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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365일설교 9월1일~30일

by 【고동엽】 2022. 12. 3.
365일 설교[ 9월 1]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받는 복            {목록 돌아가기}
 

본문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가 받는 복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이러한 복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수고한 대로 거두는 형통의 복을 받습니다(2절). 열심히 노력하고 땀을 흘려도 하나님께 형통의 복을 받지 못한 사람은 그 모든 노력의 열매를 거두지 못하고 다시 빈 손으로 남게 됩니다. 생활하다 보면 우리는 사기나 술수에 걸리거나 뜻하지 않은 자연 재해로 말미암아 계획 가운데 공들여 쌓아 왔던 모든 것들을 하루 아침에 잃어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야웨를 경외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그 손으로 하는 범사에 복을 내리시고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므로 수고한 일에 열매를 얻고 형통하게 됩니다.

  둘째, 가정이 화목하고 가족이 건강한 복을 받습니다(3절). 가정의 화목과 가족의 건강은 행복한 가정 생활의 필수 조건입니다. 많은 재산과 사회적인 명예가 있다 해도 가정이 불화하여 서로 미워하고 싸우거나 혹은 가족 중 한 사람이라도 병들어 있다면 그러한 부와 명예도 소용이 없습니다. 가산이 적어도 야웨를 경외하는 것이 크게 부하고 번뇌하는 것보다 낫다고 성경은 교훈하고 있습니다(잠 15:16). 오직 야웨를 경외하는 자만이 이러한 복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 평생 동안 복을 누릴 뿐 아니라 그 후손까지도 복을 얻게 됩니다(5,6절). 우리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비롯한 수많은 신앙의 위인들에게 형통의 복과 더불어 항상 그 후손에게까지 미칠 축복을 약속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신명기 12장 28절에서도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모든 말을 너는 듣고 지키라 네 하나님 야웨의 목전에 선과 의를 행하면 너와 네 후손에게 영영히 복이 있으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얻는 재물과 명예의 복은 잠시 후면 사라질 일시적인 것이지만 야웨를 경외하는 자의 누릴 복은 그 사람 뿐 아니라 후손 대대에까지 미칠 영원한 복인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면 영혼의 구원 뿐 아니라 이 땅에서의 삶 또한 복을 받아 형통케 됩니다. 그러므로 “주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시 16:2)고 고백한 다윗처럼 야웨를 경외함으로 하나님께로부터 풍성한 복을 받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부탁 드립니다

 

 

365일 설교[ 9월 2]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
 

누구나 일생을 살아가면서 많은 사람들과 함께 일합니다. 그런데 함께 일하는 사람들의생각과 뜻이 일치하면 하는 일이 형통하지만, 생각과 뜻이 서로 맞지 않으면 일을 제대로 추진할 수 없습니다. 바벨탑을 쌓던 사람들은 생각과 뜻이 일치하였기 때문에 그 하는 일을어느 누구도 막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이 하는 일을 중지시키기 위해서 언어를 혼잡케 하여 그들이 서로의 언어를 알아듣지 못하도록 만드신 것이었습니다.

  본문은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1절). 즉,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과 함께 천국 사업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천국 사업에 동참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아보겠습니다.

  먼저, 하나님과 함께 일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깨어져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인본주의적인 태도를 버리고 깨어지지 않으면 하나님의 동업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깨어져서 모든 일에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주여, 살든지 죽든지 흥하든지 망하든지 성하든지 쇠하든지 주님께서 맡아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의지하면 하나님께서 가까이 오셔서 우리를 책임지시고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과 함께 일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생활 속에 하나님의 생각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두 사람이 같이 일할 때 두 사람의 생각이 일치되어야 함께 일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일하시도록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생각을 우리 생각 속에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 말씀을 읽고 설교 말씀을 듣고 성령님의 도우심을 통하여 하나님의 생각을 우리의 생각 속에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여 하나님의 생각과 우리의 생각이 같아지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일할 수 있습니다.

  주를 믿는 우리들은 하나님과 함께 우리의 운명과 환경을 창조해 나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 앞에서 깨어지고 우리의 생각 속에 하나님의 생각을 받아들이면 우리는 하나가 되어 하나님과 함께 일하게 되므로 언제 어디서나 성공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365일 설교[ 9월 3]치료의 근원되신 하나님
 

본문은 엘리후가 하나님께서 병으로 고통받는 사람을 끌어 올리시는 장면을 욥에게 말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오늘날도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대속의 은총을 통해 파멸과 죽음의 질병에 처한 인류를 구해 주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치료는 어떻게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고 계실까요?

  첫째,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영혼을 치료하십니다(24,28절). 사람들은 치료가 외부적인 데서 오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실제로 치료는 영에서부터 출발하여 혼으로 흘러들어갑니다. 죄로 인해 인간의 영은 모두 죽었으며 이로 말미암아 인간의 마음은 부정적으로 변해 파괴적인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모셔들일 때,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의 보혈을 통해 우리의 죄를 청산하시고 마음의 죄책감을 없애 주셔서 담대한 마음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 그분과 더불어 교제할 수 있도록 해 주시는 것입니다(요일 3:21,22).

  둘째,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도덕적 생활을 치료하십니다(26절). 우리의 죄가 주의 보혈로 씻겨지고 영과 마음이 치료를 받으면 우리의 도덕적 생활에 치료가 나타납니다. 그래서 불효, 음란과 방탕, 거짓된 삶, 이웃을 해치는 삶, 탐심과 욕심을 치료합니다. 도덕적 생활을 치료받은 사람만이 인생을 맑고 밝고 환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셋째,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육체를 치료하십니다(25절). 사람이 육신적으로 건강을 회복하게 되는 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뜻입니다(마 10:8).

  많은 사람들이 수많은 질병의 치료를 위해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우리의 영혼과 도덕적 생활이 치료받은 후 육체의 질병을 위해 기도해야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대개 육체의 질병은 마음과 생활이 병들 때 따라오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치료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모셔들이고 하나님께 나아가면 하나님의 치료가 우리의 영과 마음과 생활과 육체에 넘쳐나 우리는 맑고 밝고 환한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365일 설교[ 9월 4일]성도의 겸손
 

성도의 겸손(시 131:1)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사람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요?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자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첫째, 겸손한 자는 마음이 교만하지 않습니다. 겸손한 자는 오직 절대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인정하고 의지하며 범사에 그를 높이고 감사하는 태도를 가진 자입니다. 그러나 교만한 자는 자기를 과대 평가하여 분수에 넘치는 말과 행동을 함으로 말미암아 결국은 패망의 길을 자초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하나님과 사람 앞에 겸손한 마음의 자세를 가져야 하겠습니다.

둘째, 겸손한 자는 눈을 높은 데 두지 않습니다. ‘눈을 높은 데 둔다’는 말은 동료와 경쟁하여 더욱 나은 것을 성취하려는 지극히 인간적인 심리를 말합니다. 이는 하나님께 반항하고 그와 겨루어 이기려는 인간의 패역한 태도를 의미합니다.

성경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눅 14:11)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항상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자세를 취할 때 성령님께서는 우리를 성공적인 신앙인으로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셋째, 겸손한 자는 자신의 힘에 벗어나는 일들에 대하여 헛된 힘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탐욕은 자기 분수를 뛰어 넘은 욕심으로, 자기가 소유한 것으로 만족치 않고 분수 이상의 것을 취하려는 욕망을 말합니다. 오늘날도 탐욕의 죄는 인류에게 전쟁과 가난과 저주와 비참한 죽음을 가져다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신분과 처지를 분명히 깨닫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직분과 사명에 자족하면서 최선을 다해 성실하게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겸손한 모습으로 신앙 생활을 하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만일 겸손한 모습을 잃어가고 있다면 그 즉시 하나님 앞에 엎드려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교만치 아니하였다고 한 시인의 고백처럼 하나님 앞에서 언제나 겸손한 모습으로 살아야 하며 또한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겠습니다

 

 

365일 설교[ 9월 5일]예비하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예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암사자를 위하여 식물을 예비하시며, 까마귀 새끼를 위하여 먹을 것을 예비하신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무엇을 예비하셨으며, 예비된 복을 받는 우리의 자세는 어떠해야 하는지를 알아보겠습니다.

  먼저, 구약을 통해서 나타나신 하나님은 ‘예비하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지으시기 전에 먼저 만물을 창조하셨고, 동방에 에덴을 창설하셔서 그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예비해 주셨습니다. 또한 앞은 홍해수요, 뒤는 애굽 군대의 추격을 받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 바다 밑에 길을 예비하시고 그들을 인도하셨던 것입니다.

  그 다음, 예비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는 신약 에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신약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예비하심의 핵심은 ‘구원’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후 인류는 죄로 인해 영이 죽었을 뿐 아니라 질병으로 인해 육체도 끝내는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운명을 맞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환경에는 저주의 가시와 엉겅퀴가 돋아나 이마에 땀을 흘리며 수고해야 살아갈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비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예비해 두셨고 때가 되매 그를 세상에 보내 주심으로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이와 같이 예비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받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믿음과 순종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예비하심을 우리가 진실로 믿는다면 우리는 범사를 하나님께 맡기고 순종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순종하기 위해서는 교만과 탐욕을 버려야 합니다. 잠언 16장 18절에는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라고 말씀하고 있고, 야고보서 1장 15절에는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의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을 예비하셨음을 확실히 알고 오직 믿음과 순종으로 예비된 복을 받아 누리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365일 설교[ 9월 6일]형제가 동거하는 복
 

본문에는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형제와 연합하여 동거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켜야 할 조건이 있습니다. 이에 대해 몇 가지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첫째, 서로 용서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은 죄된 본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받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상처를 받았을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고통을 통해서 나를 용서하신 것같이 이웃을 용서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용서의 힘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밑에 나와서 기도하여 용서할 수 있는 힘을 공급받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둘째, 이해와 동정이 있어야 합니다. 이해와 동정은 자신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그 사랑에 의지해서 주의 능력으로 우리 마음을 넓혀 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시 119:32).

  셋째,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이웃을 이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나도 살고 남도 살리자.’라는 마음 자세를 가지고 공동의 이익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서로에게 진실하고 겸손해야 합니다. 상대방을 속이거나 무시하고 얕보는 태도를 가지고는 이웃과 함께 연합하여 동거할 수 없습니다.

  넷째, 적극적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은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남에게 베푸는 것입니다. 사랑은 고통당할 때도 오래 참습니다. 상대의 유익을 위해서 적극적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랑은 우리의 힘으로는 만들어 낼 수가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밑에 나아가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영생을 주시기 위해 그 몸을 아끼지 아니하고 우리에게 내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아들일 때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아름답게 보시는 것은 그의 자녀들이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동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용서하며 이해하고, 겸손하게 서로를 세워 주며 적극적으로 사랑할 때 우리는 참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성도가 될 것입니다.

 

 

365일 설교[ 9월 7일]부요의 복을 받기 위한 자세
 

성경은 부요와 축복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임을 가르치고 있습니다(고후 8:9).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그의 아들 이삭, 손자 야곱은 부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또한 동방에서 가장 부자였던 욥은 시험을 이기고 난 후 갑절의 복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들은 어떻게 하여 부요하게 되었을까요? 오늘은 축복의 영적 법칙과 그 법칙을 적용하는 자세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합니다.

  첫째, 부요가 하나님의 복임을 안 이상 우리는 축복의 영적 법칙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복을 받아야 합니다. 그 법칙은 ‘심고 거두는 법칙’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평생에 획기적으로 두 가지를 하나님께 심었습니다. 하나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인 멜기세덱에게 자기의 소득의 십일조를 드린 것이고(창 14:20), 또 하나는 그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로 드린 것입니다(창 22장). 우리가 심을 때 반드시 물질로만 심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노력과 헌신으로도 믿음의 씨앗을 심을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반드시 심어야 거둔다는 것입니다(갈 6:7).

  둘째, 하나님께 심는 자세를 올바로 가져야 합니다. 본문 6절과 7절에는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심을 때 적게 심고 많이 거두기를 바란다면 그것은 잘못된 태도입니다. 이런 사람은 밭 한 귀퉁이에 씨앗을 조금 뿌려놓고 밭 전체에서 수확하려는 사람과 같습니다.

  또한 인색한 마음이나, 타의에 의해서 강제로 심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성경은 스스로 마음에 결정하여 기쁨으로 즐겨 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의 사랑을 입게 되고 풍성하게 채워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복받기를 원하지만 복받기를 원하는 만큼 기쁨과 감사로 즐겨 심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천국을 위해서 기쁨과 감사로 우리의 몸과 시간과 물질과 노력을 심을 때 이 땅에서도 잘되고 저 천국에서도 상급과 칭찬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365일 설교[ 9월 8일] 영적 전쟁
 

성도들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끊임없이 영적인 전쟁을 해야만 합니다. 우리가 하늘 나라에 갈 때까지 계속해서 해야 하는 이 영적 싸움의 대상은 과연 무엇일까요?

  첫째, 우리는 모든 인본주의적 이론을 파기하기 위한 싸움을 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들으면서 자기의 생각의 기준대로 선과 악의 이론을 내세웁니다. 이러한 인본주의적인 선과 악의 이론은 조물주와 대등한 위치에 서 보겠다는 피조물의 교만입니다.

  그러한 이론을 내세우는 한 하나님께서는 결코 복을 주시지 않습니다. 마귀는 우리에게 선악의 이론을 내세우도록 충동시키나 우리는 이를 단호히 떨쳐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악이란 기준으로 우리를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은혜로써 우리를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의지대로 선악을 판별하며 살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하나님께 무조건 순종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 우리는 하나님을 높이고 영화롭게 하는 것을 방해하는 그 모든 것들과 싸우는 싸움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배하고 높이기 위해 지음받은 피조물로서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 지음받은 존재임을 말씀하셨습니다(사 43:21). 우리의 본분은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 명령을 지키는 것뿐입니다(전 12:13).

  셋째, 우리는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기 위한 싸움을 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의 생각이 그리스도께 사로잡히지 않으면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에 사로잡혀 멸망의 길로 걸어가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사로잡혀 생명과 자유와 복을 누리려면 성령님께 의지하여 성령의 감화와 능력이 임하도록 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읽고 듣고 묵상하여 우리의 생각에 예수님의 생각을 접붙여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씀을 좇아 우리의 생각을 훈련하고 믿음으로 살며 오직 하나님을 높이고 그에게 영광 돌리는 삶을 살 때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365일 설교[ 9월 9일]이웃과 동행하는 삶을 살려면
 

아무리 세상에 대해 혐오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정작 사회라는 테두리를 벗어나서는 생존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웃과 올바른 관계 속에서 동행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첫째, 주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먼저 이웃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영생에 이르게 하는 믿음을 주어야 하겠습니다. 또한 우리는 이웃에게 천국과 재림에 대한 소망을 주어야 합니다. 아울러 우리가 받은 하나님의 사랑을 이웃에게도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믿음, 소망, 사랑을 이웃에게 주되 의무를 초월해서 힘껏 주어야 하겠습니다.

  둘째,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먼저 상대방을 섬기려고 하지 않는 관계는 쉽게 깨어지고 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은 하나님을 섬길 뿐 아니라 겸허한 자세로 정성을 다해 이웃을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자아가 철저히 깨어져야 합니다. 자신을 철저히 깨뜨렸을 때만이 하나님과 이웃을 올바로 섬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셋째, 타인을 성공시키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남을 성공시키는 사람은 종국적으로 자신도 성공하게 됩니다. 그러나 남을 짓밟고 대신 성공을 차지하려는 사람은 자신도 파멸하고 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부패한 옛사람의 습관을 벗어 버리고 남이 잘될 때 함께 기뻐하며 힘닿는 대로 남을 성공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넷째, 타인의 장점과 밝은 면을 인정하고 축복해 주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마땅히 사랑으로 남의 허물과 부족함을 덮어 주고 그의 밝고 좋은 면을 인정하고 축복함으로써 우리의 이웃이 삶의 새로운 용기와 의욕을 얻어 성공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 주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웃을 자신의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 삼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웃과의 관계가 ‘목적’이 되지 않고 ‘수단’이 되고 만다면 우리는 이웃과 동행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강도 만난 자의 진정한 이웃이 되어야 하겠습니다(눅 10:36,37)

 

 

365일 설교[ 9월 10일]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인생을 살다보면 여러 가지 어려움에 부딪힐 때가 있습니다.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생활 중에 다가오는 어려움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우리에게 곤고한 날이 다가온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여기에 대해 성경 본문은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과연 무엇을 생각해야 할까요?

  첫째, 우리의 삶을 예비하신 하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만세 전부터 이미 구속하시고 지명하여 부르신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사 43:1). 그러므로 우리를 자녀로 부르신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의 인생 길을 예비해 주시지 않을 리가 없습니다. 바로 그 좋으신 하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앞길을 예비하고 계시다는 확신을 가질 때 우리는 곤고한 날에 인내할 수 있게 됩니다.

  둘째, 우리의 무거운 짐을 맡아 주시는 하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짐을 주님께 맡길 때, 주님께서 그 모든 짐을 맡아주시고 성령을 통해서 우리의 상하고 지친 심령을 치료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간의 수단과 방법에만 의지하여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면 더 큰 어려움에 빠져들게 됩니다. 그렇게 하다 고난에 지쳐 신앙도 포기하고 좌절해 버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곤고한 날에 주님께 나아와 모든 짐을 맡겨 버리고 안식을 얻어야 하겠습니다.

  셋째, 우리를 보호하시고 지켜 주시는 하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흔히 고난에 처하면 하나님께서 자신을 버렸다고 오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의 안과 밖에서 우리를 보호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떠한 상황에 처하든지 우리에게는 항상 도우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곤고한 날이 전혀 없을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고난이 없으면 우리는 무기력하고 나약한 인생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고난이 다가올 때 오히려 하나님을 향한 굳건한 믿음으로 극복하면 우리의 인생은 더욱 값지고 보람찬 인생이 될 것입니다.

 

 

365일 설교[ 9월 11일]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라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약하게 만드는 가시를 지니고 있습니다. 초대 교회의 위대한 복음 전도자요, 사도 중의 사도요, 신학자이기도 한 바울에게도 가시가 있었습니다.

  가시는 우리를 찌르고 상처를 입히기 때문에, 우리는 가시를 뽑아 버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 본문을 살펴볼 때, 우리를 약하게 만드는 가시가 도리어 큰 유익이 되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가시는 우리를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도록 만들어 주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의 가시는 그의 눈에 심한 고통을 주었던 ‘안질’이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그에게는 많은 가시가 있었습니다(10절). 그러나 사도 바울은 가시로 말미암아 약해질 때,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오히려 강해졌고, 환난 가운데 우겨쌈을 당할 때도 싸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체험했습니다.

  바울과 똑같지는 않지만 우리에게도 가시가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가시가 주는 고통과 상처가 크면 클수록 우리는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고, 그 은혜가 넘치게 됩니다.

  또한 가시는 우리를 겸손하게 만들어 하나님의 존귀와 능력으로 옷입게 합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가시를 제하여 주시라고 세 번이나 간구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가시를 제하여 주시지 않고 대신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9절).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계시가 너무 크고 중대했으므로, 하나님께서는 그가 교만하지 않도록 가시를 허락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강할 때에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는 줄로 생각합니다만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능력은 아주 약하고 보잘것없는 데서 온전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시로 말미암아 인간의 약함을 뼈저리게 느낄 때 전적으로 그리스도를 의지하게 되고 하나님의 은혜로 강해지는 비결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아무리 기도해도 가시가 없어지지 않으면 거기에는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이 있는 것을 믿고 감사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가시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 가시가 여러분의 삶을 변화시켜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365일 설교[ 9월 12일]목자되신 야웨
 

 본문의 내용은 왕이 자기의 사랑하는 자를 찾고 찾다가 결국 발견하여 그 사랑하는 자를 왕의 집, 왕의 처소로 데리고 가기까지 놓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목자되신 야웨께서 우리를 천국갈 때까지 놓지 아니하시고 보살펴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은 우리의 목자되신 야웨와 우리의 바른 관계, 그리고 우리가 갖추어야 할 신앙의 바른 자세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첫째, 우리의 목자되신 야웨는 우리에게 부족함이 없이 채워 주십니다. 다윗은 “야웨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23:1)라고 고백했습니다. 목자되신 하나님께서는 그의 양인 우리를 항상 십자가 밑의 푸른 초장과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셔서 의와 화목, 치료와 축복, 그리고 믿음, 소망, 사랑의 꼴을 먹이시고 물을 마시게 하심으로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것입니다.

  또한 목자되신 야웨께서는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의의 길로 인도하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부족함이 없습니다. 야웨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받는 환경적인 스트레스를 말끔히 씻어 주시고 우리의 시든 영혼을 말씀의 꼴과 성령의 물로 소생시켜 주시며 우리를 의의 길로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둘째, 우리의 목자되신 야웨 하나님은 언제나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비록 우리가 어둡고 절망적인 사망의 골짜기에 빠져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하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시 23:4).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담대하고 소망찬 삶의 자세를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셋째, 우리의 목자되신 야웨 하나님은 우리의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시고 우리의 머리에 기름을 발라 주십니다(시 23:5). 그러므로 우리는 원수가 우리를 조롱하며 해치려 할 때도 부정적인 태도를 버리고, 하나님의 상이 우리 앞에 진설될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수의 목전에서 우리에게 성령의 기름을 부어주심으로 원수보다 높여 주실 것을 믿고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의 목자되신 하나님은 우리를 평생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그의 양된 우리는 굳세고 담대한 믿음과 감사의 자세로 목자되신 하나님을 따라가야 할 것입니다

 

 

365일 설교[ 9월 13일]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려면
 

예수님께서는 우리 안에 계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 까닭은 무엇일까요?

  첫째, 불신앙의 죄를 저지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환경을 바라보고 믿음이 약해지면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우리가 감각적인 지식에 의존하고 말씀에 서지 아니하면 살아계신 예수님의 영광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행할 때 우리 속에 계신 예수님께서 능력을 나타내십니다.

  둘째, 불순종의 죄를 저지르기 때문입니다. 사울 왕은 하나님께 불순종의 죄를 범함으로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알고도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불순종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역사하실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환경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믿음으로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기적을 베풀어 주십니다.

  셋째, 우상 숭배의 죄를 저지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우상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세상을 겸하여 섬길 수 없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돌아서서 하나님 중심으로 설 때 우리의 생애 속에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넷째, 마음이 두려움에 사로잡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마음속에 두려움을 가지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기 때문입니다(요일 4:18). 그러면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속에서 두려움을 몰아내야 합니다. 두려움은 마음속에 믿음이 들어오면 없어지게 됩니다. 이 믿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습니다(롬 10:17). 우리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가득차면 두려움이 다 내어쫓기고 하나님의 평안이 마음속에 가득차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불신앙의 죄, 불순종의 죄, 우상 숭배의 죄를 회개하고 마음속의 두려움을 말씀으로 몰아내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에 굳게 서서 믿음으로 나아갈 때 우리는 하나님의 충만하신 능력을 삶 속에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365일 설교[ 9월 14일]인생의 세 가지 발견
 

과학의 발명과 발견은 일시적으로 물질적인 환경과 생활의 변화를 가져다 줄 뿐,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는 변화도 변경도 시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존재와 운명과 미래의 영원한 삶에 결정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발견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일까요?

  첫째, 잃어버린 자아의 발견입니다. 모든 인간은 자아를 잃어버리고 자신이 어디서 와서 무엇 때문에 살며 어디로 가는지 전혀 알지 못하고 정욕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부귀, 영화, 공명에 빠져 삶의 방향을 잃어버리면 죄책과 허무와 무의미, 죽음과 무(無)의 공포 속에서 버림받고 말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아무리 과학을 발달시켜도 인간은 절망적인 자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해야만 합니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의 구주로 오셔서 인류의 죄와 저주와 절망과 질병과 죽음을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사흘만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 오늘날에는 성령으로 우리 가운데 역사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면 우리의 잃어버린 자아도 찾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체험입니다.

  셋째,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자신을 발견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보혈로 죄 씻음받고 성령의 인침을 받은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존재들입니다.

  성경에서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지혜와 의와 거룩함이 되셨습니다. 또한 구속함이 되셔서 죄와 병, 마귀의 종살이, 저주와 죽음에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자아를 발견할 때 우리는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된 참된 자아를 발견할 때 비로소 우리의 미래에 참된 꿈이 있게 되고, 우리의 운명과 환경을 새롭게 창조해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365일 설교[ 9월 15일]하나님의 프로그램
 

우리 하나님께서는 무슨 일을 하시든지 만세 전에 미리 계획을 세우시고 그 프로그램대로 일을 행하십니다. 본문을 근거로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 개개인의 삶 속에 역사하시는가를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들 개인에게는 모두 하나님의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본문은 “내 형질이 이루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나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되었나이다(16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힘쓰며 애쓰고 우리의 계획대로 프로그램을 만들어 인생을 살아간다 해도 하나님의 계획에서 벗어난 삶은 슬픔과 고통, 절망과 상처투성이의 삶이 될 뿐입니다.

  하나님의 프로그램은 개개인마다 다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자신에게 계획되어진 프로그램을 따라 살도록 결정해야 합니다. 우리 마음대로 ‘의사가 되겠다’, ‘목사가 되겠다’, ‘사업가가 되겠다’라고 결정해도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우선되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공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의 프로그램을 잘 알고 그에 따라 순종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일은 항상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하나님 앞에서 기다리는 시간을 가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프로그램을 아는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인내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 인생의 주인이시라는 것을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프로그램을 따라간다 해도 평탄한 길만 계속되지는 않습니다. 시련과 고통, 오해와 박해, 모함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영혼이 잘 됨같이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며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는 축복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프로그램에 따라 착하고 충성된 종으로 살아갈 때 어떤 역경 속에서도 하나님의 소망과 축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프로그램은 선에 있고 악에 있지 않습니다. 성공에 있고 실패에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늘의 프로그램을 알고 하나님의 계획대로 순종하며 살기를 힘쓰는 자가 되어야겠습니다

 

 

365일 설교[ 9월 16일]신앙 성장을 위한 세 가지 진리
 

본문에는 우리의 신앙 성장에 필요한 세 가지 진리가 제시되어 있습니다. 그 진리는 어떤 것일까요?

  첫째,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진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은 바로 내 자신이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바 된 절실한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을 때 법적으로 우리도 함께 죽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죄의 호적에서 사망 처리된 존재들입니다(롬 6:6).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죄에 매여 종노릇 한다면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겠습니까? 주를 믿는 우리는 죄에 대하여, 저주에 대하여 죽고 예수님 안에서 새로 태어났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이 믿음에 서야 합니다. 죄인이라는 생각, 저주받은 존재라는 생각을 완전히 바꾸고 주 안에서 자유를 얻었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둘째,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셨다는 진리입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고후 5:17). 그러면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성경은 예수는 우리의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다(고전 1:30)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혜되신 예수님 때문에 세상에서 꼬리가 되지 않고 머리가 되며, 의가 되신 예수님 때문에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 세상의 자랑을 추구하지 않고 오직 예수님의 의를 추구하며 그의 형상을 닮아갑니다. 나아가 우리는 구속함이 되신 예수님 때문에 죄인에서 의인으로, 하나님과 원수된 존재에서 화목하는 존재로, 병든 존재에서 치료받은 존재로, 영벌을 받을 존재에서 영생할 존재로 변화된 것입니다.

  셋째,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산다는 진리입니다. 믿음이란 눈에 안 보이는 것, 없는 것을 보이는 것, 있는 것으로 여기는 신념을 말합니다. 우리는 주 안에서 늘 복받은 자신의 모습을 꿈 꾸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담대하게 시인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 삶의 현장에 위대한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께서 내 안에 사셨다’는 믿음을 분명히 가질 때 우리의 믿음이 장성하여 마귀의 참소와 세속으로 향하는 정욕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위대한 자녀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365일 설교[ 9월 17일]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
 

추운 겨울이 가고 따뜻한 봄이 오면 겨울 옷을 벗고 봄 옷으로 갈아입는 것처럼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그리스도로 옷 입은 새사람이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슨 뜻일까요?

  첫째, 그리스도의 의로움으로 옷 입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죄인이 아닙니다. 용서받은 의인이 되어서 주님 앞에 부끄러움 없이 설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하신 옷이 우리에게 입혀졌으므로 모든 더러운 귀신과 추한 귀신은 우리에게 한 길로 왔다가 일곱 길로 도망치는 것입니다.

  둘째, 그리스도의 영으로 옷 입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예수를 믿고 거듭나서 그리스도의 영, 성령이 우리를 점령하게 되면, 성령께서는 육의 사람을 멸하시고 속 사람을 신령하게 하시어 하나님의 은혜로 채워 주신다는 것입니다.

  셋째, 그리스도의 건강으로 옷 입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고 가셨기 때문에 우리는 치료와 건강으로 옷을 입은 사람인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가 건강하게 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옷을 입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생명의 역사가 우리 가운데 나타나는 것입니다.

  넷째, 그리스도의 복과 형통으로 옷 입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그 자신이 성공이요 형통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모든 저주를 십자가에서 다 청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고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과 형통으로 옷 입었다는 것입니다.

  다섯째, 그리스도의 천국으로 옷 입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그리스도로 옷 입은 사람들은 이제는 사망과 음부를 다 철폐해 버리고 천국으로 옷 입었습니다. 언제 어느 순간에 우리가 육신의 장막집을 벗을지라도 우리는 바로 천국으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었다는 것입니다. 엘리사가 엘리야의 두루마기를 받아 입자 엘리야의 권세가 그에게 임하여 갑절의 능력을 행사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옷을 받아 입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살아야 합니다.

 

 

365일 설교[ 9월 18일]야웨의 신이신 성령
 

개인의 능력있는 신앙 생활에 있어서나 교회의 성장 발전을 위하여 성령님의 역할은 절대적입니다. 과연 성령께서는 어떠한 분이시기에 이와 같은 역사를 행하실 수 있을까요?

  첫째, 성령께서는 지혜와 총명의 신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위대한 구속 사역이 완성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대속 사역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왜 그들이 십자가의 깊은 의미를 깨닫지 못했을까요? 그것은 십자가야말로 하나님의 지혜요 감추인 비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지혜와 총명의 신이신 하나님의 성령께서 임하시지 않으면 결코 십자가 대속을 이해할 수도 깨달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오순절 날, 성령 강림으로 예수님의 제자들이 지혜와 총명의 신이신 성령을 충만히 받자 그때서야 그들은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고 복음을 확신있게 증거하였던 것입니다.

  둘째, 성령께서는 모략과 재능의 신이십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부나 세리로 생활하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지식이나 학문이 많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난 후로는 그들의 행위와 말에 모략과 재능이 넘쳤으므로 이제는 이스라엘의 어떠한 지도자들이라 할지라도 그들을 논박할 수 없었습니다(행 4:13). 이처럼 성령께서는 모략과 재능의 신이십니다. 그 때문에, 복음이 증거되고 성령의 역사가 임하시는 곳마다 무지와 미신의 어두움이 물러가고 찬란한 문화의 꽃이 피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 성령께서는 지식과 야웨를 경외하는 신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령님을 통하여 우리로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또한 두려운 존재이심을 깨닫게 하십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이러한 지혜는 계시적인 지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실로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을 얻으려면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씀을 읽을 때나 기도할 때, 그 어떤 일을 할 때에도 성령님을 의지함으로 하나님에 대한 참 지식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얻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지식과 야웨를 경외하는 신이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능력있는 신앙 생활을 해야 하겠습니다

 

 

365일 설교[ 9월 19일]고난 중에 드리는 기도
 

다윗은 아무도 자기를 돌아보지 않고 피난처도 없는 절박한 상황에 처하였음을 하나님께 호소했습니다(4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신앙적인 해결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무도 도와 주지 않는 위기에 처했을 때 우리는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 우리는 부르짖어 간구해야 합니다(1,2절). 이런 상황에 처하면 보통 기도할 힘마저 상실한 채 한숨만 쉬면서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자포 자기하는 상태에 빠지고 맙니다. 그러나 그럴 때일수록 우리는 더욱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3)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려운 일을 당할수록 철야하고 금식하며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합니다.

  둘째, 우리는 좋으신 하나님이심을 믿고 부르짖어야 합니다(5절). 아무도 나를 돌아보는 자가 없고 발 붙일 곳이 없을 때에도 우리에게 소망이 사라지지 않음은 주님이 나의 피난처요, 삶의 터전(분깃)을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비록 사람들은 우리를 버릴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끝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피난처가 되시고 이 땅에서 우리에게 입을 옷과 먹을 양식을 주시는 하나님께 우리는 소망을 두고 간구해야 합니다.

  셋째,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7절). 비록 지금은 아무도 나를 돌아보지 않지만, 내가 부르짖을 때 하나님께서는 기도에 응답하시고, 나를 얽어매고 있던 모든 문제들을 순식간에 해결해 주십니다. 또한 나를 떠났던 친구들이 다시 찾아 오는 완전한 회복의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하나님은 쓰시기로 택하신 사람들을 종종 깊은 연단의 수렁 속에 던지십니다. 그래서 사람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는 사람으로 체질을 변화시키고 훈련시키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아무도 도와 주지 않는 고독에 처할 때 낙심하여 뒤로 물러갈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좋으신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하며 부르짖어 간구함으로 슬픔이 변하여 춤이 되는 기적을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365일 설교[ 9월 20일]육체의 일과 성령의 일
 

 예수님은 사람의 마음속에서 나오는 탐욕, 악독, 교만, 음란 등이 사람들을 더럽게 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막 7:20-23). 사도 바울도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육체의 일을 멀리하고 성령의 열매를 맺을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왜 육체의 일을 멀리해야 하는지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첫째,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기 때문입니다(17절). 즉 육체의 소욕이 있는 곳에는 성령님이 자유롭게 활동하실 수 없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 충만하며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기를 원한다면 육체의 소욕을 결단코 멀리해야 합니다. 성령이 떠나간 사람은 눈이 뽑힌 채 맷돌을 가는 삼손과 같은 신세가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신에 감동되어 능력이 충만하여 원수 마귀 블레셋 군인들을 때려눕히는 십자가의 용사가 되기를 소원한다면 육체의 소욕을 멀리해야 합니다.

  둘째, 육체의 일을 따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21절). 하나님의 나라는 주님이 다스리시는 곳으로 가나안 복지와 같이 젖과 꿀이 흐르는 곳이요, 에덴 동산과 같이 풍성한 결실이 있는 곳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면 개인과 가정과 사회, 그리고 교회는 분열하여 파괴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육체의 일에 유혹을 받을 때면 언제나 하나님의 나라에서 받을 유산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혹시 잠깐 유혹을 받았을 때에도 하나님의 나라를 완전히 빼앗기지 않도록 몸부림치며 회개해야 합니다. 사업과 직장과 가정과 교회의 모든 맡은 일들을 아름답게 처리하는 사람은 분명히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충만히 받은 사람이며, 육체의 일을 이기고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사람입니다.

  셋째, 우리는 이미 십자가에 육체의 일을 못박고 장사지낸 사람이기 때문입니다(24절). 육체의 일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떻게 다시 죄를 지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말미암아 육의 사람에서 영의 사람으로 신분이 변화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죄의 종이 아니며,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신분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육체의 소욕을 철저히 십자가에 못박고 성령의 열매를 풍성하게 맺어야 하겠습니다

 

 

365일 설교[ 9월 21일]무엇을 심을 것인가?
 

 자연을 지배하시는 하나님의 법칙은,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는 것입니다. 사람이 육신을 위하여 심으면, 육신으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으면 성령으로부터 썩지 아니하는 영생을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썩지 아니할 영생을 거두기 위해서는 무엇을 심어야 할까요?

  첫째, 말씀을 심어야 합니다. 말씀을 심는다는 것은 마음속에 말씀이 깨달아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말씀을 듣고 마음에 깨달음이 와야만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게 됩니다. 우리가 말씀을 깨닫기 위해서는 우선 기도를 많이 하고 성령의 도움을 받아서 성경도 많이 읽어야 합니다.

  둘째, 순종을 심어야 합니다. 아무리 마음속에 진리를 깨달았다고 하더라도 순종하지 않으면 믿음이 생겨나지 않습니다. 만일 질병으로 고생하는 사람이 말씀을 깨닫고 믿었으면 그대로 순종하고 실천해야 합니다(벧전 2:24). 그래서 건강한 사람처럼 생각하고 행동해야 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치료의 광선을 비춰 주셔서 병을 고쳐 주시는 것입니다.

  셋째, 믿음을 심어야 합니다. 믿음이란 귀로 듣고 손으로 만져지는 감각적인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 위에 기초를 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눈에는 아무 증거 안 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 들리며, 손에 잡히는 것 없고 모든 것이 역행하는 것 같아도 말씀만 믿고 기다려야 합니다. 말씀을 저버리고 난 다음에 ‘믿습니다’라고 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넷째, 확신을 심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순종하고 믿음으로 출발하였으면 그 말씀을 끊임없이 확신하며 입으로 시인해야 합니다. 그래서 현실적으로는 아무 변화도 일어나지 않고 이루어진 것이 없어도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끊임없이 입으로 시인해야 합니다.

  이처럼 우리가 영생을 위해 좋은 씨앗을 심어서 많이 거두려면 말씀에 순종하여 믿음과 확신을 심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열매 없는 자가 되어 하나님의 책망을 받을 것이 아니라 풍성한 열매를 맺어 하나님께 영광돌려야 하겠습니다

 

 

365일 설교[ 9월 22일]변하지 않는 신앙의 자리
 

신앙생활하는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세월이 변하고 환경이 변하고 또 만물이 요동해도 요동치 않는 신앙의 자리를 지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신앙의 자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잡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있어 변하지 않는 신앙의 자리는 무엇일까요?

  첫째, 하나님께서는 그의 뜻과 계획대로 모든 것을 예정하시고 예비하십니다(4-6절). 하나님께서는 절대 주권으로 하늘과 땅을 만드셨고 친히 다스리고 계십니다. 그리고 인간이 선하신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타락하였을 때에도 예수님을 통해 구원을 예정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잘나서, 착한 행동을 해서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버림을 받아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서 택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격 없는 우리에게 예수님을 믿는 천국의 초대장을 보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둘째, 우리는 예수님의 피로 죄사함을 받았습니다(7절).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보내셔서 우리의 죄와 추악, 불의, 죽음, 저주의 모든 책임을 맡기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외치실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용서하시고 의롭게 여기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한 죄사함의 은혜를 풍성하게 누려야 합니다.

  셋째, 우리는 성령으로 인침을 받았습니다(13,14절).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의 부르심을 받아 예수님의 피로 죄사함을 얻게 하시고 이것을 우리 마음속에 확신시키기 위해 성령을 보내셔서 마음에 도장을 찍어 주셨습니다. 즉 아직도 의심이 오고 눈에는 아무 증거가 보이지 않고 손에는 아무 것도 만져지지 않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뜨겁게 끓어 오르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이 간절하게 됩니다.

  또한 세상에 흥미를 느낄 수 없고 세속적인 부귀 영화에서 허무를 느끼고 만족을 얻을 수 없으므로 영원한 것을 찾고 소망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이 우리의 마음속에 천국 백성이 되었음을 확증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변하지 않는 신앙의 자리를 확고히 지켜 믿음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러야 하겠습니다

 

 

365일 설교[ 9월 23일] 악령의 활동
 

아담과 하와를 타락시켰던 악령은 오늘도 인간 심령을 점령하여 우리를 세속으로 이끌어가려고 합니다. 악령은 공중의 권세를 잡고 있으며 이 세상의 불순종하는 사람들의 영 속에 운행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육체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통해 인간을 타락하게 하는데, 이것은 곧 마귀의 역사입니다. 오늘 악령들이 우리 사이에서 어떤 모습으로 활동하고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거짓말하는 영입니다(대하 18:21). 마귀는 거짓 영을 보내어 이단 사설과 같은 거짓을 믿게 하고 세상의 물질만 좇다가 마침내 멸망의 길로 이르게 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시어 참된 삶을 허락하여 주십니다.

  둘째, 미혹하게 하는 영입니다(딤전 4:1). 마귀는 사람들이 불안해 하는 마음을 이용하여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일을 합니다. 오늘날 이 세상에는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이 팽배하여 있습니다. 공산주의는 인류 역사상 그 유례가 다시 없을 귀신의 미혹케 하는 가르침입니다. 또한 종교계에도 미혹케 하는 영이 있어서 많은 성도들을 실족케 하고 있습니다.

  셋째, 더러운 귀신입니다(마 10:1). 더러운 귀신은 마음속에 끊임없이 더러운 생각을 넣어 주어 더러운 말, 더러운 행실을 하게 하여 인간의 윤리와 도덕을 파괴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더러운 귀신이 한 길로 왔다가 일곱 길로 도망하도록 늘 성령으로 충만해야 하는 것입니다.

  넷째, 악령은 육체의 일을 도모합니다(갈 5:19-21). 육체의 일은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입니다. 악령은 우리에게 이러한 육체의 일을 도모하게 함으로써 우리를 멸망시키려고 늘 기회를 엿보고 있습니다.

  옛말에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도 백 번 이긴다’고 하였습니다.

  이제 우리는 원수 마귀의 정체를 알았으므로 끊임없이 말씀과 기도와 성령으로 무장하여 원수 마귀를 물리쳐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 가운데서 우리의 영혼과 생활이 날로 성장하도록 하여야 하겠습니다

 

 

365일 설교[ 9월 24일]응답받는 기도의 비결
 

많은 성도들이 기도를 어렵게 생각하거나 혹은 기도를 해도 하나님의 응답을 받지 못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간구하는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그를 경외하는 자의 소원을 이루어주실 것을 약속하고 계십니다. 이에 오늘은 응답받는 기도의 비결을 말씀 드림으로 더 풍성한 기도의 생활로 여러분을 안내하고자 합니다.

  첫째, 먼저 진실한 마음으로 회개해야 합니다. 누구든지 회개하지 않고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으며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회개란 하나님 앞에 우리의 죄를 자백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빗나간 삶을 돌이켜 하나님 중심의 삶으로 돌아서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 시편 66편 18절에도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하기 전에 우리 자신을 먼저 살펴 생활 속에서 지은 죄와 불의를 하나님께 낱낱이 고백하고 용서받아야 할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분명한 뜻을 알고 구해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고 구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요일 5:14)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인가를 살펴봄으로, 또는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여 마음속에 평안이 있는가를 살펴봄으로 분별할 수 있습니다.

  셋째, 믿음을 가지고 인내로 간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진실한 마음으로 드린 성도의 기도는 어떤 형태로든지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예수님께서도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 11:24)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 응답이 이루어질 때까지 어떠한 환경에서도 물러서거나 포기하지 말고 믿음과 인내로 간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기도는 우리로 하여금 위대한 신앙을 소유하게 하고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응답받는 기도를 통해 풍성한 은혜를 누리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65일 설교[ 9월 25일]장차 오실 왕
 

 오늘은 장차 오실 왕이신 예수님에 대해 예언된 말씀 속에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그러면 왕이신 예수님은 어떤 분이실까요?

  첫째, 광풍을 피하는 곳이 되십니다. 광풍은 모든 것을 파괴하는 무서운 힘이 있는데 사람들은 모두가 이러한 광풍을 안고 살아갑니다. 즉 죄책의 광풍, 죽음과 허무의 광풍 그리고 인생의 여러 가지 생활 문제의 광풍을 안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오직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이러한 광풍의 피난처가 되십니다.

  과학이나 철학 등 그 어떠한 것도 휘몰아치는 광풍의 피난처가 되어 주지 못하지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능력으로 죄와 죽음의 광풍 그리고 생활의 여러 가지 광풍들을 잠잠케 해 주시는 것입니다.

  둘째, 폭우를 가리우는 곳이 되십니다. 폭우는 하늘에서 쏟아지는데 이는 하나님의 심판을 뜻합니다. 모든 사람은 육체의 장막을 벗으면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심판의 폭우를 가리워 주실 왕이 되십니다.

  셋째, 마른 땅의 냇물이십니다. 고도로 발달된 현대 사회는 인정이 메마르고 고독이 가득찬 시대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은 마른 땅과 같이 되어 참된 마음의 위로와 사랑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마른 땅 같은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기쁨과 소망, 사랑과 생명의 샘물이 되어 주십니다.

  넷째, 곤비한 땅의 큰 바위 그늘이십니다. 사람이 사막을 지나다가 모래 바람을 만나면 바뀌어진 지형 때문에 길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아무리 거센 모래 바람이 불어와도 큰 바위는 굳건히 남아 있습니다. 오늘의 세계는 격동의 시대로 정치, 경제 상황뿐 아니라 사람들의 가치관마저도 절대적 기준 없이 변화되어 갑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어떠한 바람에도 요동치 않는 큰 바위의 그늘이 되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생의 거친 광풍과 심판의 폭우를 가려 주시고, 메마른 삶에 냇물과 바위 그늘이 되어 주시는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마음속에 모셔들여서 참기쁨을 맛보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65일 설교[ 9월 26일] 삶을 낭패케 하는 것들
 

사람에게 있어서 건강은 매우 중요합니다. 육체의 건강이 인간 생활의 바탕이 되는 것이라면 마음의 건강은 인생의 성공과 실패를 좌우하는 관건이 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마음의 질병을 다스리지 못해 마음의 건강을 잃으면 영락 없이 낭패를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에 오늘은 인생을 낭패케 하는 마음의 질병을 진단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 교만의 병입니다. 교만은 자기를 과대 평가하는 성품입니다. 하나님보다 높아지려 했던 천사장 루시퍼의 행동이나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은 교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러나 교만의 결과는 멸망의 길입니다. 이에 대해 성경도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 16:18)고 교훈하고 있습니다.

  둘째, 탐욕의 병입니다. 탐욕이란 자기 분수를 뛰어넘은 욕심을 말합니다. 인간은 누구에게나 인생의 분량이 있으므로 이에 따라 지혜롭게 살아가야 합니다. 이를 넘어서 억지로 욕심을 부리면 그 탐욕은 독일의 히틀러의 경우처럼 자신뿐 아니라 이웃까지도 망하게 만들고 맙니다.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면 사망을 낳는 것입니다(약 1:15).

  셋째, 무절제의 병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자신의 쾌락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향락과 사치로 가득한 환락 문화와 지칠 줄 모르는 허랑 방탕한 풍조는 무절제의 병에 걸린 인간의 비극적 모습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행복은 절제에서 비롯됩니다. 완전한 만족, 극도의 환락 끝에서 인간이 얻는 것은 비애와 허무감과 절망뿐이기 때문입니다.

  넷째, 이기주의의 병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자기 자신 혹은 자기 가족만을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의 삶에는 아무런 관심도 갖지 않는 극도의 이기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성경에도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면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딤후 3:1,2).

  이와 같이 병든 마음은 삶을 실패케 만들고 우리를 하나님 앞에 나가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삶을 낭패케 하는 마음의 병을 주님께 내어 놓아 치료받고 변화받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65일 설교[ 9월 27일]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려면
 

본문 17절에는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주의 뜻을 이해할 수 있을까요?

  첫째, 탐욕을 버려야 합니다. 성경은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도 탐욕으로 선악과를 바라보다가 그만 마귀의 유혹에 걸려 범죄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또한 사울 왕은 겸손하고 훌륭한 왕이었으나 그 마음에 탐욕이 들어가 하나님의 뜻을 알고도 준행치 않아 버림을 받았습니다.

  둘째, 우리의 고정 관념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자기 생각을 하나님의 뜻으로 연결시키는 고정 관념을 버려야 합니다. 나아만 장군은 자기가 엘리사에게 가면 엘리사가 거창한 종교 의식을 행하고 안수하여 고쳐줄 것으로 생각했으나 엘리사가 요단 강물에 일곱 번 들어갔다가 나오라고 말하자 그만 분노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뜻이나 생각을 고집하지 말고 과감히 고정 관념을 깨뜨려 버려야 합니다.

  셋째,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어떠한 역경과 희생이 있더라도 주의 뜻을 좇겠다는 결단이 있어야 주의 뜻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우리에게 임하면 많은 시련과 환난이 다가옵니다. 아브라함은 그의 나이 75세에 하나님의 뜻이 임했지만 그 뜻이 이루어지는 데 25년이라는 시련의 세월이 있었습니다. 오늘날도 우리가 주님의 뜻을 이해하려면 자기 십자가를 질 각오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에 뜨거운 소원을 일으키심으로 그의 뜻을 계시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할 때 마음속에 일어나는 소원의 구름 기둥과 불 기둥에 항상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또한 환경이나 특별한 계시를 통해서 그의 뜻을 나타내기도 하십니다.

  우리가 진실로 주의 뜻을 이해하기 원한다면 탐욕과 고정 관념을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질 수 있어야 합니다

 

 

365일 설교[ 9월 28일]무엇을 가르쳐야 하나?
 

한 개인이 삶을 긍정적이고 성공적으로 사느냐, 아니면 부정적이고 패배적으로 사느냐는 가정 교육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의 자녀들을 양육해야 할까요?

  첫째, 자녀들에게 하나님 중심의 산 생활 교육을 시켜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생활을 하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이것이 자녀들에게 있어서 평생 가장 큰 자산이요 축복이 됩니다. 돈과 권세와 명예는 있다가 없어질 수도 있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교육의 효과는 영원합니다.

  또한 우리는 가정의 분위기를 잘 조성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사랑과 이해와 신뢰와 정의에 가득 찬 분위기를 만들어 놓으면 자녀들은 자연히 바른 길로 걸어갑니다. 또한 정직하고 성실하고 근면한 삶의 분위기를 만들어야 합니다. 이것이 자녀들의 일평생에 유익을 주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교육은 말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부모가 정직, 성실, 근면한 삶을 살 때 자녀들이 그 본을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 자녀들에게 신앙을 실천하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먼저 자녀들에게 성수 주일할 것을 가르쳐야 합니다. 부모는 엿새 동안은 열심히 일하고 이레째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예배하는 삶을 모범으로 보여야 합니다. 또한 십일조는 우리의 신앙의 행위 고백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 앞에 복을 달라고 기도해도 십일조를 드리지 아니했다면 하나님께서는 응답하지 아니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적어도 주일 성수와 십일조만큼은 자녀들에게 반드시 본을 보이고 가르쳐야 합니다.

  셋째, 자녀들에게 사랑의 실천을 가르쳐야 합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기독교 공동체는 더불어 사는 공동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녀들에게 이 공동체 의식을 철저히 가르쳐야 합니다. 또한 자연 사랑을 가르쳐야 합니다. 자연 사랑은 곧 바로 인간 사랑과 직결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녀들에게 하나님과 이웃 그리고 자연과 더불어 사는 지혜를 터득하도록 가르쳐야 하겠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자녀들에게 하나님 중심의 삶을 바탕으로 한 행함 있는 믿음의 본을 보이고 그와 같이 가르칠 때 우리 자녀들의 장래에 소망이 있게 될 것입니다

 

 

365일 설교[ 9월 29일]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
 

성경은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히 9:27). 그러므로 우리 인생이 덧없을지라도 우리는 이 세상의 삶에 최선을 다하여 영원한 삶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래서 심판날에 부끄러움이 없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이러한 삶의 비결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 우리는 사랑이 지식과 총명으로 더불어 점점 더 풍성하게 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늘고 또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총명이 늘어감에 따라 점점 더 깊어가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나아가 이 사랑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점점 깊이 체험하게 되고 그 무한하신 사랑을 깨달으며 또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속에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 우리는 지극히 선한 것을 깨달아 앎으로써 주님께서 오시는 날까지 진실하고 허물 없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에게 참된 지식과 분별력이 길러진다면 우리는 우리에게 다가오는 선과 악을 구별할 줄 알게 됩니다. 여기에서 ‘지극히 선한 것’이란 하나님의 뜻에 맞는 것 곧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지혜와 총명을 얻어서 선한 것을 알았으면 이를 생활 속에서 실행함으로써 진실하고 허물 없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셋째, 우리는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이 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위와 같은 삶이 꾸준히 계속되면 우리는 진실한 인격의 소유자가 되며 우리 생활에는 성령의 열매가 가득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열매는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 의롭게 되었으므로 맺게 되는 의의 열매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의의 열매를 맺게 되면 그것은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이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의의 열매를 맺는 목적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풍성한 삶, 진실하고 허물 없는 삶, 의의 열매가 풍성한 삶을 살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겠습니다.

 

 

365일 설교[ 9월 30일]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본체이셨지만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여기에서 본체(本體)란 헬라어로 ‘모르페’(morfh)라고 하는데, 이는 ‘완전하게 같은 분’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본체가 하나님이셨지만 우리 죄인들을 너무나도 사랑하신 나머지 자신을 낮추어 인간이 되셨던 것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지극히 높이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과 땅 아래 있는 자들이 모두 그리스도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성경은 바로 이와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늘의 영광스러운 보좌를 버리시고 낮고 천한 인간 세상으로 오셔서 가장 가난하고 소외된 삶을 사시다가 가장 고통스럽고 천한 죽음인 십자가 형벌을 감수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한 마음, 순종하는 마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이처럼 낮아지셨는데 본래 비천한 인간인 우리가 무슨 교만을 내세울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철저하게 낮아져야 합니다. 우리가 겸비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은총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진실로 우리가 가져야 할 마음은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철저하게 자신을 낮추어야 합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통해 모든 교만과 아집을 버리고 겸비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높여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높여 주시면 그 누구도 낮추지 못합니다.

  성도 여러분, 십자가 없이는 부활이 있을 수 없으며, 낮아지지 않고는 높아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께서 만일 영, 혼, 육이 잘되고 강건한 축복의 삶을 영위하기를 원하신다면 그리스도의 겸손과 순종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겸손과 순종의 사람이 될 때,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높여 주시고 복을 주시며 하나님 나라의 기쁨과 평화를 누리게 해 주실 것입니다

출처 : RED COMPASS 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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