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멘토이신 예수님//마태복음 1장 18-25절

by 【고동엽】 2022. 10. 23.

멘토이신 예수님// 20001225 성탄절예배

2001-12-08 18:01:00 read : 867

 

마태복음 118-25

 

10년 전까지만 해도 교회에서는 '제자'라는 말이 많이 유행했었습니다.

교회를 세우는데 제자훈련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제자훈련 열풍이 부어

각 교회마다 앞 다투어 여러 명칭의 제자훈련 프로그램을 도입해 시행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란 '몇 단계 공부'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님을 점차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그 열기가 다소 수그러든 느낌입니다.

 

대신에 요새는 '제자'라는 용어보다 '멘토'라는 용어가 많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좋은 제자가 되는 것보다 오히려 좋은 멘토가 있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특히 복잡한 사회에서 리더십이 중시되면서 멘토의 중요성은 더 강조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멘토란 어떤 뜻을 가지고 있고, 어떤 사람을 말할까요?

 

주전 1200년 그리스의 이타이카 왕국의 왕 오딧세이가 트로이 전쟁을 떠나면서

사랑하는 자기의 아들 텔레마쿠스를 가장 믿을만한 친구에게 맡겼는데,

그 친구의 이름이 멘토였습니다.

그후 오딧세이가 전쟁에서 돌아올 때까지 멘토는 왕자의 친구가 되어주고,

선생과 아버지가 되어 주면서 그를 키우고, 지도하고, 위로하고, 격려했습니다.

 

그 뒤 오딧세이가 트로이 전쟁을 마치고 10년만에 돌아와 보니까

자기 아들이 당당하고, 매력적이고, 늠름하고, 훌륭하게 성장해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 역할을 하며 자기 아들을 잘 키웠던 멘토 덕이었습니다

그때부터 멘토라는 이름은 지혜와 믿음과 사랑과 꾸준함을 가지고

아버지처럼 이끌어 주고 격려해 주는 지도자와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 안에서 성공하는 데 가장 필요한 사람이 바로 멘토입니다.

멘토는 머리 좋은 사람이 아닙니다. 사랑과 믿음으로 격려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에게는 여러분들을 이끌어 줄 아름다운 멘토가 있습니까?

어려운 순간에 금방 달려올 수 있는 위로자와 인생의 조언자가 있습니까?

없다고요? 아닙니다. 있습니다. 바로 우리 주님이 우리의 멘토이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멘토가 되어 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우리의 멘토이신 예수님께서 나실 때의 상황이 그려져 있습니다.

본문 18절을 한번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이 말씀은 예수님이 요셉의 씨에서 나지 않았음을 명백히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처녀의 잉태는 당시로서는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되었던 남편 요셉은 심히 괴로워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 19절을 보십시오.

"그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의로운 요셉의 모습은 타인의 불의를 드러내지 않는 모습이었습니다.

많은 경우에 '의로운 사람'은 불의를 지적하고 비판의식을 가지고

정의를 외쳐야만 의로운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정의를 외치기 위해 정의롭지 못한 방법을 사용하여

안타깝게도 그 외침의 참 의미를 전달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정의를 특별히 사랑하는 사람들은 꼭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언제 어디서나 사랑을 가지고 정의의 편에 서자"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는 정의는 먼저 남을 무너뜨리고 결국 자기 자신을 무너뜨립니다.

그런데 사랑을 가진 정의는 먼저 남을 세우고 결국 자기 자신을 세웁니다.

 

그러므로 진정 사랑을 아는 자만이 정의를 말해야 합니다.

그래서 '정의로운 자'하면 목소리만 높은 운동가를 연상하기보다는

진정 정의를 사랑하는 자가 존경받는 사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타인의 허물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요셉의 의로움을 배워야 합니다.

 

그래서 요셉은 마리아의 잉태를 드러내지 않고 가만히 끊고자 했습니다.

헤어지더라도 상대의 파멸을 원치 않기에 조용히 처리하려는 태도를 통해

우리는 요셉은 마리아를 아주 깊이 사랑했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고,

그의 침착하고 신중한 모습, 기도하는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내 생각으로 급히 행동하지 말고, 한 번 더 기도하고 생각해보십시오.

어떤 이해할 수 없는 사건도 어떤 의미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래서 어떤 일에 대해 너무 속단하지 말고, 하나님께 기회를 드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계획보다 더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결국 주의 사자가 나타나 실상을 알려주고 낳을 아들의 이름까지 지어줍니다.

본문 20절과 21절을 보십시오.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이처럼 우리가 어려움을 묵묵히 처리하려고 하면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주시고, 더 놀라운 것을 예비해주십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시게 되었는데 23절 말씀을 보면

이미 구약성경은 임마누엘 예수가 오실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었습니다.

 

임마누엘이란 말이 무슨 말입니까? 그것은 히브리말로서

<임마누>"우리와 함께"라는 말이고,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임마누엘>이라는 말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히브리말에는 현재, 과거, 미래형이 없고 문장에 따라 달라집니다.

그러므로 임마누엘이란 말의 뜻은 문장의 문맥에 따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셨다"는 뜻도 되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뜻도 되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이다"는 뜻도 됩니다.

우리 하나님은 과거에도 우리와 함께 하셨고, 현재에도 우리와 함께 하시며

미래에도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히브리말로 <임마켐>이란 "당신과 함께"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임마켐엘의 하나님>도 되십니다.

히브리말로 <임마디>"나와 함께"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임마디엘의 하나님>도 되십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을 만나도 결코 홀로 가는 고독한 인생이 아닙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께서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항상 함께 해 주십니다.

우리가 실수할지라도, 심지어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질지라도,

하나님은 잠시 침묵하는 일은 있어도 우리를 떠나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어려울 때, 내가 실패했을 때, 떠나지 않는 하나둘의 세상 친구가 있다면,

아니 한 명이라도 있다면, 그 사람은 정말로 행복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멘토이신 우리 예수님은 우리가 실패했을 때, 소망이 없을 때

그래서 모든 친구들이 다 떠나버렸을 때에 오히려 우리에게 더 가까이 오십니다. ,

 

성경 이사야 547절에는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내가 잠시 너를 버렸으나 큰 긍휼로 너를 모을 것이다."라는 말입니다.

지금 약간의 고난이 있을지라도, 그것이 더 큰 축복의 방편임을 깨닫고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가지고 사십시오.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과거는 미래를 향한 서막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지나간 인생동안 열 가지 사고에서 함께 하셨습니까?

그렇다면 앞으로 있을 열 한 번째 사고에서도 함께 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려운 일이 있으면 먼저 과거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고

미래를 하나님의 손에 의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길이 열릴 것입니다.

 

1877년 미국의 곡창 미네소타에는 3년째 가뭄이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가뭄이 드니까 메뚜기 떼가 창궐했습니다.

점차 미국이 경제공황에 빠지고, 사람들은 내일을 두려워했습니다.

바로 그때 미네소타 주지사인 필스베리(Pillsbury)

절망과 좌절에 빠진 모든 주민들에게 감사의 날을 선포하고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를 믿고 삶에 대해 먼저 감사하자고 했습니다.

 

농작물은 거의 전멸하고 있으나 아직은 살아있으니 감사하자는 말에,

거의 모든 주민들이 주변에 있는 밭으로 나가서 무릎을 꿇었습니다.

"하나님! 그래도 우리에게는 남은 것이 많이 있군요. 감사합니다."

바로 그날 신기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3년 동안 들판을 뒤덮었던 메뚜기 떼들이 하루만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과학자들이 "무엇, 무엇 때문이다"라고 여러 가지 분석을 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해답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당연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도와주셨기 때문입니다.

주민들의 눈물이 섞인 감사 기도가 하늘 보좌를 움직인 것입니다.

어려움이 있어도, 실패했어도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고,

하늘 보좌를 움직이는 눈물 속의 감사 기도를 드릴 줄 아는 분들이 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은 그 믿음, 그 정성, 그 수고를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은 특별히 성탄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두 가지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1. 첫째, 주고받는 사랑에 정통한 사람이 되자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사랑을 받은 존재입니다. 그러면 그것으로 끝나야 합니까?

아닙니다. 우리도 주님처럼 주려고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잘 받기도 하고, 잘 주기도 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사랑을 정의하면서 '사랑은 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더 소중한 사랑의 정의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은 주고받는 것'이라는 정의입니다.

어떤 분은 사랑은 주는 것이라고만 생각해서 받지 않으려는 분이 있습니다.

 

얼마 전에 돌아가신 어떤 훌륭하신 대학교 총장이 있었습니다.

이분은 평생 교회를 위해서 최선으로 봉사하는데 집사 직분을 안 받습니다.

직분을 받지 않고 숨어서 봉사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열심히 합니다.

그런데 이 분을 보니까 직분만 거부할 뿐만 아니라 모든 받는 것을 거부합니다.

가까운 친척이 사과 한 상자를 보내도 뜯어보지도 않고 돌려보냅니다.

그리고 교인이 무슨 고마운 선물을 보내도 그냥 박스 채로 돌려보냅니다.

 

사람들은 청빈하다고 합니다. 강직하고 정의롭게 사는 분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너무 그렇게 강직하다 보니까 사람들이 그분을 어려워합니다.

사람은 정이 오고 가야 합니다. 따뜻한 정은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결국 그분은 교인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쓸쓸하게 돌아가셨습니다.

 

받기만 하는 것은 인색한 일입니다.

그러나 주기만 하는 것도 인색한 모습일 수 있습니다.

주고받는 관계가 되어야 사랑도 꽃피고 정도 생기게 됩니다.

오직 하나님만 일방적으로 주실 수 있습니다.

인간은 서로 주고받고 살도록 하나님이 그렇게 창조하셨습니다.

혼자 주기만 하고 받지 않겠다고 하는 것은 자칫 큰 교만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더불어 사는 원리에 정말 정통한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자녀를 기를 때 일방적으로 베푸는 사랑을 가르치지 마십시오.

주고받는 사랑을 가르쳐야 합니다.

주는 삶이 고상해 보이고, 받는 삶은 덜 고상해 보이는 것 같습니다.

아닙니다. 주고받아야 합니다. 받기만 해도 안되고 주기만 해도 안됩니다.

그렇게 한쪽 편향으로 자라면 자녀가 정상적인 인간관계를 할 수 없습니다.

 

부모의 사랑을 받을 줄 아는 훈련! 그리고 부모를 공경해 드릴 줄 아는 훈련!

이 두 가지가 동시에 필요합니다.

그래야 나중에 부부관계도 주고받는 대등한 관계 속에서 행복한 가정이 됩니다.

자녀가 성공적인 결혼생활을 하게 하려면 주고받는 훈련을 잘 시켜야 합니다.

 

어떤 의로운 분은 교회가 왜 이웃을 돌보지 않느냐고 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교회를 왜 돌보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분들은 교회는 무조건 사람들에게 베풀기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베푸는 삶이 있기 위해서는 교회를 위해 드리는 삶도 필요합니다.

 

그래서 정의를 주장하는 사람들 중에 참으로 안타까운 사실은

없는 사람은 있는 사람에게 베풀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베풀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큰 오해입니다.

사람은 물질관계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베풀 것이 물질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고받는 원리를 모르고 받는 원리만 너무 주장하는 것이 잘못된 정의입니다.

 

받는 것은 복입니다. 그런데 주는 것은 더 큰 복입니다.

그러나 주고받는 것은 우리가 지향해야 할 가장 아름다운 복입니다.

우리 교회 성도들은 주고받는 복을 많이 받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2. 둘째, 어떤 경우에도 희망을 잃지 말자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믿는다면 어떤 경우에도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희망의 씨앗이 되고, 지금 형편에서 행복을 만들어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베들레헴의 말구유에서 태어나셨지만 역사의 주인공이 되셨습니다.

우리도 얼마든지 지금 형편에서 주인공은 되지 못해도 행복할 수는 있습니다.

 

얼마 전에 시중에 베스트셀러였던 "오체불만족"이란 책을 읽어보셨습니까?

지은이는 와세다 대학 정치학과 4학년이 오토다게 히르타다입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손과 발이 모두 10센티밖에 되지 않은 채로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절대로 자기의 삶에 대해서 불평하지 않습니다.

요새 개성시대인데 자기는 태어날 때부터 개성이 있어서 좋다고 합니다.

 

그는 어깨와 머리 사이에 연필을 끼워서 글을 씁니다.

그리고 입과 어깨로 가위질을 합니다.

또한 양어깨로 농구공을 드리볼 하면서 농구를 하기도 하고,

겨드랑이 사이로 철봉을 끼고 턱걸이를 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는 그런 모습을 자기만이 가진 장기라고 자랑을 합니다.

 

그의 어렸을 때 별명은 <휠체어의 황제>였습니다.

항상 자신 있게 살고 모든 일에 적극적이어서 골목대장 노릇을 했습니다.

그의 얼굴에는 어둔 기색이라곤 없습니다. 어머니도 그를 그렇게 키웠습니다.

어머니는 그를 낳은 후 한 달만에 처음 보게 되었는데 다른 사람들은

그의 어머니가 자신이 낳은 자식의 모습을 보고 크게 실망할까봐 걱정을 했습니다.

그러나 처음 자식을 보고 한 소리가 "! 정말 귀엽다!"라는 소리였습니다.

그리고 정말로 자기의 자식을 최고로 귀여운 자식으로 알고 기쁘게 키웠습니다.

 

아버지도 그의 자긍심을 고양시키기 위해서 자주 데리고 산책을 나갔습니다.

초등학교 은사인 다카기 선생은 4년간 그의 담임을 자원하여 멘토가 되어서

무조건 도와주지 않고 오토다케가 모든 일을 스스로 하도록 도와주었습니다.

결국 그는 정상인도 들어가기 힘든 와세다 대학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어떤 분은 불행하게 태어났다고 불행하게 지내는 분들이 있습니다.

아닙니다. 불행은 없습니다. 행복을 포기하기 때문에 불행한 것입니다.

하물며 멘토이신 우리 예수님을 믿는 우리가 희망을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성탄절을 맞이해서 다시 한번 새로운 희망이 여러분들이 삶에 넘쳐나고,

신년에는 더욱 행복하고 아름다운 삶을 엮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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