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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괴롭고 힘들 때// 이사야 55장 1-3절

by 【고동엽】 2022. 10. 23.

마음이 괴롭고 힘들 때// 20010318

2001-12-08 17:48:12 read : 485

 

주일 낮예배// 이사야 551-3

 

< 마음이 힘든 것은 보편적인 시대상황입니다 >

 

얼마 전 초등학교 4학년인 한 아이가 일기에 이런 글을 적은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 엄마는 매일 집에서 저에게 병원놀이를 하자고 합니다.

병원놀이를 할 때 엄마는 의사가 되길 원하기 때문에 저는 환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엄마는 항상 저에게 '이것은 안돼,! 저것은 안돼!'라고 명령을 내리십니다."

아이를 위한다고 하는 엄마의 노력이 아이에게는 병원놀이로 비춰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아이도 괴롭고, 엄마도 괴롭습니다. 우리가 사는 시대가 이런 시대입니다.

 

어떤 중학교 1학년 학생은 아빠 때문에 힘들다고 인터넷에 이런 글을 띄웠습니다.

"우리 아빠는 항상 저의 장래를 염려해주지만, 저의 현재는 생각해주지 않습니다."

분명 아빠는 아이를 위해주려고 했을 것입니다. 아이도 아빠를 좋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서로 힘들어합니다. 누구의 잘못이라고 꼭 집어 말할 수 없지만

다만 인생을 더 살고, 더 깊이 생각할 줄 아는 아빠의 노력이 더 필요할 것 같습니다.

 

어른들은 흔히 자녀가 욕심꾸러기인 줄 압니다. 아닙니다. 자녀는 비교적 순수합니다.

정작 아이들을 욕심꾸러기로 길러내는 것은 부모들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통계입니다.

그러니까 샘이 많은 부모가 샘이 많은 자녀를 길러낸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부모들은 자녀가 욕심으로 잘되기보다 이웃을 돕는 정신으로 잘되기를 바래야 합니다.

그렇게 살아야 삶의 보람과 행복을 느끼고, 고통과 고민이 현저하게 줄어들 것입니다.

 

사람들은 높은 곳에 올라가고, 무엇인가 있으면 고통이 줄어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없는 사람> 이상으로 <있는 사람>에게도 고통이 있습니다.

있는 사람에게는 많은 사람이 몰리지만 정말 좋아서 몰리는 것이 아닌 경우도 많습니다.

그처럼 사람과의 관계에서 영혼과 인격의 진실한 만남이 없다면 그것도 큰 고통입니다.

 

어떤 사람이 열심히 수고해서 성공하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에 무엇이 기다립니까?

이웃의 찬사가 기다리는 경우도 있지만, 이웃의 시기가 기다리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 시기를 극복하고 가진 자에게는 가진 것을 지켜야 하는 마음의 고통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실상 <가진 사람>의 고통은 <없는 사람>의 고통과 별로 차이가 없습니다.

이처럼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사회는 우리 마음을 힘들게 하는 환경이 많습니다.

 

믿는 사람들은 어떨까요? 믿는 사람에게도 역시 마음이 힘들어지는 환경이 많습니다.

얼마 전 교회를 잘 다니는 한 고등학교 선생님에게 유난히 예쁜 딸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이 딸아이가 머리가 아프다고 고통을 호소했습니다.

아이가 아프다고 하는 것은 장난이 아닌데 박봉에 시달리는 교육공무원이라

병원에 가는 일을 자꾸 미루다 병세가 심해져서 병원에 가보니 뇌종양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미 그때는 병세가 너무 심해져서 몇 달 살지 못한다는 진단이 내려졌습니다.

 

그분은 절망감을 느끼며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아이의 통증은 점차 심해졌습니다.

그 고통을 지켜보면서 마음이 너무 힘들어 잘 아는 의사 친구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그 친구에게 아이가 사는 동안이라도 고통 없이 살게 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 친구는 "강한 진통제를 맞히면 진통은 줄어도 생명은 더 위험해진다"고 말렸지만

결국 친구의 간곡한 부탁을 이기지 못하고 아이에게 강력한 진통제를 놔주었습니다.

 

그러자 아이는 언제 고통이 있었냐는 듯이 일주일 동안 멀쩡한 모습이 되었습니다.

그 일주일 동안 딸아이는 부모에게 애교도 부리고 재롱도 부리며 기쁨을 주었습니다.

아내는 아이가 나은 줄 알고 하나님께서 자기의 기도를 들어주었다고 좋아했습니다.

그렇게 꼭 일주일을 지내다가 이 아이는 숨을 거두었습니다.

 

왜 그토록 예쁜 딸아이를 하나님이 데려가셨을까? 정말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도 이 남편은 몇 달 동안 방황한 뒤 다시 교회를 찾아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반면에 이 분의 아내는 하나님을 원망하면서 계속해서 교회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참된 신앙이 무엇일까요? 기적이 사라진 곳에서도 소망을 가지고 다시 시작하는 것!

그리고 어려운 환경에서도 마음의 평안을 잃지 않는 것! 그것이 참된 신앙입니다.

왜냐하면 이 땅에서의 일로 모든 것이 승부가 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 마음이 힘들고 괴로울 때는 오히려 하나님의 기회입니다 >

 

때로 그리스도인의 기쁨은 일이 잘될 때 얻어지기보다는 고통 중에서 얻어집니다.

그러므로 "고통이 있느냐? 없느냐?"보다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합니다.

믿음이 있으면 얼마든지 환경의 장벽과 마음의 고통을 이겨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70년 전에 그리스에 사는 한 사람이 형편이 어려워 교육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은행 경비 시험에 응시했는데 글을 몰라 떨어졌습니다.

그는 집에 와서 통곡합니다. "하나님! 어떻게 저는 은행 경비도 될 수 없나요?"

그 뒤 그 사람은 미국으로 이민 와서 후손에게 가난을 물려주지 않기 위해

열심히 일해서 나중에 미국 월가를 주름잡는 엄청난 갑부가 되었습니다.

 

그가 60세 생일을 맞아 성대한 파티를 열 때 수많은 하객들이 참석했습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이 그에게 다가와 말했습니다. "선생님! 자서전을 하나 내시지요."

그러자 그 갑부가 말합니다. '죄송합니다. 저는 제 이름밖에 쓸 줄을 모릅니다."

"그렇습니까? 만약 선생님이 글을 알았다면 더욱 위대한 인물이 되었을 겁니다."

그때 그가 말합니다. "아닙니다. 제가 글을 알았다면 지금도 경비를 하고 있을 겁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가 약하고, 추하고, 병들고, 힘들어하고, 마음이 상할 때

그러한 고난을 통해서 가장 위대한 하나님의 기회를 제공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가 거룩해지고, 삶의 방향을 가치 있게 전환하고, 자기 의식의 개혁을 이루고,

신사고가 생기는 것과 같은 그런 위대한 일은 편할 때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의 기회는 마음이 힘들 때에 가장 많이 제공됩니다.

 

< 마음이 힘들고 괴로울 때는 겸손해야 합니다 >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마음이 힘들 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 겸손한 자세입니다.

실질적으로 은혜를 아는 자의 모습은 겸손한 모습 속에 가장 잘 드러나 있습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최고의 매력은 무엇보다 겸손한 언어와 겸손한 행동에 있듯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가장 기뻐하는 것도 역시 우리가 겸손한 마음을 가질 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높은 마음을 가질 때에는 절대 임하지 않습니다.

 

옛날 시리아(아람 나라)에 나아만이라는 위대한 장군이 있었습니다(열왕기하 5).

이 장군은 문둥병자였는데 어느 날 이 장군은 하녀로 있던 이스라엘 소녀로부터

엘리사라는 선지자가 있으면 자기의 병을 고칠 수 있다는 희망적인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병을 고치러 가서 엘리사의 집 문 앞에 이르렀는데 사자가 나와 말을 전합니다.

"당신은 가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시오. 그러면 문둥병이 나을 것입니다."

 

자기를 직접 맞이하지도 않고, 상식에도 어긋난 말을 하는 것에 나아만은 대노해서

"우리 나라에 있는 강이 이 요단강보다 더 낫다. 차라리 거기서 몸을 씻겠다."고 합니다.

나아만의 말은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맞는 말보다 순종하는 태도가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말씀의 권위를 높이고 인정하는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분한 마음을 가지고 돌아가려고 하는데 종들이 말리면서 나아만에게 말합니다.

"장군님! 큰 일도 했을 텐데 요단강에서 몸을 씻으라는 것 못하겠습니다. 해 보십시오."

그러자 나아만은 그들의 말을 듣습니다. 종의 말이라도 바른 말이라면 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말씀대로 나아만이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니 병이 깨끗이 치유되었습니다.

 

가끔 믿음생활을 하다 보면 이해 안되는 상황, 이해 안되는 말씀을 접하게 됩니다.

그러나 굳이 이해가 되어야 하나님을 믿고 순종할 수 있다고 하지 마십시오.

이해되지 않아도 주님을 믿고 나가면 반드시 주님 안에서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원리는 외면하고 마음만 높아져 있으니 자기 마음만 더 힘들어질 뿐입니다.

 

얼마 전 미국에서 오래 지내다 한국에 돌아오신 한 목사님이 이런 말을 해주었습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있는 자 없는 자 할 것 없이 다 교만한 것 같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국민적인 교만을 치료해야 합니다. 자세히 보면 아이들에게도 교만이 있습니다.

교회에서도 교만함을 버려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하나님을 위해!"가 너무 지나쳐

자기 의를 가지고 봉사하다 보니까 마음이 힘든 일이 얼마나 많이 생기는지 모릅니다.

 

어떤 분은 이런 말을 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위하여 일한다'라고 하는 생각할 때에는 낙심할 일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고 생각하니까 견고한 심령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 말은 자기 중심적 생각을 버려야 마음의 고통과 낙심이 사라지게 된다는 말입니다.

 

< 마음을 너그럽게 바꾸어 먹으면 됩니다 >

 

사람이 왜 마음이 힘들어질까요? 그 원인을 추적하다 보면 이기주의를 만나게 됩니다.

자세히 보면 <주려고 하는 마음>보다 <받으려는 마음>이 클 때 마음이 힘들어집니다.

나이는 들어도 받기만 좋아하는 것을 심리학자들은 유아기적 고착현상이라고 말하는데,

결국 인간이 성숙해진다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그런 이기심을 극복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가장 아름답게 보일 때는 받으려는 마음이 주려는 마음으로 변할 때이고,

그때 우리의 괴롭고 힘든 마음은 신기할 정도로 봄눈 녹듯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그런 이기심이 있으니까 심지어 신앙 때문에 분쟁이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생각과 스타일을 가진 사람을 미워하고 다른 교파 사람들을 우습게 압니다.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있는 곳에 총 소리가 그치지 않는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짜 신앙인은 진리를 고수하면서도 보편적인 안목으로 사랑을 실천합니다.

 

똑같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도 그 스타일과 표현은 다를 수 있습니다.

지금 누구와 갈등과 분쟁이 있습니까? 이해하는 마음을 가지면 그 갈등은 풀립니다.

우리가 각자의 자리에서 자기의 일에 더욱 충실하면 누구하고도 잘 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 인정해 주면서 그가 나와 같지 않음을 불평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서로가 하나님 앞에 겸허하게 서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서로 하나님을 잘 믿으면 싸움은 자연히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진정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믿는다면 어떻게 함부로 하나님 앞에서 큰소리치며,

서로 치고 받고 자기 흥분을 표출하며 싸우겠습니까?

어른 앞에서는 싸우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것이 바른 인격, 바른 신앙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환경을 탓할 필요가 없습니다. 먼저 마음을 조금만 바꾸면 됩니다.

마음먹기에 따라 고통스런 환경이 오히려 자기의 개성으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어렸을 때 찢어진 옷을 입으면 창피했지만 요새는 개성이라고 오히려 옷을 찢습니다.

이처럼 사람은 동일한 일을 가지고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합니다(파스칼).

그러므로 마음을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 우리는 울어야 할 때도 웃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자신감을 회복해야 합니다. 사람이 자신이 있으면 마음이 넓어집니다.

남을 그토록 용서하는 못하는 것은 아직도 자신이 없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자신감을 가지고 남을 이해하고 남을 격려하며 살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이 세상에 격려가 필요하지 않은 사람은 없고, 격려해줄 수 없는 사람도 없습니다.

목회자에게는 격려하는 것이 가장 큰 일이지만 사실상 격려도 많이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격려를 위해 큰 무엇이 필요하지 않고 따뜻한 감사의 말 한마디면 충분합니다.

 

가끔 저의 홈페이지를 통해서 누군가 감동과 감사의 말을 전하면 정말 격려가 됩니다.

그 중에서도 얼마 전에는 저에게 가장 격려가 되었던 이메일이 한 분으로부터 왔습니다.

대통령에게서 왔을까요? 아닙니다. 그 이메일은 11살 짜리 소년이 보낸 이메일이었습니다.

"목사님! 저는 초등학교 4학년입니다. 목사님의 말씀이 얼마나 은혜가 되는지 모릅니다.

이제 저에게는 꿈이 생겼습니다. 저도 앞으로 목사님이 되고 싶습니다. 노력할께요.

목사님께서도 더욱 좋은 말씀 전해주세요. 매일 방문해서 목사님 말씀을 듣겠습니다."

그 이메일을 받고 "정말 당돌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마음에 큰 격려가 되었습니다.

서로 감사의 말을 전하십시오. 조그만 말 한마디가 마음의 먹구름을 사라지게 만듭니다.

 

< 긍정적인 자화상을 가지십시오 >

 

그리고 마음이 힘들 때 또 한가지 필요한 것은 긍정적인 자화상을 가지는 것입니다.

사람들마다 각자의 자화상이 있는데 그 자화상이 반듯하고 성공적이어야 합니다.

자화상이 반듯하면 삶도 반듯하고, 자화상이 비굴하면 그의 삶도 비굴해집니다.

그래서 성경은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항상 긍정적인 자화상을 가져 보십시오. 그러면 긍정적인 것들이 많이 생겨납니다.

환경과 운명은 밖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실상 마음속에서 비롯됩니다.

내가 어떤 환경에 있느냐를 보지 마시고, 내가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느냐를 보십시오.

우리가 아는 유명한 위인들을 보면 대부분 평범한 환경에서 비범하게 살았습니다.

그처럼 지금 위치에서 긍정적인 자화상을 가지고 꿈과 비전을 숙성시켜 보십시오.

그러면 마음이 힘들 때에도 오히려 큰 창조적 에너지를 얻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십시오 >

 

마음이 괴롭고 힘들 때 무엇보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은 짧은 본문이지만 여러 곳에서 말씀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2절 말씀 하반부를 보십시오.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미음이 기름지고 즐겁기 위해서는 하나님 말씀을 청종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때로 하나님의 구체적인 축복은 대단히 조건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조건이 어떤 인간적인 조건이 아니라 아주 단순한 조건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축복의 조건은 언제나 하나로 통일이 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축복 받기를 간절히 소원하지만 이제는 빌기만 해서는 안됩니다.

축복 받을만한 준비가 없으면 울어도 안되고, 애써도 안되고, 힘써도 안됩니다.

축복 받을 행동이란 무엇입니까? 아무리 힘들어도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들은 대부분 시간이 지나면 변할 것들입니다.

그러니까 변하는 것에 기대를 걸고 살면 정말 인생이 허무해집니다.

그러므로 세상 것은 기대를 걸 것이 별로 없다고 생각하며 사는 것이 지혜입니다.

 

그런데 말로는 교회를 찾고, 하나님을 찾지만 사실상 세상 것을 찾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니까 낙심할 일, 고민할 일이 많아지고 마음이 힘들어지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므로 우리는 변하지 않는 것에 기대며 살아야 합니다. 무엇이 변하지 않습니까?

성경은 말합니다.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여러분! 정말 하나님 말씀대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복된 길로 가면 복을 받을 것이고, 잘못된 길로 가면 인생을 망치게 될 것입니다.

당장은 잘 몰라도 시간이 지나면 역시 하나님의 말씀만이 우뚝 서게 될 것입니다.

 

어떤 분의 연구에 의하면 성경에는 32500가지의 축복에 대한 약속이 있다고 합니다.

그 많은 축복을 받은 방법을 한 가지로 들라 하면 말씀대로 살라는 것입니다.

때로 어려운 일이 있고 어려운 순간이 찾아오지만 하나님 말씀을 앞세워 살면

모든 부정적인 삶, 모든 부정적인 마음을 극복하고 반드시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미국 미식축구 팀 중에서 달라스 카우보이라는 텍사스 팀이 있습니다.

1989년까지 연평균 성적인 115패로 만년 하위에 머물던 팀이었는데

1993년과 1994년 연속적으로 미식축구 정상을 차지해서 사람을 놀라게 했습니다.

그렇게 꼴지 팀이 무적의 팀이 된 데에는 지미 존슨이라는 코치역할이 있었습니다.

 

그는 대학에서 심리학을 전공한 아주 평범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는 선수들을 강요하지도 혹사시키지도 않고 항상 진실하게 살도록 인도했습니다.

그는 스포츠를 남을 이기는 도구로 생각하지 않고 인생을 배우는 도구로 생각하면서,

그가 가장 싫어했던 것은 불평과 원망과 같은 부정적인 단어, 부정적인 태도였습니다.

결국 선수들은 삶이 부정에서 긍정으로 바뀌어갔고, 결국 무적의 팀이 되었습니다.

 

한 사람의 입에서 나온 긍정과 격려의 말이 사람들의 마음이 이처럼 바꿉니다.

하물며 영원한 생명의 말씀인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진정 듣는다면

우리는 본문 3절 말씀처럼 영혼이 살고 확실한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조금 어렵다고 실망하지 말고 정말 말씀에 순종하며 살기로 해보십시오.

때때로 산에 올라가 하늘을 찌르며 살아가는 웅장한 나무를 봐도 기분이 좋지만

척박한 환경 속에서 몸부림을 치며 생존하는 나무를 보면 더 감동적이지 않습니까?

그 나무들은 자라다가 바위에 막히면 온 몸을 비틀어서라도 바위를 피해 자랍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 마음이 숙연해지는 것을 느끼면서 어떤 도전을 받지 않습니까?

 

이 세상의 모든 풀 중에서 사막에서 자라는 풀은 가장 뿌리가 깊이 내린다고 합니다.

어느 날 바람에 날려 씨앗이 사막에 떨어졌는데 그곳에서 생각지 않게 싹이 났습니다.

그러면 이제 그곳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한 방울의 수분을 향해 생명을 다합니다.

그런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불평보다는 생명의 의지가 엿보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사람은 너무 환경을 불평합니다. 만물의 영장이라면서 불평도 제일입니다.

 

이제 우리의 마음을 추스리고 지금의 현실 속에서 진실을 추구하도록 하고,

때로 어려운 환경이 펼쳐져도 급한 마음으로 낙심하지 않도록 더욱 노력하시고,

항상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은혜를 온전히 신뢰하며 나아가는 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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