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δεδομένα 18,185편 ◑/उपदेश सामग्री 16,731편

365설교 5월1일~31일

by 【고동엽】 2022. 12. 3.
365일 설교 5월1일~31일     {목록 돌아가기}
 
365일 설교[ 5월 1일]하나님께서 열국을 남겨 두신 이유(삿 3:1-4)      4169E1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기업으로 주신 가나안에는 열국이 남아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그들을 진멸시키지 않고 남겨 두셨을까요?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열국을 남겨 두신 이유를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전쟁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을 강하게 훈련시키시기 위함이었습니다(2절).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강한 야웨 신앙을 소유하여 어떠한 이방 신에게도 미혹되지 않고 하나님만을 섬기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하나님께서는 우리 주변의 여러 가지 문제들을 통해서 우리를 훈련시키심으로우리의 신앙이 환경에 좌우되지 않는 강건한 신앙으로 성숙되도록 역사하고 계십니다. 때때로 문제를 만나 고난을 당할 때가 있는데 이 고난은 새로운 삶을 창조하는 계기요, 인격 변화의 원동력이며, 강인한 인격을 만들어 주는 동기이고, 하나님의 축복을 감사케 하는 힘이 되는 것입니다.

  둘째,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청종하는지 알아보시기 위함이었습니다(4절). 하나님께서 이를 알아보시려는 의도는 무엇이었을까요? 신명기 8장 15절과 16절에는 “너를 인도하여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간조한 땅을 지나게 하셨으며 또 너를 위하여 물을 굳은 반석에서 내셨으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열국을 사용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의 청종 여부를 시험하신 것은 마침내 그들에게 복을 주시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하나님께서 가정의 문제, 사업의 문제, 직장의 문제, 결혼의 문제, 학업의 문제, 대인 관계의 문제 등을 통해 우리를 시험하시고 연단하시는 이유는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환경이나 주변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시험하시고 연단하실 때마다 굳센 믿음과 기도로 인내하면 마침내 우리는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365일 설교[ 5월 2일]변화시키시는 예수님 (요 2:1-11)
 

우리 인생이란 항상 모자라고 부족한 것을 채우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과정이기에 이 땅에 사는 동안에는 항상 문제가 있기 마련입니다.

  한 번은 예수님께서 가나의 혼인 잔치에 초청을 받아 잔치에 참석하시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연회가 한창 무르익어 갈 때 그만 포도주가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 때 그 자리에 함께하셨던 예수님께서 포도주가 떨어진 문제를 해결해 주심으로 이들 신혼 부부가 복되고 아름다운 가정으로 출발할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우리의 구주가 되실 뿐 아니라 위대한 문제의 해결자가 되십니다. 이러한 예수님께서 우리 인생에 오셔서 함께하시면 어떤 변화가 일어날까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시면 첫물과 끝물을 다르게 만들지 않습니다. 인생의 처음 출발이 좋았으면 끝까지 좋게 만들어 주시는 것이 주님의 역사입니다. 또한 예수님을 믿어 성령으로 변화된 사람은 포도주처럼 향기롭게 됩니다.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와 같은 성령의 귀한 열매를 맺게 되므로 인격의 향기를 날리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변화된 인격은 많은 사람들을 기쁘게 하며 그들의 삶을 윤택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오시면 이성과 도덕적 감각에 조금도 변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취하게 만드셔서 마음속의 염려와 근심에서 벗어나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물과 같은 우리의 인생이 예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포도주와 같은 인생으로 변화될 때,우리는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케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가 됩니다. 이로 인해 우리의 삶이 긍정적이 되고 소망을 얻게 되며 평강을 얻게 되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형통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좋으신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갈보리 십자가를 통해 축복을 예비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날도 마음 문을 활짝 열고 예수님을 초청하는 우리들의 문제 가운데 오셔서 놀라운 능력을 나타내십니다. 그리하여 물과 같던 우리의 인생이 포도주와 같이 변화되는 축복의 역사를 베풀어 주십니다

 

 

365일 설교[ 5월 3일]거듭난 삶(요 3:1-5)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인으로서 교회에 모이고 있는데 그들 모두가 거듭난 사람들일까요? 거듭남이란 무엇을 의미하며, 거듭나면 어떤 변화가 일어날까요?

  예수님께서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물은 말씀과 세례를 의미하고, 성령은 우리 가운데 변화의 역사를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영을 말합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이 때 성령님께서 오셔서 회개하게 해 주시고 믿음을 주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영접함으로 구원에 이르게 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았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장사지낸 바 되었다가 새로이 태어나는 획기적인 내적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을 말합니다. 물로 세례를 받는 것은 이러한 내면적인 거대한 변화를 외적으로 표시하는 의식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의 능력으로 거듭나면 우리의 존재적인 신분에 변화가 다가옵니다. 그래서 죄의 권세에서 해방되어 의의 나라로 옮겨지며, 마귀의 종 노릇하던 삶에서 하나님의 사랑의 아들 나라로 옮겨집니다. 육신의 정욕과 세상의 낙을 좇던 삶이 성령의 인도를 받아 하나님을 섬기고 그의 뜻을 추구하는 삶으로 옮겨지며, 이 세상과 함께 멸망받을 인생이 천국의 영광과 영생을 얻는 인생으로 옮겨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변화된 우리의 실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젠 고아와 같이 버림받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에는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늘과 땅과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을 지으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변화요 축복입니까?

  우리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났다는 사실은 온 천하를 다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보배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분명히 알고 늘 기뻐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365일 설교[ 5월 4일]이런 사람이 되자(삿 9:8-15)
 

우리가 우리 자신을 살펴보면 우리의 인격 안에는 쓸모 있는 부분과 쓸모 없는 부분이 공존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데, 오늘 본문을 보면 이에 대한 좋은 비유가 나와 있습니다.

  첫째, 우리는 감람나무와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원래 감람나무는 박토에서도 잘 자라고 해를 거듭할수록 열매를 많이 맺는 특성을 지닌 나무입니다. 우리는 감람나무와 같이 아무리 어려운 환경에 부딪치더라도 꿋꿋하게 믿음을 지키며 해를 거듭할수록 신앙의 아름다운 열매를 많이 맺어가야 하겠습니다. 또한 감람나무에서 나는 올리브 기름이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하듯이 우리도 이 세상에 살면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나타내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둘째, 우리는 무화과나무 같은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무화과나무는 잎이 무성해서 사람들에게 시원한 그늘을 제공해 주고 속으로만 꽃을 피워 열매를 맺기 때문에 그 화려함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습니다. 우리는 무화과나무와 같이 상처입은 이웃의 그늘이 되어 주고 자기를 겸손하게 낮추며 예수님만 자랑해야 합니다. 또한 무화과 열매가 사람들에게 좋은 양식을 제공해 주듯이 우리는 이웃에게 하나님의 말씀의 양식을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셋째, 우리는 포도나무와 같은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포도는 자기를 깨뜨려서 단물을 내고 술을 내는 식물입니다. 예수님은 몸 찢고 피 흘려 우리의 구원의 단물이 되셨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주 앞에서 깨어져 단물을 내면 그 단물을 통해 사람들은 기쁨을 얻게 되고 그에 따라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넷째, 가시나무에 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가시나무는 재목으로 말하자면 땔감으로도 쓸 수 없는 나무입니다. 원래 가시란 반역과 저주와 황폐와 고통을 뜻합니다. 가시나무와 같은 사람은 이웃을 파멸시키고 맙니다. 혹시라도 우리 안에 가시나무와 같은 인격적 요소가 도사리고 있다면 이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반드시 제거해야 합니다.

  우리는 가정과 사회와 교회에서 항상 감람나무와 무화과나무, 그리고 포도나무와 같은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365일 설교[ 5월 5일]목마르지 않는 삶 (요 4:1-15)
 

사마리아에 사는 한 여인은 인생을 행복하게 살아보려는 꿈을 갖고 결혼했으나 다섯 번이나 실패하고 여섯번째 만난 남자와 함께 절망 가운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자마자 그녀의 삶에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어떻게 이런 변화가 일어날 수 있었을까요?

  이 여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성령의 샘물을 마셨기 때문입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과 대화하는 가운데 예수님이 메시아인 것을 알고 그 즉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였습니다. 그러자 이 여인의 심령 속에는 영생하도록 솟아오르는 성령의 샘물이 흘러 들어갔고 이로써 그녀의 마음속에 기쁨이 충만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셔들인다는 것은 한 종교를 갖거나 또는 어떤 의식을 집행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영생토록 솟아나는 생수의 샘물인 성령을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같이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오시면 부인할래야 부인할 수 없는 놀라운 변화가 우리 삶 속에 일어납니다.

  먼저 우리의 영적인 눈이 열리게 됩니다. 이전까지는 정욕을 좇아 감각적이고 물질적인 것에 의지하며 허무감 속에 살았던 자가 성령의 생수를 마시면 영원한 영적인 세계로 눈이 열립니다. 이에 따라 성령 속에서 하나님의 지식과 지혜를 깨닫게 되어 우리 삶 전체에 새로운 세계가 전개됩니다.

  또한 인생을 바라보는 가치관이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부귀, 영화, 공명을 최고의 가치로 알고 살았으나 생수를 마시면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것에 최우선적인 삶의 가치와 목표를 두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는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을 즐거워하고 그리스도로 인한 조롱과 핍박에 오히려 기쁨이 넘쳐납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살려고 노력하기에 자신의 뜻보다 하나님의 뜻을 앞세우게 됩니다.

  혹시 여러분은 사마리아 여인과 같이 허무와 무의미 속에 목마른 인생 길을 걸어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영원한 생수의 근원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 나와 성령의 생수를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삶에 놀라운 변화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365일 설교[ 5월 6일]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면 (삿 13:8-18)
 

본문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원했던 마노아에게 말씀이 임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마노아처럼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데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고 또 그 분명한 뜻을 알 수 있을까요?

  먼저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하는 마음의 자세를 갖추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음성을 사모하는 자에게 들려 주십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아무리 좋은 라디오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듣고 싶은 방송의 주파수에 다이얼을 맞추지 않는다면 어떤 소리도 들을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 마음을 활짝 열어 놓고 그의 말씀을 주의 깊게 듣고자 하는 갈망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데 방해가 되는 불신앙과 정결치 못한 마음을 회개를 통해 씻어내야 합니다.

  마음의 자세를 갖추었으면 그 다음에는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들과 즐겨 대화하시고 교제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의 길을 보이시고 그의 뜻을 드러내시며 우리의 해야 할 바를 가르쳐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 중에 우리에게 음성이 임하면 그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가를 성경 말씀에 비추어 확인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만이 우리의 모든 생각과 말의 지침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속에 떠오르는 생각이나 귀에 들리는 음성이 성경 말씀에 비추어 보아 맞지 않으면 이것을 단호히 거부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마음에 평강이 임하는가를 확인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평강으로 임하기 때문에 마음에 평강이 올 때까지 기도해야 합니다. 평강 가운데 임한 말씀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항상 하나님께 모으고 기도에 힘쓰며 우리에게 향한 하나님의 음성을 성경 말씀을 통하여 듣고자 할 때 비로소 하나님의 음성을 올바로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365일 설교[ 5월 7일]물이 동할 때(요 5:1-9)
 

본문에는 38년 동안 중풍병으로 고생하던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 치료받은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과연 38년 된 병자가 치료와 축복을 체험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또한 우리 삶 속에도 이와 같은 역사가 일어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 마음속에 뜨거운 소원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38년 된 병자에게 가셔서 제일 먼저 “네가 낫고자 하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네 마음속에 간절한 소원이 있느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이 병자의 마음속에는 치료에 대한 뜨거운 소원이 있었습니다(7절). 쇠붙이가 자석에 이끌려가듯이 하나님께서도 뜨거운 소원을 가진 자를 찾으시고 그에게 놀라운 치료와 축복의 역사를 베풀어 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치료와 축복의 역사를 체험하려면 이와 같이 마음속에서부터 뜨거운 소원이 있어야 합니다.

  둘째, 베데스다 연못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당시 베데스다 연못은 제물로 드릴 양과 짐승을 깨끗하고 정결하게 씻는 곳이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대속의 보혈을 흘려 주신 십자가 밑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날마다 은혜의 베데스다 연못인 십자가 밑에 나아가 우리의 죄를 십자가 보혈로 깨끗이 씻음받고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말끔히 씻으시고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어 주십니다.

  셋째, 물이 동할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겨울 파종에 싹이 날 리가 없듯이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지 않고 사람이 아무리 수고한다고 해도 하나님의 역사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때가 오기도 전에 앞서서 뛰거나 또는 하나님의 때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방관하는 자는 실패하고 맙니다.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때를 믿음과 인내로 기다리다가 가장 적절한 때에 주님의 인도를 받아 담대히 나아가는 자에게 하나님의 응답이 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때를 분별할 줄 아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뜨거운 소원을 가지고 십자가 밑에 나아가 죄를 회개하며 믿음과 인내로 하나님의 예비하신 때를 기다릴 때, 우리의 삶에는 놀라운 치료와 축복의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365일 설교[ 5월 8일]밤에 한 노래 (시 77:6)
 

인생을 살면서 고난의 길을 걸어가지 않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신앙을 성숙시켜 주시기 위해 우리로 하여금 절망의 밤을 지나게 하십니다. 이럴 때 우리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요?

  첫째, 하나님께서 과거에 우리를 어떻게 인도하셨나 기억하고 그것을 진술해야 합니다(시 77:10,11).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은 하나님의 신묘 막측한 섭리입니다(고전 2:7). 우리가 절망의 밤을 지날 때 하나님께서 택해 주시고 인도해 주신 그 과거의 섭리들을 하나하나 생각하고 감사하면 우리는 용기와 힘을 얻어 새 날을 향해 출발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기적을 기억하고 기대해야 합니다(시 77:12-14).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사는 한, 기적을 기대한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가 절망의 밤을 지날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기적입니다. 그 옛날 기적을 행하신 하나님께서는 오늘날도 기적을 행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으로서 그 이름으로 기적을 기대하는 사람의 기도를 응답하여 주십니다. 지금 여러분은 어떤 절망의 밤을 지나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기적들을 믿고, “이 하나님께서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지금 나와 함께 계시며 나를 이끌어 주고 계십니다.”라고 시인하십시오. 그럴 때 여러분은 어떠한 환경에도 좌절하지 않는 믿음을 소유하게 될 것입니다.

  셋째, 절망의 밤에 감사 찬양을 해야 합니다(살전 5:18).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아무리 어려운 일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그 일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죽음을 앞에 둔 상황일지라도 감사해야 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비하신 처소로 인도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더욱 성숙한 신앙 생활과 축복된 삶을 누리게 하시기 위하여 절망의 밤을 지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인생의 밤을 지날 때 과거에 함께 하셨던 기억을 되살리며 영원토록 동일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기적을 기대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태도를 취함으로 찬란한 축복의 아침을 체험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365일 설교[ 5월 9일]영의 사람(요 6:1-15)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영적인 존재로 지으시고 그 영이 혼과 더불어 육체 속에 거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영에 속한 사람으로 하나님과 교통함 가운데 살 수도 있고, 혼에 속한 사람으로 인본주의에 서서 이성적이고 과학적으로 살 수도 있으며, 육에 속한 사람으로 감각적이고 정욕적으로 살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바라는 영의 사람이 지니는 특징은 무엇일까요?

  첫째, 영의 사람은 예수님께서 기적을 베푸실 것을 믿습니다. 예수님은 육의 사람이나 혼의 사람과는 함께 일하시지 않습니다. 본문에서도 보면, 안드레는 예수님께서 역사하시면 인간의 불가능이 가능케 됨을 믿었기에 예수님은 이러한 영의 사람 안드레와 함께 일하심으로 오병 이어의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하나님의 기적이 삶 속에 나타날 것을 믿는 영적인 사람만이 기적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 영의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성령의 능력을 의지합니다. 파도를 만난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의지해 실천함으로 바다 위를 걸을 수 있었습니다(마 14:28,29). 우리가 말씀을 의지해 영의 사람이 되고 성령님과의 교제를 통해 그의 위로와 권능을 얻게 되면 이성을 초월한 기적이 일어나 어떠한 역경도 이길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 영의 사람은 믿음의 행진을 계속합니다. 인간은 내면의 소리 즉 육신의 감각, 혼의 이성적 생각, 영의 믿음의 격려 등 내면으로부터 들려오는 소리를 들으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영의 사람은 “약속의 말씀을 믿어라, 눈에는 아무 증거 안 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 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을지라도 믿음의 행진을 계속하라.”는 영의 소리에 귀를 기울입니다. 육신과 혼의 소리를 듣고 중도에 믿음을 포기한 베드로는 물에 빠졌으나(마 14:30) 약속의 말씀을 힘차게 믿고 나간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롬4:18-22). 영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이를 실천하는 사람만이 빛과 소금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 안에서 기적을 기대하고 성령의 권능을 힘입으며 믿음의 행진을 계속하는 영의 사람이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복된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365일 설교[ 5월 10일]생명의 떡 (요 6:35)
 

모든 생물과 인간은 끊임없이 음식물을 먹어야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믿고 거듭난 사람도 영의 양식을 섭취해야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영의 양식은 성경 말씀이며 이 말씀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생명의 떡입니다. 우리가 생명의 떡인 말씀을 받아들일 때 어떠한 역사가 일어날까요?

  첫째, 말씀은 우리에게 믿음을 줍니다. 성경은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믿음의 근거는 바로 그리스도의 말씀에 있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 믿음에 대한 분명한 근거를 갖게 되어 환경에 좌우되지 않고 승리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 말씀은 우리에게 지혜와 지식을 줍니다. 오늘날 인간의 지혜와 지식이 극도로 발달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을 따를 수는 없습니다(고전 1:25). 우리가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을 풍성히 얻게 되어 어디에 가든지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아니하고 위에 있고 아래 있지 아니하며 남에게 꾸어 줄지라도 꾸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거룩한 삶을 살게 합니다. 성경에는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엡 5:26),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다.”(시 119:9)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을 매일같이 읽고 듣고 묵상함으로 영혼을 끊임없이 정결케 할 수 있고, 우리의 행실을 삼가 삶을 경건히 지켜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넷째, 말씀은 우리에게 영생의 소망을 줍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영생의 말씀’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요 6:68).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말씀을 통해 인생의 의미와 가치를 깨닫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말씀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영생을 얻었기 때문에 영원한 천국의 소망 가운데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이 생명의 양식이 되는 말씀을 날마다 읽고 묵상함으로 믿음과 지혜 그리고 성결과 영생의 소망 가운데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365일 설교[ 5월 11일]룻의 신앙을 본받자(룻 1:16)
 

룻은 예수님의 족보에 기록된 여인입니다. 성경의 명칭으로도 불리게 된 이 여인이 이방인이요, 과부로서 어떻게 예수님의 조상이 될 수 있었을까요? 그 이유를 룻의 신앙을 통해 알아보겠습니다.

  첫째, 룻은 하나님 제일주의의 신앙을 가진 여인이었습니다. 룻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자기 하나님으로 모시려고 조국마저 버리고 그의 시어머니인 나오미와 함께 유다로 갔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버리고라도 주님을 따르는 이와 같은 신앙이 하나님 제일주의의 신앙입니다. 마가복음 10장 29절에서 30절에는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둘째, 룻은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는 여인이었습니다. 나오미는 룻의 헌신적인 효성을 받으면서 그녀에게 좋은 남편이 있기를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나오미로부터 보아스가 가까운 친족이며 자기의 남편이 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들은 룻은 그녀가 지극히 공경했던 하나님을 섬기는 시어머니 나오미가 시키는 대로 순종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조용히 기다렸습니다(룻 3:18).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을 때 인간의 도리와 노력을 충실히 하면서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셋째, 이방 여인 룻의 결혼은 우리에게 귀중한 영적 교훈을 줍니다. 하나님께서 메시아 의 선조로 이방 여인 룻과 보아스의 가정을 택하신 것은 장차 오실 예수님이 유대인에게만 한정된 메시아가 아니라 이방인의 구원자도 되심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것입니다. 나아가 룻은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신부가 될 그리스도인들을 상징하고 보아스는 신랑되신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오늘날 우리도 룻과 같은 이방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그 구원의 반열에 들어서게 된 것입니다.

  우리도 룻과 같이 하나님 제일주의의 신앙, 성실히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는 신앙을 본받아 이웃과 하나님 앞에 칭찬받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365일 설교[ 5월 12일]하나님의 뜻을 아는 방법(요 7:17,18)
 

우리가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합니다.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면 하나님의 뜻대로 행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을까요?

  첫째, 무슨 일을 결정하기 전에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인지에 관해 살펴보아야 합니다. 즉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결정인지 또는 내 욕심을 위한 결정인지 점검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마 6:33).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할 때 이것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결정이 됩니다.

  둘째, 무슨 일을 결정하기 전에 그것이 내 이웃에게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고 많은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는 일인지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마귀의 역사는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역사는 생명을 얻게 하되 더 풍성하게 얻도록 하는 것입니다.

  셋째, 기도하면서 마음속에 뜨거운 소원이 일어나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뜨거운 소원을 갖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행하게 하십니다(빌 2:13). 만일 우리가 기도할 때 심령 깊은 곳에서부터 소원이 생기지 않는다면 그것이 과연 하나님의 뜻인지 다시 한 번 점검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넷째, 무엇을 하고자 하는 생각과 소원이 성경 말씀과 일치하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이것이 말씀에 일치한다면 하나님의 뜻이지만 말씀에 어긋난다면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다섯째, 기도한 다음 마음이 평안한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평강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이면 하나님의 평강이 임하게 됩니다. 만일 우리 마음이 평안하면 출발하라는 하나님의 신호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위의 다섯 가지 질문에 어느 한 가지라도 “아니오”라는 대답이 나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므로 포기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고 행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자원이 되어 주십니다. 우리가 이와 같은 기준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바로 분별하여 행할 때 승리하는 삶을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365일 설교[ 5월 13일]뱃속의 신앙(요 7:38)
 

오늘날은 두뇌 경쟁 시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두뇌로만 되지는 않습니다. 신앙은 성령으로 시작해서 성령으로 완성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은 두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뱃속에서 넘쳐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뱃속에서 넘쳐 나오는 신앙을 소유할 수 있을까요? 그 비결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첫째, 자아 중심의 생활에서 하나님 중심의 생활로 전환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의지 앞에서 우리의 감정과 이성과 의지를 온전히 굴복시켜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점령하셔야만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의 뱃속에서 강물같이 넘쳐 흐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평소에 하나님의 말씀을 충분히 공부해야 합니다. 말씀이 있는 곳에 하나님께서 거하시고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합니다. 우리는 말씀을 눈에서 떠나지 말게 해야 합니다. 믿음의 눈을 가지고 믿음이 현실화 되어서 그리스도의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모습을 꿈꾸며 바라보아야 합니다. 말씀 충만이 없는 신앙은 뱃속의 신앙이 될 수 없습니다.

  셋째, 보혜사 성령님과 올바른 관계를 유지해야만 합니다. 성부 하나님께서도, 성자 예수님도 성령을 통해서 역사하시기 때문에 성령과의 교통이 항상 있어야만 합니다. 성령과 함께 교제하면서 성령과 함께 인생 동업을 하면 성령께서 우리의 뱃속에서 생수의 강으로 넘쳐 나오게 됩니다.

  넷째, 불퇴전의 기도로 마귀의 장벽을 무너뜨려야 합니다.우리의 머릿속의 신앙이 뱃속의 신앙으로 변화될 때까지 그리고 이론적인 신앙이 창조적이고 체험적인 신앙으로 변화될 때까지 불퇴전의 기도로 밀고 나가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뱃속의 신앙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자아 중심의 생활에서 하나님 중심의 생활로 바뀌고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성령님과 올바른 관계를 유지하고 불퇴전의 기도를 할 때 우리의 머릿속의 신앙은 뱃속의 신앙으로 바뀌어지게 됩니다. 우리가 뱃속의 믿음을 가지면 동남풍이 불고 서북풍이 불어와도 요동치 않고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한 삶의 축복을 누리며 성공적인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365일 설교[ 5월 14일]그리스도인의 삶(요 8:1-11)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가장 귀중하게 여기십니다. 본문에서와 같이 예수님께서는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용서하시고 구원해 주셨습니다.

  이 기사를 통해서 예수님은 우리가 어떠한 안목을 가지고 사람을 대해야 하는지 교훈하시고 있습니다.

  첫째, 이해의 안목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가정 생활이나 사회 생활의 기준을 율법에 두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율법적인 사람은 언제나 사람들에게 의무를 부과하고, 착오가 있을 때는 무섭게 심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와 같은 율법적인 안목을 버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허물 많은 인간을 있는 그대로 받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웃의 허물을 이해하고 용서하고 감싸 주어야 합니다.

  둘째, 긍휼의 안목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긍휼의 눈으로 우리를 보시지 않는다면 살아남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긍휼은 허물을 덮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그 크신 긍휼로써 간음한 여인의 허물을 덮으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인류의 허물을 사해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심으로 우리의 죄의 대가를 대신 지불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긍휼의 안목으로 사람들을 보아야 합니다.

  셋째, 사랑의 안목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긍휼이 상대방을 불쌍히 보는 것이라면 사랑은 적극적으로 상대방을 돕는 것입니다.부부간에도 서로 사랑한다면 어떠한 어려움이 닥쳐와도 서로 도움으로 능히 이겨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사랑의 눈으로 상대방을 보는 것은 극한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 진정한 기쁨과 승리가 있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죄는 미워하셨지만 죄인은 사랑하셨습니다. 그 때문에 간음한 여인을 용서하시며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인은 대인 관계에 있어서 율법의 안목으로서가 아닌 이해와 긍휼과 사랑의 안목으로 사람들을 대함으로써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365일 설교[ 5월 15일]기도의 능력(삼상 7:5-11)
 

사무엘은 기도의 선지자였습니다. 블레셋 족속이 이스라엘을 치러 왔을 때 사무엘이 하나님께 번제를 드리고 간절히 기도하자 하나님께서는 큰 우박을 내려 블레셋 군대를 패하게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기도하면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데, 그러면 우리가 기도할 때 구체적으로 어떤 능력이 나타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우리 자신의 개혁이 일어납니다. 사람은 때로 마음 깊은 곳에 감추어진 죄로 인해 인격적인 결함을 나타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나오면 성령께서 감추인 부분을 드러나게 해 주십니다. 그 때 그것을 자복하고 통회하면 성령의 새롭게 하시는 역사를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에스겔 18장 31절에는 “너희는 범한 모든 죄악을 버리고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할지어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 영적인 승리를 얻게 됩니다. 마귀는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칫 잘못하면 악한 마귀의 올무에 빠질 수 있습니다(마 26:41). 그러나 깨어서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통하여 우리로 하여금 마귀와 마귀의 시험을 능히 이길 수 있게 하십니다.

  셋째, 하나님의 평안이 임하게 됩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다 보면 우리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문제들이 끊임없이 다가옵니다. 이런 무거운 짐들을 자신의 힘으로 해결하려고 할 때 좌절하고 낙망하게 됩니다. 그러나기도로 모든 짐을 하나님께 맡기면 평안이 강같이 흐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임하는 하나님의 평안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짐을 대신 맡아 책임져 주시겠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넷째,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그 뜻대로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크고 놀라운 역사를 베풀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예레미야 33장 3절에는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기도를 통해 우리 자신은 변화되며 영적인 승리와 평강을 얻고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체험하게 됩니다

 

 

365일 설교[ 5월 16일]참자유에 대한 가르침(요 8:31-36)
 

사람들은 자연적인 환경 조건이나 사회 질서, 제도에서 해방되면 참된 행복과 자유를 누린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요? 본문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참자유를 얻을 수 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될 때 어떤 것들로부터 자유함을 얻을 수 있을까요?

  첫째, 탐심으로부터 자유를 얻습니다. 탐심은 곧 우상 숭배입니다(골 3:5). 우리가 참 자유인이 되려면 먼저 우리를 자유케 하시는 예수님께 기도함으로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모든 탐심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이 땅의 기름진 것으로 우리에게 축복해 주십니다.

  둘째, 죄의 습관으로부터 자유를 얻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에서 놓여났지만 여전히 죄악의 습관에 얽매여 있습니다(롬7:25).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모든 죄와 사슬을 끊어 버리시고 우리에게 참자유를 주셨습니다. 오늘날도 우리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할 때 생명의 성령께서는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끊임없이 해방시켜 주시는 것입니다(롬 8:2).

  셋째, 삶의 불안과 공포로부터 자유를 얻습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마음의 안식을 잃고 불안해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역사할 때 평안과 자유를 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8:32).

  넷째, 죽음으로부터 자유를 얻습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다가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심으로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영원한 하늘 나라의 처소가 예비되어 있는 것입니다.

  다섯째, 마귀의 세력으로부터 자유를 얻습니다. 인간은 보이지 않는 영적 세력에 사로잡혀 자유를 잃어버리는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물리침으로 마귀의 세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참자유는 인간의 수단이나 방법을 통해서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참자유를 주시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성령 충만을 받고 말씀으로 굳게 선 참자유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365일 설교[ 5월 17일]내가 믿나이다(요 9:38)
 

어느날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셔서 그를 고쳐 주셨습니다. 그 때 그는 “내가 주를 믿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믿는다고 고백하는 예수님은 어떤 분이실까요?

  첫째,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악을 청산해 주시고 용서해 주신 구세주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구세주로 모신 우리들은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못났음에도 불구하고 버림을 받아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으로 말미암아 용서받은 의인이 되어 하나님 앞에 떳떳이 설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께서는 육체의 질고와 죽음을 대속해 주신 분이십니다. 이사야서 53장 5절은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 의지하여 우리의 몸에 붙어서 우리를 도적질하고 파괴하는 질병을 단호히 물리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죽으셨다가 부활하심으로 살려 주는 영이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으므로 우리도 부활의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육체의 질고와 죽음을 철저하게 대속하셨습니다.

  셋째, 예수님께서는 환경의 저주를 대속해 주신 분이십니다. 아담과 하와의 타락으로 인류는 하나님과 적대적인 관계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적대 관계를 청산하시려고 십자가에 올라가 하늘과 땅 사이에 높이 달리심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화평을 이루셨습니다(엡 2:14).

  이로 말미암아 우리들은 저주의 땅, 가시와 엉겅퀴의 땅, 낭패와 실망의 땅에서 나와 젖과 꿀이 흐르는 축복의 땅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내가 주를 믿나이다”라고 고백하는 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죄를 씻어 주셨음과, 질병과 저주, 그리고 죽음을 십자가에서 철폐하셨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에게 용서와 의, 건강과 축복, 영생과 천국을 주셨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을 굳게 믿습니다

 

 

365일 설교[ 5월 18일]마이너스 인생, 플러스 인생(요 10:10)
 

하나님의 삶 속에는 마이너스라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우주 만물을 플러스 의지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생에는 플러스 뿐만 아니라 마이너스가 되는 요인들이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첫째, 마귀는 우리에게 마이너스 인생을 가져옵니다. 원수 마귀는 그 자체가 강력한 마이너스 존재입니다. 마귀는 사람들 속에 들어와 좋은 것을 다 빼앗아 버립니다. 영혼을 파멸시키고 범사를 망하게 하며 건강과 내일의 소망도 도적질해 갑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세상 풍속을 좇아 사는 사람은 영적, 정신적, 육체적으로 마이너스 인생을 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둘째, 인간은 마이너스를 플러스로 바꾸려고 노력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힘으로써 온갖 노력을 다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인간의 계획으로 이루어진 것들은 플러스 인생보다는 마이너스의 인생을 살게 할 뿐이었습니다. 즉 과학의 발달은 한편으로는 지구를 파괴하는 현상을 초래하였으며 전쟁은 여전히 인류에게 학살의 기회를 부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셋째, 영원한 플러스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우리의 살 길은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나와서 영원한 은총의 플러스를 얻는 것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되 플러스 인생을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또한 마귀가 가져온 마이너스를 플러스로 바꾸기 위해 오셨습니다.

  성경은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 안에 있는 십자가의 능력으로 플러스 인생을 살고 이 플러스 인생을 마이너스로 가득찬 세상 속에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능히 마귀가 가져온 마이너스 인생을 플러스 인생으로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보고 부정적인 생각을 버리고 예수님 안에서 “할 수 있다”는 강한 믿음으로써 창조적인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365일 설교[ 5월 19일]순종과 복(삼상 15:17-23)
 

하나님께서는 창조주요 절대 주권자이십니다. 이 때문에 피조물인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께 절대 순종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에게 은혜를 베푸시기 전에 반드시 순종의 도를 시험하십니다. 그러므로 오늘은 순종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 인간의 뜻을 분명히 구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에게 아말렉을 진멸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전쟁에 승리한 사울은 아말렉의 왕 아각을 죽이지 않았고 하나님께 제사 드린다는 명목으로 짐승들과 전리품을 가지고 돌아왔습니다.이는 사울의 판단에 의한 행위요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된 행위였습니다. 이러한 사울의 불순종으로 하나님께서는 그를 버리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의 판단을 버리고 하나님께 절대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럴 듯한 의식(儀式)이 아닌 온전한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둘째, 우리는 희생적인 순종만이 참신앙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잉태했습니다. 마리아는 엄격한 유대의 율법하에 있던 그 당시의 사회에서 죽음까지도 각오하고 하나님의 뜻에 희생적으로 순종한 것입니다.

  남편 요셉 역시 비판과 조소에도 불구하고 마리아를 데려왔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순종할 수 있는 마음의 자세를 갖춘 사람들을 택하시고 그들의 순종을 통해 위대한 역사를 베푸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면 그 어떤 핍박과 고난이 따른다고 할지라도 그대로 순종하겠다는 마음의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셋째,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도 순종을 통해 가장 위대한 영광을 얻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본래 하나님의 본체시요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었지만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 인류를 죄악에서 구원하셨습니다(빌 2:6-11). 순종에는 희생이 따릅니다. 그러나 희생 후에는 부활의 영광이 있습니다.

  순종은 신앙의 척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 순종함으로 복을 받아, 그를 통해 복음을 위해 더욱 헌신하여야 하겠습니다

 

 

365일 설교[ 5월 20일]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요 11:44)
 

예수님께서는 죽어서 썩은 냄새가 나는 나사로를 살리시면서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죄로 죽은 우리를 살리신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묶임에서 놓여나 자유함을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사망의 묶음에서 놓여나 자유를 누릴 수 있을까요?

  첫째, 생각을 풀어 놓아야만 합니다. 우리의 생각이 저주와 패배와 절망으로 가득차 있으면 구원을 받았어도 부유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의 모든 죄는 도말되고 저주에서 해방되며 마귀의 사슬에서 놓여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에서 자유함을 받은 생각, 저주에서 해방된 생각, 하나님의 자녀된 생각, 그리고 주님께서 항상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에 넘치도록 능히 하시는 분이십니다(엡 3:20).

  둘째, 불안과 공포에서 풀려나야 합니다. 사람들은 알 수 없는 미래를 바라볼 때 마음이 불안해집니다. 또한 자신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발생하면 공포에 짓눌리게 됩니다. 이와 같은 때에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부여잡고 기도하면 마음속에 평안이 생기고 불안과 공포는 물러가게 됩니다. 우리에게 불안과 공포를 주는 것은 마귀의 역사입니다.우리는 이것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단호하게 물리쳐야 합니다.

  셋째, 비관적이고 부정적인 말에서 놓여나야 합니다. “나는 못한다, 안된다, 절망이다, 죽겠다, 할 수 없다.” 등의 비관적이고 부정적인 말을 하면 패배적인 인생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말 대신 긍정적이고 적극적이며 생산적인 말을 하여야 합니다.

  넷째, 예수님께서는 풀어서 “다니게 하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믿는다고 말한 것을 실제적인 행동으로 나타내야 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행할 때 사망의 묶임에서 놓여나 자유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변화되어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말을 하면서 실천적인 신앙 생활을 하기를 원하십니다. 자, 다음의 말씀을 크게 외쳐 보십시오. “나는 예수님으로 인해 모든 묶임에서 풀려 놓임을 받았다!

 

 

365일 설교[ 5월 21일]자아가 깨어지려면(요 12:1-8)
 

예수님을 믿는 신앙은 인격이나 생활의 현저한 변화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이러한 신앙은 예수님 앞에서 자신의 옥합을 깨뜨린 사람만이 가질 수 있습니다. 옥합을 깨뜨리는 것은 우리의 이기적인 자아가 깨뜨려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자아는 오직 주님께서만이 깨뜨리실 수 있습니다.

  그러면 주님은 어떻게 하여 우리의 자아를 깨뜨리실까요?

  첫째,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깨뜨리십니다. 우리가 교회에 나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동안 마음에 감격이 올 때도 있고 양심이 찔릴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말씀이 검이 되어 우리의 심령을 찔러 쪼개기 때문입니다(히 4:12). 이와 같이 말씀을 들을 때에 우리의 옛사람에 속한 이기적인 자아가 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 성령의 은혜를 통해 깨뜨리십니다. 육신의 생각은 성령의 은혜가 올 때 그것을 받지 못하도록 방해합니다. 반면에 성령께서는 우리가 육체의 일을 행할 때 날카롭게 꾸짖으십니다. 우리가 성령의 꾸짖음을 받을 때 이를 인정하고 성령의 뜻에 순복한다면, 우리는 죄와 사망의 법에서 벗어나 생명의 성령의 법 아래 놓이게 됩니다. 이 성령의 법을 좇을 때 우리의 자아가 깨뜨려지는 것입니다.

  셋째, 환난을 통해 깨뜨리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환난을 통해 우리를 막다른 골목으로 집어 넣으셔서 우리의 자아를 항복하게 하십니다. 우리가 이렇게 항복하여 주님 앞에 나올 때 성령께서는 우리를 점령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아가 깨어지면 깨어질수록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더 큰 믿음을 주시고 복을 주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깨어지기를 거부하면 우리는 새롭게 변화되는 하나님의 부활의 능력과 은총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삶에는 자아가 깨어지는 증거가 나타납니다. 세상 사람들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 세상의 자랑을 따라 살지만, 우리는 자아의 옥합을 깨뜨려살든지 죽든지, 흥하든지 망하든지, 성하든지 쇠하든지 오직 주님의 뜻을 좇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성도들을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서의 축복뿐만 아니라 영원한 새 하늘과 새 땅과 새 예루살렘을 예비하셨습니다

 

 

365일 설교[ 5월 22일]죽으면 살리라(요 12:24)
 

한 알의 씨앗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 법칙은 믿음의 세계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죽으면 살게 되는 성경의 원리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첫째,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죽음의 고통을 맛보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보이는 영광의 왕으로 오시지 않고 베들레헴의 초라한 마구간에 비천하게 오셨습니다. 일생을 가난하게 사셨고 나중에는 모든 사람의 죄와 불의, 질병과 저주, 절망과 죽음을 한 몸에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러나 장사한 지 사흘 만에 무덤을 박차고 영광스럽게 부활하심으로 만왕의 왕, 만주의 주로 승리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죽으면 사는 법칙입니다.

  둘째,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들의 꿈이 죽는 고통을 통과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자 제자들은 꿈을 잃어버리고 암울한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져 버렸습니다. 그러나 오순절 날이 이르러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자 그들은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그들과 함께 계심을 확연히 깨닫게 되었고 그들의 죽었던 꿈은 새롭게 부활되었습니다.

  그들은 일어나 담대히 복음을 전하였고 그 결과 300년이 못 되어 전 로마 제국을 복음화시켰던 것입니다.

  셋째, 우리의 꿈이 죽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의 아름다운 꿈과 목표가 분명히 하나님의 뜻이라는 확신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꿈과 목표가 시들어 죽기 시작할 때가 있습니다. 이러할 때 우리는 절망에 몸부림 칠 것이 아니라 자신의 꿈을 주님께 내어 맡기고 자신의 모든 인간적인 욕망과 이기주의를 던져 버리며 주님을 철저히 신뢰해야 합니다.

  이와 같이 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죽었던 꿈을 다시 부활시켜 주시고 이루어 주심으로 그의 영광을 우리들에게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꿈은 반드시 한 번은 죽습니다. 그러나 꿈과 함께 우리의 자아가 하나님 앞에서 철저하게 죽을 때, 우리의 죽은 꿈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부활되고, 이제 그 꿈은 우리의 능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성취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까지 출처 : RED COMPASS 선교회
여기부터 고동엽 블러그에서 채움
365일 설교[ 5월 23일]
 

나를 필요로 하는 곳으로 찾아간다

1960년 슈바이쳐박사가 노벨 평화상을 타기 위해 잠시 아프리카를 떠나 프랑스공항에 내린 박사님은 덴마크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습니다. 세계에서 몰려온 신문 기자들이 기차에 동승을 하게 되었고 슈바이쳐를 만나기 위해서 특등석을 뒤지기 시작했습니다. 슈바이처를 찾지 못한 사람은 1등석으로 그리고 2등석으로 가 뒤져 보았지만 슈바이쳐를 만나지 못했습니다. 마지막 3등석 시골 촌부들과 함께 사과 괴짝을 엎어놓고 슈바이처는 촌노들의 손을 붙들고 맥을 짚고 있었습니다. 슈바이처는 박사 학위가 3개, 명예박사학위가 20개 였습니다. 영국황실에서 그에게 백작칭호를 주었고, 노벨상으로 막대한 상금을 손에 쥘수 있는 분이었습니다. 한 기자가 “선생님, 몸도 피곤하실 터인테 어찌 이런 3등석 자리에 있습니까?” 슈바이쳐박사는 한마디 말을 남깁니다. “3등석 밑엔 열차가 없어서요. 그리고 나는 내가 즐길 곳을 찾아 살지 않고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을 찾아다닌다.”

365일 설교[ 5월 24일]
 

기독교와 불교의 차이

크리스마스를 맞아 모처럼 고교 동창들끼리 모여 파티를 즐기고 있었습니다.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던 친구들이 갑자기 화제를 종교문제로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종교학과를 다니는 영자가 순자에게 물었습니다.

“예수님과 부처님의 가장 큰 차이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니?”

한참을 진지하게 생각하던 순자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응, 그건 무엇보다도 헤어스타일 아니겠니?”

365일 설교[ 5월 25일]
 

인생은 고해다. 인생은 괴로운 바다입니다.

 

중세기 어느 수도원에 신부복을 입은 어느 낯선 구도자 한 사람이 찾아와 수도원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그러자 수도원을 지키고 있던 사람이 나와서 구도자에게 물었습니다. "누구를 찾으십니까?" 낯선 구도자는 대답했습니다. "저는 평화를 찾습니다" 바로 이 구도자가 저 유명한 '신곡'을 쓴 단테였습니다.

 

"평화를 찾습니다" 이 세상에 살고 있는 60억이 넘는 사람이 한결같이 찾고 있는 것은 평화입니다. 공부를 많이 한 사람도 지식을 얻으면 평화로울 것이라고 기대하기 때문에 밤잠을 안자고 열심히 공부합니다. 사업을 하는 사람은 돈을 많이 벌면 평안할 것을 믿기 때문에 이윤의 추구를 위해서 전력을 기울입니다. 권력을 잡으면 평안하리라 생각하기 때문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아니하고 권모술수도 사양치 아니하고 권력쟁취를 위해 눈에 불을 켭니다.

 

그러나 인생 한가운데서 누구도 진정한 평안을 찾지 못합니다. 자신의 힘으로 평안을 찾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혼자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실존주의자들이 본 인간입니다.

365일 설교[ 5월 26일]
 

소금 가마니를 바닷물에 넣으면 넣은 순간

목포엔 쓰러진 황소도 벌떡 일어난다다는 세발 낙지로 유명하지만, 신안 앞바다에서 나온 천일염은 유익한, 유명한 소금입니다. 염전을 하시는 장로님의 얘기를 들으니 소금 가마니를 바닷물에 넣으면 넣은 순간 녹아버린 답니다. 그러나 민물엔 소금가마니를 바닷물에 짚어 넣어도 건재해 거의 그대로 있답니다. 왜 그럴까요? 소금의 고향이 바다 이기에 소금은 바다엔 너무나 쉽게 녹아 버린다는 거지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천국이 고향인 사람, 영적인 사람은 영적인 바다에서 잘 녹습니다. 예배에 빠져듭니다. 말씀에 사로잡힙니다. 기도의 자리에서 행복해합니다. 그러나 아직도 세상의 바다가 고향인 사람은 유혹에 쉽게 넘어집니다. 사소한 문제에 짓눌려 평안을 잃어버립니다. 부정적인 일에 쉽게 현혹 됩니다. 받은 은혜도 세상에 한번 빠져 버리면 너무나 쉽게 잃어버리고 맙니다.

365일 설교[ 5월 27일]
 

어떤 풍랑 한 가운데서도 평안을 누릴 수 있도록 주여!

주기철 목사님처럼 신사참배를 반대하다가 잡혀가 고문을 받은 주남선 목사님이 있습니다. 일본 경찰의 고문은 잔인하여 말로 다 형용하기 힘들었습니다. 엄지손가락 두 개를 노끈으로 한데 묶어 대들보에 매다는가 하면, 고춧가루를 탄 물을 콧구멍에 붓기도 하고, 손가락 사이에 나무 토막을 끼우고 짓누르며, 손톱사이에 대나무침을 꼽고, 인정사정없이 몽둥이로 두들겨 패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악형을 한 차례 가한 형사는 "잘 생각해 보고 마음을 돌이켜!"라고 주 목사님에게 말했습니다. "백번 생각해 봐도 마찬가지요. 참신은 하나님뿐 다른 신은 있을 수 없소!" 또 다시 몽둥이가 사정없이 날아듭니다. 주 목사님은 시멘트 바닥에 쓰러져 기절하였습니다. 얼마 후, 의식을 되찾았고 사방은 조용하였습니다. 목사님은 그 자리에 엎드리어 이 시련을 이기게 해 달라고 주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한참 기도하다가 우연히 시멘트 바닥을 만져보니 추운 겨울 물로 젖은 시멘트 바닥이 불 땐 온돌방처럼 따뜻했습니다. 목사님의 온몸은 포근한 담요에 싸여 있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눈이 사르르 저절로 감겨 그는 깊은 잠에 잠겼습니다. 주 남선 목사님은 후에 이 일을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포근한 담요는 우리 주님 자신이었어요. 나는 주의 품에서 평안히 지낼 수 있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구해야 할 일은 “환경을 잠잠케 해 주시옵소서, 풍랑을 꾸짖어 주십시오”라고 기도할 것이 아니라, “어떤 환경 속에서도 안식할 수 있게 해주시옵소서! 어떤 풍랑 한 가운데서도 평안을 누릴 수 있도록 주여! 제게 믿음을 주시옵소서!” 우리가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365일 설교[ 5월 28일]
 

평안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

“내 평생에 가는 길”이란 찬송가는 작사자 호례이쇼 G. 스패포드((Horatio G. Spafford) 교수의 엄청난 비극 속에서 탄생한 찬송가라 하여 “찬송가 속의 욥기”라고 부릅니다.

그는 변호사요, 린드 대학교와 시카고 의과대학의 법리학 교수요, 신학교 이사 및 운영위원이며 무디 교회 회계집사였고 부동산 사업가였는데 1873년 이 평화롭고 행복한 가정에 시련이 닥쳤습니다. 화재로 집은 불타고 재산은 전부 잿더미로 바뀌어 지고 말았습니다.

그의 부인은 충격으로 인해 건강이 몹시 악화되어 환경을 바꿔보라는 의사의권유로 병약한 아내의 휴양을 위해 가족들과 함께 유럽으로 출발하려고 여객선을 예약한 상태였지만 시카고의 대 화재로 자신의 집 뿐 아니라 그가 출석하던 무디교회도 잿더미가 된 것입니다.

스패포드는 무디교회의 재정을 맡고 있었으므로 교회당 재건 때문에 그의 부인과 네 명의 딸이 먼저 여행을 떠나고 자신은 며칠 후에 뒤따라가기로 했습니다. 여객선은 일주일 동안 대서양을 순항하였으나 새벽 2시, 손님들이 모두 잠든 시간에 그 여객선은 영국선적의 철갑선 '로키안'과 정면으로 충돌하여 2백26명의 선객을 실은 채 바다 속으로 침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사고 직후 스패포드 부인은 네 아이를 이끌고 갑판 위로 달려 올라와 두려움 속에서도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는 동안에 여객선은 완전히 침몰하고 말았습니다. 30분도 채 못 되는 동안의 일이었습니다. 다행히 스패포드 부인은 익사하기 직전 실신한 채 구명정에 의해 구조되었지만 4명의 아이들은 익사했습니다. 9일 후 스패포드 부인은 웨일스의 카디프에 도착하여 남편에게 전보를 쳤습니다. '혼자 구조됨‘ (Saved alone)'.

소식을 들은 교인들이 찾아와 스패포드를 위로하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게 어려운 고난이 닥쳐왔으나, 주님을 의지하게 되니 매우 기쁘다". 그는 아내를 데리러 서둘러 영국으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 그가 탄 배가 비극의 대서양 사고지점을 지나면서 그는 아픔과 슬픔으로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울부짖었습니다. 그런데 새벽 3시경에 그는 일찍이 체험해보지 못한 평안이 그의 마음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는 종이를 꺼내어 마음의 평안을 기록했습니다.

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 /늘 잔잔한 강 같든지 /큰 풍파로 무섭고 어렵든지 /나의 영혼은 늘 편하다. /내 영혼 평안해 내 영혼 평안해“

스패포드는 유명한 작곡가인 블리스(Bliss,1838~1876)에게 자신의 찬송시를 보여주며 작곡을 부탁하여 이 유명한 찬송가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스패포드는 1881년, 시카고에서 아주 떠나 예루살렘에 가서 한 수도원에 정착하여, 주의 사도로 삶을 마감하였습니다.

 

스패포드가 그 환란 중에서 체험한 평안을 세상은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 평안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게 되는 것도 세상이 설명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담대함이기 때문입니다.

365일 설교[ 5월 29일]
 

주님이 오라 하지 않는 일을 하면 망합니다.

믿음이 좋다는 한 청년이 은혜로운 집회를 마치고 산에서 내려오는데 여름철 폭우에 강물이 넘쳐서 건널 수 없게 되었습니다. 마음속에 너무나도 믿음이 충만했습니다. 베드로가 물 위로 걸었다면 나도 넘실대는 강물을 건널 수 있으리라. “주여 믿습니다! 100번 외쳤습니다. 그리고 강물에 발을 풍덩 담그는 순간 쑥 빠져 들어가서 허우적거리고 있습니다.” 사람 살려! 옆에 있던 청년들이 밧줄을 던져서 겨우 살려 주었습니다. 나는 왜 베드로처럼 걷지 못할까? 믿음 없음을 한탄했다는 얘기지요.

 

은혜는 말씀에 근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오라 했기 때문에 베드로가 간 것이지, 자기 생각으로 간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젊은이는 강물을 자기 생각으로 건너보려고 했던 게지요.

 

주님이 오라 하지 않는 일을 하면 망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말씀에 근거하고 살아야 합니다. 말씀이 없는 성공이나 실패는 불행입니다. 말씀에 근거한 일은 성공을 하든, 실패를 하든 모두가 위대한 것입니다.

365일 설교[ 5월 30일]
 

기독교.예수님이 다른 점

서양 전설 가운데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중동에 한 행상이 사막에 들어섰다가 길을 잘못 들어서 크게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때 공자님께서 나타나셔서 하시는 말씀이 “인생은 언제나 바른 길을 가야 하는 법이요” 하고 지나갔습니다. 석가모니께서 나타나셔서 “인생은 고행이라오”하고 지나갔습니다. 마호멧이 나타났습니다. “그게 하나님의 뜻이니 하나님 앞에 굴복하시오”라고 지나갔습니다. 예수님이 나타났습니다. 이 행상 이 나그네의 손을 붙들고 “내가 이 길을 너와 함께 동행해 주마” 그래서 그 길을 예수님이 함께 손 붙들고 사막을 지나간다는 얘기입니다. 이게 기독교입니다.

 

예수님은 책망하거나 나무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구경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멀찍이 바라만 보는 분이 아니십니다. 언제나 내 곁에서 나와 함께 계시는 분이십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내 곁을 떠나는 그 순간에도 예수님은 내 곁에서 나를 붙들어 지켜 주시는 분이십니다

365일 설교[ 5월 31일]
 

희망...끝이 아니다

중세사람들은 포르투칼이 지구의 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은 포르투칼의 수도가 되어 있습니다마는 한때 스페인령에 속해 있던 리스본이라는 항구도시가 있었습니다. 그 항구도시의 해안이 끝나는 곳에 큰 바위가 하나 있었는데 이 바위에 다음과 같은 말이 씌어져 있었다고 합니다. “여기가 끝이다. 이 너머엔 아무 것도 없다.” 그러나 1492년 한 사람이 이 항구에서 작은 배에 오르면서 함께 한 사람들은 외쳤습니다. “여기가 끝이 아니다. 저 너머엔 위대한 희망의 세계가 있다.” 그가 바로 탐험가 <콜롬부스>였습니다. 그는 마침내 위대한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합니다.

 

우리 신앙생활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여정에서 절망적인 상황을 만나면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포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편 절망과 좌절을 거부하고 희망을 붙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겐 인생의 막다른 골목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들은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서 희망의 세계를 봅니다. 가능의 세계를 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일부터 시작합니다. 이런 사람이 신앙의 사람이요.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바로 이런 사람에게 빈들은 절망의 자리가 아니라 오히려 기적을 경험하는 자리입니다.

 

출처 : RED COMPASS 선교회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