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5일 설교 4월1일~30일 {목록 돌아가기} |
365일 설교[ 4월 1일]가장 작은 자가 큰 자니라(눅 9:46-48) |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이름을 내고 자신을 높이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누가 큰 자인지 다투는 제자들에게 어린아이 하나를 세우시고 가장 작은 자가 오히려 큰 자라고 하는 새로운 하늘 나라의 교훈을 주셨습니다. 즉 예수님은 자신을 낮추는 겸손에서 얻어지는 명예를 구할 것이지 남을 짓누르고 쟁취하는 탐욕적인 명예를 구하지 말라고 교훈하신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죄악 가운데서 교만만큼 물리치기 어려운 죄도 없습니다. 교만은 너무나 미묘하게 작용을 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어느새 마음속으로 스며들어 자신을 붕괴시킵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천사 중 가장 아름다운 루시퍼가 사단이 된 것도 바로 이 교만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찬양하며 높이는 천사였으나 교만한 마음으로 자기 위치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주권에 도전했습니다. 그 결과 그는 하나님께 심판을 받아 구덩이의 맨 밑으로 빠지게 된 것입니다. 이에 반해 겸손의 본이 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죽기까지 낮아지심으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올리우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주신 믿음의 분량과 분수는 모두 다릅니다. 그런데 교활한 마귀는 사람들을 부추겨서 자신의 분수와 능력의 한계를 벗어나게 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조그만 부와 명예와 지식과 권세를 가지게 되면 스스로 교만해져서 자기보다 낮은 자들을 업신여기고 무시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칫하면 마귀가 파놓은 이러한 교만의 함정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무시하고 믿음의 분수를 뛰어넘어 탐욕을 부리기도 하고, 이기적인 마음으로 남의 인격과 권리를 무시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이런 잘못을 범했다면 즉시 돌이켜 하나님께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고 그리스도를 본받아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는 대적하시지만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주시고 때가 되면 높여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길 줄 아는 겸손한 신앙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365일 설교[ 4월 2일]진정한 자유(신 4:9) |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로 말미암아 죄악의 노예에서 해방되어 영적인 자유를 소유하게 된 자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의 진정한 자유를 누리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종살이에서 자유를 얻어 광야 행진을 하던 중 하나님께 받은 권면의 말씀입니다. 오늘은 이 말씀을 중심으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우리의 마음을 지켜야 합니다. 인간은 아담과 하와의 범죄 이후 죄의 노예가 되어 멸망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의롭다 하심을 인정받고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었습니다. 죄의 노예에서 해방되어 존귀한 하나님의 자녀로 그 신분이 변화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의 올무에서 해방된 마음을 사단에게로부터 지켜 진정한 자유를 마음껏 누려야 하겠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해야 합니다. 광야 생활이 어려울 때 이스라엘 백성이 불평과 원망으로 가득찼던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잊어버렸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구원의 자유를 누리지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를 교훈삼아 우리는 광야 같은 세상에서 많은 역경과 고난을 극복하고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기억하고 그 사랑의 힘을 의지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셋째,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해야 합니다. 참된 자유는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는 방종이 아닙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해방된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주셨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사랑의 법이 주어져 있습니다. 이 사랑의 법을 행하고 실천할 때만 우리는 참된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됩니다.
진정한 자유는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오직 자신의 마음을 지켜 구원의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사랑의 법을 행하고 전할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365일 설교[ 4월 3일]이스라엘아 들으라(신 6:4-9) |
오늘은 죄와 사망의 애굽에서 벗어나 생명의 가나안 땅에 들어갈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첫째, 우리는 삶 전체를 통하여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모세는 불순종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야웨는 오직 하나인 야웨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야웨를 사랑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우리는 안일하고 위선된 마음을 버리고 온전하고 진정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또한 허물과 죄로 얼룩진 우리의 성품을 그리스도를 통해 새롭게 변화시켜 아름다운 성품을 가지고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나아가 우리의 의지와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둘째,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항상 묵상하고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을 기록하여 손목에 매고 미간에 붙이며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의무를 알고 그 분을 더욱 잘 섬기기 위해서 말씀을 항상 기억하고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을 힘입어 말씀의 심오한 진리를 깨닫고 그 말씀을 묵상하여 자신의 것으로 수용하면 완악한 우리의 마음은 녹아져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깊이 받아들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셋째, 우리는 마음에 새겨진 말씀대로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말씀을 깨달은 자라 할지라도 실천이 없다면 그 사랑과 지식은 전혀 무익한 것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의 노력이나 의지로 결코 이룰 수 없습니다. 오직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보혜사 성령님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나의 택한 이스라엘아, 들으라”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실천하여 인생의 광야를 지난 후 약속된 축복의 땅에 들어가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365일 설교[ 4월 4일]감사의 위력(신 8:10) |
감사하는 마음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가장 귀한 마음입니다. 또한 이 ‘감사’라는 말은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 중 가장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능력을 가진 말입니다. 오늘은 본문을 중심으로 감사의 위력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감사는 우리의 삶을 변화시킵니다. 인간 생활에 있어서 감사는 기계에 있어서 윤활유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사람이 메마르고 딱딱한 환경 가운데에서 부정적인 마음으로 가득할 때에라도 감사의 기름을 붓게 되면 어느새 그에게는 생동력과 기쁨이 솟아나게 됩니다.
어떤 주인이 타국에 가면서 종들을 불러 각각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그리고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습니다.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 받은 종들은 감사하면서 적극적인 자세로 일해 각각 두 배를 남겨 후에 주인의 칭찬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 받은 종은 그 한 달란트를 그냥 땅에 묻어 두었다가 후에 주인의 꾸지람을 받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어떠한 마음 자세를 가지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은 달라집니다. 감사하는 자는 적극적이고 생명이 넘치는 삶을, 감사하지 않는 자는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 감사는 환난과 역경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줍니다. 사람은 형통할 때에는 감사할 수 있지만 거센 역경과 절망적인 문제에 부딪쳤을 때에는 감사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러나 환난 속에서도 감사하는 사람은 흰 눈 속에서도 푸른 기상을 발하는 소나무처럼 그 아름다운 믿음을 변함없이 발휘하게 됩니다. 이러한 사람은 감사와 찬양으로 빌립보 감옥의 문을 열었던 바울과 실라처럼 역경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것입니다.
셋째, 감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 감사는 하나님을 가장 기쁘시게 하는 것으로, 하나님은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시 50:23)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환경에서도 하나님께 감사하는 아름다운 마음의 소유자가 되어야겠습니다
365일 설교[ 4월 5일]빈 집의 우환 (눅 11:21-26) |
오늘 본문을 보니, 목회 도중 물욕에 사로잡혀 사람을 죽이고 돈을 탈취했던 어느 목사의 사건이 생각납니다. 우리는 마음속에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시고 있지 않으면 이처럼 사단의 종 노릇을 하게 되는데 이에 대해 몇 가지 교훈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타락한 아담의 후손인 인간 안에는 하나님께 반역하는 사단이 역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본래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도록 지음받은 아담과 하와가 불순종하여 사단의 꾀임에 넘어가 그 종이 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사단은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지 않는 사람들 속에서 주인 노릇하며 그 생애를 인본주의로 살아가도록 이끌고 있습니다.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모두 공중 권세잡은 사단을 주인으로 섬기고 있는데 이런 사람들은 이 땅에서 무가치한 삶을 살다가 영원한 멸망의 처소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면 과연 이런 비극적인 인간에게 소망은 없는 것일까요? 예수님은 이에 대해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고 말씀하셨습니다. 2천 년 전 예수님은 사단의 종살이로부터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인류를 대신해 십자가에서 속죄 제물이 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인간은 죄 짓고 불의하며 추악하고 버림을 받아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죄 사함을 얻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것은 단순히 종교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주인을 바꾸는 것입니다. 즉 사단을 주인으로 섬겼다가 성령을 통해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도 자신의 내면을 기도와 말씀, 그리고 성령으로 채워놓지 않고 빈 집으로 남겨 두게 되면 본문 말씀처럼 옛 주인인 사단의 공격을 받아 처음보다 더 흉악한 형편에 처하게 되고 맙니다. 따라서 우리는 신앙 생활에 게으르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엡 6:13
365일 설교[ 4월 6일]하나님을 섬기는 자의 받을 복(신 11:13-15) |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잘 섬길 것을 당부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을말합니다.
본문에서 모세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계명을 잘 지키고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면 토지의 소산과 육축에 하나님의 풍성한 복이 임할 것임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즉 영혼이 잘 되면 범사에도 잘 되고 강건한 복을 받을 것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주신 계명들에 우리가 순종하는 삶을 살면 모든 자연과 환경은 그야말로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으로 바뀌게 됩니다.
사람이 하나님께 복을 받으면 그의 모든 것에 하나님의 복이 임하게 되고 또한 하나님께서 그에게 이른 비와 늦은 비(14절)를 시기 적절하게 주셔서 풍성한 수확을 얻게 하시는것입니다.
그러므로 복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미워하시는 것은 우상 숭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택하셔서 애굽의 종살이에서 구출하시고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셨으나 그들이 우상을 섬기자 가차없이 심판하셔서 이방민족의 포로가 되게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도 마음속에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우상이 자리잡고 있지 않은지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해야 할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은 그 무엇이든지 하나님께서 싫어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자 할 때는 많은 노력과 희생이 요구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러한 어려움을 기쁨으로 감당할 때 우리는 명실공히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말과 혀로써만 섬기는 사람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그의 계명을 잘 지켜나가는 사람에게 한없는 복을 주시되 하늘의 신령한 것과 땅의 기름진 것으로 충만하게 채워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범사에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삶을 사심으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자녀들이 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365일 설교[ 4월 7일]삶의 우선 순위(눅 12:16-20) |
예수님의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는 오늘날 하나님을 저버리고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 세상의 자랑을 좇아 사는 물질 만능주의의 사람들에게 큰 경종을 울려주는 말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본문의 부자처럼 삶의 우선 순위를 알지 못하고 자기를 위해서는 부요하면서도 하나님을 향해서는 부요치 못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이에 본문 말씀을 통해 몇 가지 교훈을 얻고자 합니다.
첫째, 인간은 먼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만물의 창조주이시며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절대 주권자가 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소유인 물질과 시간, 생명을 그 형상대로 지음받은 우리 인간에게 잠시 맡겨 두셨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잠시 위탁받은 그것들을 주인이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용해야 할 책임을 지니고 있습니다. 청지기인 우리는 주인이신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해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 우리는 하나님께 대해 부요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본문의 부자는 풍성한 소출로 인해 많은 곡식을 쌓아둘 곳이 없자 새 곡간을 짓고 평안히 쉬고 먹으며 즐거워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자기를 위해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해서는 부요치 못했던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어리석은 자라는 낙인을 받고 말았습니다.
많은 사람이 그것이 전부인 줄 알고 화려한 집, 기름진 음식, 쾌락적인 삶을 추구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진정한 삶의 의미와 가치를 잃은 채 하늘 나라와 영적 세계에 대한 소망은 상실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겉은 화려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볼품없는 초라한 거지에 불과한 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잠깐 있다가 사라질 안개와 같은 존재들이며 나그네와 같은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잠시 후면 사라질 이 세상 것들에 집착하지 말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부요한 자로 인정받을 수 있는 삶을 살아야하겠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은 어떻습니까? 풍요로운 외적 환경에 비해 내적 세계는 황폐와 빈곤으로 가득하지는 않습니까? 이 세상 삶에서의 우선순위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것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365일 설교[ 4월 8일]충성된 청지기란(눅 12:42-48) |
우리는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주인되신 하나님의 일을 맡은 청지기로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본문은 우리에게 충성된 청지기의 자세에 대해 교훈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충성된 청지기는 어떤 청지기일까요?
첫째, 충성된 청지기는 지혜로운 청지기입니다. 본문 42절에는 지혜로운 청지기가 어떠한 사람인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바로 지혜로운 청지기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사와 재능을 필요한 곳에 잘 활용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가르치는 은사가 있는 사람은 교사로서 봉사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가르치는 은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통 봉사를 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를 부적절하게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 충성된 청지기는 진실한 청지기입니다. 본문 45절부터 47절까지에는 진실한 청지기가 누구인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만일 그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노비를 때리며 먹고 마시고 취하게 되면…” 진실한 청지기는 주인이 있든 없든, 주인이 감독을 하든 안 하든, 항상 주인의 뜻을 따라 성실하게 일하는 종입니다. 윗사람이 볼 때는 열심히 일하고 보지 않을 때는 적당히 소홀하게 일하는 사람은 진실한 청지기가 아닙니다.
셋째, 충성된 청지기는 주인이 맡긴 것에 따라 풍성한 열매를 맺는 사람입니다. 본문 48절에는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찾을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사와 재능을 주시는 이유는 우리를 통해서 열매 맺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와 재능을 계발하여 열매 맺는 일에 항상 힘써야 합니다. 요한복음 15장 8절에는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모두 지혜롭고 진실하며 열매를 풍성히 맺는 충성된 청지기가 되어 주님 앞에 서는 날, 잘했다 칭찬받는 종들이 되어야겠습니다
365일 설교[ 4월 9일]왕의 의무(신 17:16-20) |
본문에는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아 왕이 된 사람이 지켜야 할 의무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첫째, 본문 16절에는 “왕된 자는 말(馬)을 많이 두지 말 것이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말을 많이 둔다는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는 군사력을 더 의지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하나님에 대한 불신앙입니다. 우리는 지위나 권세와 같은 세상의 것들을 의지하지 말고 오직 절대 주권자 되신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둘째, 본문 17절에는 “아내를 많이 두어서 그 마음이 미혹되게 말 것이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의 ‘아내’는 후궁이나 정략 결혼으로 들어온 이방 여인입니다. 아내가 많으면 왕은 마음을 빼앗겨 본연의 일에 충실할 수가 없습니다. 또한 이방 여인들은 시집 올 때 항상 자기가 섬기던 우상을 동반하고 있었기 때문에 문제가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날의 우상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것들에 미혹되어서는 안 되며 오직 성령의 충만을 입어 하나님만을 섬겨야 하겠습니다.
셋째, 본문 17절에는 “은금을 자기를 위하여 많이 쌓지 말 것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왕이 자신을 위하여 재물을 많이 쌓는다는 것은 부정 축재와 과다한 세금 징수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왕이 자기 신분과 위치를 이용하여 탐욕을 채우는 행위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금하신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앞에서와 사람 앞에서 정직과 성실로 가득찬 빛과 소금의 삶을 살아야 하는 의무가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왕이 행해야 할 일에 대해서 본문 18절에서부터 20절까지에는 “……이 율법서를 등사하여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서 그 하나님 야웨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 그리하면…… 그와 그의 자손의 왕위에 있는 날이 장구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날도 그리스도 안에서 왕된 우리들은 오직 하나님 경외하기를 배우며 십계명을 지키기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의 신앙과 삶이 반석 위에서 견고하게 될 것입니다.
365일 설교[ 4월 10일]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눅 13:24) |
오늘 본문에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교훈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근거로 우리가 들어가야 할 좁은 문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합니다.
첫째, 좁은 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구원을 얻을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방법 외에는 없음을 단호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행 4:12).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셔들이고 살아갈 때 비로소 구원의 좁은 문으로 들어서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 성령 충만으로 들어가는 문이 있습니다. 이 문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 세례를 받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능력으로 뜨거운 성도가 되기 위해서 들어가는 문입니다. 이 문에 들어오면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점령하여 하늘의 사랑과 희락과 화평으로 가득 채워 주심으로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의 은총 속에 좁은 문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 성결한 생활로 나아가는 좁은 문이 있습니다. 이 문에 들어간 성도는 추하고 더러운 자리에 함께하지 않고 대화 속에서도 추하고 세속적인 말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결의 문으로 들어온 성도에게는 성령께서 자꾸 그 마음속에 성결한 삶에 대한 뜨거운 소원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이 성결의 삶의 문으로 들어가면 이전에 느끼지 못하던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되고 성령의 권능과 능력이 임하는 것입니다.
넷째, 주님 앞에 엎드려 주님만을 바라보는 문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주님만을 바라보는 삶을 살았던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사도 바울입니다. 사도 바울은 일평생 온갖 환난과 핍박을 당하며 복음을 전했으나 그의 마음은 세상에 얽매이지 않고 천국의 기쁨과 화평으로 충만했습니다. 세상의 미련에 묶이지 않는 마음, 오직 주님만 바라보고 사는 마음, 이것이 바로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성도들이 가져야 할 마음 자세입니다.
우리는 지금 어떤 문으로 들어가고 있는지 다시 한 번 점검해 보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써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사람만이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영원한 천국의 위로와 상급을 준비하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365일 설교[ 4월 11일]애착(눅 14:15-24) |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애착은 무서운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자신이 애착하는 그 대상을 위해 전 생애를 바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애착하는 그것을 하나님과 겸하여 섬기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우리 마음속의 애착을 내어놓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본문의 비유는 우리에게 이에 대한 중요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부자의 잔치 초청을 거부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천국 잔치를 거절한 이 세상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이 세상에 애착을 가진 사람들은 영원한 천국의 초청을 현재 삶의 방해물로 여겨 거부합니다. 당장 눈에 보이는 현재의 생활에 만족하여 자신의 삶에 새로운 변화가 다가오는 것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택한 백성들을 부르실 때 그들이 이 세상의 것에 애착을 두고 있으면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그 애착의 대상물을 빼앗아 가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세상의 것을 동시에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세상의 것에 미련을 두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본문의 주인은 큰 잔치를 베풀었으나 많은 사람이 여러 가지 핑계로 잔치에 참예하지 않자 이제는 종에게 가난한 자, 병신, 소경 그리고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고 명령합니다. 이들은 이 세상에서 버림받고 자신의 부족함과 무능함을 깨달아 하늘의 것에 애착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처럼 오늘날 이 땅이 아닌 하늘에 애착을 두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초청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좇는 자들이 아니라 영원한 하늘 나라를 소망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모든 사람들을 영원한 천국 잔치에 초청하고 계십니다. 그 초청을 거절하느냐, 받아들이느냐는 자신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잠시 후면 사라질 이 땅에 애착을 두고 있다면 그 초청을 받아들일 수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디에 애착을 두시겠습니까? 여러분 가운데 한 순간의 세상 쾌락을 위해 영원한 것을 포기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한 사람도 없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65일 설교[ 4월 12일]이기주의의 비극(눅 15:11-24) |
현대인들은 지극히 자기 중심적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기주의가 인간의 생활에 얼마나 큰 파괴와 비극을 가져오는지에 대해 탕자의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본문을 통해 이기주의와 그 결말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어느 날 두 아들을 가진 사람의 둘째 아들이 그의 아버지에게 재산 중 자신의 몫을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아버지는 그 아들이 자립해도 좋을 만큼 충분히 성장하면 기꺼이 재산을 분배하려 했던 좋은 인격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들은 그러한 아버지와 가정의 입장은 조금도 상관하지 않고 자기의 욕심만을 내세워 “내게 속한 분깃을 내게 주소서”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이기주의자는 타인의 상황에는 무관심한 채 자기만을 생각하고 자기의 주장만을 내세웁니다.
마침내 자신의 몫을 받은 그 아들은 재산을 모아 먼 나라로 떠났습니다. 상대방을 자신의 이용 가치로만 보고 더이상 쓸모가 없어지면 헌신짝처럼 던져 버리고 ‘먼 나라’로 떠나 버리는 것이 이기주의의 한 형태입니다. 서로 이용하고 이용당하면서 배신감의 쓰디쓴 고통 속에서 더이상 서로를 신뢰하지 못하는 관계로 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이기주의자가 걷는 길은 어떤 길일까요? 아마도 둘째 아들은 자신의 욕망을 성취할 수 있다는 꿈에 부풀어 먼 나라로 떠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그는 허랑방탕한 생활로 자신이 가진 재산을 다 허비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다른 사람을 짓밟고 자신을 높이려는 이기주의적 동기는 그 기초부터 왜곡된 것이기에 결국은 모래 위에 세운 집같이 무너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또한 이기주의의 길은 쾌락과 타락의 길입니다. 이기주의는 본문의 둘째 아들처럼 자신의 현실적인 쾌락만을 즐기며 방탕한 삶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기주의의 열매는 얼마 못 가 흉년이 들어 궁핍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자의 영혼과 마음, 육체와 생활에 흉년이 들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이기주의적인 삶을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인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신 예수님을 본받아 이기주의적인 삶을 청산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365일 설교[ 4월 13일]하늘의 아름다운 보고(신 28:1-14) |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천국을 기업으로 받게 된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서도 하나님 나라의 능력과 축복을 받아 누리며 살아가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즉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를 열어(12절) 그의 자녀들로 하여금 기쁨과 풍요 가운데서 형통한 삶을 살게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께서 하늘의 그 아름다운 보고를 먼저 열어 주실까요?
먼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의 말씀에 순종할 때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를 열어 주십니다. 성경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할 때에는 축복을 받을 수 있었지만 순종하지 않을 때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징계를 받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네가 네 하나님 야웨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2절)라는 본문 말씀처럼 그들에게 약속된 많은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히 순종하는 것뿐이었습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역사는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간혹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따르는 것에는 무관심한 채 무조건 하나님의 축복만을 간구하는 그릇된 신앙을 지닌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축복과 약속의 말씀은 우리가 먼저 그의 말씀과 그의 뜻에 순종할 때 선물로 주어지는 것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가진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드릴 때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를 열어 주십니다. 여기에는 심고 거두는 법칙이 적용됩니다. 우리의 물질과 시간 그리고 몸을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헌신을 기뻐 받으시고 하늘의 아름다운 것으로 후히 되어 넘치도록 갚아 주시는 것입니다.
말라기 3장 10절에도 “만군의 야웨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 분께 헌신함으로 우리를 위해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를 여시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누려야겠습니다.
365일 설교[ 4월 14일]관심과 무관심(눅 16:19-31) |
현대 사회의 대표적인 특징 중 하나는 무관심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는 온갖 노력을 기울이면서도 다른 사람들의 삶에는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이와 같은 메마르고 냉랭한 무관심의 늪 속에 빠져 있으면서도 사람들이 이를 깨닫지 못한다는 사실은 비극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더 큰 비극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육신의 삶에만 집착할 뿐 영혼의 삶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는 점입니다. 육체의 소욕을 좇아 살아가면서 영원한 삶에는 아무 관심도 기울이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부자는 좋은 옷을 입고 값진 음식을 먹으며 매일 연락(宴樂)하며 살았습니다. 그는 육체의 향락을 위해서만 모든 관심을 기울이고 하나님과 영혼에 관해서는 철저한 무관심 속에 있었습니다.
이에 반해 나사로는 병으로 고통받으며 부자의 대문에 누워 상에서 떨어지는 음식을 먹고 살았습니다. 아무도 그를 사랑하거나 동정하지 않았고, 개들이 와서 그 아픈 상처를 핥기도 했습니다. 나사로는 비록 겉모양이 초라한 거지였지만 그의 관심은 부자의 관심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는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 관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부자가 육체의 쾌락에 관심을 가질 때 그는 영혼의 삶에 깊은 관심을 두었던 것입니다.
세월이 흘러 그들은 이생의 삶을 끝내고 영원한 세계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 때 나사로는 천사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안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부자는 음부에서 고통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세계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똑같은 무관심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결국 그는 무관심의 세계, 즉 부르짖어도 응답이 없고 간구해도 들어줄 이 없는 버림받은 세계로 처절하게 곤두박질당하고 말았습니다.
오늘날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땅에 있을 동안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디에 관심을 두고 있습니까?
진정으로 영원히 썩지 않을 하늘에 관심을 두어 하나님의 극진한 관심을 받으며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65일 설교[ 4월 15일]우리들 안에 있는 천국 (눅 17:20,21) |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과 만나기 위한 특별한 장소가 요구되었습니다. 제단이나 성막 그리고 성전에 하나님께서 임재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성막이나 성전을 찾아갈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를 구주로 모신 사람 안에는 성령이 임하심으로 천국이 이미 임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미 우리의 마음 안에 있는 천국을 어떻게 누릴 수 있을까요?
첫째, 천국의 특징과 속성을 알아야 합니다. 이를 알 때 우리는 천국을 찾아서 누릴 수 있게 됩니다. 그러면 천국의 특징과 속성은 무엇일까요? 천국에는 가난에서의 해방이 있습니다. 가난은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으로 인해 생겨난 결과로 예수님의 공로로 이미 십자가에서 철폐되었습니다. 또한 천국에는 포로된 자를 위한 자유가 있습니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음란, 방탕, 저주, 술취함, 미움 등의 포로가 되어 있습니다. 천국은 이러한 자들의 포로의 사슬을 풀어 주어 자유를 얻게 해 줍니다. 마지막으로 천국에는 눈 먼 자가 눈을 뜨는 치료의 역사가 있습니다. 육신의 눈 뿐만 아니라 영의 눈이 떠져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 세상의 자랑이 아닌 천국의 영광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 우리에게 천국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 요인을 제거해야 합니다. 애굽을 나온 이스라엘 백성은 약속된 가나안 땅을 차지하기 위해 먼저 그 땅에 살고 있던 일곱 족속을 몰아내야 했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약속된 천국을 누리려면 이를 방해하는 일곱 가지 원수를 쫓아버려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생각을 사로잡아 천국을 누릴 수 없게 하는 것들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자아 중심의 생각, 탐욕, 거짓, 미움, 두려움, 좌절감, 죄책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우리 속에 부정적인 생각들을 심어 주어 천국을 누리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것에서 마음과 생각을 돌이키는 ‘회개’를 통해 마음을 천국의 생각으로 가득차게 해야 할 것입니다.
천국은 그리스도를 영접한 우리 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천국을 풍성하게 누릴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을 지켜야 하겠습니다.
365일 설교[ 4월 18일]믿음이 곧 순종 |
요한복음 3장 4∼5절
그리스도인이란 말의 뜻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사람들이란 의미입니다. 삶의 방식이 그리스도를 닮았다고 해서 사람들이 붙여준 이름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믿음을 가진 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믿음은 인간 구원의 필수조건입니다. 성경은 믿음의 궁극적인 목표는 영혼 구원에 있다고(벧전 1장) 말씀합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민수기 21장에는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사건이 소개돼 있습니다. 백성들이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자 불뱀이 나타나 사람들을 물어 죽였습니다. 백성들은 모세에게 뱀을 없애주기를 요청합니다. 모세가 기도하자 하나님은 놋뱀을 만들어 장대에 높이 매달고 그것을 바라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는 말씀대로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자 바라보는 자들이 살아나는 역사가 벌어졌습니다.
이 사건은 우리에게 의문점을 갖게 합니다. 왜 뱀에 물린 자들에게 장대에 달린 놋뱀을 바라보라고 했을까요? 차라리 어떤 약초를 먹거나 상처에 바르게 했으면 더 이해가 빠르고 따르기 쉬웠을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구리뱀을 바라보는 것이 우스꽝스럽게 보이지만 하나님께서 말씀을 따라야 합니다. 믿음이 곧 순종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놋뱀을 바라보면 살아난다는 말씀을 믿고 바라봄으로써 살아났듯 골고다 언덕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아임을 믿고 그분을 바라보는 사람은 구원을 얻는다는 말씀입니다. 놋뱀을 바라봄으로써 살아났듯이 믿음으로 예수를 바라보는 자는 영원히 살 수 있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불뱀에 물린 자가 살기 위해 구리뱀을 바라보는 것이나 십자가에 달린 예수라는 사람을 구세주로 고백하는 것은 모두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내가 십자가의 예수를 바라보지 못하고 구세주로 고백하지 못하는 가장 큰 걸림돌은 바로 스스로 정해놓은 어떤 기준 때문입니다. 우리는 각자 나름대로의 잣대로 기준을 삼아 판단하고 평가하며 살아갑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신뢰한다면 자신의 잣대를 포기하고 버려야 합니다. 내 경험, 내 상식, 지식 등 모든 것을 버려야 합니다. 믿음과 신뢰는 비움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슬프거나 기쁘거나 고통과 염려 등 어떤 문제가 있든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여기에 우리 행복과 평화와 구원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구원을 약속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믿고 내 죄로 인해 피 흘리신 분임을 믿으며 내 입으로 고백하는 자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여러분 모두 평강의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살아가는 복된 삶을 누리기를 소망합니다.
김동은 목사(부산용당교회)
365일 설교[ 4월 19일]예수님의 눈물의 의미(눅 19:41-44) |
사람의 눈물은 대부분 ‘슬픔’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때문에 그 ‘눈물’ 앞에서는 대부분 숙연해지게 됩니다.
오늘 저는 예수님이 우신 기사를 통해 그 눈물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 예수님의 눈물은 예수님이 완전한 인성을 가진 분이심을 나타내 줍니다. 본래 ‘우시며’(41절)의 뜻은 슬퍼하여 비통하게 우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이 울었다는 기사는 본문과 요한복음 11장 35절의 나사로의 죽음 사건, 그리고 히브리서 5장 7절의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라는 구절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같은 묘사는 예수님이 하나님이면서 동시에 완전한 사람이셨음을 표현하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의 눈물은 인류의 고난과 죄에 대한 탄식의 눈물입니다. 예수님의 눈물은 예루살렘의 장래에 대해 애통하는 눈물이며 그것은 하나님의 눈물이고 사랑의 눈물입니다. 나아가 이 눈물은 예루살렘에만 국한된 것이 아닌 인류가 당하고 있는 보편적 고난과 죄에 대한 애통의 눈물이었습니다.
셋째, 예수님의 눈물은 심판의 눈물입니다. 본문 42절부터 44절까지에 언급되어 있는 것처럼 당시 이스라엘이 당하고 있는 고난, 즉 로마로부터의 억압과 압제 뿐만 아니라 종교의 타락, 소수 특권 계급의 착취와 지배 등은 실로 암담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44절의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겠다는 말씀은 결국 건물의 완전한 파괴와 완전한 파멸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길을 걷지 아니하는 사람과 도시와 민족에 대하여 심판이 있을 것임을 경고해 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종말의 경고를 믿지 않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경고의 말씀을 믿지 않는 자들은 모두 동일한 심판을 당한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눈물은 예수님이 연약한 인간으로 오셨음을 나타내는 것이요, 인류의 죄와 고난에 대한 애통과 사랑의 눈물이었으며, 종말을 경고하는 심판의 눈물이었습니다. 오늘을 사는 저와 여러분은 종말에 대한 주님의 경고에 귀 기울여 항상 깨어 있어야 할 것입니다
365일 설교[ 4월 20일]승리하는 삶의 비결(수 7:2-26) |
본문은 가나안 제일의 철옹성인 여리고를 쉽게 점령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와는 비교도 되지 않게 쉬운 아이 성 전투에서 실패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 이 사건을 통해 우리가 세상에서 실패하는 원인을 규명해 봄으로써 날마다 승리하는 삶을 사는 비결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승리하는 삶의 첫번째 비결은 야웨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믿음으로 나갔을 때 철옹성인 여리고를 점령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적인 계산으로 자만한 채 나간 아이 성 전투에서는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성경은 우리의 이김이 군대의 수의 많고 적음에 있지 않고 오직 야웨를 믿는 믿음에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 문제가 생겼을 때 인간적인 생각으로 자만하거나 판단하지 말고 오직 야웨를 믿는 믿음으로 나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승리하는 삶의 두번째 비결은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항상 기억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여리고 성을 정복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은혜를 잊어버리고 교만한 마음으로 아이 성 전투에 나갔다가 패배했던 것을 우리는 늘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성도들 중에도 과거에는 뜨겁게 기도하고 은사도 체험하고 열심히 봉사하던 자들이 지금은 작은 일에도 쉽게 낙심하고 쓰러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어제의 신앙에만 만족하여 오늘의 신앙을 소홀히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승리하는 삶의 비결은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이 성 전투에서 패배한 결정적인 원인은 ‘아간의 불순종’ 때문이었습니다. 아간은 여리고 성을 멸할 때 탐욕에 눈이 어두워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했습니다. 우리의 재능, 생명, 가족, 재산 모두가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내 것인 양 마음대로 주장하거나 하나님께 구별하여 드릴 줄 모른다면 아간과 동일한 불순종의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교만하며 불순종하면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과 겸손과 순종으로 살아가는 자에게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주님께서 승리의 삶을 보장해 주십니다
365일 설교[ 4월 21일]하나님 중심의 삶(수 8:30-35) |
본문은 이스라엘이 전쟁중임에도 불구하고 전쟁과 전혀 무관해 보이는 예식을 행했음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놀라운 진리가 숨어 있습니다.
오늘은 그들이 행한 예식을 통하여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그들은 먼저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본문은 여호수아가 전쟁의 와중에서 ‘철 연장으로 다듬지 않은 돌’로 단을 쌓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31절). 이것은 인공적인 아름다움에 치우치지 않고 오직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 경건하게 예배를 드렸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상황이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오히려 더 열심히 예배를 드렸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도 바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지속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단’ 위에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친교와 헌신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것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쟁에서의 승리가 자신들의 용맹이나 전략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임을 고백한 것입니다. 감사하는 생활이야말로 우리의 모든 것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여기는 성숙한 신앙의 표현입니다. 삶의 모든 영광을 자신이 차지하지 않고 하나님께 돌릴 때 날마다 새로운 감사가 넘치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조용히 들었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34,35절). 정보의 홍수 속에 사는 현대인들은 정말 중요한 정보인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을 소홀히 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점점 멀어져 갑니다. 우리의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음성에 민감해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야말로 어둡고 혼탁한 사회 속에 사는 우리들에게 유일한 등불이 되기 때문입니다(시 119:105).
이스라엘의 승리가 인간의 전략에 있지 않았던 것처럼 우리 인생의 승리도 인간적 수단과 방법에 있지 않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인생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뢰하고 그 은혜에 항상 감사하며 그의 말씀에 늘 민감해야 하는 것입니다
365일 설교[ 4월 22일]하나님께서 명하신 전쟁에 임하는 자세 |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전쟁을 명하신 이유는 가나안 족속들의 죄악이 극에 달했기 때문입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통하여 가나안 민족의 죄악을 징벌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전쟁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단의 나라와 대적하여 싸우는 영적 전쟁입니다. 이 때 우리는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까요?
첫째, 우리는 두려움이 없어야 합니다(8절). 왜냐하면 우리의 대장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이미 사단의 모든 권세를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아직 최후의 심판을 앞두고 있으므로 우리에게 여전히 영적 전쟁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안에서 이미 이김을 얻었으므로 두려움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앞서 9장에서 이스라엘 족속은 기브온 족속과 화친의 약조를 맺는 실수를 범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담대함을 명하셨습니다. 우리는 과거의 실수에 연연하지 말고 신속히 회개한 후에 담대히 마귀를 대적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주님께서 그들을 우리 손에 붙이시며 우리를 당할 자가 없게 하실 것입니다.
둘째, 해가 지도록 싸울 때 하나님께서 기적을 베풀어 우리를 도우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태양을 멈추게 하심으로 여호수아의 군대를 도우셨습니다(12,13절). 그러므로 여러분이 지금 맡은 사역지에서 해가 지도록 최선을 다해 열심히 일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마치 시간이 늘어나는 것처럼 우리에게 놀라운 승리의 역사를 안겨 줄 것입니다. 또한 그렇게 되도록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 주실 것입니다.
셋째, 다섯 왕을 진멸시켰습니다(24-26절). 죄와는 타협이 있을 수 없습니다. 마귀의 권세에는 긍휼이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주위에 있는 죄의 모든 뿌리를 진멸시켜야 합니다. 악은 그 모양이라도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적 전쟁을 명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부여잡고 성령님의 능력을 힘입어 담대하게 나아가 승리를 쟁취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365일 설교[ 4월 23일]가나안은 침노하는 것(수 11:1-15) |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의 북부 지방을 정복하는 장면입니다. 구약의 가나안은 신약의 하나님 나라를 예표합니다. 곧 하나님이 언약의 백성들에게 주신 기업이요, 축복의 땅입니다. 이제 여호수아가 어떻게 그 땅을 차지했는지 살펴봄으로 교훈을 얻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가나안은 싸워서 얻는 것입니다. 가나안 왕들이 싸우러 나와서 진쳤다고 했습니다(5절). 하나님이 약속의 땅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셨지만 그것은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가나안 족속들과 싸워서 쟁취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싸움은 영적 싸움입니다. 마귀는 날마다 무장하고 우리와 싸우러 나옵니다. 마귀와의 영적 싸움을 이기기 전에는 가나안 복지, 하나님 나라를 소유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침노하여 차지하라고 우리에게 명하셨습니다(마 11:12).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마귀의 권세를 정복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싸워야 할 가나안 마귀의 권세는 무엇입니까? 나태함입니까? 아니면 세속주의입니까? 그것과 싸워 이길 때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둘째, 전쟁은 야웨께 속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싸우러 나오는 가나안 족속을 ‘내가 몰살시키겠다’(6절)고 선언하셨습니다. 우리는 어느 한 순간이라도 자신의 힘으로 이길 수 있다고 자만해서는 안 됩니다. 적을 정복하여 승리를 주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전쟁을 싸우되 우리의 대장은 예수님이심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모든 악한 마귀의 권세와 대적할 때에 “예수 이름”으로 원수 마귀의 진을 훼파해야 합니다.
셋째, 여호수아와 그의 군대는 야웨께서 모세를 통해 명하신 대로 모두 행하였습니다(15절). 이와 같이 우리도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들을 준행함으로써 천국을 침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신 가나안을 침노하여 차지했듯이, 주님이 주신 천국도 우리가 싸워 차지해야 함을 명심하여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오늘 하루도 승리하는 하루가 되시기 바랍니다
365일 설교[ 4월 24일]가나안의 땅 분배(수 13:1-21) |
본문은 하나님께서 노쇠해진 여호수아에게 가나안 복지의 경계를 상기시키시며 그 땅을 이스라엘 열두 지파에게 골고루 분배할 것을 명하시는 내용입니다.
여기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몇 가지 교훈을 살펴봅시다.
첫째,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분배해 주셨다는 사실입니다(6절). 열두 지파가 골고루 모두 차지할 수 있도록 나누어 주신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자에게 분량대로 은사와 직분을 골고루 나누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교회에 쓸모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백성에게 예외없이 기업을 나누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받은 은사와 직분을 따라 맡겨 주신 일에 충성되이 임하면 되는 것입니다. 또한 다른 사람의 기업도 인정해야 하며 그들이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고 활동하는 것을 도와 주고 협력해야 합니다.
둘째, 이스라엘 백성들이 적을 쫓아내지 아니한 땅이 있었기 때문에 어려움을 당했다는 사실입니다(13절). 이들은 뒤이은 사사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끊임없이 괴롭히는 쓴 뿌리가 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정복하여 쫓아내지 못한 죄가 있으면 그것은 쓴뿌리가 되어 끝까지 우리를 괴롭힙니다. 우리가 좋아하고 즐기던 그것이 도리어 채찍이 되어 우리를 때리고, 불의한 마음으로 아끼고 사랑하던 사람이 도리어 가시가 되어 우리의 옆구리를 찌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귀의 세력을 단호히 물리쳐야 합니다.
셋째, 레위 지파는 기업을 분배받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대신에 화제물로 그들의 양식이 되게 하셨습니다(14절). 열두 지파는 레위 지파를 책임질 의무가 있었습니다. 현대의 레위 지파는 교회의 사역자들입니다. 우리는 교회의 사역자들이 주의 일을 수행하는 데 지장이 없도록 그들의 생활을 책임져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주의 종은 오직 하나님만으로 기업을 삼아야 할 것입니다(민 18:20).
하나님께서는 열두 지파가 골고루 가나안에서 기업을 나누기를 원하셨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교회의 식구들이 모두 다 하나님의 사명을 잘 감당하도록 돌아보고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365일 설교[ 4월 25일]감사 제사의 위력(시 69:30,31) |
감사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가장 귀한 마음으로, 창조적인 능력이 있으며 어떤 제사보다도 하나님을 더욱 기쁘시게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감사를 통해 나타나는 위대한 능력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우리는 환난과 고통 중에서도 감사해야 합니다. 사철 푸른 나무는 눈서리 내리는 한 겨울에 더욱 그 푸른 기상이 돋보이듯이 우리는 기쁠 때는 물론이요, 극한 환난과 고통 중에서도 변함없이 하나님께 감사드릴 때 우리의 신앙이 더욱 견고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감사의 제사를 드리는 우리를 고난에서 반드시 건져내시고 기적으로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둘째, 우리는 평범한 생활 중에서도 감사해야 합니다. 사실 평범한 것 같은 우리의 삶을 자세히 살펴보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크고 작은 은총 속에 유지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노래는 부를 때까지 노래가 아니며, 사랑은 표현할 때까지 사랑이 아니고, 축복은 감사할 때까지 축복이 아니다.’라는 말처럼 우리가 평범한 삶 속에서 늘 감사를 잊지 않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 삶을 더욱 풍성하고 아름답게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셋째, 감사하는 사람은 적극적이고 생명이 넘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죄짓고 버림받아 멸망받아야 마땅할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영원한 천국에 들어갈 소망을 얻었으니 더욱 감사하지 않습니까? 또한 모태에서 적신(赤身)으로 태어난 우리를 돌보아 주시고, 사랑하는 가족을 주시며,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을 주셨으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반드시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는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가야 합니다.
성도에게 있어서의 감사는 믿음의 확인이며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적극적인 응답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은 ‘감사하는 생활’바로 그 자체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우리에게 하늘의 신령한 복과 땅의 기름진 복으로 넘치게 채워 주실 것입니다
365일 설교[ 4월 26일]베드로의 부인(눅 22:54-62) |
본문은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베드로가 보여 준 인간적인 연약함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주와 함께 죽는 데도 같이 가겠다고 호언 장담했으나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우리도 우리의 연약한 모습을 가지고 예수님을 따를 때가 있습니다. 베드로의 모습을 통해 우리의 신앙을 점검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첫째, 베드로는 예수님을 멀찍이 따라갔습니다(54절). 예수님께서 잡히셔서 끌려가실 때 다른 제자들은 다 도망가 버렸으나 베드로는 예수님을 멀찍이 따라갔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 대한 베드로의 불분명한 태도를 나타내 주는 것입니다. 이처럼 오늘날도 우리가 실제적인 삶에서 예수님과 동떨어진 생활을 할 때 우리는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뜨거운 신앙의 열정을 가지고 주님의 뒤를 따르는 신앙인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둘째, 베드로는 뜰 가운데 불을 피운 사람들과 함께 앉았습니다(55절). 이는 성도가 세상과 타협하는 모습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성도를 타락의 길로 들어서게 하여 급기야 비참한 결과를 가져오게 합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살기 때문에 죄악과 접할 수밖에 없지만 그럴 때일수록 우리는 우리의 삶을 통해 그리스도의 향기를 나타내며 이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하겠습니다.
셋째,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였습니다(56-62절). 두 사람이 베드로를 예수님과 함께 있던 자라고 고발했을 때 베드로는 그 말에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는 연약함을 보였습니다. 한때 그는 주님 앞에서 담대한 신앙 고백을 했었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을 잡으러 온 말고의 귀를 잘랐습니다. 뿐만 아니라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물 위를 걸었던 유일한 제자였습니다. 하지만 베드로가 불분명한 신앙적 태도를 가지고 불신자와 어울릴 때에는 실족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베드로의 연약한 모습을 상기하여 우리의 신앙 상태를 점검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이 순간 어떻게 주님께 충성해야 할지를 생각하고 기도하여 진정한 제자의 길을 가야 하겠습니다
365일 설교[ 4월 27일]두 종류의 눈(눅 23:43) |
예수님께서 양손과 양발이 대못으로 박히시고 십자가에 높이 달리셨을 때, 예수님 왼편과 오른편에 행악자 두 사람이 십자가에 못박혀 피를 흘리며 함께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 두 행악자는 십자가 위에서 고난당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중 한 강도는 고난당하시는 예수님을 볼 때 단지 십자가에 못박혀 비참하게 죽어가는 예수님의 외형적인 모습밖에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자기도 고통을 받고 있으면서도 분노하여 외치기를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39절)고 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잘못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 강도는 옆의 강도와 달랐습니다. 그는 십자가에 달려서 고난당하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지신 구주이심을 알았습니다. 그는 고난당하시는 예수님의 내면적인 모습을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예수님을 잘못 보고 욕하던 옆의 강도를 꾸짖었습니다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40,41절). 그리고 주님을 바라보며,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42절)라고 하면서 주님께 자기의 영혼을 부탁했습니다.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쏟으시면서 고통을 받고 계시던 주님께서는 이 고백을 들으시고,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43절)고 하셨습니다.
두 강도가 똑같이 예수님을 바라보았으나 그들이 보는 방향에 따라 한 사람은 버림을 받고 한 사람은 구원을 얻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느냐 하는 것은 우리의 자유이지만 그 결과는 엄청난 차이를 가져옵니다. 천국과 지옥, 영생과 영멸의 차이가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모습을 올바로 바라볼 수 있게 해 주신 성령님께 감사를 드리며, 더 나아가 예수님의 모습을 잘못된 방향에서 보고 있는 이들에게 올바로 볼 수 있도록 인도해야 하겠습니다
365일 설교[ 4월 28일]마음의 휘장을 찢으라(눅 23:44-46) |
구약 시대의 성전은 성전 뜰과 성소와 지성소로 구분되어 있었습니다. 제사장들은 성소에 들어가 수종들었으나 두꺼운 휘장이 쳐 있었던 지성소에는 오직 대제사장만이 1년에 한 차례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희한한 일이 생겼습니다.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시는 순간 예루살렘 성전의 성소와 지성소를 막고 있던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찢어지고 성소와 지성소는 한 통로가 되어버리고 말았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으로 말미암아 그 동안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막고 있던 죄의 담이 무너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 지성소에 계신 하나님께서는 성소를 통해서 걸어 나오셔서 우리 마음 가운데 성령으로 임하시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우리를 도와 주시기 위해서 손을 내밀고 초청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초청에 응답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마음의 부정적인 의식의 휘장을 찢어야 합니다. 먼저 죄의식의 휘장을 찢어야 합니다. 회개를 통해 죄를 찢어내고 의롭게 된 마음속에 영롱한 꿈을 그려야 합니다. 또한 질병의 휘장을 찢어야 합니다. 질병 의식, 연약 의식을 찢어서 벗어 던지고 “예수님이 채찍에 맞음으로 나는 나음을 입었다”고 외치며 건강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또한 저주와 가난의 휘장을 찢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아브라함의 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저주와 낭패 의식을 버리고 축복과 성공 의식을 가져야 됩니다. 마지막으로 죽음과 절망의 공포 의식의 휘장을 찢어야 합니다.
우리는 영생을 얻은 자요, 천국을 상속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러므로 영생 천국의 의식을 항상 마음속에 영롱하게 가져야 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부정적인 의식의 휘장을 예수 이름으로 찢어버리고 긍정적이고 창조적이며 생산적이고 적극적인 의식의 변화를 가질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과 동행하여 새로운 삶의 위대한 승리를 창조할 수 있는 것입니다
365일 설교[ 4월 29일]은혜의 땅을 소유하려면(수 23:6-11) |
본문에는 여호수아가 임종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한 유언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수아의 유언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의 대적을 멸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예비하신 은혜의 땅을 차지하는 비결을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 “너희는 크게 힘써 모세의 율법책에 기록된 것을 다 지켜 행하라 그것을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6절)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의 계명을 지켜 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 14장 15절에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기 위해서는 그 말씀을 우리의 입술과 마음에 두어야 합니다. 신명기 30장 14절에는 “오직 그 말씀이 네게 심히 가까와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둘째, “너희 중에 남아 있는 이 나라들 중에 가지 말라 그 신들의 이름을 부르지 말라 …또 그것을 섬겨서 그것에게 절하지 말라.”(7절)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이방 신은 바로 탐심입니다. 성경은 탐심이 곧 우상 숭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골 3:5). 히브리서 13장 5절에도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마음속에 탐심의 우상이 자리잡지 않도록 늘 마음을 점검해야 합니다. 만일 마음속에 탐심이 생기면 예수 이름으로 물리쳐야 합니다.
셋째, “오직 너희 하나님 야웨를 친근히 하기를 오늘날까지 행한 것같이 하라.”(8절)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야웨를 친근히 한다는 것은 그를 기뻐하고(느 8:10), 그를 의지하며(시 71:5), 그에게 헌신하는 것(롬 12:1)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이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싸워 주심으로 우리의 모든 대적들을 우리 앞에서 쫓아내시고, 우리로 하여금 그가 주신 아름다운 땅에서 영원히 살게 하실 것입니다
365일 설교[ 4월 30일]율법, 그리고 은혜와 진리(요 1:17) |
본문의 말씀은 우리가 어떻게 하면 성공적인 신앙 생활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명료하게 계시해 주고 있습니다.
먼저 율법이 왜 주어졌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율법은 정의로우시고 지극히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죄인인 사람과 교제하시기 위해서 주신 최소한의 규범입니다. 사람은 이 율법을 지켜야만 하나님과의 교제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힘으로는 이 율법을 지킬 수 없었습니다. 로마서 3장 23절에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직 율법은 사람들의 죄를 지적하고 비추는 거울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이제 사람들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데 실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실패한 인간에게 또 하나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 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율법을 지키지 못하여 절망에 빠져 영원한 형벌을 기다리던 죄인들을 찾아오신 예수님은 인류의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값을 청산하시고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 부활을 통해서 죄인들에게 주어진 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이제는 율법을 지킴으로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은혜는 우리를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으며 그 은혜를 받으면 사랑과 평안과 감사가 강물같이 넘쳐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진리이시기에 우리를 거짓으로부터 지켜 주십니다.
아담은 거짓의 아비인 마귀의 꾐을 받아 진리를 버리고 거짓을 좇았습니다. 마귀는 오늘날도 인본주의, 세속주의, 쾌락주의, 황금 만능주의, 허무주의라는 거짓을 지어 사람들을 절망 속에 헤매이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거짓을 진리로 물리치신 유일한 분이시며 우리 삶의 진정한 이치가 되십니다. 또한 예수님은 참된 진리요, 생명으로 인도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항상 율법에 비추어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와 진리를 받아들일 때 늘 성공적인 신앙 생활을 보장받게 될 것입니다
출처 : RED COMPASS 선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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