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5일 설교[ 7월1일] {목록 돌아가기} |
전도는 내안의 생명이 넘쳐흐르는 것....
구둣방 점원이었던 무디가 예수님 믿고 은혜를 받았습니다. 한번은 구두방에 앉아 있는 데 주일학교 교사 킴볼이 전도했습니다. 전도받고 교회 나간지 얼마 안되어 성령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충만했습니다. 어느 주일날 아침에 거리로 나가 단번에 18명의 아이들을 전도했습니다. 그 후부터 전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런 결심을 합니다. “하루에 한번 이상 전도하지 않으면 잠을 자지 말자”. 어느 날 밤, 무디가 집으로 돌아와 잠을 자려고 하는 데 그날 따라 전도하지 않았습니다. “아, 전도안했구나”. 그리고 거리로 나갔습니다. 그날따라 비가 쏟아졌습니다. “이렇게 비가 오니 누가 있겠나?” 과연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한 사람 전도해야 겠고, 조금 기다렸더니 한 사람이 우산을 쓰고 지나갔습니다. 재빨리 달려 우산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같이 우산 좀 같이 써도 될까요?” 그리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비가 오면 우리는 우산으로 피합니다. 인생의 폭우가 쏟아질 때 선생님은 어디로 피하나요?” 결국 그 사람은 구원받았습니다. 자기 안에 있는 예수님 생명이 자기도 모르게 흘러 무디는 일생 100만명을 전도했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에게 예수님의 생명이 있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을 때 흘리신 물과 피가 여러분에게 생명으로 흘러왔다는 것을 아십니까? 인생에 고난이 와도 우리가 담대할 것은 고난이 오면 우리가 더 강해지기 때문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고난이 올 때 고난과 싸우지 말고 예수님을 바라 보십시오. 고난이 올 때 예수님 바라보면 우리안에 있는 생명을 더 풍성해 집니다. 그러면 그 생명이 흘러갑니다. 요7: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주여, 우리안에 있는 예수님 생명이 고여 있지 말게 하옵소서. 사랑으로, 긍휼로, 성실로, 지혜로, 학업으로, 사업으로, 능력으로 흐르게 하옵소서. 특히 전도로 흐르게 하옵소서.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직장에 있든지 학교에 있든지, 부요하든지, 가난하든지, 우리안에 있는 예수님 생명이 흐르게 하옵소서.
365일 설교[ 7월2일] |
남편과 아내 역할 바꾸기
물론 아내와 남편은 다르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다릅니다. 각가 고유한 위치와 기능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가정에서 남편이 그 날따라 몸도 아프고 피곤한데 어쩔 수 없이 직장에 가기 우해 집을 나서다가 소파에 길게 누어 잠을 자는 아내를 보았습니다. 그래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는 아픈 데 직장에 가야 하는 데 아내는 펴저 잡니다. 제발 며칠만이라도 역할을 바꿔주옵소서”. 하나님이 그 남편의 소원을 들어주어 다음날 보니 자기가 아내가 되고 아내가 남편이 되어 있었습니다. 직장에 안 가게 된 남편은 너무 좋았습니다. 그래서 직장에 갈 남편을 위해 아침을 준비하고, 아이들을 깨워서 학교 갈 준비를 시켰습니다. 아침 식사를 하게 한 후에 점심을 챙겨주고, 학교에 데려다 준 후에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집에 오니 빨래를 수북히 쌓였습니다. 세탁기에 넣고, 드라이크리닝을 해야 할 옷을 세탁소에 맡겼습니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은행에 들러 전기세, 전화세를 내고 마켓에 들러 저녁식사거리를 사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오자마자 침대를 정리하고, 집안 청소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오후2시가 되자 헐레벌떡 뛰어 아이들을 데리러 가서 데려온 후 집에 와서 숙제를 시켰습니다. 오후 5시가 되자 저녁준비를 시작했습니다. 나물을 다듬고, 국을 끓이고, 그 사이에 또 빨래접고 아이들 숙제검사하고 밤 9시가 되자 아이들을 씻어 잠자리에 들게 했는 데 남편이 들어올 때쯤 파김치가 되었습니다. 며칠 그렇게 하다 보니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기도를 잘못 한 것 같습니다. 다시 바꿔 주세요. 힘들어도 너무 힘들어요”. 그랬더니 하나님이 대답하셨답니다. “내 아들아, 고생이 많았다. 네 소원을 들어주마. 그러나 앞으로 10개월은 더 참아야 한다. 그 이유는 네가 어젯밤 임신했기 때문이다”
365일 설교[ 7월3일] |
무신론자의 심리학
최근에 <무신론의 심리학>이란 책이 나왔습니다(사진). 이 책은 하나님이 없다고 부정하는 무신론자들의 가정을 연구한 책입니다. 연구의 결과는 놀랍습니다. 무신론자 100%는 모두 아버지가 잘못된 사람들이었습니다. 니체, 프로이트, 샤르트르, 히틀러, 스탈린, 모택동, 모두가 아버지가 없거나 일찍 죽었거나 아니면 나쁜 아버지였거나 자식에게 관심이 없었던 아버지였습니다. 먼저 무신론자 니체가 있습니다. 이 사람은 “신이 죽었다”고 선언한 사람입니다. 놀랍게도 이 사람의 아버지는 목사였습니다. 그런데 너무 약했습니다. 병들고 약하고 생기없고 자녀들과 대화가 없고, 그래서 결국 니체는 평생 병들고 나약한 기독교를 평생 공격하며 살다가 자살로 인생을 마쳤습니다. 그가 공격한 병든 기독교는 아버지였습니다. 염세주의자 쇼펜하우어가 있습니다. 이 사람 아버지는 자살했습니다. 어머니와 아주 나쁘게 지내다가 건물 3층에서 운하로 뛰어들어 자살로 죽었습니다. 부부간의 갈등이 심해서 쇼펜하우어의 어머니는 쇼펜하우어를 낳을 마음도 없었고 낳은 후에도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는 불행한 가정에서 나온 것입니다. 프로이드의 아버지 야콥은 아들이 보기에도 실망스러운 존재였습니다. 가족을 부양할 능력도 없는 데다가 성도착자였습니다. 그의 성적인 심리학은 아버지가 모델입니다. 아버지에 대한 무의식적 혐오와 거부감이 그의 무신론적 심리학의 출발입니다. 시베리아를 피로 물들인 소련의 스탈린이 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매우 거칠고 무자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여러 도시들을 돌아다니느라 집을 자주 비웠고 술을 많이 마셨고 아내를 때렸습니다. 어린 스탈린은 어릴 때 그래도 착해서 신학교까지 들어갔지만 나중에 신학교를 중퇴하고 무신론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권력을 잡자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 6천만을 죽였습니다. 독일의 히틀러는 어릴 때 자주 아버지에게 매질을 당했습니다. 그 아버지는 아들에 대해 관심이 없고 강팍하고 다혈질적인 남자였습니다. 아버지가 몰래 좋아한 여자가 유대인인 것을 알고 그는 훗날 유대인 600만명을 죽였습니다. 그가 죽은 것은 사실상 유대인이 아니라 아버지였습니다. 그 많은 무신론자들을 어떻게 다 말하겠습니까?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버지가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를 통해 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 버지가 좋으면 하나님을 떠나지 않았을 텐데 아버지가 잘못되어 하나님을 떠난 것입니다.
365일 설교[ 7월4일] |
왕따
왕따란 말이 있습니다. 따돌림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왕따가 다 나쁜 것은 아닙니다. 어떤 분이 왕따를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왕따=왕이 나중에 따로 쓰려고 준비한 사람”. 그렇습니다. 왕따는 지금 볼 때 따돌림 당하지만 왕이신 하나님이 나중에 따로 쓰려고 준비한 사람일 수 있습니다. 이렇게 고난을 보는 것이 믿음입니다.
365일 설교[ 7월5일] |
자연을 보면서 하나님 찬양
5세기의 성자 어거스틴이 아름다운 자연을 보며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의 “참회록”에 이렇게 썻습니다, “하나님, 눈부시게 아름다운 분, 저는 당신은 너무 늦게 사랑했습니다, 오, 하나님, 그토록 오랫동안 계시되 늘 새롭고 아름다우신 분, 당신을 사랑합니다”. 인류 최초로 우주 여행을 했던 사람은 소련의 가가린 중령이었습니다.그가 비행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사람들이 물었습니다.“당신은 우주에서 하나님을 보았습니까?” 그가 말했습니다.“거기에 하나님은 없었습니다”.같은 우주여행을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미국의 암스토롱이었습니다.땅에 돌아와 같은 질문을 받았을 때 그가 대답했습니다. “내가 우주공간에 있었을 때 거기서 나는 충만하신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우주만 보지 말고 하나님을 보아야 합니다. 성 프란치스코도 우주를 지으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가 1224년 라베르나 산에서 오상을 체험한 뒤 “태양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보니까 태양도 아름답고 달도 아름답습니다. 태양은 형님이요 달은 누님이요, 구름과 물과 불은 아우였습니다. 그래서 찬송가 69장이 나왔습니다. “온 천하 만물 우러러. 다 주를 찬양하여라. 할렐루야. 할렐루야. 저 금빛나는 밝은 해, 저 은빛나는 밝은 달, 하나님을 찬양하라.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결국 그는 죽을 때 죽음마저도 자기 자매로 삼았습니다. “자매 죽임이여 어서 오라”. 그리고 자기의 몸을 벌겨벗겨 대지위에 누이라고 말했습니다. 대지는 그의 어머니였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는 어머니 품에 안긴 아이처럼 평온하게 하나님께 돌아갔습니다.
365일 설교[ 7월6일] |
하늘과 땅사이에 무엇이있습니까?
어떤 분이 저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하늘과 땅 사이에 무엇이 있습니까?”. 여러분, 무엇이 있습니까? 하늘과 땅 사이에 산, 구름, 산, 언덕이 있습니까? 해답은 “과”였습니다. 하늘과 땅. “과”가 있지 않습니까? 과”는 관계입니다. 둘을 연결하는 관계, 그래서 어떤 신학자는 하나님은 하늘과 땅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관계를 창조했다고 말했습니다. “태초에 천지를 있었느니라”가 아니라 “태초에 관계가 있었으니라”. 사실 세상의 모든 것은 관계로 되어 있습니다. 나와 너, 나와 우리, 부모와 자녀, 형과 아우, 나와 이웃, 우리와 자연, 나와 조국, 모든 것이 관계로 되어 있습니다
365일 설교[ 7월7일] |
며느리와시어머니 사이의 거짓말
나와 관계를 맺고 사는 모든 사람과의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관계는 어떻습니까? 사실 이보다 더 운명적인 만남이 있습니까? 한 사람은 내 남편을 낳아준 여자요 또 하나는 내 아들과 살아주는 여자가 아닙니까? 아무리 내가 남편과 좋아해도 그 남편을 낳아준 사람이 없었다면, 아무리 내 아들이 귀해도 아내없이 혼자 산다면 어떻겠어요? 낳아줘서 감사, 살아줘서 감사. 둘은 얼마나 기가막힌 관계입니까? 정말 눈물없이는 못 만날 관계입니다. 재가 아들을 결혼시켰잖아요? 며느리 볼 때마다 너무 감사한 거예요. 내 아들의 장점과 단점 다 아는 데 그 아들과 살아주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만일 며느리 없었다면 지금도 내가 아들을 돌봐야 하지 않아요? 그래서 거짓말 시리즈가 있답니다. 먼저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하는 거짓말 Best 5. 5위: 저도 어머님 같은 시어머니 될래요. 4위: 전화 드렸는데 안 계시더라고요. 3위: 어머니가 한 음식이 제일 맛있어요. 2위: 용돈 적게 드려서 죄송해요. 1위: 어머님 벌써 가시게요? 며칠 더 있다 가세요.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하는 거짓말 Best5가 있습니다. 5위: 좀 더 자라. 아침은 내가 할 테니. 4위: 내가 며느리 땐 그보다 더한 것도 했다. 3위: 내가 얼른 죽어야지. 2위: 생일상은 뭘... 그냥 대충 먹자꾸나. 1위: 아가야, 난 널 딸처럼 생각한단다.
365일 설교[ 7월8일] |
탄광에서 목사님과의 악수
독일의 한 목사님이 탄광지역에서 목회를 했습니다. 하루는 탄광으로 심방을 가서 거기서 일하는 신자의 손을 잡고자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때 그 신자가 말했습니다. “제 손이 더러워서 목사님과 악수를 못하겠습니다.”그러자 이 목사님은 몸을 굽혀 양손에 석탄 가루를 가득 묻혔습니다. 그리고 새까매진 손을 내밀며 다시 말했습니다. “이제 괜찮겠습니까?”. 이것이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365일 설교[ 7월9일] |
원수를 사랑하라
어느 집에 사이가 좋지 않는 집사 부부가 살았습니다. 어느 날 예배에 아내는 몸이 아파 참석하지 못하고 남편만 다녀왔습니다. 남편이 혼자 교회에 갔다 오더니 그동안 안 하던 행동을 하였습니다. 늦도록 설거지도 하고 청소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아내를 열렬히 사랑해 주었습니다. 오랜만에 기분이 흡족해진 부인은 대견한 눈초리로 남편을 보면서 물었습니다. “당신 오늘 웬일이유?” 남편이 말없이 웃기만 하였습니다. 틀림없이 목사님의 설교에 영향을 받았으리라 짐작한 아내는 비싼 과일 바구니를 사 들고 목사님을 찾아갔습니다. “목사님, 고마워요. 그리고 지난번 설교 참 좋았다죠. ‘아내를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설교였는가요?” 그러자 목사님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면서 대답했습니다. “아닌데요. ‘원수를 사랑하라’는 설교였는데요.”. 원수도 사랑하면 세워집니다.
365일 설교[ 7월10일] |
칭찬은
어느 아파트에 노인 부부가 살았습니다. 이 부부는 금술이 너무 좋아 알콩 달콩 살았습니다. 어느날 할아버지가 샤워하기 위해 웃통을 벗자 할머니가 말했습니다. “야, 알통 좀 봐. 권투선수같네. 멋지부러”. 할머니가 할아버지를 칭찬하자 할아버지가 샤워를 끝내고 집을 나갔습니다. 그런데 아침에 나간 할아버지가 점심때가 되어도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할머니가 “이상하다. 이 영감이 어디갔나?” 하고 찾았습니다. 찾아도 없어서 지하 아파트 로 가보았는데 아, 이게 웬일입니까? 할아버지가 거기서 땀을 뻘뻘 흘리며 아령연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할머니가 알통나왔다고 칭찬하자 할아버지가 운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사랑은 이런 것입니다. 사랑하면 더 잘 합니다. 사랑이 사람을 자라게 합니다.
365일 설교[ 7월11일] |
엄마품
여러분이 가장 좋아하는 말은 무엇입니까? 영어를 쓰는 사람들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영어 단어는 무엇입니까?” 세 단어가 꼽혔습니다. 1위, mother, 2위, home, 3위, love, 사랑. 어머니도 집도 사랑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결국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말은 love입니다.
며칠전 우연히 인터넷을 보다 이런 사진을 보았습니다(사진). 한 어린 소녀가 바닥에 누어 자는 사진입니다. 그런데 그는 무슨 그림 속에 누어 있습니다. 무슨 그림인가 하고 보았더니 어머니 그림입니다. 내용을 보았더니 이 소녀는 인도의 어느 고아원에 있는 소녀인데 엄마가 없어 엄마의 모습을 크게 그려놓고 그 가운데 누워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제목을 이렇게 붙었습니다. “얼마나 엄마가 그리웠으면”. 얼마나 엄마가 그리웠으면 어린 것이 그림을 그리고 그 속에서 잘까? 엄마의 품에 달싹 붙어 쪼그리고 자는 것이 안쓰러웠습니다. 그렇습니다. 누구에게나 사랑이 필요합니다. 사랑이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사랑이 모든 것입니다.
365일 설교[ 7월12일] |
감사
어느 기독교 신문에서 누가 이런 글을 썻습니다. “주님, 제가 지난 한 해동안 꼬박꼬박 세금을 낼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제게 직업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주님, 며칠 전에 제가 사람들을 초청하여 식사를 대접하고 설거지 하게 하셔서 감사합니다. 그것은 제게 대접할 만한 마음과 친구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 며칠 전에는 제 차가 고장나서 공장으로 끌고 하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제게 귀한 차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주님, 어제 밤에는 제 몸이 너무 피곤하여 정신없이 자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제게 하루 종일 열심히 일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 지난 주일 예배시간에 제 옆 자리에 앉아 음정이 틀린 교인의 노래를 듣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그것은 제 귀가 아직 정상이기 때문입니다”.
365일 설교[ 7월13일] |
망한 세가지이유...우리나라 역사
제가 역사학자는 아니지만 저에게 세가지 이유를 들라면 첫째 우리나라 지도자들는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한 것입니다. 일본이 서구 문명을 받아들여 개혁을 단행하고 개화하고 근대 무기로 무장하는데도 조선은 쇠국정책으로 척화비를 세우며 문을 닫고 국제 사회로부터 고립되었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시대의 흐름과 국제정세를 읽고 대처할 만한 인물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일찍이 천주교가 우리 나라에 들어 왔을 때 천주교만 핍박하지 않고 받아들였다면 문제는 달랐을 것입니다. 당시 집권세력들은 기독교가 양반과 상놈의 평등을 주장한다며 공자의 제사를 반대한다고 새 시대의 개화된 인물들을 처절하게 죽였습니다. 시대를 변화시킬 만한 인물들을 처형하였습니다. 만약 병자 호란 때 청나라에 끌려간 소현 세자만 죽지 않았다고 해도 우리 역사는 달라졌지 않았나 생각이 듭니다. 소현 세자가 청나라에서 마담샬 신부로부터 서양 문물을 전해 들었고 천주교인들과 함께 귀국하였습니다. 그가 왕이 되었다면 세상이 바뀔 뻔 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소현세자는 귀국한 지 70일 밖에 안되어 갑자기 죽었습니다. 우리 역사로 볼 때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분이 왕이 되었으면 우리 민족의 판도는 달라졌다고 생각이 됩니다. 한 가지 더 이유를 생각한다면 힘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새 시대에 우뚝 설만한 힘이 없었습니다. 이미 조선은 붕당으로 힘을 다 상실하였고 일본이 처들어 왔을 때도 친러파와 친일파로 국논은 갈라져 결집된 힘이 없었습니다. 내부의 분열의 외부의 적보다 더 무서운 것입니다. 결국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고 시대를 이끌만한 지도자가 없는 우리 민족은 힘없이 일본의 속국이 되었던 것입니다.
365일 설교[ 7월14일] |
시대에 맞는 발전을 이루어야
어떤 청년이 아버지를 죽인 원수를 갚기 위해 산에 들어 갔습니다. 10년 동안 열심히 검술을 연마했습니다. 깊은 산속에 들어 가있었기 때문에 시대가 변한지를 몰랐습니다. 원수를 찾아가 아버지를 죽인 외나무 다리에서 결투하자고 했습니다. 이미 세상이 바뀌어 상대는 권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도 모르고 이 청년은 외나무다리에 섰습니다. 칼을 뽑아 10년 동안 연마한 검술로 일격에 원수의 목을 날리려고 했지만 상대는 이미 접근하기도 전에 총을 뽑아 쏘아 버렸습니다.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면 아무리 연마하여도 필요 없습니다
365일 설교[ 7월15일] |
김익두 깡패의 회개
우리 한국 교회 부흥사 가운데 김익두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이 분은 황해도 안악이란 곳에서 태어나 젊었을 때는 예수님도 믿지않고, 시골 장날이 돌아오면 술을 먹고 아무런 잘못도 없는 사람들을 붙잡고, 돈을 뜯어내고, 때리고, 폭력을 하는 깡패 두목이었다고 합니다. 그 당시 경찰들까지도 김익두 하면 혀를 내두를 정도로 싫어하는 사람, 문제의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소안론 선교사에게 전도를 받고 설교 말씀을 듣는 중에 그의 마음이 변화되어 하나님의 말씀에 굴복을 하고 엎드려 회개를 하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는 성령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세례를 받고 전도인이 되고 신학교를 들어가 공부를 하여 평양 신학교 제 3회 졸업생이 되고 목사가 되어 장로회 제 9회 총회장이 되기도 했고 가는 곳마다 부흥회를 인도하여 28만명에게 전도를 하고 150개 교회를 세웠다고 합니다. 안악산골의 깡패 김익두가 어떻게 이러한 위대한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었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의 마음이 변회를 받아 하나님 말씀에 굴복하고 엎드려 회개하고 새사람으로 변화되었기 때문입니다.
스위스의 앙리 뒤낭이라는 유명한 은행가가 있었습니다. 그는 그당시 세계를 석권하던 유명한 장군, 나폴레옹 황제를 한 번 만나고 싶은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 하나의 꿈은 자기의 사업, 자기의 기업체을 더욱더 크게 키워보고 싶은 그런 욕망이었습니다. 그런데 나폴레옹을 만나기 전에 전쟁이 일어나서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 불란서 등 전지에 가게 되었습니다. 가보니까 얼마나 많은 불쌍한 환자들이 총탄에 맞아 피를 흘리고 숨져가는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이런 일을 목도한 이 사람은 다시 자기의 꿈을 바꿨습니다. 지금까지의 큰 기업체를 이루겠다는 꿈에서 눈앞에 나타난 비참한 불쌍한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도와야겠다 하는 꿈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성령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세상만 바라보던 사람, 물질 만 바라보던 사람이 사람의 생명을 바라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돌아와서 많은 사업가들에게 열심히 호소를 해서 부상병들,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돕는 일에 온 생애를 바쳤습니다. 이분이 곧 적십자사를 처음 주창한 분입니다. 그분은 노벨 평화상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그 한 사람의 꿈은 세상에서 잘 살기를 위해서, 더 풍요한 생활을 위해서 돈을 많이 벌아야겠다는 것이었지만 불쌍한 사람들을 눈으로 보고서는 그리스도 사랑으로 그들을 돕겠다고 하는 꿈으로 바뀌어졌을 때에 마침내는 당대 불쌍한 사람을 돕는 것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후에 전세계적으로 적십자가 없는 곳이 없이 다 들어가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뒤낭 한 사람에 의해 적십자사가 탄생한 것입니다
365일 설교[ 7월16일] |
사람은 변할수 있다
2006년에 개봉됐던 ‘식스틴 블럭(16 Blocks)’이란 영화가 있습니다. 이 영화는 한 형사가 죄수를 16 블록을 이송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런데 주인공 잭 모슬리 형사는 경찰의 부패에 연루된 채 어쩔 수 없이 임무를 수행하고 있고, 죄수 에디 벙커는 경찰 부패 사건의 희생양으로 감옥에 수감 중입니다.
이송 도중 두 사람이 논쟁을 합니다. 모슬리 형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날씨도 변하고 계절도 변하지만 사람은 절대 안 변해” 흑인 죄수 벙커는 이렇게 반박합니다. 소매치기였던 척 베리도 결국엔 좋은 사람이 됐어요 사람은 변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사람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던 모슬리 형사는 결국 자기가 변해 갑니다. 지난 날 잘못을 반성하며 경찰의 부패를 고발하며 자기도 감옥에 수감됩니다. 이 영화 후반부에 모슬리 형사가 출소하고 생일에 죄수였던 벙커가 케익을 보내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케익에 이런 글을 새겨져 있습니다. “사람은 변할 수 있다.”(People can change)
365일 설교[ 7월17일] |
철학자들 가운데 인간 변화를 철학의 주제로 다루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프랑스의 철학자 사르트르를 들 수 있습니다.
그는 인간이 변할 수 있는 존재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어떻게 변할 수 있는가를 설명하면서 자신의 독특한 철학적 개념을 사용합니다. 인간은 두 종류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즉자적’(卽自的) 존재로 살아가는 사람과 다른 하나는 ‘대자적’(對自的) 존재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즉자적 존재란 그냥 단지 존재하는 것을 말합니다. 한 마디로 생각 없이 주어진 환경에 등 떠밀려 살아가는 존재를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수동적으로 운명에 끌려서 살아가는 존재를 말합니다. 사르트르는 이런 즉자적 존재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결코 변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대자적 존재란 어떤 대상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존재를 말합니다. 특히 자신을 성찰할 수 있고 그래서 자신에 대해 반성할 수 있는 존재를 말합니다. 사르트르는 이런 대자적 존재로 살아가는 사람은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깊은 반성을 하게 되는데 그러면서 변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물론 이런 사르트르의 주장에는 일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깨닫고 반성한다고 사람이 변할 수 있을까요? 어느 정도 변화는 시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흔히 하는 ‘작심삼일’(作心三日)이라는 말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이 반성하고 새롭게 변해 보려고 작심도 하고 결단도 해 보지만 얼마 못가서 있던 자리로 되돌아가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단지 반성만으로는 변할 수 없습니다. 다만 변화의 필요를 알게 될 뿐입니다. 우리는 깨달음만으로도 변할 수 없습니다. 다만 변화의 방향을 알게 될 뿐입니다. 우리는 의지만으로도 변할 수 없습니다. 다만 변화를 시작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으로 변할 수 있을까요? 바로 예수와의 만남입니다. 성경 안에는 이렇게 예수와의 만남으로 변화된 사람들의 이야기가 넘쳐납니다.
여기까지 출처 : 고동엽 블러그에서 |
여기부터 출처 : RED COMPASS 선교회 |
365일 설교[ 7월18일]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 |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음을 향해 달려갑니다. 그런데 죽음을 이기고 살아나셨을 뿐 아니라 죽음을 철폐하신 분이 계신데, 그는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 세상 사람들이 죽음을 극복하고 살아나갈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첫째, 죄와 허물로 죽은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죄로 인해 그의 후손된 인간은 육체는 살았지만 영은 완전히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박히심으로 죽은 우리를 살려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님의 보혈을 통해 죄 사함을 얻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면 하나님의 생명을 얻게 되고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 우리의 아집을 죽이고 믿음과 순종으로 살리는 역사를 베푸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할지라도 오랫동안 자신의 혼과 아집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을 이용하려는 간교한 성품을 그대로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불 같은 시험과 연단을 통해 자아가 깨어지며 하나님께 전적으로 헌신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자아를 죽인 사람은 비로소 믿음의 입을 크게 열어 하늘 나라의 역사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 우리를 육체의 죽음에서 살리셨습니다. 주를 믿는 우리에게는 부활이 보증되어 있고 영원한 삶이 예비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고 십자가에 죽게 하신 후 사흘 만에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게 하심으로써 우리를 위한 부활의 첫 열매가 되게 하셨습니다(고전 15:20).
우리는 이 말세의 때에 성령으로 기름을 준비하여 주님 오실 날을 예비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깨어서 기름을 준비하고 있으면 주께서 오시는 날에 하나님의 은총으로 부활의 영광을 얻고 주와 함께 영원히 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죄 사함을 얻고 자아를 깨뜨림으로 믿음과 순종의 사람이 되어 주께서 오시는 날 부활의 영광에 다같이 참여하는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365일 설교[ 7월19일]고난을 당할 때 |
인류의 조상 아담이 지은 범죄로 말미암아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삼중고 즉, 영혼의 죽음과 육체의 죽음 그리고 생활의 저주에서 파생되는 고난의 무거운 형벌을 짊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고난을 축복의 계기로 만들기 위한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일까요?
첫째, 고난을 축복의 계기로 만들기 위해서는 고난의 때를 회개의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인간은 고난을 당하면 밖으로 향하던 관심을 자기에게 돌이키게 됩니다. 그래서 세상 일에 동분 서주하던 발길을 멈추고 자신을 돌아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 당할 때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경고하시는 때이고, 자신을 돌이켜 보아 주님 중심으로 살지 않고 내 마음대로 살고 있지 않은지 살펴보라고 지시하시는 때임을 알아야 합니다.
둘째, 우리는 고난에 대해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 이 고난을 능히 이길 수 있도록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보혜사’라는 말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우리를 돕기 위해 우리 곁에 와 계시는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보혜사 성령을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들이고 의지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고난의 어려움을 극복해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셋째, 고난을 당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위에 굳게 서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방주의 창을 천정 가까이 만들게 하셨습니다.
이는 인간이 환난을 당할 때, 요동하는 주위 환경이나 인간의 도움을 기대하지 말고, 오직 인간의 역사와 운명을 주관하시는 하나님만 바라보라는 깊은 뜻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난의 시기를 지날 때는 괴롭고 힘들지만 뒤돌아 보면 이 고난을 통해 크게 성장 발전한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을 당할 때 낙담하거나 불평하지 말고 고난을 회개의 기회로 삼고 그 고난을 기뻐하고 감사함으로써 고난을 축복으로 변화시키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365일 설교[ 7월 20일]그리스도와의 연합 |
오늘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할 때,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연합되어 있음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갈보리 십자가에서 못박히셨을 때 우리들도 함께 그 십자가에 못박혔으며, 예수님께서 죽으신 후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 장사되었을 때 우리도 함께 그 무덤에 장사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장사된 지 사흘 만에 부활하셨을 때 우리도 함께 부활한 것입니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 지금도 비록 우리의 육신은 이 땅 위에 있지만 우리의 영은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세례를 통해 확증됩니다. 우리가 받은 세례의 의의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죽고 다시 살아나는 내적 변화를 의미합니다. 세례를 받을 때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물 속에 잠기는것은 우리의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며, 다시 일으켜 세움을 받음은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서 성령님을 모시고 새 삶을 살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즉 세례는 우리의 옛 사람이 죽고 새 신분으로 태어나는 것을 뜻하는 의식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죄와 세상에 대해서는 죽은 바 되고 의와 하나님에 대해서는 살아난 바 되면, 예수님께서 요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 위로 올라오실 때 하늘 문이 열렸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하늘 문이 열리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시인하게 되는 것 자체가 성령께서 우리 마음속에 거하신다는 증거입니다. 이것은 곧 하늘 문이 이미 우리에게 열려 있음을 뜻합니다.
우리가 세례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경험했다면 이제는 우리의 입술을 통해 그리스도와의 연합됨을 선포하고 시인하면서 그리스도인다운 생활을 해야 합니다. 세상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여 더 이상 애착하지 말고 온전히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경험한 자답게 세상에 대해서는 죽고 하나님께 대해서는 산 자가 되어야겠습니다. 이렇게 될 때 우리 모두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가 잘되며 강건케 되는 놀라운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365일 설교[ 7월 21일]하나님의 긍휼을 입은 자 |
다윗은 일생을 하나님과 동행했고 보호 속에서 살았지만 동시에 인간이 빠질 수 있는 가장 비참한 상태에까지 도달하는 경험을 수 없이 한 사람입니다(삼하 11,13,15장). 그러나 이와 같은 경험은 그로 하여금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게 하였고 더욱 많은 하나님의 긍휼을 입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본문을 근거로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 자의 상태를 알아보기로 하겠습니다.
첫째, 구원을 얻습니다. 다윗은 사울, 압살롬, 그리고 세바로부터 심한 모욕을 당했을 때 하나님의 긍휼을 구했습니다(26절). 우리가 세상에서 환난과 핍박을 당할 때 하나님께 긍휼을 구하면, 하나님께서는 악인들을 벌하시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백성들을 고통 중에서 건져 주십니다.
성경은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 50:15)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 있게 하나님의 긍휼을 구해야 합니다.
둘째, 복을 얻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구하는 것보다 더 넘치게 주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을 구할 때 하나님께서는 구원은 물론 우리의 고난 이상의 복으로 갚아 주십니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우리는 모든 일에 풍성하신 하나님, 자신의 백성들에게 복주시는 데 인색하지 않으신 하나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바로 이러한 하나님이시기에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모든 고난을 기쁨으로 견뎌냈으며 우리도 그 뒤를 따르고 있는 것입니다.
셋째, 감사와 찬송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최종적으로 주시고자 하는 것은 물질의 풍요가 아닙니다. 악인의 멸망을 바라보는 승리감도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만나고 그와 교제함으로써 얻는 영적 희락입니다. 이 희락을 얻게 될 때 우리는 참된 기쁨으로 충만해지며 우리의 입에서는 감사가 넘쳐나고 하나님의 영광을 노래하는 찬양이 끊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 자는 누구든지 구원을 받고, 복을 받고, 영적인 희락을 누림으로 영혼이 잘 됨같이 범사에 잘 되며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365일 설교[ 7월 22일]세 종류의 사람 |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실로 다양합니다. 그 살아가는 방식에 따라 성경은 크게 세 종류의 사람으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첫째, 육체로 사는 사람입니다. 육체로 사는 사람은 하나님을 인정치 않고 육체의 일을 따라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육체의 일은 도덕적인 면으로는 음행, 더러움, 호색이며 종교적인 면에서는 우상 숭배, 술수, 이단이고 대인 관계로는 원수 맺음, 분쟁, 시기, 분냄, 당짓는 것, 분리, 투기이며 개인 생활에서는 술취함, 방탕함, 유혹, 욕심, 그리고 탐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을 향해 진노하심으로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맙니다. 이런 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결과적으로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지우는 둘째 사망에 처하게 됩니다(계 21:8).
둘째, 혼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혼으로 사는 사람은 인본주의적으로 사는 사람이며 인간의 이성과 경험, 그리고 과학을 의지하여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그 때문에 하나님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외면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인 중에서도 혼으로 사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인간의 지혜와 지식으로 성경을 이해하고 판단하려 하며 성령의 역사를 부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혼으로 사는 사람들을 어리석은 자, 오만한 자라고 책망하십니다.
셋째, 영으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으로 사는 사람을 사랑하시고 지켜 주십니다. 영으로 사는 사람은 중생한 사람이며, 말씀과 성령으로 사는 사람이고,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또한 영으로 사는 사람은 몸의 행실을 죽이고 혼을 영에 굴복시키며 사는 사람입니다. 이와 같이, 영으로 사는 사람을 성경은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14절)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육체의 소욕을 십자가에 못박고 말씀으로 혼을 다스리며 믿음으로 사는 영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게 되고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365일 설교[ 7월 23일]궁극적인 신념 |
인생 항로를 생각해 볼 때 우리가 어려움을 겪는 시간보다 평탄한 삶을 사는 시간이 훨씬 많은 것은 모두 공감하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고통의 밤을 지날 때 ‘이로써 나의 인생은 끝장이다,’하며 절망에 빠져 몸부림칠 때가 많습니다.
본문은 우리가 고통의 밤을 지날 때 이를 극복할 궁극적인 신념이 필요함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러한 신념을 가질 수 있을까요?
첫째, 우리 자신이 하나님을 사랑할 때 궁극적인 신념을 갖게 됩니다. 요한일서 4장 19절에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였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즉, 불의한 죄로 버림받아야 마땅한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몸 찢고 피 흘려 돌아가신 예수님을 만날 때, 우리는 그분을 이 땅에 보내 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감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에 감동된 자만이 진정 하나님을 믿을 수 있으며,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통하여 우리는 궁극적인 신념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믿을 때 궁극적인 신념을 갖게 됩니다.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나올 때 우리는 우리의 의지로 나온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성경은 하나님께서 부르시지 않으면 한 사람도 하나님 앞에 올 자가 없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주님의 뜻대로 부름을 받았다는 사실을 확신할 때, 우리는 흔들리지 않는 궁극적인 신념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 믿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믿을 때 궁극적인 신념을 갖게 됩니다. ‘모든 것’이란 좋은 것뿐만 아니라 나쁜 것도 포함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반드시 좋은 일만 다가오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어도 사업에 실패할 수 있고 몸이 병들어 고난에 처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의 종국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좋은 일로 변하게 해 주십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신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었다는 것을 확신하며,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믿음을 가질 때, 우리는 모든 고난을 극복할 수 있는 궁극적인 신념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365일 설교[ 7월 24일]하나님을 섬기는 자의 복 |
본문은 야웨를 경외하는 자는 복이 있다(1절)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떤 복이 있는지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첫째, 후손이 잘 되는 복입니다(2절). 우리가 하나님을 잘 섬기고도 후손이 잘못 되는 일은 없습니다. 시편 기자는 말하기를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저는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고 꾸어주니 그 자손이 복을 받는도다”(시 37:25.26)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지킴으로 자신은 물론 후손까지 땅에서 강성하고 복을 받는 역사가 나타나도록 해야겠습니다.
둘째, 만족하게 사는 복입니다(3절). 만족한다는 것은 살아가는 데 불만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큰 복입니까? 사람이 모든 면에서 만족하다고 생각하고 사는 생활은 무척 행복한 삶인 것입니다. 그 이유는 행복은 만족에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딤전 6:7,8)라고 하였습니다.
셋째, 구제하는 복입니다(5,6절). 모세는 말하기를 “야웨께서 너를 위하여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를 열으사 네 땅에 때를 따라 비를 내리시고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리니 네가 많은 민족에게 꾸어 줄지라도 너는 꾸지 아니할 것이요 야웨께서 너로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시리니”(신 28:12,13)라고 하였습니다.
구제하는 것은 주는 것입니다. 내 것을 남에게 조건 없이 주는 것입니다. 주면 더욱 부하게 되는 복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더 많은 사람을 구제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열심으로 구제할 때 그것은 복의 씨앗이 되어 반드시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하나님을 잘 섬김으로 후손도 잘 되고, 만족한 생활을 하며, 남에게 구제하면서 사는 복된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365일 설교[ 7월 25일]우리는 질그릇 |
성경은 하나님은 토기장이로, 인간은 질그릇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사용하시고자 하는 목적에 따라 여러 종류의 그릇을 빚으십니다.
이처럼 목적에 따라 각기 다른 그릇들이 빚어지듯이 모든 사람에겐 각기 다른 은사와 특기가 주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어떤 은사와 특기를 받았는지 잘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가진 소질과 특기를 파악하여 그것을 잘 계발해야 많은 신앙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약 1:17)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것이든지 하나님께서 주신 것임을 깨닫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데 사용해야 합니다. 부모가 자녀를 양육할 때도 그 아이의 소질과 특기를 잘 살려 주어야 하고 사회도 개인의 소질과 특기를 살려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사와 직분에 불평하기보다는 오히려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은사와 재능은 성령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주어진 것이고 우리가 받은 직분 역시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 의지에 의해서 받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 내가 이런 그릇으로 만들어졌느냐고 하나님께 항변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특성을 분명히 깨닫고 하나님께서 주신 위치에서 충성을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좋아 보이는 그릇이건, 평범한 그릇이건 자기의 직분에 충성을 다하는 그릇만이 하나님께 소중히 쓰임받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곳에서 일하는 사람이건, 사람들의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하는 사람이건 자기 직분에 충실한 사람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우리의 한계를 분명히 깨닫고 교만하거나 불평하지 말고 오히려 감사해야 합니다.
이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 나라의 소중한 그릇으로 요긴하게 사용하여 주실것이며 우리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게 될 것입니다.
365일 설교[ 7월 26일]긍정적인 말의 능력 |
말의 위력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부정적인 말을 쓰면 우리의 생애를 파괴시키는 일이 생겨나지만 긍정적인 말을 쓸 때는 위대한 축복이 다가옵니다. 본문을 근거로 긍정적인 말을 할 때 오는 축복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첫째, 긍정적인 말은 축복으로 나아가는 지름길입니다. 성경은 우리 입에서 나오는 말이 우리 몸을 굴레 씌운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약 3:2).
그러므로 우리가 “안 된다, 끝장났다.”라는 부정적인 말을 하면 그 말이 굴레가 되어 정말 안 되고 끝장나게 됩니다. 반면에 우리가 창조적인 말, 승리의 말, 건강의 말, 생명의 말을 입으로 시인하면 그 말이 축복의 길로 여러분을 인도할 것입니다.
둘째, 긍정적인 말은 하나님의 역사를 일으킵니다. 우리가 입술로 고백하면 주님께서 그것을 받아서 하나님께 기도드려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다 가지고 성령으로 우리 가운데 와 계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 고하실 수 있도록 우리는 입술로 고백하여 그 재료를 내놓아야 합니다. 우리가 긍정적인 말을 예수님의 손에 얹어드리면 바로 예수님의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역사를 일으키시는 것입니다.
셋째, 긍정적인 말은 성령의 검이 됩니다. 마귀가 우리에게 다가올 때 우리가 말씀 위에 서서 말씀을 입으로 시인하면 그 말씀이 나가서 검이 되어 마귀를 찌르게 됩니다. 또한 우리가 입술로 긍정적인 하나님의 말씀을 외칠 때, 원수를 물리치고 생활 가운데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를 일으키게 됩니다. 그 때문에 마귀는 어찌하든지 우리의 입술에서 부정적인 말을 끌어내려고 애를 씁니다. 여러분이 마귀의 속삭임에 넘어가 “안 된다, 절망이다.”라고 말하면 그 말이 올무가 되어 신앙을 잃게 되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일을 하실 수가 없게 됩니다. 또한 마귀는 우리의 부정적인 말을 통해 우리를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긍정적인 말을 할 때에 축복이 다가오고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며 그 말씀이 성령의 검이 되어 마귀의 진을 훼파하게 되는 것입니다.
365일 설교[ 7월 27일]영광을 받을 자 누구인가? |
만일 어떤 사람이 전혀 영광을 받기에 합당한 일을 행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찬사를 돌린다면 그 결과가 어떨까요? 그것은 도리어 욕을 끼치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 안에는 그런 일이 비일비재 합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에게 영광을 돌려야 할까요?
첫째, 사람에게 돌리면 안 됩니다. 인간이 아무리 위대한 일을 했다 하더라도 영광을 받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타락한 본성은 스스로 선한 일을 행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롬 3:12). 인간은 하나님의 은총을 받지 않고는 아무런 선한 일도 할 수 없습니다(요 15:5). 그래서 본문은 “야웨여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1절)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절대 사람에게 영광을 돌리는 일을 행하여서는 안 되겠습니다.
둘째, 우상에게 돌리면 안 됩니다. 우상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코가 있어도 냄새를 맛지 못하며, 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하고,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는, 생명이 없는 허망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바알의 제사장들은 그들의 신에게 하루 종일 외쳐댔지만 아무런 응답도 없었습니다(왕상 18:26-29). 성경은 우상을 숭배하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며 욕을 받을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사 45:16). 그러므로 절대로 우상에게 영광을 돌리는 일이 있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셋째, 오직 하나님께만 돌려야 합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이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만이 홀로 선하신 분이시며(마 19:17), 또한 우리 안에서 선을 행하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착한 행실로 인한 영광은 당연히 사람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께 돌려야 합니다(벧전 2:12). 사도 바울은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께 세세 무궁토록 영광을 돌릴지어다.”(빌 4:20) 라고 말하였습니다. 우리 삶의 모든 복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으므로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영광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고 하나님께로만 돌려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절대로 사람이나 우상에게 영광을 돌리는 일이 없어야 하고, 그 영광을 온전히 하나님께만 돌려야 합니다
365일 설교[ 7월 28일]아사 왕의 처음 신앙과 나중 신앙 |
아사 왕은 하나님을 열심히 섬겨 20년 동안은 태평 성대를 누렸으나, 말년에는 신앙을 잃어버리고 비참한 죽음을 맞았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우리는 귀한 영적 교훈을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 그는 20년 동안 하나님의 복을 받아 나라가 부강해지자 신앙이 나태해져서 그만 하나님을 찾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고난을 당할 때는 하나님께 엎드려 간구하지만, 기도 응답을 받고 평안해지면 하나님께 감사할 줄 모르고 하나님을 찾지도 않습니다. 그러므로하나님께서는 한편으로는 우리에게 은총과 복을 주시지만, 또 한편으로는 고난과 괴로움을 허락하심으로써, 우리의 자아를 깨뜨리시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찾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둘째, 그는 문제에 부딪쳤을 때 인간적인 방법을 썼습니다. 이스라엘이 유다에 쳐들어왔을 때 아사 왕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명철을 의지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는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여러가지 어려운 문제가 다가와 우리를 넘어뜨리려 할지라도 우리는 아사 왕처럼 인간의 방법을 쓰지 말고 하나님의 방법으로 그 문제를 해결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셋째,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아사 왕은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음으로 중병에 걸리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의 길을 갈 때 잘못된 길로 걸어가게 되면 성령님은 반드시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자신의 뜻을 드러내십니다. 그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넷째, 그는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아사 왕은 의원들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치료의 손길을 입지 못하고 결국 죽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마음의 병이나 육체의 병이 들었을 때, 먼저 하나님을 의지하여 그의 치료의 역사를 간구해야 할 것입니다.
아사 왕의 신앙은 처음과 나중이 달랐기에결국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던 것을 교훈삼아, 우리는 시종 일관된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 중심에 굳게 섬으로 말미암아 항상 승리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365일 설교[ 7월 29일]고난을 대처하는 방법 |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고난’은 곧 ‘하나님의 축복의 전주곡’임을 알아야 합니다. 본문에 나타난 여호사밧의 고난에 대한 태도는 우리에게 귀중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첫째, 여호사밧은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전국에 금식령을 선포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들이 극한 고난에 처할 때 할 수 있는 가장 현명한 방법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금식하며 부르짖는 것입니다. 여호사밧은 혼자 기도하지 아니하고 전국민과 함께 기도했습니다. 기도는 인생 문제에 하나님께서 관여하실 수 있는 수단이 됩니다. 우리도 인생의 위기를 맞을 때 인간적인 방법을 취하지 말고 철저하게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둘째, 그는 긍정적인 마음으로 기도했습니다. 비판하고 좌절하는 마음으로 하는 기도는 효과가 없습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전지 전능하신 하나님을 생각하고 긍정적인 마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여호사밧은 온 땅을 다스리시는 절대 주권자이신 하나님께 신앙을 고백함으로 마음속에서 불안과 절망을 쫓아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긍정적인 마음으로 기도할 때 응답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의지했습니다. 환경이 칠흑처럼 어둡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하되 응답이 올 때까지 인내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여호사밧이 기도할 때 그 응답이 레위 사람 야하시엘을 통해 나왔습니다. 야하시엘을 통해 응답하신 하나님께서는 오늘날도 성령님을 통해 우리에게 응답해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응답을 받은 여호사밧은 성가대를 조직하여 하나님께 감사 찬양을 드렸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 적군은 피차 살륙하여 전쟁의 승리는 유다에게로 돌아갔습니다. 감사와 찬양은 하나님의 능력을 풀어 놓는 위대한 동기가 됩니다.
오늘날 우리도 어떠한 고난을 당하든지 여호사밧의 방법으로 그 고난을 대처함으로써 위대한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365일 설교[ 7월 30일]하나님의 권세 |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권세 위에 세워진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권세에 도전하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대항이요, 도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의 권세에 복종하는 신앙 생활을 하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에덴 동산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두시고 아담에게 먹지 말라는 명령을 주셨습니다. 선악과는 하나님의 주권을 상징합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만이 선악을 판단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마귀의 유혹에 빠져 이 실과를 따 먹는 중대한 범죄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사단도 하나님의 권세에 도전하여 하나님과 동등하게 되려고 하다가 심판을 받았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권세에 대한 도전을 용납치 않으십니다.
그런데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제 2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이것은 바로 2천 년 전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사 그를 믿는 모든 자를 구원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아담과 하와가 그랬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음으로써 하나님을 반역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권세인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사람은 영벌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메시아요, 구주로 보내셨습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그 권세에 복종해야 합니다.
그러면, 오늘날 하나님의 권세는 어디에 있을까요? 하나님의 권세는 바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의 권세에 따라서 조직되어 있습니다. 교회의 조직은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이며, 교회의 직분에 따른 권세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이 권세에 대한 도전은 하나님께 대한 도전으로써, 심판을 자취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고, 열심히 교회를 받들고,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전파되는 일에 전적으로 협조하고 밀고 나감으로써,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고 다시 오실 예수님을 맞이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곧 오늘날 하나님의 권세에 복종하는 성도들의 올바른 자세입니다
365일 설교[ 7월 31일]그리스도로 말미암는 행복 |
사람은 누구나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그렇지만 부귀 영화를 누리면서도 행복하지 못하고 불행하게 사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러면 어떤 것을 가리켜 우리가 확신 있게 “이것이 행복이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과연 그것은 무엇일까요?
첫째, 행복은 우리에게 의로움이 있을 때 얻을 수 있습니다. 의가 없는 곳에는 행복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경우가 그랬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보호 아래서 형용할 수 없는 행복을 누렸지만 마귀가 넣어 준 탐심으로 말미암아 죄를 범하자, 그 즉시 의로움을 잃고 벌거벗은 수치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의가 사라진 곳에는 결코 행복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오직 우리가 예수님 앞에 나와 그의 피로 우리의 죄를 씻음받고 의롭다 함을 얻을 때만이 비로소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둘째, 행복은 마음의 평강을 통해 얻어집니다. 황금을 태산처럼 모아 놓은 사람이라도 마음속에 평강이 없으면 행복할 수 없습니다. 요한일서 2장 2절에는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우리의 화목을 위해 화목 제물이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화목 제물이 되신 예수님을 의지할 때 평강을 누리게 됩니다.
셋째, 우리가 마음속에 참된 기쁨을 가질 때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세상에서 얻는 기쁨은 풀이 마르고 꽃이 지는 것처럼 쉽게 사라지고 맙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생 최고의 쾌락을 누린 솔로몬 왕도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 1:2)라고 탄식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쾌락과는 달리 기쁨을 주면서도 허무를 안겨 주지 않는 기쁨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믿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부어 주시는 기쁨입니다. 예수님의 영인 성령은 곧 기쁨의 영인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충만함으로 참된 기쁨과 참된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성삼위 일체 되신 하나님과 동행함으로써 마음에 항상 의로움과 평안과 참된 기쁨이 넘쳐나는 신앙인이 되어야겠습니다
출처 : RED COMPASS 선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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