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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365일 설교 12월1일~31일

by 【고동엽】 2022. 12. 3.
365일 설교 6월1일 ~30일          {목록 돌아가기}
 
365일 설교[ 12월 1일]빛 가운데 거하자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세상 사람들에게 좋지 않은 평을 받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그것은 우리의 믿음과 행동의 차이 때문입니다.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사는 동안 오직 빛 가운데 거해야 합니다. 믿음과 행동의 불일치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 상처를 입히고 성도의 아름다운 이름에 수치를 주는 요인입니다. 그러면 성도는 왜 빛 가운데 살아야 할까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어두움에서 불러내시어 빛의 자녀로 삼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의 죄와 형벌이 얼마나 크고 중한가를 말해 줍니다. 사람들은 흔히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시니까 죄를 지어도 회개하면 다 용서해 주시겠지’하고 죄짓는 것을 가볍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공의의 사랑이므로 우리를 용서하시는데 엄청난 희생이 따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공의를 이루시기 위하여 우리의 죄값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희생 제물로 내어 주시고 우리를 의롭다 인정해 주셨습니다(롬 4:25).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지극하신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영원한 공의와 사랑의 표상입니다. 이제 용서받은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연합하여 날마다 죄에 대하여 죽고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빛 가운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기 위해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을 비추어 보아야 합니다. 요한복음 14장 21절에,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기뻐하시는지는 그의 계명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주신 계명은 빛과 어두움을 분별하는 기준이 되고 우리가 올바로 살아갈 수 있는 기준이 되기 때문입니다. 십계명은 우리에게 주신 율법을 집약해 놓은 것입니다. 제1계명에서 제4계명까지는 ‘하나님 사랑’에 대한 것이고 제5계명에서 제10계명까지는 ‘이웃 사랑’에 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힘을 다해 하나님과 이웃 사랑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우리가 항상 말씀에 비추어 하나님을 사랑하며 이웃을 사랑할 때 우리는 빛의 자녀로 불리워지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 수있는 것입니다.

 

 

365일 설교[ 12월 2일]우리를 건지시는 하나님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은 거대한 금신상을 세우고 여기에 엎드려 절하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온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절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풀무불에 던져졌으나 하나님께서 건져 주셨고 느부갓네살 왕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해서 담대한 믿음을 가질 수 있었을까요?

  첫째, 그들은 타협하지 않는 신앙을 가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십계명 중 첫째 계명에서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출 20:3)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히 지켜 결코 다른 신들을 섬기지 않기로 결심하였던 것입니다. “이제라도 너희가 예비하였다가 금신상 앞에 엎드리어 절하면 좋거니와”라고 하면서 왕은 이들에게 신앙적으로 타협하도록 유혹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체면이나 지위나 목숨을 위해 타협하기보다는 하나님만을 섬기는 신앙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둘째, 그들은 핍박을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한 신앙을 가졌습니다. 그들이 금신상에 절하지 않을 경우 풀무불에 던져질 것이라는 위협을 받으면서도 그저 형식적으로라도 절하지 않았습니다. 죽음이 다가오는 절박한 때에도 우상에게 절하지 아니하는 담대한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들은 육체를 멸하는 사람의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영혼까지도 능히 처벌할 수 있는 하나님만 두려워하며 끝까지 신앙을 지켰던 것입니다.

  셋째, 그들은 ‘건지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가졌습니다. 그들은 왕에게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서 능히 건져내시겠고….”라고 말했습니다.

  과연 그들의 신앙 고백대로 하나님께서는 일곱 배나 뜨겁게 한 극렬한 풀무불 속에서도 그들이 털끝 하나 상하지 않도록 보호해 주셨습니다.

  오늘날도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죄와 질병, 저주와 죽음의 권세에서 우리를 건져 주고 계십니다.

  우리도 이와 같이 타협하지 않는 신앙, 핍박을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한 신앙, 건지시는 하나님에 대한 굳건한 신앙을 가짐으로 기적을 체험하는 승리의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365일 설교[ 12월 3일]참된 사상(잠 23:7)
 

인간의 사상은 불완전하고 일시적입니다. 또한 그것은 구름처럼 허망하기도 합니다. 이 허망한 사상에 사로잡혀 파멸을 당하는 사람은 수도 없이 많습니다. 북한의 주체 사상을 보십시오. 인간을 가난에서 해방시켜 주고 균등하게 잘살게 해 준다는 그 사상이 오늘날 북한의 2천여 만의 인구를 처참하게 짓밟고 있지 않습니까?

  이 지구상에 북한의 주체 사상만큼 인간을 비극적인 존재로 전락시킨 사상도 없습니다. 주체 사상이야말로 우리가 반드시 배격해야 할 사상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 사상을 가지고 살아야 할까요?

  인간을 가장 올바르게 이끌어 주는 사상은 영원 무궁한 십자가의 사상입니다. 절대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상은 인간을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킬 뿐입니다. 하나님과 화목하는 사상이 인간을 영혼이 잘 됨같이 범사에 잘 되며 강건하게 합니다. 하나님과 화목하는 사상이 바로 십자가의 사상 인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 하나님께서는 죄와 허물로 죽은 인간을 살리시려고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류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셨고 이를 통해 인류의 죄와 저주와 절망과 죽음을 다 청산하셨습니다.

  처음 아담이 범죄함으로 몰고 온 그 모든 저주를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다 청산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못났음에도 불구하고, 벌을 받아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기만 하면,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십자가의 사상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생명의 사상입니다. 오늘 본문은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즉”(잠 23:7)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참된 사상은 인간을 살리지만, 거짓된 사상은 인간을 파멸시킵니다. 어떤 사상을 갖느냐 하는 것은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참된 사상, 십자가의 사상을 택함으로 위대한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365일 설교[ 12월 4일]하나님께 속한 자의 복
 

 사람들은 일평생을 살면서 반드시 어디엔가 소속되어 살아갑니다. 사람들이 소속된 환경은 그 사람들에게 막대한 영향력을 미칩니다. 그러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디에 소속되어 있을까요? 본문은 우리가 하나님께 소속되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께 소속되면 어떤 복을 받게 될까요?

  첫째, 우리 안에 삼위 일체 하나님을 모시게 됩니다. 에덴 동산에 계셨던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제단에 역사하셨고, 그 후 광야의 성막에 계셨으며 나중에 솔로몬이 지은 성전에 계셨습니다. 그러나 오순절 이후에는 성령을 통해서 그리스도인들의 몸을 성전 삼고 계시는 것입니다.

  둘째, 우리가 하나님께 소속되면 우리 안에 천국을 소유하게 됩니다. 우리 안에 있는 천국에는 환경을 초월한 평안이 있으며(롬 8: 38,39), 치료의 능력이 있습니다(마 10: 7,8). 또 천국 안에는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이 있으며(눅 11:20), 형통의 복이 있습니다(고후 9:8). 또 우리 안에 있는 천국에는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셋째, 우리가 하나님께 소속되면 우리 안에 충만한 기쁨이 솟아나게 됩니다. 우리가 천국의 임재를 깨닫고 삼위 일체 하나님과 사귐을 가지면, 우리에게 그 열매로써 충만한 기쁨이 솟아납니다. 환경이 주는 기쁨은 잠깐이지만 성삼위 일체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은 영원한 것입니다.

  이러한 축복을 간직한 우리는 이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살아야 합니다. 이것만이 우리의 최대 목표요, 과제가 되어야 합니다. 이 일을 배제한 그리스도인의 삶은 무의미할 뿐 아니라 위에서 언급한 세 가지 보화도 다 잃고 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속하였으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성전 삼고 계실 뿐 아니라 우리를 친히 돌보실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하나님께 속하였다면 천국이 우리 속에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천국은 우리를 통해서 세상에 전파되고 확장되어 나아감으로 우리는 땅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는 복음의 증인으로서의 삶을 살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마 28:18-20).

 

 

365일 설교[ 12월 5일]생동하는 신앙, 응답받는 기도
 

수많은 사람이 일생 동안 기도하며 살아갑니다. 이 기도 중에는 응답을 받는 기도도 있고 그렇지 못한 기도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응답받는 기도의 법칙을 알고 기도한다면 하나님께서 들으시는 기도가 될 것입니다. 그러면 응답받는 기도의 법칙이란 무엇일까요?

  첫째,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몸부림치고, 고집부리며 기도한다고 무조건 응답해 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이는 마치 부모가 자녀들이 아무리 울부짖고 몸부림쳐도 불필요하고 위험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결코 들어 주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뜻을 알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읽고 묵상해야 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통해 주의 뜻을 분별하고 그 뜻을 따라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를 응답하시는 것입니다.

  둘째, 믿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는 머릿속에 있는 믿음이 뱃속 깊은 곳에 내려와 담대한 믿음이 될 때까지 끈질기게 기도해야 합니다. 온 몸에 확신과 평안이 강물처럼 흐르는 믿음이 올 때까지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셋째, 응답된 것을 믿음으로 바라보고 입으로 시인해야 합니다. 눈에는 아무 증거 안 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 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는 절망적인 상황일지라도 뱃속에서 나오는 깊은 믿음이 생겼다면 담대하게 이제는 입술로 시인해야 하는 것입니다.

  마음에 질병을 치료받았다는 확신이 있습니까? 저주에서 해방되었다는 확신이 임합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 감사하는 가운데 자신이 건강해져서 활기차게 생활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나는 주 안에서 건강하다. 주께서 채찍에 맞으심으로 나는 나음을 입었다. 나는 복받은 자다.”라고 시인해야 합니다. 이 때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하고, 그 뜻대로 끈질기게 기도하며 나아가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입술로 시인하며 믿음을 실천할 때 하나님께서는 생동하는 신앙과 놀라운 기도의 응답을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365일 설교[ 12월 6일]진리의 교훈 안에 거하라
 

사도 요한이 활동하던 초대교회 때는 영지주의라는 이단 사상이 나타나 성도들을 미혹했습니다. 이처럼 오늘날도 성도들의 영혼을 미혹하는 온갖 이단 사상들이 있습니다. 이에 본문을 통해 성도들이 미혹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알아보겠습니다.

  첫째, 성도들은 예수님의 진리와 함께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2,9절). 거짓 교사들이 예수님의 성육신을 부인해도 그의 구속의 완성은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육신으로 이 땅에 오셔서 인류의 허물과 죄악을 대신하시기 위해 찔리시고 상하셨습니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게 되었고,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게 된 것입니다. 또한 그가 부활하심으로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었고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심으로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진리 안에 확고히 거해야 하겠습니다.

  둘째, 성도들은 진리의 교훈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5,6절). 우리의 육신은 연약하고 이기적이어서 예수님의 사랑을 행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랑의 교훈을 실천하고자 엎드려 기도하면 성령께서 우리 마음속에 예수님의 사랑을 넘치게 부어 주셔서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며, 가족과 이웃과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게 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웃의 아픔과 고난에 동참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줌으로써 진리의 교훈을 증거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셋째, 성도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대적하는 사상을 물리쳐야 합니다(7,10절). 당시 거짓 교사들은 교회에서 ‘영적인 것은 선하지만 물질 세계는 모두 악한 것’이라는 영지주의를 가르쳤습니다. 이에 미혹된 성도들은 예수님께서 육체를 가지신 분이심을 부인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이와 같이 신앙을 파괴하는 거짓된 이단 사상을 경계하며 단호히 물리쳐야 할 것입니다.

  진리는 육신을 입고 우리 가운데 오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성령의 인도로 예수님의 진리의 말씀 위에 굳게 서서, 진리의 증인된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아울러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온갖 이단 사설을 경계하며 물리쳐야 하겠습니다.

 

 

365일 설교[ 12월 7일]참된 기독교 신앙
 

오늘은 본문을 통해 참된 기독교 신앙이란 어떤 것인가에 대하여 확실한 해답을 제시해 드리고자 합니다. 참된 기독교 신앙은 어떤 신앙일까요?

  첫째, 영혼이 먼저 잘되는 신앙입니다. 세상의 부귀, 공명을 다 누린 사람일지라도 자신의 영혼이 구원받지 못하고 죽으면 영원한 지옥에 떨어지고 맙니다. 그러나 영혼이 구원받은 사람은 예수님과 함께 천국에서 영원한 생명과 복락을 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영혼 구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동기로 그 앞에 나올지라도 꾸짖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두를 품에 안고 십자가를 바라보게 해 주십니다. 그리고 그의 보배 피로 정결케 씻어 의롭다 인정해 주시므로 우리의 영혼이 먼저 잘되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둘째, 범사가 잘되는 신앙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적인 세계뿐 아니라 인간을 위한 물질적인 세계도 아름답고 풍부하게 지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잘못 관리하여 저주받은 이 물질 세계를 무조건 나쁘다고만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하나님 중심에 바로 서서 열심히 일하는 성도에게 풍성한 물질적 축복과 형통의 복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모든 일에 형통하고 물질의 복을 받은 성도들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셋째, 강건한 삶을 사는 신앙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의 3분의 2를 병을 고치는 데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둘씩 파송하시면서 그들에게 귀신을 쫓아내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강건하게 되는 것을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느 곳에서든지, 병든자를 위해서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치료의 역사를 통하여 많은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은 영혼과 몸이 죽고 범사가 저주를 받는 삼중(三重) 형벌을 받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해 우리의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하게 되는 삼중(三重)의 구원과 축복을 주셨습니다. 이것이 참된 기독교 신앙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신앙을 좀더 많은 이웃에게 나누어 주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365일 설교[ 12월 8일]신앙을 승리로 이끄는 네 단계
 

초대교회 당시 교회 안에서 이단 사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성도들의 신앙을 왜곡시켰던 것같이 오늘날에도 이런 사람들이 성도들을 미혹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런 무리에게 미혹되지 않고 믿음을 지키며 승리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첫째,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피흘려 돌아가심으로 우리에게 중생과 성령 충만과 신유와 축복과 천국을 값없이 주셨습니다. 우리가 이 복음을 깊이 알고 믿으며 성경 말씀을 계속적으로 연구할 때 견고한 믿음을 가지게 됩니다.

  둘째, 우리는 늘 깨어 성령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으로 기도하는 것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이 아닌 인간의 정욕대로 구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 기도하면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기 때문에(고전 2:10)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기도의 응답도 확실히 받게 됩니다(요일 5:14).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켜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고 그의 뜻을 따라 그를 기쁘시게 하며 말씀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러한 삶을 사는 사람은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진리를 아전인수격으로 왜곡시키는 이단 사설에 미혹되지도 않습니다.

  넷째, 우리는 영생에 이르도록 예수님의 긍휼을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은 인간의 노력이나 선행으로 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써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원한 하늘 나라에 소망을 두고 날마다 예수님의 긍휼을 힘입고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거룩한 믿음의 터 위에 굳게 서서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키며 주님의 긍휼을 기다리는 신앙 생활을 계속함으로 늘 승리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365일 설교[ 12월 9일]최초의 질문에 대한 최종의 대답(계 1:18)
 

하나님께서는 죄를 범한 아담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부르셨습니다. 이는 죄를 지은 아담 자신이 얼마나 처절한 절망의 자리에 처하게 되었는가를 스스로 깨닫게 해 주시기 위한 부르심이었습니다. 이에 오늘은 인류에게 던져진 하나님의 최초의 질문과 최종의 대답으로 오신 예수님에 대하여 깊이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먼저 하나님을 반역한 아담의 처참한 자리는 어떠했을까요?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라는 하나님의 최초의 질문에 대하여 아담은 “하나님이시여, 저는 죄 가운데 있습니다. 그 결과 저는 하나님과 분리되었고 제 영혼은 죽었습니다. 이제 저는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버림을 받고 말았습니다.”라고 대답했을 것입니다. 이처럼 아담은 죄악의 절망과 하나님과 원수된 자리, 질병과 육체의 죽음, 영원한 멸망중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문명이 발달한 오늘날에도 하나님과 화목하지 못한 인간은 누구를 막론하고 아담과 똑같은 자리에 처하여 탄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땅에 마지막 아담으로 오신 예수님의 최종의 대답은 무엇일까요? 아담 이후로 끊임없이 던져진 ‘네가 어디 있느냐’라는 피할 수 없는 질문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심으로 최종적이고 완벽한 대답을 주셨습니다. 그런 다음 예수님께서는 죽으셨다가 3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그 대답이 진리였음을 증명하셨습니다. 즉 예수님을 구주로 믿어 구원의 은총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준엄한 최초의 질문 앞에서 이제는 “저는 예수님을 통해 용서와 의(義) 안에, 화해와 성령 충만 안에, 치료와 건강 안에, 축복과 승리 안에, 영생과 천국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라고 가슴을 펴며 예수님 안에서 분명하게 대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아담 이후로 인류는 하나님의 낯을 피해 도망다니는 존재가 되었지만 예수님 안에 들어온 사람들은 절망의 자리를 극복하고 믿음, 소망, 사랑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한 이 놀라운 축복의 장막터를 더욱 넓혀 나가기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

 

 

365일 설교[ 12월 10일]시험을 이기려면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크고 작은 시험을 수없이 만나게 됩니다. 우리가 만나는 여러 가지 시험은 우리의 욕심이 원인이 되기도 하지만, 마귀가 갖다 주기도 하며 때로는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신앙을 향상시키기 위해 허락하시기도 합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다가온 시험을 어떻게 하면 무사히 극복할 수 있을까요?

  첫째, 시험을 이기려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귀의 세 가지 시험을 모두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기셨습니다(마 4:1-11).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잘 간직하고 있으면 마귀가 아무리 교묘한 올무를 가져올지라도 이를 즉시 발견함으로 능히 물리칠 수 있습니다.

  둘째, 시험을 이기려면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마귀는 눈에 보이는 것, 귀에 들리는 것, 손으로 만져지는 것, 즉 감각을 통해서 불안과 공포와 세상적인 유혹으로 우리를 시험합니다.

  이에 우리는 눈에는 아무 증거 안 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 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을지라도 ‘하나님께서 분명한 약속을 성경에 기록하였으므로 이 땅이 꺼지고 저 하늘이 무너질지라도 나는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히 나가리라’고 하는 확고한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셋째, 시험을 이기려면 범사에 불평과 원망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를 지나며 시험을 당할 때, 끊임없이 불평과 원망을 하다가 결국에는 축복의 땅인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파멸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설령 우리의 생활이 원망과 불평에 처할 수밖에 없는 환경일지라도 원망하거나 불평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원망과 불평은 마귀에게 우리를 파괴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주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시험을 당할 때는 오히려 감사 드려야 합니다. 이것이 시험을 이기는 큰 지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현재를 보고 낙망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우리가 시험을 이기려면 오직 말씀을 의지하여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실 것을 굳게 믿고 감사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365일 설교[ 12월 11일] 환난 날에 부르짖는 기도
 

우리 주변에는 환난을 당했을 때 어떻게 해야만 옳은지 알지 못하고 방황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환난을 당하여 능력의 한계를 절감할 때 하나님의 권능과 기도의 힘에 관심을 기울이게 됩니다. 그러면 본문을 통해 우리가 환난을 당할 때 어떻게 기도를 해야 하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첫째, 금식 기도를 해야 합니다(12절). 환난날에 편한 곳에서 배부르게 먹으며 ‘주여, 주여’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응답을 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금식을 한다는 것은 인간의 중대한 관심을 포기하고 결사적으로 하나님께 매달리며 그 도우심을 구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환난을 당해 절박한 상황에 이르렀을 때는 금식하며 하나님을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 회개 기도를 해야 합니다(13절). 우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으며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란 잘못된 삶에서 돌아서는 것으로 입술의 고백뿐만 아니라 행위에 있어서도 변화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즉, 마음을 찢으며 죄악의 길을 버리고 하나님 중심에 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가 회개할 때 용서해 주시고 받아 주셔서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셋째, 합심 기도를 해야 합니다(15-17절). 우리가 마음을 합해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위대한 능력을 나타내십니다. 우리는 약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강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면 인간의 이성을 초월한 생명의 역사, 능력의 역사가 나타나고 당신의 손으로 우리를 붙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환난을 당할 때 금식 기도, 회개 기도, 합심 기도를 하면 하나님의 은총의 태양이 우리 환경 가운데 찬란하게 나타나 하나님의 구원과 치료의 역사, 성공과 번영의 역사가 우리 개인과 가정, 사회와 국가에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환난을 만날 때 전심 전력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회개하고 금식하며 부브짖을 때 하나님의 능력의 손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365일 설교[ 12월 12일]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충성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보실 때 가장 귀하게 보시는 인품은 착하고 충성된 것입니다. 착하고 충성된 인품의 사람은 세상에서도 인정과 귀히 여김을 받습니다. 본문에도 주인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충성된 사자에 대한 칭찬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에 오늘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충성이란 어떠한 것인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지극히 작은 것에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작은 일은 무시하며 꺼려하고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큰 일에만 관심을 기울입니다. 그러나 지극히 작은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세계의 그 어떠한 위대한 일들도 지극히 작은 것에서부터 출발하여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는 것을 기뻐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달란트 비유에서 착하고 충성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한 종들을 칭찬하셨습니다.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고 보잘것 없어 보이는 일이라 할지라도 그것에 최선을 다하는 충성은 하나님 앞에 인정될 뿐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둘째, 오직 하나님께 헌신된 충성입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딤후 2:3,4)고 권면하였습니다. 전쟁에 부름받은 군사의 특징은 자신의 이익이나 욕심을 위해 싸우지 않고 오직 국가와 민족을 위해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고 충성한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 하나님께 부름받은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군사다운 충성을 지녀야 합니다. 자신의 유익이나 목적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과 그 분의 영광만을 위해 자신을 헌신하고 용감히 싸우는 충성스러운 군사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작은 것에 최선을 다하는 충성과 오직 하나님께 드려지는 헌신을 기뻐하십니다. 진정한 충성과 헌신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65일 설교[ 12월 13일]마음을 제어하려면
 

 사람은 누구나 한 번뿐인 삶을 승리하며 살기를 소망합니다. 이에 대해 성경은 승리하는 인생을 살기 위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는 것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생각과 마음을 어떻게 가지느냐에 따라 사람의 미래가 결정되고 변화되기 때문입니다. 이에 오늘은 본문을 중심으로 마음을 제어하는 길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 마음을 제어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에 충분히 젖어 있어야 합니다. 타락한 죄성을 지니고 있는 인간은 스스로의 의지와 노력만으로는 결코 자신의 마음을 제어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뿌리 뽑으려 해도 인간 본연의 탐욕과 정욕, 거짓과 미움 등의 사악한 마음이 끊임없이 솟아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날마다 묵상하고 입술로 고백해 나간다면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의 빛에 의해 올바른 길로 인도받게 됩니다. “야웨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야웨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야웨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야웨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시 19:7,8)라는 성경의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마음을 제어하려면 사단의 생각으로부터 우리의 마음을 지켜야 합니다. 사단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에게조차 끊임없이 공격을 합니다. 도처에 우리를 실족케 하며 넘어뜨리려 하는 죄의 올무를 놓아 둡니다. 또한 사단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아(벧전 5:8) 죄에 대해 참소하며 부정적이고 패배적인 생각을 주어 마침내는 멸망에 이르게 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러한 사단의 생각으로부터 자신의 마음을 지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죄책감이나 패배감 혹은 열등감의 노예가 되어 삶을 부정적이고 소극적으로 살아간다면 마음과 영혼이 사단의 생각으로 가득해져 결국에는 인생의 패배자로 전락해 버리고 말기 때문입니다.

  마음은 생명의 근원이 되는 중요한 처소입니다. 그리고 인생과 신앙 생활을 풍요롭게 하는 능력의 근원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마음을 제어하여 승리하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365일 설교[ 12월 14일]참 삶의 길(암 5:1-15)
 

북이스라엘은 여로보암 2세 때 국제 정세의 안정과 나라의 풍요로 인해 이전 솔로몬 시대의 번영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풍요는 오히려 극심한 사치와 방탕, 우상 숭배로 이어져 하나님 앞에 큰 죄를 짓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이에 아모스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했습니다.

  오늘은 그 말씀을 통해 참삶의 길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첫째, 참삶의 길은 무엇보다 먼저 야웨를 찾는 것입니다. 아모스는 죄에 빠진 이스라엘을 향해 계속하여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것은 죄의 근원이자 죽음의 원인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의 결과는 멸망이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해 줍니다. 오늘도 하나님을 버리고 자신의 경험과 지식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결과는 멸망뿐이라는 것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둘째, 참삶의 길은 우상을 버리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건져 주시고 가나안 땅에 거하게 하신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이방신과 우상을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보다 이방의 쾌락적인 예배 의식을 더 좋아하던 이스라엘 백성은 참삶의 길을 저버려 마침내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 대신 온갖 세속적인 것을 우상시하여 참만족을 얻으려 하고 있습니다. 물질이나 쾌락, 명예 등을 우상으로 숭배하며 하나님을 떠나갑니다. 그러나 우상은 헛된 것이며 이를 숭배하는 자는 결코 참생명을 얻을 수 없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셋째, 참삶의 길은 하나님의 공의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공법을 변질시켜 편법과 불의가 난무한 사회로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사회는 참 삶의 길을 저버려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없을 뿐더러 멸망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을 저버린 자, 하나님보다 세상의 것을 더 사랑하는 우상 숭배자 그리고 하나님의 공의를 실천하지 않는 자들을 향해 하나님의 심판은 선포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에서 돌이켜 야웨 하나님을 찾음으로 참 삶의 길을 걸어가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365일 설교[ 12월 15일]말씀의 능력(암 8:11)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거나 떠날 때 기근이 다가옵니다. 오늘은 본문의 말씀을 근거로 하여 말씀의 위력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 예수님은 말씀을 통해 역사하신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8장에 보면 로마의 백부장이 하인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 예수님께 부탁했을 때 그는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예수님과 말씀이 하나라는 사실을 믿고 있었기 때문에 이와 같은 고백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말씀을 믿고 받아들일 때 예수님의 능력을 믿고 받아들이는 것이 되어 하나님의 은총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 말씀 속에 형통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함으로 형통할 수 있는 비결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그것은 ‘말씀을 늘 읽고 묵상하고 지켜 행하라’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할 것이라고 여호수아 1장 6절부터 9절까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말씀에 분명하게 서 있을 때, 성령님의 역사로 지혜와 지식과 총명과 능력을 얻어 어떠한 역경도 극복해 나가며 형통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셋째, 말씀에 대한 우리의 자세입니다. 먼저 우리는 말씀을 즐거워해야 합니다. 즐거워하지 않으면 묵상이 되지 않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신앙이 힘이 없고 무기력해지는 이유는 영혼의 영양 부족으로 인해서 생기는 현상입니다. 또한 우리는 말씀에 주의를 집중해야 합니다.

  이렇게 할 때 약속의 말씀이 살아 움직이게 됩니다. 나아가서 말씀을 입술로 시인해야 합니다. 말씀을 시인할 때 그 말씀이 믿음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말씀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믿음의 눈으로 말씀이 현실화되는 것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말씀에 대한 바른 태도를 가질 때 말씀은 역사하는 것입니다.

  말씀은 하나님이십니다. 말씀이 있는 곳에 하나님께서 계시고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씀을 듣고 묵상하고 시인하며 실천할 때 위대한 역사를 체험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365일 설교[ 12월 16일]회복시키시는 하나님(암 9:11-15)
 

본문에는 하나님께 범죄함으로 징계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회복시키시겠다는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세 가지 점을 살펴봄으로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사로잡힌 것을 돌이키심으로 회복시켜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비록 유다와 이스라엘의 범죄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으로 그의 백성을 이방인의 손에 파셨지만 하나님의 자비와 인자하심이 끝이 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은 영원합니다(대상 16:34). 이렇게 하나님은 회복시키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죄에게, 질병에게, 마귀에게, 저주와 가난에게 팔렸다 할지라도 우리가 회개할 때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에서 우리를 돌이키시고 회복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둘째, 장막을 세워 주심으로 회복시켜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포로에서 돌이키셔서 그들의 본토에 이르게 하시고 그들의 무너진 장막을 일으켜 세워 주셨으며 퇴락한 것을 보수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무너지고 퇴락한 우리의 주변 환경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우리의 범죄로 말미암아 가정이 파괴되었을지라도 회개할 때 우리의 가정을 다시 세워 주시고, 사업장이나 직장이 무너졌다 할지라도 다시 일으켜 주시며, 우리의 불순종과 범죄로 인하여 우리의 소망이 끊겼다 할지라도 회개할 때 그 소망을 다시금 부활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이름으로 일컫는 만국을 기업으로 얻게 하심으로 회복시켜 주십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일컫는 기업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의의 기업입니다. 성령 충만의 기업입니다. 치료와 건강의 기업입니다. 아브라함의 창대한 복을 누리는 기업입니다. 영원한 천국에서 주님과 함께 왕노릇하고 우주를 상속받는 기업입니다. 이와 같은 모든 것들은 우리가 오직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이킬 때 누릴 수 있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아무리 큰 죄를 범했다 하더라도 돌이켜 회개할 때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떠나지 아니하시며 회복시켜 주시는 좋으신 분이십니다

 

 

365일 설교[ 12월 17일]삶의 내리막 길과 오르막 길
 

오늘은 니느웨에 가서 회개를 선포하라는 하나님의 명을 거역하고 다시스로 도망한 요나가 겪었던 내리막 길의 삶과 오르막 길의 삶을 통해서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먼저, 내리막 길을 간 요나의 모습을 살펴 보겠습니다. 그는 “일어나서 저 큰 성읍 니느웨에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기로 작정하고 욥바로 내려가서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 그는 배 밑층에 내려가 잠을 자다가 큰 풍랑을 만났습니다. 하나님의 명을 거역한 한 사람 때문에 배에 타고 있던 모든 사람이 고난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제비를 뽑으니 요나가 걸렸으므로 그는 바다에 던져졌고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내리막 길은 쫓겨난 길이요, 버림받은 길이요, 외롭고 고독한 길입니다.

  아담으로부터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과 하나님이 계신 예루살렘을 떠나 내리막 길을 걸어왔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마귀의 꾀임에 빠져 범죄함으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 세상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러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모두 강도 만난 사람들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의를 빼앗겼고 질병으로 말미암아 건강을 빼앗겼고, 저주로 말미암아 축복을 빼앗겼고 사망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빼앗겼습니다.

  올라가는 길은 회개하지 않고는 갈 수 없습니다. 요나서 2장 2절에는 “…내가 스올(음부)의 뱃속에서 부르짖었삽더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요나 자신이 지옥까지 내려갔다고 생각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요나는 돌이켜 주의 성전을 바라보며 고통중에 부르짖어 회개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를 회복시키시고 다시 한 번 명령을 하셨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니느웨에서 회개를 선포했고 그 결과 니느웨 사람들은 재앙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 한 사람의 순종이 많은 사람을 재앙에서 건진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신앙의 내리막 길을 걷고 있다면 하루 빨리 회개하고 돌이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회개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품어 주시는 것입니다.

 

 

365일 설교[ 12월 18일]어리석은 착각(미 3:11,12)
 

 인생을 사는 동안 사람들은 자기 생각에 빠져 착각을 하는 때가 많이 있습니다. 본문의 유다의 치리자들과 거짓 선지자들도 죄악을 일삼으면서 어리석은 착각에 빠져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할 줄 몰랐습니다. 그들이 주는 교훈을 통해서 우리의 신앙 생활을 점검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첫째, 그들은 하나님을 의뢰한다고 착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 경고함에도 불구하고 영적으로 귀가 멀고 눈이 먼 치리자와 거짓 선지자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의뢰한다고 공언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입술로는 하나님을 의뢰한다고 하면서도 실상은 돈을 더 의지했습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추구했던 것입니다. 그들의 이러한 언행은 하나님을 의뢰한다는 것이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임을 모르는 어리석은 착각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전심으로 하나님을 의뢰한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세상의 것을 더 의뢰하고 있지 않습니까?

  둘째,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계신다고 착각했습니다. 그들의 조상이 하나님께 선택을 받았다는 사실만으로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고 착각한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찾아오셔서 죄인들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고 하면서 그 중심에 하나님을 모시지 않고 짐짓 죄를 범하는 자들을 어떻게 하나님께서 가까이 하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멀리 내치실 것입니다.

  셋째, 그들은 재앙이 임하지 않을 것이라고 착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 패역한 이스라엘의 멸망을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재앙이 임하지 않으리라고 호언장담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깨닫지 못한 것은 현재의 안일과 쾌락이 그들의 마음의 눈을 멀게 하였기 때문에 생긴 어리석은 착각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인간의 죄를 반드시 형벌하십니다. 죄의 대가로 죽어야 할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총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도 나태와 안일에 빠져 있으면서 신앙 생활을 잘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지는 않는지 자신을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365일 설교[ 12월 19일]칭찬을 들을 때(잠 27:21)
 

 금속은 제련 과정을 거쳐 모든 불순물을 제거해야 그 가치가 높아지고 비로소 쓸모가 있게 됩니다. 본문을 보면 은과 금은 도가니와 풀무를 통해서 제련을 하고 인간은 칭찬을 통해서 시험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칭찬을 해보면 그 사람의 됨됨이를 알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겸손하고 성실한 사람도 남의 칭찬을 듣기 시작하면 스스로 교만해지고 자기를 과신하는 사람이 되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위의 칭찬에도 불구하고 항상 겸손하고 성실한 삶의 자세를 지속하는 사람이야말로 진실로 고결한 인격과 품성을 갖춘 사람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높이셔서 많은 사람들에게 칭찬을 듣게 될 때, 더욱 겸손으로 우리의 허리를 동여야 합니다. 자신을 통하여 하늘의 권능과 기적이 나타나고 환경의 축복이 임할수록 우리는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리스도를 높이며 겸허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자신을 자랑하거나 자만하면 그런 사람은 하나님께서 친히 대적하시고 물리치십니다. 그 때문에 성경 베드로전서 5장 5절에는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남보다 못할 때는 겸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지위가 높아지고 남의 칭찬을 자주 듣게 될 때 겸손하기란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겸손을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 근본이 하나님의 본체이시지만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자신을 낮추사 죄있는 육신의 모습으로 오셔서 자신을 겸손히 우리에게 화목 제물로 내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히기까지 자신을 낮추신 예수님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높이시고 축복하실수록 우리가 더욱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고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과 몸된 교회를 섬기면 우리의 날은 장구할 것이요,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칭찬을 들을 때, 그 때가 가장 위험한 때라는 것을 명심하고 겸손으로 허리를 동여야 하겠습니다

 

 

365일 설교[ 12월 20일]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것(미 6:6-8)
 

역사가 바뀌고 시대가 변해도 하나님께서 변함없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참된 신앙의 본질이 있습니다. 그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먼저,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우리가 공의를 행하는 것입니다. 공의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속성이요 성품입니다. 하나님은 공의로 온 세상을 다스리십니다. 미가 선지자가 활동했던 남왕국 유다는 하나님께 예배는 드렸으나 진실한 회개가 없었으며, 제사는 드렸으나 참된 믿음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공의를 행할 것을 요구하셨으나, 그들은 입술로만 야웨의 이름을 불렀을 뿐 여전히 불의를 행했습니다. 오늘날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형식적인 예배가 아니라 불의를 회개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공의를 행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우리가 인자를 베푸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공의로우시며 자비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는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기본적인 원칙이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행동의 동기는 바로 사랑과 섬김이 되어야 하며, 복음을 전하는 일도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 폭력이 난무하고 범죄 양상이 잔인해져가는 것은 우리 가운데 사랑이 식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주변에서부터 작은 사랑을 실천해 갈 뿐 아니라 지역과 국경을 초월하여 그리스도의 복음 증거를 위해 사랑을 나누는 일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

  나아가,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것은 우리가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겸손은 우리가 하나님을 최상의 자리에 모시고 그 뜻에 순종하는 자세입니다. 스스로 높아진 사람 속에는 하나님께서 거하실 곳이 없습니다. 베드로전서 5장 5절에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활을 통하여 요구하시는 신앙의 본질적인 요소는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고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름진 제사보다 우리의 생활 전체를 드리는 영적 예배를 원하십니다

 

 

365일 설교[ 12월 21일]성도의 궁극적인 승리(계 12:11)
 

 우리가 사는 세계에는 물질적인 세계와 영적인 세계가 있습니다. 그런데 영적인 세계에는 우리를 살리는 영인 하나님과 우리를 죽이는 악한 영인 마귀가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마귀를 이기고 승리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첫째,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의 증거를 끊임없이 주장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보혈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의 증거가 됩니다. 예수님의 보혈은 우리의 고집을 깨뜨리고 불순종을 대속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귀가 불순종으로 우리를 얽어매려 해도 우리가 이 피를 증거로 내세우면 마귀는 물러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보혈은 우리의 건강과 치료를 보장하는 증거가 됩니다. 보혈은 예수께서 우리의 연약과 질병을 대속하기 위해 채찍에 맞으시고 흘리신 피이므로 마귀가 우리에게 병을 가져다 준다 해도 이 피를 증거로 내세우면 마귀의 역사는 물거품처럼 흩어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나아가 보혈은 예수께서 저주를 상징하는 가시관을 쓰심으로 흘리신 피입니다. 그러므로 이 보혈은 우리의 저주를 청산한 증거가 됩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대속하기 위해 흘리신 보혈은 우리가 의와 영생을 소유하게 되는 증거가 됩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예수님의 보혈을 주장할 때 마귀를 능히 이기게 됩니다.

  둘째, 우리는 말씀을 끊임없이 주장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천지와 만물을 지으셨고 예수님께서도 공생애 기간 동안 말씀으로 기적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도 믿음의 말을 통해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이와 같이 말씀에는 창조적인 위대한 능력이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을 사용할 수 있는 위대한 권세를 주셨습니다(마 16:19). 그러므로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으로써 우리의 권리를 주장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마귀를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예수님의 보혈과 하나님의 말씀을 끊임없이 주장할 때 마귀는 한 길로 왔으나 일곱 길로 도망하게 되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한 승리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365일 설교[ 12월 22일]야웨 하나님을 인하여 감사하라(합 3:17-19)
 

감사는 우리의 믿음을 생동하게 하기 때문에 우리는 범사에 감사할 일을 적극적으로 살펴보고 하나님께 항상 감사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오늘은 감사의 신앙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 우리는 극한 고난중에 감사해야 합니다. 평탄할 때는 누구나 감사할 수 있지만 환난중에도 감사하는 사람은 극히 드뭅니다. 그러나 극한 고난에 처했을 때에도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람은 참된 그리스도인입니다. 성경은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셨습니다. 범사란 좋은 일과 좋지 않은 일을 통틀어 말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제자들에게 가장 절망적인 사건이었지만 그들이 오순절날 성령을 받고 나서 이 사건이 인류 구원을 위한 가장 위대하고 축복된 사건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자마자 그들은 절망의 자리에서 뛰쳐나가 목숨을 바쳐 복음을 증거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절망적인 사건을 당했을 때는 모든 것이 탄식뿐이지만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지나고 보면 그것이 복과 영광의 계기였다는 것을 깨달을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어떤 일이든 결국 하나님께서 선을 이루실 줄 믿고 하나님께 감사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롬 8:28).

  둘째, 우리는 평범한 생활 중에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가 평범한 생활을 하면서 하나님께 감사드리면 우리의 믿음은 생동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현재 그렇게 큰 축복이나 감사할 일이 없다고 원망하고 불평하고 탄식하면 우리의 믿음은 급속히 냉각되어 버리고 말 것입니다. 이 때문에 우리는 항상 일상 생활 중에 가장 작은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큰 것에 이르기까지 항상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복, 즉 죄사함의 은혜, 성령 충만의 은혜, 치료의 은혜, 저주를 대속하신 은혜, 영생 천국의 은혜, 온갖 자연의 혜택 등에 대해 끊임없이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가 가진 것을 생각하며 감사드릴 때 하나님께서는 영화로움을 느끼시고 더 풍족한 것으로 채워 주시는 것입니다(시 50:23; 마 25:29).

  우리는 고난중에도, 평범한 생활중에도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는 신앙 태도를 지님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 더욱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365일 설교[ 12월 23일]성도의 받을 상급(계 14:13)
 

주 안에 있는 우리는 장차 하늘 나라에 가게 되면 우리의 행위에 따라 면류관을 상급으로 받게 됩니다. 오늘은 그 면류관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첫째, 썩지 않을 면류관입니다(고전 9:25). 이 면류관은 신앙의 경주에서 끝까지 충성하며 믿음을 지킨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상급으로서 변하지 않고 쇠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면류관을 얻기 위해서 모든 일에 절제하며 낙심하지 말고 인내의 경주를 계속해야 합니다.

  둘째, 자랑의 면류관입니다(살전 2:19). 이 면류관은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잃어버린 영혼을 주께로 인도하였을 때 받는 상급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역사를 베푸시기 위해 우리들이 힘써 복음을 증거하고 전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말씀을 전파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셋째, 의의 면류관입니다(딤후 4:8). 이 면류관은 이 세상에서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믿음을 지킬 때 받는 상급입니다. 선한 싸움이란 하나님의 법으로 죄악의 법과 싸우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싸움이 어렵다고 해도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성령을 의지하여 싸우면 승리하게 됩니다.

  넷째, 생명의 면류관입니다(약 1:12,2:10). 이 면류관은 예수님을 믿고 복음을 전한다는 이유로 시험과 환난이 다가올 때 끝까지 참고 충성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상급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 충성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전진해야 합니다.

  다섯째, 영광의 면류관입니다(벧전 5:3,4). 이 면류관은 최선을 다해 양무리를 양육할 때주어지는 상급입니다. 양무리를 양육한다는 것은 우리 주위에 있는 형제, 자매들을 말씀으로 위로해 주고 권면해 주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 양무리를 말씀으로 양육해야 합니다.

  우리는 믿음의 길을 최선을 다해 경주하여 하나님께서 예비하고 계신 면류관을 받음으로써 하나님과 더불어 기쁨에 동참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365일 설교[ 12월 24일]훈계로 양육하라(잠 29:15-17)
 

사람들의 가장 큰 관심사 중 하나는 ‘자녀를 어떻게 훌륭하게 양육할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근거로 그 방법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채찍과 꾸지람으로 해야 합니다(15절). 채찍과 꾸지람은 주의 사랑의 기초 위에, 그가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징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징계는 무조건 혈기나 감정만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나 사랑하는 마음에서 그의 미래를 위해 꾸짖는 것입니다. 성경은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히12:5,6)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녀들에게 사랑의 채찍과 꾸지람을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둘째, 자식이 임의로 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자유는 법의 테두리 안에서만 자유이지, 법의 테두리를 벗어나면 이는 방종이며 타락을 말합니다.

  부모가 자녀의 일을 간섭한다고 해서 자유를 구속하는 것은 아닙니다. 엘리 제사장은 아들들이 죄를 범하는데도 꾸지람이나 채찍을 가하지 아니하여 어린 사무엘을 통해 하나님의 책망을 들었습니다. 그 결과 엘리 제사장의 아들들은 모두 전쟁터에서 죽고, 자신도 의자에서 넘어져 목이 부러져 죽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삼상4:1-18). 그러므로 주의 교양으로 훈계하려면 자녀들이 하는 대로 버려둘 것이 아니라 반드시 간섭해야 합니다.

  셋째, 상벌의 법칙으로 해야 합니다. 자식이 잘하는 일에는 칭찬과 더불어 상을 주고, 죄를 범하면 엄한 꾸중과 아울러 벌을 주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죄를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죄를 지으면 벌을 받고, 선을 행하면 상급을 받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그것을 자녀에게 가르쳐야 합니다.

  자녀를 훈계하는 것은 그들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채찍과 꾸지람으로 훈계하고, 자식이 임의로 하도록 두어서는 안 되며, 상벌의 법칙을 알려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들의 장래가 보장되기 때문입니다

 

 

365일 설교[ 12월 25일]성탄절에 오신 예수님(슥 2:10,11)
 

 오늘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하는 성탄절입니다. 성탄절을 맞이하면 사람들은 카드를 보내고 선물을 교환하며 예수님의 탄생을 기뻐하고 있습니다. 2천 년 전 유대 땅 베들레헴에 오신 예수님의 탄생을 전 세계가 이처럼 소란스럽게 축하하며 즐거워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기 위함이셨습니다(눅 4:18,19). 성탄절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지상의 33년간의 생애 동안,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시고 끝없는 사랑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십자가에 올라가셔서 피흘려 돌아가심으로 우리의 죄를 다 사하시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 공로 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값없이 구원을 선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은혜를 참으로 감사하며, 믿음과 사랑과 소망을 이웃과 함께 나누는 성탄절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로 하나님과 우리를 화목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참된 평안을 주셨습니다. 그 때문에 밤에 양떼를 지키던 목자들에게 천군 천사가 아기 예수의 탄생을 말할 때,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라고 찬양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 보좌를 버리시고 낮고 천한 곳에 임하셔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 우리는 그 예수님의 용서와 사랑의 마음을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우리 주위에는 가난하고 병든 이웃들이 외롭고 쓸쓸하게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들에게 찾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이웃의 고통과 짐을 함께 나누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용서와 사랑과 화해의 마음으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화해를, 원한이 있는 곳에 용서를 가져오는 성탄절이 되도록 힘써야 하겠습니다.

  즐거운 성탄절에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여러분 모두에게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365일 설교[ 12월 26일]성령의 능력을 경험하기 위한 단계(슥 4:6)
 

 우리가 인생을 사는 가운데 힘으로도 되지 아니하고 능으로도 되지 아니하는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들에 부딪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들은 성령을 통해 해결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성령과의 교제는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오늘은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며 살아갈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첫째, 성경을 그대로 믿는 단계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기사(奇事)들은 실제적인 사건이며 오늘날도 우리의 삶 속에서 나타날 수 있는 일들입니다. 우리는 기적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저 하늘이 무너지고 이 땅이 꺼져도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은 변치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을 굳게 믿을 때 성령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의 갈보리 십자가를 의지하는 단계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의 능력을 시인한다고 하더라도, 예수님의 피의 제단인 갈보리 십자가를 통해 언약을 맺지 않으면, 깊은 성령의 능력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십자가 앞에서 예수님의 보혈을 통해 하나님과 화목한 후 예배를 드릴 때 성령의 더 깊은 능력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셋째, 원수의 세력과 싸우는 단계입니다. 우리는 거짓말이나 음란이나 탐욕 등과 같은 우리의 원수와 싸워야 합니다. 우리의 악한 습관과 악한 행실을 극복하지 못하면 성령의 능력을 체험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 성령의 깊은 능력을 체험하기 원한다면 우리는 자신의 악한 습관, 악한 행실 등을 기도와 말씀으로 반드시 극복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깊은 능력 안으로 우리를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넷째, 내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나아가는 단계입니다. 원수와의 싸움을 극복한 그리스도인은 이제 과거의 불순종, 불신앙을 청산하고 하나님 중심에 서서 살아가야 합니다. 여기까지 온 그리스도인은 성령으로 충만해질 수 있고, 힘으로도 아니되고 능으로도 아니되는 난관을 성령을 통해 극복할 수 있습니다. 무릇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은 이 단계까지 나아가 성령의 권능을 받고 모든 흑암의 세력을 물리치며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365일 설교[ 12월 27일]바벨론의 멸망(계 18:1-24)
 

 계시록에 나오는 바벨론은 영적으로 사탄의 나라를 뜻합니다.

  이제 이 세상의 마지막 날이 이르러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 나타나는 날에 바벨론은 결국 멸망당할 것을 성경은 예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심판당할 바벨론은 어떤 곳이며, 심판의 모양은 어떠할까요?

  첫째, 바벨론은 귀신과 각종 더러운 영과 각종 새가 모이는 곳입니다. 종말이 가까울수록 귀신의 권세는 더욱 결집하여 기세를 부리게 됩니다.

  공중 권세잡은 마귀는 더욱 영적으로 이 세상을 황폐시킬 것입니다. 용하다는 점쟁이를 찾아가서 점을 치거나 부적을 붙이고 굿을 하는 것은 모두 바벨론의 권세 아래로 자청해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처음에는 사탕발림처럼 달콤한 것 같지만 결국은 사람을 죽이고 패망시킬 것입니다.

  둘째, 자기를 영화롭게 하며 사치하는 것도 바벨론의 역사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바벨론의 상품은 금과 은 등 모든 보석과 사람들의 영혼까지 포함합니다. 바벨론은 아름답고 황홀함으로 사람들을 유혹합니다. 우리가 그 아름다움에 취해 하나님 섬기는 일을 멀리하다 보면 바벨론이 멸망당할 때에 그것과 함께 멸망당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재물이 있으면 그것으로 하나님의 선한 사업에 힘을 써야 합니다. 자기가 가진 재물에 만족치 못하고 모으는 일에만 급급하다 보면 탐욕의 귀신에 노예가 되어 자신의 영혼까지 멸망당하는 심판의 날을 맞이하게 됩니다.

  셋째, 재앙은 하루 아침에 임합니다. 지진이 일어나면 호화롭던 건물이 하루 아침에 무너져 내리듯이 바벨론의 멸망은 예고가 없습니다. 자기의 재산은 고사하고 영혼만이라도 건질 수 있다면 천만 다행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예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고 경고하십니다(4절).

  우리는 재림의 복음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곧 주님이 도적과 같이 이 땅에 오실 것이므로 항상 주님 맞을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러나 바벨론의 귀신 숭배와 사치와 쾌락에 젖어 살면 도리어 바벨론과 함께 멸망당하고 만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365일 설교[ 12월 28일]선한 목자를 버린 못된 양떼(슥 11:4-14)
 

 오늘 말씀인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은 어려운 상황에 처하자 거짓 목자들이 양떼를 버리고 모두 떠나버린 상황을 보여 주며 참된 목자상이 무엇인지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 참된 목자상은 동시에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표입니다.

  첫째, 하나님은 스가랴에게 잡힐 양떼를 먹이라고 명하셨습니다. 5절에 목자들은 양떼들을 서로 사거니 팔거니 하면서 그들을 전혀 불쌍히 여기지 않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와중에서 양떼들이 이제 곧 도살될 직전(잡힐 양떼)에 처해 있자 하나님은 스가랴를 보내어 이 불쌍한 양떼들을 먹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선한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오늘도 선한 예수님을 본받은 우리들은 마귀에게 잡혀 죽기 일보 직전까지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양떼를 먹이는 직분자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둘째, 선한 목자는 삯꾼 목자들을 끊어 버리고 “은총”과 “연락”(연합)이라는 두 막대를 취하여 양떼들을 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떼들은 이 선한 목자를 거부했습니다. 그러자 “은총”이라는 막대기가 잘려 졌습니다. 즉, 하나님의 친백성이라 할지라도 은총을 끊겠다는 표시였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선한 목자되신 예수님의 인도하심을 거부하고 도리어 배척하고 있다면 하나님의 은총을 받을 수 없습니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시지만 그 아들을 거부하는 자들에게는 진노하시는 것입니다.

  셋째, 결국 선한 목자가 그들의 거부로 더 이상 양을 칠 수 없게 되자 그 삯으로 은 삼십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종들을 매매할 때 주는 가격입니다(출 21:32). 선한 목자를 끝까지 인정치 않고 무시한 행동이 극에 달하자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연합” 관계를 끊겠다는 표시로 “연락”이란 막대기를 잘라 버리게 하셨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선한 목자되신 예수님의 인도를 끝까지 포기하고 거절하며 무시한다면 하나님과의 연합 관계가 끊어지게 되고, 무시무시한 악한 목자의 손에 붙혀져서 영영히 고통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한 목자를 따르는 선한 양떼가 되어 하나님과의 연합 속에서 그의 충만한 은총 가운데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365일 설교[ 12월 29일]작고도 가장 지혜로운 것(잠 30:24-28)
 

땅 위에 있는 동물과 곤충 중에는 작지만 지혜로운 것 네 종류가 있습니다. 그것은 개미와 사반과 메뚜기와 도마뱀입니다. 이들을 통해서 우리가 배울 교훈은 무엇일까요?

  첫째, 개미는 먹을 것을 여름에 예비합니다. 여름은 무더워서 사람들도 모두 일하기 싫어하는 계절이지만 지혜로운 곤충은 남들이 쉬는 시간에도 열심히 일을 함으로 일하지 못할 시기가 오더라도 넉넉히 살 수 있게 됩니다. 우리도 남들이 일하기 싫어하는 새벽이나 밤 시간에 개미처럼 부지런히 일을 해서 일하지 못할 노후를 대비하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둘째, 사반은 약한 종류이지만 바위 위에 집을 짓습니다. 산꼭대기 바위 위에 집을 짓기란 장사도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약한 사반이 힘센 장사가 못해내는 일을 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도 힘이 없지만 하나님을 의지하면 힘센 장사가 하지 못하는 일을 감당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셋째, 메뚜기는 임금이 없지만 떼를 지어 질서 있게 다니며 어느 때는 간섭하지 않더라도 자체적으로 질서 있게 일을 잘 처리해 나간다고 합니다. 우리는 메뚜기 떼를 통해서 협동과 질서를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가 교회나 가정, 혹은 사회에서 어떠한 위치에 있든지 자신의 위치를 지키며 각자가 맡은 일을 서로 돕고 협동할 때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 할지라도 능히 이룰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넷째, 도마뱀은 손에 잡히는 하찮은 것이지만 아무도 못 들어가는 왕궁을 출입합니다. 오늘날에도 생존 경쟁이 치열하여 전문적 학업이나 직종에 임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찮은 도마뱀이 자기의 처지보다는 담대한 용기로 왕궁에 무사히 들어가는 것처럼 우리도 어떤 난관이라도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도전하면, 미천한 사람이라도 왕궁같이 들어가기 힘든 곳도 능히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을 사는 지혜와 명철은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습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와 명철로써 성공적인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365일 설교[ 12월 30일]둘째 사망에 들어가는 자들(계 21:8)
 

우리 인생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은 영원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사람은 천국에서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지옥에서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둘째 사망’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 사망은 영혼이 육체와 분리되어 이 땅에서 죽는 것이고, 둘째 사망은 영혼이 하나님과 분리되어 영원히 버림을 받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둘째 사망’에 들어가는 자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먼저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도 회개치 않는 자들입니다. 즉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알면서도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 세상의 자랑을 좇아 범죄하고 하나님이 두려워 전전긍긍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즉 죽어도 예수는 안 믿기로 마음속에 결정한 사람들로서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고 예수님께서도 메시아가 아니며, 인간은 죽으면 한줌의 흙으로 돌아갈 뿐 내세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입니다.

  또한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입니다. 즉 자기의 목적 달성을 위해 거침없이 악을 행하며 다른 사람의 생명을 파리 목숨보다 못하게 여기는 자들입니다. 또한 행음자들입니다. 즉 육체적인 환락에 젖어 방탕한 삶을 일삼는 자들입니다(히 13:4). 또한 점술에 능통한 술객들입니다. 즉 모든 궤계와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이며, 주의 길을 굽게 하는 자들입니다(행 13:10).

  또한 우상 숭배자들입니다. 즉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거나,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숭배하는 대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출 20:5). 마지막으로 상습적이고 악의에 찬 거짓말을 하는 자들입니다. 즉 언제나 거짓말로 사람들을 미혹하여 진리에서 떠나게 하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우리 주위에서 둘째 사망을 향해 가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고 주의 복음과 사랑으로 그들을 사망길에서 건져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이 둘째 사망에 들어서지 않도록 늘 깨어 기도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이 다 회개하고 둘째 사망에 들어가지 않기를 원하고 계십니다(벧후 3:9).

 

 

365일 설교[ 12월 31일]야웨를 대적하는 일들(말 3:7-18)
 

오늘날 사람들은 의식적으로나 혹은 무의식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삶을 태연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외적으로 볼 때는 참으로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 같은데 실상은 그렇지 못할 때가 너무나 많은 것입니다. 그러면 본문을 통해 하나님을 대적하는 삶은 어떤 것인지 알아보겠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규례를 어기는 삶입니다(7절). 우리는 십계명 중, 제1계명부터 4계명까지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규정한 계명 인데 우리는 이 계명을 철저히 지켜야 합니다(출 20:3-11). 즉 다른 신을 섬기고 우상 숭배하며 하나님의 성호를 욕되게 하고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므로 결코 이러한 죄를 범해서는 안 됩니다.

  둘째, 십일조와 헌물을 도적질하는 삶입니다(8-12절).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 것을 하나님 앞에서의 도적질로 규정하고 계십니다. 아직도 하나님을 믿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자기 생각대로 여유가 있으면 십일조를 드리고, 없으면 안 드리며 내게 좋은 것이 생겼을지라도 적당히 자기 생각대로 처리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이는 하나님을 크게 슬프시게 하고 정면으로 대적하는 결과를 낳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십일조와 헌물을 도적질한 것이 있으면 회개하고 돌이켜야 하겠습니다.

  셋째, 하나님께 대한 망령된 말들을 하는 삶입니다(13-18절).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예수님을 통해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라고 하셨습니다. 이 좋으신 하나님을 우리가 잘 믿으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거역하며 “하나님을 믿어 봤자 소용이 없다”,“예수님을 믿는 것은 다 헛것이다.”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 되고, 결국 화를 자초하게 되어 하나님의 은총을 누릴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은 금년의 마지막 날입니다. 여러분은 금년 한 해를 어떻게 사셨습니까? 만일 여러분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삶을 살았다면 깊이 회개하고 모든 죄를 청산한 후에 새로운 해를 맞이해야 하겠습니다. 새해에는 여러분 모두에게 하나님의 복이 충만하게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출처 : RED COMPASS 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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