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강해로 돌아가기 | 목차로 돌아가기 |
생의 두 원리(롬8:18~39)
오늘의 본문에서는 생의 확실한 두 원리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거니와 로마서 8장은 로마서 중에서도 가장 귀한 말씀입니다. 구구절절이 중요한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어떤 분들은 로마서 8장을 아예 외웁니다. 가능하면 여러분도 100번 이상 거듭 읽어보세요. 그러면 자연히 외게 될 것입니다. 사실 로마서 8장은 외워두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죽을 때에 외워야 할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죽을 때에 생각나야 될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고로 내 이름을 잊어버리고 내 성은, 내 나이는 다 잊어버리는 한이 있어도 로마서 8장은 잊어버리지 말아야 됩니다. 못해도 8장 18절쯤은 반드시 외워야 될 것입니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참으로 로마서에는 귀한 말씀이 많습니다.
현대에 와서 가장 문제되는 것이 인간의 문제입니다. 기계다, 산업이다, 건설이다, 경제다, 정치다, 해봐도 역시 문제는 인간입니다.
결국은 인간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입니다. 또 어떤 인간으로 살아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Anthropology에 문제가 있다,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인류학에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인류학을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합니다. 하나는 Biological anthropology-생물학적 인간학, 그 다음에는 Cultural anthropology-문화인류학, 그리고 Theological anthropology-신학적 인류학입니다. 결국은 같은 인간입니다. 헬라어 '안트로포스'라고 하는 말이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에 'logy'가 붙어서 '인간학'입니다. 인간학-인간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인간을 도대체 뭐라고 생각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바로 거기에 내 운명이 있고, 내 가치관이 있고, 내 생명이 있고, 내 영광이 있는 것입니다. 사람인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참 중요합니다.
진화론자로 한평생을 산 분이 있습니다. 그 분이 마지막에 회개하고 예수를 믿게 됩니다. 자, 진화론에서는 사람이 아메바로부터, 단세포동물로부터 시작됐다고 합니다. 그리고 사람과 가장 가까운 것은 유인원(類人猿)이라고 합니다. 유인원으로부터-유인원이란 것은 쉽게 말하면 사람 닮은 원숭이, 원숭이 닮은 사람입니다. 어쨌든 원숭이로부터 사람이 진화했다는 생각을 한 거예요. 그 분은 평생을 두고 이 진화론에 대해 연구했어요. 그러다가 진화론을 떠나서 예수를 믿게 됐는데 그 분이 쓴 수필에 아주 재미있는 말이 있어요. '아직도 나는 결론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진화론을 믿고 있을 때에 원숭이를 보면 참 기분이 이상했어요. 동물원에 갈 때마다 그랬지요. 저 동물들이 다 내 할아버지라는데, 할머니라는데… 이런 생각을 하게 되니까요.
그래 동물과 내가 연관되는 것 같아 늘 기분이 찝찝했어요. 영 기분이 좋지 않았지요. 그랬는데 예수를 믿고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생각하고 보니까 동물원에 가도 기분이 달랐습니다. 하나님께서 참 묘하게도 만드셨다, 하게 됩니다. '얼마나 동물이 아름답게 보이는지, 세상이 확 달라 보이는 거예요.'
보세요. 이것이 세계관입니다. 세계관은 곧 인생관이요, 인생관은 곧 자아의식입니다. 나 자신을 어떻게 보느냐와 관계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느냐-사람을 생리학적으로 본다 하면 그것은 동물입니다.
사람은 동물적인 요소를 다 가지고 있어요. 먹고 싶은 본능, 자고 싶은 본능, 새끼 가지고 싶은 본능… 이런 게 다 있지요. 그래 유명한 진화론자가 기껏 한다는 말이 사랑이 뭐냐, 생식본능의 발로다, 라고 합니다. 그 이상으로 다르게 생각할 수가 없는 거예요. 동물의 암놈 숫놈이 서로 좋아하는 것, 사람도 그 정도 아니겠느냐, 그 이상 다른 게 아무 것도 없지 않느냐 하는 것이지요. 사랑을 그렇게 놓고 보면 인생이란 참 허무합니다. 그런고로 사람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인류학적 비판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생리학적 인간, 생리학적 인간론에서 비롯한 것이 유물사관이요 공산주의입니다. 저도 어렸을 때에 배웠습니다마는 공산주의를 알게 하기 위해 맨먼저 가르치는 것이 진화론입니다. 중학교 다닐 때부터 이것을 두꺼운 것으로 세 권이나 공부했어요. 언젠가 서울대학교에서 진화론 특강을 한다고 해서 제가 시간 내서 한 번 가본 일이 있습니다. 상당히 많은 학자들이 모여서 진화론 강의하는 것을 들어보니까 그실 제가 중학교 때에 배운 것만도 못한 것 같습디다. 자, 진화론은 공산주의자들이 정통합니다. 왜 진화론을 가르치느냐--그걸 자꾸 배우게 함으로써 사람이 동물이다, 그렇게 세뇌하는 거예요. 그래서 공산주의자를 만들 때에는 진화론, 사회발전사, 볼셰비키당사, 이 세 가지를 배우게 하면 된답니다. 더 긴 얘기는 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면 공산주의에서는 사람을 어떻게 보느냐, 동물로 봅니다. 사람은 동물로부터 비롯됐다, 동물과 사람은 하나다, 동물의 약육강식, 먹고 싸우는 것과 똑같은 것이 사람 사회에도 있다, 사람은 옷을 입은 것뿐, 동물과 다른 게 없다-이렇게 말합니다. 결국은 사람은 동물이요, 동물로 끝난다는 거예요. 이런 세계관으로 사람을 봅니다.
그 다음에 또하나의 세계관은 Cultural anthropology, 인간을 철학적으로, 혹은 문화적으로 봅니다. 역시 인간에게는 정신 문화가 있는 문화-사람만이 가지는 특별한 언어가 있고, 철학이 있고, 이성이 있고, 이래서 인간은 문화를 창조하고, 문화 속에 태어나고, 문화와 함께 살아간다, 문화에 따라서 행복하기도 하고, 불행하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그도 그렇기는 해요.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여러분, 아마 우리 사회에서 한 남자가 여자를 서넛 데리고 살아야 한다, 그러면 그 사람은 아마 돌 맞을 거예요 그렇지요? 그런데 일전에 제가 이집트의 카이로에 갔을 때였어요. 딱히 뭘 사려는 것도 아니었고, 그저 심심해서 백화점에서 왔다갔다했는데 그곳 점원이 저더러 자꾸만 뭘 사라고 그래요. 여자 물건을 가리키면서 말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런 것은 필요없다고 했더니 웬걸, 4개나 사라는 거예요.
저는 물었지요 "왜 4개를 삽니까? 사려면 하나만 사지요." 그랬더니 이 점원이 "아니, 마누라가 넷 아니예요?"하고 되묻습니다. 그래서 "그야 당연히 한 명이지요." 이 점원, 의아하다는듯이 "하나 지고 어떻게 행복합니까?"하더라고요. 그래 제가 "당신은 마누라가 몇이요?" 했더니 "저는 네 명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일개 점원인 자기도 부인이 넷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얘기 좀 합시다. 여자의 질투가 참으로 굉장할 텐데 그 얼마나 괴롭겠어요?" 그랬더니 "그렇지 않아요. 한 여자가 한 남자를 섬긴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오히려 서넛이 함께 섬기면 좋지요. 서로 협력해가면서 말입니다. 세 번째 마누라가 제일 좋아해요. 위로 언니가 둘이 있고 밑에 동생이 하나 있으니까요." 그것, 가만히 듣고 보니까 일리가 있다 싶데도. 그렇지 않아요? 이것이 저들의 문화예요. 그 속에서 살았기 때문에 저들은 불편이 없는 거예요.
지금 여러분이 이렇게 웃고 있지만 우리도 100년 전에는 그랬어요. 죄송하지만 세종대왕을 비롯해서 쓸만한 남자들은 거느린 여자가 서넛 됐어요. 하나 데리고 사는 남자는 신통치 않은 남자였어요. 안 그렇습니까? 바로 100년 전의 우리 사회만 해도 그랬던 거예요. 우리가 복음을 받아들인 이 좋은 세상에 사니까 지금 이렇게 큰소리치는 거예요. 예수를 믿건 안 믿건 다 기독교 문화 속에서 이렇게 행복을 누리고 있는 거예요. 원래 우리 문화도 이렇지 않았어요. 여러분은 아마 이 말을 들으면 깜짝 놀랄 거예요. 세계의 인구를 다 통틀어보면 아직도 monogamy, 일부일처제가 세계 인구의 4분의 1밖에 안돼요. 4분의 3은 아직도 일부다처제입니다. 그러니까 고맙게도 우리가 한국에 태어났으니까 큰소리칠 수 있는 것이지요. 문화라는 게 그런 거예요. 어떤 문화, frame of reference-frame, 그 틀 속에서 이렇게 자라났고, 이렇게 살다보니 자연 그런 줄 알고 사는 거예요. 그러니까 행복을 모르면 불행도 모르는 거예요. 그저 그렇거니 하고 사는 거예요. 지금 저 북한에서 고생하는 우리 동포들도 사실은 여기 와서 자유세계를 한번 보고가면 더는 그곳에서 못살아요. 숨차서 못삽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 태어나 그렇게 사니까 그런 대로 살아가는 거예요. 행복을 모르면 불행도 모릅니다. 이것이 문화예요. 무릇 사람은 문화 속에 살아가는 것이예요.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그렇다면 인간을 이렇게 문화의 산물로 볼 것이냐, 이 정도로 보면 되는 것이냐-이 또한 잘못 보는 것입니다.
자, 그 다음에 문제는 바로 신학적 인간학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된 인간-하나님께서 당신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창조하셨다, 사람은 나름대로 육체도 입었고, 문화도 가졌지마는, 그 중심은, 그 본성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형상인 것이다, 좀 이지러지기도 했고, 병들기도 했지만 그래도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다, 그런고로 하나님의 자녀됨을 다시 회복하는 것이 바로 예수 믿는다는 것이다, 그것입니다. 나도 하나님의 자녀, 너도 하나님의 자녀-이렇게 알고 살아가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이게 바로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의 성경에서 사도 바울은 사람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말씀합니다. 이원론적 표현을 씁니다. 왜냐하면 헬라문화에 젖어 있는 사람들에게 말씀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두 가지 방법으로, 소위 이원론적 방법을 사용해서 말씀하는 것입니다. "육신을 좇는 자는… 영을 좇는 자는(5절)"하고 육에 속한 사람, 영에 속한 사람으로 딱 나누어놓았어요. 육에 속한 사람과 영에 속한 사람-사람은 한 사람이에요. 그런데 한 사람 속에 영과 육이 있어 가지고 서로 싸운다, 하는 이원론적 해석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헬라 철학적 이원론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한 사람이 두 소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소속의 문제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 사람이 어떤 지배를 받고 있느냐 함입니다. 소속의 문제입니다. 자, 나는 육체를 가졌어요. 다같은 육체가 있어요. 그런데 육체를 따라서 육체에 사느냐, 영에 따라서 육체에 사느냐-그것이 다르다는 거예요. 어디 사느냐가 문제가 아니예요. 어떤 모양으로 사느냐가 문제가 아니예요. 문제는 그의 영이 어디에 속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소속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본문은 이 문제를 자세하게 설명해줍니다. 먼저 육신에 속한 사람이든 영에 속한 사람이든 누구나 속한대로 생각하게 된다고 말씀합니다.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5절)"-아주 오묘한 말씀이에요. 이것은 인간학적으로 봐도 대단히 중요한 것이에요. 자, 육신을 입었어요. 그리고 인간은 그보다 더 높은 차원의 생각을 가졌어요. 그리고 생각보다 더 높은 곳에 영이 있어요. 육신에 속한 사람은 생각도 육신에 매이는 거예요. 그리고 영도 육신에 매입니다. 그것이 우상숭배입니다. 그러니까 철저하게 육체 주도적입니다. 무엇을 해도 육체만 생각해요. 생각이 거기에 있어요. 철학도 거기에 있어요. 자나깨나 그것만 생각을 해요. 그리고 그 운명이 그쪽으로 갑니다. 이제 그런 사람이 영을 생각할 때에는 우상을 섬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육체에 속한 사람의 모습이예요. 가만히 보세요. 오늘도 육체에 지배를 받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자나깨나 무엇을 생각합니까? 돈 생각만 해요. 육체에 속한 사람은 예수를 믿어도 돈밖에 생각하지 않아요. 기도해도 '장사 잘되게 해주세요'-그것밖에 없어요. 십일조 내면 장사가 잘된다는데, 해서 십일조를 바칩니다. 어떤 목사님은 한 교인에게 봉변을 당했다고 합디다. "십일조 냈는데 왜 장사가 잘 안 되는 거요? 내 돈 도로 물어주시오"하며 넥타이 잡고 흔드는 바람에 혼이 났답니다. 그런 교인이 있으면 참 큰일이지요. 목사가 Body guard 둬야 될 판입니다.
육체에 속한 사람-예수를 믿어도 보이는 것은 육체밖에 없어요. 돈밖에 없어요. 그런데 그 소원대로 안 된다는 거예요. 소원대로-그러면 문제가 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내 마음의 중심이 어디 있느냐, 어디 속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육에 속한 사람, 영에 속한 사람-이렇게 나누어 말씀합니다.
그러면 영에 속한 사람은 어떻습니까? 영에 속한 사람은 영 주도적으로 살아요. 그런고로 이제는 그 이성도, 그 생각도 영에 속해요.
신령한 것을 생각해요. 신령한 방향으로 생각해요. 여러분도 잘 아시는 대로 생각이라는 것은 어느 각도에서 생각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입니다. 어느 방향에서 생각하느냐-사랑으로 생각하면 좋은 생각하게 되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긍정하게 되고, 그렇지 않습니까? 부정적으로 삐딱하게 생각하기 시작하면 끝도 없는 거예요. 좋은 일이 하나도 없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생각이 잘못되는 것은 무엇 때문이냐 하면 그 소속이 잘못됐기 때문이에요. 중생하지 못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중생해서 영 주도적으로 사는 사람에게는 모든 일이 합리적입니다. 가만히 보면 아직도 중생하지 못한 사람들한테는 성경에 나타난 얘기가 믿어지지 않아요. 믿으려고 애쓰면서도 믿는 것과 합리적인 세계가 따로따로 놀아요. 그래서 고민이 많아요. 갈등이 많아요.
그러나 정말로 중생한 사람은 그 이성도 중생 했어요. 그 생각도 중생 했어요. 그런고로 무엇을 볼 때마다 은혜롭게 생각하고, 은혜롭게 보고, 은혜롭게 듣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적극적으로, 창조적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에게는 고민이 없어요. 그 생활은 영생이요, 기쁨이요, 평안인 것입니다.
그러나 육체 주도적으로 사는 사람은 생각이 허무해져요. 그래서 결국 오늘의 본문에 보는 바와 같이 그 생각은 사망으로 빠져요(6절).
그쪽밖에는 없어요. 그 길로 갈 수밖에는 없어요. 그러니까 영적으로 생각하는 훈련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 6절말씀은 영에 속한 사람은 영을 생각하고, 육체에 속한 사람은 육체만을 생각해서 결국은 사망에 빠지고 만다 합니다. 육체에 속한 사람은 그 중심이 자기자신에 있고, 사람에 있고, 정욕에 있고, 자존심에 있고, 자기교만에 있고, 육체의 욕망에 있습니다. 그것에 따라서 움직여져요. 오늘도 보면 저마다 별것도 아닌, 내놓을 것도 없는 자존심, 그것 때문에 고민이에요. 그것 때문에 사랑도 못해요. 그것 때문에 바른 생활, 바른 인간관계도 가질 수가 없어요. 자존심, 그것 뚝 떼어버리고 살면 참 좋으련만, 육체에 속한 사람은 이것을 절대 끊지 못합니다. 그런가하면 아주 더러운 욕심, 필요 없는 욕심을 가진 사람이 있어요. 다 가져서 무엇합니까? 이런 사람 보면 참 답답해요. 그렇게 많이 필요한 게 아닌데, 그 많은 욕심, 이것 때문에 시달립니다. 많은 고통을 당하고 삽니다.
사망에 이를 수밖에 없어요. 결과적으로 이런 사람은 두려움에 빠지게 되고, 좌절과 근심과 절망에 빠지게 됩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영적 자살'이라고 합니다.
사실은 자살에 대한 책을 제가 몇 권 읽어보았습니다 마는, 소위 '자살심리'라고 하는 것은, 자살하려는 순간에 이를 때에는 이미 그 마음은 자기 것이 아니예요. 그러나 누구도 참견할 수 없는 거예요. 그러면 거기까지 이르는 것은 어떻게 된 것이냐, 자살까지 가는 것은 어떻게 된 것이냐--그가 육체에 속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육체에 끌려가고 깊이 끌려가는 나머지 이제는 헤어날 수가 없게 되고 말아요. 그래 이제 자살밖에는 생각이 나지 않아요. 다른 길은 전혀 생각이 나지 않아요. 요새는 차를 타고 다니니까 보지도 못하고 어떻게 되었는지 모릅니다마는 제가 기억하기로는 한 30여 년 전에 인천에 있을 때에 서울로 올라오는 버스 안에서 유심히 본 것이 있어요. 여러분도 혹 보신 분이 있을 거예요. 당시 제1한강교 다리 난간에 뭐라고 써 있는 고하니 '잠깐만 기다리세요. 인생은 한 번뿐입니다'-한강에 빠져 죽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죽지 말라고, 잠깐만 기다리라는 말입니다. 그도 그렇지요. 잠깐만 기다리면 안 죽을 수 있을 거예요. 그 잠깐을 못 기다려서 풍덩 빠지는 것이지요. 또 빠져 가지고 이제 살려달라고 허우적거려요. 이게 인간이에요. '영적 자살'-그 어느 시간서부터 빠져 들어가기 시작하면 헤어나지 못해요. 소위 spirit suicide, 영적 자살 할 자가 많아요. 죽어 가지고 사는 거예요. 영은 이미 죽었어요.
죽는짓만 하고 있는 거예요. 이 얼마나 불쌍합니까? 이것은 자기 파멸입니다. self destroying입니다. 가만히 보세요. 영적으로 이렇게 잘못될 때에 육체 주도적으로 살게 되고 만사를 부정적으로 봅니다.
마지막에는 자기 몸에까지도 해로운 짓만 해요. 이상하지요? 꼭 나쁜 짓만 골라서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육체도 건강을 지킬 수 없어요.
그리고 모든 인간관계도 좌충우돌입니다. 누구를 만나도 반갑지 않고, 그 역시 누구한테나 괴로운 인간입니다. 이런 사람이 되고 맙니다.
특별히 오늘의 본문은 귀한 말씀으로 이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7절)"-이런 사람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또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않는다 합니다. 하나님의 율법에 굴복하지 않는다 함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법이 들리지도 않아요. 이해되지도 않아요. "할 수도 없음이라"라고 말씀합니다. 이 얼마나 귀한 말씀입니까?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그것이 문제예요. 아무리 하려고 해도 할 수 없어요. 아무리 허우적거려도 헤어나올 길이 없어요. 이것이 육체에 속한 사람입니다.
그 다음으로 영에 속한 사람은 어떻습니까? 영에 속한 사람은 영의 일을 생각합니다. 이성의 세계도 영적입니다. 신령한 세계로 생각합니다. 신령한 세계 지향적으로, 하나님의 뜻 지향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육체의 세계나 물질적인 세계나 사회에 대해서도 절대로 절망하지 않습니다. 멀리 내다봅니다. 영원한 세계에 비춰봅니다. 그런고
모든 것이 아름답습니다. 이것이 바로 영에 속한 사람입니다. 세상을 아름답게 보고, 또 귀하게 보고, 소중하게 느끼는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인이요, 영에 속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깊은 세계에서 생각합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를 생각하고, 또 더 먼 세계를 내다보면서 삽니다. 그렇기 때문에 절대로 절망하지 않습니다. 영의 생각은 항상 생각 자체도 멀리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 주도적으로, 그리스도 주도적으로, 그리고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고 그렇게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이 사람은 영적으로 마음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영성에 의해서 그 본능도 좌우됩니다.
이것은 마치 건강한 사람이 음식을 먹어도 자기 몸에 이로운 것만 먹는 것과도 같아요. 그것만 맛이 있어요. 그러나 어떤 사람은 취미가 아주 이상해요. 꼭 먹어서 나쁜 것만 좋아해요. 상식적으로 봐도 나쁘고, 의사도 나쁘다고 하지만 자기는 그것만 좋은 거예요. 우스운 얘기입니다마는 제가 오래 전에 종합진찰을 한번 받아본 일이 있어요. 다 진찰 받고 의사선생님이 이렇게 말을 해줍니다. "몸에 이상이 없고 다 좋습니다. 그런데 콜레스테롤 단위가 좀 높군요. 그러니 이런 이런 것은 먹지 마십시오." 가만히 들어보니 새우도 먹지 말고, 굴도 먹지 말고, 해요. 그래서 제가 "아주 먹지 말아야 합니까?"라고 물어봤더니 "일주일에 두 번은 괜찮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래 제가 "두 번 이상 먹을 돈도 없습니다"라고 웃으며 말했어요. 그리고 그곳을 나와 마침 또 누구를 만났는데 점심 먹자고 그래요. 그래서 따라갔더니, 하필 굴이 나오는 거예요. 그런데 참 이상하지요? 그 날 따라 굴이 굉장히 맛있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저를 가리켜 "내가 아담의 후손이구나"했지요. 분명히 먹지 말라는 것을 좋아하거든요.
여러분, 이것을 아십니까? 터부(금기)를 좋아하는 것은 금기로 인해서 지배받는 그 굴욕에 대한 반항심 때문이에요. 자유 하고자 하는 마음 때문에 하지 말라는 일을 꼭 하고 싶은 거예요. 그럴 때에 마치 자유인이 되는 것 같아요. 사실 그 자유인은 참 못된 자유인입니다. 바로 그런 심리 때문에 사람은 하지 말라는 일을 꼭 하고 싶은 거예요. 그런데 이게 다 좋은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영에 속한 사람은 이런 모든 시험으로부터 자유 합니다. 그래서 성령이 함께 하고, 말씀이 함께 합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말씀에 복종하면서 하나님의 법을 따라가면서 그것을 즐깁니다. 복종을 즐겨요. 순종을 즐깁니다. 그리고 복종하는 사람은 복종케 한 자에게 책임을 전가합니다. 그런고로 나는 걱정할 필요가 없어요. 잘되든 안되든 하라시니까 하는 것일 뿐이니까요. 그래서 결과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요. 이렇게 되면 어떻게 되나, 장차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결과의 불확실성에 대해 아무 걱정이 없어요. 하라시는대로 했을 뿐이에요. 그렇지 않아요? 여러분, 부모님의 말씀에 잘 순종하는 사람은 잘되든 안되든 상관 안해요. 부모님이 하랬으니까 했다, 그거예요. 결국은 시집 장가가는 것도 그렇더라고요. 부모님이 하래서 결혼한 사람은 처음에는 조금 섭섭하더라도 결국에는 그것이 나은 선택이었다는 것을 알아요. 그런데 부모님이 반대한 결혼을 한 사람은 자신이 몽땅 책임을 져야돼요. 혹이라도 잘못되면 부모가 뭐라고 합니까? 그러기에 내가 뭐라든?-이게 얼마나 무겁습니까? 그렇지 않아요? 아무튼 영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하고 거기에 모든 책임을 맡겨요. 나는 다만 순종만 해나가면 되니까요. 그렇듯 영으로부터, 영의 생활에서 자유 하게 됩니다. 그래서 진리의 말씀을 듣고, 거기서 힘도 얻고, 지혜도 얻습니다. 내 지혜로 살지 않습니다.
성령이 주시는 지혜로 삽니다. 성령이 열어주시는 깨달음을 통하여 새로운 세계를 항상 확인해가면서 살아갑니다. 그가 따르는 방향은 생명이요, 그가 가는 길은 영생입니다. 영생을 보장받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의 생이 명랑하지요. 어디서 어떻게 살다가 어떻게 죽어도 상관이 없어요.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그래 이 사람은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불행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영을 따라 살았기 때문에, 영 지향적으로 살았기 때문에-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오늘의 본문에 대단히 중요한 요절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꼭 외워두어야 될 말씀입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9절)"-성령론을 강의할 때에 이 말씀은 아주 중요한 요절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다 함입니다. 육신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어요. 성령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기에 자신도 기쁩니다. 자, 사도 바울, 이 사람은 그리스도의 영에 살아요. 그리스도의 영 안에 살고 있어요. 그래서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다 하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신학적으로 중요한 말씀이 있습니다. 성령을 '그리스도의 영'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호칭이 다르지 않습니까? 성령을 성령이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이라고도 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했습니다. 자,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부르는 바 성령에 대한 호칭입니다. 이 성령에 대해서는 긴 말씀은 못드리겠습니다마는 제가 신학대학에서 여러해 동안 성령론을 강의해온바 결론을 한 가지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사도 요한은 역사적인 예수께서 부활하신 다음에 영으로 임재하신 것으로 성령을 설명합니다. 이에 비해서 사도 바울은 종말론적으로, 앞으로 세상의 끝에서 재림하실 예수께서 (마치 예수님이 세상에 오실 때에 세례 요한을 먼저 보내신 것처럼) 그 Agent로, 지금은 영으로 먼저 와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의 성령론의 요점입니다. 사도 바울이나 요한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이요, 오셨던 그리스도께서 지금 여기 계시고, 영으로 계시고, 존재의 양상을 달리하셔서, 이제 앞으로 오실 그리스도께서 먼저 와 계시는 것입니다.
칼 바트의 유명한'예수의 현현설'이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그리스도는 세 번 나타나신다는 것입니다. 첫째가 인격으로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예수, 둘째가 영을 입고 오신 예수입니다. 영으로-그래서 어디에나 계십니다. 누구의 음성이든 다 들으시고, 누구라도 만나실 수 있어요. 셋째가 이제 앞으로 재림하실 예수입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지금 우리가 가진 육체가 가장 완전한 것 같지요? 그리고 죽을 때에는 육체는 썩어버리고 영만 남으니까 '반쪽이다'하게 되지요? '영이 훨훨 날아갔구나, 육체는 없고'--이렇게 생각한다는 말이지요. 은연중에 살아 있는 사람만 소중하고, 죽은 사람은 어딘가 조금 잘못된 것 같아요.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은요, 사실 알고 보면 육체도 불완전하고, 영도 불완전해요. 육체의 감옥에 갇혔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영도 육도 사실은 다 불완전한 것입니다.
그러면 참으로 완전한 인격이란 무엇이냐-부활하신 주님, 바로 그 인격입니다. 육체도 완전한 육체요, 영도 완전한 영이십니다. 그래서 완전한 인격이십니다. 장차 그 모양으로 우리가 부활될 거예요. 보세요. 주께서 영으로 여기 와 계셔요. 그런고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장차는 온전한 인격으로, 그도 우리도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나타나게 될 거예요. 그러한 존재로 우리가 이렇듯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다, 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내 영은, 내 영 자체는 지금 병든 거예요. 구속받지 못한 영이에요. 그리고 육체만 있는 거예요. 육체 주도적으로 살고 있는 거예요. 그런고로 그리스도의 영이 있고, 그리스도의 영과 바른 관계를 맺으면서 내 영이 건강한 하나님의 자녀의 영으로 살아갈 때에 그가 발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럴 때에 정신도 몸도 온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다, 크리스찬이 아니다, 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중생하지 않으면 그리스도인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같은 말씀이에요. 표현이 다를 뿐입니다. 그런고로 '그리스도의 영'-구속한 영이요, 자유의 영이요, 진리의 영이요, 앞으로 재림하실 영입니다. 그 영이 오늘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있을 때에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고린도후서 3장 17절에 보면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원문대로 보면 "주는 영이시니"-여기에 한 단어가 더 추가되어 있습니다. "주는 지금 영이시니"-앞으로는 온전한 인격으로 오시겠지만 지금은 영으로 계십니다. 그래서 '지금'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리스도의 영이 있을 때에 그는 언제나 자유함이 있다, 그리스도와 함께 자유함이 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이다, 그리고 그 성령과 함께 할 때에 그가 그리스도인이다, 그 영에 의해서 주도될 때에 그 인격은 온전한 자유인이다, 하는 말씀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의 영에 이끌려 그리스도의 영에 지배를 받으면서 그 진리 안에 살고, 그 자유함을 누리고, 그 사랑 안에 사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육체의 본능에 따라 사는 사람을 아주 생리학적 인간이라고 한다면, 또 정신적 세계에 끌려 사는 사람을 철학적 인간이라고 한다면, 그리고 양심에 끌려 살고, 도덕에 끌려 사는 사람을 율법주의자라고 한다면, 이제 성령에 끌려살 때에, 성령의 지배하에 살 때에 그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여러분, 무한한 자유함이 여기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의 본문 마지막 결론에 귀한 말씀이 있습니다.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11절)." 보세요.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영에 속해 살 때에 영만 사는 게 아니예요. 정신도 살고, 몸도 살고, 종말론적으로는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실제적으로 말하면 영 주도적으로 사는 사람은 육체도 건강해요. 정신도 건강해요. 그의 모든 생활도 건강해요. 이것을 잊지 말 것입니다. 영 주도적으로 성령에 이끌려 사는 거기에 무한한 자유함과 온전한 그리스도인의 인격이 있습니다. 이것을 항상 기억해야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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