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19: 8~16
(도입)오늘은 6.25, 56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6.25의 의미를 깨닫는 시간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보라 너희 왕이로다”는 본문의 말씀은 빌라도가 조롱삼아 아무렇게나 유대인들에게 지껄인 말입니다. 그러나 그는 놀랍게도 진리를 말했습니다. 다만 그 자신이 믿지 않았을 뿐입니다.
오늘 우리는 빌라도라고 하는 정치인에게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바라기는 이 역사의 거울 앞에서 우리의 이지러진 영적 얼굴을 보고 더러운 부분들을 이 시간 깨끗이 씻는 기회가 되고, 정말 원리를 가지고 사는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1. 발리도의 착각(10절)
빌라도가 예수님을 재판하는 과정에서 “내가 너를 놓을 권세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세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10절)고 말 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빌라도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빌라도는 로마의 디베료 황제로부터 유다지역의 총독으로 임명을 받은 생사 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당시 로마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던 가이사랴에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빌라도는 유대지역과 사마리와 그리고 사해부근까지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빌라도는 로마 사람으로 유대인들에게는 인기가 전혀 없었습니다. 정치만을 추구하고 종교에 대해 전혀 무관심한 그런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빌라도는 원리가 없는, 줏대가 없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모든 것은 주님의 말씀대로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면”(11절)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왜 빌라도는 예수님에 대해 이런 착각을 했을까요? 인간에게는 몇 가지의 착각이 있습니다.
(1)[시각적 착각]이 있습니다.
인간의 눈은 정확한 것 같아도 때로는 우리를 속입니다. 그것을 이용한 것이 마술입니다. 시각적 착각 중에 가장 무서운 것이 [터널 비전]입니다. 터널에서 밖을 보면 앞에 있는 조금 밖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것이 전부가 아닌데 문제는 그것을 전부로 착각합니다.
(2)[사고의 착각]이 있습니다.
김 선운 목사님은 저의 은사로서 우리들에게 아주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지식이 자기의 세계이다”. 그래요, 무식하면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무지란 감옥에 갇혀있으면서도 그것을 모르고 지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식을 가져야 넓게 볼 수 있습니다.
(3)[경험의 착각]이 있습니다.
인간은 모든 것을 다 경험할 수 없습니다. 결국 일부분만 경험하는데 많은 사람들은 자기의 경험만을 주장합니다. 이것이 바로 편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저는 미셀 위를 좋아합니다. 남녀의 성의 구별에 대해서 계속해서 도전하는 것이 좋아 보입니다. 고정관념을 버리려고 남자만의 대회에 도전하는 그 생각을 높이 평가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빌라도 뿐 아니라 우리도 6.25의 의미를 바로 깨닫지 못하고 착각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6.25는 하나님께서 이 승만 박사를 초대 대통령으로 삼아 통일의 기초인 민족복음화를 이룩하기를 바랐지만 자신의 영광만을 추구하자 북에 준비한 붉은 몽둥이를 사용해서 친 것이 6.25입니다.
2. 왜 빌라도는 무죄한 예수님을 석방시키지 못했는가?
참 이상한 것은 당시 빌라도는 유다지역의 총독으로 사형권도 있고, 정치적으로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총독이었으나 예수님에 대해서는 마음대로 하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12절상반절에 “빌라도가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으나” 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그것은 유대인들의 여론에 밀려(12절하) 두려워 굴복 당하였기 때문입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빌라도는 원리가 없는 적당주의 자였습니다. 게다가 유대인들에게 인기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결국 자기의 생각을 접었던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빌라도는 예수님이 무죄한 것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요18:38절에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고 했습니다. 19:4절에서는 “내가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로라”고 두 번째 고백했습니다. 또 19:6절에서도 세 번째로 “나는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노라”고 했습니다.
사실 어떻게 보면 빌라도는 바로 우리의 얼굴입니다. [예와 아니오]를 분위기에 따라 하는 원리도 없는 자가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그러나 사실입이다.
빌라도가 떨었던 이유가 12절에 나옵니다. “유대인들이 소리 질러 가로되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 빌라도를 로마의 황제인 가이사의 반역자로 몰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두려워했습니다.
요컨대 빌라도가 예수님을 석방시키기를 원했지만 하나님께서 허락지 않았기 때문에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6.25도 한국 교회로 하여금 깨달으라는 채찍일 뿐 그 이상이 아니기 때문에 적화를 막아주셨던 것입니다.
3. 왕 되신 예수님께 대한 자세
(1)빌라도의 자세
14절 상반 절에 보면 “빌라도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보라 너희 왕이로다”고 말했습니다. 물론 그렇게 믿은 것은 아닙니다. 일종의 조롱의 뜻으로 말한 것일 뿐입니다. 그러나 빌라도가 어떤 의미로 말했든 그것은 진리였습니다.
문제는 그렇게 믿지 못했고, 주장하지 못했고, 그렇게 살지 못한 것입니다. 혹 우리도 그런 원리 없는 자는 아닙니까?
(2)유대인들의 자세
15절 상반 절에 보면 유대인들이 말했습니다. “없이 하소서. 없이 하소서. 저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하고. 이유는 15절 하반 절에 나옵니다.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그러나 이것은 거짓말입니다. 유대인들은 겉으로는 로마의 황제와 법을 존중하는 것처럼 하지만 사실은 그것을 믿지도 않고, 따르지도 않는 사람들입니다. 다만 외식 적으로, 자기들의 주장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이 말을 했던 것뿐입니다.
그러면 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을까요?
(1)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인기가 높아서 자기들의 라이벌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 이해관계로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였던 것입니다.
(2)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로 인해서 데모가 일어나고 군종의 폭동이 일어나면 로마 군대가 개입되고 그러면 지금 유지하고 있는 반만큼의 자유마저 빼앗길 것이라고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3)예수님이 자신을 하나님과 동일시하는 것이 성경에 어긋난다고 해석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메시아를 기다리면서도 메시아가 왔을 때는 그를 죽이는 우를 범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들의 예수님께 자세는 어떤 것입니까? 바라기는 역사는 다 하나님의 주권 밑에 있다는 것을 믿고 하나님만을 의지하기를 축원합니다.
4. 빌라도의 씻지 못할 죄
결국 빌라도는 역사 남는 씻지 못할 죄를 범했습니다. 16절에 보면 “이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히게 저희에게 넘겨주니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십자가게 못 박도록 넘겨준 이유는 무엇입니까?
(1)유대인들의 다수의 반대를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은 인간을 멸망시키는 무서운 심리적 부담입니다. 7-8절을 보면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죄목을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함이니이다”라고 한데 대해 8절에 “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더욱 두려워하여”라고 했습니다.
혹여나 예수님이 유대인들이 기다리는 메시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잠간 동안 두려워했지 사실은 별로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움을 버려야 합니다.
이사야도 말합니다. “두려워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사41:10절 상).
(2)원리 없이 사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원리를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성경이 바로 우리의 원리고, 자고 저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표준입니다. 그의 삶이 바로 우리의 원리입니다.
(3)자기의 정치적 입지에 해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의 여론이 예수님을 반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정치가들은 우선 도움이 되는 것만 봅니다. 그래서 큰 정치를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멀리 볼 수 있는 안목을 가져야 합니다.
(4)아내의 꿈과 의견을 존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빌라도의 아내가 뭐라고 했습니까? 마27:19절에 나옵니다. “그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가로되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을 인하여 애를 많이 썼나이다 하더라”. 물론 아내의 말을 무조건 따르는 사람이 되어서도 안 되지만 아내의 견해를 존중해주는 것도 필요합니다.
5. 빌라도의 죄의 결과는?
성경에는 빌라도의 죄의 결과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역사가인 요세퍼스는 빌라도의 최후를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십자가 사건 이후 빌라도가 사마리아인들을 무력으로 진압하다가 그만 많은 사상자를 냈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빌라도의 상관인 수리아의 총독, 비테리우스에게 상소를 올렸습니다.
마침내 빌라도는 총독 직에서 쫓겨나 로마의 황제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유세비우스에 의하면 이 때 빌라도는 지금의 프랑스 지역인 비엔나 시에 망명했다가 결국 자살을 했다고 전해집니다. 빌라도는 인기 따라 가다가 결국 인기와 함께 망했습니다. 우리는 누구를 따라갑니까?
바라기는 오늘 우리가 6.25 56주년을 마지하면서 역사가 주는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맺는 말
그러므로 6.25 56주년을 마지하면서 우리는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다수의 견해에 흔들리지도 말고, 또 본문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 질렀던 유대인들 같은 편견에 넘어가도 안 됩니다.
과연 지금 나를 통치하는 왕이 누구입니까? 나 자신입니까? 그렇다면 우리도 빌라도처럼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참 왕은 오직 예수님뿐입니다.
또 유대인들처럼 자기들 편이 아니라는 이유 때문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우를 범해서도 안 됩니다. 다만 오늘 우리는 역사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심을 믿고, 참 왕이신 예수님의 통치를 받아 그의 뜻대로 살아야 승리하고, 참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보라. 너희 왕이로다”. 예수님을 우리의 왕으로 영접하고 그의 통치를 받는 것이 바로 6.25를 맞는 우리의 바른 자세입니다.
출처/신성종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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