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32:7
(신 32:7)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 네 아비에게 물으라 그가 네게 설명할 것이요 네 어른들에게 물으라 그들이 네게 이르리로다
가리발디는 19세기 이탈리아의 개혁과 통일운동에 공헌한 국민적 영웅이라 합니다. 어느 날 가리발디가 청년들을 모아놓고 조국을 위해 싸우자고 역설하자 한 청년이 나와 [ 만일 내가 조국을 위해 싸운다면 그 대가는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가리발디는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 칼에 베인 상처, 심한 부상, 끝내 죽음이 대가로 주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잊지 마십시오. 그대들의 상처와 죽음으로 이탈리아는 자유로운 나라가 될 것이요, 우리의 후손은평화롭게 살 것입니다]
가수 싸이의 병역특례 비리가 여론에 보도었습니다. 가수 싸이(본명 박재상)가 산업기능요원 복무 기간 제대로 근무하지 않은 정황을 포착, 조만간 소환조사할 방침이라는 것입니다. 검찰은 최근 싸이가 2003년 1월부터 2005년 11월까지 근무한 교육용 소프트웨어 개발업체인 F사 대표와 매니저 등 관계자들을 소환해 특례자로 채용된 경위와 근무실태를 조사한 데 이어 이날 F사 사무실을 압수수색하고 “F사가 제출한 출퇴근 대장 등 관련 자료를 분석한 결과 부실 근무한 흔적이 있어 좀더 자세한 증거를 수집하고자 압수수색하게 됐다”면서 “통신사실 조회, 계좌 추적 등도 병행하고 있는데, 이번주 내로 (싸이를) 소환할 예정”이라고 하며 1999년 정보처리기사 자격증을 취득한 싸이는 복무 기간 대전, 대구 등 지방과 평일에도 이뤄진 대학축제 공연과 콘서트를 100차례 이상 해왔고 리메이크 앨범을 발매하는 등 영리활동을 해 부실 근무 의혹 등이 제기돼 앞으로 싸이는 병역법상 복무가 취소되고 현역병으로 입대하게 된다는 사연입니다.
1958년 ‘왕’은 ‘일등병’이 됐다는 미국과는 대조적입니다. ‘로큰롤의 제왕’ 엘비스 프레슬리가 미 육군에 입대했던 것입니다. 스타덤에 오른 지 불과 2년 만의 군 입대는 자칫하면 아직 확고하지 못했던 그의 인기를 물거품처럼 만들 수도 있는 ‘위기’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국가의 부름을 받아들였습니다. 육ㆍ해ㆍ공군이 저마다 엘비스를 차지하려고 경쟁했습니다. 해군은 엘비스가 살았던 멤피스 출신 사병들을 모아 ‘엘비스 프레슬리 중대’를 만들어 주겠다는 등 여러 곳에서 ‘엘비스 모셔가기’에 총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엘비스는 모든 제의를 뿌리쳤습니다. 그리고 ‘특별서비스부대’ 배속도 거절했습니다. 이 홍보부대에서는 노래도 부르고 신문, 방송에도 나갈 수 있었지만 그는 ‘특별대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여느 사병과 똑같이 훈련받으며 서독 미군기지에서 복무했습니다. 군 복무 중에는 한 차례의 레코드 취입 외에는 일절 활동을 중지했습니다. 그럼에도 엘비스의 인기는 시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야한 몸놀림과 소란스런 음악으로 인해 그에게 거부감을 갖고 있던 보수층에 자신을 새롭게 각인시켰습니다. 엘비스는 ‘애국심이 강하고 건전한 미국 청년’으로 모든 연령층에게 사랑을 받았습니다. 실제로 서독 주둔 제32전차대대에서 엘비스와 같이 근무했던 윌리엄 테일러는 엘비스를 “병사로서, 미국 시민으로서 훌륭한 남자였다”고 회고했습니다. 그의 군복무를 놓고 한 여성 팬은 대통령 부인에게까지 편지를 보내 “제발 남편에게 엘비스를 돌려주라고 말해 주세요”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러나 군은 엘비스를 다른 사병들과 똑같이 대우했고 엘비스 역시 특별함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엘비스를 우러르는 많은 청소년들이 훗날 군 생활에서도 그의 본을 따를 것”이라는 당시 육군 문서의 기록처럼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를 성실히 이행했다합니다.(21세기예화- 애국청년 엘비스)
미국민의 애국심을 부추기는 말 들은 끊임없이 생산되었고, 알라모 요새의 죽음은 "알라모를 잊지 말라(Remenber the Alamo)"는 텍사스 민병대의 표어로 이어졌다합니다. 나중에 이 표어는 제2차 세계대전의 "진주만을 기억하라(Remenber the Pearl Harbour)"로 다시 재생산되었고, 이런 미국식 정의와 애국심은 다민족국가의 민족주의로 그 생명을 지속하고 있다합니다.
19세기 초엽까지, 광활한 오늘의 텍사스 땅은 멕시코의 영토였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 이주해 온 미국의 개척민들은 어느 누구의 속박도 받지 않고 자기네 방식대로 살아가기를 원했습니다. 멕시코 정부로서는 심히 껄끄러운 일이 어서 미국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을 압박하기 시작했습니다. 1821년 멕시코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하면서 국내적으로 혼란한 상태에 빠지자 미국계 주민들은 자기들 또한 멕시코로부터 독립을 하겠다고 나섰고, 1835년에는 샘 휴스턴(Sam Houston, 1793-1863) 장군을 텍사스 독립군 총사령관으로 세우고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이렇게 되자 멕시코 정부는 산타 아나(Santa Anna)장군에게 이 사태를 진압하도록 전권을 위임했습니다...이때 산 안토니오(San Antonio) 지방에 있는 알라모(Alamo) 성당 안에는 미처 200명도 못 되는 독립 의용군들이 모여 있었는데, 산타 아나 장군은 우선 이들부터 괴멸시키겠다는 결심으로 진격해 왔습니다. 병법에는 중과 부적이라고 200대 4.000의 싸움은 처음부터 상대가 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알라모의 용사들은 20배가 넘는 적을 맞아, 무려 12일 동안이나 버티다가 한 사람 예외 없이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이 장렬한 전투소식을 들은 휴스턴 장군은 부하장병들을 향하여 "알라모를 기억하라"(Remember the Alamo)는 피맺힌 절규를 발했고, 지면 알라모 전사들같이 전멸한다는 생각으로 새롭게 정신무장을 갖춘, 텍사스 독립군은 마침내 산 저신토(San Jacinnto) 전투에서 깨끗이 승리함으로써, 대망의 텍사스 독립을 성취했다합니다. 종종 미국의 거리에선 자동차 뒤 범퍼에, "알라모를 기억하라"는 스티커를 붙이고 다니는 자동차를 발견할 수 있다합니다.
1945년 12월 7일 일본군의 비행기가 진주만을 기습하여 미국이 패잔한 사건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일본군의 기습을 미국은 어느 정도 짐작은 하였지만 그리 쉽게 기습 할 줄은 모르고 주말이 되면 모두 술을 마시고 댄스파티를 밤늦게까지 즐기다가 아침 잠에 취하여 떨어져 있었습니다. 바로 이때 일본 항공모함으로부터 수많은 비행기가 진주만을 향해서 공격해 오고 있었습니다. 이 때 마침 레이다 조종을 연습하던 어떤 견습병이 레이다를 보니까 태평양쪽에서 많은 비행기가 오는 것을 보고 재빨리 상부연락을 취하였지만 응답이 오기를 '그것은 아마 아군의 연습기일는지 모르니 관계없다' 고 묵살해 버렸습니다. 그런데 조금 있으니 일본군 비행기는 기습하여 진주만을 일시에 폭격을 가하여 미국 군인들은 눈뜰 사이도 없이 가만히 기습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정박 중이던 기함 애리조나오는 십분만에 침몰되어 타고, 거기에 있던 병사 천 이삼백이 그대로 죽고 그 외 많은 병사들은 블구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도 6.25를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합니다.
엄청난 피해를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합니다.
1950년 6월25일, 만물이 평화롭게 잠든 주일 새벽에 소련제탱크 500대를 앞세운 인민군은 남한을 향하여 불의의 총 공격을 개시하여 이 강토를 동족상잔의 처참한 싸움터로 몰아넣었습니다.
공보부 발표의 피해상황은 남한에서 96만 명이 사망했고 가옥이 51만 동 파괴되었으며 886억원의 피해를 내었고 전쟁으로 생겨난 구제 대상자가 392만 명, 고아가 5만 명, 과부가 30만 명, 국군 전사자는 15만 명, 유엔군이 48,201명, 민간인이 37만 명, 전쟁 때 학살당한 사람이 12,000명, 납치된 사람이 15만 명, 행방불명이 30만 명이라 합니다.
북한의 경우 사살이 50만여 명, 귀순 4,700여명, 교회는 360여 곳이 피해를 입었으며, 교역자 60명이 총살되었고 옥중 희생자가 40여 명이나 되었다합니다.
6.25 때 영천 고개를 넘어 이북으로 끌려가던 애국자들의 납북 행렬은 흰옷 입은 민간인들이 4열종대로 쇠사슬에 묶여4,500미터나 되는 긴 행렬이었다합니다. 입은 죄수복에서 퀴퀴한 냄새, 걸을 때 마다 쇠사슬 소리는 차락차락 요란스럽고, 모두는 고개를 숙이고 묵묵히 걷고, 여자들은 모두 울고, 피와 눈물의 죽음의 행렬이었고 한 구덩이 속에 할머니 어린이까지 100명씩 생매장하던 생지옥이었다고 합니다. 아사자와 병사자 그리고 폭격으로 말미암아 죽은 백성들의 시체가 들과 거리에 아무렇게나 널려졌으니 기나긴 민족의 고난의 역사를 더듬어 본다하더라도 이같이 처절한 사연은 다시 없었던 것입니다. 실로 피와 죽음으로 점철된 6.25동란이야말로 우리 한국 민족 사상 최악의 사건이었습니다. 우리 경제 문화가 발전하고 아무리 번영한대도 그 처참하던 납북 애국자들, 순교자들의 모습을 잊어버지 말고 기억해야합니다, 그 눈물, 그 피, 그 쇠사슬, 그 죽음의 소리는 영원히 우리 민족에게 사라지지 않는 경고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억하라
1950년 6월 25일은 한민족에게 비극의 날이었습니다. 꿈에도 잊지 못할 6.25 민족상쟁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날은 일요일이었다. 남한의 군인들은 휴일을 맞아 영 밖으로 외출을 했기 때문에 무방비 상태였습니다. 잘 훈련받은 인민군이 하늘에는 비행기, 땅에는 탱크를 앞세우고 순식간에 남한으로 쳐내려왔다. 문자 그대로 물밀듯 쳐내려왔습니다. 남한의 정부와 국민은 졸지에 당한 변고라 속수무책이었고 정부는 수원으로, 수원에서 또 대전으로, 대전에서 대구로, 급기야는 부산으로 국민들을 피난시켜야만 했습니다. 그야말로 남한이 공산당의 천하가 되는 것 같았습니다. 그때 한국으로부터 구원병을 요청하는 전문이 미국의 투르먼 대통령에게 당도했습니다. 투르먼 대통령은 잠자리에 들었다가 다시 일어나 침실에서 왔다갔다하면서 어떻게 처리를 해야되는지 고심을 했다합니다. 그는 엎드려 기도를 드렸다합니다. 중대한 결정을 해야 하는 순간인 것이었습니다.
그의 결정 하나에 따라서 미국의 청년들이 수없이 피를 흘려야 할 것이요, 그에 따라 한반도의 정세가 왔다갔다하는 것입니다. 마침내 그는 결정을 내렸다합니다. “남한이 공산치하에 들어가는 것은 하나님께 영광이 될 수 없다. 한국동란에 미국이 개입하는 것이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길이다.” 6.25동란 때 미국군대가 손쉽게 참전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어느 한 정치가가 밤새껏 기도하는 가운데 내려진 결정에 따라 참전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수많은 우리 한국 사람들이 그 덕을 입고 있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U.N군이 한국에 참전하게 된 것도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이루어진 것이라 합니다. 6월26일 날 미국 트루만 대통령이 소집한 "U.N 안전보장이사회"에서 U.N군의 한국참전 여부를 결정할 때, 소련이 거부권을 행사하면 U.N이 한국에 군대를 파견할 수 없었습니다. 그날 아침 소련대표 아담 마리크는 안전보장이사회에 참석해서 거부권을 행사하려고 캐디락을 타고 뉴욕거리를 오는 데 이상하게도 엔진이 꺼져서 멈추고 말았습니다. 아무리 만져도 안되고 결국 고쳐가지고야 도착했을 때는 이미 안전보장 이사회에서는 한국참전을 만장일치로 결정한 뒤였다합니다.
용서하되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합니다
미쯔오 후찌다 씨는 1941년 12월, 진주만에 공습을 감행했던 공군 비행대의 총 사령관이었습니다. 전쟁이 끝나자, 그는 평상시 잘 알던 한 대령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미군 병영에서 전쟁 포로로 지내던 시절에 대해 물어 보았습니다. 그러자 그의 친구는 그에게 뜻밖의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 얘기에 의하면 한 미국 여인이 규칙적으로 그 막사에 찾아와 죄수들을 위하여 여러 가지 일들을 해 주고 가곤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수들 중의 하나가 그녀에게 왜 그리 친절하게 하느냐고 물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그 여자는 대답하기를 '왜냐하면 저희 부모님도 일본군에게 죽임을 당하셨거든요.'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말을 죄수들은 이해할 수 없어 어쩔 줄 모르며 당황하고 있을 때, 대략 20세가량 정도밖에 되어 보이지 않는 젊은 아가씨가 다시 설명을 했습니다. '저희 부모님은 전쟁이 발발한 무렵, 필리핀에서 선교사의 사역을 감당하고 있었지요. 그러다가 그들은 체포되어 스파이라는 명목으로 총살당했답니다. 저희 부모님은 당신들의 마지막 30분이라는 시간을 적들을 위해 기도하며 보내셨습니다.
처음에 그 얘기를 들었을 땐, 저도 너무나 분하고 억울했답니다. 하지만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제 마음속엔 분노가 사라지고 모든 사람을 심지어는 적까지도 사랑하는 마음이 싹트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아주 아름다운 얘기였지만 미쯔오는 그러한 일들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일이 있은 지 오래지 않아, 토오쿄오에서 기차역을 떠나려고 할 때에 그는 한 미국인으로부터 소책자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 책자에는 야곱 디샬에 관한 내용이 실려 있었는데, 그 사람은 1942년 4월 18일에 토오쿄오에다 폭탄을 투하했던 두리틀 비행대원 중의 하나라고 합니다. 또한 그 소책자 안에는 디샬이 40개월 정도 일본군의 포로로 있으면서 성경을 얻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그 성경을 읽기 시작했고 거기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완전히 사로잡히게 되었다는 내용의 기사가 실려 있었던 것입니다. 소책자를 받고 난지 얼마 안되어 미쯔오는 도오쿄오 신문에서 성경이 세계 최고의 베스트 셀러라는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는 즉시로 성경복사본을 사서 그것을 읽기 시작했는데, 특별히 다음의 내용이 눈에 들어 왔습니다.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저들은 저들이하는 일을 알지 못하니이다.' 이 말은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자신을 죽이려 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한 내용입니다. 그때에서야 비로소 그는 미국 여인의 깊은 사랑을 이해할 수가 있었습니다. 바로 그 날 미쯔오 자신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펜실바니아주 월킨스버그의 주미들은 1962년에 한가지 좋은 아이디어를 생각했습니다. 후세사람들을 위하여 그 마을의 역사를 보존하는데 도움이 될 만한 자료들을 수집해서 철제 용기에 넣은 뒤땅에 파묻었습니다. 1987년에 마을 축제 때에 이것을 파내려고 했지만 아무도 묻은 장소를 기억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시 78:9) 에브라임 자손은 병기를 갖추며 활을 가졌으나 전쟁의 날에 물러갔도다
(시 78:10) 저희가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지 아니하고 그 율법 준행하기를 거절하며
(시 78:11) 여호와의 행하신 것과 저희에게 보이신 기사를 잊었도다
북 이스라엘 왕국의 백성들도 역시 기억 상실로 인하여 후세에 나쁜 영향을 미친 분명한 예입니다. 에부라임의 자손들은 기억할 만한 사건들로 가득 찬 철제 용기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 즉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베푸신 선을 일들을 잊었습니다. 오늘의 성경말씀에서 아삽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의 선조 때에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을 기억할 뿐 아니라 후세들에게 하나님의 위대하시고 신실하심을 전하라고 권면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후세들에게 그의 진실하심을 계획해서 생명력 있게 나타내시게 합니다.
유명한 유태인의 명언 중에.."용서하라.. 그러나 잊지말라" 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2차 대전 당시 독일 아우슈비치 수용소에 수만의 유태인이 가스 살해를 당하고 전쟁이 끝난 후 유태인의 랍비가 수용소입구 벽에다 써놓은 말이라 합니다.
출처/강성찬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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