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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때의 삶의 원리//베드로전서 4장 7-11절

by 【고동엽】 2022. 10. 23.

마지막 때의 삶의 원리// 20010103 수요저녁예배

2001-12-08 18:02:29 read : 517

 

베드로전서 47-11

 

지난 인류 역사 중에 가장 위대한 사건을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예수님이 되어 이 땅에 오신 것이 가장 위대한 사건일 것입니다.

그러면 앞으로 일어날 사건 가운데 가장 위대한 사건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재림하시는 사건일 것입니다.

 

언제 예수님께서 재림할까요? 이 날은 아무도 모릅니다.

왜 하나님께서 그 날을 모르게 하셨을까요?

계산적으로 날짜를 꼽아보고 날짜에 맞춰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이 아닌

묵묵히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에게 더욱 큰 은총을 주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지막 때에 언제 어디에서 예수님이 재림하시든지 상관없이

즐겁게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항상 깨어 준비하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마지막 때에 어떻게 사는 것이 깨어 준비하는 삶일까요?

오늘 본문은 우리들에게 마지막 때의 삶의 원리 몇 가지를 권면하고 있습니다.

 

1. 기도하는 삶

 

베드로는 마지막 때의 삶의 원리 중 첫 번째로 기도하는 삶을 권면합니다.

본문 7절을 보십시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왜 베드로는 마지막 때에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고 했을까요?

 

그만큼 마지막 때는 정신을 차리기 힘든 스피드 시대가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오늘날 보십시오. 정말 정신없이 변화하고 있고, 할 일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할 일은 많은데 무슨 일을 해야 할지는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지막 때에 베드로는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권면합니다.

 

기도하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무엇을 먼저 해야 할지, 무엇이 정말로 가치 있는 일인지 지혜를 얻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기도할 때 이 땅에 우리를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됩니다.

 

사람들은 대개 기도할 때 문제에 대한 문제해결을 위해서 기도하는데

사실상 우리가 기도해야 할 더욱 중요한 이유는 문제해결보다는

'삶의 목적과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기 위해서'라는 이유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힘들 때에도 기도가 필요하지만, 바쁠 때에도 기도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바쁜 때에는 마음이 분주해서 오히려 기도를 안합니다.

아닙니다. 그때야말로 더욱 기도가 필요한 때이고,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킬 때 종교개혁이 점차 확산되면서

너무 바쁘니까 잠자는 시간을 줄일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잠자는 시간이 여섯 시간에서 세시간까지 점점 줄어드니까

그는 "정말 바쁘다! 그래서 더욱 기도해야겠다."라고 말하고 더 기도했습니다.

 

우리도 바쁘다고 여길수록 더 기도 시간을 내야 합니다.

냉철히 생각하면 가장 바쁜 때가 가장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그리고 기도는 우리의 신앙생활 및 교회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입니다.

그 중요한 것을 빼 놓고 다른 무엇을 한다면 신앙의 균형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어떤 신학자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기독교는 기도교다."

기도가 없는 신앙은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신앙으로 보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어떤 목사님은 기도의 중요성을 이렇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교회에 다니면 여러 가지 기적을 목격하게 되지만

그 중에서 가장 놀라운 기적 중의 하나가 기도하지 않고 교회에 다니는 것이다."

 

우리가 기도하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고

이 할 일 많은 세상에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며 살 수 있겠습니까?

마지막 때에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은총을 입고 사는 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2. 사랑하는 삶

 

오늘날 사랑이라는 말이 많이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홍수에 먹을 물이 더 없다고 진정한 사랑은 오히려 찾기가 힘듭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마지막 때가 되면 그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무엇보다도 사랑을 아주 강조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강조합니까? 8절 말씀을 보십시오.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새해가 되었습니다.

여러 가지 새로운 목표를 세울 때 꼭 사랑의 목표를 세우십시오.

용서해야 할 사람이 있으면 용서하겠다고 작정하고 실천해 보십시오.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8절 말씀을 보면 사랑의 첫 단계는 바로 '허다한 죄와 허물을 덮는 것'입니다.

그처럼 상대방의 허물을 덮어줄 때 진정한 용서와 사랑이 싹트게 됩니다.

 

우리는 다 부족한 사람이고 모자라는 사람이고 실수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 허물을 덮어주고 적절한 때에 용서해야 합니다.

성경은 말세가 될수록 사랑이 메말라져 간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열심으로 사랑하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을 주고받으며 사랑에 빚진 자들이 되기에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성도들이 빚지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그러므로 되도록 빚을 지지 않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빚을 많이 지어도 좋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로마서 138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이 구절에는 두 가지의 핵심 메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져서는 좋지 않다는 메시지입니다.

그런데 동시에 사랑의 빚은 예외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의 빚은 많이 질수록 좋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랑을 많이 꾸어 주시고, 많이 꿔다 쓰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이 사랑을 주고받는 것을 대단히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사랑할 때 특히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축복을 받게 됩니다.

 

첫째, 사랑하면 죄와 허물이 보이지 않게 됩니다. 그것이 결국 행복입니다.

 

둘째, 사랑하면 인생의 짐이 덜어집니다. 짐이 없어지진 않지만 덜어집니다.

왜냐하면 사랑하며 지는 짐은 짐이 아니고 오히려 기쁨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남에게 기대야 하고, 짐을 지우려면 먼저 사랑 받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사랑 받는 존재가 아닌 상태에서 짐을 지우면 남이 부담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랑 받는 존재가 된 상태에서 짐을 지우면 그것은 기쁨이 됩니다.

 

미국의 텍사스에서 목회하는 저의 친구 목사님은

수많은 사람들이 그분을 기꺼이 도우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겸손하고 마음의 여백을 통해 사랑 받을 행동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부담을 주는 존재가 되지 말고 사랑을 받는 존재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제가 미국에서 혼자 유학할 때 수많은 분들이 식사초청을 해 주었습니다.

그렇다고 절대 빈대처럼 생활하면서 사람들의 눈총을 받지 않았습니다.

실질적으로 두 가정으로부터 더블로 초청을 받아서 난처한 때도 많이 있었습니다.

 

아마 제가 그때 두 가지를 잘 하려고 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1) 하나는 신학생들 사이에도 갈등이 생기는데, 저는 그 갈등을 잘 풀어주려고 했습니다.

AB가 갈등하면 A에게는 B 칭찬을 하고, B에게는 A 칭찬을 했습니다.

그런 성향을 사람들이 알게 되니까 누구하고도 친하게 지낼 수 있었습니다.

 

2) 또 하나는 신학생들도 가끔 침체에 빠지는데 그들에게 <밝음>을 잘 전하려고 했습니다.

그처럼 어디에 가든지 <자연스러움><즐거움>이 넘치는 분위기를 만들려고 했기에,

신학교 졸업할 때까지 어느 학생과도 갈등관계에 들어갈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의 사랑도 많이 받는 편이었습니다.

 

우리는 주위에 평화와 기쁨과 즐거움을 전해주는 사람들이 되어서

남에게 부담이 되는 존재가 아니라 남에게 사랑 받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상대방은 나의 짐을 지면서도 오히려 기뻐하며 짐을 질 것입니다.

 

꽤 부유하게 사는 어떤 평범한 사람에게 두 명의 동생이 있었습니다.

A라는 동생은 아주 미워합니다. 만날 때마다 물질에 대한 부담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전혀 물질적으로 도움을 주지 않고, 꼴도 보기 싫어하고 뒤에서 욕합니다.

그런데 B라는 동생은 아주 사랑합니다. 만날 때마다 즐거움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B라는 동생에게는 최대한 자기의 것을 기쁨으로 주려고 애를 씁니다.

 

우리는 남에게 짐을 지우는 존재가 아닌 사랑 받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자연히 남이 기쁨으로 나의 짐을 지고자 하는 그런 은혜를 입게 됩니다.

 

셋째, 사랑하면 악을 기억하지 못하는 축복을 받게 됩니다.

무작정 기억력이 좋은 것이 축복은 아닙니다.

선한 일, 감사한 일은 잘 기억하고 악한 일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축복입니다.

그런데 사랑을 하면 신기하게도 악한 일이 대한 기억력은 감퇴하고

선한 일에 대한 기억력은 더욱 좋아집니다.

이런 선한 기억력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정말 큰 축복 중의 하나입니다.

 

마지막 때에 더욱 사랑이 넘치는 삶을 통해

주위에 밝음과 기쁨과 즐거움을 전하는 사랑의 용사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서로 대접하고 서로 봉사하는 삶

 

9절 말씀을 보십시오.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본문은 서로 대접하라고 합니다. 어떻게 서로 대접할 수 있습니까?

자기를 낮추고 겸손한 자세를 취해야 원망 없이 대접할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은 대접을 하긴 하는데 자기를 높이면서 대접을 합니다.

그런 경우는 대개 사심을 가지고 대접하는 경우입니다.

나중에 그런 대접은 꼭 원망과 불평으로 자라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원망 없이 서로 대접하려면 교만한 모습을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교만입니다.

사람들이 좋아해도 하나님이 싫어하면 문제가 아주 심각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만의 문제에 대해 항상 자신을 가다듬고 성찰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공적인 사람이 되기보다 성실한 사람이 되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래서 저도 가끔 하나님께 이런 기도를 드립니다.

"하나님! 성공적인 목회자가 되지 말게 하시고 성실한 목회자가 되게 하소서.'

왜냐하면 성공하면 제일 걸리기 쉬운 병이 '교만의 병'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은 은혜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여기저기 간증을 합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은혜를 받았다는 말 중에 교만이 비쭉 나와 있습니다.

그처럼 은혜를 오해하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은혜 받은 자에게 있는 가장 결정적인 덕목이 겸손인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은혜 받았다고 하면서 교만의 병에 걸린 사람에게

어떤 분은 "영혼의 에이즈"라는 병명을 붙입니다.

그 병은 정말 고치기 힘든 아주 심각하고 난처한 질병이라는 말입니다.

 

본인도 은혜 받은 경험이 있고 말씀도 꽤 아니까 말을 잘 듣지 않습니다.

"다 안다!"라고 하면서 어느 누구의 말도 잘 듣지 않습니다.

공동체의 원리를 생각하지 않고, 리더십의 원리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받은 은혜를 다 쏟아 부어 버립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러므로 많이 배운 사람일수록 많이 아는 사람일수록 더욱 겸손해야 합니다.

그리고 많이 은혜를 받은 사람이라면 더욱 더 겸손해야 합니다.

은혜 받았다고 "어떻게 설교를 저런 식으로 해!"라고 하면 될까요? 아닙니다.

자식들이 부모를 볼 때 부모에게서 부족한 점이 한두 개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식은 자식의 자리를 지키는 것이 자식의 도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는 자리를 이탈하고 자기를 높이라는 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은사를 주신 목적이 10절에 아주 잘 나타나 있습니다.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

하나님께서 은사를 주신 것은 "서로 봉사하라!"는 명령을 이행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이제는 자기 은혜, 자기 은사를 가지고 남을 비교하고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약을 남용하는 것보다 훨씬 더 은사를 잘못 남용하는 것입니다.

자기 은사가 남을 판단하는 재료가 아닌 서로 봉사하는 재료로 사용될 때

그 은사는 진정 하나님의 축복을 예비하는 하나님이 주신 은사가 될 것입니다.

 

마지막 때에는 자기 중심주의가 팽배해서 자기가 높아지는 때입니다.

이런 때 겸손함으로 서로 대접하고, 서로 봉사하는 분들이 되어야 합니다.

 

4.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

 

11절 말씀을 전반부 말씀을 보십시오.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말하는 것도 청지기의 자세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봉사하는 것도 하나님의 주시는 힘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청지기 의식이 있는 교인들이 많을수록 교회는 부흥하게 됩니다.

 

그러나 어떤 교회에 가면 교인들이 서로 싸웁니다.

왜냐하면 서로가 서로를 가르치려고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 자기를 드러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 생기는 가장 무서운 마귀 두 마리가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섭섭 마귀입니다. 이 마귀는 참여하지 않으면 생기는 마귀입니다.

참여 안 하면 갈등이 생기고, 불평이 생기고, 섭섭함이 생깁니다.

천성이 나빠서가 아닙니다. 참여하지 않다 보면 누구나 그렇게 됩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무서운 마귀는 삐딱 마귀입니다.

이 삐딱 마귀는 자기를 알아주지 않으면 누구에게나 생길 수 있습니다.

 

이러한 마귀를 물리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항상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는 청지기 의식을 가지면 됩니다.

말하는 것도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봉사하는 것도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하면 절대로 이런 마귀들은 틈타지 않습니다.

 

이렇게 청지기 의식을 가지고 마지막 때의 삶을 아름답게 살 때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십니까? 11절 말씀 후반부를 한번 보십시오.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

 

우리가 청지기 의식을 가질 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러나 죽어서 천국 가는 것만 관심을 가지지 마시고

살아있을 때에 영광을 돌리는 아름다운 삶을 펼쳐야 하겠습니다.

 

동물은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집밖에 있는 야생동물입니다. 이것들은 대체적으로 해가 됩니다.

또 하나는 집안에 있는 동물이 있습니다. 이것들은 주인에게 유익이 됩니다.

 

그런데 집안에 있는 대표적인 것으로 소와 돼지가 있습니다.

이 두 동물은 주인에게 유익을 줍니다.

그러나 유익을 주는 방법에는 아주 큰 차이가 있습니다.

 

소는 살아서도 주인을 위해 일하고 죽어서도 주인에게 큰 도움이 됩니다.

살아서는 밭 갈고 짐 나르고, 죽어서는 가죽으로 구두를 만들게 하고,

설렁탕, 곰탕, 꼬리탕, 도가니탕의 재료가 되어서 뼈까지 다 줍니다.

그러나 돼지는 살아서는 별로 유익을 못 주고

밥만 먹고 잠만 자고 살만 찌고 있다가, 죽은 다음에 비로소 유익이 됩니다.

 

적절한 비유는 아닐지라도 소 같은 성도가 있고, 돼지 같은 성도가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데도 살아서는 하나님께 하나도 영광을 못 돌리고

죽어서 천당에만 가는 것으로 만족하는 돼지 같은 성도가 있고,

살아서도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리고 죽어서도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소 같은 성도가 있습니다. 어떤 종류의 성도가 되어야 할까요?

 

주님 만날 날이 가까운 이 때에 이제는 그냥 성도라는 이름으로 만족하지 말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성도라는 이름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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