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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누가복음 4장14-21 / 은혜의 해가 시작되다

by 【고동엽】 2022. 11. 19.
■2022년 10월25일(화)■
 
(누가복음 4장)
 
14 예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 그 소문이 사방에 퍼졌고
15 친히 그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매 뭇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시더라
16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17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된 데를 찾으시니 곧
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20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21 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묵상/눅 4:14-21)


◆ 갈릴리에서 사역을 시작하시다


(14) 예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 그 소문이 사방에 퍼졌고


세례받고, 시험을 모두 이기신 후에 예수님은 갈릴리로 돌아가셨다. 그리고 갈릴리에서부터 예수님의 공적 사역이 시작되었다. 


갈릴리에서 사역이 시작된 것은 이사야 예언의 성취다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사 9:1-2)


이사야는 '큰 빛'이라고 표현했고, 사도 요한은 '참 빛'(요 1:9)이라고 표현했다. 빛 되신 그분께서 마침내 자신을 드러내셨다. 


이제부터 그리스도의 본격적인 공적 사역이 시작된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 기간은 3년이 채 안 된다. 세상을 바꾸기에는 너무나 짧은 시간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짧은 기간에 우리 주님께서 하신 모든 일은 우리 인류 역사를 바꾸었다. 




◆ 은혜의 해가 열리다


(18-19)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이 말씀은 이사야서 61장 1, 2절을 인용한 것이다. 주님께서는 이 예언이 성취되었다고 하셨다.


오늘 예언을 살펴보자.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이 말씀은 정말 물질적으로 가난한 자를 의미할까? 아니면 심령이 가난한 자를 의미할까?


예수님은 가난한 자에게 돈을 주신 적은 없다. 그렇다면 분명히 문자적 성취는 아닌 듯하다. 그러나 영적으로 무척 갈급할 때 예수님을 만나서 만족을 얻은 사람들은 이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할 것이다.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문자적으로 보자면 예수님은 감옥에 갇힌 자에게 자유를 주신 적이 없다. 그러나 죄에 포로되었다가 자유를 체험한 자들은 이 말씀이 확실히 문자적으로 성취되었다고 고백할 것이다.


이것이 예언의 신비다.
사이비 교주들처럼 자기 상황에 맞게 궤변으로 꿰맞춘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성취란 말이다.


비유적이면서 문자적인 이 오묘한 성취를 어떻게 설명할까? 많은 사람이 엉터리 풍유적(allegoric)해석을 감히 '영적'이라는 말로 포장하기도 하며 정당화한다. 그러나 영적(spritual)성취란 물질세계만큼이나 분명히 실재하고 있는 영적 세계에서의 문자적인 성취를 의미한다. 


모든 예언을 비유적으로만 해석하는 자들은 성경을 자기만 해석할 수 있는 이상한 책으로 만들고, 사람들이 자기 입만 쳐다보게 만든다. 결국 그가 스스로 사람들의 영광을 구하는 거짓 선지자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반면에 모든 예언을 가시적 세계의 문자적 성취로만 해석하는 자들은 예언을 메마르고 감동이 없는 것으로 만든다. 


생각해보라 오늘 본문의 예언이 단순히 눈 먼 자가 고침을 받게 된 것이라면 신체적 장애인들에게는 은혜며 우리의 눈에는 신기하겠지만, 여기에 무슨 감동이 있겠는가? 


모든 거듭난 신자들이 '내가 소경이었지만, 이제는 본다 (I was blind, but now I see)'라는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부르면서 깊이 공감함은 영적으로 소경되었던 자신이 정말로 보게된 것이 너무 생생하기  때문이 아닌가?  


이토록 예언은 가시적 세계에서는 비유적이지만, 영적 세계에서는 완전히 문자적이다.


예언이 비유적이면서 문자적인 예를 하나 더 들어보자.


이사야의 예언 중에 "장차 들짐승 곧 승냥이와 타조도 나를 존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내가 택한 자에게 마시게 할 것임이라"(사 43:20)란 말씀이 있다.


문자적인 성취만을 고집하는 자들은 이것을 천년왕국에서 성취될 것이라고 말한다.


광야에 물을 내는 것이 단순히 문자적인 성취라고 하면 우리에게 무슨 감동이 있겠는가? 그것은 수천 년 전에서나 기적이었지, 지금은 과학으로도 가능한 것이 아닌가?


그러나 이사야가 언급한 광야가 그냥 가데스 광야와 같은 곳이 아니라 복음의 불모지였던 이방을 의미한다면 이 예언은 우리에게 이루어진 것이며, 얼마나 감동이며, 은혜가 되는가?


또한 광야의 물을 냄으로써 들짐승이 하나님을 존경하게 된다는 것이 문자적으로 보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러나 이것이 들짐승으로 취급받았던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게 되어서 예배하는 존귀한 자들이 된다면 그것은 감동이다.


나는 이런 맥락에서 예수께서 수로보니게 여인에게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않다'(막 7:27)라고 하신 것이 단순히 그 여자에게 모욕을 주신 것이라거나 그를 시험하시기 위함이 아니라고 본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이방인은 들짐승이었다. 주님께서는 이 사건을 통해서 우리에게 이사야의 예언이 성취되었음을 일러주신 것이다. 드디어 광야에 물이 터지고, 들짐승 같았던 우리들도 예배자,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길이 열렸음을 암시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믿는 자는 목마르지 않다고 하셨다. 목마르지 않다는 말씀은 분명히 비유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난 자들은 정말로 영적으로 목마르지 않음을 체험한다.


예언은 비유적인데, 성취를 체험한 자는 문자적으로 느끼는 이 오묘한 조화는 실로 감탄이다. 진실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능력이다. 


엘 샤다이(전능하신 하나님), 지혜로우신 하나님께서 은혜의 해를 여셨다.




어두워진 세상 길을 주님 없이 걸어가다 나의 영혼 어두워졌네.


어느 것이 길인지 어느 것이 진리인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네.


주님 없이 살아가는 모든 삶
실패와 좌절뿐이네.


사랑하는 나의 주님 
내 영혼 눈을 보게 하소서.


열려라! 에바다. 열려라
눈을 보게 하소서
죄악으로 어두워진 나의 영혼을 나의 눈을 보게 하소서.  (CCM '에바다')


<찬양듣기>
https://youtu.be/ZndofsiswrE
출처 : https://cafe.daum.net/soongsari/WDob/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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