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0월20일(목)■
(누가복음 3장) 21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22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묵상/눅 3:21-22) ◆ 예수께서 세례받으심. (21)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세례 요한의 세례는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다. 그런데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왜 세례를 받으셨을까? 오늘 본문에서는 소개되지 않았지만,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나아오셨을 때 세례 요한은 당황했다. 요한은 세례 베풀기를 사양하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당신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마 3:14-15) 즉 주님께서 세례받으심은 개인적인 회개나 죄 사함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의를 이루기 위하심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시기 위함이다. 어떤 분은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가리켜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 1:29)라고 말씀하신 것을 근거로 요한이 예수님께 세례줄 때 온 백성들의 죄가 예수님께 전가되었다고 주장한다. 구약에서 대제사장은 1년에 한 차례씩 백성들의 죄를 속하기 위해 동물의 머리에 안수하고 그 동물을 속죄제로 드렸다(레 16장). 그러나 그러한 주장은 몇 가지 점에서 받아들여지기 힘들다. 일단 세례는 안수와는 구별되며(히 6:2), 또한 요한은 주님께서 세례 받고 난 후가 아니라, 세례받기 전에 이미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라고 증거했다(요 1:29). 즉 이 말씀은 주님의 대속이 세례의 유무에 달려있지 않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세례 요한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라고 함은 예수님께서 인류의 구속을 위해서 오신 분이심을 표현한 것이지 당장 죽어야 할 어린 양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주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그러한 죄를 넘겨받고 그 죄의 짐을 지고 3년이나 사역하셨다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 또한 세례 요한이 인류를 대표한 대제사장 노릇을 했다는 것도 받아들여지기 어렵다. 예수께서 인류의 모든 죄를 짊어지신 순간은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이며, 이때 인류의 죄를 짊어지게 하신 분은 세례 요한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심은 인류의 죄를 짊어지시기 위한 행위가 아니라 후에 나타날 성도들에게 본을 보여주신 것이라고 본다. 물 세례, 성령 세례를 차례로 받으심으로써 성도들이 어떤 삶을 사는 자들인가를 보여주신 것이다. 예수님의 모든 행위와 삶은 바로 성도 된 우리들의 표준이다. ◆ 성령이 임하심 (22)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예수님에게 성령이 강림하셨다. 그런데 질문이 생긴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신 분이 아니신가? (마 1:18) 그리고 성령의 은혜 가운데 사신 분이 아니신가? 그런데 세례 받고 올라오실 때, 성령이 임하셨다고 함은 이전에는 예수님 안에 성령이 안 계셨다는 말씀이 아닌가? 과연 그럴까? 우리는 인간적인 사고와 물질적인 논리로 성령을 논하면 안 된다. 성령은 내 안에 계시지만, 동시에 위로부터 다시 부어주시는 영으로 강림하실 수 있다. 내 안에 계시면서 동시에 다른 사람 안에도 계실 수 있다. 어떤 영적인 존재도 그럴 수 없다. 그러나 성령은 영적인 존재이면서 매우 특별하시다. 무한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 성령을 논리적으로 질서정연하게 설명하려고 하다가 오히려 메마르고 차가운 신학 논리에 갇혀서 그 풍성하고 강력한(powerful) 성령의 능력을 놓쳐버렸다. 성령으로 잉태되시고, 성령과 함께 사셨던 예수님께 또 성령이 임하셨다. 이때부터 예수님께서는 공적 사역을 시작하셨다. 성령의 능력으로 모든 일을 행하셨다. 이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성도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 본을 보여주심이다. 우리 안에 성령이 안 계셔서 성령을 구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성령을 구함은 성령이 충만하도록 구함이며, 위로부터 풍성한 능력이 임하길 구함이다. 성령이 내 안에 계실지라도 성령 부어주심을 구하는 일이 조금도 모순된 일이 아니다. 내게는 이미 성령이 계시기 때문에 더는 성령을 구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지 말라. 오히려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위해서 성령의 능력과 충만을 계속 갈망해야 한다. 사람들을 감정적으로 울고 웃게 하며, 지적인 설교로 감탄하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성령의 능력이 아니고는 회개하게 만들 수 없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들 수 없다. 논리에 갇혀있지 말고, 성령의 능력을 구하라. 지금 당장 영적으로 메말라있는 사람이 무슨 토론이 필요한가? 더욱 풍성하게 성령을 부어주실 것을 구하라. 신학 지식을 쌓음으로써 영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다. 오직 성령께서만이 우리를 영적인 사람으로 만든다. 주님, 성령을 부어주십시오. 더욱 충만하게 부어주십시오. 매일 삶 속에서 그리스도를 표준으로 삼겠습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행하게 해주십시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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