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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일설교 8월1일~31일

by 【고동엽】 2022. 12. 3.
365일 설교[ 8월 1일]소망의 하나님                    {목록 돌아가기}
 

하나님은 우리에게 소망을 주시는 분으로서 소망의 근원이 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소망의 하나님을 믿음의 대상으로 하는 기독교를 소망의 종교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소망의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이 세상에서의 소망 뿐만 아니라 죽음 저 건너편까지 계속되는 영원한 소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의 소망은 금방 있다가 사라지는 안개와 같은 것입니다.

  소망의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는 기쁨과 평강이 있습니다. 이 기쁨과 평강은 하나님의 나라를 구성하는 두 요소입니다. 하나님 안에서의 기쁨과 평강은 하나님께로부터 우리가 의롭다함을 인정받을 때 생기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 마음속의 기쁨과 평강은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형제 자매들과 하나가 될 때 더욱 놀랍게 생겨납니다.

  육적인 기쁨은 일시적일 뿐만 아니라 진정한 기쁨을 주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육적인 기쁨을 추구하는 사람은 겉으로는 웃으면서도 마음속은 텅 비어 있고 허전한 것입니다. 그러나 천국의 참된 기쁨은 영혼을 즐거움으로 가득 채워 주기 때문에 이 세상의 어느 것과도 바꿀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내적인 기쁨과 평안을 맛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가 소망의 하나님을 믿노라 하면서 기쁨과 평안 대신에 짜증과 불만과 원망만을 가지고 산다면 참된 신자의 삶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소망의 하나님을 참으로 믿는 사람은 그 얼굴에서 밝은 광채가 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과 기쁨과 소망은 절대로 감추어 둘 수 없고 밖으로 흘러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얼굴이 일그러져 있고, 마음에 소망이 넘치지 않는다면 신앙이 병들어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런 사람은 즉시 예수님의 이름으로 회개하고 믿음으로 그 영적인 병을 고쳐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비록 환경이 어렵고 고통스럽더라도 소망이 없는 자와 같이 탄식해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어둡고 캄캄한 환경에 처할지라도 소망의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므로 하나님의 평강과 기쁨이 날마다 충만한 여러분이 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365일 설교[ 8월 2일]모퉁이돌 되신 예수 그리스도
 

본문은 예수님께서 직접 자신에 대하여 적용하신 말씀입니다(마 21:42). 여기에서 ‘모퉁이의 머릿돌’이란 모퉁이의 기초에 박혀서 두 벽을 연결하며 건물을 지지하는 주춧돌을 가리킵니다. 본문을 통해서 이 말씀의 의미를 생각해 봅시다.

  먼저 그리스도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버린 건축자들은 예수님 당시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 그리고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또한 오늘날의 모든 인본주의자들, 무신론자들, 합리주의자들을 가리킵니다. 이들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의 무너질 집을 짓는 건축자들입니다. 그러나 이 버림받은 돌, 즉 그리스도는 그를 버린 자들에게는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며 버린 그들을 부수어 가루로 만드는 심판의 돌이 되는 것입니다(벧전 2:8).

  그런데 가장 위대한 건축자이신 하나님께서는 인간 건축자들의 생각을 뒤엎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버린 돌을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섭리에 의한 것으로 이는 이미 선지자들에 의하여 증거되었으며(사 28:16)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나타나셨습니다. 본문도 하나님의 이와 같은 섭리를 “이는 야웨의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퉁이의 머릿돌에는 두 가지의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먼저 모퉁이 돌은 제일 먼저 놓여지는 돌로서 다른 돌들은 모두 그 돌 다음에 놓여집니다. 또한 이 돌은 건물을 지지하는 돌입니다. 모든 다른 돌들은 그 위에 놓여지며 그 돌의 도움을 받습니다. 바로 이와 같이 그리스도는 사람이 건축할 수 있는 유일한 기초로서, 그 위에 놓여지지 않은 모든 것들은 다 무너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를 반석으로 하여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를 지어가야 하는 것입니다(엡 2:20-22).

  성도 여러분, 인간 건축자들은 그리스도를 버렸을지라도 하나님은 그 돌을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 모두는 머릿돌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나님의 거하실 아름다운 전을 이루어 가야 하겠습니다

 

 

365일 설교[ 8월 3일] 주님만을 바라보자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서 일어난 분쟁의 문제를 가지고 제게 신앙 상담을 해 옵니다. “목사님, 우리 교회에서 큰 분쟁이 일어났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싸울까요, 싸우지 말까요?”

  그럴 때마다 저는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싸우지 마십시오. 교회 안에서 신앙 중심으로 살지 않는 사람이 있어 분쟁이 일어났을 때, 같이 싸우면 같이 잘못되어집니다. 타락한 종도 주의 종입니다. 다윗도 타락한 사울 왕을 하나님의 기름 부으신 자라고 해서 건드리기를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직접 관여하시도록 하나님께 맡기십시오.언제든지 그러한 분쟁이 일어나거든 싸우지 말고 그를 떠나야 합니다. 교회 담임 교역자와 아무래도 마음이 안 맞거든 차라리 성도님이 교회를 떠나 다른 목자를 찾아가는 것이 낫습니다. 분쟁을 해서 신앙의 순수성을 잃어버리는 것보다는 그 편이 훨씬 낫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면서 명심해야 할 것 중의 하나는 직분을 보고 그 사람의 전체를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외적인 칭호가 그 사람의 전체를 나타내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고 신앙 생활을 해야 합니다. 물론 사람들이 자신의 지도자를 보고 따라가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주의 종이나 신앙의 선배들도 인간이기 때문에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의 종이나 장로, 집사가 넘어지는 것을 보고 낙심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불완전하고 죄악된 사람 때문에 시험에 빠져 구원의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잃어버린다면 그보다 더 비극적인 일은 없을 것입니다. 오직 우리의 푯대이신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고 신앙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영적인 지도자가 된 사람은 모든 면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 모두는 주님 중심으로 살고자 하는 끊임없는 노력과 경건의 훈련을 계속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의 대상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신앙의 경주를 계속하고 한편으로는 남들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신앙의 모범을 보여 주어야 하겠습니다.

 

 

365일 설교[ 8월 4일]신앙 여정의 재점검
 

우리 인생은 항해와 같습니다. 항해중에 있는 배가 무사히 목적지까지 가기 위해서는 철저한 정비와 점검이 있어야 하듯이 인생의 항해에도 철저한 점검이 필요합니다. 그러면우리가 본문 말씀처럼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견고케 되기 위해 돌아보고 점검해야 할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첫째, 우리는 생명을 바쳐 하나님을 사랑했는지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인생의 가장 근본적인 의무는 죄인된 인간을 구하시려 예수님을 보내 주신 아버지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되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야 하며, 인생의 목표를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데 두어야만 합니다. 이러한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 충만히 받게 되어 세상을 이기고 성공적인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왔는지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늘 읽고 묵상하고 지켜 행함으로 하나님 중심에 서서 세상의 환경이나 인간적인 조건을 초월하여 사는 삶을 말합니다. 이러한 믿음은 모든 환난과 풍파를 극복하게 해 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 위에 굳게 서도록 결심해야 합니다.

  셋째, 우리는 소망이 넘치는 삶을 살아왔는지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소망이 넘치는 사람은 항상 긍정적이고 적극적이며 창조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우리가 하박국 선지자처럼 구원의 하나님께 소망을 두게 되면 우리의 모든 어려운 환경은 축복으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합 3:17,18). 그러므로 우리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 참된 소망이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넷째, 우리는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살아왔는지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성령께서는 승천하신 예수님을 대신해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려고 우리 곁에 와 계신 분이십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힘과 능력과 보호가 되시므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사람은 결코 실패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 소망, 사랑을 가지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신앙 생활을 함으로써 성공적인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365일 설교[ 8월 5일]예수 그리스도의 사람
 

오늘날 인간의 타락 문제는 그 어떤 법이나 교육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인간 자체의 근본적인 변화가 있을 때만이 해결될 수 있습니다. 본문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죄악된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예수께서 베푸신 네 가지 은총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지혜가 되어 주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할 때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지혜가 되어 주십니다. 예수님의 지혜는 세상을 가장 올바르고 가치 있게 살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의 수단과 방법, 지혜로 세상을 살아갈 것이 아니라 모든 문제를 예수님께 내어 맡기고 예수님의 지혜가 이끄시는 대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떠한 문제라도 능히 해결하고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의로움이 되셨습니다. 의로움이란 죄를 한 번도 안 지은 상태로써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가 하나님의 은혜를 구할 자격이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은 예수님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이와 같은 의로움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거룩함이 되어 주셨습니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 속에서 끓어 오르는 음란하고 추하며 더러운 생각으로 괴로움을 겪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 앞에 나오면 천하고 세속적인 성품에서 벗어나 고결한 성품을 얻게 됩니다.

  넷째,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속함이 되어 주셨습니다. 우리 인류는 아담 이후로 마귀에게 종으로 팔려 에덴에서 쫓겨나고 죄와 질병과 저주와 죽음의 종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2천 년 전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우리의 이러한 죄와 질병, 저주와 사망을 대속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십자가의 능력을 통해서 오늘날도 우리의 구속함이 되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에게 연합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지혜와 의와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어 주시는 것입니다.

 

 

365일 설교[ 8월 6일]지식과 신앙
 

사람들은 믿음에 관해서 정확한 지식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노력하며 애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참된 믿음에 서지 못하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그러면 우리가 참된 믿음을 갖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예비하시는 분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다 만드시고 맨 나중에 인간을 지으신 것은 인간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예비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물과 양식을 예비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실한 신앙을 갖기 원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위해 모든 것을 예비하시는 분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해 놓으신 것은 오직 성령을 통해서만 깨달을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9,10절).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할 때 비로소 우리 속에 거하시고 우리 속에 계신 성령께서 하나님의 예비하신 곳으로 우리를 이끌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 때문에 우리는 성령과의 깊은 교제가 필요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지정의를 갖고 계신 인격적인 성령을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들이고 의지해야 합니다.

  이같이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의 예비하신 것을 깨달을 때 우리는 비로소 참된 신앙을 얻게 됩니다. 참신앙은 참된 지식을 기초로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참된 믿음과 신앙을 얻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감추어 놓으신 진리를 성경 속에서 찾아야 합니다. 이 진리는 성령만이 깨닫게 해 주십니다.

  성령께서는 꿈이나 환상으로 혹은 기도중에 마음의 생각을 통해서 우리에게 계시적인 지식을 넣어 주십니다. 이 지식을 통해 우리는 참믿음을 얻게 되고 성령의 인도를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과 지식은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믿음은 참된 지식을 통해서 생겨납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할 때 성령의 계시적인 지식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신 것을 알 수 있고, 확실한 믿음을 소유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365일 설교[ 8월 7일]성령의 능력을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구약에서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를 뜻하는 곳으로,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이 나타나는 특별한 장소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과 임재의 능력이 성령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신 사람들의 마음속에 임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은 우리의 생활 속에서 그의 능력을 나타내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의 능력을 풀어 놓아 다니게 할 수 있을까요?

  첫째, 찬양을 통해서 성령의 능력은 풀려 납니다. 사도행전 16장에 보면 찬양을 통해 성령의 능력을 체험한 좋은 예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감옥에 갇혀서 손발이 착고에 채이고 매를 맞아 몹시 고통스러웠을 때 그들은 밤중에 일어나 하나님께 찬송했습니다. 이 때 홀연히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착고가 끊어지고 옥문이 열리는 역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찬양은 이처럼 성령의 능력을 풀어 놓는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둘째, 기도를 통해서 성령의 능력은 풀려 납니다. 예수님께서 변화산에서 내려오셨을 때 제자들은 귀신들린 소년을 고치지 못하여 애쓰고 있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이 소년을 고치시면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막 9:29). 아무리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신다 하더라도 우리가 기도하지 않으면 성령께서는 그 능력을 나타내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셋째, 입술의 창조적인 시인을 통해서 성령의 능력은 풀려납니다. 성령께서는 말씀을 통하여 역사하십니다. 성령께서는 태초에 말씀이 선포될 때 그 말씀을 타고 역사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긍정적이고 적극적이며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말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 성전에 거하시던 하나님은 이제는 성령을 통하여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찬송과 기도와 창조적인 말을 함으로써 항상 성령의 능력을 생활 속에 풀어 놓을 때 우리의 삶 속에는 놀라운 하나님의 영광과 기적이 나타날 것입니다

 

 

365일 설교[ 8월 8일]그리스도의 일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부름받은 우리들의 삶은 받으려는 이기적(利己的)인 삶에서 나누어 주려는 이타적(利他的)인 삶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타인에게 무엇을 나누어 주어야 할까요?

  첫째, 믿음을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웃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영생에 이르게 하는 ‘믿음’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을 아버지로, 예수님을 구세주로, 성령을 삶의 주인으로 모시게 되었고,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놀라운 믿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눠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 소망을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우리의 인생 가운데 위로와 소망의 말만큼 아름다운 것은 없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지쳐있고 소외감 속에서 생의 허무를 느끼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따뜻한 위로와 소망의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사람들을 위해 이 땅에 오셨고 하나님의 말씀은 이러한 사람들을 위해 기록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은 소망의 씨앗이 됩니다. 이 소망이야말로 우리 인생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자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위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소망을 나누어 주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셋째, 사랑을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진정 주님의 사랑을 본받아 사랑을 나누어 주고자 한다면 우리는 원수까지라도 사랑의 대상으로 삼아야 합니다(마 5:44-46). 주님은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기 전에 먼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내어 주시기까지 사랑하지 않으셨습니까?(롬 5:8) 그러므로 우리는 이같이 값없이 받은 위대한 희생의 사랑을 이웃은 물론이요, 우리를 핍박하고 욕하는 자들에게도 값없이 베풀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일꾼된 우리는 이제 믿음, 소망, 사랑을 이웃에게 풍성히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그럴 때 그 이웃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 참여하는 것은 물론이요, 그것이 우리에게도 30배, 60배, 100배의 축복이 되어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365일 설교[ 8월 9일]유월절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
 

지금으로부터 약 2천 년 전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유월절 어린양으로 삼으사 인류의 죄를 대속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대속을 믿는 자는 누구든지 마귀의 포로된 삶에서 해방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믿는 성도는 구체적으로 어떤 해방을 얻을까요?

  첫째, 죄악에서 해방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은 인류의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를 도말시켜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면 죄로부터 해방되어 자유함을 얻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과 원수된 사이에서 해방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하여 하나님과 원수되었던 담은 무너지고 하나님과 화목됨으로써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 질병에서 해방을 얻습니다. 질병은 하나님의 뜻이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의 사역의 3분의 2 이상은 병 고치시는 일이었으며 그분은 친히 채찍에 맞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질고를 담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질병을 단호히 꾸짖어 내쫓아야 하는 것입니다.

  넷째, 가난과 저주에서 해방을 받습니다. 성도가 헐벗고 굶주리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영광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나무에 달려 저주를 받으신 것은 우리에게 아브라함의 복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저주를 단호히 내쫓고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복을 받아 누려야 하는 것입니다.

  다섯째, 죽음과 지옥의 권세에서 해방을 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마귀의 권세를 멸하시고, 다시 부활하심으로 죽음과 지옥의 권세를 깨뜨리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우리는 죽음과 지옥의 권세에서 해방과 자유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을 철저히 의지할 때 죄와 질병, 저주와 죽음으로부터 놀라운 해방과 자유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365일 설교[ 8월 10일] 예루살렘으로 가는 에스라
 

본문은 에스라를 지도자로 하여 포로되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는 극적인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지도자 에스라의 모습을 통하여 몇 가지 귀중한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첫째, 에스라는 그와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사람들의 이름을 철저히 기록하였습니다(1-14절). 성경을 읽다보면 여러 곳에 족보가 나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의 이름을 정확히 기록하고 계신 것입니다. 오늘날도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백성인 우리의 이름과 행한 일들을 그의 생명책에 분명히 기록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책에 자랑스런 이름으로 기록되도록 힘써야 하겠습니다.

  둘째, 에스라는 백성과 제사장들을 살폈습니다(15절). 살피시고 감찰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에스라는 하나님을 대신한 종으로서 충실히 백성들을 살핀 결과 제사장이 부족한 것을 파악하고 이를 보충했습니다. 우리도 가정과 교회, 그리고 믿음의 형제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항상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필요를 구체적으로 채워 주어야 합니다.

  셋째, 에스라는 그들과 그의 자녀들과 소유를 위하여 하나님께 평탄한 길을 간구했습니다(21절).

  지도자의 기본적인 의무는 자기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늘 중보의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는 어린아이와 모든 소유물까지 관심을 가지고 하나님께 예루살렘에 도착하기까지 평탄한 여정이 되게 해 달라고 간구했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항상 하나님께서 우리의 길을 평탄하게 인도해 주시도록 기도해야 하며, 우리의 가정과 교회가 평화로운 가운데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해 나갈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목자같이 백성들을 인도하는 에스라의 모습은 우리의 목자되신 예수님의 모습을 예표합니다. 이처럼 우리도 가정과 교회를 항상 돌아보아 그 필요를 채우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교회와 가정에 항상 평화가 충만하여 하나님의 일을 잘 감당하도록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365일 설교[ 8월 11일]에스라의 개혁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1차 귀환 후 약 60년 간 영적인 지도자가 없는 공백기를 지내면서 도덕적, 종교적으로 타락해 있었습니다. 2차 귀환을 통해 예루살렘으로 돌아 온 에스라는 그들이 이방 여인과 통혼하며 범죄하는 모습을 보고 단호한 개혁을 시행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신앙의 개혁을 통한 몇 가지 교훈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첫째, 에스라는 먼저 하나님 앞에 엎드려 울며 백성들의 죄를 대신 통회 자복했습니다 (1절). 에스라는 백성들이 죄를 범하자 마치 그것이 자신의 죄인 양 울며 회개했습니다. 백성들의 과오를 대신 지고자 하는 참목자의 심령으로 그들의 불순종과 패역을 토로하는 철저한 참회의 기도를 드렸던 것입니다. 그러자 백성들이 같이 통곡하며 죄를 회개하기 시작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둘째, 에스라는 백성들이 회개의 역사를 끝마칠 때까지 금식했습니다(6절). 이것은 철저한 회개의 역사를 촉구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도 한번 죄를 범한 후에 철저한 회개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다시 그 죄를 범하기 쉬운데, 그 때에는 금식하며 회개해야 하는 것입니다. 에스라처럼 다른 사람의 죄를 위해서 금식하고 또한 우리 자신의 고범죄를 위해서 금식하며 회개할 때, 우리는 죄의 고리를 철저히 끊어 버릴 수 있게 됩니다.

  셋째, 백성들은 이방 여인들을 단호히 끊어버렸습니다(11-17절). 다말과 룻은 이방 여인이지만 언약의 계보에 들어온 여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여기 나온 이방 여인들은 가증한 이방 우상을 숭배하며 이스라엘내에 불신앙을 퍼뜨리는 자들이었기 때문에 에스라는 혼인을 금하고 끊어버릴 것을 명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전도가 가능한 불신자와는 교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도리어 나를 세속주의로 빠져들게 하는 친구 및 불신자와는 그 관계를 단호히 끊어 버려야 합니다.

  에스라의 인도를 따른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우리 신앙 생활 중에도 내적인 신앙 개혁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금식하고 회개하며 단호한 결단을 통해 새로운 신앙의 부흥을 이루어야 하겠습니다

 

 

365일 설교[ 8월 12일]거룩한 소원
 

본문의 느헤미야는 바사 왕국의 고위직 관리였음에도 불구하고 호의호식에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그는 거룩한 소원을 품고 그것을 이루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이에 그의 모습을 통해 몇 가지 교훈을 얻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그는 거룩한 소원을 가슴에 품은 사람이었습니다(2절). 거룩한 소원이란 무너진 예루살렘의 성벽을 재건하는 일이었습니다. 그가 그것으로 인해 얼마나 근심했던지 얼굴에 수색이 드러났습니다. ‘무너진 성벽’은 오늘날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교회의 부패와 타락된 모습을 의미합니다. 우리도 교회의 여러 가지 타락된 모습을 볼 때 단지 그것을 비판하거나 정죄하기보다는 느헤미야처럼 근심하고 마음 아파하며 그러한 타락된 모습을 갱신하고자 하는 거룩한 소원을 품어야 할 것입니다.

  둘째, 그는 거룩한 소원을 입술로 선포했습니다(5절). 그는 세속 도시 수산궁의 여러 대신들 앞에서 자기의 영원한 삶의 목적이 하나님 나라의 사업을 수행하는 것임을 선포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이 부패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언제 어디서나 우리가 살아가는 목적과 우리가 가진 거룩한 소원을 담대히 시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경은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마 10:32,33)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셋째, 그는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으로 거룩한 소원을 이루었습니다(8절). 느헤미야는 제사장이 아니었지만, 방백으로서 귀한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그는 성벽을 재건하는 데 필요한 재목 등을 이방인들로부터 공급받음으로 기적적인 역사를 이루어냈습니다. 그는 그것을 하나님의 선한 손이 도우셨다고 증언하며 자신의 공로를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거룩한 소원을 품으면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선한 손의 역사로 우리를 도우십니다.

  이와같이 우리가 항상 주 안에서 거룩한 소원을 품고 그 소원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할 때 하나님의 도우시는 선한 손길이 함께 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365일 설교[ 8월 13]두려워 말라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성벽 건축 공사에 착수하였으나 방해 세력으로 인하여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방해 세력을 물리쳤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느헤미야의 태도를 통하여 우리의 영적 방해 세력으로부터 승리하는 비결을 배울 수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성벽 건축의 방해 세력들로부터 공격을 받았습니다. 산발랏과 도비야는 예루살렘 성벽이 완공될 경우 유다인들의 세력이 막강해질 것을 경계하여 사마리아 군대를 충동하여 무력으로 방해 공작을 시도하였습니다(1-3절). 이처럼 오늘날도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행할 때 원수 마귀의 방해로 말미암아 낙심하고 곤경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4-6절). 방해 세력들의 음모를 잘 알고 있는 느헤미야는 성벽이 건축되어 대적들을 방비할 수 있을 때까지 그들의 어떠한 조롱과 위협에도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담대히 공사를 추진해 나갔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문제가 발생했을 때 먼저 하나님께 의지하는 신앙으로 기도하며 전진해야 합니다. 우리가 문제를 바라보면 낙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문제 위에 계시고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있으신 하나님을 바라볼 때 우리는 승리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나아가 느헤미야는 역군들을 무장시켰습니다(9-23절). 방해 공작이 계속되는 가운데 일부 백성들은 계속된 노역으로 심신이 탈진 상태에 이르러 불평하기 시작했고(10절), 대적들은 공사를 포기하도록 끈질기게 유혹했습니다(12절). 그러나 느헤미야는 백성들을 무장시키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강조하면서 성벽 공사를 계속했습니다(13-23절).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할 때는 지치고 낙심한 형제가 있는지 항상 살펴보고 그들의 짐을 함께 지면서 위로하고 격려해 줌으로써 합력하여 하나님의 일을 성취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일을 할 때는 항상 원수 마귀의 방해가 있습니다. 이러할 때 우리가 지치지 않고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철저히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해야 할 뿐 아니라, 서로를 돌아보아 주의 일을 하다가 낙심하는 사람이 없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365일 설교[ 8월 14]복음 전파의 직분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로 사도로 부르심을 받자 사명감을 가지고 열심히 직분을 감당했습니다. 본문의 말씀은 사도 바울이 복음 전파의 직분에 대한 자신의 고백을 기록한 것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복음 전파자로서 우리가 가져야 할 자세에 대해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 바울은 복음 전하는 일을 개인적인 자랑거리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16절). 바울은 바나바와 전도 여행을 하던중 그들을 통한 하나님의 능력을 본 이방인들이 자신들을 신으로 모시려고 하자 옷을 찢으며 자신들도 그들과 동일한 인간임을 강조하였습니다(행 14:8-20).

  이는 복음 전하는 일이 개인의 영광과는 무관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복음 증거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드러내는 일인 것입니다.

  둘째, 바울은 복음 전하는 일을 당연히 해야 하는 사명이라고 고백했습니다(16절). 복음 전하는 일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즉 하나님의 일께서 좋고 싫은 것을 떠나서 당연히 해야 하는 사명인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명령하신 일에 대하여 뜻을 저버릴 경우 화를 당하게 될 것이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16절).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을 전파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피하려 하지 말고 최선을 다해 수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셋째, 바울은 자신을 복음 전파의 직분을 맡은 자라고 고백했습니다(17절). 여기서 직분은 청지기를 의미합니다. 즉 바울은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복음 전파를 수행한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이처럼 오늘 우리도 주인의 명령을 따르는 충성된 종처럼 복음 전파의 사명을 다한 후에 “마땅히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눅 17:10)는 고백의 자세를 가져야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의 복음 사역은 자발적이 아닌 그리스도의 강권에 의해 시작되었으며, 또 그는 항상 복음에 빚진 자로서의 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그는 고통과 강압이 아닌 기쁨과 감사 가운데서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복음 증거를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야 하겠습니다

 

 

365일 설교[ 8월 15]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일
 

바울은 출애굽 과정에서 이스라엘이 범했던 죄악의 사건들을 실례로 들면서 고린도 교인들에게 바로 살지 않으면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네 가지 사항에 대해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우상 숭배를 미워하십니다(7절).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여 사랑해야 할 하나님 대신에 다른 대상을 더 사랑하는 사람은 우상을 숭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상 숭배를 가장 싫어하십니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음란을 미워하십니다(8절). 이스라엘 백성들은 음란한 생활을 하다가 하나님께 심판을 받아 하루에 2만 3천 명이 죽었습니다. 오늘날도 우리가 음란죄를 지으면 육신이 당장 죽는 것은 아니지만 영혼을 죽게 하는 결과를 낳게 합니다. 우리의 몸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산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는 음란을 반드시 피해야 합니다.

  셋째, 하나님께서는 주를 시험하는 것을 미워하십니다(9절).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지 아니하고 일시적인 방편으로 병 낫기 위해, 소원 성취하기 위해 주님 앞에 나오는 것은 주를 시험하는 것이 됩니다. 주를 시험하다가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뱀에게 물려 죽었습니다. 이처럼 오늘날도 주님을 시험하면 마귀에게 물릴 것이므로 우리는 주를 시험하지 말아야 합니다.

  넷째, 하나님께서는 원망하는 것을 미워하십니다(10절). 원망은 우리들에게 아무 유익이 되지 못하며 사람들 사이를 불화하게 만들고 이간시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원망하다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40년 동안 광야에서 방황하였습니다. 이처럼 원망하는 죄는 우리들에게서 축복을 빼앗고 메마른 사막으로 우리들을 몰아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원망하는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우상 숭배와 음란, 주를 시험하며 원망하는 죄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이러한 죄를 범했다면 반드시 지금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365일 설교[ 8월 16]에서의 후예
 

창세기 25장 27~34절, 마태복음 6장 25~34절

I. 이야기

구약 성경에 나오는 이른바 '팥죽 이야기'는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도 알고 있을 정도로 유명합니다. 구약에서 빼놓을 수 없는 신앙의 조상 아브라함·이삭·야곱과 이어지는데다가 이삭의 두 아들 곧 에서와 야곱 사이에서 벌어진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입니다.

적혀 있는 그대로, 형 에서는 들판에 나가 사냥하기를 좋아하는 '뛰어난 사냥꾼'이었고, 동생 야곱은 천막에 머물러 있기를 좋아하는 '조용한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이었습니다. 들판에서 돌아온 에서가 몹시 배가 고팠습니다. 마침 야곱은 죽을 끓이고 있을 때였습니다. 에서가 허겁지겁 동생 야곱에게 다가서서는, 허둥거리듯이 '빨리, 죽 좀 다오. 배고파 죽겠다!'고 했습니다.

형이 허기를 채우자는 데 느닷없이 야곱이 조건을 달고 나왔습니다. '먼저 나에게 맏아들의 권리를 파시지오'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32절이 압권입니다. '이봐라, 죽겠다는데 그까짓 맏아들의 권리가 무슨 소용이나 되냐?' 하고 내뱉듯이 말했습니다. 이 대목에서 야곱은 더 집요하게 나왔습니다. 그 권리를 주겠다는 '약속'을 하라고 다그쳤습니다. 에서가 맏아들의 권리를 야곱에게 주도록 계약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야곱은 형 에서에게 죽에다 빵을 더해 주었습니다. 에서는 그렇게 배를 채운 다음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자리를 떴습니다.

II. 새기기

우리 교회의 성경 공부 시간이나 설교 후에 이어지는 대화 시간에서 함께 경험하게 되는 일이지만, 성경에 담겨있는 가르침은 어느 한 두 가지 단답형으로 정답을 끌어낼 수 없다는 겁니다.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고 또 여러 가지로 생각해봐야 합니다. 그만큼 넓게 생각해야 하고 많이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같은 내용을 두고도 공부하고 또 공부하고,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합니다. 창세기를 공부할 때 우리가 마주한 '에서의 이야기'에서도 그러했을 것입니다.

앞으로도 이에 대한 숱한 생각과 풀이가 끊임없이 나오게 되겠지만 그 가운데서 한 가지,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그 이야기는 무슨 생각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물음에 우리의 관심을 돌려보면 어떻겠습니까? 에서가 더욱 중요한 것을 생각해볼 겨를도 없이 배고픈 김에 모든 것을 헐값으로 넘긴 그 삶의 태도가 지난날 빈궁한 삶의 역사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한갓 어처구니없는 옛이야기일 뿐이겠습니까? 오늘날 풍요를 누리며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는 전혀 적절성을 행사할 수 없는 것이겠습니까?

만일 이 시대 상황에서도 그 이야기가 적절성을 행사할 수 있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삶 그 어떤 것이 에서가 보여준 삶의 태도와 비슷하고, 어느 면에서 너무도 같다고 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물음이 이어질 것입니다. 말하자면, 에서의 이야기는 분명 오래된 이야기이지만 오늘 우리들의 이야기는 아닌지 생각해보려는 것입니다.

III. 쏠리기

사람은 생각하는 동물, 생각하는 존재라고 하지만 우리 안에는 넓게 생각하지 못하고 언제나 비좁은 데로 나아갑니다. 높게 생각하지 못하고 줄곧 낮은 수준으로 떨어지려는 '닫힌 삶'의 경향성을 갖고 있습니다. 아니, 그것이 인간의 본성일지 모릅니다.

사람은 생각과 마음과 영의 세계를 활짝 열어둘 수 있는 '열린 삶'의 씨를 갖고 있기는 합니다. 하나님의 영상으로 지음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좁은 자기 안에 갇혀 사는 것이 아니라, 그 갇힌 삶의 테두리를 무한히 넘어서는 초월의 존재 곧 하나님을 그려보고 그 하나님을 생각하고 그 하나님과 이어보고자 하는 존재 가능성을 지녔다는 뜻일 것입니다.

비록 에덴의 땅으로부터 내쫓김을 당했다 하더라고 하나님의 이미지만은 몰수당하지 않았습니다. 이 땅에서도 그 이미지만은 우리 안에 지니고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좁고 얕은 자신의 생각을 자기보다 더 넓고 자기보다 더 높은 삶의 차원으로 열어둘 수 있는 가능성이 여기에서 비롯됩니다. 뒤집어 말해보면, 인간에게 하나님의 이미지가 없다면 '닫힌 삶' 그 너머 '열린 삶'에 대한 믿음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인간은 '열린 삶'의 가능성을 가능성으로 소중히 여기지 않습니다. 그 가능성을 향한 믿음을 값지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 가능성마저도 짓밟아버리고 그 믿음마저도 짓뭉갭니다. 그리고는 '닫힌 삶'의 그늘진 뒤뜰로 돌아가 울타리를 쳐 자신을 둘러쌉니다. 닫힌 울타리 그 너머, 초월의 가능성을 주시는 하나님의 이미지를 중히 여기지 않고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이미지를 중히 여기게 되면 이미 익숙해져버린 그 좁다란 삶의 방식을 깨야하는 아픔과 수고의 대가를 치러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이미지를 사모하는 삶은 자기 폐쇄와 자기 축소의 삶에 익숙해진 얕은 수준의 삶을 넘어서야 하는 특별한 돌파의 결의와 노고가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좁다란 삶의 공간으로 퇴거하여 문을 잠그고 닫혀 사는 것에 익숙해져, 이제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상식이고, 정상이고 또 행복이라고 여기고 있는 터에, 그 생각의 틀에 맞서기란 거북하다 못해 두렵기조차 합니다.

III. 맡기기

깊이 생각할 것도 없고 높이 우러러볼 것도 없이 그 좁다란 세계 안에서 별 고민할 것 없이 그 상태 그대로 살아가고자 합니다. 자기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이미지에 자신의 삶을 이어놓지도 않고, 거기에 자신의 생각과 마음을 열어놓지도 않는 꽉 막힌 삶, 그것이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삶이라 하고, 나아가 그것이 불가피한 삶이라고 우겨대기에 이르렀습니다. '닫힌 삶'이 가져다 준 자기 축소의 삶에 더욱 익숙해지고 굳어지다 못해, 이제 그 삶을 열성을 다해 변호하고 마냥 높이 예찬하기까지 합니다.

기껏 생각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눈앞의 자기 이익과 편리를 계산하는 것입니다. 깊게 들여다보고 높은 것을 그리워하고 넓은 것을 살필 수 있고 하나님의 이미지에 맞닿아 닫힌 자기의 삶을 열 수 있는 그 가능성을 버립니다. 자기 이익과 편리를 저울질 하는 편벽된 생각의 울타리 안에 갇혀버려 저급한 자기 취향과 욕구와 충동의 수준으로 떨어져버립니다.

이것은 자본주의라고 하는 특정 시대의 체제만을 탓할 수 없는 인간 본성의 밑뿌리 문제입니다. 자본주의를 맛볼 수 없었던 저 아득한 시대의 에서에게서도 나타났던 인간의 한계였습니다. '허기와는 도저히 치환될 수 없는' 장자의 특권을 분별없이 손쉽게 내준 것은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는 인간의 한계를 가리킵니다.

장자의 특권이란 현재의 배고픔을 이유로 결단코 가볍게 바꿔치기할 수 없는 영원의 가치를 말합니다. 현재의 궁핍을 핑계 삼아 단연코 쉽게 팔아버릴 수 없는 거룩한 삶의 가르침과 새로운 삶의 약속과 비전을 뜻합니다. 에서는 배고픔에 자신을 맡겨 그 좁은 세계에 갇힌 나머지 그것과 족히 견줄 수 없는 약속과 비전을 내동댕이치는 인간의 한계를 표상합니다. 자기 속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이미지를 저버리고 순간의 배고픔에 모든 것을 다 맡겨버리는 희비극의 상황을 연출한 보편 인간의 모습입니다.

V. 바르기

우리의 삶에서, 우리의 일상에서 모든 것을 순간의 이익과 편리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과 비전을 버리는 경박한 삶의 방식으로부터 벗어날 때가 왔습니다. 우리가 놓친 하나님의 이미지, 거기에 기대어 더욱 깊고 높고 넓게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믿음을 회복할 때가 왔습니다.

장자의 특권이 표상하고 있는 상징은 당시 관습에서 규정하고 있던 이 세상에서의 어떤 이점 그 너머, 하나님의 약속을 의미하며 하나님의 뜻을 앞장서 구현해 가는 소명을 가리킵니다. 당장의 배고픔에 휘둘려 죽 한 그릇에 그 고결한 믿음의 삶을 간단하게 넘겨버리려는 마음가짐,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이미지를 마음에 새기지 않고 자기 욕망에 내맡긴 채 일상을 살아가는 이들이 저지르는 삶의 행태입니다.

그런데 눈앞의 배고픔, 자기 욕구와 충동 그리고 자기 이익과 편리를 잘 챙기는 사람, 그런 사람을 오늘의 세상에서 똑똑하다 하며 재치 있다고도 합니다. 잘 사는 사람이라 합니다.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사람만을 끌어들이고, 또 이용합니다. 깊은 사귐의 뜻은 없습니다. 필요하다면 언제이고 친구도 내동댕이칩니다. 시간을 내어 남을 위해 봉사하는 삶으로 나아가는 ‘열린 삶’이란 이들에게 언제나 무가치한 일로 치부됩니다.

자기의 이익을 향해 모든 것을 쏟아 부을 뿐 그 너머 하나님의 선하신 뜻은 주변으로 밀어버리고 뭉개버리며 살아가는 ‘닫힌 삶’입니다. 협소하기 이를 데 없는 오늘의 천박한 삶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삶을 표상한 에서를 망령된 자, 속된 자, 하나님 없는,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히 12:16)

우리의 삶은 어떻습니까? 팥죽 한 그릇에 혈안이 되어 더욱 중요한 '하나님 생각'을 뒷전으로 밀어제치고 넉살좋게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우리도 '배고파 죽겠다'며 자기의 형편을 극도로 과장하면서,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 마냥 유쾌한 듯 매끄럽게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기만 하는 통상의 생각에 얽매여, '그 나라와 그 의'라는 넓고 높은 세계와 만날 수 있는 문을 잠그고는, 자기 만족의 담벼락 안에 갇혀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그 나라와 그 의'라는 새 하늘, 새 땅을 바라볼 수 있는 열린 삶에 대한 가능성의 믿음을 놓치고 죽 한 그릇 얻어먹기 위해 발버둥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그렇게 살면서도 아무런 느낌 없이, 아무런 생각 없이 쳇바퀴 돌듯이 오늘을 살고 또 내일을 살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까?

VI. 나가기

죽 한 그릇 얻기 위해 '하나님 생각'을 저버렸던 구약의 에서, 그 에서의 후예는 이스라엘과 전쟁을 벌여온 아랍 어느 족속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눈앞의 이익과 편리로만 저울질 하고, 모든 것을 생존과 물질로만 바라보고 이것을 다른 모든 것에 우선하는 급선무로, 첫째가는 과제로 여기며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의 편의주의자들,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는 일상인들, '그 나라와 그 의'라는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생각하지 않는 꽉 막힌 오늘의 '닫힌 현실주의자들', 그들이 다름 아닌 에서의 후예입니다.

에서의 후예는 교회 밖에서도, 교회 안에서도 승승장구의 기세를 떨치고 있습니다. 아니, 밤하늘의 저 별들처럼 많아지고 있는 것은 하나님을 생각하는 믿음의 후예들이 아니라,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는 에서의 후예들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어느 족속, 어느 후예입니까? 에서의 후예입니까, 이에 맞서는 믿음의 후예입니까? 어느 후예로 일상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깊이 물어볼 수 있기 바랍니다.

박영신 / 예람교회 목사

 

 

365일 설교[ 8월 17]말씀의 능력
 

 바울은 출애굽 과정에서 이스라엘이 범했던 죄악의 사건들을 실례로 들면서 고린도 교인들에게 바로 살지 않으면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네 가지 사항에 대해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우상 숭배를 미워하십니다(7절).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여 사랑해야 할 하나님 대신에 다른 대상을 더 사랑하는 사람은 우상을 숭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상 숭배를 가장 싫어하십니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음란을 미워하십니다(8절). 이스라엘 백성들은 음란한 생활을 하다가 하나님께 심판을 받아 하루에 2만 3천 명이 죽었습니다. 오늘날도 우리가 음란죄를 지으면 육신이 당장 죽는 것은 아니지만 영혼을 죽게 하는 결과를 낳게 합니다. 우리의 몸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산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는 음란을 반드시 피해야 합니다.

  셋째, 하나님께서는 주를 시험하는 것을 미워하십니다(9절).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지 아니하고 일시적인 방편으로 병 낫기 위해, 소원 성취하기 위해 주님 앞에 나오는 것은 주를 시험하는 것이 됩니다. 주를 시험하다가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뱀에게 물려 죽었습니다. 이처럼 오늘날도 주님을 시험하면 마귀에게 물릴 것이므로 우리는 주를 시험하지 말아야 합니다.

  넷째, 하나님께서는 원망하는 것을 미워하십니다(10절). 원망은 우리들에게 아무 유익이 되지 못하며 사람들 사이를 불화하게 만들고 이간시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원망하다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40년 동안 광야에서 방황하였습니다. 이처럼 원망하는 죄는 우리들에게서 축복을 빼앗고 메마른 사막으로 우리들을 몰아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원망하는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우상 숭배와 음란, 주를 시험하며 원망하는 죄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이러한 죄를 범했다면 반드시 지금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365일 설교[ 8월 18]물질의 복을 누리려면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의 율법에 따라 해마다 처음 난 것을 야웨의 전에 드렸고 또한 자신 소유의 10분의 1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본문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과 새로운 언약을 맺으면서 이러한 내용들을 준수할 것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이에 오늘은 우리의 소유를 하나님께 먼저 드림으로써 물질의 부요를 누리는 생활에 대해 살펴 보고자 합니다.

  먼저, 우리는 물질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인정해 드려야 합니다. 온 우주의 물질 세계를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그 중 일부를 우리에게 맡겨 두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물질 그 자체보다는 그것을 관리하는 우리의 마음 자세를 더욱 중시해야 합니다. 우리는 다만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부름받았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하나님께 선물로 받은 물질을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해야 합니다. 우리의 첫 열매를 드림으로써, 또한 소득의 10분의 1을 드림으로써 우리가 하나님을 물질의 주권자로 인정해 드릴 때 하나님께서는 더 풍성한 물질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심고 거두는 법칙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씨를 뿌려야만 열매를 거둘 수 있는 자연의 법칙처럼 영적 생활에 있어서도 우리는 심어야만 약속된 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먼저 물질을 심으면 그것은 씨앗이 되어 우리의 생활 속에 넉넉한 물질의 열매로 나타납니다. 나아가 우리가 시간과 노력 등 우리의 가진 것들로 하나님을 위해 심으면 그 또한 하나님 나라의 축복의 씨앗이 되어 삶 가운데 풍성한 열매로 돌아오게 됩니다. 마지막 남은 가루와 기름으로 하나님의 종 엘리야를 대접함으로 그 땅의 가뭄이 끝날 때까지 먹을 양식이 떨어지지 않는 큰 축복을 받았던 사렙다의 과부가 이에 대한 좋은 본보기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소유욕을 버리고 하나님을 물질의 주인으로 인정해 드리며 또한 우리에게 맡겨진 것들을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해 먼저 심는 생활을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풍성한 복을 받아 누리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365일 설교[ 8월 19]주의 만찬에 참여할 때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성령이 충만하여 하나님을 열심히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가운데 심신이 약한 자, 병든 자, 그리고 잠자는 자가 많은 것을 보고 이는 그들이 성찬 예식을 잘못 지켰기 때문임을 지적하였습니다. 이에 오늘은 성찬의 깊은 의미와 우리가 성찬을 대하는 올바른 태도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성찬은 주의 몸이므로 분변하여 참여해야 합니다. 주의 몸을 분변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몸이 깨어진 이유와 목적을 분명히 깨달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형식적으로 혹은 습관적으로 성찬에 참여함으로 주의 심판을 자초합니다. 그러나 성찬은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히사 몸 찢고 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극진한 사랑을 기념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 안에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가 담겨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찬의 떡과 잔을 대할 때 우리는 채찍에 맞으시고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의 고난이라는 객관적인 사건을 바로 나를 위한 것이었다는 주관적인 체험의 사실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둘째, 성찬에 참여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살펴야 합니다. 성찬 예식은 그리스도의 깨어진 몸과 흘리신 피를 먹고 마시는 것이므로 지극히 거룩하고 장엄한 것입니다.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이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거룩한 고난과 영광에 참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찬 예식에 앞서 자신을 살펴보고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 것입니다.

  셋째, 성찬을 통해 십자가 대속의 복음을 증거해야 합니다. 성찬 예식은 주님의 재림 때까지 영, 혼, 육의 전인적인 구원의 복음을 전하겠다고 선언하는 것이요, 신앙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철학적으로, 형이상학적으로 변질시킴으로써 주님의 대속 사역을 무의미하게 만들어 버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복음은 오직 십자가 구속의 은혜를 통해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절실한 신앙 체험인 것입니다.

  성찬 예식은 단순한 종교 의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는 위대한 축복입니다. 그러므로 올바른 성찬을 통해 하늘의 은혜와 축복을 누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65일 설교[ 8월 20]충성된 자의 담대한 기도
 

느헤미야 13장에 보면 하나님을 위한 느헤미야의 열심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을 하나님의 회에서 쫓아내었고(1-3절), 하나님의 전에서 방을 갖추고 살고 있던 대적 도비야를 내쫓기도 하였으며(4-9절), 각지로 흩어진 레위 사람들을 다시 모아 하나님의 전에서 봉사하게 하였습니다(10-14절). 또한 안식일에 이방인들이 유다 예루살렘에 들어와서 장사하는 것을 금하였고(15-21절), 이방 여인을 취하여 아내를 삼은 유다 사람을 책망하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를 시키기도 했습니다(23-25절).

  본문에는 이처럼 하나님께 충성되었던 느헤미야가 하나님께 기도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위하여 이 일도 기억하옵시고 주의 큰 은혜대로 나를 아끼시옵소서”.

  이러한 느헤미야의 기도를 통해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담대하게 기도할 수 있기 위해서는 모든 일에 충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하나님께 자기가 하나님을 위하여 한 일들을 기억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한 모든 일들을 기억하고 계실 뿐 아니라 그것을 주의 책에 기록해 놓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에 따라 보상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통하여 히스기야가 죽으리라고 말씀하셨을 때도 히스기야는 “내가 주의 앞에서 진실과 전심으로 행하며 주의 목전에서 선하게 행한 것을 추억하옵소서.”(사 38:3)라고 기도했습니다. 이 얼마나 자신 있고 담대한 기도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이 기도를 들으시고 즉시로 히스기야의 수명을 15년 연장시켜 주셨을 뿐 아니라, 그와 예루살렘 성을 앗수르의 손에서 건져 주셨던 것입니다(사 38:5,6).

  그러므로 우리도 느헤미야처럼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를 위하여 행한 모든 일들을 기억해 주시고 나를 아껴 주옵소서”라고 기도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충성되게 헌신한 모든 일들은 기도 못지 않은 힘이 있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하나님께 기억된 바 되었다가 우리가 위경에 처했을 때 하나님의 도우심과 보살핌을 받는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365일 설교[ 8월 21] 무엇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가?
 

인간이 삶을 영위하는 데 있어 필수적으로 소유해야 할 세 가지 요소가 있는데 그것은 본문에서 제시한 믿음, 소망, 사랑입니다. 그 세 가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우리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불안과 공포, 초조에 매여 있는 사람은 창조적인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야이로에게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막 5:36)고 말씀하신 주님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믿음이란 범사에 긍정적인 자세를 갖는 것이요, 감사하는 자세를 갖는 것이며, 기뻐하는 자세를 갖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살기 위해서는 먼저 마음속에 있는 불안, 의심, 초조 등의 부정적인 생각들을 뿌리뽑고 그 속에 인간을 구원하시고 복된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워 넣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우리는 소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을 은혜로 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살후 2:16).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소망은 우리에게 삶의 용기와 기쁨을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주 안에서 소망을 가진 자와 절대적으로 동행하시는데 그것은 하나님은 ‘소망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롬 15:13). 그러므로 우리는 늘 주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소망을 품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셋째, 사랑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잘못된 대상을 사랑함으로써 낭패를 당합니다. 돈이나 권력이나 명예나 세상 인기를 사랑하던 사람들이 그와 함께 망하는 것을 우리는 수없이 보아 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 사랑으로 인해 더욱 값진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할 때 비로소 우리가 누구인지 깨닫게 되고 우리 자신을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또한 우리 자신을 사랑할 때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여러분은 지금 무엇을 가지고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인생의 성공과 행복과 보람 여부는 팔자 소관이나 환경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소유하고 사느냐에 달려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365일 설교[ 8월 22]신앙의 절개
 

바사 왕 아하수에로 때의 일입니다. 총리 대신 하만은 왕의 은총을 받아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었으나 한 가지 불만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대궐 문지기인 유다 사람 모르드개가 자기에게 무릎을 꿇지도 않고, 절하지도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유다 사람 모르드개가 하만 앞에서 보여준 신앙의 절개와 그 결과를 살펴봄으로써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먼저 우리는 모르드개의 행동을 통해서 절개 있는 신앙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께 선택받은 유다인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이방인 하만에게 절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왕의 신복들이 모르드개에게 “너는 어찌하여 왕의 명령을 거역하느냐”(3절)고 날마다 권했습니다. 만일 왕의 명령을 어기고 하만에게 절하지 않으면 생명을 부지하기가 힘들 것이라고 위협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모르드개는 조금도 타협하지 않았고 오히려 자신이 유다인임을 고하였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악한 하만은 모르드개와 유다 민족 전부를 멸절시키기로 작정했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만의 계획대로 모르드개와 온 유다인이 멸절되었습니까?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더를 미리 왕궁에 보내어 유다 백성들의 구원의 길을 예비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왕후 에스더의 죽음을 불사한 결단을 통해서 유다 백성들을 악한 하만의 손에서 건지시고 오히려 하만과 그의 가족들을 멸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의 절개를 지켰던 모르드개는 왕궁에서 존귀하여 점점 창대하여져서 그 명성이 각 도에 퍼지게 되었습니다(9:4).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에게 포로로 잡혀간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도 죽음을 각오하고 느부갓네살 앞에서 믿음의 절개를 지켰을 때 하나님께서는 네번째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구원하셨습니다(단 3:8-25).

  이처럼 신앙의 절개를 굳게 지킨 사람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이 임했듯이, 오늘날도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어려움과 위기 속에서도 하나님 중심에 굳게 서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믿음의 진리를 지키는 성도들을 결단코 버리지 않으시며 떠나지 않으시고 모든 위험과 환난에서 건져 주시고 높여 주시는 것입니다

 

 

365일 설교[ 8월 23]방언의 유익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은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많은 체험을 갖게 됩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놀라운 체험은 성령 세례를 받고 방언을 선물로 받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방언의 구체적인 유익은 무엇일까요?

  첫째, 방언을 말하는 자는 하나님께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할 수 있게 됩니다(고전 14: 2). 방언 기도는 자기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그 입술과 혀를 붙잡아서 말하게 하시는 것이므로 하나님 외에는 그 누구도 알아듣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아무런 방해없이 하나님과 더욱 친밀한 가운데 깊은 교통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 방언은 마음의 안식을 가져옵니다. 성경은 “생소한 입술과 다른 방언으로 이 백성에게 말씀하시리라 전에 그들에게 이르시기를 이것이 너희 안식이요 이것이 너희 상쾌함이니”(사 28:11,12)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방언 기도는 우리의 깊은 잠재 의식 속에 들어가 어린 시절부터 경험했던 슬픔과 고통과 억압과 침울함 등 우리 마음을 병들게 했던 온갖 상처들을 말끔히 씻어냅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억압하던 불안, 초조, 공포에서 해방되어 우리의 마음은 상쾌하고 가벼우며 평안과 안식을 얻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 방언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시험과 위험으로부터 우리를 건져 줍니다. 우리는 앞날에 일어날 위험과 고통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은 이 모든 것을 알고 계시므로 미리 우리의 방언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 간구하심으로(롬 8:26,27) 장차 다가올 여러 가지 시험과 위험들을 방지해 주는 것입니다.

  넷째, 방언은 믿는 자들의 표적이 됩니다. 마가복음 16장 17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들에게 분명한 증거와 표적을 주시는데, 그 첫째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쫓는 것이요, 또 하나는 새 방언을 말하며 놀라운 권능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방언을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받은 백성이요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자녀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외에도 방언 기도의 유익은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와 같이 신앙 생활에 큰 유익이 되는 방언 기도를 통하여 살아계신 하나님의 증거를 심령 깊숙이 가지고 날마다 확신과 능력에 찬 신앙 생활을 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365일 설교[ 8월 24]부활의 체험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는 사상은 인간의 생각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어느 종교도, 인간 사후의 영혼 불멸은 믿을지 몰라도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믿지 않습니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통하여 계시하신 사상인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을 거역하고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영혼과 육체의 죽음, 그리고 환경의 저주와 절망 가운데 처하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인간적인 절망은 어떠한 사람도, 어떠한 문명도, 어떠한 사회도 해결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의 모든 절망을 짊어지고 십자가에 못박혀 몸 찢고 피 흘려 죽으셨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이를 해결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것은 죄악을 다 청산하신 것을 의미합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피값을 받으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는 사람의 과거, 현재, 미래의 죄를 다 도말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의 죄속함의 보증이 됩니다.

  또한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의 부활에 대한 확증이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할 것을 보증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믿음, 소망, 사랑이 있음은 예수님의 부활을 인함이며, 우리에게 영원한 승리가 있는 것도 예수님께서 죽음과 절망을 딛고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부활의 체험을 장차 올 미래에만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의 현실의 삶 속에서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날마다 그리스도 안에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 세상의 자랑으로부터 죽을 때 우리는 날마다 부활의 체험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죽음으로 다시 사는 생명의 도입니다. 우리는 몇 번이고 우리 자신과 자기 중심적인 욕심에 대해 죽음으로써만 더 충실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과거의 역사적인 사건이나 성경 속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의 사건은 현실적인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예수님은 부활과 생명으로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것입니다

 

 

365일 설교[ 8월 25]욥의 시련과 마귀의 참소
 

참소란 모든 거짓을 동원하여 남을 헐뜯고 없는 죄를 있는 것처럼 꾸며서 고해 바치는 행위를 말합니다. 마귀는 바로 이와 같은 참소자입니다(계 12:10). 마귀는 밤낮으로 우리를 참소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복을 받지 못하도록 온갖 궤계를 부리고 있습니다.

  본문의 욥은 훌륭한 인격자요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참소자인 마귀는 욥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다고 맹렬히 참소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마귀의 참소를 잠시 허락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허락을 받은 마귀는 자신의 참소를 증명하기 위하여 사력을 다해 욥의 전 재산을 빼앗고 자녀들을 죽였습니다. 그러나 욥은 모든 재산과 자녀들을 잃고도 자신의 입술로 하나님을 비방하거나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욥을 참소하던 마귀는 참패를 당하고 만 것입니다. 그러나 마귀는 쉽사리 물러가지 않고 재차 욥을 참소하여 이번에는 몸에 악창이 나도록 했습니다. 욥은 극한 상황 가운데 빠져 있으면서도 끝까지 그의 순전함을 버리지 않았고, 결국 승리하여 이전보다 더 큰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욥의 이야기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 전에 반드시 마귀의 참소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에 마귀의 거짓된 참소라도 허락하셔서 그것이 거짓임을 증명하시고 당당하게 복을 내려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 마귀의 참소가 따르고 그것을 이겨내야 축복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마귀의 참소를 쉽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마귀는 영적 존재이므로 그 형체는 없어도 사람과 환경을 통해서 격렬하게 우리를 공격해 옵니다. 이와 같이 마귀가 우리를 참소하는 동안 우리는 결코 낙심하거나 절망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보혈로 무장하고 기도로써 참소의 때를 이겨내야 합니다. 그러면 마귀의 거짓됨은 밝히 드러나고 하나님의 크신 축복이 우리에게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마귀의 참소가 아무리 격렬하다 할지라도 우리는 십자가에서 마귀의 궤계와 참소를 격파시키신 예수님을 의지함으로 언제나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365일 설교[ 8월 26]그리스도인답게 살자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쓰는 편지를 마감하면서 마지막으로 세 가지의 권면을 해주고 있습니다. 그 권면을 살펴봄으로써 은혜를 나누기로 하겠습니다.

  첫째로, 깨어 있으라고 권면합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는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정신적으로, 밤과 같이 어두운 시대입니다. 마치 우는 사자가 그 먹이를 바라보고 있듯이 마귀는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도전을 해 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어찌하든지 이 세상의 교훈과 풍조를 좇아 안일하게 그리고 자기 중심적으로 살도록 합니다. 그러나 깨어있는 신자는 그러한 유혹을 이길 수 있습니다. 깨어있다는 것은 관심과 주의를 기울이는 것인데 여기서는 특별히 영적 각성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세대 속에서 깨어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매일 매일의 순간들을 감사하면서, 주님을 의지하며 경건하게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둘째, 굳게 서 있으라고 권면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대로 사는 것이 나쁘지 않다고 자기를 합리화하는 것처럼 위험한 생각은 없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그러한 생각에서 돌이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회개하라”는 말씀이 바로 돌이키라는 말씀입니다. 돌이켜 사는 생활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생활입니다. 그 나라의 삶의 최대 강령은 “사랑함으로 행하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구했고 그를 본받아 우리가 나타내 보이는 사랑보다 더 큰 믿음의 역사는 없습니다. 사랑은 구체적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의 희생도 감수해야 합니다.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 이것이 우리 신앙 생활의 모토가 되어야 합니다.

  셋째, 남자답게 강건하라고 권면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경건하면서도 그러나 믿음으로 인해 더욱 용감하게 인생을 사는 삶을 말합니다. 세상을 이긴 주님을 믿는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 속한 모든 어두움의 세력들을 이기고 강건하게 살 수 있게 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감사함으로 깨어있고 사랑을 실천함으로 믿음 위에 굳게 서서 세상을 이긴 주님을 의지하여 담대히 어두움의 세력을 이기고 승리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365일 설교[ 8월 27]장애를 극복하는 신앙
 
365일 설교[ 8월 28]긍정적 생각의 축복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최초의 사람은 어떤 종류의 장애도 없이 아름다웠습니다. 그런데 그런 인간에게 장애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오늘날 인간에게 장애가 생기게 된 원인과 이를 극복하는 신앙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우리 인간은 모두 전인적 장애자였습니다.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는 마귀의 꾀임에 빠져 하나님께 범죄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영적으로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지고 그들의 육체도 흙으로 돌아가야만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땅은 저주를 받아서 인간은 종신토록 수고를 해야 땅의 소산을 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죄의 결과로 모든 인간은 사망에 이르게 되었고 죽음 이후에는 불과 유황으로 타는 지옥에 떨어지게 된 것입니다(롬3:23, 6:23). 그러면 어떻게 해야 우리는 영과 육과 범사의 3중 장애를 해결받을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2천 년 전 인간의 3중 장애를 멸하시기 위해 죄 있는 인간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인류를 대신해 형벌을 받아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이를 완전히 해결해 주셨습니다. 또한 다시는 장애가 없는 천국을 예비해 주셨습니다. 천국은 사망이나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없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 넘치는 곳입니다. 또한 그 곳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우리들을 위해 예비되어 있으며 얼마 후면 우리는 그 곳에서 영원히 장애가 없는 몸을 가지고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내게 주신 재능을 열심히 계발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려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 사함받았습니다. 그 때문에 우리의 전인적 장애는 완전히 제거되었습니다. 이처럼 구원이 보장된 우리는 항상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살전 5:18). 감사하는 신앙은 어떤 장애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게 있는 것을 찾아내어 감사하고 주신 재능을 개발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성실히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생의 3중장애가 극복되었음을 믿고 감사하며 성실히 살아갈 때 우리의 삶은 보다 밝아질 것입니다

 

 

365일 설교[ 8월 29]그리스도인의 삶의 자세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인간적으로 갖는 긍정적인 신념은 마치 아침 안개와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게 될 수 있는 진정한 ‘긍정적 신념’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럼 그것을 얻는 조건이 무엇인지 함께 생각해 봅시다.

  첫째, 회개해야 합니다. 천국에는 긍정적인 것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긍정적인 천국의 세계를 체험하기 위해서는 먼저 회개해야 한다고 예수님께서 단호히 선언하셨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회개함으로 하나님과 화목하면 긍정적으로 살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됩니다. 회개하지 않음으로 하나님과 화목하지 않으면 아무리 혼자 긍정적인 생각을 하고 긍정적인 말을 외친다고 할지라도 결코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을 수 없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하늘과 땅과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을 지으신 하나님의 자녀라는 확신을 갖고 있으면 우리는 그 위대하신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긍정적인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셋째,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말씀은 저 하늘이 무너지고 이 땅이 꺼져도 일점 일획도 변치 않습니다. 이 때문에 우리는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있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는 믿음 위에 굳게 서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의 긍정적인 생각을 얻게 됩니다.

  넷째, 신실한 신앙 생활을 계속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배하고 교회 생활을 착실하게 하며 헌물과 십일조 생활을 잘하고 이웃에게 전도함으로 순종의 생활을 할 때 긍정적인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성령의 인도를 좇아 살아간다면 하나님의 크신 역사가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인도를 무시하고 인간의 체면이나 욕심을 좇아 살아간다면 결코 긍정적인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우리가 성령을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들이고 의지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파괴적이고 부정적인 생각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긍정적일 수 있는 조건들을 갖춤으로 긍정적인 신념을 얻어 위대한 축복의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365일 설교[ 8월 30]주의 영광을 바라보자
 

사람은 태어난 후 성장하여 그 삶을 마칠 때까지 끊임없이 변화하여 갑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믿는 우리는 그 존재 자체까지 변화하게 됩니다(고후 5: 17). 그러므로 오늘은 변화된 우리가 취해야 할 삶의 올바른 자세에 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첫째, 우리는 용서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죄를 한 번도 짓지 않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기 때문에(롬 3:23), 우리에게 용서가 필요한 것입니다. 용서란 실천하기가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용서하는 사람이 십자가를 짊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려고 하면 우리는 온갖 모욕과 오해와 고통을 짊어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용서하시려고 우리 대신 십자가를 짊어지셨고 그 결과는 영광이 되었습니다(잠 19:11; 빌 2:9-11).

  둘째, 우리는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먼저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절망적인 상황에 둘러싸인다 해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건져 주십니다(시 91:14). 또 우리는 자기를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시고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도 마땅히 우리 생명을 사랑해야 합니다. 나아가 우리는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영원히 죽을 인생에게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것, 곧 복음을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가진 것을 끊임없이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셋째, 우리는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염려와 근심에 짓눌려 사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그런데 주님은 우리가 맡기지 않은 일은 책임져 주시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로 모든 짐을 맡기고 하나님께서 돌보아 줄 것을 믿고 감사드려야 합니다. 많은 성도들이 기도에 응답받지 못하는 것은 기도할 때는 “하나님께 맡깁니다.” 라고 해놓고 기도가 끝날 때는 맡겼던 것을 다시 안고 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웃을 용서하고 하나님과 나 자신, 이웃을 사랑하며 주님께 모든 것을 다 맡기고 살아갈 때 변화된 존재로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게 될 것입니다.

 

 

365일 설교[ 8월 31]이 보배를 질그릇에
 

이 세상 사람들은 모두 ‘질그릇’처럼 깨어지기 쉬운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세상 사람과는 달리 이 질그릇 속에 보배인 예수 그리스도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보배를 가진 성도만이 누리는 특권은 무엇일까요?

  첫째,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질그릇처럼 연약한 육신을 가진 인간이기에 죄와 질병과 생활고에 우겨쌈을 당합니다. 그러나 예수를 구주로 모신 사람은 기도와 찬양과 말씀을 통해 이것을 떨쳐 버리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둘째,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도가 내적인 근심과 걱정, 불안으로 인해 답답함을 당한다 할지라도 결코 낙심하지 않는 이유는 질그릇 안에 있는 보배가 그 모든 문제를 넉넉히 해결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셋째,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 성도라 할지라도 세상에 사는 동안 혹독한 핍박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보배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담고 있는 한, 비록 깨어지기 쉬운 나약한 질그릇이라 하더라도 결코 버린 바 되지 않습니다.

  넷째,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거꾸러뜨림’이란 핍박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죽을 고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죽을 고비에서조차도 우리 속에 있는 보배로 인해 구출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실제로 루스드라에서 돌에 맞아 거꾸러졌으나 죽지 않았던 것입니다(행 14:19,20).

  우리는 분명 나약하고 무가치한 질그릇 같은 존재이지만 우리 안에 계신 보배, 즉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했기 때문에 더 이상 나약하지 않습니다. 우리들의 몸인 질그릇이 우겨쌈을 당하고 답답한 일을 경험하며 핍박을 받고 거꾸러뜨림을 당한다 할지라도 우리들은 우리 안에 있는 보배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 권세와 사망을 이기신 분이시기 때문에 항상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신의 연약함을 보지 아니하고 자신 속에 있는 보배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계속해서 바라보며 살아갈 때 우리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 승리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출처 : RED COMPASS 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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