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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제사에 대해 성경은 뭐라고 말하는가?

by 【고동엽】 2022. 1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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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제사에 대해 성경은 뭐라고 말하는가?

- 곽선희 (소망교회 목사)


어느 민족 어느 나라에서든지 선교의 가장 높은 장벽은 그 나라 그 민족 특유의 민족주의와 그 민족이 가지고 있는 '미신'이라고 한다. 선교는 언제나 피선교 민족의 토착언어와 토착문화의 옷을 입혀서 복음을 전함으로 가능해지는 것이 사실이다. 여기에는 상대적인 요소와 절대적인 요소가 있다. 서로 타협하며 변화시켜 나갈 수 있는 상대적 요소가 있는가 하면 절대로 굽힐 수 없고 타협할 수 없는 복음의 절대적 요소가 있다. 이 상대적인 것과 절대적인 것을 구분하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여기에서 토착화와 혼합주의의 구별이 분명해야 한다.

한국교회가 처음 세워질 때에 선교정책을 세움에 있어서 바로 이 문제로 크게 부심한 것이 사실이다. 토착화를 위하여 토착적인 문화를 이해하며 이를 효과적 매개체로 고용하여 복음선교를 시행하였고 이일에 다분히 성공적이었다고 본다. 우리의 문화적 특수성을 십분 이해하고 문화적 장벽을 용이하게 넘어서면서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했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한국교회 초창기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가장 어려운 벽이 둘 있는데 그 첫째가 조상숭배요, 둘째가 술과 담배 문제라고 생각된다. 이론상으로는 간단한 듯 보이나 목회일선에서 경험하는 대로 너무나 높고 두터운 벽이 여기에 있다.

"예수는 믿고 싶으나 조상제사 때문에 곤란하다." "나는 장손이기 때문에 불가능하다." 라는 핑계가 단순한 핑계가 아니다. 예나 오늘이나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미신을 버리며 조상에 대한 제사를 버리고 나서야 가능한 것이었다. 이것은 참으로 '위대한 용기'가 필요한 것이다. 지금까지 속해 있던 공동체로부터 이탈하는 혁명적인 사건이기 때문이다.

신앙을 얻고 중생한 다음에 신앙적인 용기에 의해서 이를 실천한다면 또 별 문제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전통은 먼저 미신을 버리고 술·담배를 끊고 그리고 입교하는 풍속이다. 예수는 믿어도 좋겠으나 조상에 대한 불효자가 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리고 가장 큰 반발은 조상숭배를 미신으로 보려는 편견을 저들은 참을 수 없다는 것이다. 18세기 말엽에 천주교가 한국에 전래된 이래 조상숭배와 제사를 미신으로 여겨 이를 금지했기 때문에 이것을 정치문제화하여 1871년에 큰 핍박이 있었다. (신해교난, 辛亥敎難) 그 발단은 단순히 진산의 윤지충이란 천주교도가 조상의 신주를 불살라 버리고 제사를 지내지 아니했다는데서 생긴 것이었다. 오늘도 이 문제는 심각하다.



우리 민족의 제사, 그 유래와 의미

어떤 의식이든 그 의식이 가지는 뜻이 본질적으로 중요하다. 그러나 그 뜻을 표현하는 상징적 의식이 오랫동안 반복되면서 계속될 때 그 형식자체가 교리(Dogma)화 되면서 그 뜻은 망각하고 형식과 의식 자체만이 고집되고 소중히 여겨지게 되는 예가 허다하다. 사실상 우리의 관혼상제 의식도 이제는 그 유래와 본 뜻도 모르고 그 상징이 말하고 있는 소중한 내용은 잊혀진 채 형식만으로 시행되고 있는 면이 없지 않다.

역사적으로 이 관례·혼례·상례·제례 네 가지 의식은 우리의 전통적인 민속의식으로 소중히 지켜 왔고 이것이 없이는 사람이 사람구실을 못한다고 믿어 왔다. 그러나 그 뜻을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어쩌면 생각하려 들지도 않고 그저 그대로 지키며 지키는 자체에 뜻이 있는 듯 생각하기까지 하고 있는 형편으로 본다.

서양의 관혼상제 예속(禮俗)은 주로 기독교적 종교의식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일본은 불교의식에 그리고 중국은 유교의식에 그 근거를 두고 발전해 왔다고 본다. 한국 예속은 그 뿌리와 변천과정이 아주 복잡하다. 한마디로 말한다면 한국인의 예속은 그 저변에는 주술적인 무속신앙이 깔려 있고 지금까지도 그 맥락이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이 분명한 사실이다. 이 때문에 지극히 상징적이고 미신적 색체를 짙게 풍기는 무속적 상징이 그 형식과 내용이 되어 있다. 그러던 것이 풍수설(風水說)과 불교사상·유교사상 등이 전래되면서 그것들이 예속의 형식적인 면을 역사적으로 지배하게 된 것이다.

고조선(古朝鮮)의 원시 종교였던 무교(巫敎)에는 제사풍속이 없었다. 무속에서는 오히려 천신(天神)을 숭배하는 제천의 풍속이 있을 뿐이었다. 여러가지 신을 섬기는 풍속으로 천신을 숭배하는 자연종교 형태였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무속화란 민속신앙과 유교의 조상숭배 사상이 결합해서 생긴 것이 조상에 대한 제사풍속으로 발전되었다고 생각된다. 고대 조선시대에 우리 민족이 조상을 숭배해서 제사했다는 풍습을 전하는 기록은 없다고 전문가들은 말하고 있다. 조상에 제사 드리는 풍속은 무속적인 천신제사의 민속에 유교적 사상이 합쳐져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이조 500년 동안에 우리 고유의 민속의례가 유교의 조상숭배 형식의 틀에 갇혀서 지나온 셈이다. 유교는 봉건적이며 또 귀족적인 종교인 것이 사실이다. 결국은 상류층에서나 시행할 수 있는 조상숭배 의식이 지켜지는 동안 이 계층에는 허례허식으로 지나친 형식주의에 빠져드는 문제를 낳았고 반면에 일반 서민층에서는 이 형식에 매여서 순수한 내용과 의미조차 모르고 미신적인 예속만 되풀이해 온 셈이다. 불교는 이 조상숭배 의식에 약간의 영향을 준바 있으나 극락 사상을 제하고는 결정적인 영향을 준바 없다고 보여진다.

고대로부터 우리 민족은 무속신앙에 근거하여 인간의 영혼은 불멸하는 것으로 믿어 왔다. 이 신앙이 제사의식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 뿌리가 된다. 시체를 매장할 때 여러가지 격식을 갖추려는 것은 죽은 영혼이 그 시체에 있든지 또는 배회하고 있으며 다시 돌아온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같이 민속신앙에 근거하여 조상숭배 사상과 결합할 때에 죽은 조상의 혼이 다시 찾아와 차려 놓은 제물을 먹는다는 신앙으로 발전하게 되고 이 때문에 지금도 제례를 계속하게 되는 것이다.

그 깊은 뜻은 간단히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이미 죽은 조상의 혼이 배회하기도 하고 또 어떤 지정된 안식소에 가 있지만 때때로 자손들을 찾아오며 특히 죽은 장소와 그가 살던 곳에 찾아오고 그 혼들이 끊임없이 자손들의 예배와 공양을 받는 것을 행복으로 생각하고 동시에 이처럼 극진한 공양을 받는 조상의 혼은 그 자손을 가호한다고 믿는 것이다.

이 민속신앙이 발전하며 또 세속화될 때에 죽은 조상의 혼의 가호를 받고자 하는 자기 중심적 욕망이 우선되고 심지어는 이 자손들의 액운과 재해를 막아 주고 또 큰복을 내려 준다고 기복 사상에까지 내려가게 되기도 한다. 이 때문에 살아 있는 늙은 부모는 자손을 돕지 못하고 죽은 부모의 혼백은 자손에게 복을 줄 수 있다는 엉뚱한 말도 나오게 되고 살아 계신 부모에게 등한하고 죽은 후에 극진한 제사를 드리는 크나큰 불효한 제사의식도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그런즉 미신적인 뿌리에 유교적인 옷을 입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본래 제사란 죽은 이를 계속 공양함으로써 효를 계속 이어나가는 추양계효(追養繼孝)행위이지만 이것이 무속신앙과 결합하여 미신적 제사풍속이 되어 버렸다.



성서적 비판

앞으로 말한 바와 같이 조상제사의 그 사상적 근거가 무속신앙에 있는 고로 다시 비판할 여지가 없다고 보여진다. 기독교의 효도는 십계명에 명시되어 있으며 그 뜻의 신학적 의미가 큰 것이다.

먼저는 죽은 조상의 혼이 예배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그 누구의 혼도 종교적 대상이 될 수 없다는 확실한 신앙 위에서 효도를 이해해야 한다. 오직 하나님만 섬기는 것이 성서적 신앙이다. 어떤 성자나 위인도 물론 자신의 조상도 숭배의 대상이 되지못하며 하물며 죽은 자의 혼을 예배함은 용납될 수 없다. 효도와 예배는 다르며 추모와 제사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죽은 자의 혼백이 배회한다던가 다시 찾아와서 제사의 공양을 받는다는 생각은 전적으로 무속신앙이며 또 무근한 미신이다. 영혼의 주인은 창조주 하나님이시며 죽는 순간 그 영은 그 시체에서 떠나며 자의로 다시 찾아오고 가는 것이 아니다. 이같은 개념은 창조주 하나님을 모르는 어리석음이 혼백만 생각한 나머지 원시적 신앙 안에서 추리한 것이다. 원시신앙에서는 꿈과 현실을 혼돈한다. 꿈에 나타난 조상이 바로 그 조상의 혼이라고 착각한다. 이같이 원시신앙적 착각이 혼백숭배 제사에는 윤리적 도덕적 요소가 없다. 사랑과 용서, 의와 진리 그리고 사회적 요소를 찾지 못한다. 단번에 번영과 풍요를 보증해 주는 세속적 욕구와 사행심이 밑에 깔려 있고 다분히 기복적인 신앙에 매여 있는 것을 본다. 그 제사의 궁극목적이 자기자신의 부귀영화에 있다고 한다면 이것은 효의 본 뜻에서 멀어진 것이다. 효의 본뜻을 상실한 제례가 아무 뜻도 없는 것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 효도의 본 뜻으로 돌아가서 새 의미를 찾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그 제사형식에 있어서 음식을 준비하고 수저를 꽂아 놓는다던가 술을 부어 드리는 일 등은 그 자체가 미신적 의식이라고 보여진다. 의식은 상징적인 것이다. 그 상징이 미신적인 상징언어에서 빌어 왔을 때 마침내 그 뜻까지도 미신화 되어 버릴 가능성이 있다. 조상에 대한 효도가 미신적으로 표현될 때 그 귀한 뜻까지 변질되어 버리며 끝내는 그 의식만 고집스럽게 되풀이되고 그 타성에 매여서 본 뜻에로 돌아갈 수 없는 허례허식의 노예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 제례를 다시 비무속화(非巫俗化)해야 할 시점에 있다고 본다. 성서적 효의 개념으로 돌아가서 주안에서 부모를 공경하는 신앙적인 효도가 시행되어야 할 것이다.

겸하여 성경에 나타나고 있는 제사의 뜻을 간단히 설명하여서 제례를 이해함에 도움을 드리고자 한다. 성경에는 아벨의 제사를 시작으로 아브라함, 이삭, 야곱 등 믿음의 조상들이 모두 하나님께 제사 드렸다. 여기서 분명히 할 것은 '하나님께' 제사 드렸다는 점이다. '살아계신' 하나님께 제사 드렸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거룩한 만남을 뜻하는 것이다. 여러가지 제사가 있으나 대표적인 것은 속죄제사였다. 그 제사들은 피를 흘려서 뿌리서 드렸고 제물을 온전히 불살라 드렸다.

이 제사는 하나님께 드리는 뇌물이 아니었다. 이 제사로 하나님의 진노를 막고 이 제사를 드려서 큰 복을 받아 내자는 것이 전혀 아니었다. 이 때문에 마음과 정성을 다하지 못한 제사는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를 산 것을 성경 여러 곳에서 읽을 수 있다(이사야 1장). 하나님은 부정한 제물을 다시는 가져오지 말라고 책망하셨다.

그런고로 성경의 제사는 마음과 뜻을 회개와 함께 하나님께 드리는 예식이었다.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가 곧 제사로 나타난 것이다. 여기에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제사는 회개, 겸손, 의와 화해 그리고 거룩함이었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긍휼과 사랑이 우선되는 제사이어야 한다.

더욱 귀중한 신학적인 의미는 이 제사들은 계시적이요 예표적이라는 점이다. 하나님께서 죄인인 우리 인간들을 그의 자녀로 만나 주시며 영접해 주심에는 그 자신에 지불되는 엄청난 희생이 있다. 이 하나님 자신이 지불하시는 희생을 제물 위에서 계시하고 계신 것이다. 생명을 죽여서 하나님께 나아간다. 이 '죽음'의 관계 안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이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공의로운 사랑이 구체적으로 상징화되어 계시된 것이 제사이며 제물이다. 따라서 결정적인 제사는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인 것이다. 십자가의 희생 안에서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을 사랑하시며 그 사랑을 확증하여 주셨다. 그 역사적인 예표가 곧 제사인 것이다. (히브리서 참조)


이제 우리는 효의 의미를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발견하고 밝고 새로운 생생한 방법으로 효의 방법을 찾아 나아가야 할 것이다. 모르고 어두워서 그리했던 제례를 통한 조상숭배의 예식에서 깨어나서 본 뜻에로 돌아가며 성서적 효도의 바른 지표를 찾아서 새로운 효도의 풍습을 만들어 가야 할 것이다. 기독교는 가장 높은 뜻의 효도를 강조하는 종교이다. 오히려 기독교인이 됨으로써 진정한 뜻에서 효자가 될 수 있음을 확실히 알아야 할 것이다. 주안에서 부모를 공경하는 일이 새롭게 우리의 윤리강령이 되어 밝고 은혜로운 가정들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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