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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그리스도의 법으로 살아가기(3)

by 【고동엽】 2022. 11. 19.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갈 3:1)
갈라디아 사람들이 왜 어리석은가?
꾀임에 빠졌기 때문이다. 
어떤 꾀임인가?
신앙생활을 율법으로 해야 한다는 유대인들의 가르침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철저한 율법주의자였던 바울은 오히려 율법에서 뛰쳐 나왔건만, 전혀 율법을 몰랐던 이방인들이 거꾸로 율법으로 들어가려고 하니 바울로서는 기가막히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떤 사람은 바울이 반대한 것은 할례와 같은 의식법같은 것들이라고 생각한다. 나머지 율법은 그리스도인들에게도 필요하기 때문에 우리는 율법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니다. 바울이 반대한 것은 율법의 많은 의식법만을 반대한 것이 아니다. 바로 율법적인 방식을 반대한 것이다. 
 
물론 율법의 도덕법을 반대할 이유는 없다. 
하나님 경외와 이웃 사랑의 율법을 반대할 이유가 어찌 있겠는가?
그러나 율법으로 돌아가게 되면 율법적인 방식을 가지게 되고 그런 것을 통해서 '자기 의'를 유지하려고 하는 것이나, 아니면 표면적인 성취를 통해서 교만해지는 것과 점점 사랑은 잃어버리고 문자에만 집착하여 외식으로 흐르게 되는 결과를 만들게 될 것이다. 
 
우리는 종종 이런 의문에 싸인다.
왜 신앙 초기에 그토록 순수했던 사람이 신앙생활을 오래하자 더 고집이 쎄지고 완악해지는가?
그것은 율법으로 신앙생활을 했기 때문이다. 기도는 열심히하고 교회 일은 열심히 하는데, 형제들과 화합하지 못하고 더욱 교만해지고, 자기 주장만 강해지는 이유는 오직 하나다. 그리스도로 신앙생활한 것이 아니라 율법으로 신앙 생활했기 때문이다. 만일 그리스도로 신앙생활했다면, 그리스도께서 나를 대하신 방식으로 내가 사람들을 대하게 되었을 것이다.
 
율법주의가 어떤 결과를 나오게 하는지는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이 너무 잘 보여주었다. 바리새인과 세리의 예화에서 보여준 교만한 기도(눅 18장), 안식일에 38년된 병자를 고치셨다고 비난하는 태도(요 5장), 십일조는 잘했지만, 자비는 없는 메마른 태도(마 23:23) 등과 같은 것들이다. 
그들은 율법의 문자적 순종에는 지나칠 정도로 집착했지만, 막상 율법의 더 근본정신이 이웃사랑은 너무나 소홀히 했다. 진정한 이웃사랑은 율법에서 배우지 못한다. 율법은 단지 명령만 할 뿐이다. 
내 속에 사랑이 없는데, 그런 명령이 내게 무엇이 유효하겠는가? 
 
진정한 이웃사랑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배운다.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으신 사랑을 믿음으로 받아들였을 때, 비로소 나는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성되는 것이다.
 
지식으로 배운 그리스도는 결코 나를 변화시키지 못한다. 오직 믿음으로 만난 그리스도만이 나를 변화시킨다. 그러기에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야 하는 것이다.


 
주 예수님, 우리를 율법 아래 두지 않으시고 은혜아래 두심을 감사드립니다. 제가 율법이 아닌 그리스도로 살아가는 법을 배우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더욱 주님을 닮기 원합니다.

출처 : https://cafe.daum.net/soongsari/W2pw/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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