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4:3,4
(미 4:3) 그가 많은 민족 중에 심판하시며 먼 곳 강한 이방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고
(미 4:4) 각 사람이 자기 포도나무 아래와 자기 무화과나무 아래 앉을 것이라 그들을 두렵게 할 자가 없으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의 입이 이같이 말씀하셨음이니라
1934년 히틀러의 반유태주의가 유럽 대륙에 몰아치고 있을 때 거리는 긴장감으로 휩싸였고 전쟁터 같은 거리에서는 방어가 곧 목숨과 같았습니다. 히틀러의 친위대는 거리를 돌아다니며 문젯거리를 만들었습니다. 유태인인 어린 헤인즈는 친위대의 견장만 보면 다른 길로 피했는데 이는 싸우지 않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헤인즈는 친위대원과 맞부딪치게 되었고 싸움은 불가피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가운데에서 손끝하나 다치지 않고 걸어 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가 맞서서 무엇을 했기 때문이라기보다 싸움이 불필요함을 소리 높여 말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으로 헤인즈는 말이 평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분쟁과 싸움을 피하는 대화의 기술에 대해 배워나갔습니다. 그의 가족이 미국으로 이주하게 되었을 때도 그는 청소년기에 계발시킨 이 기술로 분쟁이나 싸움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가 성인이 되었을 때 그의 이름은 곧 세계적인 평화 협정을 상징하는 이름이 되었고 그의 생각들은 곧 협정의 내용이 되었습니다. 유럽의 긴장감 도는 거리에서 배운 평화의 말들이 그에게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헤인즈라는 사람은 모르지만 그의 미국식 이름인 헨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바로 헨리 키신저입니다. 주님을 믿는 사람은 평화를 만드는 생활을 하여야 합니다.(디럭스바이블- 평화를 만드는 사람)
미가는 유다의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왕 등 3대에 걸쳐 활동하던, 주전 740-690년경에 선지자였습니다. 그는 평민의 투사로서 지배 계급에 도전하며 그들의 죄악을 신랄하게 비판하였습니다. 그래서 대지주들의 횡포와 야수와 같은 탐욕을 꾸짖었고, 여호와로부터 받은 사명을 다하지 않고 이익에 따라 매수되는 예언자와 이기적인 지도층을 통박했습니다. 결국 그들의 죄악 때문에 예루살렘 성전이 결단날 것이라는 경고를 하기에 이릅니다. 그러나 미가 선지자의 꿈은, 오늘 읽은 말씀과 같이, 전쟁이 없는 이상향,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드는 세계였습니다. 나라와 나라 사이에 다시는 전쟁이 없고, 인간이 죽음의 공포에서 해방을 받는, 평화의 동산에서 사랑을 누리게 되는 그런 세계를 그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미가 선지자는 하나님의 통치가 전쟁이 없는 평화의 통치라고 하였습니다. 무기들은 모두 농기구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실로 가슴 벅찬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무리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낫을 만들 것이라고 합니다.
칼을 쳐서 보습으로 창을 쳐서 낫으로 만드는 것은 평화를 창조하는 상징적 표현입니다.
목가적인 주제를 설명하고 있는 본문은 시온에 있을 평화를 표현한 것입니다. 당시의 다른 선지자들도 목가적인 표현을 통해서 평화를 묘사하고 있습니다(사 11:6-10; 호2:15; 암 9:13-15). 미가는 이 표현을 사용하여 메시야가 도래하여 이루실 왕국의 통치 원리를 설명하였습니다. 메시야 왕국의 통치 원리는 세상 나라의 원리인 힘이 아니라 평화입니다. 세상은 철을 가지고 전쟁을 치를 수 있는 칼과 창을 만드나 메시야 왕국은 농기구를 만듭니다.
우리 심령 속에 있는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어야 합니다.
(행 1:6)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물었습니다. 사도들이 예수께서 `약속하신 것'(4절)에 대해 오해하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예수의 지상 사역 기간 동안 줄곧 그들은 이스라엘의 민족적인 독립과 회복을 통하여 실현되어질 하나님 나라를 보고자 하는 소망을 가지고 있었으며 나라가 회복되면 자신들이 권력의 자리에 앉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막10:35-45;눅 22:24-32). 예수의 십자가 처형과 더불어 그들의 기대는 산산이 부숴졌지만, 이제 부활하신 주를 보고서 다시금 정치적 회복에 관한 기대가 되살아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이니까?" 묻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면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였습니다.
로마 군병들과 제사장이 보낸 하속들이 예수님을 체포할 때, 열심 많은 베드로는 칼을 뽑아 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떨어뜨렸을 때 예수님은 베드로를 책망하시면서 말씀하시기를 "검을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한다" 하셨습니다(마26:52).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의 심령 속에 도사리고 있는 칼을 마가의 다락방의 대장간에서 녹여 보습을 만들었습니다.
민족의 마음 밭을 기경하는 보습이 되어야 합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만들어진 복음의 보습은 로마 사람들의 가슴을 갈기 시작했습니다. 드디어 로마 사람의 묵은 밭은 말씀으로 갈라지고 뿌려진 씨앗은 열매를 거두어 들였습니다. 지금 우리도 보습이 되어 민족의 묵은 밭을 기경해야겠습니다.
이 민족을 회개시키는 보습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민족 분단의 구조 악에 동참한 죄를 회개하는 일입니다. 교회가 할 일은 먼저 죄를 회개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남북 분단으로 인하여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을 어기어 왔습니다. 우리는 갈라진 조국 때문에 같은 피를 나눈 동족을 미워하고, 죽이고, 살인하였고, 그 죄악을 정치와 이념의 다툼으로 오히려 정당화하는 이중의 죄를 범해 왔습니다.
정의의 보습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들이 의롭게 되어야 합니다.
민족의 심령 밭에 하나님의 공의를 심어야겠습니다.
평화는 하나님의 정의가 있는 곳에서 실천되는 결실입니다.
(시85:10-13) 긍휼과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었으며 진리는 땅에서 솟아나고 의는 하늘에서 하감하였도다 여호와께서 좋은 것을 주시리니 우리 땅이 그 산물을 내리로다 의가 주의 앞에 앞서 행하며 주의 종적으로 길을 삼으리로다 합니다.
참 평화는, 정의의 결과요, 공의로 실현 된다는 것입니다. 정치, 교육, 경제나 군비가 없어서 나라가 망하는 것도 아닙니다. 죄 때문에 나라도, 가정도, 사회도 망합니다.
(렘 5:1)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왕래하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을 사하리라 합니다.
서로 용서하고 화해의 보습이 되어야 합니다.
이 민족의 가슴속에 화해의 복음을 심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 믿고 천당 가라고 외쳤습니다. 그 동안 복을 많이 받아 잘 살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 사는 길은 화해의 복음을 심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화해를 실천하셨습니다.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 할 것이라고 합니다.
지금도 인류는 계속해서 전쟁하고 있습니다. 전쟁을 위하여 많은 돈을 쓰고 있습니다. 일초 동안 무려 13억원이라고 하는 엄청난 돈을 쓰고 있다합니다. 한 시간에도 무려 1500명의 사람이 밥을 먹지 못해서 굶주려 죽어 가고 있습니다. 죽는 사람이 이렇게 많은 대도 군비를 계속해서 증감하고 일초에 13억원을 쓰면서도 그들을 살릴 대책은 하지 않는 세대입니다. 다른 나라의 상비군은 항상 서로에게 끊임없는 위협이 되며 서로의 군비경쟁을 부추기게 됩니다. 그러다보면 결국 군비 과잉지출에서 벗어나기 위해 평화보다는 단기간의 전쟁을 선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도 이북의 미사일 문제가 세계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무기는 또 다른 무기를 불러들입니다. 무력이라고 하는 것은 또 다른 더 심한 무력을 낳게 됩니다. 전쟁을 그치게 하는 방법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무력을 중지하고 무기를 버리는 것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예가 가까운 나라의 태국에서 있었다합니다. 태국은 바로 옆에 미얀마라고 하는 나라가 붙어 있습니다. 국경 분쟁이 생겼습니다. 서로 자기 땅이라고 우기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전쟁을 시작했는데 양측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양국 정상이 모였습니다. 그리고는 서로 회담을 했습니다. "우리 이러지 말자. 전쟁을 계속하다가 우리 모두다 죽겠다. 그러지 말고 전쟁 대신 다른 방법으로 결판을 내자." "좋다 그러면 우리 12m 되는 탑을 누가 먼저 쌓느냐 그것으로 먼저 쌓는 나라가 이기는 것으로 하고 깨끗하게 진사람은 승복을 하고 물러가는 것이 좋겠다." 합의를 했습니다. 드디어 이상한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양 나라가 12m 되는 탑을 쌓기 시작했습니다. 누가 이겼을까요? 태국이 이겼습니다. 3시간 더 빨리 쌓는데 성공을 했습니다. 미얀마는 거기에 승복을 하고 깨끗하게 군대를 철수시키고 땅을 양보했던 그런 멋진 예를 남겨 주었습니다. 얼마나 멋진 민족입니까! 바로 그곳은 와창감이라고 하는 그런 지역으로 수많은 관광객들이 그곳을 반듯이 둘러본다고 합니다.
자기 포도원과 무화과 나무 아래 앉을 것이라고 합니다(4절)
이 말씀은 전쟁과 위협의 근본 원인이 탐욕과 욕심에서 나옴을 간파하고 있습니다. 그럴듯하게 꾸며댄 명분 뒤에는 결국 “남의 것을 공짜로 탈취하려는 약탈의 마음”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밝힙니다. 그래서 전 절에 화려한 평화의 말씀과는 좀 엉뚱하지만 전쟁과 위협의 근본적인 해결책으로 각자가 자기 포도원과 무화과나무 아래서 사는 것을 말합니다.
세상은 약탈자와 침략자로 인해서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 평안히 거할 수 없으나, 메시야 왕국에서 자연스럽게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밑에서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서 평안히 쉴 수 있다는 것은 솔로몬 시대에 누렸던 평화롭고 번영된 나라를 상기시킬 뿐만 아니라 선지자 스가랴가 선포한 메시야 시대를 떠올리게 합니다(왕상 4:25; 슥 3:10). 메시야 왕국에서는 이스라엘이 솔로몬의 통치 시대에 누렸던 것처럼 번영과 평화가 넘쳐날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에서는 힘있는 자가 자신의 사욕을 채우기 위해 지배하며 약탈하지만, 메시야 왕국에서는 의롭고 공평하신 메시야가 평화로 다스리시기 때문입니다.
두 명의 수도사가 오랫동안 절친하게 지내오고 있었는데 어느 날 자신들의 생활이 매우 단조롭다고 느낀 한 수도사가 말하였습니다. “매일 매일의 단조로운 이 생활을 한번 다르게 바꾸어 봅시다. 수도원 밖에 사는 사람들처럼 살아 보는 게 어떨까요?” 그 말을 들은 다른 수도사는 너무나 오랫동안 수도원 생활을 해 왔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어떤 생활을 하면서 살고 있는지 잘 떠오르지가 않았습니다. “그들은 무엇을 하면서 사는데요.” “그들이 행 하는 것 중에 하나가 분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수도사는 사랑의 생활을 오래 동안 해왔기 때문에 싸움을 어떻게 하는지 잊어버렸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 싸우는데요.” “자 저기 있는 돌을 보십시오. 그것을 우리 사이에 두고 ‘이 돌은 내 것이야’라고 우기는 것입니다” 그러자 그 얘기를 듣고 있던 다는 수도사가 곰곰이 생각하더니 “형제님 그러시다면 이 돌을 당신의 것이라고 하시고 가지십시오.” 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분쟁은 일어나기도 전에 끝나고 말았습니다. 싸우는 방법을 잃어버린 이들의 모습이야 말로 전쟁이 종식되며 분쟁이 그치는 오직 그리스도에 의해 완성되어질 참 하나님의 나라에서 살게 될 우리의 모습이 아닐 런지요...(잊어버린 분쟁-그랜드 종합주석)
이는 만군의 여호와의 입이 이같이 말씀하셨음이니라 합니다.
이는 앞서 언급된 모든 말씀을 보증하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모든 것이 황폐해질 것이라는 선언을 들은 유다 백성들에게 미가가 예언한 본문의 말씀은 전혀 믿기지 않을 사건이었습니다(Calvin). 그러나 그것은 미가 선지자를 통해서 전해진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결코 변개될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 약속은 변치않는 신실하신 하나님의 보증입니다.
참 평화는 그리스도께서 이루시는 그의 나라에서 이루어지는 온전한 평화입니다. 인간의 나라에서는 전쟁과 가난과 기근이 있으며 공포와 슬픔이 참 평안을 막으며 누리지 못하게 합니다. 이는 악인이 나라를 다스리고 있기 때문에 벌어지는 현상입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섬기고 그의 말씀을 지키는 나라가 되어야 참 평화가 임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재림이 이루어져야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나라는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이미 시작되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이루시는 나라는 완전한 평화가 있으며 즐겁게 살 수 있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의 거처이며 영원한 피난처가 되십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상태는 온전한 그의 나라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한 상태입니다. 우리의 죄악된 습성이 우리의 평안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루실 나라는 환난에서 남은 자들을 모으시고 그리스도로 인하여 새로 지음을 받은 성도들을 불러서 이루십니다. 이제 그 나라는 강건하여질 것이며 제사장의 나라가 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루시는 강한 나라는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그의 백성들인 교회를 의미합니다. 반석 위에 세워진 교회는 음부의 권세가 흔들 수 없으며 영원까지 존재할 것입니다. 재림의 날에는 바로 이 나라에 그리스도께서 왕권을 가지고 임하시며 그의 보좌가 임하시는 것입니다. 지금도 그리스도는 하나님 우편의 보좌에서 우리를 다스리고 계십니다. 이 나라는 은혜의 나라이며 영광의 나라입니다.
유엔, 즉 국제연합의 헌장을 보면 "연합국의 국민 된 우리는, 우리 생애 두 번씩이나 인류에게 형언할 수 없는 슬픔을 가져 온 바 있는 대전의 재앙에서부터 후세를 구하기로 굳게 결심했다. 또한 기본적 인권과 개인의 존엄성과 가치, 남녀와 대소 국가의 동등 권리에 대한 신조를 재확인하기로 굳게 결심했다. 또한 조약들과 다른 국제법 등에 의하여 야기되는 의무를 이행하기 위해 공의와 존중이 유지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하기로 굳게 결심했다. 그리고 또한 사회 발전과 보다 더 폭넓은 자유 안에서 나은 생활수준을 갖도록 촉진하기로 굳게 결심했다. 따라서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행동강령을 지킨다."
1. 관용을 실천하고 좋은 이웃으로서 서로 평화스럽게 살 것.
2. 국제 평화와 안전을 유지하기 위하여 우리의 힘을 단합할 것.
3. 원리와 조직적인 기구를 받아들임으로써 군사력을 사용하 지 않고 상호의 이권을 살리고 보장할 것.
4. 만인의 경제적, 사회적 향상을 촉진시킬 국제적 기구를 채 택할 것.
한 마디로 '세계 평화'를 위하여 유엔을 만들게 됐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평화'가 국제연합을 만든 사람들만의 소망이었겠습니까?... 역사가 시작된 이래 인류가 가장 희구해 온 것은 '평화'입니다.
모두는 평화를 원하건만 세계에는 전쟁이 있고 전쟁이 그칠 날이 없고 계속 전쟁의 위험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또 모두의 마음속에는 항상 평안이 있기를 바라면서도 바라는 평안이 아니라 근심, 걱정, 때로는 두려움, 이런 많은 공포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전쟁과 폭력은 금지 되어야 합니다. 전쟁이 나와는 상관이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인류사 가운데는 많은 전쟁이 있었습니다. 20세기만 하더라도 약 9억 명이 전쟁과 혁명 때문에 죽어갔습니다.
챨스 다윈의 그의 저서[종의 기원]에 "생존 경쟁을 통한 우수한 인종의 보존"이라는 부제를 붙였다합니다. 다윈은 인간의 진보를 강자가 약자를 이기는 투쟁과 필연적으로 연관된 것으로 보았습니다.
이것이 나치 이데올로기의 근본이 되었습니다. 아돌프 히틀러는 아리안족(유대인이 아닌 백인)은 다른 인종보다 우월하다고 믿었기 때문에 아리안족이 아닌 타 인종을 모두 제거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마르크스주의는 프롤레타리아인 노동자계급은 부르죠아인 유산계급을 없애야 한다고 하면서 계급들 간의 투쟁을 장려합니다.
그래서인지 이북의 공산주의는 1950년 6.25 동족상잔의 전쟁이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그 날은 주일 이었습니다. 그런데 금년 6.25가 주일입니다. 우리는 세월이 가도 6.25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6.25는 끝난 것이 아니라 아직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1950년 6.25에 대해 바로 알아야 합니다. 역사가 지혜이고, 미래입니다. 아픈 역사를 기억 할 때, 위대한 미래를 열어갈 수 있습니다.
6.25사변은 우리나라에서만 남쪽에서 230만 명, 북쪽에서 290만 명이 여타 전쟁에 비교해보아 한 지역에서만 치루어졌던 전쟁이면서도 520여만 명에 달하는 사상자를 내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6.25 전쟁미망인만 우리 대한민국에 약20만 명, 전쟁고아가 10만 명이 길거리를 방황하고 갈데올데 없이 굶주리고 고통을 당하다가 죽어 갔습니다. 헤어진 이산가족만 해도 1천만 명이 되는 이런 큰 민족적인 대 재난을 당했던 것입니다.
독일의 유대인 강제수용소 벽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었다고 합니다. “용서하라. 그러나 잊지는 말라.” 아픈 역사를 잊지 않는 것이 위대한 나라를 만듭니다.
1950년 6.25를 생각해보고, 다시는 전쟁이 이 땅에 발붙이지 못하게 해야 하고 통일을 이루되 무력 통일이 아닌 평화통일을 이루어야 합니다.
분단을 그대로 두고서는 두 나라가 정치 발전을 할 수가 없습니다. 통일이 되지 않으면 올바른 경제발전을 가져올 수 없습니다.
분단은 민족 주체성을 상실하고 강대국에 종속된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민족을 살리고 자손만대를 위하여 최대의 과제가 민족 분단을 극복하는 평화 통일에 있습니다.
평화통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칼을 쳐서 보습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칼을 쳐서 보습으로 창을 쳐서 낫으로 만드는 작업을 민족 지상 과제로 삼아야 합니다.
전쟁을 연습하지 않아야합니다. 자기 포도원과 무화과 아래에 거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힘써야 합니다.
정치도, 문화도, 교육도, 종교도 평화를 추구해야 합니다. 민족의 생존을 위해 평화를 찾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협력해야 합니다. 그래서 평화통일을 이루어야 합니다.
출처/강성찬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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