 지키는 십계명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지키는 율법입니다. 이상이 율법의 제3용법입니다. 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꼭 기억해둘 필요가 있습니다.

앞에서 공부한 22절의 말씀에 제3용법이 언급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 예수 믿는 사람에게 주기 위하여 율법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한편 오늘의 24절에 보면 제2용법에 해당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한다는 것이 무슨 말입니까? 바로 율법의 제2용법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제3용법을 먼저 말하고 다시 제2용법, 제1용법을 말하기도 합니다.

아무튼 이렇게 하여 세 가지 용법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내용을 구조상으로 살펴보면 몇 가지의 특징을 발견하게 됩니다. 율법의 때, 믿음의 때-때에 대하여 두 가지로 나누어 말하고 있습니다. 먼저 율법의 때가 언제입니까? 본문 말씀 가운데 '믿음이 오기 전에'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믿음이 오기 전에-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또 '율법 아래 매인 바'-율법이라는 감옥에 갇혀 있는 때를 말합니다.

그리고 어린아이가 되어 몽학선생(蒙學先生)의 지배를 받고 있을 때가 바로 율법의 때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오시기 전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아직도 교만하여 예수님 앞에 나오지 않습니다. 자기 의를 고집하고 있습니다. 그런 고로 부득불 율법에 갇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율법의 형벌, 율법의 공포에 눌려 있던 때를 말합니다. 너무 유치하기 때문에 율법에 매일 수밖에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은혜에 속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예수를 믿으면서도 아직 유치하여 여전히 율법에 매여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오늘 저녁만 해도 비가 와서 교회에 나올 때에 갈등을 겪은 사람이 적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무조건 감사하며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 앞에 빨리 나아가 찬송하고 말씀을 들어야지 하며 즐거운 마음으로 서두른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오늘 안 나가면 벌 받을지도 몰라, 감기 걸릴지도 몰라-벌벌 떨면서 하는 수 없이 나왔습니다. 또 고3 자녀를 둔 부모들은 내가 안 나가면 우리 아이가 대학에 떨어질는지도 모른다고 두려워하며 나왔습니다. 이렇게 나왔다면 그 사람은 도대체 어떤 사람입니까? 몽학 선생 아래 있는 사람입니다. 아직 유치하여 그 수준에 머물러 있는 사람입니다. 아직도 그때에 머물러 있지만 시간적인 의미로만은 볼 수 없습니다.

 

그러면 믿음의 때는 언제입니까? 믿음이 온 후를 말합니다. 믿음이 온 후-그리스도께서 오신 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믿음으로 인하여 자유로워진 때를 말합니다. 예수를 믿고 나니 모든 것에서 자유로워졌습니다. 벌받을까 하는 두려움, 저주받을까 하는 두려움이 깨끗이 물러갔습니다. 죽을 것을 걱정하지 않고, 병들 것을 걱정하지 않고, 실패할 것을 걱정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확실한 믿음으로 살아갈 때가 바로 믿음의 때입니다. 그런가 하면 이제 성인이 되었기 때문에 더는 유치한 것에 매여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성숙되었다 하는 이야기입니다. 이 또한 믿음의 때를 말합니다. 믿음이 오기 전, 믿음이 온 후-여기에서의 믿음은 헬라어로 '텐 피스틴'입니다. 정관사 '텐'이 붙어 있습니다. '텐 피스틴'--the faith라는 말입니다. '그 믿음'-그냥 믿음이라고 그랬지만 '그 믿음'이라고 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입니다. 보통 믿음이 아니라 하나밖에 없는 믿음입니다. 내가 잘 되리라는 믿음, 내가 복 받을 것이라는 믿음, 떡 줄 사람은 생각지도 않는데 김칫국부터 마시는 믿음, 저 사람 것이 곧 내 것이 될 것이라는 믿음, 덮어놓고 믿습니다 주여, 하는 믿음-이것은 모두 내 마음대로 생각하는 믿음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그 믿음'이란 바로 예수를 믿는 믿음을 말합니다. 23절과 25절 두 곳에 있습니다마는 이는 구원에 이르는 믿음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퍽 재미있는 말을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지식과 관련이 없는 종교는 마술이다'-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문제와 관계없는 믿음은 무엇이든지 미신이라는 말입니다. 속임수다, 참 믿음이 아니다 라는 말입니다. '그 믿음'은 계시적인 믿음이요, 계시에 응답하는 믿음이요, 은혜로 주시는 믿음이요,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시는 믿음입니다.

또 십자가가 믿어지는 믿음이요, 예수께서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셨다고 하는 그 사건이 확실하게 내 안에서 사건화하는 믿음입니다. 나를 위하여 돌아가신 예수, 내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신 예수------그래서 십자가를 쳐다보면 절로 눈물이 납니다. 이 믿음이 선물입니다.

항상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 십자가 안에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확실한 믿음은 누가 나에게 넣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성령이 주시는 것이요, 구원에 이르는 복음적인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온 후에는 율법이 필요 없습니다.

이러한 믿음이 오기 전에는 어떠했습니까? '율법 아래 매인 바 되고'-외부로부터 방어되었고 감시 받았습니다. '갇혔느니라'-계속 감금되고 속박되어 있었습니다. 매인 바 되고, 갇혔느니라-이 두 말은 예수 믿기 전에 하는 말입니다. 예수 믿기 전에 우리는 모두 감정적으로 두려움에 매여 있었습니다. 죄지을까 걱정하고, 죄를 짓고 나서 벌 받을까 걱정했습니다. 심지어 어떤 분은 이런 걱정까지 합니다. 임신 중인데 걱정이 태산 같습니다. 얼굴이 상할 정도로 걱정입니다. 자신이 죄를 많이 지어서 태어나는 아이가 혹시 잘못되지나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생각하면 걱정할만한 일입니다. 큰 걱정입니다. 손가락 다섯 개가 분명히 있다는 것도 기적입니다. 이처럼 내 죄를 생각하면 하나에서 열까지 두려움뿐입니다. 잠시도 마음이 평안하지 않습니다. 감정적으로 완전히 공포에 매였습니다. 죄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죄의식에 빠져 있고 형벌 의식에 매여 있습니다.

지식면에서도 그렇습니다. 무슨 공부를 하든 하면 할수록 점점 어두운면, 부정적인 면으로 치우칩니다. 비판적인 면으로만 봅니다. 흔히들 가망이 없다, 다 썩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현대 철학을 오랫동안 공부한 사람들은 마지막에 가서는 허무주의에 빠지고 맙니다. 소망은 없다-세상에 남아 있는 진리라곤 소망이 없다는 바로 이것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는 인간의 지식이 율법에 매인 바 되고 갇혔기 때문입니다.

종교적인 이해가 어두워졌습니다. 캄캄해져서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눈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위한 이해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알아보려고 발버둥 쳐보았댔자 결국 붙들고 보면 우상이요 미신일 뿐입니다. 이것이 다 율법 아래 매인 바 된 갇힌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완전히 자유를 잃어버린 모습입니다. 성경을 읽고 하나님을 보려고 애쓰는 것조차 두렵습니다. 무서운 하나님으로밖에는 보이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믿음이 와서 은혜로 말미암아 구속함을 받게 될 때에 비로소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하게 된다는 것이 오늘 본문 말씀의 귀한 뜻입니다.

24절에 퍽 재미있는 표현이 있습니다.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다'-율법이 유치한 자나 가르칠만한 훈장(몽학 선생)과 같지마는 은혜와 정반대에 있지 아니하며, 비록 모자라고 간접적이고 부정적이기는 하지만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을 힘입도록, 그 약속을 믿도록, 메시아 대망 사상을 갖도록 그리스도께 인도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의 몽학 선생은 헬라어로 '파이다고고스'입니다. '파이스'는 어린아이를 뜻하는 말이며, '아고고스'는 인도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파이다고고스'라는 말은 '어린아이를 인도하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부정적인 후견인을 말하는 것입니다. 영어 성경에서는 튜터(tutor)라고도 하며 간혹 트레이너(trainer)라고도 번역됩니다. 요즘에 보면 트레이너라는 말을 많이 쓰지 않습니까? 개를 훈련시키는 사람도 트레이너요, 운동선수를 훈련시키는 사람도 트레이너라고 합니다. 옛날에는 많은 노예 중에 좀 똑똑하고 지혜로운 노예가 있으면 그를 다른 노예들의 트레이너로 썼습니다. 똑똑한 노예에게 트레이닝을 맡겼습니다. 아무튼 어린아이는 유치합니다. 말로 통하지 않습니다. 이들을 붙들고 있는 것은 참 힘듭니다. 이리 가고 저리 가고 움직이는대로 붙들고 따라다녀야 하니 큰일입니다. 그래서 부득불 후견인에게 맡겨놓습니다. 후견인이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기어가면 가지 마라, 먹으려 하면 먹지 마라, 올라가면 올라가지 마라, 만지려 하면 만지지 마라-하지 말라는 것 투성이입니다. 마지막에 가서 어린아이가 할 말이 있다면 '난 도대체 뭘 할 수 있단 말인가?'일 것입니다.

그래도 도리 없는 일입니다. 잘못된 길로 가게 할 수는 없습니다. 후견인된 몽학 선생의 책무가 이것입니다.

우리나라에도 좀 더 높은 수준의 몽학 선생이 있었습니다. 옛날 부유한 양반의 경우는 자제를 가르치기 위해 훈장을 자기 집에 두었습니다. 주로 세상 법이나 예법을 잘 아는 나이 많고 가난한 선비가 훈장 노릇을 했습니다. 그들이 아이들을 맡아서 글을 가르치고 예법을 가르쳤습니다.

대통으로 만든 담뱃대를 들고 있다가 잘못하면 '이놈'하고 때리면서 바른 길을 가도록 가르쳤습니다. 이것도 안 된다, 저것도 안 된다, 이 길로만 가라고 가르치는 후견인을 몽학 선생이라고 부릅니다. 몽학 선생 하니 생각나는 것이 있습니다. 요즘은 부부가 모두 직장에 나가기 때문에 파출부나 아예 가정부를 두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들은 집안일을 하면서 아이들까지 돌봐야 합니다. 그러나 자기네 아이가 아닙니다. 별로 사랑하지도 않는 남의 아이를 돌보는 것도 귀찮은데 게다가 장난까지 심합니다. 그래서 수면제를 먹입니다. 한 알 먹이면 몇 시간은 자니까 자신의 행동이 자유롭습니다. 그래서 자꾸만 먹이게 됩니다. 결국 아이는 그만 약에 취해서 헤롱헤롱거린답니다. 참 큰 문제입니다. 끝까지 사랑으로 돌봐야 하는데 약을 먹여 재운다니 말이나 됩니까? 이런 일이 미국에서는 흔하다고 합니다.

좋지 않은 이야기를 했습니다마는 몽학선생은 엄하게 가르칩니다. 이리 가지 말고 저리 가라, 바른 길로 가라, 그런 고로 그리스도께로 가라--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우선은 어리기 때문이요, 어려서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라는 것보다 어쩔 수 없이 하지 말라는 것이 더 많습니다. 여러분, 십계명을 가만히 보십시오. 열 가지 중에 몇 가지가 하라는 것이고 몇 가지가 하지 말라는 것입니까? 대답하기가 그리 쉽지 않습니다. 늘 외면서도 어렵습니다. 다시 한번 잘 검토해보십시오. 십계명에는 하라는 것보다 하지 말라는 계명이 더 많습니다. 대인(對人) 계명 중 으뜸인 '네 부모를 공경하라'라는 제5계명 밖의 다섯 계명은 모두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바로 몽학 선생이요, 그것이 율법이라는 말입니다. 부득불 어리기 때문에 몽학 선생에게 붙여줄 수밖에 없습니다. 자꾸 못된 버릇, 나쁜 습관이 나오려고 합니다. 아직 분별력이 없어서 스스로 판단하지 못합니다. 이렇게 유치한 가운데 있는 한 율법에 매일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날도 그렇습니다. 교인들 가운데도 많습니다. 일례로 하나님 앞에 헌금하는 것을 봅시다. 즐거운 마음, 감사한 마음으로 헌금해야 합니다.

은혜 안에서 해야 합니다. 하지만 개중에는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혹시 저주받지나 않을까 벌받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운 마음에서 헌금을 합니다. 아직 유치한 단계에 머물러 있습니다. 또 이러한 경우도 있습니다. 헌금을 하는데 이름을 쓰지 않고 하는 경우와 '아무개 얼마 했다'하고 이름을 밝히고 하는 경우입니다. 과연 어느 쪽이 헌금한 액수가 많을까요? 제 생각에 우리 교회는 이름과 액수를 발표하지 않는 쪽이 오히려 헌금을 많이 할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싶습니다. 그러나 아직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무 권사님 일금 얼마, 아무 장로님 일금 얼마-이렇게 광고를 해야 좋아합니다. 이름이 주보에 실리지 않으면 섭섭해합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헌금자 명단을 발표하지 않습니다. 다른 교회에서 온 분들은 이를 보고 참 기분 좋아합니다. 일등 주보라고 칭찬들 합디다. 지금도 주보에 깨알같이 헌금자 명단을 발표하는 교회가 있습니다. 주보에 적힌 자기 이름을 보고는 자랑스러워한다고 합니다. 그래야 좋아하는 것을 어떡합니까? 아직 몽학 선생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나는 어느 수준에 있습니까? 깊이 생각해보십시다.

 

나는 이름 없이 헌금할 때에 더 많이 할 수 있다-수준이 높은 사람입니다. 반면 아무도 모르는데 조금만 하지 뭐-아직 유치한 수준에 있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좀더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봉사를 해도 이름 없이 빛 없이 아무도 모르게 해야 합니다.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하시지 않습니까? 그저 후하게 해야 합니다. 이름을 밝혀줘야만 좋아하는 사람은 아직 어리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름이 밝혀지지 않으면 영 봉사할 마음이 들지 않습니다. 이 사람들, 당분간 몽학선생에게 매여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26절 이하를 보면 그리스도인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다섯 가지로 나누어 말씀하고 있는데, 하나하나가 모두 귀하고 소중합니다. 첫째,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둘째, 세례 받은 자입니다. 셋째, 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입니다. 넷째, 아브라함의 후손입니다. 다섯째,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입니다. 한 가지씩 자세히 설명드리지는 못합니다마는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새로워졌다는 사실입니다. 먼저 종이 이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논법대로, 또 에베소서의 논법대로 하면 마귀의 자녀, 진노의 자녀가 비로소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그런 고로 이제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율법에 매일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특권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둘째, 세례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세례를 받은 자는 율법 앞에서 죽은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율법이 아무리 무섭지만 죽은 자를 심판할 수는 없습니다. 죽으면 자유로워질 수 있다-로마서 7장에서 특별히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나의 의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율법 앞에서 완전히 죽어 버렸습니다. 그런 고로 이제 자유롭습니다. 율법으로 죽고 은혜로 살고, 나로 죽고 그리스도로 사는 것이 바로 세례입니다.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 받았다-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세례를 받은 다음에는 예수 안에서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 세례 받았다는 입장에서는 누구나 똑같습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다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여기에는 유대 사람과 헬라 사람의 구별이 없습니다. 자유인과 종의 구별이 없습니다. 남자와 여자의 구별도 없습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는 데는 평등합니다. 누구나 예수 믿고 하나님 앞에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다-근본적으로 같다는 말씀입니다.

다음으로 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입니다. 옷 입었다는 말은 신분이 다르다는 뜻입니다. 옛날에는 신분에 따라서 입는 옷이 구별되었습니다. 세례 받을 때는 그때대로 다른 옷을 입었습니다. 어른이 되면 어린아이 적에 입던 옷과는 다른 것을 입었습니다. 어른의 옷을 입습니다. 옛날에는 결혼 전에 입는 옷과 결혼 후에 입는 옷이 달랐습니다. 그 사람이 입은 옷을 보고 혼인 여부를 분별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도 결혼식을 위해서 신부가 입는 옷은 다르지 않습니까? 옷은 신분을 나타내준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그리스도인은 신분이 다르다는 말입니다. 새 신분, 새 성품, 새 인격, 그리고 이제 새 운명이 시작됩니다. 나 혼자의 운명이 아닙니다. 결혼하면 배우자와 한 운명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와 결혼한 관계입니다. 그리스도로 옷 입고 나니 내 운명이 그리스도의 운명과 같아졌습니다. 새로운 운명, 새로운 존재가 되어 새로운 종말에는 모두 주님 앞에 나아갈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완전히 새로운 신분, 새로운 존재로 나타났다는 뜻입니다.

넷째는 아브라함의 후손입니다. 이는 약속의 자녀라는 말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는 말씀을 따라서 구원을 얻은 자를 말함이요, 선택받은 자를 의미합니다.

마지막은 약속을 유업으로 받을 자입니다. 구원의 약속을 우리에게 말씀해주고 계십니다.

이상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옛날 유대에 한 교만한 남자가 있었는데 그는 이렇게 기도했다고 합니다. "오, 하나님 감사합니다. 내가 이방인이 아닌 것과 노예가 아닌 것과 여자가 아닌 것을 감사합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감사합니까? 내가 예수 믿는다는 것과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에 감사하십시오. 이제 율법에서 벗어나 은혜 안에 살게 되었고 이 세상에서야 부하건 가난하건 간에 하늘나라에 가게 되었음을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자유로운 후사(後嗣)요, 자유인이요, 성숙한 존재라는 것을 항상 강조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