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경고 예화모음 18편

by 【고동엽】 2022. 12. 3.
[처음 목차 돌아가기]
 
 

경 고

미국의 펜실베니아 주 조그만 읍에 큰 강이 하나 있다. 이 강을 가로질러 수 억통의 물을 담은 댐이 하나 건설되었다. 얼마후에 장마가 내려 물이 의외로 불어났다. 토목 기사들이 모여 들어 이 댐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를 놓고 갈팡질팡하는 가운데 갑자기 둑이 갈라진 틈을 발견하였다. 이에 즉시 이들은 "언덕으로 올라들가시오. 둑이 금가고 있습니다. 물난리는 무섭습니다."하고 경고하였다. 그러나 그 댐은 몇년이고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으며 물난리도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꼼짝을 하지 않았다. "그 친구들 알기는 뭘 안다고, 떠들어 대긴?" 하는 말로 비꼬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면서 이들은 안전지대로 도피하는 사람들과 합류하지 않았다.
얼마 후에 갑자기 굉음을 발하며 댐이 무너지는 바람에 수억톤의 물이 골짜기로 밀려 터져 3백여명이 떼 죽음을 면치 못했다. 막상 재난이 닥치고 보니 도피할 길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경고를 받아들여 당장 떠난 사람들은 충분히 피난처를 찾을 수 있었다.

우리들은 앞으로 올 위험에서 피하라는 하나님의 경고 음성을 들어야 한다. 꼭 내게 이로울 것인가를 계산하고 이기적인 행동을 취할 때 우리는 실수를 범하게 된다. 내 관점과 내 방식대로 아집을 취할 때 우리는 실수를 범하게 된다. 내 관점과 내 방식대로 아집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 겸손히 받아들일 줄 아는 믿음의 자세가 되어야 한다. 의심하고 꾸물거리는 데 위험 과 죽음이 있을 뿐이다. 

 

 
 

귀가 가리워서 듣지 못함

오래 전에 미국에서 있었던 일인데 어떤 사람이 매우 추운 어느 아침에 자동차를 몰고 가다가 그만 철길에 차가 처박혀 주인은 차를 꺼내려고 전힘을 기울였으나 쉽지는 않았다.
때마침 뒤쪽에서 열차가 기적을 울리고 쏜살같이 달려왔다.
그러나 차주는 귀가 먹어 평소에 보청기를 끼고 있는데 그날 따라 보청기를 끼지 아니하여 듣지 못함으로 결국 달려오는 열차에 치어 자동차와 사람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이와같이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오신다는 경고와 간청 을 귀가 가리워져서 듣지 못한다면 종래는 비극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극약 같은 죄

어느 교회 목사가 주일 아침 설교에서 죄에 대하여 아주 강하게 말했더니 이튿날 어느 여자 교인 한 분이 목사댁엘 찾아와서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목사님, 어제 설교에서는 죄에 대하여 너무 솔직하게 말씀하셨어요.
우리 애들이 그 말씀을 듣고 그러 지 않아도 교회에 잘 나오지 않으려 하는데 앞으로는 너무 그렇 게 솔직하게 죄에 대해서는 말씀 안하시면 좋겠어요.` 이 충고
를 듣고 있던 목사가 일어나더니 약장에 가서 `극약`이라고 쓴 약병을 가지고 와서 그 교인에게 하는 말이 `자매님께서 저에게 말씀하시는 뜻을 잘 알겠읍니다. 자매님의 말씀은 이 약병에서
`극약`이라고 쓴 딱지를 바꾸라는 말씀이지요. 제가 이 독약이 든 병에서 `극약`이라고 쓴 딱지를 떼버리고 `꿀`이라고 써 붙 이면 좋을까요? 그러면 위험하지 않겠지요? 자매님, 사람이 듣 기 좋은 말로만 하면 더욱 영혼을 죽이게 됩니다` 했답니다
. 옛날이나 오늘이나 사람들은 죄라는 말을 듣기 싫어합니다. 기왕 이면 듣기 좋은 말을 썼으면 하는 사람이 많고 아예 어떤이는 교회에서는 죄라는 말을 빼고 윤리적인 말이나 철학적인 지식이
나 때로는 정치적인 발언이나 했으면 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이 것은 극약이 든 병에서 극약이라는 딱지를 떼 버리라는 말과는 꼭 같은 것입니다. 이 얼마나 위험한 일입니까? 성경은 죄의 비극적인 결과에 대해서 두려움없이 솔직하게 말하고 있읍니다. 

 

 

 
 

나 때문이야

가정에서 풍랑이 일어나려고 할때마다 한 성도는 `다 나 때문입 니다. 다 나의 부족 때문입니다. 다 나의 부덕 때문입니다`라고 하
면서 자신의 가슴을 늘 때렸읍니다. 교회에서 풍랑이 일어날려고 할 때에도 ` 다 나때문입니다`라고 하면서 자신의 가슴을 때렸읍니다.

어느날 어떤 젊은 성도가 그에게 이런 질문을 했읍니다.`성도님!
제사장적인 성도가 좋기는 하지만 때로는 예언자적인 성도가 좋을
때도 있읍니다.` 다 나 떠문입니다도 좋지만 다 너 때문입니다도 좋
을 때가 있다는 말이었읍니다. 젊은 성도의 이러한 의견에 그도 동
의했읍니다.

그러나 그의 의견은 다음과 같았읍니다.`저는 풍랑이 있을때마다
나 자신의 가슴을 때립니다. 5년,10년,15년,20년 동안 계속해서 때 렸읍니다. 그러자 마침내 `다 나 때문입니다`의 메아리가 상대편 형 제,자매의 가슴을 울리게 되었읍니다. 단단한 가슴의 벽이 무너지고 굳게 닫혔던 가슴의 문이 열리기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바로 거기에
너와 나의 화해가 있고 일치와 공존이 있읍니다. 마음의 천국이 있 는것입니다` 

 

 
 

도망치는 배

바다에서 적의 배가 전속력으로 도망치고 있는 것은 발견했을 때 처음 에는 도망치는 배를 멈추게 하기 위하여 화약으로 장전한 총들만을 사용
하여 쏜다. 그래도 그 배가 멈추려 하지 않을 경우 포탄을 대포에 장전하 여 그 배를 향해 발사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그 배를 파괴시키려고 하 는 것이 아니라, 그 배로 하여금 돛을 내리고 항복하게끔 위협하려는 것이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의 배가 도주를 멈추려 하지 않을 때에, 아군의 선 장은 도망치는 배의 정면을 향해 직접 총과 대포를 쏘라고 명령을 내린
다. 그러면그 배는 수많은 포탄을 맞아 선체와 배의 장비들에 커다란 상처 를 입고서야 도주를 멈추게 될 것이다. 

 

 

 
 

불복종에 대한 결과

뉴욕의 어느 항소 법정에서 원고가 손해 배상을 청구한 것이 기각되었
다.

이일은 4번가를 걷던 한 사람이 지하철에서 일어나는 어떤 일을 보기
위하여 잠시 다리 위에 멈추어 섰던 것으로 시작된다. 그러자 작업공이
다치기 쉬우므로 그곳에서 비키라고 충고하였다. 그는 공공거리에 서 있을
권리가 있다며 그의 경고를 거부하였다. 몇 분 후 그는 위에서 떨어진 철
파이프 조각에 머리를 다쳤다. 그는 심하게 다쳤으며 손해 배상을 청구하
였다.

법정은 그가 경고를 받은 후 그곳에 머무를 권리가 있다고 선고했다.
그러므로 당연히 그가 돌에 맞을 권리는 있는 것이다. 또한 회사측에서 경 고를 함으로써 그 의무를 완저히 수행한 것이므로 원고의 손해 배상청구를 기각한것이었다. 

 

 
 

솔제니친의 경고

소련의 반체제 문인 솔제니친은 20세기의 예언자로 알려져 있다. 그가 그렇게 갈 망하던 자유를 찾아 서구의 자유세계로 망명와서 발견한 것은 소련보다 깊은 절망이 었다.
특히 서구의 청소년들이 육체의 환락과 자유, 물질과 돈의 가치관으로 키워진 생
활양식을 보고 개탄하면서 `만일 오늘날의 사방 자유 세계가 내 조국 소련의 모델이
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솔직히 말해서 그 대답은 부정적이다. 이대로의 서구 사회
는 급격히 몰락할 것이다.`
우리는 이 솔제니친이 개탄한 서구 쓰레기를 자유라는 컨테이너에 넣어 무비판으 로 들여오고 있다. 나는 크리스챤 청소년만이라도 일정 기간 중세 수도원적 수련을 시켰으면 좋겠다. 
 
 

신호등을 따라서(조심)

기관사의 나태가 자신의 운명을 결정짓고 30여명의 사상자를 낸 열차 충돌 사고가 뉴욕 교외에서 발생하였다. 역 구내에 서 있는 다른 화물
차를 들이받는 순간에 기관사는 온 몸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져 생명을 잃고 말았다. 사고 조사 결과 이 지역의 신호등은 모두 제대로 작동하
고 있었다. 또 사고지점에 이르기 3/4마일 정도의 거리에서부터 속도
를 줄이라고 경고하는 신호등들도 약 반 마일 전부터 작동하고 있었다 는 사실도 수사관들은 밝혀 냈다. 하나님은 크리스챤으로 살아 가는데
있어서 우리에게 자주 신호등을 보여 주고 계신다. 개인적으로 혹 단체 적으로 위협당하는 위험을 앞에 두고 정신을 차리라고 만약에 이러한
신호등을 무시해버린다면 불행이 닥쳐 올 수 있다.

 

하나님이 제시하는 방향으로 조정키를 곧 바로 잡고 있도록 하라. 주님의 `신호등`을 따라
정진하라. 그러면 여러분 자신 뿐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닥칠 위험 에서 보호도리 것이다. 여러분의 무지나 나태가 많은 사람들의 비극을 초래하도록 해서는 안된다. 

 

 

7일동안 바다 위에서 난파된 뱃조각을 붙잡고 사투하던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의 목숨을 유지해준 것은 두 평 남짓한 뱃조각
이었다. 이사람은 낮에는 태양열에 괴로워했고 밤엔 추위와 죽
음의 공포로 절망했다. 갈증과 허기, 불안과 절망가운데있던 이 사람은 7일만에 구조팀에 의해 기적적으로 구조되어 다시 꿈에
그리던 가족의품에 안겼다. 건강을 회복한 후 사람들이 소감을
물었을 때 이 사람들이 소감을 물었을 때 이사람은 이렇게 대답 했다. [먹고 싶은 것 먹고 가정에서 편히 쉬고 사람들과 대화할
수 있다면 다른 일체의 것에 대해서는 불평하지 않겠습니다].감사와 자족을 잃어가는 현대인은 이따금 [실종된 자신]을 생각 해보고 주위 환경에 고마워해야 할 것이다.

 

 
 

열심히 하는 사람이

어느 교회에서 제일 잘 달리고 골프 잘 치고 사업 열심히 하는 사람이 건강진단을 받
았는데, 의사가 `과로하지 말고 사업도 좀 쉬고 건강에 유의하시오`라고 말했다. 간염
증세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사람은 의사의 진단을 무시하고 5년간을 바쁘게 지냈
다.
그리고 다시 진단을 받으러 갔더니 의사가 말하기를 `이젠 먹고 싶은 것 다먹고 운동
하고 싶은 것 마음대로 하시오`라고 하였다. 그는 기분이 좋아서 그대로 시행했다. 그
러나 그는 그로부터 26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 간염이 간암으로 악화되었던 것이다. 이
와 같이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면 안된다. 

 

 
 

역경 체험으로

헬렌켈러 가정교사 자기가 소경이었다 9번 수술로 시력회복 그래서 소경이요
벙어리요 귀머거리인 헬렌을 불쌍히 여겨 포기하지 않고 교육을 시켰습니다
그리하여 마음의 눈을 떠게 해 주었다. (고후1:3- )

 

 
 

크리스챤에게 주는 경고

슬픈 민족, 가도 가도 고달프다. 지금은 상가집 처럼 무겁고 슬프다.누가 심은 증오의 씨일까. 누가 저지른 분노의 불길일까? 크리스챤이 심은 것은 무엇일까?
찬송가 하나 통일 못하고 교권 싸움에 경찰이 출동해야하는 한국교회 현실을 먼저 참회 해야겠다. 싸우다 망했던 우리 민족사를 참회하면서 먼저 갈라진 교회는 다시 합하고 전
교회는 사랑과 화해와 일치의 연합체가 구성 됐으면 좋겠다.
광주사건도 크리스챤에게 거듭되는 제2, 제3의 경고다. 더 큰 매를 맞기 전에 문이 영영 닫히기 전에 주여! 회개하게 하소서. 

 

 

 
 

최후의 날의 경고

예루살렘 최후의 날, 러시아 최후의 날을 아실 것입니다.지금 기독교 사상 전례
없는 전도의 기회가 한국에 주어졌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 문은 영원
히 열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앞으로 4,5년이 지나가면 그 문이 닫힐 지도 모릅니다.
만일에 우리가 그 책임을 다하지 못한다면 하나님은 러시아 최후의 날 같은 심판을
한국에도 하실 것입니다. 러시아 최후의 날이 어떠한지 아십니까? 그 당시 러시아에
는 그릇 하나에도 십자가 표시가 없는 것이 없었습니다.



톨스토이나 도스토예프스키
의 작품을 보면 문학이나 언어나 의식이나 러시아의 토기나 건물이나 문학이나 교육
가운데 기독교인의 것이 아닌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무엇을 했습니까? 코카사
스의 기병대가 모스크바를 향해서 쳐들어 오고 있을 때에 사제들은 모여서 싸움을
했습니다. 축도를 할 때 손가락을 어떻게 펼 것이며, 성직자의 가운의 색깔은 어떻
게 할 것인가를 가지고 싸움을 했습니다. 그때 쳐들어 왔습니다.


어느 대장이 인솔을 하여 후퇴를 하게 되었습니다.금은 보화를 마차에다 싣고 처
녀들과 사제들과 부녀들과 귀족들과 부자들과 예술가 등 125만 명이 후퇴를 했습니
다. 날씨는 영하 35도에서 40도를 오르내리는 강추위였습니다. 먹을 것이 없고 춥
고 병들어 거의 다 죽었습니다. 어느 부인이 만삭이 되어 아기를 낳게 되었습니다.
한참 있다가 소리가 없어 보니까 아기가 반쯤 나오다가 산모도 죽고 아기도 죽었습
니다. 어느 사제 한 사람이 `오 하나님이여,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나의 생명을 거
두어 가소서.`라고 하면서 죽어갔다고 합니다. 이 비참한 러시아 최후의 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경고를 했습니까? 우리 한국에게 주는 마지막 경고입니다. 우리는 6.
25를 잘 알고 있습니다. 묶여 끌려가다가 죽고 애절 단장(애절단장)의 눈물을 흘렸
습니다.이와 같은 사실을 우리는 상기해야 합니다. 잊어서는 안 됩니다. 분명히 우
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우리와 함께 하사 우리의 머리가 되시고 그 제사장들도 우리와 함께 하여
경고의 나팔을 불어 너희를 공격하느니라 이스라엘 자손들아 너희 열조의 하나님 여
호와와 싸우지 말라 너희가 형통치 못하리라(대하 13:12)
이스라엘에 관한 여호와의 말씀의 경고라 여호와 곧 하늘을 펴시며 땅의 터를 세
우시며 사람 안에 심령을 지으신 자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예루살렘으로 그 사면
국민에게 혼취케 하는 잔이 되게 할 것이라 예루살렘이 에워싸일 때에 유다에
미치리라 그 날에 여호와가 예루살렘 거민을 보호하리니 그 중에 악한 자가 그 날에
는 다윗 같겠고 다윗의 족속은 하나님 같고 무리 앞에 있는 여호와의 사자 같을 것
이라 예루살렘을 치러 오는 열국을 그 날에 내가 멸하기를 힘쓰리라(슥 12:1,2,8,9) 

 

 

 
 

현대장-고려장

고구려시대에는 `고려장`이 있었고 현대에는 `현대장`이 있다.-
법정소년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간혹 다투었다.
처음에는 소년이 들을세라, 할머니가 들을세라 소리가 문밖으로새어나가지 않게 조
심조심하며 투닥거렸다.
그러나 차츰 날이 감에 따라 부부싸움 소리가 점점 커졌다.
소년도 듣게 되고, 할머니도 듣게 되었다.
나중에는 담을 넘어가게 되었다.
`당신 어머닌 비위생적이어서 함께 못살겠어요.`
`오늘 신경정신과에 다녀왔어요.
내 병명이 무엇인지 아세요?`
`......`
`당신 어머니가 남한테 망신사는 일만 저지르니 내가 노이로제에걸릴 수밖에요.`
날이 가면서 소년의 어머니는 할머니를 보면 고개를 돌렸다.
얼마 가지 않아서 소년의 아버지도 할머니방 앞을 무심히 지나쳤다.
어느 날 또 죽는다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소년의 어머니는 시퍼렇게 되어서 외쳤다.
`나를 택하든지, 당신네 어머니를 택하든지, 둘 중 하나를 말해요!`마침내 소년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합의를 하였다.
할머니가 묵을 방을 하나 얻어서 내보내기로 한 것이다.
낙엽이 우수수 지는 날, 온 식구가 달려들어서 할머니의 이사짐을꾸렸다.
아버지는 담배를 피워 물고 상자를 묶었고, 어머니는 고무장갑을끼고 거들었다.
소년은 종이와 연필을 꺼내 와서 적었다.
헌옷장 1
전기장판 1
담요 1
밥통 1
어머니가 물었다.
`너, 왜 그런 것을 쓰니?`
소년이 대답하였다.
`다음에 어머니를 내보낼 때 내가 챙겨드릴 품목이에요.`

[어린이는 어른의 거울입니다.
당신은 부모님을 슬프게 하지는 않으시는지요.] 

 
 
 

빨간 신호등

자동차 운전에 자신이 붙고나서 한동안은 빨간 신호등이 싫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단지 나의 갈 길을 가로막는 거부신호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언제나 예기치 못한 장소에서 불쑥불쑥 나타나 거역할 수 없는 권위로 나의 의지를 꺾어 놓는 방해꾼인 빨간 신호등을 무척이나 싫어했었다.

따라서 신호대기에 걸려있는 시간은 무료하고 초조할 수밖에 없었으며, 가능하면 빨간 신호등이 켜지기 전에 빨리 건널목을 통과하거나, 미쳐 푸른 신호등으로 바뀌어지기도 전에 출발하는 습관마저 붙게 되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빨간 신호등을 대하는 마음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즉, 잠깐 휴식하며 계기판을 들여다 보거나 거울 등을 점검하고, 좌우편에서 달려오는 차들을 신호가 바뀐 뒤에도 한번 더 지켜보게 되었다. 그것은 나의 운전습관에 있어서 커다란 변화였다.

요즈음은 인생 여정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장애물들에 대해서도 같은 생각을 해본다. 불쑥 나타나 한바탕 먼지바람을 일으키면서 때아닌 눈물마저 흐르게 하는 사건들이 무의미한 세월의 낭비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오히려 잠시 머물러 서서 자신을 돌아보게 못하는 하나님의 빨간 신호등이라고... 

 

 
 

무시한 경고

펜실바니아주의 한 댐을 조사한 기술자들은 인근 주민들에게 경고를 했다. '이 위에 있는 저수댐은 안전치가 않으니 이주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을 주민들을 코웃음을 쳤다.

 그해 가을에 조사단이 와서 다시 경고를 했지만 마찬가지였다.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일이 아닌가?

우리에게 겁을 먹도록 할 수는 없지...'. 그러나 마지막 경고가 있은지 보름이 못되는 1889년 5월 31일 그 댐은 홍수로 무너지고 말았다. 이 댐의 붕괴로 존스타운 주민 중 2,200명이 삽시간에 몰사했으니, 미국 역사상 대홍수 사건이라 아니할 수 없다. 

 

 

 
 

악한 날에 서기 위해

죽음은 모든 사람에게 필연적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날을 대비하며 우리의 할 바를 행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어느 성주가 있다고 하자. 그런데 그의 성을 막강한 군사들이 포위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는 부하들에게 전투태세를 갖추라고 명하지 않겠는가? 그러한 명령을 듣고도 복종하지 않으면 그것은 성주에 대한 나태함을 통한 일종의 반역행위가 아니겠는가? 우리의 영혼은 마치 하나님의 성과 같아,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 사탄이 우리의 영혼을 위협하고 있다는 경계경보를 줄곧 듣고 있다.

 

어둠의 세력이 몰려올 때는 바로 ‘악한 날’이다. 따라서 우리는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여 전투 방어 태세를 갖추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군수품을 쓸데없는 곳에 허비할 수는 없지 않은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재능을 개인의 영화를 위해 다 써버리면 나중에 악한 날이 도래했을 때 무슨 수로 변명을 할 것인가?

현명한 주인은 하인들이 제 일을 안하고 쓸데없는 일에만 정신 팔려 있을 때엔 결코 물품을 공급해주지 않는다. 우리의 시간 사용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쓰여지지 않는다면 그 귀한 시간들이 어이없이 허비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고 있는 매순간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한다는 것을 생각할 때 우리 또한 하나님의 명령에 순응하여 매순간을 지혜롭게 보내야 한다. 

 
 

핍박에 대한 경고

마태복음 10장 16~23절

‘예수님의 길’ 택한 제자에게 다가오는 핍박
‘핍박’에서 자유하십시오. 의의 핍박은 우리를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이끕니다. 우리가 복음을 위해 당하는 핍박은
새 생명을 얻기 위한 산고이며 삶을 거룩하게 하는 ‘사랑의 채찍’이기도 합니다.

120여 년 전, 우리나라에 첫발을 내디딘 언더우드 선교사가 하나님께 드린 기도문이 있습니다.
“주여, 지금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메마르고 가난한 땅, 나무 한 그루 시원하게 자라지 못하는 땅에 저희들을 옮겨와 앉히셨습니다. 보이는 것은 고집스럽게 얼룩진 어둠, 가난과 인습에 묶여 있는 조선사람뿐입니다. 그들은 왜 묶여 고통 당하는지도 모르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고통을 벗겨 주겠다’고 하면 의심하고 화부터 냅니다. 조선 남자들 속마음이 보이지 않습니다. 조정도 내심을 보이지 않습니다. ‘가마를 타고 다니는 여인들을 영영 볼 기회가 없어지면 어떡하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조선의 마음이 보이지 않고 저희가 해야 할 일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 순종하겠습니다. 겸손히 순종할 때 주님께서 시작하신 그 일을 우리의 영적 눈으로 볼 수 있는 날이 올 것을 믿습니다. 경계와 의심과 멸시와 천대가 가득한 곳이지만, 머지 않아 은총의 땅이 될 것을 믿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 하신 말씀을 따라 조선에서 믿음의 앞날을 보게 될 줄 믿습니다. 주여, 오직 제 믿음을 지켜 주소서.”
언더우드 선교사의 눈에 비친 조선 땅은 장밋빛이 아니었습니다. 가난과 편견, 억압과 투쟁, 분파와 분리로 가득한 어둠의 땅이었습니다. 왜 많은 선교사들은 이 땅에서 어둠, 가난, 두려움을 보고서도 자신들의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았을까요? 그들은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부르셔서 이 땅에 보내셨기에 온 것입니다.
핍박은 생명을 살리기 위한 대가
시대와 상황은 다르지만, 예수님께서 복음을 들고 세상으로 나가는 사람들에게 항상 환난과 위험이 따른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핍박에 대해 경고하고 계십니다. 16~22절 말씀을 보십시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사람들을 삼가라 저희가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겠고 저희 회당에서 채찍질하리라 또 너희가 나를 인하여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리니 이는 저희와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 그 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장차 형제가 형제를, 아비가 자식을 죽는데 내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세상으로 보내시면서 약속하신 것은 넓은 길이 아니라, 환난과 핍박과 고난의 좁은 길입니다. 주님께서 믿는 사람을 ‘양’으로, 세상 사람을 ‘이리’로 비유하셨습니다. 양과 이리는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다만 양은 이리의 먹이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복음 전파를 위해 죽음까지도 불사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너희는 양이다. 세상 사람들은 이리다. 고로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고 가르치십니다. 세상은 싸움의 대상이 아니라, 구원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처럼 우리는 세상을 구원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보내신 것같이, 주님께서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우리를 세상으로 보내십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싸울 것이 아니라, 영혼을 얻기 위해 존재해야 합니다. 문제는 누가 원수이고 친구인지 알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에게나 다가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얻으십시오”라고 전도합니다. 전도란 잃어버린 생각, 상실된 기억을 되찾아 주는 일입니다.
우리는 영화나 드라마 등에서 사고나 충격으로 인해 ‘기억상실증’에 걸린 사람을 봅니다. 아버지는 기억상실증에 걸린 아들을 데리고 기억을 회복하도록 태어난 곳에도 데려가고 함께 놀던 놀이터에도 찾아갑니다. 이와 같이 전도란 죄로 인해 하나님을 상실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기억을 되찾아 주는 일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해 설명하고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장소로 데려가 주님을 느끼게 하는 것입니다. 복음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돕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 주님께서 우리를 세상에 남겨 놓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것은 잃어버린 영혼입니다. 천하보다 귀한 영혼! 그러나 그 영혼을 찾는 데는 그만한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누군가 대신 값을 치러야 합니다. 생명을 얻기 위해 치러야 하는 대가가 예수님에게 ‘십자가’라면,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에게는 ‘핍박’입니다. 핍박은 복음을 위한 고난으로 의로운 삶을 선택했기에 짊어져야 하는 짐과 같은 것입니다.

핍박을 수용하신 예수님
그러므로 우리는 핍박을 받을 때 두 가지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는 복음을 들고 세상에 나아갔을 때 그로 인해 갈등하고 좌절하며 고난 당할 것을 예상해야 합니다. 다른 하나는 복음으로 인해 고난 당하는 것을 예수님께서 알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핍박을 받을 때 세상 사람들처럼 반응하면 안됩니다. 나와 함께 고난의 자리에 오신 주님의 방법대로 핍박을 이길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핍박을 거부하는 것으로 이기지 않으셨습니다. 핍박을 받아들임으로써 승리하셨습니다.
주님은 핍박하는 자들과 갈라서지 않았습니다. 모든 핍박을 받으심으로써 핍박하는 자의 편에 섰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써 하나님의 편이 아닌 사람의 편에 섰습니다. 의인의 편에 선 것이 아니라 죄인의 편에 섰습니다. 예수님께서 당하신 핍박의 무게는 곧 죄의 무게입니다. 주님은 모든 인류의 죄 값을 감당하셨습니다. 죄의 대가를 치름으로써 모든 인류를 죄에서 해방시켰습니다.
그런 사실을 이사야서 53장에서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기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주님은 모든 고난의 무게를 십자가에서 해결하셨습니다. 우리가 사람들 앞에서 복음을 전한다면 듣는 사람들은 자기 죄의 무게만큼 우리를 핍박할 것입니다. 초대 교회의 위대한 교부 터툴리안은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라고 했습니다. 교회는 그냥 세워지지 않고 핍박 가운데 탄생하는 것입니다. 생명이 자라는 것은 쉽지만, 처음에 탄생시키기는 무척 어려운 일입니다. 씨앗이 땅에 떨어져 자기 존재를 소멸할 때 비로소 새로운 생명으로 부활합니다. 우리가 죽어야 교회가 탄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고난에 대한 반응과 관리 능력
우리는 고난의 광야를 통과하지 않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얻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해 생명을 구원하려면 많은 고난을 겪어야 합니다.
강준민 목사님은 자신의 저서 ‘비전과 존재 혁명’에서 믿음의 사람들에게 고난이 닥쳐오면 즐거이 받아들일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고난보다 중요한 것이 고난에 대한 해석과 반응입니다. 고난을 당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고난을 관리하는 능력입니다.” 그리고 본인이 고난을 통해 얻은 성경의 네 가지 원리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째, 고난을 기쁘게 여기는 것입니다. 고난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성도를 온전하게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합니다. 고난은 결코 기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기쁘게 여기는 것이 믿음이요, 삶의 지혜입니다.

둘째, 고난을 스승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고난에는 뜻이 있고 교훈을 줍니다. 고난은 고통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고난의 의미를 모르고 있기 때문에 고통스러울 뿐입니다. 비밀이란 그 정체를 드러내지 않을 때 힘을 발휘하듯이 고난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난의 의미가 깨달아질 때, 고난은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떠나는 것입니다.

셋째, 고난을 변화와 성숙의 도구로 사용합니다. 도구는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유익을 줍니다. 사람은 고난을 변화의 도구로 삼을 때 성숙해집니다. 조지 폭스는 ‘마귀도 병에 걸리면 천사가 된다’고 했습니다. 극단적인 표현이지만 고난은 마귀도 변화시키는 강한 능력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넷째, 고난은 사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이겨낸 영혼에게 다른 사람들을 돕는 일을 맡기십니다. 모세는 40년 동안 광야에서 고난을 받고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구해내는 일을 수행하게 됩니다. 고난은 부름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우연이란 없습니다. 모든 게 하나님의 오묘하신 섭리 중에 이뤄 갑니다.” 핍박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히려 기뻐하십시오. 피할 수 없는 핍박이라면 차라리 끌어안고 사랑으로 정복하십시오. 핍박은 우리를 강하게 할 뿐만 아니라, 거룩과 순결로 인도하는 도구입니다.

루마니아의 가장 큰 침례 교회에서 시무했던 조셉 톤 목사님은 참으로 위대한 분이었습니다. 당시 루마니아 공산 정권은 톤 목사님을 잡아다 처형하고 싶었지만, 세계의 여론이 무서워 어쩌지 못하고 국외로 추방해 버렸습니다. 톤 목사님은 미국에 오셔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때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그 분의 설교를 듣고 싶어했습니다. 그 분은 위대한 신학자요, 설교자였습니다.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목사님의 신학은 무엇입니까?”그때마다 목사님은 항상 똑같은 대답을 했습니다. “내게는 단 하나의 신학밖에 없습니다. ‘순교 신학’입니다. 내게는 단 하나의 신앙밖에 없습니다. ‘순교 신앙’입니다.”

구소련이 무너지고 동구권이 개방의 조짐을 보일 때, 미국의 한 기자가 톤 목사님을 찾아와 “동구권이 개방되는 소감이 어떻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톤 목사님은 “참 두렵습니다”하고 대답했습니다. “뭐가 두렵습니까? 동구권이 개방되면 조국으로 돌아갈 수 있을 텐 데요.”

“나의 조국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받는 것을 기쁨으로 여기는 성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위해 핍박을 받지만 그럴수록 예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믿음의 길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공산 정권이 해체된 후 고국에 돌아갔을 때 핍박을 은혜로 모르는 그리스도인들로 교회가 가득 찰 게 두렵습니다.”

의의 핍박은 우리를 강하고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이끕니다. 성도가 복음을 위해 당하는 핍박은 새생명을 전도하는 산고이며, 우리 삶을 거룩과 순결로 이끄는 사랑의 채찍이기도 합니다. 혹시 핍박을 당한다면 핍박에서 자유 하십시오.

불필요한 핍박에 대응하는 지혜
권투 경기에서 KO 패는 계속 날아오는 잽을 맞고 누적된 상태에서 결정타를 맞았을 때 주체하지 못하고 쓰러지는 것입니다. ‘가랑비에 속옷 젖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핍박이 유익한 것이라 해도, 계속 이어지면 사람은 견딜 수 없게 됩니다. 계속되는 핍박에는 장사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한계를 아시고 무작정 핍박을 당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주님께서 피할 길을 주십니다. 불필요한 핍박은 무익한 것이기에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싸워서 얻어야 할 승리가 있다면, 피해서 얻어야 할 승리도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핍박에 대처하는 다섯 가지 지침을 주십니다.

하나,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 분별해서 피할 것은 피하라는 것입니다. 둘, 사람을 삼가는 것입니다. 아무 사람이나 만나지 말라는 뜻입니다. 더러운 욕망에 차있는 사람들을 피하라는 것입니다. 셋, “핍박받을 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걱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변호할 말을 주십니다. 넷째, 핍박에 지지말고 인내하여 승리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지침은 23절 말씀에서 알 수 있습니다.

이 동네에서 너희를 핍박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

주님께서 “이 동네에서 핍박을 받으면 저 동네로 피하라”고 말씀하십니다.

23절 말씀은 오랫동안 핍박으로 살아가야 하는 특수한 사람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인류사에서 유대인들만큼 박해를 많이 받은 민족도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신앙을 위해서라면 어떤 박해도 받을 준비가 돼 있습니다. 그들은 늘 순교할 것을 교육하는 민족입니다.

그런 배경에서 초대 교회가 탄생하고 제자들이 세상으로 흩어짐을 당합니다.
그들 중에는 복음 전파가 아니라 순교가 목적인 사람도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분별 없이 목숨을 던지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23절과 같이 말씀하신 것이기도 합니다.
한 유대인이 로마 군인에게 붙잡혔습니다. 로마 군인은 유대인에게 돼지고기를 던져주고 욕하며 먹을 것을 강요했습니다. 이럴 때 유대 랍비 교훈집은 “하나님의 법은 생명을 위해 주어졌지 죽음을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다. 그러나 개인의 수치라면 먹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런 사상에 익숙해져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역사에서, 신앙에서 메시아를 경험했고 메시아를 위해 자신들의 목숨까지 던질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 동네에서 핍박하거든 저 동네로 피해라. 복음을 위해 고통 당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의무이지만, 불필요한 고통을 받는 것은 지혜롭지 못하다”고 가르치십니다. 때로 우리는 위험에 직면하고 도전하는 것보다 위험을 피해하는 것이 더 바른 행동임을 알아야 합니다. 직면해야 할 고난과 피해야 할 고난을 아는 것도 지혜입니다.

왕새우의 새 갑옷 입기
영국은 2차 세계대전 발발 초기에 참전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주변 나라들은 영국에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습니다. 그때 윈스턴 처칠은 “여러분, 왕새우(영국군 애칭)를 아십니까? 왕새우는 바다의 왕자입니다. 그는 강한 갑옷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때가 되면 왕새우는 갑옷을 벗습니다. 바위틈으로 가서 갑옷을 벗고 새 갑옷이 몸을 감싸 단단해질 때까지 기다립니다. 새 갑옷이 갖춰지면 밖으로 나가 투쟁해 다시 왕자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입니다. 영국은 잘못된 정치가들에 의해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지금은 바위틈에서 새 갑옷을 갖추는 때입니다.”라고 연설했습니다.

때로 행동하지 않는 것이 행동하는 것보다 지혜로울 때가 있습니다. 후퇴하는 것이 공격하는 것보다 용감한 때가 있습니다. 핍박은 도구이지 목적이 아닙니다. 우리의 목적은 한 영혼, 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면, 때로 핍박을 두려워하지 않고, 용감하게 물러서기도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주님과 함께 복음을 들고일어날 때 넉넉히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 앞에 환난, 두려움, 핍박, 곤고, 아픔이 닥쳐올지라도 두려워하지 맙시다. 주님께서 세상을 이기셨습니다. 

 

 
 
 

 

 

 

'〓주제별 설교〓 > 설교.자료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반태효 목사 설교(방주교회)  (0) 2022.12.03
격려 예화 모음 61편  (0) 2022.12.03
경영 예화모음 2편  (0) 2022.12.03
경외 예화모음 2편  (0) 2022.12.02
기다림 예화모음 23편  (0) 2022.12.02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