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5일 설교 3월 1일~31일 { 목록 돌아가기} |
365일 설교[ 3월 1일]하늘 나라에 보화를 쌓는 길(막 10:17-22) |
한 부자 청년이 예수님 앞에 나와서 영생을 얻는 길에 대해서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십계명 중 5계명부터 10계명까지를 말씀하시면서 그것들을 행하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 계명들은 어려서부터 다 지켜왔다고 자신있게 말하는 청년에게 예수님께서는 마지막으로 한 가지를 더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그런데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이 청년이 하나님보다 재물을 더 의지하고 사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청년은 재물을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예수님의 요구를 행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에게 재물은 그 무엇보다도 소중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청년은 영생을 얻고 하늘에 보화를 쌓는 일에 실패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영생을 얻고 하늘 나라에 보화를 쌓을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믿고 의지하는 세상줄을 모두 끊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영생을 얻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또 다른 것을 의지하고 있다면 그것은 하늘 보화를 쌓기에 합당치 못한 일입니다. 어떤 사람은 세상 권세와 권력이, 어떤 사람은 돈이, 어떤 사람은 많은 인기나 재주가 하늘 보화를 쌓는데 방해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의지하는 것이 무엇이든간에 하늘 보화를 쌓는 데 방해가 되는 것은 다 팔아야 합니다. 여기서 팔아야 한다는 것은 그러한 것들을 의지하던 마음을 쫓아내고 오직 하나님만을 마음 중심에 모시고 의지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같이 하나님보다 더 믿고 의지하는 것들을 단호히 끊어 버리고 오직 하나님만을 모시고 살아갈 때 우리의 삶에는 축복이 넘치고 저 하늘에는 보화가 쌓이게 되는 것입니다.
현재, 여러분은 하늘 보화를 쌓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365일 설교[ 3월 3일]잎만 무성한 신앙(막 11:12-14) |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신 다음 날이었습니다. 주님은 시장하신 나머지 멀리 있는, 잎사귀가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가까이 가셔서 열매를 찾아 보셨으나 아무 열매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 중대한 교훈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먼저, 무화과나무의 잎사귀가 무성하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원래 무화과나무는 잎이 생기기 전에 열매를 냅니다.
그러므로 잎이 무성하다는 것은 곧 이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찾으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잎사귀가 무성한 무화과나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상징할까요? 그것은 성도들의 의식적이고 형식적인 신앙 생활을 의미합니다. 성도들이 주님을 믿노라 하면서 행하는 장엄한 예배 의식 등 겉으로 드러나는 형식적, 의식적 모습들은 무화과나무의 무성한 잎사귀와 같습니다. 잎이 무성한 나무에 열매가 있어야 하듯이 이러한 신앙의 형식과 의식에는 반드시 신앙의 열매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 이 무화과나무가 예수님의 저주를 받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 무화과나무는 자신의 존재 의미와 목적을 잊고 있었습니다. 무화과나무는 본래 풍성한 열매를 맺어서 사람들에게 맛과 배부름을 제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잎사귀만 풍성하고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는 신앙의 목적을 성취하지 못하는 성도를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신앙 생활의 형식은 갖추었으되 그리스도의 복음과 이웃을 위하여 희생과 봉사의 사랑을 행하지 못하는 자, 그래서 여전히 자신의 유익과 야망을 위한 이기적이고 세속적인 삶을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에는 반드시 열매가 있어야 하듯이, 오늘날 외형적 신앙 생활에 바쁜 성도들의 삶 속에도 선한 열매들이 있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 성도들이 잎사귀만 무성한 삶을 살지 않고 삶 속에서 그에 합당한 풍성한 열매를 맺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365일 설교[ 3월 4일]가난한 자와 객의 하나님(레 23:22) |
오늘날 성도들의 모습 속에 가장 찾아보기 힘든 것 중의 하나는, 바로 헐벗고 가난한 자를 돌아보는 마음입니다.
세속적인 황금 만능주의가 성도들의 삶 속에까지 침투되고 있는 요즘, 가난한 자를 멸시하고 영혼의 문제보다 물질의 풍요와 안락을 더욱 중요시 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져 가고 있습니다.
요즘 성도들 간에 유행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믿어도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아무리 신앙을 가지고 살아도 돈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돈이 있어야 교회에서도 행세를 하고 무시를 당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 얼마나 통탄할 만한 말입니까?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성도들 중에는 부한 자도 있고 가난한 자도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서 모두 부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가난하든 부하든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며 그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사람이 참으로 귀한 인생입니다.
하나님은 부한 자의 하나님도 되시며 가난한 자의 하나님도 되십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부한 자들보다 오히려 헐벗고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에게 더욱 관심을 가지고 계심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마 5:3-12). 그러므로 가난한 자를 학대하는 사람은 그들을 지으신 자를 멸시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잠 14:31). 잠언 28장 27절에서도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자는 궁핍하지 아니하려니와 못본 체하는 자에게는 저주가 많으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생활에 소용되는 모든 자원은 하나님께로부터 와서 우리에게 맡긴 바 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허락하신 부를 이웃의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과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이렇게 가난한 자들과 함께 나누는 것은 부한 자들이 마땅히 행하여야 할 일입니다.
여러분은 가난한 자들을 하나님의 복을 받지 못했다고 멸시하거나 믿음이 없어서 그렇다고 함부로 판단한 적은 없습니까? 하나님의 복은 결코 물질적인 부로 측정될 수 없음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고아와 과부의 하나님이시요, 가난한 자와 객의 하나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365일 설교[ 3월 5일]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심령(레 24:2-9) |
구약에서 성막은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곳이었습니다. 이러한 성소는 오늘날 영적으로 하나님께서 거하시고 역사하시는 성도들의 마음을 상징합니다.
오늘은 성소에 대한 규례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임재하시고 역사하시는 성도의 심령은 어떠해야 하는지 그 영적 의미를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먼저, 성소의 등불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감람을 찧어 낸 순결한 기름을 켜기 위하여 네게로 가져 오게하고 끊이지 말고 등잔불을 켤지며 아론은 회막안 증거궤 장 밖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야웨 앞에 항상 등잔불을 정리할지니 너희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라”(2,3절).
여기서 성소의 등불은 성령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4장 5절에서도 보좌 앞의 일곱 등불을 ‘하나님의 일곱 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등불은 감람을 찧어 낸 순결한 기름으로 만듭니다. 이 기름은 회개한 정결한 심령을 상징합니다. 이것은 회개한 정결한 심령 속에서만 성령의 불꽃이 타오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본문은 저녁부터 아침까지 항상 등잔불을 정리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루 종일 매순간마다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교훈합니다.
둘째로 본문에는 성소에 떡 열둘을 야웨 앞 순결한 상 위에 진설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5-8절).
떡 열둘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상징하며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떡이 육신의 양식이 되듯이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심령에 양식이 되어 놀라운 생명의 역사를 일으켜 주십니다.
여기서 열둘이란 성경에 나오는 완전수로서 부족함이 없는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 떡은 매 안식일마다 새롭게 진설해야 하는데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날마다 마음을 새롭게 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이와 같이 새롭게 씻음받고 항상 성령의 등불을 밝히며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한 심령 속에는 하나님께서 임재하셔서 위대한 승리의 삶을 살 수 있도록 역사해 주십니다.
365일 설교[ 3월 6일]외식을 삼가라(막 12:38-40) |
본문은 예수님께서 위선적인 서기관들에게 몇 가지 예를 들어 외식하지 말 것을 경고하신 말씀입니다.
첫째,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입니다. 긴 옷을 입고 다닌다는 것은 자신의 부와 외모를 과시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고 얼마나 치장을 잘 하고 사느냐 하는 것은 아무 가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며 마음의 중심을 보십니다(행 10:34; 갈 2:6). 그러므로 인생의 가치는 속사람이 얼마나 충실하고 강건한가에 따라 결정되는 것입니다.
둘째, 시장에서 문안받는 것입니다. 서기관들은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시장에서 인사를 받고 높임 받기를 좋아했습니다. 이것은 명예욕을 의미합니다. 우리 성도들은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높임받기 위해 애쓰지 말고 은밀히 보시는 하나님께 인정받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셋째, 회당의 상좌와 잔치의 상석을 원하는 것입니다. 서기관들은 어디를 가든지 이와 같이 으뜸이 되기를 좋아했습니다. 회당의 상좌와 잔치의 상석에 앉으려고 하는 것은 교만한 마음을 의미합니다. 우리 성도들은 어디를 가든지 항상 마음을 낮추어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넷째, 종교를 이용하여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것입니다. 서기관들은 종교라는 가면을 쓰고 자신들의 법적인 신분과 위치를 이용하여 힘없고 의지할 곳 없는 과부들의 재산을 많이 갈취했습니다. 오늘날도 자신의 이기적인 목적을 위하여 종교를 이용하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다섯째,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당시 서기관들은 회당이나 거리에서 손을 들고 길게 기도하여 자신의 경건을 과시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은밀한 대화로서 자신의 신앙을 과시하거나 경건을 드러내기 위한 도구로 전락되어서는 안 됩니다.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께 진실된 마음으로 기도하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오늘날 온갖 거짓과 위선이 판치는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이러한 외식적 행위를 경계할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365일 설교[ 3월 7일] 고난과 회개(레 26:40-45) |
레위기 26장 14절 이하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갖가지 재앙을 내리시는 이유가 나오는데,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규례를 멸시하며 마음에 그의 법도를 싫어하여 그 모든 계명을 준행치 아니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재앙을 주시는 근본적인 이유는 우리에게 고통과 슬픔을 주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회개하게 하사 우리의 삶을 돌이키시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회개할 기회를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깨닫지 못하고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는 더 큰 재앙을 내리셔서 다시 회개할 기회를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에 예기치 않은 재앙이나 고난이 올 때에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의 신앙에 어떠한 문제가 발생했는지 곰곰이 생각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는 우리가 우리의 죄와 허물을 자복하고 마음이 낮아져서 그 죄악의 형벌을 순수히 받는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싫어 버리지 아니하시고 미워하지 아니하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40-44절). 또한 본문 45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맺은 언약을 기억하시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자복하는 마음을 원하시며 구원의 언약을 기억하셔서 우리들을 회복시키기를 원하십니다. 문제는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고난에 처할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나의 신앙에 어떠한 문제가 발생했는지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시편 107편 10절에서 11절에도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임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죄를 짓지 않은 의인은 하나도 없습니다. 믿음을 가진 자라 하더라도 전혀 죄를 짓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실제로 위대한 사람이란 죄를 짓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죄로 말미암아 고난과 재앙이 몰려올 때 즉시로 통회 자복하며 하나님 앞에 회개함으로써 놀라운 회복의 역사를 일으키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과 회개를 통하여 놀라운 회복의 역사를 체험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65일 설교[ 3월 8일]하나님의 인자와 진리(시 40:11) |
본문에서 다윗은 하나님께 “주의 인자와 진리로 나를 항상 보호하소서”라고 탄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인자와 진리가 어떻게 우리를 보호해 주시는지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인자’(仁慈)라는 말은 ‘사랑’이라는 말과도 같은 의미인데 구체적으로는 긍휼히 여기는 마음과 자비로운 마음을 말합니다. 느헤미야 9장 17절에는 “…인자가 풍부하시므로 저희를 버리지 아니하셨나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인자를 받을 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인자를 베푸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인자는 우리의 죄와 허물에도 불구하고 베푸시는 무조건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영원한 것입니다. 이사야 54장 10절에는 “산들은 떠나며 작은 산들은 옮길지라도 나의 인자는 네게서 떠나지 아니하며 화평케 하는 나의 언약은 옮기지 아니하리라 너를 긍휼히 여기는 야웨의 말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향한 이와 같은 하나님의 인자가 우리를 모든 환난과 위험에서 보호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진리란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는 안내자입니다. 에베소서 1장 13절에는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진리의 사랑을 받는 자들로서이 진리의 사랑을 받지 못하면 멸망하고 마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장 10절에는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또한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위경에서 건지십니다. 시편 107편 20절에는 “저가 그 말씀을 보내어 저희를 고치사 위경에서 건지시는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그의 무조건적인 사랑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사랑에 감사하며 진리 위에 굳건히 서서 담대하고 승리에 찬 생활을 해나가야 하겠습니다
365일 설교[ 3월 9일]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막 14:36) |
예수님은 일평생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는 생을 사셨습니다. 그래서 하늘의 영광을 다 버리시고 이 땅에 오셔서 죄인을 용서하시고 병자를 고치시며 귀신들린 자를 놓여나게 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며 절망에 처한 자에게 소망을 주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 뜻대로 사신 예수님은 최후로 십자가를 지시기에 앞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마지막 기도를 하셨습니다.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예수님은 자신이 마셔야 할 인류의 죄악의 잔이 얼마나 무섭고 고통스러운 것인지 알고 계셨습니다. 더욱이 속죄양이 되어 하나님 아버지께 버림 받아야 한다는 것은 예수님께 더할 나위 없는 고통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모든 것을 아시고도 하나님의 뜻에 전폭적으로 순종하셨습니다. 그래서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뜻에 따라 세상 죄를 다 짊어지고 십자가 위에서 몸 찢고 피 흘려 죽으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순종이 있었기에 죄악과 저주 가운데 살아오던 인류에게 구원과 영생의 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타락한 후, 인간은 영적으로 하나님과 단절되어 영혼이 죽고 육체는 병들고 부패하여 흙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그리고 환경적으로는 저주의 엉겅퀴로 인해 고통받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피투성이채로 끊임없이 반역의 역사를 걸어왔습니다. 이같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여 멸망을 향해 치닫고 있던 인류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순종의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는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못났음에도 불구하고, 버림받아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로 구원받고 영생을 얻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을 통하여 구원의 은총을 받은 우리 성도들도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원대로 하옵소서”라는 고백과 함께 하나님의 뜻에 전폭적으로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365일 설교[ 3월 11일]아리마대 요셉의 용기(막 15:42-46) |
본문에는 예수님께서 운명하신 후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고 요구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문의 아리마대 요셉이 보여 준 행동을 통하여 진정한 용기가 무엇인지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먼저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누구인지 알아보겠습니다. 그는 평범한 유대인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존경받는 산헤드린 공회원으로서 율법에 철저한 사람이었고,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부자였으며(마 27:57), 선하고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눅 24:50). 그는 산헤드린 공회에서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안할 때 찬성하지 않은 사람이었으며(눅 23:51), 예수님을 은밀히 따르던 제자였습니다(요 19:38).
이와 같이 당시 예루살렘에서 유명인이었던 요셉이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고 요구했던 것은 많은 희생을 요구하는 일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유대인들의 미움과 특히 산헤드린 공회의 거센 핍박과 징계를 각오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의 시신을 싸기 위해서 세마포를 샀으며 자기를 위하여 예비한 무덤마저 예수님께 기꺼이 드렸습니다. 또한 그는 예수님의 시신을 만짐으로 부정했기 때문에 1주일 동안 유대인의 큰 명절인 유월절에도 참여할 수 없었습니다. 산헤드린 공회원으로서 유월절을 지키지 못했다는 것은 매우 수치스러운 일이며 비난거리가 되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수모와 불이익, 그리고 생명의 위협까지도 감수하면서 예수님의 시신을 돌본 요셉의 행동은 3년 동안 예수님의 제자로 훈련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간 제자들의 모습과는 너무나도 대조적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진정한 용기를 가지고 예수님을 좇았던 요셉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진정한 용기를 요구합니다.
예수님을 따를 때 때로는 우리의 지위와 권세, 명예와 재물에 희생과 위협이 따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예수님을 위해서 그 모든 것을 감수할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모든 성도들이 가져야 할 진정한 용기인 것입니다.
365일 설교[ 3월 13일]하나님의 약속을 받으려면(눅 1:20) |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자식이 없었으므로 하나님께 오랫동안 기도해 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사가랴가 성소에 들어가서 제사장의 직무를 행할 때, 천사가 나타나서 사가랴에게 아들을 주리라고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사가랴는 천사의 말을 의심함으로 인하여 벙어리가 되었습니다.
이 본문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놀라운 약속을 이루기 위하여 우리가 어떠한 신앙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없이 믿어야 합니다. 사가랴는 천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도 자기와 자기 아내가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했습니다. 사가랴가 벙어리가 된 이유도 바로, 그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히 11:6).
둘째, 기다리며 기도해야 합니다. 한번 임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천지가 없어져도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아들을 약속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기다리지 못하고 여종 하갈을 통해서 이스마엘을 낳는 실수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나이들어 죽은 자와 방불한 그에게 약속의 아들 이삭을 주심으로써 결국 하늘의 무수한 별과 같은 자손을 주시리라는 약속을 성취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록 약속이 더디 이루어진다 할지라도 인내와 확신을 갖고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셋째, 부정적인 말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에서 천사는 사가랴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아니하므로 그가 부정적인 말을 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방해할까 염려되어 그의 입을 막아 벙어리가 되게 했던 것입니다. 부정적이고 의심하는 말은 하나님의 역사를 방해하여 그의 약속이 성취될 수 없도록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으면 그에 합당한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말을 함으로써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놀라운 것들을 약속하셨습니다. 우리는 확신에 찬 믿음과 인내의 기도, 그리고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입술의 고백을 통하여 그 축복의 약속을 받아 누려야 할 것입니다
365일 설교[ 3월 14일]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삶(민 9:15-23) |
본문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생활 중에 구름 기둥의 인도를 받아 가나안 땅으로 전진해 나가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문의 말씀을 통해 우리는 광야 같은 인생길에서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려면 먼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묻고 그 뜻을 분별할 수 있도록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막 위에 머물러 있는 구름이 언제 떠오르는지, 어디로 가는지, 어디에 머무르는지 항상 예의 주시하였습니다. 만일 구름이 떠올라서 진행하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름의 움직임에 아무런 관심을 두지 않았다면 구름 기둥의 인도를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항상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영적으로 깨어 분별하려는 자세를 가질 때 하나님의 인도를 받을 수 있습니다.
둘째, 즉시 순종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름의 움직임에 따라 즉시 움직였습니다. 구름이 머물면 한 달이고 일 년이고 구름과 함께 머물렀고, 구름이 움직이면 그들도 즉시 구름과 함께 움직였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할 때 즉시 순종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데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자세입니다.
셋째, 자기에게 주어진 직임에 충성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주신 명령을 따라 각자의 직임을 지켰습니다(23절). 그들은 이동할 때나 머무를 때, 각자에게 주어진 임무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였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하나님께 부여받은 각자의 사명에 충성되게 임할 때 하나님의 온전한 인도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 위해서 날마다 영적으로 깨어 있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발견했을 때 즉시 순종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자기의 주어진 임무에 충성되게 일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삶이란 자신의 뜻과 시간에 하나님을 끼워 맞추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에 자신을 철저히 복종시키는 삶입니다
365일 설교[ 3월 15일]일할 때와 쉴 때의 기도(민 10:35-36) |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행하는 동안 야웨의 언약궤는 내내 그들의 길을 인도하였고 야웨의 구름은 항상 언약궤 위에 덮여 있었습니다(민 10:33,34).
궤가 떠날 때에는 모세가, “야웨여 일어나사 주의 대적들을 흩으시고 주를 미워하는 자로 주의 앞에서 도망하게 하소서”라고 기도하였고, 궤가 쉴 때에는 “야웨여 이스라엘 천만인에게로 돌아오소서”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이러한 모세의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하루의 일을 시작하기 전과 귀가하여 쉴 때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에 대해 배울 수 있습니다.
먼저, 우리는 하루의 일을 시작하기 전에 “야웨여 일어나사 나의 원수들을 흩으시고 나를 주의 길로 인도하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들도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광야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광야에는 모압이나 아말렉과 같은 이방인들이 항시 이스라엘을 노리고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이 세상의 삶에도 우리를 노략질하려는 원수 마귀의 공격이 항상 있고, 우리를 죽이고 도적질하고 멸망시키려는 죄의 유혹이 곳곳에 산재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루의 일을 시작하기 전에 하나님께 우리의 모든 원수를 물리쳐 주시고 우리를 승리의 길로 인도해 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다음에, 우리가 하루의 일을 마치고 귀가하여 쉴 때는 모세가 “야웨여 이스라엘의 천만인에게 돌아오소서”라고 했던 것처럼 “야웨여 우리 가정에 돌아오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을 떠나 계셨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를 간구하며 평강과 축복과 회복을 기원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활동하면서 받은 스트레스와 근심, 걱정 등을 하나님께 내려놓고 평강과 기쁨, 그리고 영적, 육체적인 회복을 간구할 때 우리의 가정에 임재해 계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짐을 맡으시고 모든 것을 회복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처럼 하루의 일과를 시작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우리 앞에 행하셔서 우리의 대적을 흩어 주시도록 기도하고, 일을 마치고 쉴 때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에 임재하셔서 평강과 안식을 회복시켜 주시도록 기도할 때, 날마다 승리와 평강의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365일 설교[ 3월 16일]지도자를 비방하지 말라(민 12:1-10) |
본문에는 모세와 긍극적으로는 하나님을 향한 권위의 도전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미리암과 아론은 모세가 구스 여인을 취한 것을 비방하고 있으나 이는 핑계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들의 진정한 속셈은 모세가 하나님 앞에서 지니고 있는 지도자로서의 독특한 위치에 대한 질투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론과 미리암은 모세를 헐뜯고 비방하였습니다. 비방하였다는 것은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돌아다니면서 남의 허물을 말했다는 것입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즉시 나타나사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을 부르신 후, 아론과 미리암이 모세를 비방한 것을 책망하셨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내 종 모세 비방하기를 두려워 아니하느냐”(8절) 야웨께서 이 말씀으로써 그들을 향해 진노하신 후 떠나시자 야웨의 영광을 나타내는 구름이 그 위를 떠났고 미리암에게 문둥병이 발하였습니다.
사실 아론과 미리암도 꿈이나 이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훌륭한 선지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께 특별히 택함을 받은 지도자였습니다. 만일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의 행동에 불만이 있었다면, 모세를 직접 찾아가서 이야기 하거나 하나님께 말씀을 드리는 것이 옳았을 것이며, 그렇게 했다면 하나님의 징계도 받지 않았을 것입니다. 미리암과 아론의 실수는 모세에게 불만을 품었을 뿐만 아니라, 돌아다니면서 모세를 비방함으로써 결국 하나님 마저 비방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진노하신 이유입니다.
오늘날도 우리가 교회에서 혹은 교구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다 보면, 지도자와 마찰을 일으킬 경우가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가 여기저기 다니면서 그 지도자를 험담하고 비방하는 것은 하나님께 진노를 사는 일입니다.
무엇보다도 지도자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사람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만일 지도자와 의견이 맞지 않으면 그 지도자를 개인적으로 찾아가서 자신의 의견을 겸손하고 충성스러운 마음으로 이야기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지도자를 위하여 끊임없이 기도하는 것, 이것이 곧 지도자에 대한 우리의 올바른 자세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모습인 것입니다
365일 설교[ 3월 17일]하나님의 약속과 기도(눅 2:36-38) |
아기 예수의 부모는 율법의 전례대로 아기를 데리고 성전으로 올라갔습니다. 그 곳에는 아셀 지파 출신의 안나라는 여선지자가 있었는데, 그녀는 과부가 된 지 84년 동안 성전을 떠나지 않고 주야로 금식하고 기도하며 하나님을 섬겨 왔습니다. 이 여인이 메시아를 보기를 간절히 소원하며 기도하다가 이 날 구원자 되신 예수님을 뵙게 된 것입니다. 오늘 이 본문을 통해서 여선지자 안나가 어떻게 하여 늙은 나이에 예수님을 볼 수 있게 되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이 여인은 하나님께서 메시아를 보내 주실 것이라는 구약의 예언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의 삶 속에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의 약속을 믿어야 합니다. 성경에 아무리 많은 하나님의 약속이 있을지라도 그 약속을 우리가 믿지 않으면 그 약속이 우리에게 아무런 효력도 발휘할 수 없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함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막 9:23).
그 다음에는, 그 약속이 이루어지기까지 줄기차게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약속은 결코 그냥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들의 기도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본문의 이 여선지자는 메시아 보기를 고대하면서 금식하고 기도하며 기다렸습니다.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한번 말씀하신 것은 천지가 없어져도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그 약속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의 기도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에스겔 36장 34절에서 36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에서 돌아오면 예루살렘 성에 사람들이 많아지게 할 것이며 이스라엘의 황무해진 땅이 장차 밭을 갈 수 있는 옥토가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다음 절을 주의해야 합니다. “나 주 야웨가 말하노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와 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겔 36:37).
하나님의 약속과 응답이 이미 주어졌다고 할지라도 그 약속과 응답은 우리의 기도를 통해서만이 열매맺게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가슴깊이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365일 설교[ 3월 18일]거룩함을 유지하려면(민 15:37-40) |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옷단 귀에 술을 달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당시 술 장식은 야웨의 명령을 마음에 새겨 선민으로서의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한 상징적 부착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술을 달라고 명령하신 이유에 대해 본문 39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술은 너희로 보고 야웨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여 준행하고 너희로 방종케 하는 자기의 마음과 눈의 욕심을 좇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
이 말씀은 오늘날 우리가 어떻게 거룩함을 유지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 옷단에 단 술을 보아야 합니다. 술이란 바로 야웨의 모든 명령과 계명인데, 우리는 이 술을 항상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는 무엇을 바라보아야 할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날마다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옷단에 단 술을 바라봄으로써 하나님의 계명을 기억하였듯이, 오늘날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봄으로써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어 놓으신 은혜와 축복을 기억해야 합니다.
둘째, 야웨의 모든 계명과 행사를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생활을 하는 중에 계속하여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의 계명을 말씀하셨고,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기억시키셨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계명과 베푸신 모든 은혜를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잊을 때 우리의 삶에 감사와 기쁨이 사라지고 원망과 불평만이 늘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 그 계명을 준행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우리가 지킬 때 비로소 그 목적이 달성되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성도들은 보는 것으로 행할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행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계명을 준수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고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일들을 기억하고 감사하며 믿음으로 행할 때, 우리의 삶 속에 거룩함이 유지되는 것입니다
365일 설교[ 3월 19일]자족하는 삶(민 16:1-35) |
본문에 보면, 레위 지파 중 이스할의 아들 고라가 일어나 르우벤 지파의 다단, 아비람, 그리고 온과 손잡고 이스라엘의 유명한 족장 250인과 함께 모세와 아론을 거스르다가 멸망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중대한 교훈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먼저 고라와 그의 무리들이 모세와 아론을 거스른 내용은 제사장권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본문 3절에서 고라는 “…야웨께서도 그들 중에 계시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야웨의 총회 위에 스스로 높이느뇨”라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고라와 그의 무리들이 왜 모세와 아론을 거스르게 되었을까요? 본문 9절과 10절에 그 이유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스라엘 회중에서 너희를 구별하여 자기에게 가까이 하게 하사 야웨의 성막에서 봉사하게 하시며 회중 앞에 서서 그들을 대신하여 섬기게 하심이 너희에게 작은 일이겠느냐 하나님이 너와 네 모든 형제 레위 자손으로 너와 함께 가까이 오게 하신 것이 작은 일이 아니어늘 너희가 오히려 제사장의 직분을 구하느냐”.
우리는 여기서 고라와 그의 무리가 모세와 아론을 거스른 이유가 바로 자기들의 위치와 직분에 자족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자족하지 못하고 불만스러워하는 마음이 결국 그들로 하여금 모세와 아론을 거스르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 30절에 보면 모세와 아론을 거스른 고라의 행위가 야웨를 멸시한 행위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라와 그를 지지한 모든 백성들과 족장 250인은 하나님의 징벌로 모두 멸망당하고 만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각자가 맡은 직분과 사명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지금 나에게 주신 직분과 위치에 자족하는 마음을 가지고 충성스럽게 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불만스러운 마음을 가질 때, 우리는 고라와 같이 윗 권위에 도전하는 죄를 범할 수 있고 하나님의 진노를 살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자신이 있는 위치나 직분에 자족하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자족하는 사람을 기뻐하시고 그에게 더 큰 것을 맡기시는 분입니다
365일 설교[ 3월 20일]선지자를 환영하라(눅 4:25-27) |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러 안식일날 회당에 들어가셔서 성경을 읽으시고 설교하셨습니다. 이 때 회당에 있던 자들은 예수님을 단지 인간 요셉의 아들로만 알고 그를 메시아로서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멸시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사렙다 과부와 나아만 장군의 이야기를 통해서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에 대해 그들의 믿지 않음을 책망하셨습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의 사렙다 과부와 나아만 장군의 이야기를 통해 배워야 할 교훈이 있습니다.
엘리야 시대에 3년 6개월 동안 하늘이 닫혀서 비가 오지 않았습니다. 이 때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엘리야는 이스라엘 과부가 아닌 시돈 땅에 사는 사렙다 과부에게 보내심을 받았습니다. 왜 엘리야가 이스라엘에 사는 과부에게 보내심을 받지 않고 이방 땅인 시돈에 사는 과부에게로 보내심을 받았을까요? 그것은 이스라엘에 사는 어떤 과부도 엘리야를 하나님의 선지자로서 환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렙다 과부는 엘리야를 환영했을 뿐 아니라 자기와 자식이 한 끼를 때우기에도 급급한 밀가루와 기름으로 엘리야를 먼저 공궤하였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축복으로 가뭄이 지나기까지 그 과부의 집에 밀가루와 기름이 끊이지 않는 기적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선지자 엘리사 때, 이스라엘에 많은 문둥병자가 있었으나 그 중에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 장군만이 고침을 받은 이유도 이와 같습니다. 이스라엘에 있던 문둥병자들은 엘리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환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수리아 사람, 나아만 장군은 이방인임에도 불구하고 엘리사의 소문을 듣고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찾아와서 순종함으로써 고침을 받았던 것입니다.
주의 기적을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복음을 전파하는 주의 선지자들을 환영하십시오. 참된 주의 선지자들을 배척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그의 선지자도 신뢰합니다. 선지자로 더불어 하늘나라 확장 사업에 기꺼이 동참하십시오.
오늘날도 하나님께서는 그의 종들을 환영하고 신뢰하는 사람에게 기적을 베푸시는 것입니다
365일 설교[ 3월 21일]모세의 실수(민 20:2-13) |
축복의 땅 가나안을 눈 앞에 둔 가데스의 므리바 물가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물이 없으므로 모세를 원망하며 그와 다투었습니다. 이 상황에서 모세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못하고 실수를 범함으로써 생전에 가나안 땅을 밟지 못하는 징벌을 받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모세가 범한 실수를 통해서 중요한 교훈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모세는 백성들에게 혈기를 냄으로써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못하였습니다(10절).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뛰어나다고 칭찬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한 모세가 마지막 순간에 분노를 참지 못하고 백성들에게 자기의 분노를 드러내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분노하게 되면 하나님의 거룩함을 드러내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둘째, 모세는 분노한 나머지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지 아니하고 자기 임의대로 행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반석에게 명하여 물을 내라고 하셨는데(8절) 모세는 자기 분노에 못이겨 반석을 두 번 쳐서 물을 내었습니다(11절).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였노라”(12절)라며 모세와 아론을 꾸짖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하나님의 방법과 뜻대로 하려고 하지 않고 자신의 경험이나 자신의 방법을 앞세우는 것은 하나님을 불신앙하는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불신앙은 하나님의 거룩함을 드러내지 못합니다.
셋째, 하나님의 이름을 드러내지 아니하고 자신의 이름을 드러냈습니다. 본문 10절에는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세와 아론은 마치 자기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기적을 행하는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이러한 그들의 교만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이 가리워졌고 하나님의 거룩함이 나타나지 못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주의해야 할 점은, 우리가 아무리 훌륭한 일을 해냈다 할지라도 그 영광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 우리에게 능력 주신 하나님께 돌려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모세와 같은 실수를 범하고 있지는 않은지 깊이 성찰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365일 설교[ 3월 22일]죄사함과 치료(눅 5:17-26) |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모든 질병을 치료하시는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
본문에는 중풍병자와 그의 친구들의 믿음을 통해서 중풍병자에게 죄사함과 치료가 임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우리는 믿음이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중풍병자와 그의 친구들의 믿음을 보시고 치료를 베푸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계신 집 안팎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운집해 있어서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중풍병자와 그의 친구들은 어떻게든 예수님 앞에만 나아가면 주께서 분명 중풍병을 고쳐 주실 것이라는 강한 믿음과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붕을 뜯고 중풍병자를 매달아 예수님 앞에 내리는 열심을 보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치료를 베푸셨던 것입니다. 이같이 우리도 주님에 대한 강한 믿음을 갖고 이것을 담대히 행동으로 보여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은 병을 고치러 온 중풍병자에게 먼저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의 육신의 병을 고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쇠하지 않고, 흠이 없는 천국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함이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죄사함을 받지 않고는 하늘 나라를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중풍병자를 치료해 주시기 전에 먼저 그의 죄를 사해 주셨던 것입니다.
셋째, 예수님은 중풍병자에게 죄사함을 선포하신 후,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들것에 실린 채 예수님을 찾아왔던 중풍병자는 거뜬히 일어나 침상을 들고 걸어 나갔습니다. 죄의 문제가 해결되면 하나님께서 그 열매로써 병을 고쳐 주시는 것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죄사함 받는 것에는 관심이 없고 치료만 해 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먼저 죄사함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막혔던 죄의 장벽들이 무너지고 하늘로부터 풍성한 치료의 단비가 내리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치료자 되시는 예수님께 믿음으로 모든 죄를 씻음받아야 합니다. 이렇게 죄사함 받은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선물인 치료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365일 설교[ 3월 23일]사람을 위한 안식일(눅 6:1-11) |
본래 구약의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과 인간을 지으신 다음 이레째에 쉬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출 20:8,11). 예수님께서 활동하시던 당시,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일을 제외하고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도 병을 고치시는 일을 하셨습니다. 오늘은 이를 살펴봄으로써 안식일의 참 뜻이 무엇인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루는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셔서 한편 손마른 사람을 고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사람의 병을 고치시는 것을 엿보던 사람들은 이 사건을 구실로 예수님께서 안식일을 범하였다고 송사하려고 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고 물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들을 구하시고 새 생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다른 회당에서 가르치시다가 18년 동안 귀신 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펴지 못하는 한 여자를 고치셨습니다. 이것을 보고 분내는 회당장에게 예수님께서는, “십팔 년 동안 사단에게 매인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치 아니하냐”고 그들의 잘못을 꾸짖으셨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님을 강조하셨습니다.
오늘날 교회에서는 안식일 대신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주일을 지키고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성령을 통하여 교회 가운데 와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배 드리고 주의 이름을 부를 때 사단은 떠나가고 우리의 영과 혼과 육이 사단의 궤계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은총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을 사랑하셔서 안식일에도 선을 베푸신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동일하게 우리의 모든 문제를 아시고 예배를 통하여 영,육간의 강건한 축복으로 역사해 주시고 계십니다
365일 설교[ 3월 24일]생동하는 신앙(눅 6:38) |
갈릴리 바다는 요단 강 물을 받아들이는 것만큼 자꾸 물을 내보내 주기 때문에 언제나 생동하지만 사해는 물을 받기만 할 뿐 내보내지 않기 때문에 죽은 바다가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도 하나님께 받은 축복을 나누어 줄 때만이 생동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나누어 주어야 할까요?
첫째, 우리는 복음 증거를 통하여 신령한 생명을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중생의 체험과, 성령 충만의 체험을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죄악으로 말미암아 영벌에 처해 있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을 통하여 치료와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다는 것과, 그로 말미암아 보혜사 성령님의 능력을 힘입어 축복된 승리의 삶을 살아가게 되었다는 기쁨의 소식을 전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 우리는 긍정적인 마음의 자세를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열등 의식과 좌절감과 패배감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마음의 자세를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이런 긍정적인 마음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을 때 생겨납니다. 나를 위하여 독생자마저 기꺼이 내어 주신 하나님의 사랑, 그 사랑을 받는 나야말로 진정 가치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 긍정적인 마음으로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같이 긍정적인 마음의 자세를 끊임없이 나누어 줄 때 우리에게도 긍정적인 자원이 넘쳐나서 생동하는 믿음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 우리는 성공적인 삶의 비결을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성공적인 삶은 ‘영혼이 잘 됨같이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한 삶’입니다. 영혼이 잘 되는 비결은 중생의 삶, 성령 충만의 삶, 말씀 중심의 삶, 시험과 환난을 감사로 이기는 삶입니다. 범사가 잘 되는 비결은 저주에서 해방을 받고, 부요 의식을 가지며 착하고 충성된 태도를 갖는 삶입니다. 또한 강건함의 비결은 치료의 예수님을 믿는 삶과 회개하는 삶, 기도하는 삶입니다. 우리가 성공적인 삶을 이웃에게 공급해 주면 우리에게도 성공적인 자원이 넘쳐나서 승리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웃에게 신령한 생명과 긍정적인 마음의 자세, 성공적인 삶의 비결을 나누어 주는 생동하는 신앙 생활을 해야겠습니다
365일 설교[ 3월 25일]직분자를 세울 때(민 27:15-23) |
모세는 광야에서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을 잘 인도했습니다. 이제 그에게는 자기를 대신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지도자를 세우는 것만이 최후의 사명으로 남았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 나라의 지도자 또는 직분자를 세울 때 모범이 되는 세 가지 원리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첫째, 모세는 하나님께 기도로 여쭈었습니다(15절). 직분자를 선택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열두 사도를 뽑으시기 전에 밤새도록 기도하셨고(눅 6:12), 초대교회에서 선교사를 파송할 때에도 금식 기도 중에 바울과 바나바를 선택했습니다(행 13:2). 그러므로 우리가 먼저 마음 속에 자신의 생각대로 “저 사람이 적합하다”라고 결정내리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하는 행위가 됩니다. 우리는 기도의 응답을 받기도 전에, 내 마음에 드는 지도자 또는 직분자를 정한 일은 없는지 살펴보아야 겠습니다.
둘째, 하나님은 성령에 감동된 자를 지도자로 뽑으셨습니다(18절). 하나님이 보시는 기준은 영적인 기준이며, 그 기준에 따라 직분자를 뽑으셨다는 사실에 유의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뽑으신 이들에게는 분명히 성령의 열매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직분자의 인선 과정에서 나 자신의 목소리를 높여서는 안 됩니다. 나와 맞지 않는 사람일지라도 하나님의 관점에서 성령의 열매가 나타나는 사람이라면 높이 추천해 주어야 합니다.
셋째, 모세는 과감히 위탁했습니다. 위탁이라는 말은 모든 책임을 맡겼다는 뜻입니다. 모세는 여호수아가 사람이 아닌, 하나님께서 뽑으신 지도자라는 사실을 철저히 인식했습니다. ‘하나님이 여호수아를 뽑으시고 그에게 사명을 맡기셨으니, 나는 그가 모든 일을 잘 수행할 줄 믿는다’는 것이 모세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는 기득권자로서 아무런 권위도 주장하지 않았고, 그를 세우신 하나님의 뜻을 신뢰하며 과감히 그에게 모든 일을 위임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직분자를 선택할 때 전폭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맡기는 태도를 취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가 그것을 위해 기도할 때 하나님은 성령 충만한 종을 뽑으셔서 주님의 사명을 감당케 하실 것입니다
365일 설교[ 3월 26일]이 세대 사람들의 비유(눅 7:31-35) |
본문은 당시 세대의 사람들에 대해 예수님이 비유로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적용되는 말씀이기에 이것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첫째, 이 세대의 사람들은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애곡을 하여도 울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구원의 놀랍고도 즐거운 소식을 듣고도 춤추며 즐거워할 줄 모르고 또한 죄로 인한 회개의 메시지를 듣고도 슬퍼하거나 애곡할 줄을 모릅니다. 그저 세상살이에 떠밀려 무감각하고 무의미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교만과 아집의 완악한 마음으로 복음을 배격하고 성도들을 조롱하는 자들도 많습니다. 이와 같이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살았다 하나 죽은 자와 다를 바 없는 자들이 바로 오늘날 현대를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인 것입니다. 이들에게 우리는 구원의 기쁨과 회개의 애통함을 전해 주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이웃들이 어둠을 깨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감격된 삶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둘째, 사람들은 세례 요한의 절제 생활을 귀신들린 것으로, 예수님의 먹고 마시는 생활은 탐욕과 무절제로 비난했습니다. 남을 비판하는 사람들의 기본적 마음 자세는 자기는 의로운 사람이라는 착각입니다. 자신이 죄인이라고 솔직히 인정하고 시인하는 사람은 함부로 자신의 기준으로 남을 판단하거나 비판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바로 잡으려고 애쓰며 또한 타인의 입장에 서려고 노력하는 자입니다.
우리가 습관적으로 남을 비난하고 있다면 진정 우리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진실로 회개한 사람은 혹시 남이 옳지 못한 행동을 하더라도 그 속에 담겨 있는 선한 의도를 발견하고자 애쓰는 자입니다.
오늘날 세상 사람들은 완악한 마음과 무지함으로 죄악의 애통함과 구원의 기쁨을 알지 못하고 남을 비난하며 교만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이러한 모습이 우리 삶 속에는 없는가 돌아보아야 합니다. 또한 이 세대를 향하여 구원의 감격으로 살아가는 축복된 삶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그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해야 할 것입니다
365일 설교[ 3월 27일]진정한 회개(시 51:7-19) |
본문은 다윗이 밧세바를 범한 후에 애통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드린 회개의 기도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영접한 후 신앙 생활을 하면서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회개’라는 말을 수없이 많이 듣게 되는데, 이에 다윗의 회개를 통해 진정한 회개란 무엇을 의미하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고 고백하면서 통회하는 마음을 받으시는 하나님을 향해 죄를 토로했습니다. 종종 인간의 자존심과 교만은 자신을 스스로 의인인 체 가장하여 죄를 숨겨 놓게 만듭니다. 그러나 진정한 회개는 상한 심령을 가지고 숨김없이 자신의 죄를 토로하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롬 7:19)라고 고백한 바울의 말처럼 인간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나약한 죄성을 지닌 자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나약한 죄성을 마음 깊이 애통해 하며 상한 심령을 가지고 자신의 무력함을 그대로 하나님 앞에 내어 놓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회개인 것입니다. 형식적인 종교 행위로 자신의 깊은 죄와 무력한 모습을 감춘 채 입술만으로 하는 회개의 기도는 심령을 감찰하시는 하나님 앞에 인정될 수 없는 것입니다.
또한 진정한 회개는 이전의 죄악된 삶으로부터 돌아서서 하나님 중심의 거룩한 삶으로 변화되는 것을 말합니다. 말로는 또는 마음으로는 죄를 회개한다고 하면서 실제 생활에 있어서는 아무런 변화도 없이 다시 죄의 구렁텅이에서 뒹군다면 그것은 진정한 회개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드린 회개의 기도는 우리의 실제 생활 속에서의 행함을 통해 온전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씻음 받았으면 죄의 사슬을 단호히 끊고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서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진정한 회개란 애통하는 마음의 상한 심령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죄에서 돌이켜 구원받은 자로서의 온전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진정한 회개를 통하여 변화된 삶을 살므로써 다윗과 같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로 인정받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365일 설교[ 3월 28일]결실하는 마음 밭(눅 8:4-8) |
사람의 마음은 매우 중요한 곳입니다. 왜냐하면 마음이 어떤 상태에 있느냐에 따라서 다양한 결과가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좋은 상태에 있으면 아름다운 결과가 나타나며 마음이 악한 상태에 있으면 악한 결과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풍성한 결실 여부도 우리의 마음 상태에 의해서 좌우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을 네 가지로 나누어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길가와 같은 마음입니다. 이 마음은 완악하고 무관심한 마음을 말합니다. 이런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아무리 힘써서 예수님의 복음을 증거하고 말씀의 씨를 뿌려도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이러한 사람의 경우 하나님께서는 그의 완악한 마음밭을 깨뜨리기 위해 시험과 환난을 통과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돌밭과 같은 마음이 있습니다. 이런 마음을 가진 사람은 가끔 교회에 나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그 마음 속에는 불신앙과 불순종이 자리잡고 있어서 사람들의 조소나 비난을 받으면 곧 신앙을 포기해 버리기 때문에 어떠한 열매도 맺지 못합니다.
그 다음은 가시떨기와 같은 마음이 있습니다.이는 세상의 염려와 탐욕이 가득한 마음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기는 하지만 세상의 염려와 근심으로 인해 믿음에 바로 서지 못합니다.
우리는 눈 앞에 있는 현실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 때문에 믿음을 저버리는 가시떨기와 같은 마음을 성령의 불로 태워 버려야 할 것입니다.
길가와 같은 마음, 돌밭 같은 마음, 그리고 가시떨기와 같은 마음이 깨어지고 불태워지면 옥토와 같은 마음이 됩니다. 옥토는 순종과 믿음을 가진 마음입니다. 우리가 결실하는 신앙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우리 마음 밭이 옥토와 같아야 합니다.
이런 마음에 복음의 씨앗이 뿌려지면 싹이 나서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게 됩니다.
여러분은 풍성한 복음의 열매를 맺기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순종과 믿음의 마음을 가지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은 순종과 믿음의 마음 밭에서 열매를 맺기 때문입니다
365일 설교[ 3월 29일]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눅 8:22-25) |
본문에 기록된, 예수님께서 풍랑을 잔잔케 하신 사건을 통하여 우리의 믿음을 점검해 보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첫째,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들의 믿음을 하나님의 말씀에 두었는지 묻고 계십니다. 바다를 건너기 전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평범한 인간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아들의 입에서 나온 말씀이기 때문에 어떠한 어려운 환경에서도 반드시 이루어지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을 단지 평범한 상식적인 말씀으로만 받아들였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풍랑을 만나자 예수님의 말씀이 아닌 환경만을 바라보게 되어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세상을 살면서 예수님의 말씀보다는 감각으로 느껴지는 환경에 더 귀를 기울일 때가 많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나의 현재의 상황과는 무관한 하나의 신화 같은 이야기로만 여길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그 말씀에 믿음을 두는 자는 그 어떠한 풍랑이 밀려와도 결코 요동하지 않습니다.
둘째,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묻고 계십니다. 사람은 누구나 태어날 때부터 자신의 지식이나 경험을 믿는 인간적인 믿음을 갖고 있는데, 이러한 믿음은 때때로 삶의 풍랑 속에서 처절하게 무너집니다.
본문을 보면 제자들도 어부로서의 자신의 경험과 지식에 대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믿음이 거센 풍랑 속에서 무력하게 무너져 내리자 그들은 깊은 절망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이에 반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진 성도는 어떠한 어려움을 만나도 믿음의 근원되시는 예수님과 교제함으로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자신의 경험이나 능력을 의지하지 않고 예수님을 의지함으로 인생의 배를 타고 항해하면서 크고 작은 풍랑들을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이겨 나갈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여러분에게 묻고 계십니다.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우리는 말씀 위에 굳게 서서 환경을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만 바라봄으로 담대하게 인생의 노를 저어가는 성도들이 되어야겠습니다
365일 설교[ 3월 30일]문제를 해결하시는 예수님(눅 8:40-48) |
나는 영국에서 출판되는 기독교 잡지에 실린 어느 목사님의 글을 읽고 놀란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시대에 우리의 영적인 문제에는 관여하시지만 생활의 문제나 환경의 문제에는 조금도 관심을 두지 않으신다는 내용의 글이었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본문을 보면 혈루병 앓는 여인은 예수님을 만나서 육신의 질병을 치료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날도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 일상 생활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분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간혹 영적인 것만을 거룩하게 생각하고 육체와 물질적인 것은 죄악으로 여겨 영적인 것만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물질 세계를 지으신 분으로서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딤전 4:4,5). 그 분은 우리의 영혼 구원 뿐 아니라 육체와 환경의 구원에도 지극한 관심을 갖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문제가 있으면 그 원인을 알아내어 이에 대해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다가온 문제 중 대부분은 우리의 탐욕으로 인해 생긴 것입니다. 야고보서 1장 14절에도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탐심으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 세상의 자랑을 좇아 살아왔던 죄를 철저히 회개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께 먼저 믿음의 봉사를 드려야 합니다. 성경을 보면 사렙다의 과부는 가뭄으로 인한 극심한 어려움 속에서도 마지막 남은 가루와 기름으로 하나님의 종 엘리야를 먼저 대접했습니다. 그러자 그녀의 집에는 가뭄이 다할 때까지 가루와 기름이 끊어지지 않는 하나님의 복이 임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법칙은 먼저 믿음으로 심을 때, 내어 줄 때 받는 것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우리가 문제를 해결받기 위해서는 먼저 시간과 물질과 봉사로 하나님께 믿음의 씨앗을 심는 행함을 보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 회개 그리고 헌신을 통해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받고 승리의 삶을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65일 설교[ 3월 31일]십자가의 신앙(눅 9:23) |
우리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놀라운 믿음을 약속해 주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이 확고한 믿음을 갖지 못한 채 방황하는 이유는 그들에게 십자가의 신앙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십자가 신앙을 통해 확고한 믿음을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 우리는 육신의 정욕을 버림으로써 십자가를 지고 자신을 부인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를 하나의 윤리적, 철학적 사유대상으로 여기거나 생활에 여유가 있을 때 즐기는 액세서리 정도로 생각합니다. 이러한 사람에게는 생명력 있는 믿음이 창출되지 않습니다.
육신의 정욕을 버리고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는 마음으로 자기 희생과 헌신을 할 때 우리는 생동하는 믿음을 통해 우리의 환경과 생활을 변화시킬 수 있게 됩니다.
둘째, 우리는 안목의 정욕을 버림으로써 십자가를 지고 자신을 부인해야 합니다. 안목의 정욕이란 눈을 즐겁게 해 주는 대상만을 추구하는 탐욕입니다. 오늘날 삶이 향상되고 풍요로워짐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당장 눈앞에 보이는 이익만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의 가치는 갈수록 사라져 가고 사람들은 점점 세속화되고 있습니다. 이에 바울도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딤전 6:9)고 교훈하고 있는 것입니다.
셋째, 우리는 이 세상의 자랑을 버림으로써 십자가를 지고 자신을 부인해야 합니다. 이 세상 자랑은 세상의 지위, 명예, 권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 자랑을 위해 복음을 외면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침 안개와 풀의 꽃과 같아 한순간에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썩어질 이 세상의 자랑을 버리고 영원한 하늘 나라와 십자가를 자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십자가를 통해 나타납니다. 십자가 없는 믿음은 마치 모래 위에 세운 집과도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 세상의 자랑을 버리는 십자가 헌신의 신앙을 통해 진정한 믿음을 구축해 나가야 하겠습니다
출처 : RED COMPASS 선교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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